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race Pippin (1888-1946) 의 작품들을 미국의 미술관에서 만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가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았고, 그리고 그가 '화가'로 알려지고, 화가로 활동한 기간이 극히 짧기 때문입니다. Horace Pippin은 '모세 할머니 (http://americanart.textcube.com/93)' 와 마찬가지로 어린시절부터 가난하여 미술 교육이나 정규 학교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성장했으며, 홀로 취미삼아 그림을 그렸고, 그러다가 어느날 뒤늦게 그의 예술성이 눈에 띄어 미국 미술사에 이름을 올리게 된 평범한 이웃같은 사람입니다.
겨울 저녁의 노래
피핀의 삶과 예술을 정리하기 전에, 우선 다음 세장의 그림들을 보시겠습니다. 실내 (1944), 기도하기 (1943), 도미노게임 하는 사람들 (1943). 제작 년도로 따지면 '실내'가 가장 뒤로 가야 마땅하겠지만, 저는 '실내'라는 작품을 제일 앞에 배치시켰습니다. 이 세편의 작품을 보면서 '공통점'들을 한번 찾아 볼까요?
사진 클릭하시면 큰 이미지로 감상하실수 있습니다.

Interior (실내) 1944
Oil on Canvas
2010년 1월 16일 워싱턴 국립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Saying Prayers (기도하기) 1943
2009년 9월 펜실베이나 Brandywine River Museum 에서 감상. 사진촬영 금지구역이라, 복제품 사온것을 사진 찍음
관련 페이지: http://americanart.textcube.com/46

Domino Player (도미노 게임하는 사람들) 1943
Oil on Composition Board
2009년 9월 워싱턴 필립스 콜렉션에서 촬영
저는 사실, 이 세편의 작품들을 각기 발견한 싯점이 동떨어져있으므로 (2009년 9월, 9월, 2010년 1월) 이것들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는 안중에도 없었는데요. 호레이스 피핀 이야기를 하려고 그동안 갖고 있던 그림 사진들을 나열하다보니 뭔가가 잡히더란 것입니다. 저는 그림 이야기를 하기 위하여 미술사책이나 각종 비평서들을 심심풀이차원에서 대충대충 보기도 하지만, 정작 제가 페이지를 열고 그림 이야기를 할때는, 그림에 집중해서, 그제서야 제가 발견하게 된 사항들을 정리하게 됩니다. (그래서 페이지 열어놓고 몇번씩 덧붙이거나 고쳐쓰거나 하는 일이 발생하지요. 그림보면서 이야기하면서 - 그야말로 현장에서 이야기를 하게 되니까요. 미리 생각한 얘기가 아니라, 지금 자판 두드리면서 생각 나는대로 쓰는거죠.)
위의 세장의 그림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무엇인가를 찾으셨나요? (심심해서 시간을 어떻게 죽일지 모르는 독자라면, 한번 세장의 그림에 발견되는 요소들을 종이에 적어보세요. 그러면 시간이 금방 갈겁니다. 예...제가 이런 식으로 고통의 시간들을 보낼수 있었거든요. 이거 의외로 괜챦은 처방이지요. 헤헤. 자살하려다가, 심심해서 제 페이지 발견하시면, 자살도 포기하고 이거 하게 됩니다. 요소들이 뭐가 있다는거여 대체? 이거나 마저 하고 죽으까? 이러고... 하다보면... 고통이 썰물처럼 슬슬 잊혀질지도 모릅니다.)
자 이 세장의 그림에 뭐가 들어있나요.
1. 네, 창문이 하나씩 있습니다. 창문의 모양도 일정하고, 창문을 가리는 커튼은 일률적으로 거무칙칙한 색입니다.
2. 그 창문을 좀더 들여다볼까요? 그 창틀 자세히 보셨습니까?, 아, 창틀에 허옇게 칠해진것, 저것은 아마도 창틀에 쌓인 눈 (snow)이겠지요. 아 창밖에 눈이 쌓여있나봅니다. 겨울이군요. 음. (아유, 똑똑해! 이런거 발견하셧으면, 스스로를 '난 천재야, 천재야!'하고 외친후 머리를 쓰다듬어주십시오.)
