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25일 목요일

소통

 

요즘 하는일. 

한국 -- 몽고 -- 중국 -- 한국출신.  이런 순서대로 학생들이 차례차례 영어로 메시지 전달을 하는 작업을 했는데, 여러가지 재미있는 현상이 발견되어서, 자료 정비하는 중 입니다.  지난해부터 간헐적으로 동일한 작업을 진행해 왔는데, 요즘 데이타 분석을 해보니 유의미한, 일관된 결과가 보이길래,  몇 번 더 진행해서 좀더 데이타를 보강해서. 이론을 세워야.

 

현재 계획은

이 자료를 대충 꾸려서 일단 4월에 지역 컨벤션에서 일부 발표를 하고,

가을에 국제 학회에 나갈때 자료 제대로 보강하고

그 다음에는 제출을. 올 해 안에.

 

 

이제 동영상 편집하고, 자료화 하는데는 '선수'급이 된것도 같군요.  혼자 프로듀서하고, 섭외, 노가다 하고, 편집하고, 분석하고. 원맨쇼의 달인.  맨위에, 열심히 작업하는 RedFox. (맨처음 클립과, 맨 마지막 클립에 한번씩만 등장하는 사람들은 연구자와 도우미.)

 

 

사람의 말이, 참 전달이 안됩니다...

 

2010년 3월 19일 금요일

[Walking] 초승달

2010년 3월 18일 목요일 키브리지 왕복  (7마일)

오후 여덟시포토맥강 그리고 초승달

이사진 내가 봐도 참 좋다 :)

 

 

 

 

오후 일곱시 10분 Fletcher's Cove. 황혼

 

 

 

 

 

 

 

오후 여덟시 키브리지와 알링턴 시가지.

 

 

 

 

대략 왕복 7마일 거리  강변길 A 지점에서 출발 -- 키 브리지앞에서 반환

 

& 3월 15 : 2마일

& 3월 17:  2마일

 

 

한창 걷기 할때는, 매일 몇마일을 걸었는지 정리했었다. 올해는 이것이 가능할지 잘 모르겠다. (일이 분주하다...)  걸을때마다 정리는 해 놓겠다.

 

 

 

2010년 3월 18일 목요일

바위 - 유치환

 

  바위

 

 

                  유치환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린(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 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바위가 되고싶어.  내가 바위가 될 수 있는지, 한 번 시험해 보고싶어. 내가 바위가 되면, 더이상 번뇌는 없을것이지. 다른 생각 않고, 그냥 내가 바위가 되는 일이나 생각해보겠어.

Brooklyn Museum

http://www.brooklynmuseum.org/

 

뉴욕행 고속버스 왕복권을 예매했다.  이번 토요일에 부르클린에 있는 부르클린 미술관에 다녀올것이다.  내가 기획한 '미국미술' 프로젝트를 대충이라도 틀을 마무리 하려면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알지만,  어쩐지, 이번에 안가면 부르클린 뮤지엄에 영 못가보게 될 것 같아서, 메트로폴리탄이나 휘트니를 나중으로 미루고 부르클린으로 향한다.

 

틀을 마무리 하기전에 내가 한번 더 가보려고 계획하는 곳은 맨하탄에 있는

 1. 메트로 폴리탄 뮤지엄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 사진을 집중적으로 찍어갖고 오겠다...)

 2. 휘트니 아메리칸 아트 뮤지엄 (이곳에서는 사진 촬영이 불가해서 욕구불만이 쌓인다.)

 3. Jewish Museum (뉴욕의 쥬이시에 대한 내 부정적인 편견때문에 이곳을 경원시 했었는데, 뒷조사를 해보니 쥬이시 미술가들의 걸작들이 이곳에 있어서, 안 가볼수가 없다...)

 

이 세곳을 나중에 둘러보고 내 프로젝트를 일차 마무리 짓겠다. 4월중에 한번 더 다녀오면 되겠지.   (일을 질질 끌지 않겠다는 강력한 결단!)  아무튼, 내 현재 계획은 한국을 방문하기 전에 미국미술 프로젝트를 대충 마무리를 지어놓고...  한국에 다녀온 후에는 내 본래 연구쪽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결연한. 그러나. 나는 게으르다. (이것은 진리.)

 

 

 

 

저녁 산책

 

 

 

 

내가 기록을 살펴보면, 작년 이맘때는 뻔질나게 포토맥강을 드나들며 걷기 마일리지를 높이는 재미를 붙였었는데, 일년사이에 삶이 좀더 분주해진 것일까? 오후에 퇴근이 늦어져서인지, 강변으로 저녁산책을 나갈 여유가 별로 없다.  그래서 날이 이울면, 개를 끌고 동네 천주교당까지 산책을 나간다. 왕복 2마일 거리. 왕복7-8마일, 두시간 정도는 되어야 걷는 맛이 나는데 2마일 거리는 좀 답답한 느낌을 준다. 그래도 바람이라도 쐬려고 나갔다 온다.

