아침에 문득 떠 올랐다.
[황 호양] 선생님.
지금도 어디선가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계실 것이다.
서울사대 사회교육과를 나오셨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때 대학원에 다니고 계셨다.
황호양 선생님은 집안에서 막내 아들이었고, 당시 신혼이셨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고 사셨다. 딸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의 이름을 할아버지가 지어주셨다고 자랑을 하셨다. 아주 특별한 이름이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중국 고전 영화에 나올만한 특이한 이름이기도 했다.) 중간 정도의 키에 (지금 생각하면) 예쁘장한 용모셨다. 말씀도 순하고 부드러웠다. 대체적으로, 사랑을 많이 받은 막내아들의 행복한 천성과 사회학 공부한 사람의 진지성을 유지한 그런 분으로 평가된다. (지금 어른이 되어 돌아보니 그렇다는 것이다.)
그 선생님과는 대학입시를 앞둔 고 3때,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숫기없는 내가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다니...)
내게는 원래 고등학교 3년간 내가 딱 찍어놓고 좋아하던 선생님이 따로 있었다. 나는 한우물만 파는 성격이라서, 일단 한 사람 딱 찍어놓으면 다른데 한눈을 팔지는 않는 편이다. 물론 내가 그렇다고 내가 찍어놓은 선생님한테 무슨 메시지를 보낸것도 아니지만... (이건 마치 테레비 보면서 남자 탈렌트 하나 좋아하는거하고 비슷한거지. 그냥 테레비만 줄창 보는거지.) 아무튼 나는 황호양 선생님을 그냥 '좋은 선생님'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이지. 황호양 선생님은 일반사회, 국민윤리 그런거 가르치셨다. (내가 찍어놓고 좋아하던 선생님도 동일한 전공자 이셨다. 아마도 학과 선후배 사이일것이다.)
그런데 내가 황호양 선생님과 방과후에 종알거리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수 있었던 이유는?
아, 때는 고3 때였고, 그때 대개들 돈없는 애들은 방과후에 학교에 남아서 열시나 열한시까지 공부를 했다. 돈있는 애들은 어딘가 독서실로 가거나, 그보다 더 돈 있는 집 애들은 방과후에 자가용에 실려서 어디론가 갔다. (그때는 한반에 자가용있는 집 아이가 한두명 했다.)
나는 즐거운 십대 생활을 무개념으로 보내다가 고3때 대학에 들어가고 싶어서 1년 반짝 공부를 한 케이스인데 고3때, 공부 좀 했다. 방과후에 공부하고 있다보면 내 친구 이호순이가 남아서 공부하다말고 한숨을 짓곤 했다. 내 친구 이호순이는 남아서 공부는 하는데 크게 집중은 안 한 편이고, 뭔가 다른데 골몰해있었다. 호순이의 한숨의 원인은 황호양 선생님 이었다.
"오늘 황호양 선생님 숙직이라서 퇴근 안하시는데...교무실에서 공부하시던데...빵 사다 드리자..응?"
교무실에 가면 커다란 칠판에 숙직, 당직, 일직 뭐 그런 표시가 되어있지 않던가? 호순이는 그 내용을 줄줄 꿰는 식으로 황호양 선생님의 일정을 파악했고, 황호양 선생님이 교무실에 늦게까지 남아있는 날에는 빵이나 우유를 사다 드리고 싶어했다. 하하하 하하하 지금 생각하니 참 순진하고 천진하다.
문제는 이호순이가 너무나 수줍은 나머지 빵을 들고 혼자서 황호양 선생님한테 갈수가 없는것이다.
그러니
같이 가자는 것이지. 하하하.
그러면, 나는, (내가 황호양 선생님을 좋아했다면 나도 못갔을텐데), 나는 뭐 황호양 선생님에 대해서는 아무 감정이 없으므로, 큰 인심 써주는 기분으로 이 호순이와 함께 빵이나 우유를 들고 선생님을 찾아갔다. 황호양 선생님은 이호순이가 수줍어서 눈도 제대로 못 뜨면서 간신히 내미는 우유는 빵을 아주 달게 잡수시거나, 혹은 "야, 너희들도 시장할텐데 같이 먹자" 이러고 잘라주시거나 그랬다. 그러면 지가 준 빵, 선생님이 다시 잘라서 준건데 그 빵조각 하나에 이호순이의 그날은 '천국'이었을것이다. 하하하 하하하.
