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도령이 하이스쿨에 들어가자마자 학교 신문사에서 학생기자 일을 시작했다. 지금 3년째 기자 활동을 하고 있으니 슬슬 고참이 되어가고 있는듯 하다. 작은 도령은 부유층 백인학생들이 많이 포진한 하이스쿨 신문사에서 유일한 아시아계 비 원어민 학생기자이다. 작은 도령의 부친이나 모친이 모두 학창시절에 방송반이나 신문사 일을 거친 경력이 있어 녀석을 신문사로 유도한 것도 한몫을 했을것이다. 작은 도령은 곰처럼 성실하게 '꾸역꾸역' 일을 꾸려나가는 스타일로 보인다. 녀석의 모친이 신경질적이고 불꽃같이 파르르한 성격이라면, 녀석은 곰같이 느릿하고 둔하고, 질기고 유순하다.
이제 얼마후에 4학년들이 나갈때가 되었으므로, 쥬니어 3학년 기자들중에서 편집장을 뽑게 되는가보다. 우리들은 가끔 밥상머리에서 "야 야 곰딴지야. 네 에미 애비가 둘다 신문사 편장장 출신인데 너도 한번 해봐라" 하고 주문을 한 적이 있다. 기왕에 신문사에서 활동하는거 편집장까지 한번 해보고 졸업을 하라는 주문이었다. 녀석은 가타부타 말이 없이 곰딴지같이 굴더니, 어제는 신문사 편집장 지원서를 작성했다고 한다. 그러더니 녀석이 한숨을 내 쉰다.
곰: 편집장 지원서를 냈는데....안될거 같아요
나: 왜?
곰: 나는 열심히 했는데, 별로 내 공로를 인정하는 것 같지가 않아요.
나: 왜?
곰: 모르겠어요. 내가 잘 눈에 안띄나봐요.
나: 왜? 기사를 못써? 아니면 네가 미국인이 아니라 밀리는거니?
곰: 모르겠어요....내가 제일 열심히 일한거 애들이 아는데, 상급생들이 나 말고 다른애를 지명할것 같다고...누가 가르쳐줬어요.
나: 왜 너말고 다른애 지명한대?
곰: 몰라요. 그 애가 내 파트너라 나하고 함께 일하는데...그애는 미국인이고, 좀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것 같아요.
나: 넌?
곰: 난, 열심히 일 했지요. 그러면 알아줄거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일했는데...
나: ...음...
곰: 여태까지 열심히 일했는데, 편집장 안시켜주면, 일할맛이 안날것 같아요.
나: 배신감 느낀다는 말이냐?
곰: 그건 아니고, 여태까지처럼 열심히는 못할것 같아요. 일은 하겠지만, 대충 할것 같아요...
나: 그러냐? 글쎄...
나는 아들에게 내 경험을 들려줬다. 나는 대학생때 영자신문사 기자를 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일을 꽤 열심히 했다. 영문으로 기사쓰는 나 자신이 근사해보였으니까. 그런데 편집장이 될 생각은 없었다. (난 원래 책임지는 일을 회피한다). 그래서 동기생들사이에서 편집장을 뽑을 시간이 왔을때 후배들을 독려하여 내 친구에게 몰표를 줬다. 내 친구가 리더십이 있고, 편집장을 하고 싶어했고, 그러므로 당연히 그가 편집장을 하는 것이 맞는 것이지. 그래서 내 친구가 내 동기중에서 편집장을 했다. 난 내가 담당한 분야만 열심히 즐기고 있었다. 편집장 일에 관심이 없었다. 내가 편집장을 했던 내 동기보다 열등했던것도 아니고, 심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서 편집장이 되었는가? 우리 동기들이 일을 마치고 모두 퇴진을 하는 시간이 왔을때, 주간교수님이 "야, 너 남아서 일년 더 하고 나가라. 네가 편집장 해라" 이러고 나한테 편집장을 하라고 '명령'을 하셨다. (그때는 교수님 말씀이 하늘이라서 사절이고 거절이고 그런것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편집장질을 일년을 하고 학교를 졸업했다. 그것이 내가 편집장질을 하게 된 이력이었다. 물론 내 책임을 나는 성실하게 완수했다. 그때 주간교수가 내게 일을 맡긴 이유는, 격월간으로 발행하던 신문을 월간으로 발행부수를 늘리면서, 일거리가 늘어나니까 고참 학생기자 하나를 잡아 놓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후에 나는 월간지를 월간 '잡지'로 바꾸는 일에 투입되기도 했었다. 그래서 내 이력에 학교 방송, 학교 신문, 학교 잡지등이 덧붙게 되었다. 그 이력으로 나는 잡지사에서 일을 한적도 있고, 잡지사 칼럼을 쓰면서 용돈벌이를 한 적도 있다.
내가 이것저것 거쳐보니, 내 친구가 편집장을 하던 시절에, 나는 내가 내 친구보다 못났다는 생각을 해본적도 없었고, 내가 편집장을 하던 시절 편집장으로서의 책임 혹은 이따금 누리는 작은 명예의 맛도 봤다. 그런데, 편집장의 이력도, 편집장이 아닌 이력도 내게는 귀한 경험이었다. 동기생이 여럿 있을때 그중에서 편집장은 한명이 뽑히는 것인데, 그러면 나머지 동기생들은 모두 '바보' '머저리'라서 안뽑힌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그런 느낌이 든다면 순간적일것이다. 남들의 시선이 신경쓰이는가? "넌 왜 신문사에서 편집장도 못해보고 졸업을 하는가?"하고 엄마 아빠가 비아냥거릴것이 두려운가? 나는 내 아들이 신문사 편집장에 선출되지 않아도 스트레스 안받는다. 뽑히면 하는거고 안뽑혀도, 일을 즐기는데는 문제가 없다. 일이 좋아서 하는것이지 편집장이 좋아서 하는 짓거리인가?
잘해도 못해도, 내 자식은 내 자식이고, 어딜 갖다 놔도 자랑스러운 나의 곰딴지가 아닌가? 착하고 건강한 나의 곰딴지인데 걱정할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래서 내가 전략을 말해줬다:
1. 일단 편집장을 선출하는 투표권을 갖고 있다는 네 선배들에게 네 의사를 정확히 알려라. 반드시 편집장이 되고 싶다는 의사 표시를 하고, 비전을 제시해라. (멀거니 앉아서 - 나를 알아주겠지 하고 기다리지는 말라.)
2. 결과가 나오면 결과를 깨끗하게 받아들여라. 선출되면 희망이 이루어졌으니 기쁜 일이고, 혹시 다른 친구가 선출되더라도 그 것 때문에 스스로 실망하지는 말라. 그래도 너는 자랑스러운 학생기자인거다.
3. 네가 어떤 결과를 갖고 집에 와도 - 너는 자랑스러운 나의 곰딴지인거다. 나는 네가 편집장이 되건 안되건간에, 너의 가능성을 높이 보고 있다.
녀석이 편집장에 선출된다면 좋겠다. 그러면 녀석에게 '나도 뭔가 할수 있다'는 자신감을 줄것이고, 그리고 그 학교 역사상 처음 배출되는 비원어민(비미국인) 아시아계 편집장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될것이니 좋은 일이고. 여러모로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니 녀석이 편집장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이것은 녀석의 문제를 바라보는 나의 희망사항이고, 결과가 어찌되건 녀석을 튼튼한 나무로 자라날 것이므로 내가 걱정할 일은 없다. 만사 태평인것이지. 두려울것이 없다. 하늘에 영광, 땅에 평화. 때는 꽃피는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