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americanart.textcube.com/300 Ben Shahn 페이지에서 제 블로그 이웃 친구인 자유인님이(http://jumpkarma.com/) 다음과 같은 화두를 던져 주셨습니다.
그림을 보면서 제목과 시대, 작가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정확한 그림보기가 되지 않는 것 같은데요.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그림을 그림으로서만 보는 행위는 한계를 지니게 되는 걸까요.
'음악'은 작곡가와 시대배경을 알지 못해도 선율이 전해주는 감성적인 부분을 직접적으로 느끼며 소통되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림 그 자체로만 소통하는 경우는 쉽지 않은 일일까요?
이것을 '답글'로만 논의하기에는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많은 것 같아서, 저 자신에게 '숙제'를 주는 기분으로 페이지를 만들어봅니다.
문제를 정리해보자면:
(1) 제목: 예술작품 (문학/미술/음악 기타 예술 포함)에서 제목이 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 시각예술의 경우 '제목'없이 예술작품 자체만으로 홀로 설수는 없는가?
(2) 예술 그자체인가, 배경까지 포함하는가? : 예술 감상을 할때, 그 작품의 배경을 (작가, 시대, 역사성, 기타)을 모두 알아야만 하는가? 작품 자체가 전하는 감수성만 보면 안되는가?
간단한 질문이 아니지요. (제가 예술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이런것은 미학 전문가한테 의뢰를 하고 싶은 내용입니다. 미학전문가를 만나면 따로 의뢰를 해보기로 하고요, 그냥 상식차원에서 평범한 보통사람의 입장에서 한번 정리를 해보고 싶습니다.
예술작품과 제목의 문제
제목을 달고 안달고하는 문제를 저는 세가지로 정리해봅니다.
(1) 제목 자체가 작품의 정체성의 일부인 경우가 있습니다.
(2) 제목의 작품에 가하는 '한계'를 거부하기 위해 제목달기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3) 편의에 의해 제목이 왔다리 갔다리 하거나, 다른 사람이 제목을 달기도 합니다.
그 예를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1) 뒤샹의 샘
예술작품과 제목의 문제를 논의할때, 제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프랑스 출신 뒤샹의 'Fountain (샘)'이라는 작품입니다. Dadaism(다다이즘)의 선구자로 알려진 뒤샹이 1917년 공장에서 제작된 '변기'를 가져다가 이것을 작품이랍시고 제출했을때, 이 작품은 전시장에도 못가보고 문전 박대 퇴출 당한후에 사라져버렸다고 하지요. 현재 대형 미술관에 있는 것들은 후에 뒤샹이 다시 제작한 것들입니다. (만들기도 쉽죠 뭐~ ㅎㅎㅎ).

이 '샘'의 예술성은 '미술사적으로' 대단한 전환점이 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지만, 이걸 보면서 "뭘 어쩌라구?" 하면서 한심한 느낌을 갖는다해도 문제 될 것은 없다고 봅니다. 제가 이것을 미술사적으로 종알거릴 형편은 못되고요 (가능하면 나중에 별도로 다루기로 하고요) 여기서는 이 작품의 '제목'만 말하고 싶습니다. 이 남성 양변기가 '작품'으로 인정받는데 단단히 한 몫 한것은 그 제목에 있습니다. '샘'이라쟎아요. 우리가 만지기도 싫어하는 오줌냄새나는 변기를 연상할때, 이 정신병자같은 예술가 양반께서는 이걸 보면서 '샘'을 상상했다고 하쟎아요. (이건 아무나 못하는거죠... 우리를 확 깨쟎아요.) 이거 흉내 내느라고 십수년전에 가수이자 엔터네이너이신 조영남씨가 뭐 '요강' 가지고 작품이라고 쇼를 하셨는데, 뒤샹의 변기는 '샘'이 될수 있었겠지만, 영남이 아저씨의 요강은 요강이었던거죠 뭐... 왜냐...안깨거든요...전혀...전혀...
해서...제가 볼때, 예술 작품에서 '제목'이 그 작품 전체를 흔들어댈때가 있습니다. 그냥 보면 별거 아닌데, 제목을 보는 순간 의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맛볼때가 있지요. 이 경우 우리는 작품과 제목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수조차 없습니다. 제목없이 그 작품은 무의미하다는 것이지요.