3. 방의 가운데에는 반드시 등잔불이 있고요, 등잔불 옆에는 사발시계 (탁상시계: 우리 할머니는 이것을 꼭 사발시계라고 불렀습니다)가 있습니다. 제가 제작 년도를 무시하고 그림을 현재의 순서대로 차례차례 배치시킨 이유는, 이 시계 때문입니다. '실내(1944)'라는 작품속의 시계는 여섯시를 가리킵니다. '실내' 작품속에는 등잔불 하나, 그리고 구석에 촛불 하나 이렇게 조명용 불이 두개나 있군요. 기도하기와 도미노 그림속의 시계는 여덟시를 가리킵니다 (물론 모두 저녁 시간대일것입니다.)
4. 방에는 화덕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 화덕은 요리및 난방의 기능까지 톡톡히 해주지요.
5. 화덕 근처에 '물동이 (일명 바께쓰)'들이 반드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실내에 급수 시설이 없을경우, 어디선가에서 물을 길어다 썼겠지요. 저 물을 끓여서 차를 만들고, 설겆이도 하고, 씻기도 했을것입니다. (아, 저도 시골에서 다 저러고 살아서 잘 알지요.)
6. 잘 보십시오, 벽의 어딘가는 금이 가고 깨져 있습니다. 닳고 망가져가는 일상이지요. 원래 우리가 사는 풍경이 어딘가 금가고, 삐그덕대고 닳아 없어지고, 칠이 벗겨지고 그런것 아닌가요. (알란 드 보통의 Architecture of Happiness 라는 책에서 -- 모든 건축물은 완공되는 순간부터 망가져간다는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끊임없는 유지 보수 작업이 기다리는거죠. 서서히 부식되고 침식되고 기울어가는거죠. 우리의 삶도.)
7. 깨진 의자 등받이들도 보이는군요.
8. 그 밖에 실내 풍경에 보이는 자질구레한 도구들을 나열해봐도 재미있는 작업이 될것입니다. 호레이스 피핀이 즐겨그린 실내풍경속의 물품들은 무엇인지. 후라이판도 보이고, 빨래판 같은것도 보이고, 알록달록한 깔개하며... 참 다양한 일상의 물건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들여다볼수록 정겨운 장면이지요.
위의 '실내'와 '기도하기'를 보면, 참 재미있어요. 실내 디테일을 보면 약간 차이가 나지만, 엄마가 머리에 쓰고 있는 스카프의 무늬하며, 두 그림의 주인공들이 동일한 사람들인것처럼 보입니다.
오후 여섯시에, 저녁상을 물리고 엄마는 화덕 앞에 앉아 담배를 한대 피우고 있고, 학교에 다니는 사내녀석은 방 구석에 촛불을 키고 숙제를 하는것 같기도 하고요, 아직 어린 꼬마 여자아이는 인형놀이에 열중해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은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그림을 그리고 있을지도 모르고요. 호레이스 피핀 자신이지요) 창밖은 겨울인듯, 창틀에 눈이 쌓여있고요. 그래서 실내는 더욱 따스하게 느껴집니다. 각자 자신의 생각에 열중해 있는 풍경이지만, 각자 다른 방향을 보고 있는 세사람이 서로 소외되었다거나 서로를 소외시키고 있는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서로에게 의지하며 각자의 상념에 잠겨있는 것이지요.
오후 여덟시, 아이들은 잠옷으로 갈아입고, 엄마 품에 매달려 저녁 기도를 합니다. 여자아이는 엄마품에 매달려 기도하느라 애지중지하던 인형도 발뒷쪽에 떨어뜨려 놓았군요. 이들은 기도를 마친후 잠자리에 들을 것입니다.
오후 여덟시, 아이들이 잠자리로 물러간 후, 혹은 이웃집에서는 사람들이 모여서 도미노 게임을 합니다. 화덕 앞에 앉아 퀼트 작업을 하는 여인네도 보입니다. 전에, 겨울밤에, 우리들이 고모들과 어울려 내기 화투놀이를 할때, 우리 할머니는 호롱불 옆에 앉아 해어진 내복이나 양말을 꿰매셨지요. 바로 그런 풍경입니다. 겨울밤은 그렇게 일찍 찾아들고, 그리고 길었습니다.