황호양 선생님은, 한가롭게 교무실 밖을 내다보면서, 그렇게 찾아간 우리에게 참 이야기를 잘 해주셨다. 지금 돌아보면 마음좋은 막내오빠 같은 스타일이셨다. 이호순이가 좋아할만도 하지... (나도 내가 이미 찍어놓고 혼자 좋아 죽던 그 선생님이 없었다면 황호양 선생님을 좋아했을것이다.)
사랑의 아이러니란 이런거지.
황호양 선생님을 좋아하던 이호순이는 빵하고 우유 사다 내밀고는 말 한마디 못하고 장날 내놓은 장닭처럼 눈만 두리두리하면서 진땀을 내고
황호양 선생님한테 특별한 감정이 없던 나는 선생님하고 종알종알 사심없이 떠들며 깔깔대고.
이호순이 속은 타들어가고
나는 공부하다 머리 식히며 룰루랄라~
그래도 황호양 선생님한테 빵과 우유를 사다 나르면서 이호순이가 꼭 나를 데리고 갔던 이유는
내가 선생님하고 격의없이 깔깔대고 그래도, 그래도 나는 믿을수가 있어서 그랬을거다.
나는 이미 딴 사람한테 미쳐있어가지고 이호순이의 연적이 될 가능성이 전혀 없어보였으니까. 하하하.
난, 매일 빵이나 사다 바치면서 입도 뻥긋 못하고 내 옆에 얌전히만 있는 호순이가 너무나 딱했다.
하지만, 뭐 (한숨), 나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나는 내가 찍어놓고 군침을 삼키던 선생님께, 심지어 빵이나 우유 따위도 사다바칠 용기도 없었던 것이니, 그냥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하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것으로 내 오랜 사랑은 종지부를 찍어버린 것이다.
갑자기 아침에 황호양 선생님이 떠올랐다.
그 선생님과 방과후에 편안하게 이야기하고 그러던때가 아마도 황금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가을 햇살처럼 편안한 눈빛을 주고 받으며 사심없이 그냥 깔깔 웃을수 있었던 아주 귀한 시간.
황호양 선생님과의 수업에서 아직도 생각나는 것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인가 그 책을 읽고는 사회시간 한시간 내내 지구 대재앙에 대한 이야기만 하셨던 일. 하하하하하. 우리는 1999년 지구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과 공포를 갖고 살았었지. 하하하.
***
생각난김에 구글신께 여쭤보니 이미지가 딱 하나 나온다
오른쪽에서 네번째, 왼쪽에서 다섯번때, 가운데 위아래 흰 옷 입고 있는분.
위 페이지 저자의 설명으로는 조용하기로 황호양이 으뜸이라고 하신다.
수십년이 지났으므로 자신 할 수 없지만, 옛날의 모습이 남아있는것도 같고.
얼굴 약간 앞으로 내밀고 이러고 서있는 모습이, 내가 알고 있는 그 선생님 모습이다.
찾아가서 종알거리면, 상냥하게 이야기를 들려주시긴 했지만,
성품은 고요하고 조용한 분이었다.
아마 친구들과 어울릴때도 왁자지껄하기보다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조용히 계실것이다.
그런데 그 웃는 표정이 참 평화로웠지.
황호양 선생님이야 나를 기억도 못하실것이다.
평생 교단을 지키신다면 스쳐지나간 학생이 수만명일텐데
그중에 개성없고 눈에 안띄던 나를 무슨수로 기억해낼것인가
하지만 나는 황호양 선생님을 기억하는 것이지. 아름답게.
아름다운 시간이었으니까.
이호순이 역시 지금은 나처럼 그냥 그 선생님을 기억하고 말걸.
사랑은 덧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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