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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Sleep (잠속에서) 1983
콘테 크레용, 색연필, 파스텔
Simon Dinnerstein (1943- )
2010년 1월 31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건강하고, 행복한 잠처럼 보이지요? ... 아 졸립다. 나도 자야지. 행복한 꿈을 꿔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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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Sleep (잠속에서) 1983
콘테 크레용, 색연필, 파스텔
Simon Dinnerstein (1943- )
2010년 1월 31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건강하고, 행복한 잠처럼 보이지요? ... 아 졸립다. 나도 자야지. 행복한 꿈을 꿔야지...
1월의 마지막날. 일년 열두달 중에서 한달이 갔다.
오후에 날이 풀리면서 도로가 녹는듯하여 가까운 시내에 나갔다. 루즈벨트 다리를 건너 디씨 시내로 진입하면 나타나는 링컨 기념관 측면.
스미소니안 박물관들이 일제히 나타나는, 컨스티튜션 애비뉴 (Constitution Avenue)
워싱턴 마뉴먼트를 볼때마다, 나는 한숨을 짓게 된다. 아마, 언젠가 내가 미국을 떠날때, 그때 나는 워싱턴 마뉴먼트 모형을 하나 사서 보따리에 챙길것이다. 두고두고 보려고.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의 중앙정원 (Kogod Courtyard) 유리 천장에 눈이 쌓인것을 보았다.
오후 일곱시.
눈이 개인 아침엔 햇살이 유난히 투명하고
쌓인 눈때문에 눈이 부셔
이런 날 이불 빨래를 해다 널면
빨래가 더 하얗게 될 것도 같아.
앞으로 눈이 몇번 더 오면 꽃이 필까?
카메라를 들고 마당에 나가서
설경을 찍으려고 기웃대다가
추워서 들어와버리고 말다.
추워 추워. 따뜻한 실내가 좋아.
내가 몇해전에 심심풀이 손바느질로 만들었던 조각보는
지금 보니 마티스 그림의 일부같아
마티스.
볼티모어 미술관의 마티스 그림이 좋아서
작은 액자에 담긴 카피본을 사다놓고
나는 아직 그 비닐 포장도 뜯지않고 고스란히 보관하고 있다.
나중에, 누군가에게 주고 싶을때, 주려고.
들여다보다가.
내 기억속에 있는건
손바닥만한 카피본이 아니라
큼직하게 걸려있던
무늬들이 살아서 너울너울 춤을추는듯하던
잠자는 개의 숨결
그 개의 꿈속의 생동
아무리 아무리 기다려도
창밖에
내가 기다리는 것들은 나타날것 같지 않아
눈이 쌓여 눈이 부시다.
내가 죽을때까지.
http://www.imdb.com/title/tt0301555/
오십년 이상 지속되고 있는 아프리카 '수단'의 내전. 그 내전의 와중에 태어나고 자라나는 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피곤하고 비참할까. 2006년에 다큐멘터리로 세상에 소개가 된 이 작품은 수단 난민촌에서 자라난 몇명의 수단 청년들이 난민 자격으로 미국으로 옮겨와 자리를 잡는 수년간의 과정을 카메라에 담았다.
내가 보기에 이들은 수천, 수만의 난민 캠프 수용자들 중에서 아마도 '매우 특별한' 존재들일 것이다. 액센트가 있지만, 난민 캠프에서 영어를 잘 교육받았고, 그리고 행동, 태도, 생각이 '위인'급이다. '전기'가 뭔지 '아파트'가 뭔지, 캠프 학교에서 배우기는 했지만 그것이 뭔지는 상상도 하기가 힘들정도로 이들의 오지의 삶과 이들이 서양인들의 책에서 배운것 사이의 차이는 현격하다.
네명의 '선택된' 청년들이 피츠버그의 작은 아파트를 배정받고 현지 삶에 뛰어들었을때, 미국인들은 '네명의 부랑자같은 흑인들이 가게에 몰려 들어온다'는 이유로 경찰에 신고를 하기도 한다. 이들은 '몰려 다니면 오해를 받으니 따로 다니라'는 주의를 받는다. 아프리카에서 부족으로, 단체로 모여서 살던 이들에게 '네명'은 너무나 적은 숫자인데, 미국에서는 '네명'이 몰려다니는것을 수상쩍게 본다.
신기한것이 많으나, 사람들은 서로 말도 건네지 않고, 이웃집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의심을 받고, 미국은 이상한 곳이다... 참 이상한 곳이다...
'전기'가 뭔지도 모르고 미국땅에 도착했던 수단 청년은 미국 도착 3년만에 고등학교 졸업자격을 따내고, 전문대의 준학사 학위를 받아쥐고, 그리고 이제 주립대에 입학할 꿈을 꾸는가하면, 또 한 청년은 하루에 두세가지 일을 하여 돈을 모아 다른 나라의 난민 캠프에 있는 가족들과, 수단의 난민캠프의 친구들에게 부친다. 또 한청년은 공부와 일을 하는 틈틈이 수단을 위한 외교활동을 펼친다.
이 청년들은, 겉보기에는 아프리카 출신의 빈민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범상한 빈민이 아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어깨위에 수단 사람들의 '미래'가 걸려있다고 생각하며, 자신들이 미국에서 누리는 안전한 삶을 다른 사람들도 누릴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어찌보면, 수단의 영웅들일것이다.
나는 아프리카 오지의 난민 캠프에서 '운좋게' 발탁되어 미국으로 건너와 허드레 일에 종사하며 공부와 꿈을 향해 나가는 이 청년들을 보면서, 안창호 선생, 김구선생, 서재필 선생 이런 독립, 애국지사들을 떠올렸다. 우리 애국지사들도 저러했을것이다. 조선이 아시아 구석의 볼품없는 지역이던 시절, 조선 출신의 이 청년들은 남보기에 초라한 빈민에 불과했겠지만, 그들은 남다른 열정으로 똘똘뭉쳐 고민하고 공부하고 노력을 했을것이다. 수단의 저 청년들도 수십년후 수단의 민족 지도자로 알려질지도 모르겠다.
키가 장대같이 크다는 이유로 나이 열세살에 수천명을 통솔하는 캠프의 지도자로 뽑혔던 청년이 캠프 책임자로 할 일은, 매일 숱하게 굶어죽어 나가는 친구들의 시체를 매장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키가 큰것에도 하느님의 섭리가 있을것이고, 그 큰키의 쓰임새가 분명 있을거라는 얘기를 한다. (그는 수단을 알리는 민간 외교할동에 앞장서고, 수단 출신 청년들을 이끄는 일도 한다). 그 청년이 난민 캠프에서의 삶을 돌아보며 하던말
: 우리들은 굶어 죽고, 총맞아 죽고, 언제 죽을지 알수 없고,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수 없고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 하느님이 우리한테 지치셨나봐. 그래서 곧 종말이 올거고, 우리 모두는
심판 받을건가봐. 하느님이 우리들한테 완전히 지치신거야.
주말을 맞이하여, 팬 서비스 차원에서 제가 아끼는 작품 사진을 올려드리죠 :) 로뎅의 '입맞춤' 입니다. 볼티모어 미술관 소장품 입니다.