9. 아하! (제가 일을 좀 하다가 문득 화면을 들여다봤는데요. 재미있는것을 발견했습니다.) 엄마가 머리에 뒤집어 쓴 스카프, 빨간 바탕에 점박이 무늬가 세장의 그림에 모두 등장하죠? 그러면, 이 세장에 등장하는 스카프를 머리에 뒤집어 쓴 저 사람은 동일인 인걸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오후 여섯시쯤에 화덕 앞에서 곰방대를 피우며 휴식을 취하던 엄마는, 오후 여덟시에 아이들을 품에 안고 저녁기도를 하고, 애들을 잠자리로 보낸후, 어른들과 어울려서 도미노 게임을 하는겁니다. 더불어서, 저 머리에 스카프 쓴 여성은 화덕에서 멀리 앉아있을때는 짙은 색의 두툼한 숄을 두르고 앉아있군요. 아무래도 윗풍도 있고 화덕에서 멀어지면 추우니까요... 자, 세장의 그림이 이렇게 연결되어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지지요?
10. 시간대별로 커튼의 높이가 다른것도 보입니다. 오후 여섯시의 커튼과 오후 여덟시의 커튼 높이가 달라요. 시간이 갈수록 커튼이 내려가는거죠. 호레이스 피핀이 실내 풍경을 그릴때, 그는 어쩌면 굉장히 사실에 입각해서 작업을 했던것 같습니다. 그림 그린 시기가 다른데도 일관성이 있쟎아요. 그 일관성은 ...그의 치밀함에서 오는것일걸요 아마도. 사실에 입각해서 그리는 치밀함. 놀랍죠? 와... 놀랍군요...
Interior (실내 풍경) 세밀하게 들여다보기
제가 재미난거 보여드릴까요?
우선 이 그림이 걸린 위치의 '의미심장'함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이 그림은 국립 미술관의 동관 (East Bldg) - 현대 미술관에 걸려있습니다. 그리고 지하층의 중심부에 있는 이 그림의 주위에는 마티스, 와홀, 잭슨 폴락, 뉴만, 로스코, 등등 20세기 세계 미술및 미국미술의 지배한 대가들이 총 출동해 있습니다. 그 한가운데 우리의 흑인 아저씨 호레이스 피핀, 정규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혼자서 심심풀이로 상자 뚜껑이나 생활 집기에 그림을 그려서 장식하는 것이 취미였던 한 사나이의 그림이 걸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좀 세밀한 부분을 보실까요?
이그림의 벽면을 좀 보십시오. 이 집의 벽면이 도대체 이상한겁니다. 이 그림의 중앙부분, 물동이가 있는 곳에서부터 왼편, 소년이 서있는 구석까지, 저 벽이 도대체 어떻게 된걸까요? 얼핏 보기에 물동이가 있는 곳이 모퉁이같이 생겼거든요. 그런데 모퉁이처럼 줄이 그어진 곳은 거기가 아니고 더 왼편입니다. 양동이가 있는 곳도 모퉁이이고, 줄이 그어진 곳도 또다른 모퉁이 인걸까요?