 

전에는 천주교당에 가면 마당에서 놀다가 다시 개를 끌고 돌아오곤 했는데, 요즘은 안에 들어가서 조용히 묵상도 하고, 기도를 하는 시늉도 하고 그런다. 뭐, 들어오지 말라고 가로막는 사람 없으니까... 예배당 안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고 고요해서 잠시 앉아서 사색하기에도 좋다. 

 

어제는 왕눈이를 데리고 예배당 입구 벤치에 앉아서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는데,  예배당 마당에 차를 세우고 중년 남자와 그 딸이 입구쪽으로 다가온다.  남자는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고, 축구화를 신은 반바지 운동복 차림의 여학생은 예배당에 안들어가고 그대신 내 곁에서 멈춰선다.  왕눈이 때문이다. 여학생이 개를 만져봐도 되냐고 묻는다. 왕눈이를 데리고 나가면 사람들이 왕눈이때문에 걸음을 멈추고 말을 거는 일이 많다.

 

여학생은 왕눈이를 만져본 후에도 계속 자리를 떠나지 않고 내 곁에서 종알종알 말을 건다.  나역시 축구를 하는 여학생이 맘에 들어서, 애가 붙임성도 좋아서 서로 죽이 맞아서 이야기를 나눈다.  "너 아빠하고 예배당에 왔는데, 왜 안들어가니?" 내가 물으니, 자기는 일요일에 오는것으로 족한데, 아빠는 가끔 저녁 식사후에 예배당에 와서 머리를 식히고 가는것 같다고 종알거린다.  아빠를 따라 오기는 했으나 예배당에 들어갈 생각은 없고, 나하고 이야기나 하는 편이 좋다는 눈치다.

 

그래서, 나도 어른인데, 정말 머리 식힐 시간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해줬다. 나는 네 아빠를 이해할수 있다. 왜 저녁먹고나서 예배당을 찾았는지. 우리에게는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얼마후 그 아빠가 나왔는데, 여학생이 여전히 내 곁에서 자리를 뜨지 않았으므로, 이제는 그 아빠까지 함께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냥, 객적은, 그러나 산들바람처럼 가벼운. 각자의 인종적 배경이라던가 문화. 여학생은 아빠의 손에 이끌려 자리를 떴는데,저만치 차가 출발하기 전에도 소리 질러 인사를 날렸다. "Bye, See you!"  애가, 붙임성이 정말 좋구나... (혹은, 그 애는 내가 대화상대로 편안했나보다.  내가 인상이 좋은걸까?)

 

며칠전에는 훤칠하고 키가 큰, 머리를 짧게 자른 내 또래 백인여성과 만날 일이있었는데, 사람의 인상이 하도 좋고, 내게 붙임성있게 미소를 보내길래, 그자리에서 친구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이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여러차례 나를 돌아봤다. (너하고 나하고는 생각이 통해. 그렇지?)  나는 어쩌면 그 사람과 친구가 될것도 같다. 내가 의지할수 있는. 물론 나는 모임이 끝나자 마자 보따리 챙겨서 뒤도 안돌아보고 떠나기는 하지만, 앞으로 만날일이 이어질 것이므로, 차근 차근 친구가 되면 될 것이다. '저 사람하고 친구가 되고싶다'는 느낌을 가져본것이 언제였더라?  아마 고등학교때 훤칠하고 근사한 친구를 발견했을때 그런 느낌을 가졌던 것도 같다.  아, 어쨌거나 내게도 '여자친구'가 필요한 것이다. 

 

 

Field Trip: Mount Vernon - 조지 워싱턴의 농장

워싱턴의 저택 실내를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들어간다

 

 

 

 

2010년 3월 17일 세인트 패트릭스 데이 (St. Patrick's Day).  존 폴리트 교수의 주선으로 ESL학생들의 필드트립이 있었다.  장소는 마운트 버논. 미국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의 버지니아 농장과 저택.  미국 전역의 학생들이 워싱턴으로 수학여행을 가면 (한국의 시골 학생들이 서울에 수학여행을 가는 경우와 비슷) 반드시 이곳을 여정에 포함시킨다.