(2) 잭슨 폴락의 제목없는 걸작들 : 제목을 거부한 화가
어떤 경우에는 작가가 아예 제목을 안달아버리는 수도 있습니다. 어떠한 맥락도 주지 않겠다는거죠. 그냥 보고 즐기고 멋대로 해석하라고, 관객에게 전권을 위임해버립니다. 그런 작품들중 제일먼저 떠오르는것은... 잭슨 폴락 (Jackson Pollock)이지요. 제가 전에 썼던 페이지에서 이미지를 가져왔습니다. 이 작품에는 제목이 없습니다. 잭슨 폴락의 많은 작품들이 제목이 없이 그냥 '번호'만 매겨져 있습니다. 잭슨 폴락 스스로 그냥 번호만 매겨 버린 것입니다. 그 번호에도 의미는 없고, 그냥 '구별'해야 하니까 번호를 붙였겠지요. 폴락은 자신의 작품에 '제목'을 달음으로써 작품을 '한정된' 틀에 가두는 현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거부했던 것이지요.
http://americanart.textcube.com/75
(3) 편의에 의해 제목이 변하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고~
George Bellows (http://americanart.textcube.com/198) 페이지에 소개되었던 그림입니다. 제목은 Both Members of This Club 입니다. 직역하면 '이 클럽의 두 회원'이지요. 이 제목은 원래 화가인 조지 벨로우즈가 붙인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원래 벨로우즈가 붙인 제목이 있긴 했는데, 그것이 '법'적으로 문제가 있었대요. 이 그림이 그려지던 1909년 당시에, 미국에서는 '권투경기'를 공공장소에서 진행하는 것이 '불법'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공공장소에서 이런 피튀기는 '놀음'을 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이거 사실 야만적인 행동이쟎아요, 어찌보면...) 그래서 이런 권투 경기는 '비밀리'에 '몰래 숨어서' 즐겼다고 합니다. 불법이니까요 (불법 사우나, 안마 이런거 몰래몰래 하다가 경찰 단속 나오면 도망가는 통로까지 만들고 그러죠? ㅎㅎㅎ) 사람 사는거 다 비슷비슷하지요. 그러니까, 이게 불법이니까, '권투선수 (Boxer)'라는 제목을 붙일수도 없고, 그냥 클럽의 회원들끼리 삿적으로 놀이를 즐겼다는 식의 '클럽의 두 회원'이라는 식으로 얼버무리는 '제목'이 탄생 한 것이지요. 그것도 벨로우즈가 아닌 제 3자가 (미술 중개상이나 뭐 전시회 기획자나 누군가가) 이런 제목을 갖다 붙여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림 그리는 친구를 보면, 제목이란것도, 그냥 어쩌다 만들어지기도 하고, 곁에서 구경하던 친구가 달아주기도 하고 그러더라구요. 그럴땐 사실 제목에 큰 의미가 있는것은 아니지요. 남이 어떤 편의에 의해서 제목을 달기도 하고요.
가령, 그림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바하의 'G 선상의 아리아' 그거요. 그거 바하가 제목 달은거 아니죠. 그냥 어떤 번호로 이루어진 음악이었는데 하필 그 부분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자주 연주되다보니 언제부터인가 그런 제목으로 알려지게 된거죠. 베토벤의 교향악들도 대개는 몇번째 교향곡으로 알려져있는데, 5번 교향곡을 우리는 '운명'이라는 부제로 부르지요. 베토벤이 제목 단거 아니죠. 누군가가 별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부제로 자리를 잡은거죠.
제가 기억이 흐릿해서 정확히 설명할수는 없지만요, 서양음악사 배울때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서양음악에서, '절대음악'을 추구하던 시기가 있어요. 이 시기에는 음악에 '제목'을 안붙였습니다. 제목이 무엇을 암시하는 어떤 것도 용인하지 않았습니다. 음악 그 자체로 다가가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런가하면 음악에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제목을 붙이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이것도 어떤 유행이 있는것 같아요.)
자, 지금까지 '제목'과 '예술'의 문제를 논의하면서
(1) 제목과 작품이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는 경우가 있고
(2) 작품 자체만으로 승부를 보는 - 제목 없는 작품들도 존재하며
(3) 제목이 편의에 의해 붙여지거나 변경되는 예들도 살펴봤습니다.