그래가지고, 피핀이 뭐랄까 착시 현상을 이용해 공간을 뒤틀어 놓는, 뭐 Escher 기법이라도 쓴걸까? 별 고민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시내 나간김에 국립 미술관에 또 가서 그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며 연구를 하다가, 나름 해답을 찾았지요. 바닥에다 시선을 고정시키고 보면, 모퉁이가 저쪽으로 꺾어진 것같이 보이는 회색 삼각형 모양은, 꺾어진 모퉁이 각이 아니고, 테이블에 올려진 촛불 때문에 생긴 테이블의 그림자였습니다. 테이블의 그림자가 선명하게 각을 이뤘던 것입니다. 촛불은 실내가 어두울수록 환하게 느껴지고, 그만큼 그림자도 깊지요. 그러다가 저 혼자 웃고 말았습니다, 물동이와 의자 사이의 바닥에 회색 그림자속에 '쥐구멍'이 하나 뚫려있는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피핀은 쥐구멍까지 그려넣는 관찰력과 여유와 웃음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 이번에는, 아래 부분에서 오른쪽의 노란 동그라미 부분을 들여다보세요. 벽부분에 흰 칠이 되어 있는데, 그 칠 안쪽에 뭔가 보이지요? (ㅎㅎㅎ) 커다란 죽 솥같은 것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제가 추측하기에 원래 여기다가 죽솥을 그렸다가, 나중에 그냥 벽으로, 흰칠을 해버린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죽솥은 희미하게 그냥 거기 남아있습니다. (죽솥의 유령이라고나 할까요). 왜 그런 일화들이 있쟎아요. 밀레나 고호나 이런 화가들이 가난해가지고 캔바스 살 돈이 없어서, 기존 작품에 덧칠을 하고 새 그림을 그리고, 몇번씩 그렇게 그림 연습을 했다고 하지요. 그것을 요즘 현대기술로 연구를 해보면 몇번을 덧칠하고 그렸는지 그런것까지 계산이 된다고도 하고, 그 자료를 바탕으로 밑에 깔린 그림을 대충 짐작해서 복원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들었거든요. 피핀역시 이그림을 그리다가 생각을 바꾸고 덧칠을 하거나 이미 그린 대상을 뭉개버리거나 그러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아, 부분부분으로 잘라봐도 참 아름다운 정경입니다. 색상이나 붓 터치나 서툰듯 정묘하고, 뭐랄까, 기성 화단의 영향을 받지 않고 홀로 성장한 사람의 어떤 개성과 순수함도 느껴지고요.
그러면, 피핀의 실내 풍경속의 창문들은 왜 모두들 하나같이 수직으로 길다란 직사각형 모양일까요? 제가 그 단서가 될만한 자료를 갖고 있습니다. 지난 2009년 9월에 펜실베니아 웨스트 체스터의 피핀의 집을 찾아가서 그가 살던 집을 밖에서 확인해보고, 그가 평생 지나치던 동네 골목길, 마을등을 둘러본적이 있지요. http://americanart.textcube.com/45 페이지에 그 내용이 실려있습니다. 자 이 건물의 두가구중에서 오른쪽 절반이 피핀이 결혼이후 평생 살았던 집입니다. 본래는 그의 아내의 집이었지요. 그의 아내가 아이들과 함께 살던 집인데 피핀이 그녀와 결혼하여 그 집에 함께 살게 된 것이지요. 실제로 가서보면 3층이긴 하지만, 한층 면적이 넓은것은 아닙니다. 그냥 소시민의 집이지요. 창문들이 죄다 수직으로 길쭉한 직사강형이지요? 그림속의 창문는 바둑판 모양의 창틀이 있었는데, 현재의 창은 '현대식' 통유리군요. 손좀 봤겠죠. 피핀이 살던 동네가 궁금하시면 링크 해 놓은 페이지로 이동하시면 됩니다.
http://americanart.textcube.com/45
올드 블랙 조 : 그리운 날 옛날은 지나가고

Old Black Joe (1943)
Oil on Canvas
61 x 76.1 cm
2009년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관련 페이지: http://americanart.textcube.com/40
이 그림에 대한 이야기는 http://americanart.textcube.com/40 에 정리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에이브라함 링컨 : 책과 촛불
에이브라함 링컨이 어떤 정치적 함의를 갖는 존재인가는 사람마다 해석이 다를수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미국의 흑인들에게 링컨은 '성자'와 같은 존재 일 것입니다. 아무래도 상징적으로 흑인 노예 해방에 기여한 사람이니까요 (상징적으로요....실제 역사를 들여다보면 링컨이 성자라서 그렇게 행동 한 것도 아니고, 흑인 노예 해방을 위해서는 무수한 정의로운 사람들의 노력과, 그리고 희생이 있었다고 봐야지요.)
