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13일 수요일

[교육] 디지탈에서 아날로그로의 회귀 : 파워포인트를 없애버리다

이번 계절학기 수업에서 나는 '파워포인트' 기기를 강의실에서 없애버렸다. (영사기 자체를 강의실에서 치워버렸다).  파워포인트 프레젠테이션에 넌더리가 나서.

 

십여년 전까지만 해도 대학원생들이 프레젠테이션을 할때 '오버 헤드 프로젝터'를 사용했었다.  그런데 7-8년전부터 거의 모든 강의실에 파워포인트 프로젝터가 설치되고, 미국의 경우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원까지 거의 모든 레벨의 학생들이 무슨 발표 할 거리만 있으면 파워포인트 자료를 만들어 발표를 한다.  나도 미국에서 대학원 생활을 시작하면서, 혼자서 파워포인트 제작하는것을 익히면서 - 이 놀라운 도구에 흠뻑 빠져들기도 했었다.  게다가 나는 이런 '시각적인 자료'를 만들어내는데 취미가 있었으므로 아주 신이 났었다. 새로운 문물을 익히고 남들보다 빠르게 해 낸다는 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내가 이제 대학원에서 가르치는 위치가 되었을때도, 나는 학생들이 발전하는 기술에 뒤처지지 않도록 '신 문명'을 익히고 응용하여 자신의 도구로 잘 활용할수 있도록 각종 프로젝트를 주곤 했다.  특히나 '공백'이 길었던,  늦게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늦깎이 대학원생의 경우 이런 파워포인트 자료를 만든다거나 언라인으로 뭔가 프로젝트를 해내는 것에 겁을 먹는 일이 왕왕 있는데 이런 학생들도 일정 시일이 지나면 내가 기대했던대로 수행능력을 높이곤 했다 (학생들이야 뭔가 새로운것을 익히느라고 괴로웠겠지만, 결국 다 해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나는 - 초등학생부터 대학원생에 이르도록 아무나 척척 만들어 발표하는 이 파워포인트 놀음이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너무너무 지겨운 나머지 이번학기부터는 그놈을 아예 치워버렸다.

 

내가 파워포인트 영사기를 교실에서 치워버린 이유:

 

 (1) 발표자가 지나치게 파워포인트에 의존적이 되어버렸다: 뭐든지 얼렁뚱땅 파워포인트로 만들어 띄우고 얼렁뚱땅 시간만 채우면 된다는 식이 되어버렸다.

 (2) 내용을 아는건지 모르는건지 파워포인트에 핵심 요약해와서 떠들어대면 된다는 식이다.  내가 파워포인트 봐주기 지겨우니까, 발표자 세워놓고 "저건 무슨 말이래?" 하고 물어보면 대꾸를 못하고 얼버무리고 있을때, 그럴때면 나는 파워포인트 영사기와 스크린을 다 때려 부수고 싶어진다. 

 (3) 특히,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고, 영어 발표에 자신이 없는 학생의 경우,  파워포인트 자료에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말 영어로 다 적어가지고 와서,  앞에 서서, 그걸 읽고 있다.  봐주는 나는 지겹다. 자기 말로 이야기를 해야지 단체로 글 읽기 연습하자는건가?

 

 

내가 '파워포인트가 지겨워서 없앴다'고 학기초에 학생들에게 고지하자, 분위기가 썰렁했었다.  이미 파워포인트에 중독이 되어버린 학생들이, 그것없이 어떻게 발표를 할지 막막해졌던 모양이다.  "파워포인트 만들라고 할때는 언제고 왜 그걸 치우신당가요?"   "사랑할때가 있고, 헤어질때가 있으며, 살때가 있고 죽을때가 있나니  파워포인트를 줄때가 있고, 그것을 도로 빼앗을 때가 있느니라 (전도서에 나오는 구절 같지 아니한가? 하하하)"

 

그런데, 겨울 계절학기 개강한후 몇주가 흘렀고, 그 몇주동안 학생들이 일제히 아날로그로 돌아가서 직접 손으로  만질수 있는 각종 발표자료를  손으로 만들어가지고 와서 - 역시 다른 학생들이 '손'으로 뭔가 작업을 하여 학습을 할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짜가지고 와서 아주 활발한 주제 발표들을 해치웠다. 밋밋하고 나른한, 지겨운 파워포인트에 비해 우리가 손으로 직접 만들고, 만질수 있고, 그리고 뭔가 만들어 나갈수 있는 자료들은 얼마나 생생하고 맛이 있던지.