그러니, 예술작품에 '제목'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가 없어야 하는가 고민하기 보다는 이들간의 유기적 관계를 살펴보면서 제목이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우리가 자유롭게 예술을 즐기면 될듯 합니다. 나라면 어떤 제목을 달아볼까? 이런 상상을 해봐도 재미있겠지요.
그런데, 이것은 저의 극히 개인적인 취향인데요, 저는 무엇을 보거나 들을때, 타이틀/제목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령 어떤 음악이 흐르면, 그 음악의 제목이 뭔지 알아야 직성이 풀리고 마음의 평화를 가질수 있습니다. 제목을 모르면, 눈을 감고 길을 걷는것처럼 불안합니다. 그러니까 온가족을 태우고 운전을 해서 어딜가는데 라디오나 씨디로 음악을 듣습니다. 라디오에서는 아나운서가 음악 제목을 말해주죠. 그러니까 제목과 곡을 연결시켜서 즐길수가 있습니다. 음악 씨디를 틀었는데 어떤 음악이 흘러나올때, 그 제목이 머릿속에 흘러줘야 하는데 제목이 생각이 안날경우, 운전하다 말고 식구들에게 부탁을 합니다. "저거 누가 작곡한거지? 제목이 뭐지?" 식구들은 이런 저를 매우 귀챦아 합니다. "음악이 좋으면 즐기면 되는거지 왜 꼭 제목과 작곡자를 알아야 하는가? 잘난척 좀 하지 말고 운전이나 똑바로 하라." 하지만, 저의 경우, 음악이 흐르는데 제목과 작곡자가 떠오르지 않으면, 불안하죠... 알아야하죠... 저는 속으로 혼자 한탄을 합니다 (제목도 모르면서, 작곡자도 모르면서, 어떻게 그 음악을 기억해? 제목을 알아야 기억할수 있지. 그래야 다음에 또 들을수 있지...) 제목을 알아야 다른 사람한테도 그 음악을 소개해줄수 있지, 그래야 기억할수 있지... (그래서...우리집에서 저는 아주 이상한 사람입니다. 이상한채로 살아가는것도 아주 힘든 일입니다. 편집증이죠...대개..재수가 없죠 이런사람...ㅎㅎㅎ )
예술 그 자체인가 배경인가?
예술작품을 감상할때, 작가나 제작 연도 혹은 사회 문화적 배경에 대한 이해를 접어 둔채, 그냥 작품 그자체의 아름다움만 보면 안되는가? 우리가 한가지 그림을 보면서 작가 배경까지 다 고려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간단한 질문이 아닙니다. 제가 영문학을 전공했고, 나름 문학비평 한다고 고민하고 돌아다니던 시절이 있어서 그때 배운 깜냥으로만 얘기를 해도, 어떤 예술작품을 감상할때
1. 작품 그 자체만 파악하고 분석하고 해석한다는 비평의 흐름이 있고요
2. 작품이 태어난 전체적인 배경을 모두 분석해야 한다는 비평의 흐름도 있습니다.
작품의 전체적인 배경을 아울러서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 고전적인 접근 방법이고, '작품 그 자체만' 분석한다는 것이 좀더 근대적인 방법이었는데, 어느 노선을 취하건 비평가가 이르는 곳은 한곳이지요. 작품 그 자체의 속 고갱이 (배추 고갱이같은 알맹이). 고갱이에 이르기 위해 작품만 분석을 하기도 하고, 고갱이에 이르기 위해 주변까지 싹 훑기도 하고 그런겁니다. 무엇이 옳은 방법인가? 이런 의문에는 해답이 없습니다. 어떤 방법을 취하건 우리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지점이 '고갱이'라는 것만 잊지 않는다면 마찬가지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미학가도 아니고 예술 전문가도 아닌 평범한 우리같은 사람이 그림감상이나 예술 감상을 할때는 어떤 접근 방법이 좋을까요?