Auguste Rodin, French, 1840-1917 오거스트 로뎅, 프랑스, (1840-1917)
The Kiss, 1886, Bronze 입맞춤, 1886, 동
이 작품은, 생각하는 사람 (The Thinker)과 마찬가지로 로댕이 1880년 위임 받았던 '지옥의 문'에 포함될 작품으로 디자인 되었는데요,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편에 등장하는 비극적 사랑의 주인공들 프란체스카와 파올로의 첫 키스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지옥의 문에 실제로 포함되지는 않았고, 그냥 독자적인 작품으로 남게됩니다. 파올로와 프란체스카는 슬픔에 빠진 모습으로 지옥의 문에 실리게 되지요. http://americanart.textcube.com/59 이 페이지에서, 제가 손으로 만지고 있는 작품이 바로 슬픔에 울부짓는 프란체스카 입니다, (아무래도 지옥의 문 사진들도 조만간 올려드려야 할 것 같군요.)
1893년 이 작품이 시카고에서 개최된 세계 콜롬비안 엑스포에 출품되어 나타났을때, 포르노그라피로 간주되어서 특별 전시 공간에 전시 되었으며, 특별히 신청을 한 관객만 절차에 따라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 하하하.
따로 설명이 필요 없죠. 이런 작품은 그냥 보고, 느끼면 되는거죠. 따따부따 설명이 필요 없죠. 제가 이 작품의 모사품을 수년간 들여다보며 성장했건만 (옛날에 어렸을때 우리집에 석고로 만든 모사품 작은것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아마 누군가에게서 선물로 받아오셨겠죠), 여태까지 몰랐던 것이 뭐냐하면, 여자의 왼발이 남자의 왼발위에 포개져 있었다는 것이지요. 전에는 여자의 왼발 아래에 있었던 것이 남자의 왼발이라는 사실을 몰랐어요. 그걸 이제야 발견한거죠. 볼티모어에서.
아, 사람들이 클림트의 '키스'를 좋아하쟎아요. 유명하기도 하고. 하지만, 키스는 누가 뭐라해도 로뎅의 키스죠. 저로서는 로뎅의 키스 만큼 아름다운 작품은 다시 찾기 힘들어요. 완벽하죠. 이보다 더한 열락의 경지가 또 있겠는가 하는거죠.
2010년 1월 RedFox 볼티모어 미술관
배움을 찬양함
Book Shop: Hebrew Books, Holy Day Books (책방) 1953
Tempera on Panel
2009년 10월 31일 디트로이트 미술관 (Ditroit Institute of Art Museum)에서 촬영
위의 그림은 1951년에 그려진 것이고, 브레히트의 글은 1931년작이지만, 어쩐지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처음 이 그림을 만났을때부터 - 저것은, 브레히트의 시와 같구나! 이런 상념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저 그림 이야기를 할때 브레히트의 시를 인용해야지,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림은, 제목을 안 읽고 그림만 볼경우 Books라는 간판 덕분에 책방 풍경임을 알수 있습니다. 그 책방 문을 열어 젖히고, 한 키가 커보이는 여인이 아이를 왼쪽 가슴에 안고, 숄을 두른채 걸어 나오고 있습니다. 어쩐지 그 여인의 손이 굉장히 커 보입니다. 특히 발에 비교해볼때, 손이 기이하게 커보이지요. 아주 커다란 손입니다. 그리고 쇼윈도우에 적힌 글귀가 아마도 히브리언어로 적힌 것이고 그것을 옮기면, 'Hebrew Books, Holy Day Books' 결국 유태인들의 히브리 경전들을 주로 취급하는 종교서적 책방인듯 합니다. 유태인들에게 그들의 '경'은 삶의 가장 기본이 되는 얼개이지요. 유태인들이 수천년간 '나라'도 없이 이리저리 떠돌면서도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인재들을 배출할수 있었던 이유는, 어딜가건 우선 '학교'부터 세우라는 탈무드의 가름침 덕분이라는 이야기를 어느 책에서 본 것 같습니다. 학교, 교육이 우선되는 종족은 살아 남지요. 한국이 일제 식민역사와 참혹한 한국전의 아픈 역사를 딛고 수위안에 드는 경제국가로 성장한 배경도, 한국의 '교육열'을 빼놓고 생각할수는 없을 것입니다. (얼마나 교육열이 높으면, 대학입시 경쟁이 그토록 치열하겠습니까... 교육이 파행으로 흐르는 면도 부정할수 없지만, 이것이, 무엇보다도 교육에 투자하는 것만이 생존의 길이라는 본능과도 같은 원칙 때문이겠지요.)
1951년이면, 1945년에 2차 대전이 끝났고, 2차 대전 전후로 유럽에서 나찌의 홀로코스트를 피해 뉴욕에 온 유태인 이민자들이 뉴욕에서 발을 붙이고 살기 위해 아둥바둥 할 때이겠지요. 1951년이면 한국에서는 625 전쟁이 (제가 어릴땐 '육이오'라고 불렀는데 요즘은 '한국전쟁'이란 이름을 많이 쓰는군요) 진행되고 있던 때 입니다. 한반도의 사람들이 전쟁의 고통속을 헤멜때, 뉴욕 거리의 유태인들도 척박한 남의 나라 땅에서 생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을 것입니다.
브레히트가 위의 글을 발표한 1931년은 미국이 경제 대공황을 겪고 있던 시기이고,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경제난이 휩쓸던 시기이기도 하지요. 1931년의 경제 공황과 1951년의 뉴욕의 유태인들이 오버랩 되는 이유는 시기가 다르지만 그 시절을 살아간 사람들의 곤궁한 삶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브레히트도, 벤 샨도 '책'의 '교육'의 '자발적인 공부'를 삶을 살아가는 어떤 해법으로 글에서, 그림에서 제안을 합니다.
오늘, 학교에서 어떤분의 인생상담을 잠시 하게 되었는데요. 가끔 저에게 '지금 공부해도 될런지, 어떤 판단을 하면 좋을지' 두루두루 묻고 싶어하는 분들이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다 가기도 하는데요. 그래서 그분과, 내가 남들보다 늦게 공부를 진행한 일화라던가, 앞으로의 전망이라던가 그런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묻기도 하다가 문득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제가요, 어느날 돌아보니까, 40넘게 살아오면서, 내가 무엇을 이뤘나 생각을 곰곰해보니까, 내 손에 쥔 것이라고는 알토란 같은 내 가족, 무조건 나를 지지해주는 내 가족하고...그리고...죽어서 관뚜껑 덮을때까지 나를 따라다닐 내 학위이더군요. 애인은 나를 버려도, 내 학위는 나를 버리지 않아요. 나는 재산을 잃을지라도 내 지식을 잃지는 않아요. 남들이 나를 인정해주건 말건, 장농속에서 썩히건 말건, 아무튼 내가 공부한 학위는 내가 죽을때 관뚜껑속에 나하고 같이 묻힐거라는거죠."
결국, 내게 남겨진 것이라고는, 내가 이 지구에 놀러왔다가, 공부한것. 그것이더라구요. 물론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서 '친구'가 남았더라, '애인'이 남았더라, '재산'이 남았더라, '한권의 시집'이 남았더라, 명품 백이 남았더라, '판검사 자식이 남았더라' 하고 다양하게 자신의 것을 살필수가 있겠는데, 내가 내것을 주판알 튕겨서 계산해보니 남은것이 '내가 공부한것, 내가 배운것'이더란 것이지요. 지금 당장 배를 곯고, 지금 당장 직장을 잃는다해도, 내가 깡으로 버틸수있는 기반이 뭔가 생각해보면, 나는 내 지식을 무기로 다시 전쟁터로 나갈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아, 내가 받은 교육이 나의 삶의 무기라는 결론에 이른 것이지요. 물론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중요한 무기가 있을수 있지요. 나로서는 나의 지식이 내 무기이지요. 그것이 박사학위인가, 석사학위인가, 학사학위인가, 고등학교 졸업장인가, 그런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고요, 내가 지구상에서 똑똑하게, 지혜롭게 살아갈 능력을 키워주는것 그것이 교육의 힘이거든요. 내가 핍박받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핍박받는 타인을 돕기위해서라도 나는 영수증을 들여다보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잘못 씌어진 고지서를 보고 따질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브레히트의 시, 제가 종알종알 읊는것중에 또한가지가 있어요 (사실 많지요...)