 

 " 그 파워포인트를 없애버렸더니, 이렇게 놀라운 발표들이 나오고 있지 않은가!  내 학생들은 천재들인 것이야!"

 

내가 어제 세명의 주제발표를 평가하면서 흐뭇해하자, 학생들이 나를 째려보며 대꾸했다,

 "Who pushed us...? (우리를 들들 볶은이가 누구인가?)"

 

 

우리는 이미 디지털 세상에 서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완전히 디지털 세계를 이탈할수는 없다.  그러나 가끔, 우리는 과감하게 어떤 요소를 싹 치워버려야 한다.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디지털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내가 디지털의 노예가 되어버리면 디지털은 더이상 아름답지 않다.  인간이, 인간의 손이, 인간의 아이디어가 디지털을 갖고 놀수 있어야 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예수를 만나면 예수를 죽이고, 디지털을 만나면 디지털을 죽이라. 뭇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사람의 눈을 현혹시키는, 자기 자신조차도 현혹시키는 현란한 시각적 자료 없이

나 자신의 흡인력

내 언어 자체가 발산하는 매력

나의 생생한 호소력만으로

청중을 끌어들일수 있다면, 그야말로 명 강사인거다. 나는 내 학생들을 '맨주먹'으로도 싸울수 있는 스파르탄으로 키우고야 말겠다.  최소한 '언어' 선생이라면, 자신의 '언어'만 가지고도 승부를 볼 수 있어야 하고, 그 외에 부가적으로 기술도 써먹는것이지, 기술에 의존해서 자신을 연마할 것을 포기해버리면 그것이야 말로 '불구'인 것이니. (소크라테스가 되 살아난다해도, 그는 여전히 길거리에서 흙바닥에 막대기로 쓱쓱 금을 그으면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것이다.) 

 

 

 

 

 

댓글 4개:

  1.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덕분에

    재미난 상상거리 얻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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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Lifelog - 2010/01/15 00:36
    음..제가 '파워포인트'라는 도구를 없애버린 이유는, 파워포인트라는 아주 편리한 도구가 발표자를 어떤 '틀'에 가둬버림으로써, 이들의 창조성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도구에 '종속'되어 버리고 마는거죠.



    그래서 - 발표자의 '창의성'과 '독립성'을 높이기 위해서 그 도구를 없앤것입니다.



    결과는 - 제 희망대로, 발표자들이 좀더 머리를 짜내고, 준비에 만전을 기하여 자료에 의존하지 않고 활발하고 입체적인 발표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런것을 Skinner 의 행동주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행동 강화' 양식중에서 Negative Reinforcement 방법으로 볼수도 있습니다. 어떤 목표가 있다 -->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해가 되는 요소를 제거한다 --> 그 방해되는 요소를 제거하자 기대했던대로 목표를 달성할수 있었다. 결국 어떤 요소를 제거(negative) 함으로써 소기의 목표를 달성할수 있었다 (reinforcement) 고 할수 있지요.



    파워포인트 자료를 만들줄 몰라서 안쓰는것은 - 도구에 종속당하는 것이고

    파워포인트의 귀신이 되어서 거기서 못벗어나는 것 역시 - 도구에 종속당하는 것이고

    우리는, 귀신이 될 정도로 숙달된 후에는 여기에 종속되지 않을 차원으로 진화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디자인 공부하시는 광경, 저도 덕분에 구경 잘 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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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파워포인트에 종속되지 않기 위해서 이것저것 틈나는대로 가능한 툴들을 사용하곤 하죠... 지금 블로그에서 공유하고 있는 제안서 템플릿이 파워포인트긴 하지만... 이는 범용성을 기준으로 한 것일뿐이구요...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고의 틀에 갖히는 것도 결국 생각이고, 그 틀 속에 갖혔다고 하는 것 역시 생각이라는 거...



