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교 셔츠를 맞췄는데, 오늘 도착했다고 조교가 갖다 줬다. 신청을 했던 학생들도 받아서 입고.
내 학교는 워싱턴 지역에 개교한지 2년도 안되는 분교이다. 본교는 다른 주에 있다. 나는 학위 받고 백수질 6개월만에 이 신생 분교의 신생 프로그램을 탄생시키는 일을 맡게 되었다. 이번 봄학기를 마치면 프로그램 탄생 2년이 되는 셈이다. 2년사이에 석사 한명이 배출되어 나갔고, 그리고 이제 대학원생들이 지역 학회에 슬슬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번 주말에 웨스트버지니아에서 열리는 컨벤션에서 일곱명의 내 제자들이 다른 이들과 동등하게 연구 발표를 진행한다. 대학원에 다니는 학생들, 혹은 현직 교사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발표이다. 그래서, 학교가 내 프로그램의 약진 덕분에, 분위기가 고무된 편이다. 신생프로그램이건 뭐건 학생은 공부로 승부 보는것이니까.
내 작은 또하나의 계획은, 이번에 발표한 학생들중에 몇놈을 가을의 국제학회에도 세우겠다는 것이다. 학교가 작아서 연구 환경이 썩 좋지 않고, 그렇다해도, 그래도 환경 탓만을 할수는 없고. 아무튼 공부만큼은 큰 학교 학생들 못지않게 해내야 하는 것이지. 내 학생들은 내 예상이나 기대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듯하다.
그래서 이번 주말에 학회에 발표를 하러 가는 학생 외에도, 컨퍼런스가 뭔지 구경삼아 가는 학생들도 있고, 내 프로그램에서 많은 대학원생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컨벤션에 가기로 했다. ... 그래서 나는 조교를 붙잡고 '셔츠 만들자 셔츠 만들어서 입자'고 노래를 불렀다. 일이 많은 조교가 군소리 않고 이리저리 연락을 하더니 단체셔츠를 맞추기로 하고 내게 디자인을 물었다. 대충 '뻔한' 디자인을 정하고, 가격도 정하고, 신청을 받고 해서 셔츠 한상자가 마침내 도착했다.
연회색 바탕의 면셔츠에 네이비색 (군청색)으로 학교 이름을 왼편 가슴에 새기고, 뒷판에는 크게 새기고.
아직 이름도 미미한 작은 학교이지만,
내 프로그램에서 배출되는 학생만큼은 어딜 가나 당당하게 서게 하고 싶다.
자신이 공부한 학교에 애정과 자부심을 가지고, 어딜 가나 당당할수 있게.
학생들이 학교에 자부심을 갖게 하기 위해서는,
가르치는 선생도 학교를 사랑해줘야 한다.
전에 내가 대학 다니던 시절 (나는 한국에서 칭하는 일류대를 나온 사람이 아니다) - 일류대 출신의 교수들중에 대놓고 수업시간에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을 '무시'하는 경우가 왕왕있었다. 말하자면,"내가 X대에 다닐땐 교수가 수업중에 이런 설명 할 필요도 없었다. 니네들은 도대체 문법부터 가르쳐야 하는거냐?" 뭐 이런 말을 대수롭지 않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지나치곤 했다. 그러면 나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그렇게 잘났으면 X대 가서 교수하지 왜 여기와서 잔치니? 너 X대 교수 못되어서 여기 온거쟎아. 나도 X대 교수 수업좀 받아보고 싶어... 너 말고..."
그때 내가 뼈저리게 겪었기때문에...
설령 지금 내가 소속한 학교가 학계에서 미미한 약체라고 해도, 나는 수업중에 내가 졸업한 학교의 수업 수준과 내가 일하는 학교의 수업수준을 대놓고 비교하는 식으로 죽을 쑤지는 않는다. 단, 학생들에게 가끔 말해준다. "나는 내가 배운것만큼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당신들중의 몇명은 지금 당장 유명대 대학원 수업에 가도 문제 없이 잘 해낼 수준이다... 몇사람은 ... 좀더 노력해야 한다. 실력 없으면 학위도 소용이 없다..."
셔츠가 값도 별로 안비싼데, 입어보니 모양이 단정하고 좋다. 학생들도 만족해하고.
뒤늦게 그것좀 사고싶다는 다른 프로그램 소속 학생들도 있고.
이 셔츠는 프로그램 시작한 이래로 최초의 단체 셔츠다.
우리는 이 셔츠를 입고 '떼거지'로 인근주 학회에 나타날것이다. :) (그들이 몰려온다~)
나는 학생들에게 자부심을 선사해주고 싶다.
(사실 나의 꿈은, 미국에서도 명문으로 알려진 번듯한 대학의 교수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꿈과는 별도로, 나는 내가 소속한 학교를 일류로 만들겠다는 꿈도 갖고 있다. 내가 소속한 곳을 번듯하게 키우는것도 사는 보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소속한 이학교를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껴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스스로 빛나줘야 한다. 나의 학생들이 작은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들이 몰려올것이다.)
자~랑스런 대~ 한.민.국. 해야 하나
답글삭제자~랑스런 Red~ Fox. 해야 하나 고민됩니다 ^^
셔츠입고 떼거지로 나타나면 다들 놀랄거에요
바라는대로 좋은 성과 있기를...
@still - 2010/04/08 03:51
답글삭제응원 감사합니다 still 님. :)
오늘도, 온종일 일하다 퇴근하려는데 학교 강의실 구석에서 발표 자료 만들던 학생들이 '자료 만든것 제대로 되었는지 봐달라'고 해서 그것 좀 함께 다듬어주고 '요기서 조금 더 키우면 박사논문 나오겠다' 응원도 해주고 그랬지요.
답글삭제학생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뭔가 해내려고 눈을 빛내며 애쓰는 것을 보면 - 그 사람들이 나를 지탱하게 해주는 천사같은 존재들 같기도 해요. 내가 학생들을 돕는게 아니라, 학생들이 나를 일으켜 세운다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무럭무럭 자라려고 기를 쓰는 그분들이 내 '자식'같기도 하고. 사제간의 정이 이런건가보다, 어렴풋이 그런 생각도 들고요.
내 은사님이 나를 사랑해주던 방법을 이제야 알것도 같아요. 나도 내 학생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잠시 피었다 지는 꽃처럼, 그렇게 허망한 삶이긴 하지만, 등대처럼 깜박이는 그런 순간들도 아름다운거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