저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시간나면, 심심하면, 그냥 폼잡으러 미술관에 가서 구경을 합니다. 구경하다보면 내가 잘 모르지만 '끌리는' 작품들이 있게 마련이지요. 이유는 설명하기 힘들지만 그 작품이 맘에 든다 이겁니다. 또는 매우 유명한 사람의 작품이라지만 내 눈에 똥덩어리로 보이는 것도 있지요.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것들도 분명 존재합니다. 그러면, 저는 일단 내 맘에 드는것부터 들여다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들여다보기는 즐겁지요. 들여다보다보면 처음에는 '작품 그 자체가' 말을 겁니다. 내가 아무런 배경 지식이 없는데 작가가 누군지도 잘 모르겠고, 그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도 잘 알수 없는데, 그냥 들여다볼수록 좋아서 자꾸 보고 싶어지게 되므로 자꾸 보다보면 내가 어떤 해석을 하게 됩니다. 구도가 좋다거나 색감이 좋다거나, 뭐 혼자 분석을 하게 됩니다. 알면 사랑하게 된다고 하지요? 그러다보면 작가가 누군지, 그의 다른 작품들이 어떠한지 관심이 생겨서 찾아보게 됩니다. 그때부터 '배경'이해에 들어가는거죠. 그리고, 아주 그쪽의 전문가가 될수도 있는겁니다.
이것은 저의 미술 감상법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들여다보다가 점차, 그 배경지식을 늘려가다가, 그러다보니 연관된 미술 사조도 찾아보고, 그러다보니 좋아하는 것이 늘어나게 되고, 그렇게 배경지식도 쌓다보면, 어디쯤서부터는 스스로 조직적인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이런것을 우리는 incremental (점진적인), bottom-up (바닥부터, 세밀한 조각으로부터 훑어 올라가는) 프로세스라고도 할수 있을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작품을 보고 '좋다, 이유는 말할수 없지만 나는 이것이 좋다'라고 하셔도 됩니다. 그것이 감상의 시작이니까요. 관심 생기면 자료 찾아보고 혹은 또 들여다보고 그러면서 관련 지식을 쌓아가도 되고, 관심 없으면 거기쯤서 지나가도 됩니다. 예술작품 그 자체만 분석을 해도 되고, 그 배경까지 파고 들어가 분석을 해도 됩니다.
그런데 잭슨 폴락의 제목없는 작품들의 경우, 우리는 작품 그자체만 즐길수도 있지만, 뭐 역사화를 감상할때는, 역사를 알아야 그림의 '해석'이 가능하겠지요. 기독교 그림을 이해하려면 최소한 그림속에 십자가에 매달린 남자가 누구인지는 알아야 뭔 소리인지 이해가 가능하겠지요. 그런차원에서 최소한의 배경 상식도 필요하다고 할 만 하지요. 뭐, 십자가에 매달린 사나이가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해도, 나름대로 어떤 해석은 가능해지겠지만요....
아, 며칠전에 델라웨어 미술관에서 도슨트 (docent)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다음 그림을 보시지요. 클릭하시면 큰 이미지로도 보실수 있습니다.
이 그림의 내용이 무엇일까요?
그림 오른쪽에 노인이 하나 있고, 바닥에 사람들이 있습니다. 꽃도 흐드러지게 피어있고요. 이것이 무슨 장면일까요? (한번 상상해 보시길...제가 제목 안달고, 작가, 연도 안달겠습니다. 그냥 그림만 보고 상상해보시길).

2010년 1월 9일 델러웨어 미술관에서 촬영
상상해보셨습니까?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뭔가 발겨하셨습니까?
도슨트 (전문 안내인)가 도심 빈민가의 어린이들 (inner city children)이 단체 관람을 왔을때, 이 그림을 보여주며 물었답니다. "자 어린이 여러분 뭐가 보이나요? 이 사람들이 왜 여기 이러고 있나요?"
미국에서 inner city children 이라는 표현은, 대도시 도심권의 빈민가에 살고 있는 - 어떤 특정의 빈민들을 가리킵니다. inner city 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우리는 머릿속에 '가난한 슬럼가'를 떠올리게 됩니다. 이 꼬마들은 이 그림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종알거렸다고 합니다:
1. 홈리스들이 길에서 자고 있어요
2. 우리동네에도 저런 사람들이 있어요
3. 도와줘야 해요
4. 나도 저런적이 있어요
5. 춥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기타 등등.
그러면 원래 저 그림의 장면 - 화가가 의도한 장면은 무엇이었을까요?