    만들어 놓은 것을 그냥 사용하려 하기 때문에 읽는 느낌이 드는 것이지 제대로 사용하려 든다면... 보다 다양한 방법과 결과들이 도출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강제하려 하는 것도 사고의 폭을 넓히는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요... ^^



    타블렛을 활용한 것도 좋은 방법 같습니다. 꼭 아날로그 디지털을 구분짓지 않아도 유용하게 현재의 트랜드라고할까요?.. 그런 유용한 도구나 환경들을 잘 활용하면 굳이 디지털을 멀리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싶어서... 돈만 아는 MS이지만 현재 테스트 중인 InkSeine이라는 타블렛용 프로그램... 아주 좋습니다. 혹, 타블렛을 준비하셨다면... 받아서 사용해 보세요... 놀라실겁니다. 참고 하실 링크는 http://hisastro.textcube.com/182 입니다.



    좋은 의도로 진행하신 듯하여 언젠가 글을 읽고서 저의 생각을 남길까... 망설이다... 지금에야 글을 남깁니다. ^^



    이제 이곳은 주말을 보내고 다시 한주를 보내야 하는 일상의 시작입니다.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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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그별 - 2010/01/25 00:51
    저희는 교육공학 쪽을 연구하고 있기 때문에, 한가지 틀에 매인다 생각되면 일단 다른 것을 모색하는 편입니다. 미국에서 자리를 잡은 '외국인교수들 (한국인 포함)'중에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기때문에 영어 스트레스를 심하게 느끼는 유능한 학자들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파워포인트가 '생존의 도구'로 활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단 영어좀 버벅거려도 할말을 파워포인트에 다 정리해놓으며 큰 실수는 안하게 되니까요. 이럴때도 아주 좋은 도구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안주하면 더이상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지요. 어느정도 된다 싶으면 그것을 치우고 살 궁리를 해야하는거죠. 청중은 '저이가 알고 떠드는지, 자료 읽고 있는지' 대충 파악하고 평가는 냉정한 편입니다. 그 냉정한 평가를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하죠.





    저는 http://www.ted.com/ 에 나오는 명사들의 강의를 심심할때면 보면서, 그들의 '강의'방법을 관찰하는 방법입니다. 얼마전에 작가 알란 드 보통이 나와서 강의를 하는데, 그 흔한 파워포인트 자료도 안만들어와서, 손에 메모지 몇장 들고 청중을 향해 선채 이야기를 하는데, 청중의 호응도 좋았습니다. (글만 잘쓰는게 아니라, 이야기도 잘 하는군.) 했지요. 물론 아주 적절한 파워포인트 자료를 제시하여 강의를 더욱 생기있게 만든 경우가 대다수 입니다. 역시 유효적절해야 하죠. (판에 박힌 무엇으로는 청중을 사로잡기 힘들죠).





    제가 지도하는 학생들은 스스로 뭔가를 '창조'해내야 코스를 통과하게 됩니다. 남이 만들어 놓은것을 활용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자신이 뭔가 만들어서 세상에 내 놓아야 무사히 과정을 통과할수 있습니다. 물론 남이 만든것을 샅샅이 알아야하고, 익혀야 하고, 그걸 바탕으로 자신이 뭔가 '기여'를 해야 하는것이지요. 거기까지 도달하라는 것이지요.



    학생들이 익히 알고 있던, 너무나 편리한 도구를 빼앗겼을때, 그들은 과감히 '입체적'인 것들을 고안해냈습니다. 평면에서 입체로 2차원에서 3차원으로 전환한거죠. 그래서 흐뭇하게 지켜보는 중이고요. 물론 강의실에서 파워포인트 도구를 영원히 없앤것은 아니지요. 어떤 조건이 주어졌을때 학생들이 어떤식으로 창의성을 펼치는지 관찰하는 것이지요. 제 학생들은 뭔가 만들어내야 낙제를 면합니다. 괴롭겠지만. :)



    그별님도 끊임없이 뭔가 고안하고 만들어내시쟎아요. 뭔가를 답습하지 않쟎아요. 바로 그런거죠. 제가 학생들에게 요구하는것이 바로 그별님같은 마인드죠. 뭔가 만들어내라는거죠, 입체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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