사실, 이 시에서 "책을 읽는 친구여, 그 책을 내려 놓지 마라"는 역설인지 아닌지 조금 헛갈리는 구석이 있습니다. 행동력을 상실한채 '글이나 읽는' 것을 비판하는 것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갈림길에서도 '책'을 읽으라는 것인지. 개인차원의 구제행위가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된다고 역설하는 싯귀는 오히려, 그럼에도 그것만이 유일한 해법임을 드러내고 마는데요. 책을 던지고 행동하라는 말씀일까요 아니면 책을 읽으라는 말씀일까요? 아무튼, 저로서는 그렇습니다. 우리가 책을 읽건, 책을 덮건, 우리 양심의 소리에 따라서 행동을 하건 행동을 유보하고 사색을 하건간에 '비판정신'은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비판'은 '무관심'보다는 나은 것이지요. 빈민구제를 몸소 실천하는 사람이나, 혹은 '그렇게 해봤자 소용없지'하고 비판하는 사람이나 이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또다른 사람들이 존재하는데요 -- 아예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지요.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지를 거부하거나...마찬가지입니다만. 코헨의 '잔인한 국가-외면하는 대중'에 그런 예가 잘 나와있지요).
단 한장의 그림만으로도, 우리는 벤 샨이라는 작가가, 사회의 밑바닥 빈곤층 (당시 유태인이면 사회 하층민입니다)사람의 삶의 한 장면을 통해서 뭔가 강한 메시지를 전하려 했다는 것을 짐작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미국 사실주의 화풍에서도 Social Realist (사회적 사실주의자) 화가로 분류를 하는 것이지요. 미국미술사 책들마다 Social Realism 을 보는 시각이 조금씩 다르지만, 대부분의 책에서 Ben Shahn (1898-1969) 을 이들의 Social Realist 분류표에 끼워 넣는 편입니다.
벤 샨의 두장의 그림 사이에서.
디트로이트 미술관, 2009년 10월 31일
왼편에 책방그림,오를쪽에 살짝 보이는 큼직한 액자가 클라리넷과 호른 그림.
도시 서민들의 유희 풍경
Handball (핸드볼), 1939
Gouache on paperboard
2009년 9월 뉴욕 현대미술관 (MoMA)에서 촬영
해방이란 무엇인가?
관련 이야기 : http://americanart.textcube.com/85
Liberation (해방), 1945
Gouache on Board
2009년 9월 뉴욕 현대미술관 (MoMA)에서 촬영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http://americanart.textcube.com/196
Franklin Delano Roosevelt, (30 Jan 1882 - 12 Apr 1945)
1944년 제작
Color Lithographic Poster
워싱턴 디씨, 국립 초상화 미술관 (National Portrait Gallery)은 국립 미국 미술관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과 건물을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미음자 건물의 통로를 따라 다니다 보면 초상화관과 미국미술관을 통과하게 되는 구조이지요. 이 작품은 초상화 미술관의 역대 대통령의 초상화들이 걸려있는 한켠에 있는 작품입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1945년에 사망했는데, 이 초상화 포스터 작품은 1944년 작품이군요.
벤 샨은 러시아 유태인 이민자의 아들이었고, 그 자신 사회주의적인 이념을 갖고 있던 화가였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사회주의 사실주의 화가들은 죄다 러시아 출신 유태인들이다 라는 농담섞이 설도 있습니다.) 그는 경제 암흑기에 강력한 국가 주도의 경제정책을 펼치고 노동자들의 권익을 지켜준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을 1930년대 1940년대에 걸쳐서 강력한 지지를 보냈습니다. 그래서 루즈벨트 대통령 시절의 여러가지 미술 관련 사업에 참여를 하기도 했습니다. 위의 초상화 포스터속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아버지와 같이 인자하고 믿음직하게 그려져 있지요.
광부의 아내
Wives of Miners (광부의 아내들), 1947
필라델피아 미술관 소장
(제 사진파일을 실수로 지워버려서...엉엉...언라인에서 빌려왔습니다.)
1947년 3월 25일 일리노이주의 남부 Centralia 의 광산에서 폭파사고로 광부 142명이 매몰되는데 그중 31명이 구조되고 111명이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한 적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당시의 참상을 그린 벤샨의 작품중에, 남겨진 가족에 촛점이 맞춰진 것입니다. 아기를 안은채 의자에 앉아있는 여인도 있고, 깍지낀 손으로 우두커니 서있는 여인도 그려져 있습니다. 문밖의 하얀 마당에는 검은 옷의 사나이 두명이 보입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의 머리위에, 선반같은 것이 있고, 선반에 대충 걸린 옷가지는, 어쩌면 매몰된 광부가 남기고 간 유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꾹다문 입, 강하게 깍지낀 두손. 그것이 이들이 가진 '전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청각예술의 시각화
Composition for Clarinets and Tin Horn, 1951
Tempera on Panel
2009년 10월 31일 디트로이트 미술관 (Ditroit Institute of Art Museum)에서 촬영
벤샨의 그림중에는 악기, 음악을 소재로 한 것들이 종종 눈에 띄는데요, 그는 시각예술 작품속에 청각예술적 요소들, 소재들을 도입시키고 싶었던걸까? 이런 상상을 혼자 해 본적이 있습니다. 이런 악기 그림을 보면, 우리 상상속에 어떤 음악이 흐르지요. 우리의 상상력의 영역까지 그가 닿고 싶었던 것일까요?
그런에 이 그림속에 두주먹을 얼굴에 기댄 이 사람 -- 얼굴이 그려져 있지 않지만, 우리는 얼굴을 상상할수 있지요. 그것도 어쩐지 주먹의 표정으로 - 그가 고뇌에 찬 표정일것이라는 상상을 하게 됩니다. 재미있지요? 우리는 얼굴이 보이지도 않는 사람의 움추린 어깨, 꽉 쥔 주먹, 이런것들을 통해서 이 그림속의 사람이 머리를 쥐어짜듯 인상을 쓰고 앉아있는 것을 상상하게 됩니다. 참 신기하죠?
주먹쥔 손을 통해, 그려지지도 않은 사람의 얼굴 표정을 상상하는가하면
그려진 악기를 통해서 그 악기 소리를 상상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그림을 보는 인간의 상상력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상상력의 주인은 관객이고
벤 샨은, 벤 샨의 '회화 (시각적 예술 장치)'가 그것을 유도해내는거죠.
사람들
Six (여섯), 1952
Tempera on Linen stretched over Plywood
2010년 1월 23일 볼티모어 미술관에서 촬영
저는 이 6인 (여섯) 그림의 배경이 궁금 합니다. 여기 함께 앉아 있는 여섯명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을것입니다. 당시의 어떤 사회적 사건의 주인공들일지도 모르고요. 사연이 궁금해서 자료를 찾아봤는데, 마땅히 이 그림을 설명해줄만한 자료를 찾지 못했습니다. 차후에 자료가 발견되면 이야기를 덧붙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이 사람들의 주먹, 손을 유심히 보는 것만으로 지나치도록 하겠습니다.