링컨이 흑인들에게 상징적으로 위대한 인물일뿐더러, 호레이스 피핀이 살던 마을 거리를 걷다 보니 에이브라함 링컨의 전기책 (biography)이 그 마을에서 발간이 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그 출판사 건물 앞에서 사진도 찍고 그랬죠. http://americanart.textcube.com/45 그러니 매일 이동네를 오가던 호레이스 피핀에게도 링컨은 각별한 인물이었을겁니다. 그는 여러장의 링컨 그림을 남겼는데요, 아래 그림은 제가 카네기 미술관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Abe Lincoln's First Book (에이브라함 링컨의 첫 책) 1944
Oil on Canvas
2009년 10월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에서 촬영
왜 이런 제목을 달았는지는 저도 잘 알수가 없군요. 에이브라함 링컨이 책벌레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고요, 특히 그의 생모가 사망하고 새어머니로 들어온 분이 링컨의 교육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고 하지요. 소년 링컨과 그 새어머니는 단단히 연결된 애정의 관계였다는 기록을 여기 저기서 볼 수 있습니다. 링컨은 성경책을 달달 외도록 읽고 또 읽었다고도 합니다. 옛날에, 책이 귀하던 시절, 집집마다 갖고 있었던 책이 아마도 성경책이었을걸요. 다른 책은 없어도 성경은 있었겠지요, 기독교 문화권 사회였으니까. 그러니 유일한 그 책을 읽고 또 읽고 달달 외도록 읽었을겁니다. 딱히 그 책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다른 읽을거리가 없으니까요.
(저도 어릴때 이솝 이야기책을 저주하면서 읽던 생각이 납니다. 책이 보고 싶은데 읽을거리가 없으니까, 그나마 집에 한권 있는, 그 너무 짧아서 짜증나는 이솝이야기를 달달 외도록 읽는거죠. 거기 나오는 모든 짐승들을 저주하면서. 왜냐하면 모든 이야기가 반페이지짜리 짧은 얘기라서, 길고 길고 긴 얘기가 그리웠던 거죠. 끝나지 않는 긴 얘기가. 아 그러니 제 블로그 페이지가 길어도 용서하시길. 전 짧은 이솝 얘기를 저주하면서 읽고 읽었던 악몽의 기억이 있어서 아마도 그 트라우마가 아주 심할겁니다.)
이 그림은 호레이스 피핀 아저씨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건 꽤나 상징적입니다. 직접 두개의 투명한 자를 갖고 와서 확인해보셔도 되는데요. 이 그림에 대각선을 그리면 그림의 정중앙에 오는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링컨의 책을 집기 위해 뻗은 왼손 입니다. 링컨의 왼손이 그림의 정 중앙에 있고요, 그 손이 막 책을 집어 들었고요 그리고 그의 지척에 촛불이 켜져있어, 그 촛불의 빛때문에 링컨이 입고 있는 셔츠가 희게 빛납니다. 촛불은 링컨의 왼뺨과 왼팔을 희게 비쳐줍니다. 책(바이블)은 우리 삶의 빛이지요. 촛불 역시 우리 삶의 빛입니다. 링컨은 두가지 삶의 빛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어둠속에서 링컨이 희게 빛납니다.
설마 피핀이 의도했을거라고는 보지 않지만,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틴성당의 천정화, 천지창조에서 손을 뻗치는 아담과 같지 않습니까? 그냥 책을 향해 손을 뻗치는 소년의 이미지가 손을 뻗친 아담을 연상시킨다고요...
그런데요, 그림에는 흑색과 백색이 돋보입니다. 백색은 눈이 부실듯이 하얗게 빛나는데, 그가 발라놓는 흑색이 그 백색을 더욱 빛나게 합니다. 특히 '링컨의 첫 책' 그림은 흑과 백으로만 이루어진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만약에 화면 중앙에 촛불이 그려져 있지 않았다면 이 그림은 어땠을까요?
