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기에 절은 배추를 맑은 물에 담가서 두어번 헹궈 바구니에 담는다. 물기를 빼낸다. 절은 배추를 씻을때, 내 눈에 들어오는 배추조각들이 마치 비맞은 나비같아 보인다. 그럴때면 나는 혼자 노래하듯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를 중얼거린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나래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거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바다를 푸른 무우밭인줄 알고 내려가 봤던 나비는 일렁이는 물거품에 날개가 젖어 얼마나 놀랐을까. 무우밭에 무우장다리꽃이 넘실대는줄 알고 내려갔다가, 그것이 꽃이 아니고 짠 물거품인것을 발견했을때 나비는 얼마나 낙담했을까. 하필 이 시를 쓴 시인이나, 이 시를 읽으면서 나비에 공감하는 인간, 모두 물에 젖은 나비처럼 놀라고, 상처받고 지친 영혼들이 아니었을까.
'어린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이 구절때문에 하필 나는 김치를 담그기 위해 배추를 절일 때 마다. 배추의 그 노리끼리하고 연두빛 나는, 절어서 휘어지는 살결을 보며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를 떠올리는 것일게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거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나비가 지쳐서 돌아온 곳은 어디인가? 나비는 어디로 돌아왔을까? 결국 나비는 돌아온건가? 바다를 건너지 못한건가? 바다를 건너갔다가 돌아온건가? 김치를 버무리는 동안 내내, 내 나비들이 바다에 빠져 파닥거리는 광경을 상상한다.
옛날에 내가 미국에 처음 오던해에, 한국마켓 이사장이 진열장에 있는 김치를 가리키며, "학생들은 귀챦다고 통배추김치를 안사가요. 그래서 막김치만 팔아요." 그 곳에는 유학생 인구 외에 딱히 한국인이 없었고, 한국 식당도 없었고, 오로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존재하던 한국마켓이었는데 사람좋은 이사장이 '신입' 고객을 상대로 이런저런 사는 풍경 얘기를 해주었다. 학생들은 썰어먹기 귀챦아서 오히려 통배추김치를 싫어한다고. '아무리 귀챦아도, 배추김치 썰기도 귀챦은가? 통배추김치가 김치인것이지, 막김치가 그게 김치 축에나 끼는가?' 내가 아무리 살림에 뜻이 없고 대충 살았대도, 어릴때부터 먹고 자란것이 통배추김치이다보니, 통배추김치가 아닌, 막 썰어 버무린 김치는 - 김치 축에도 못끼던 것이었다. 그랬었는데.
나는 이제 더이상 통배추김치를 담지 않는다.
썰어먹기 귀챦아서.
(통배추김치를 통에서 꺼내어, 도마에 올려놓고 썰어서 접시에 담은 후에, 그 도마 다시 씻고, 칼 씻고, 김칫국물 흐른것 닦고... 그런 과정들이 번거롭고 귀챦다.)
막김치는 뚝딱 만들기도 쉽고,
만들어서 통에 담기도 쉽고
통에서 필요한 만큼만 덜어서 꺼내 먹기도 쉽고.
배추 네통과 무우 두개를 썰어서 부추 파 마늘 생강을 섞어 김치를 담았다. 계절학기 수업이라 아침부터 여섯시간을 한꺼번에 몰아서 수업을 한지라, 수업 마칠즈음에는 '파김치'가 되고 말았는데, 집에 김치가 다 떨어졌다는 것이 기억이 나서 장을 봐다가 배추를 절이고, 밥을 지어 식구들을 먹이고, 그리고 쓰러져 잤다. 자고 나니 배추가 다 절어있길래, 젖은 나비같은 배춧잎들을 건져서 김치를 버무려 담았다.
학생들이 통배추김치보다 막김치를 좋아한다고 설명해주던 한국마켓 이사장이 생각나. 언제부턴가 나는 막김치를 '유학생 김치'라 부른다. 자취생 김치. 유학생 김치. 막나가는 김치. 바다를 건너던 나비들이 쓰러져 쉬는 김치.
나의 나비는 지금 저 푸른 바다위를 잘 날고 있을까?
나비야, 내 혼아. 지치지말고 바다를 잘 건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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