인생의 삼단계: 늑대 --> 사자 --> 개
After Titian (티티안 따라하기) 1959
Tempera on Fiberboard
136 x 77.3 cm
2009년 12월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티티안 (Titian, c.1485-1576)은 베네치아의 르네상스기의 화가입니다. 미국 사실주의 화가들 중 티티안의 영향을 받은 이가 다수입니다. 그러면 티티안이 무슨 그림을 그렸길래 티티안을 따라 그려본 것일까요?
http://en.wikipedia.org/wiki/Allegory_of_Prudence
그림을 위에 링크된 위키피디아 페이지에서 빌려왔습니다. 위키피디아의 설명에 따르면, 티티안은 '사려 (prudence)'의 우화를 위의 그림으로 표현해 냈습니다. 세 사람의 얼굴과 세가지 동물의 얼굴이 나오는데요, 오른편에서부터 보면, 유년기에는 늑대, 장년기는 사자, 노년기는 개에 비유 되었습니다.
티티안의 세가지 얼굴에서 노인의 얼굴이 티티안이고 가운데는 아들, 오른쪽은 사촌이라고 합니다. 벤 샨의 그림은 61세가 된 벤 샨, 노년의 벤 샨은 이를 드러낸채 웃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벤샨은 아직 이가 나지도 않은것처럼 보입니다. 티티안의 그림에서는 오른쪽, 유년기의 늑대의 이빨이 보이는데, 벤 샨의 유년기의 늑대는 이빨이 없습니다. (그래서 혹시 이쪽이 노년기인가 고민을 좀 했는데, 머리카락을 보고서야 유년기 노년기를 확실히 구분할수 있었지요). 티티안의 그림에서는 왼편, 노년기에 이빨 빠진 개가 그려져 있는데, 벤 샨의 노년기는 이를 드러낸채 웃고 있는 개가 그려져 있습니다.
61세의 벤 샨에게 노년은 이빨빠진 힘없는 시기가 아니었을겁니다. 세상을 살아본 노년을 맞이하는 화가가 돌아보기에 그의 어린 시절은 이빨이 나지도 않는 어린 늑대 혹은 어린 강아지의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송곳니조차 드러낼 필요도 없던 순수의 시대. 성년이 되어 세상과 겨뤄보고 파도를 겪은 그는 노년을 맞이하면서 삶에 대한 여유와 느긋함과, 미소지을수 있는 정신적 풍요를 찾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티티안에게 노년이 이빨빠진 늙은 개의 양순함이었다면,
벤 샨에게 노년은 권력을 가져본 자의 한가로움, 느긋함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티티안과 벤 샨 그림에서 가장 현격한 차이가 나는 곳은 어디일까요? 저는 벤 샨 그림의 '손'에서 그 차이를 찾고 싶습니다. 벤 샨의 그림에는 깍지 낀 큼직한 손이 그려져 있지요?
손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
위에 제가 미술관에서 사진찍어온 작품들중에서
1. 배움을 찬양함
2. 루즈벨트 대통령 초상화 포스터
3. 광부의 아내들
4. 클라리넷과 틴 혼의 구성
5. 여섯
6. 티티안 따라하기
작품들의 공통점으로 들 수 있을것을 저는 '커다란 손'에서 찾습니다. 제가 구경한 벤 샨의 그림들에서는 기이하게 '손'이 과장되게 그려져 있어요. 특히 루즈벨트 대통령 초상화에는 '대중'을 상징하는 '손들'이 그려져 있지요. 이 그림의 손들은 리베라의 디트로이트 미술관 벽화 (http://americanart.textcube.com/150 ) 를 연상시킵니다.
http://fs.textcube.com/blog/1/13644/attach/XLqmAQGN5t.jpg
제가 썼던 페이지에서 사진을 끌어다 놨는데요. 디트로이트 미술관의 벽화에서 제게 인상깊었던 것이 저 거대한 손들이었습니다. 주먹을 쥐었거나, 뭔가 쥐고 있거나 혹은 펼친, 다양한 사람의 손들. 리베라는 남쪽, 북쪽 벽화의 중앙 상단을 거대한 손들로 장식했습니다.
사실 이 작품을 마친 이후에 리베라가 뉴욕의 록펠러 센터의 벽화 작업을 하러가는데, 그때 벤 샨이 록펠러 센터 벽화 작업에 합류를 하여 리베라의 작업을 돕게 됩니다. 벤 샨 역시 나중에는 독자적으로 여러가지 벽화 작업을 이끌기도 했고요. 그러한 대형 벽화 작업에 리베라의 영향이 있었지요. 글쎄요, 벤샨의 '커다란 손'들이 반드시 리베라 그림의 영향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벤 샨이 그려낸 '손'들의 의미는 리베라의 의도와 흡사한듯 해 보입니다. 리베라의 벽화에서 '손'은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의 상징이었다고 할수 있거든요.
손 - 도구
손 - 노동
손 - 창조
손 - 책을 들고
손 - 아기를 안고
손 - 고뇌하고
손 - 기도하고
사실 우리들은, 저같은 보통사람은 '얼굴'에 신경을 쓰고, 얼굴에 화장을 하고, 얼굴을 좀더 아름답게 가꾸고 싶어하고, 얼굴로 어떤 좋은 인상을 주려고 하지만, 의외로 우리의 '손'이 우리의 얼굴보다 더 많은 표정을 갖고 있을지도 몰라요. 벤 샨의 그림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특히 깍지 낀 손들을 잘 보셔요.
광부의 아내가 깍지낀 손은
(1) 어쩔지 몰라 고민하는것 같기도 하고요
(2) 기도하는 것 같기도 해요
(3) 마음을 단단히 잡기 위한 제스처로 보이기도 하고요
여섯사람의 깍지 낀 손들은 어떤 판결 앞에서 마음을 추스리기 위한 제스쳐로 보입니다. 인생의 삼단계를 그린 '티티안 따라하기' 그림의 깍지 낀 손은 '신중함'을 상징하는 장치 같아요.
어떤가요? 손이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하지요?
어느 사회주의 사실주의 화가의 영광의 세월
Ben Shahn (1898-1969)은 1898년 러시아 유태인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1906년 온가족이 미국의 뉴욕으로 이민을 하여 정착하게 됩니다. 그는 석판화 기술을 익히기도 했고, 한때는 뉴욕대학에서 생물학 공부를 하기도 했었는데, 후에 National Academy of Design 등 미술 학교로 가서 미술 수업을 연마하게 됩니다. 유럽등지를 여행하며 당시의 미술 사조에 눈을 뜨기도 하거니와 유럽의 미술을 익히기도 했는데, 그는 유럽의 미술을 익힌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만의 세계를 개척해 나가지요. 일찌감치 좌익 사회주의 사상에 눈을 돌린 그는 사회 비판적인 작품 Sacco and Venzetti (1932) 사건을 일련의 작품에 담아냄으로써 화단의 주목을 받으며 그의 이름을 일찌감치 세상에 알리게 됩니다. 이 사건은 1920년에 있었던 일로 이탈리아 이민자 였던 두명의 사나이가 온당치 못한 판결을 받고 사형을 당한 일로, 벤 샨은 미국 기성 세대의 위선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래에 문제의 작품 이미지를 빌려다 올렸습니다. 이 작품은 벽화로도 제작되었는데요, 관속에 누워있는 두명의 사나이가 문제의 사코와 벤제티이고, 그의 주변에 서있는 세명의 사나이가 당대에 재판과정에 참여했던 지식인들이라고 합니다. 두명의 시민이 억울한 사형을 당할때, 이를 방치한 지식인들의 '표상'이지요.
http://www.usc.edu/schools/annenberg/asc/projects/comm544/library/images/367.jpg
The Passion of Sacco and Venzetti (사코와 벤제티의 수난), 1931-1932
Tempera
7x4 feet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소장
1932년 이 출세작을 시작으로, 벤 샨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 딜 정책을 지지하고, 리베라의 벽화 작업에 동참을 하기도 하면서 1969년 사망할때까지 영광의 한 세상을 삽니다. 다채로운 미술 활동및, 저술, 강의까지 하면서 당대의 영예를 누렸지요. 사회주의 사실주의 화가로서 미국에서 당대의 영광을 생존시 누릴수 있었다는 것이 신기한 알이지요?