저는 이 그림을 발견했을때 그 눈부신 흑과 백의 대조와 링컨 머리위의 천장의 사선이나 목조 벽면, 그리고 바닥 마루의 선등을 보면서, 문득 프랭크 스텔라를 떠올렸습니다. 잠시 웹에서 스텔라의 작품을 빌려왔습니다. 검정 물감과 흰 물감으로만 작업한 스텔라의 매우 현대적인 이 작품과, 위의 피핀의 링컨 그림을 비교해보면, 어떤 것이 더 절실하게 다가오나요? 제가 스텔라를 좋아하고, 스텔라 그림을 보면 좋아서 입이 찢어지는 편인데요, 그런데 피핀의 링컨 그림이 스텔라의 현대성을 휙 뛰어넘는다는 느낌이 듭니다. 좀더 현대성이 느껴지고, 그리고 진정성이 느껴집니다. (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아...뭔가 더 절실하다는거죠...아...공부해야돼...잘 설명을 못하겠어..공부 더 해야돼... 한탄 모우드) 아무튼, 예, 그렇습니다. 피핀의 링컨 그림에서 추상미술 작품을 뛰어넘는 추상성을 얼핏 느꼈다는 것이지요. 그 색감에서, 구도에서.
http://images.artnet.com/images_US/magazine/features/tuchman/tuchman7-9-6.jpg
저 링컨 그림을 미술관에서 발견했을때는, 어떤 '충격' 같은것을 느꼈었거든요. "아니! 어떻게! 이렇게 그리지? 어떻게?" 그리고는 입벌린채 멀거니 얼빠진 사람처럼 서있는거죠...
아슴푸레한 기억들

Shell Holes and Observation Balloon, Champagne Sector (상파뉴 지역의 폭탄자국과 관측용 낙하산) c. 1931
Oil on Muslin
2010년 1월 23일 볼티모어 미술관에서 촬영

피핀의 그림이 전시된 (왼쪽에서 세번째) 볼티모어 미술관 미국 미술 전시장
2010년 1월 23일 촬영
볼티모어 미술관 미국 미술실에서 피핀의 그림을 발견 했을때는, 월척을 한 기분이었습니다. 피핀의 그림을 찾아 보기가 힘들거든요. 위의 전쟁터 풍경 그림은 얼핏 보기에 흑백 그림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잔디밭에 초록색이 희미하게 칠해져 있는것을 볼수 있습니다. 무채색 그림은 아닌데, 기묘하게도 흑백 텔레비전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제가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화집을 통해서 그가 남긴 그림들을 살펴보면, 전쟁터 그림중에 이렇게 '흑백 테레비'처럼 보이는 그림들이 여러점 있습니다. 기분이 묘해지지요.
그는 왜 채색화를 그리면서 흑백이 두드러지는 그림을 그렸을까? 혼자 사색을 해 봤는데,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은 - 혹시나 검정, 흰색 유화 물감이 값이 싸서 구하기가 쉬웠던 걸까? 다채로운 색깔 물감을 살 형편이 안되었던것은 아닐까? 뭐, 부유로운 인생이 아니었으니까요.
만약에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면, 무엇이 그를 무채색조의 기억으로 이끌었을까요. 그의 머릿속의 전쟁의 기억은 '암담'했기 때문일까요?
피핀의 일생
1918년에 1차대전에 참전한 그는 프랑스에 배치되었는데, 거기서 부상을 당해서 제대합니다. 제대 한 후에 펜실베니아의 고향으로 돌아와 이미 아이들을 거느리고 있던 중산층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그녀와 평생 해로하게 되는데요, 부인에게 집이 한채 있었기 때문에 그는 집 걱정없이 허드레 일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 집이 위에 소개한 웨스트체스터의 집입니다.

http://www.nga.gov/education/classroom/counting_on_art/bio_pippin.shtm
위사진은 제가 '국립미술관' 웹페이지에서 빌려온 것입니다. (위의 링크를 따라가시면 피핀에 대한 이야기와 작품들을 보실수 있습니다.) 위에 피핀과 그의 부인이 함께 있군요. 피핀을 들여다보시면 그가 오른 손에 붓을 쥐고 있는데 왼손으로 오른손목을 받치고 있지요. 그는 부상을 입어서 오른쪽 팔을 자유롭게 사용할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왼손이 오른손을 받쳐주어야 했습니다. 피핀이 남긴 작품들중에 대형 작품을 볼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의 팔의 제약 때문이라고 합니다.
