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하고, 사람하고 들여다보는 일이 내 일의 주요 속성일 것이다.
공부하는거하고, 사람 가르치는거 하고, 사람 상대하는일.
최근에 ESL학생들이 특정 강사에 대해서 뭔가 불평이나 '코멘트'를 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들이 내게 와서 하는 이야기는 어느정도 강도에 차이가 있긴 하지만 (누군가는 매우 조심스럽게, 누군가는 드러내놓고 적대감을 표시하는 식으로, 혹은 당장 교체해줬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이들의 불평의 내용은 일관된 면이 있다.
이들의 불만사항을 한가지로 정리하면: "그 강사는 혼자 떠들고 학생들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는 것이다. 그 사람의 문제를 내가 객관적으로 정리하자면
- 학생의 말을 경청하지 않는다.
- 학생의 표정이나 분위기를 살피거나 감지하는데 번번이 실패한다.
- 본인은 자신이 매우 훌륭한 선생이라고 상상하거나 환상에 빠져있다.
학생의 말을 경청하지 않는다는 사례는
- 뭔가 발표 시켜놓고 듣지도 않고 돌아선다
- 수업 자료를 토해내듯 던져주고는 그것으로 끝이다. 관련 활동이나 피드백이 연결되지 않는다.
- 혼자 떠드는 시간이 많다
- 학생의 말이나 발표를 귀기울여 듣지 않고 잡담하다가 발표 끝나면 무조건 잘했다고 칭찬한다.
이 강사는 매우 유려한 뉴욕 영어 구사자이고, 언어를 구사함에 있어 매우 아름다운, 예의바른 화법을 쓰고 있다. 언어 자체는 아주 좋은 모델이다. 그런데, 이 사람의 유려한 언어에 대해서 학생들은 지겨움을 토로하고 있다. 선생이 아무리 아름다운 말씨를 구사하는 좋은 언어 모델이라고 해도, 그것이 '듣기 자료'로 아주 쓸만한 것이라고 해도, 학생들은 그의 말을 지겨워한다. 그의 말에서 '동감'이나 '진정성'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를 나는 교사의 주요 덕목인 rapport 를 형성하는데 실패했다고 평가하는 편이다.
(이 사람의 케이스를 보면, 이 유려한 WASP 영어 구사자의 수업에 학생들이 진저리를 치면서, 아시안 액센트가 여전한, 영어 원어민이 아닌 내가 그들의 수업에 들어와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을 객관적으로 보면, 언어라는 것이, 단순히 아름다운 발음이나 액센트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사례로 분류 해 볼수도 있겠다. 연구 차원에서라도 ESL수업에 일부 시간을 내야 할지도 모르겠다.)
전에, 어떤 입학 희망자를 상담하는데, 이분이 참 할말이 많아 보였다. (난 상담이고 뭐고, 말이 늘어지는 것을 매우 피곤해 하는 편이다. 시간도 없고. 빨리 끝났으면 좋겠고.) 그런데 이 사람이 뭐랄까 할말이 너무 많은 표정이 - 갈증 처럼 보였다. 갈증을 심하게 느끼는 듯한 표정. 그래서,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다 들어줬다. 가끔 추임새만 넣어주고, 그의 시선을 마주 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리고, 가끔 웃어주면서 그냥 들어주기만 했다 (들어주는 일에도 에너지가 많이 소모된다. 들어주는 일은 그냥 가만히 있는게 아니니까. 들어야 하니까...얘기 내용을 정확히 알아듣고, 공감을 표시해줘야 하니까.)
지겹지만 꾹 참고 다 들어주자, 그 학생이 말했다. 들어줘서 고맙다고. 미국에 와서 누굴 만나도 몇마디 밖에 못하고, 내 사정을 충분히 설명을 못해봤는데, 내 이야기를 다 들어줘서 고맙다고. 이제 속이 시원하다고. (하하하)
나 사실 남의말 경청하거나 귀 기울이는 사람은 아니다. 남의 말 듣느니, 성현들의 책에 코를 박는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다. 원래 내 태도가 그렇다, 의미없이 이사람 저사람 만나느니 훌륭한 책 한권 더 보는것이 내 성격에 맞는다. 그런데, 직업상, 사람을 대할때는, '나는 온 마음으로 저 사람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편이다. 들어준다는 것은 온마음으로 저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수업 중에 학생을 대할때는, 전심전력으로 학생 개개인과 만나야 한다. 그래야 뭐가 이루어진다. 그래서 직업 현장에서는 이런 원칙을 지키려 노력한다. 학생들은 내가 혼자 '가르친다'고 강의하는 것보다 토론 시키고, 발표 시키고, 의견을 경청하고 사이사이 잠깐 질문을 던지거나 간단한 평을 하는 스타일을 선호하는 듯 하다. 그래서 그런 강의를 어떤 '정형'으로 이미지화 하는 것 같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온종일 서서 강의를 한다거나, 말을 안들어주거나 그러면 '미치겠다'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학생들은 선생에게서 무언가를 '배우기'보다는 '말'하고 '설명'하고 '생각을 언어로 정리하고' 그것을 확인받고 싶어한다.
그래서 나는 수업중에 별로 말을 많이 안하면서, 주로 듣는 연습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그럭저럭 학생들이 여전히 늘 인원초과로 수강신청을 해주는 고로 밥 굶지 않고 살고 있다.
그런데, 온마음으로 들어주는 일, 참 어려운 일이다.
여전히 더욱 노력해야 한다.
특히나 이런 자세가 직장에서는 그럭저럭 유지되는 것 처럼 보이는데
집에 가면 긴장이 풀리면서 독불장군 행세를 하고 꽥꽥대고, 성질 다 드러내기 때문에 식구들이 애로가 많다...
(남의 말을 듣는것과, 책을 읽은 것과는 거의 동일한 행동이다. 책 읽을때 집중 안하면 읽어도 모른다. 저자와 교감이 불가능하다. 남의 말 들을때 집중하지 않으면 들어도 듣는게 아니다. 역시 교감은 불가능하다.)
말이나 글이나 마찬가지 인가봐요..세련되고 유려해도 진정성이 없다 싶으면 더이상 듣고 싶지도, 읽고 싶지가 않는 걸 보면..
답글삭제그리고 제가 사람말을 잘듣나 생각해보게 돼요..( 반성의 여지가 많아요...)
@사과씨 - 2010/04/23 09:14
답글삭제그게요...'집'에서 가장 통제가 안되는것 같아요. 직장에선 '긴장'하고 '의식'하고 그래서 '서비스'가 이루어지는데, 집에선 그냥 긴장 다 풀어지면서 ...그게 잘 안됩니다.
그래서...가족 사이에 상처주기가 더 빈번한것도 같아요. 물론 가족간에는 상처주고 봉합하고 그러는 일이 빈번하고 '식구끼린데 뭐...'하면서 지나치긴 하는데, 들여다보면 부모 자식 간이나 부부간에도 쌓이는건 쌓이는거죠. 그래서 '부부유별' '부자유친' 해야 하는거겠죠. 결국 '상호존중.' 존중의 제스처로 가장 돈 안들고 쉬운일이 '잘 들어주기'인데, 그게 또 무척 힘들일이기도 해요. 피곤해요 실제로 열심히 들어주려면.
문득 드는 생각 : 나도 남 말 안들어주기로 '집안에서' 유명하지만, 뭐 그냥 '들어주기 워크숍' 하나 해봐도 재밌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