벤 샨의 예를 봐도 그렇고, '사회주의 사실주의' 하면 대개는 '사회주의 (social)'라는 말에서 러시아식 빨갱이 사상을 연상할수도 있겠지만, 미국 화단에서 보였던 '사회주의' 사실주의 운동은 '사회 현상을 비판적으로 보는 선'에서 대개 잠잠해진 편 입니다. 그래서 순수한 의미의 '사회주의'하고는 거리가 있다고 할 수 있지요. 저는 이를 '미국식 사회주의'라고도 정리를 하곤 하는데, 프링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식의 사회주의를 말하는 것이지요. 난세에, 국가 주도의, 국민 복지를 위한, 노동자를 위한, 그런 미국식 사회주의.
제가 수집한 그림을 중심으로한 벤 샨의 페이지를 대충 이쯤에서 정리하겠습니다. 시라큐즈 대학에도 벽화로 존재 한다는 위 작품을 제 눈으로 보고 싶은데 아직 기회가 없었습니다. 훗날 혹시 벤 샨의 문제 작을 볼 기회가 생기면 그때 이 페이지를 업데이트 하도록 하겠습니다.
2010년 1월 29. RedFox
Horace Pippin (1888-1946) 의 작품들을 미국의 미술관에서 만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가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았고, 그리고 그가 '화가'로 알려지고, 화가로 활동한 기간이 극히 짧기 때문입니다. Horace Pippin은 '모세 할머니 (http://americanart.textcube.com/93)' 와 마찬가지로 어린시절부터 가난하여 미술 교육이나 정규 학교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성장했으며, 홀로 취미삼아 그림을 그렸고, 그러다가 어느날 뒤늦게 그의 예술성이 눈에 띄어 미국 미술사에 이름을 올리게 된 평범한 이웃같은 사람입니다.
겨울 저녁의 노래
피핀의 삶과 예술을 정리하기 전에, 우선 다음 세장의 그림들을 보시겠습니다. 실내 (1944), 기도하기 (1943), 도미노게임 하는 사람들 (1943). 제작 년도로 따지면 '실내'가 가장 뒤로 가야 마땅하겠지만, 저는 '실내'라는 작품을 제일 앞에 배치시켰습니다. 이 세편의 작품을 보면서 '공통점'들을 한번 찾아 볼까요?
사진 클릭하시면 큰 이미지로 감상하실수 있습니다.
Interior (실내) 1944
Oil on Canvas
2010년 1월 16일 워싱턴 국립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Saying Prayers (기도하기) 1943
2009년 9월 펜실베이나 Brandywine River Museum 에서 감상. 사진촬영 금지구역이라, 복제품 사온것을 사진 찍음
관련 페이지: http://americanart.textcube.com/46
Domino Player (도미노 게임하는 사람들) 1943
Oil on Composition Board
2009년 9월 워싱턴 필립스 콜렉션에서 촬영
저는 사실, 이 세편의 작품들을 각기 발견한 싯점이 동떨어져있으므로 (2009년 9월, 9월, 2010년 1월) 이것들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는 안중에도 없었는데요. 호레이스 피핀 이야기를 하려고 그동안 갖고 있던 그림 사진들을 나열하다보니 뭔가가 잡히더란 것입니다. 저는 그림 이야기를 하기 위하여 미술사책이나 각종 비평서들을 심심풀이차원에서 대충대충 보기도 하지만, 정작 제가 페이지를 열고 그림 이야기를 할때는, 그림에 집중해서, 그제서야 제가 발견하게 된 사항들을 정리하게 됩니다. (그래서 페이지 열어놓고 몇번씩 덧붙이거나 고쳐쓰거나 하는 일이 발생하지요. 그림보면서 이야기하면서 - 그야말로 현장에서 이야기를 하게 되니까요. 미리 생각한 얘기가 아니라, 지금 자판 두드리면서 생각 나는대로 쓰는거죠.)
위의 세장의 그림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무엇인가를 찾으셨나요? (심심해서 시간을 어떻게 죽일지 모르는 독자라면, 한번 세장의 그림에 발견되는 요소들을 종이에 적어보세요. 그러면 시간이 금방 갈겁니다. 예...제가 이런 식으로 고통의 시간들을 보낼수 있었거든요. 이거 의외로 괜챦은 처방이지요. 헤헤. 자살하려다가, 심심해서 제 페이지 발견하시면, 자살도 포기하고 이거 하게 됩니다. 요소들이 뭐가 있다는거여 대체? 이거나 마저 하고 죽으까? 이러고... 하다보면... 고통이 썰물처럼 슬슬 잊혀질지도 모릅니다.)
자 이 세장의 그림에 뭐가 들어있나요.
1. 네, 창문이 하나씩 있습니다. 창문의 모양도 일정하고, 창문을 가리는 커튼은 일률적으로 거무칙칙한 색입니다.
2. 그 창문을 좀더 들여다볼까요? 그 창틀 자세히 보셨습니까?, 아, 창틀에 허옇게 칠해진것, 저것은 아마도 창틀에 쌓인 눈 (snow)이겠지요. 아 창밖에 눈이 쌓여있나봅니다. 겨울이군요. 음. (아유, 똑똑해! 이런거 발견하셧으면, 스스로를 '난 천재야, 천재야!'하고 외친후 머리를 쓰다듬어주십시오.)
3. 방의 가운데에는 반드시 등잔불이 있고요, 등잔불 옆에는 사발시계 (탁상시계: 우리 할머니는 이것을 꼭 사발시계라고 불렀습니다)가 있습니다. 제가 제작 년도를 무시하고 그림을 현재의 순서대로 차례차례 배치시킨 이유는, 이 시계 때문입니다. '실내(1944)'라는 작품속의 시계는 여섯시를 가리킵니다. '실내' 작품속에는 등잔불 하나, 그리고 구석에 촛불 하나 이렇게 조명용 불이 두개나 있군요. 기도하기와 도미노 그림속의 시계는 여덟시를 가리킵니다 (물론 모두 저녁 시간대일것입니다.)
4. 방에는 화덕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 화덕은 요리및 난방의 기능까지 톡톡히 해주지요.
5. 화덕 근처에 '물동이 (일명 바께쓰)'들이 반드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실내에 급수 시설이 없을경우, 어디선가에서 물을 길어다 썼겠지요. 저 물을 끓여서 차를 만들고, 설겆이도 하고, 씻기도 했을것입니다. (아, 저도 시골에서 다 저러고 살아서 잘 알지요.)