피핀은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 시절에 교육을 많이 받지 않은 흑인들이 대개 그러하였듯, 잡역부로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 일생을 지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차대전에 참전 했던 것을 제외하고는 평생 그가 태어나 결혼하여 살림을 차린 고향 마을을 지켰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마땅히 그림 그릴 도구를 가져본적은 없다고 합니다. 열살이 되던 해에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미술 대회가 있었는데, 그때 그가 그린 그림이 대상을 받아서 부상으로 미술도구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것이 그가 평생에 처음 가져본 미술 도구였다고 하지요. 피핀은 14세에 뜨문뜨문 다디던 학교를 중단하고 생계의 현장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것으로 정규 교육과는 아주 멀어진 것이지요.
1차대전에서 부상당해 돌아와 고향 마을에서 잡역부로 일하며 살아가던 피핀은 취미삼아 혼자서 그림을 그립니다. 나무 상자위에 그림을 그려서 장식을 하기도 하고, 그것을 마을 시장에서 진열하여 팔기도 했는데, 별로 많이 팔려나가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자신이 그린 그림을 동네 이발소에서 이발료 대신으로 선물한적도 있는데, 이발소집 부인이 그 그림을 싫어했기 때문에 이발소 주인은 그걸 집에다 걸지도 못하고 이발소에 걸어놨다고 합니다 (울며 겨자먹기였던 거죠) 지금 그 작품이 얼마에 거래가 될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실 노릇이죠.
피핀은 극히 우연한 기회에 지방의 미술전에서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됩니다. 그의 예술성을 일찌감치 간파한 사람중에 Andrew Wyethe 의 아버지인, 삽화가 N.C.Wyethe 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지척의 마을에서 살고 있었거든요 (제가 와이어드 스튜디오에서 피핀의 집, 동네까지 자동차로 10분만에 간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버지 N.C.Wyeth 는 피핀의 작품을 보면서 - 나에게도 저렇게 색채를 입힐 재주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한탄을 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피핀은 1940년대에 우연히 그의 천재성이 발견되어 미술 평론가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그래서 잠시 미술학교에서 수업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지역의 화가가 그를 미술 과정에 초대를 해 준것인데요, 거기서 잠깐 그는 서양 여러나라의 미술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고, 인상파 화가들의 화잡도 접하게 됩니다. 그는 화가들중에서 르누아르의 색채를 가장 아름답다고 평했다 합니다. 피카소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하지요. 미술가가 그에게 미술의 '테크닉'을 가르치려고 했을때, 피핀은 이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 [미술 학교는 다닐게. 하지만 그림에 대해서는 간섭하지마. 나는 내가 그리고 싶은대로 그리겠어] 뭐 이런 입장이었다고 합니다. (제가 쌍따옴표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전에 책에서 읽었던 내용을 제 기억을 더듬어 옮긴 것이므로, 직접 인용이 불가하기 때문입니다.)
피핀은 1940년 이후에 미술계에 알려졌고, 그 이후 그의 활동 시기는 짧았습니다. 그는 1946년에 사망했으니까요. 뒤늦게 발견된, 어둠속에 가려진 천재였던 것이지요. 정말 혜성처럼 반짝 하고 나타났다가 사라진거죠. 하지만, 그가 남긴 그림들, 제가 워싱턴 일대에서 발견한 그의 그림들은 얼마나 영롱하게 반짝거리는지... 피핀. 피핀. 피핀. 참 예쁜 이름이죠?
2010년 1월 28일 페이지 대략 완성 RedFox
일단 대충 마감했습니다. 질질 끄는것도 고쳐야 할 습관이라.
답글삭제이게 대충 마감인가요?? 엄청나네요.
답글삭제제가 아는 분은 머핀을 좋아해서 아이를 낳으면 꼭 머핀이라고 이름지을 거라고 했는데.. 갑자기 그게 생각나네요. 피핀, 머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