저것은 우리들에게도 잘 알려진 '잠자는 숲속의 공주 (Sleeping Beauty)'에서, 궁전안의 모든 사람들이 마법에 빠져서 쿨쿨 잠이 들을 장면이라고 합니다. 동화속의 이 장면이 무척 아름다워요. 사람들이 모두 잠에 빠져서 장미 넝쿨만 뻗어나가고 꽃이 피고 지고 했다는 장면이거든요. 무릉도원속에 잠든 사람들 같은 그런 것이 연상되는 대목인데요. 그런데 이 그림을 (배경 전혀 모르고 그림만을) 본 어린이들이 생각해 낸 것은
'홈리스 (homeless)' 였던 것이지요.
어린이들이 (혹은 관객이) 어떤 역사적/문화적 배경이 있는 그림을, 자신의 환경속에서 자의적으로 감상하고 해석한대도 문제 될것은 없습니다. 그림과 관객 사이에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지요. 그것으로도 그림은 소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새로운 소통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지요. 재해석, 소통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볼수도 있습니다. 이것도 의미있는 일입니다. 러시아의 비평가 바흐친 (Bakhtin)은 이런 '예술과 관객'사이의 다이나믹한 소통의 문제를 꿰뚫어본 사람이지요. 우리는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상식을 갖췄는지 배경지식을 갖췄는지 상관없이 관객이 어떠하건 관객으로서 우리는 작품과 매우 역동적인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우리를 통해 작품은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배경을 알고 거기에 살을 붙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입니다. 알면 아는만큼 보이는 것이고, 모르면 모르는 채로 상상력을 발휘해서 새로운 해석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2)번질문, 예술 그 자체만 보면 안되는가? 반드시 배경을 이해해야 하는가? 에 대한 저의 독백같은 답변입니다.
좋은 질문을 주셔서 사색하는 시간을 가져봤습니다.
2010년 1월 14일 RedFox
행복한 자유인 ((http://jumpkarma.com/)님의 코멘트:
교집합 합집합의 그림보기
'작품 그 자체가' 그림을 보는 이에게 말을 건다는 것, 참 유쾌합니다. 아직 작품이 제게 말을 걸 정도로 바라보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시도를 해봐야겠습니다.
새로운 소통, 해석, 재해석에 대한 이야기도 무척 흥미롭고 용기를 주는 내용이네요. 아마도 저는 그림 감상(보기)을 제 자신을 위한 일종의 유희 또는 지적, 예술적 활동/즐거움으로 관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사람과의 지적경쟁 또는 일종의 도구로만 사용하지 않았나 반성을 해봅니다. 남들에게 소위 '무식'해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같은 게 있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그림과 대화하고 개인적으로 공부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발상의 전환과 같은 개념의 제목 붙이기(뒤샹의 샘)는 오히려 실력과 철학이 미천한 사람들이 그 간극을 채우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종종 사용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경우를 적지 않게 봤거든요. 어떻게 생각하면 쉬운 방법인 것 같지만 경지가 높아지고 생각이 깊어지면 '변기'에 '샘'이라는 제목을 붙이는 게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도슨트와 inner city children에 대한 일화는 많은 걸 생각하게 하네요. 작품(대상)이 관객(주체)에게 보여질 때 작가의 생각과는 별개로 의미가 살아서 움직이고 이동한다는 것은 예술의 생명력이 비단 한 시대에만 머물지 않고 생명의 영속성을 지니고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제목에도 국한되지 않고 작가의 의도에도 국한되지 않고 바라보는 내 자신의 시선에도 국한되지 않는 그림보기로부터-- 내 시선을 돌아보고 작가의 의도를 살피고 제목의 함의를 되새겨보는 그림보기까지 수 많은 교집합, 합집합의 그림보기가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trackback from: 미술 감상 방법 2: 피카소의 한 획과 나의 한 획
답글삭제바로 이전 페이지 (미술 감상 방법: 예술 작품과 제목과의 관계 http://americanart.textcube.com/302 ) 에서 (1) 제목과 작품과의 관계 (2) 작품과 작품 주변 배경과의 관계 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 해 보았습니다. 위의 두가지 주제 중에서 '작품과 작품 주변 배경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덧붙여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왜 어떤 미술 작품 (혹은 예술 작품)을 감상할때, 작가를 의식하게 되는 걸까요? 그것이..
재밌고 유익한 글 고맙습니다.