6. 잘 보십시오, 벽의 어딘가는 금이 가고 깨져 있습니다. 닳고 망가져가는 일상이지요. 원래 우리가 사는 풍경이 어딘가 금가고, 삐그덕대고 닳아 없어지고, 칠이 벗겨지고 그런것 아닌가요. (알란 드 보통의 Architecture of Happiness 라는 책에서 -- 모든 건축물은 완공되는 순간부터 망가져간다는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끊임없는 유지 보수 작업이 기다리는거죠. 서서히 부식되고 침식되고 기울어가는거죠. 우리의 삶도.)
7. 깨진 의자 등받이들도 보이는군요.
8. 그 밖에 실내 풍경에 보이는 자질구레한 도구들을 나열해봐도 재미있는 작업이 될것입니다. 호레이스 피핀이 즐겨그린 실내풍경속의 물품들은 무엇인지. 후라이판도 보이고, 빨래판 같은것도 보이고, 알록달록한 깔개하며... 참 다양한 일상의 물건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들여다볼수록 정겨운 장면이지요.
위의 '실내'와 '기도하기'를 보면, 참 재미있어요. 실내 디테일을 보면 약간 차이가 나지만, 엄마가 머리에 쓰고 있는 스카프의 무늬하며, 두 그림의 주인공들이 동일한 사람들인것처럼 보입니다.
오후 여섯시에, 저녁상을 물리고 엄마는 화덕 앞에 앉아 담배를 한대 피우고 있고, 학교에 다니는 사내녀석은 방 구석에 촛불을 키고 숙제를 하는것 같기도 하고요, 아직 어린 꼬마 여자아이는 인형놀이에 열중해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은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그림을 그리고 있을지도 모르고요. 호레이스 피핀 자신이지요) 창밖은 겨울인듯, 창틀에 눈이 쌓여있고요. 그래서 실내는 더욱 따스하게 느껴집니다. 각자 자신의 생각에 열중해 있는 풍경이지만, 각자 다른 방향을 보고 있는 세사람이 서로 소외되었다거나 서로를 소외시키고 있는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서로에게 의지하며 각자의 상념에 잠겨있는 것이지요.
오후 여덟시, 아이들은 잠옷으로 갈아입고, 엄마 품에 매달려 저녁 기도를 합니다. 여자아이는 엄마품에 매달려 기도하느라 애지중지하던 인형도 발뒷쪽에 떨어뜨려 놓았군요. 이들은 기도를 마친후 잠자리에 들을 것입니다.
오후 여덟시, 아이들이 잠자리로 물러간 후, 혹은 이웃집에서는 사람들이 모여서 도미노 게임을 합니다. 화덕 앞에 앉아 퀼트 작업을 하는 여인네도 보입니다. 전에, 겨울밤에, 우리들이 고모들과 어울려 내기 화투놀이를 할때, 우리 할머니는 호롱불 옆에 앉아 해어진 내복이나 양말을 꿰매셨지요. 바로 그런 풍경입니다. 겨울밤은 그렇게 일찍 찾아들고, 그리고 길었습니다.
9. 아하! (제가 일을 좀 하다가 문득 화면을 들여다봤는데요. 재미있는것을 발견했습니다.) 엄마가 머리에 뒤집어 쓴 스카프, 빨간 바탕에 점박이 무늬가 세장의 그림에 모두 등장하죠? 그러면, 이 세장에 등장하는 스카프를 머리에 뒤집어 쓴 저 사람은 동일인 인걸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오후 여섯시쯤에 화덕 앞에서 곰방대를 피우며 휴식을 취하던 엄마는, 오후 여덟시에 아이들을 품에 안고 저녁기도를 하고, 애들을 잠자리로 보낸후, 어른들과 어울려서 도미노 게임을 하는겁니다. 더불어서, 저 머리에 스카프 쓴 여성은 화덕에서 멀리 앉아있을때는 짙은 색의 두툼한 숄을 두르고 앉아있군요. 아무래도 윗풍도 있고 화덕에서 멀어지면 추우니까요... 자, 세장의 그림이 이렇게 연결되어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지지요?
10. 시간대별로 커튼의 높이가 다른것도 보입니다. 오후 여섯시의 커튼과 오후 여덟시의 커튼 높이가 달라요. 시간이 갈수록 커튼이 내려가는거죠. 호레이스 피핀이 실내 풍경을 그릴때, 그는 어쩌면 굉장히 사실에 입각해서 작업을 했던것 같습니다. 그림 그린 시기가 다른데도 일관성이 있쟎아요. 그 일관성은 ...그의 치밀함에서 오는것일걸요 아마도. 사실에 입각해서 그리는 치밀함. 놀랍죠? 와... 놀랍군요...
Interior (실내 풍경) 세밀하게 들여다보기
제가 재미난거 보여드릴까요?
우선 이 그림이 걸린 위치의 '의미심장'함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이 그림은 국립 미술관의 동관 (East Bldg) - 현대 미술관에 걸려있습니다. 그리고 지하층의 중심부에 있는 이 그림의 주위에는 마티스, 와홀, 잭슨 폴락, 뉴만, 로스코, 등등 20세기 세계 미술및 미국미술의 지배한 대가들이 총 출동해 있습니다. 그 한가운데 우리의 흑인 아저씨 호레이스 피핀, 정규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혼자서 심심풀이로 상자 뚜껑이나 생활 집기에 그림을 그려서 장식하는 것이 취미였던 한 사나이의 그림이 걸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좀 세밀한 부분을 보실까요?
이그림의 벽면을 좀 보십시오. 이 집의 벽면이 도대체 이상한겁니다. 이 그림의 중앙부분, 물동이가 있는 곳에서부터 왼편, 소년이 서있는 구석까지, 저 벽이 도대체 어떻게 된걸까요? 얼핏 보기에 물동이가 있는 곳이 모퉁이같이 생겼거든요. 그런데 모퉁이처럼 줄이 그어진 곳은 거기가 아니고 더 왼편입니다. 양동이가 있는 곳도 모퉁이이고, 줄이 그어진 곳도 또다른 모퉁이 인걸까요?
그래가지고, 피핀이 뭐랄까 착시 현상을 이용해 공간을 뒤틀어 놓는, 뭐 Escher 기법이라도 쓴걸까? 별 고민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시내 나간김에 국립 미술관에 또 가서 그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며 연구를 하다가, 나름 해답을 찾았지요. 바닥에다 시선을 고정시키고 보면, 모퉁이가 저쪽으로 꺾어진 것같이 보이는 회색 삼각형 모양은, 꺾어진 모퉁이 각이 아니고, 테이블에 올려진 촛불 때문에 생긴 테이블의 그림자였습니다. 테이블의 그림자가 선명하게 각을 이뤘던 것입니다. 촛불은 실내가 어두울수록 환하게 느껴지고, 그만큼 그림자도 깊지요. 그러다가 저 혼자 웃고 말았습니다, 물동이와 의자 사이의 바닥에 회색 그림자속에 '쥐구멍'이 하나 뚫려있는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피핀은 쥐구멍까지 그려넣는 관찰력과 여유와 웃음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 이번에는, 아래 부분에서 오른쪽의 노란 동그라미 부분을 들여다보세요. 벽부분에 흰 칠이 되어 있는데, 그 칠 안쪽에 뭔가 보이지요? (ㅎㅎㅎ) 커다란 죽 솥같은 것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제가 추측하기에 원래 여기다가 죽솥을 그렸다가, 나중에 그냥 벽으로, 흰칠을 해버린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죽솥은 희미하게 그냥 거기 남아있습니다. (죽솥의 유령이라고나 할까요). 왜 그런 일화들이 있쟎아요. 밀레나 고호나 이런 화가들이 가난해가지고 캔바스 살 돈이 없어서, 기존 작품에 덧칠을 하고 새 그림을 그리고, 몇번씩 그렇게 그림 연습을 했다고 하지요. 그것을 요즘 현대기술로 연구를 해보면 몇번을 덧칠하고 그렸는지 그런것까지 계산이 된다고도 하고, 그 자료를 바탕으로 밑에 깔린 그림을 대충 짐작해서 복원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들었거든요. 피핀역시 이그림을 그리다가 생각을 바꾸고 덧칠을 하거나 이미 그린 대상을 뭉개버리거나 그러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아, 부분부분으로 잘라봐도 참 아름다운 정경입니다. 색상이나 붓 터치나 서툰듯 정묘하고, 뭐랄까, 기성 화단의 영향을 받지 않고 홀로 성장한 사람의 어떤 개성과 순수함도 느껴지고요.
그러면, 피핀의 실내 풍경속의 창문들은 왜 모두들 하나같이 수직으로 길다란 직사각형 모양일까요? 제가 그 단서가 될만한 자료를 갖고 있습니다. 지난 2009년 9월에 펜실베니아 웨스트 체스터의 피핀의 집을 찾아가서 그가 살던 집을 밖에서 확인해보고, 그가 평생 지나치던 동네 골목길, 마을등을 둘러본적이 있지요. http://americanart.textcube.com/45 페이지에 그 내용이 실려있습니다. 자 이 건물의 두가구중에서 오른쪽 절반이 피핀이 결혼이후 평생 살았던 집입니다. 본래는 그의 아내의 집이었지요. 그의 아내가 아이들과 함께 살던 집인데 피핀이 그녀와 결혼하여 그 집에 함께 살게 된 것이지요. 실제로 가서보면 3층이긴 하지만, 한층 면적이 넓은것은 아닙니다. 그냥 소시민의 집이지요. 창문들이 죄다 수직으로 길쭉한 직사강형이지요? 그림속의 창문는 바둑판 모양의 창틀이 있었는데, 현재의 창은 '현대식' 통유리군요. 손좀 봤겠죠. 피핀이 살던 동네가 궁금하시면 링크 해 놓은 페이지로 이동하시면 됩니다.
http://americanart.textcube.com/45
올드 블랙 조 : 그리운 날 옛날은 지나가고
Old Black Joe (1943)
Oil on Canvas
61 x 76.1 cm
2009년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관련 페이지: http://americanart.textcube.com/40
이 그림에 대한 이야기는 http://americanart.textcube.com/40 에 정리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에이브라함 링컨 : 책과 촛불
에이브라함 링컨이 어떤 정치적 함의를 갖는 존재인가는 사람마다 해석이 다를수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미국의 흑인들에게 링컨은 '성자'와 같은 존재 일 것입니다. 아무래도 상징적으로 흑인 노예 해방에 기여한 사람이니까요 (상징적으로요....실제 역사를 들여다보면 링컨이 성자라서 그렇게 행동 한 것도 아니고, 흑인 노예 해방을 위해서는 무수한 정의로운 사람들의 노력과, 그리고 희생이 있었다고 봐야지요.)
링컨이 흑인들에게 상징적으로 위대한 인물일뿐더러, 호레이스 피핀이 살던 마을 거리를 걷다 보니 에이브라함 링컨의 전기책 (biography)이 그 마을에서 발간이 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그 출판사 건물 앞에서 사진도 찍고 그랬죠. http://americanart.textcube.com/45 그러니 매일 이동네를 오가던 호레이스 피핀에게도 링컨은 각별한 인물이었을겁니다. 그는 여러장의 링컨 그림을 남겼는데요, 아래 그림은 제가 카네기 미술관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Abe Lincoln's First Book (에이브라함 링컨의 첫 책) 1944
Oil on Canvas
2009년 10월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에서 촬영
왜 이런 제목을 달았는지는 저도 잘 알수가 없군요. 에이브라함 링컨이 책벌레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고요, 특히 그의 생모가 사망하고 새어머니로 들어온 분이 링컨의 교육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고 하지요. 소년 링컨과 그 새어머니는 단단히 연결된 애정의 관계였다는 기록을 여기 저기서 볼 수 있습니다. 링컨은 성경책을 달달 외도록 읽고 또 읽었다고도 합니다. 옛날에, 책이 귀하던 시절, 집집마다 갖고 있었던 책이 아마도 성경책이었을걸요. 다른 책은 없어도 성경은 있었겠지요, 기독교 문화권 사회였으니까. 그러니 유일한 그 책을 읽고 또 읽고 달달 외도록 읽었을겁니다. 딱히 그 책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다른 읽을거리가 없으니까요.
(저도 어릴때 이솝 이야기책을 저주하면서 읽던 생각이 납니다. 책이 보고 싶은데 읽을거리가 없으니까, 그나마 집에 한권 있는, 그 너무 짧아서 짜증나는 이솝이야기를 달달 외도록 읽는거죠. 거기 나오는 모든 짐승들을 저주하면서. 왜냐하면 모든 이야기가 반페이지짜리 짧은 얘기라서, 길고 길고 긴 얘기가 그리웠던 거죠. 끝나지 않는 긴 얘기가. 아 그러니 제 블로그 페이지가 길어도 용서하시길. 전 짧은 이솝 얘기를 저주하면서 읽고 읽었던 악몽의 기억이 있어서 아마도 그 트라우마가 아주 심할겁니다.)
이 그림은 호레이스 피핀 아저씨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건 꽤나 상징적입니다. 직접 두개의 투명한 자를 갖고 와서 확인해보셔도 되는데요. 이 그림에 대각선을 그리면 그림의 정중앙에 오는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링컨의 책을 집기 위해 뻗은 왼손 입니다. 링컨의 왼손이 그림의 정 중앙에 있고요, 그 손이 막 책을 집어 들었고요 그리고 그의 지척에 촛불이 켜져있어, 그 촛불의 빛때문에 링컨이 입고 있는 셔츠가 희게 빛납니다. 촛불은 링컨의 왼뺨과 왼팔을 희게 비쳐줍니다. 책(바이블)은 우리 삶의 빛이지요. 촛불 역시 우리 삶의 빛입니다. 링컨은 두가지 삶의 빛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어둠속에서 링컨이 희게 빛납니다.
설마 피핀이 의도했을거라고는 보지 않지만,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틴성당의 천정화, 천지창조에서 손을 뻗치는 아담과 같지 않습니까? 그냥 책을 향해 손을 뻗치는 소년의 이미지가 손을 뻗친 아담을 연상시킨다고요...
그런데요, 그림에는 흑색과 백색이 돋보입니다. 백색은 눈이 부실듯이 하얗게 빛나는데, 그가 발라놓는 흑색이 그 백색을 더욱 빛나게 합니다. 특히 '링컨의 첫 책' 그림은 흑과 백으로만 이루어진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만약에 화면 중앙에 촛불이 그려져 있지 않았다면 이 그림은 어땠을까요?