답글삭제'작품 그 자체가' 그림을 보는 이에게 말을 건다는 것, 참 유쾌합니다. 아직 작품이 제게 말을 걸 정도로 바라보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시도를 해봐야겠습니다.
RedFox님의 그림 감상법이나 지식습득 방법 중 어느 부분은 저의 그것과 약간 닮아있는 듯 해서 조금은 '안심(?)'이 됩니다.
새로운 소통, 해석, 재해석에 대한 이야기도 무척 흥미롭고 용기를 주는 내용이네요. 아마도 저는 그림 감상(보기)을 제 자신을 위한 일종의 유희 또는 지적, 예술적 활동/즐거움으로 관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사람과의 지적경쟁 또는 일종의 도구로만 사용하지 않았나 반성을 해봅니다. 남들에게 소위 '무식'해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같은 게 있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RedFox님 덕분에 좀 더 적극적으로 그림과 대화하고 개인적으로 공부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발상의 전환과 같은 개념의 제목 붙이기(뒤샹의 샘)는 오히려 실력과 철학이 미천한 사람들이 그 간극을 채우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종종 사용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경우를 적지 않게 봤거든요. 어떻게 생각하면 쉬운 방법인 것 같지만 경지가 높아지고 생각이 깊어지면 '변기'에 '샘'이라는 제목을 붙이는 게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도슨트와 inner city children에 대한 일화는 많은 걸 생각하게 하네요. 작품(대상)이 관객(주체)에게 보여질 때 작가의 생각과는 별개로 의미가 살아서 움직이고 이동한다는 것은 예술의 생명력이 비단 한 시대에만 머물지 않고 생명의 영속성을 지니고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제목에도 국한되지 않고 작가의 의도에도 국한되지 않고 바라보는 내 자신의 시선에도 국한되지 않는 그림보기로부터 내 시선을 돌아보고 작가의 의도를 살피고 제목의 함의를 되새겨보는 그림보기까지 수 많은 교집합, 합집합의 그림보기가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RedFox님의 친절한 설명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아, 그런데 첫 문단에 자유인 옆 괄호 안의 블로그 주소는 혹시 제 블로그 링크인가요? 그렇다면 블로그 주소가 틀렸네요.^^ 제 블로그 주소는 http://jumpkarma.com 또는 http://jumpkarma.textcube.com 입니다. 만약 다른 블로그 링크를 적어놓은 것이라면 죄송합니다.
@행복한 자유인 - 2010/01/16 01:13
답글삭제꽤 길고 지루한 이야기를 '다' 읽으셨나보네요. (심심하셨군요 ^^) 하하. 정말 읽는 사람이 있구나. 헤헤헤. 제가 글을 쓰면서도, 이 감각적인 휘발성 시대에 누가 이 길고 나른한 것을 다 읽으려나~ 했는데요.
감사합니다. (링크 고쳤습니다. 제가 맨날 이래요. 엉뚱한데서 얼빠진 짓을 하고 그럽니다.)
적어주신 내용은, 그냥 답글에 묻어놓기가 아까워서 본문으로 카피해서 옮기겠습니다. 괜챦지요? 저는 이런식으로 텍스트를 보관하는 편입니다. 내글이나, 혹은 다른 사람의 글이나, 귀한것은 잘 갈무리를 하는 편이지요.
다 읽었던 이유는 심심했다기 보다(^^) 제 질문에 대한 성의있는 답변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읽고 생각할 만한, 공부할 만한 '가치'가 있는 글이기 때문이었죠. 사실, 휘발성 강한 글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읽는 이(독자)에게 호흡을 멈추고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글들은 그리 많지 않지요.
답글삭제RedFox님 글들은 때론 미술관련 지식이 적은 제게 어렵기도 하지만 쉽게 읽히도록 '배려'를 해주기 때문에 읽기가 즐겁습니다.
답글이 본문으로 카피/이동되는 영광까지 누리게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안녕하세요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필력이 저에겐 흥미로우면서도 공감되고 또 재밌기까지 하네요. 지금 이 블로그의 마지막 글이 2010년인데 혹시 블로그를 옮기셨나요 ? 아니면 이제 블로그를 더 안하시는지.... 더하셨으면 좋겠는데 ... 만약 다른 블로그를 하고 있다면 저에게 정보좀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답글삭제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