저는 이 그림을 발견했을때 그 눈부신 흑과 백의 대조와 링컨 머리위의 천장의 사선이나 목조 벽면, 그리고 바닥 마루의 선등을 보면서, 문득 프랭크 스텔라를 떠올렸습니다. 잠시 웹에서 스텔라의 작품을 빌려왔습니다. 검정 물감과 흰 물감으로만 작업한 스텔라의 매우 현대적인 이 작품과, 위의 피핀의 링컨 그림을 비교해보면, 어떤 것이 더 절실하게 다가오나요? 제가 스텔라를 좋아하고, 스텔라 그림을 보면 좋아서 입이 찢어지는 편인데요, 그런데 피핀의 링컨 그림이 스텔라의 현대성을 휙 뛰어넘는다는 느낌이 듭니다. 좀더 현대성이 느껴지고, 그리고 진정성이 느껴집니다. (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아...뭔가 더 절실하다는거죠...아...공부해야돼...잘 설명을 못하겠어..공부 더 해야돼... 한탄 모우드) 아무튼, 예, 그렇습니다. 피핀의 링컨 그림에서 추상미술 작품을 뛰어넘는 추상성을 얼핏 느꼈다는 것이지요. 그 색감에서, 구도에서.
http://images.artnet.com/images_US/magazine/features/tuchman/tuchman7-9-6.jpg
저 링컨 그림을 미술관에서 발견했을때는, 어떤 '충격' 같은것을 느꼈었거든요. "아니! 어떻게! 이렇게 그리지? 어떻게?" 그리고는 입벌린채 멀거니 얼빠진 사람처럼 서있는거죠...
아슴푸레한 기억들
Shell Holes and Observation Balloon, Champagne Sector (상파뉴 지역의 폭탄자국과 관측용 낙하산) c. 1931
Oil on Muslin
2010년 1월 23일 볼티모어 미술관에서 촬영
피핀의 그림이 전시된 (왼쪽에서 세번째) 볼티모어 미술관 미국 미술 전시장
2010년 1월 23일 촬영
볼티모어 미술관 미국 미술실에서 피핀의 그림을 발견 했을때는, 월척을 한 기분이었습니다. 피핀의 그림을 찾아 보기가 힘들거든요. 위의 전쟁터 풍경 그림은 얼핏 보기에 흑백 그림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잔디밭에 초록색이 희미하게 칠해져 있는것을 볼수 있습니다. 무채색 그림은 아닌데, 기묘하게도 흑백 텔레비전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제가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화집을 통해서 그가 남긴 그림들을 살펴보면, 전쟁터 그림중에 이렇게 '흑백 테레비'처럼 보이는 그림들이 여러점 있습니다. 기분이 묘해지지요.
그는 왜 채색화를 그리면서 흑백이 두드러지는 그림을 그렸을까? 혼자 사색을 해 봤는데,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은 - 혹시나 검정, 흰색 유화 물감이 값이 싸서 구하기가 쉬웠던 걸까? 다채로운 색깔 물감을 살 형편이 안되었던것은 아닐까? 뭐, 부유로운 인생이 아니었으니까요.
만약에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면, 무엇이 그를 무채색조의 기억으로 이끌었을까요. 그의 머릿속의 전쟁의 기억은 '암담'했기 때문일까요?
피핀의 일생
1918년에 1차대전에 참전한 그는 프랑스에 배치되었는데, 거기서 부상을 당해서 제대합니다. 제대 한 후에 펜실베니아의 고향으로 돌아와 이미 아이들을 거느리고 있던 중산층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그녀와 평생 해로하게 되는데요, 부인에게 집이 한채 있었기 때문에 그는 집 걱정없이 허드레 일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 집이 위에 소개한 웨스트체스터의 집입니다.
http://www.nga.gov/education/classroom/counting_on_art/bio_pippin.shtm
위사진은 제가 '국립미술관' 웹페이지에서 빌려온 것입니다. (위의 링크를 따라가시면 피핀에 대한 이야기와 작품들을 보실수 있습니다.) 위에 피핀과 그의 부인이 함께 있군요. 피핀을 들여다보시면 그가 오른 손에 붓을 쥐고 있는데 왼손으로 오른손목을 받치고 있지요. 그는 부상을 입어서 오른쪽 팔을 자유롭게 사용할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왼손이 오른손을 받쳐주어야 했습니다. 피핀이 남긴 작품들중에 대형 작품을 볼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의 팔의 제약 때문이라고 합니다.
피핀은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 시절에 교육을 많이 받지 않은 흑인들이 대개 그러하였듯, 잡역부로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 일생을 지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차대전에 참전 했던 것을 제외하고는 평생 그가 태어나 결혼하여 살림을 차린 고향 마을을 지켰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마땅히 그림 그릴 도구를 가져본적은 없다고 합니다. 열살이 되던 해에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미술 대회가 있었는데, 그때 그가 그린 그림이 대상을 받아서 부상으로 미술도구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것이 그가 평생에 처음 가져본 미술 도구였다고 하지요. 피핀은 14세에 뜨문뜨문 다디던 학교를 중단하고 생계의 현장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것으로 정규 교육과는 아주 멀어진 것이지요.
1차대전에서 부상당해 돌아와 고향 마을에서 잡역부로 일하며 살아가던 피핀은 취미삼아 혼자서 그림을 그립니다. 나무 상자위에 그림을 그려서 장식을 하기도 하고, 그것을 마을 시장에서 진열하여 팔기도 했는데, 별로 많이 팔려나가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자신이 그린 그림을 동네 이발소에서 이발료 대신으로 선물한적도 있는데, 이발소집 부인이 그 그림을 싫어했기 때문에 이발소 주인은 그걸 집에다 걸지도 못하고 이발소에 걸어놨다고 합니다 (울며 겨자먹기였던 거죠) 지금 그 작품이 얼마에 거래가 될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실 노릇이죠.
피핀은 극히 우연한 기회에 지방의 미술전에서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됩니다. 그의 예술성을 일찌감치 간파한 사람중에 Andrew Wyethe 의 아버지인, 삽화가 N.C.Wyethe 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지척의 마을에서 살고 있었거든요 (제가 와이어드 스튜디오에서 피핀의 집, 동네까지 자동차로 10분만에 간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버지 N.C.Wyeth 는 피핀의 작품을 보면서 - 나에게도 저렇게 색채를 입힐 재주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한탄을 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피핀은 1940년대에 우연히 그의 천재성이 발견되어 미술 평론가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그래서 잠시 미술학교에서 수업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지역의 화가가 그를 미술 과정에 초대를 해 준것인데요, 거기서 잠깐 그는 서양 여러나라의 미술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고, 인상파 화가들의 화잡도 접하게 됩니다. 그는 화가들중에서 르누아르의 색채를 가장 아름답다고 평했다 합니다. 피카소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하지요. 미술가가 그에게 미술의 '테크닉'을 가르치려고 했을때, 피핀은 이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 [미술 학교는 다닐게. 하지만 그림에 대해서는 간섭하지마. 나는 내가 그리고 싶은대로 그리겠어] 뭐 이런 입장이었다고 합니다. (제가 쌍따옴표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전에 책에서 읽었던 내용을 제 기억을 더듬어 옮긴 것이므로, 직접 인용이 불가하기 때문입니다.)
피핀은 1940년 이후에 미술계에 알려졌고, 그 이후 그의 활동 시기는 짧았습니다. 그는 1946년에 사망했으니까요. 뒤늦게 발견된, 어둠속에 가려진 천재였던 것이지요. 정말 혜성처럼 반짝 하고 나타났다가 사라진거죠. 하지만, 그가 남긴 그림들, 제가 워싱턴 일대에서 발견한 그의 그림들은 얼마나 영롱하게 반짝거리는지... 피핀. 피핀. 피핀. 참 예쁜 이름이죠?
2010년 1월 28일 페이지 대략 완성 RedFo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