 

폴리트 교수의 부인이 이곳에서 자원봉사 안내를 하기 때문에 미리 자료들을 보내주었다. 학생들은 수업중에 미국 초기 역사와 조지 워싱턴에 대한 공부를 하고, 이날은 폴리트 교수와 부인의 안내를 받을수 있었다.  (나는...프로그램 책임자라서 그냥 격려차원에서...때는 봄이라 바람이나 쐬려고 합류했다가 일찌감치 자리를 떴다.)  가벼운 소풍이 아니고, '임무'로 어딘가를 간다는 것은 역시...재미가 덜하고...부담스럽기도 하다. (뭐든 직장에서 하는 일은 재미가 반동강이 되는것 같기도 하다. 특히 '단체 활동'은 내게는 쥐약이다.)

 

 

 

날씨가, '갑자기 오월' 같은 그렇게 화창하였다.

 

포토맥강이 내려다보이는 뒷마당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학생들.

 

 

힘겨루기를 하는 양들.

 

 

대장간

 

 

산수유.

 

 

마운트버논은 4월이나 5월에 오면 이들이 가꿨다는 온갖 아름다운 화초를 볼수 있다.  산책하기에도 좋고. 

2010년 3월 16일 화요일

[Book] Blind Spots: Why smart people do dumb things

Blind Spots: Why Smart People Do Dumb Things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을땐 (데이타 분석도 해야하고, 발표 자료도 만들어야 하고, 숙제가 많을때) 이럴땐 꼭 다른 분야의 책에 눈이 간다.  (아 고생물학책도 아직 못마쳤는데.) 하지만, 보고 싶을때 보는거지.  보고싶은 얼굴은 내 멋대로 볼수 없어도, 보고싶은 책은 보는거지. 그것이 내게 부여된 한정된 자유를 누리는 방법이 아닌가? (책을 애인으로 삼으면 걱정이 없겠다. 보고싶을때 언제든지 볼 수 있고, 베고 잘수도 있고, 심지어 관뚜껑안에 함께 넣어도 되지 않는가. )

 

 

 

 

 

꿈을 꾸는 아들에게

작은 도령이 하이스쿨에 들어가자마자 학교 신문사에서 학생기자 일을 시작했다. 지금 3년째 기자 활동을 하고 있으니 슬슬 고참이 되어가고 있는듯 하다.  작은 도령은 부유층 백인학생들이 많이 포진한 하이스쿨 신문사에서 유일한 아시아계  비 원어민 학생기자이다.  작은 도령의 부친이나 모친이 모두 학창시절에 방송반이나 신문사 일을 거친 경력이 있어 녀석을 신문사로 유도한 것도 한몫을 했을것이다.  작은 도령은 곰처럼 성실하게 '꾸역꾸역' 일을 꾸려나가는 스타일로 보인다.  녀석의 모친이 신경질적이고 불꽃같이 파르르한 성격이라면, 녀석은 곰같이 느릿하고 둔하고, 질기고 유순하다.

 

 

이제 얼마후에 4학년들이 나갈때가 되었으므로, 쥬니어 3학년 기자들중에서 편집장을 뽑게 되는가보다.  우리들은 가끔 밥상머리에서 "야 야 곰딴지야. 네 에미 애비가 둘다 신문사 편장장 출신인데 너도 한번 해봐라" 하고 주문을 한 적이 있다. 기왕에 신문사에서 활동하는거 편집장까지 한번 해보고 졸업을 하라는 주문이었다.  녀석은 가타부타 말이 없이 곰딴지같이 굴더니, 어제는 신문사 편집장 지원서를 작성했다고 한다.  그러더니 녀석이 한숨을 내 쉰다.

 

 

곰: 편집장 지원서를 냈는데....안될거 같아요

나: 왜?

곰: 나는 열심히 했는데, 별로 내 공로를 인정하는 것 같지가 않아요.

나: 왜?

곰: 모르겠어요. 내가 잘 눈에 안띄나봐요.

나: 왜?  기사를 못써?  아니면 네가 미국인이 아니라 밀리는거니?

곰: 모르겠어요....내가 제일 열심히 일한거 애들이 아는데, 상급생들이 나 말고 다른애를 지명할것 같다고...누가 가르쳐줬어요.

나: 왜 너말고 다른애 지명한대?

곰: 몰라요.  그 애가 내 파트너라 나하고 함께 일하는데...그애는 미국인이고, 좀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것 같아요.

나: 넌?

곰: 난, 열심히 일 했지요.  그러면 알아줄거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일했는데...

나: ...음...

곰: 여태까지 열심히 일했는데, 편집장 안시켜주면, 일할맛이 안날것 같아요.

나: 배신감 느낀다는 말이냐?

곰: 그건 아니고, 여태까지처럼 열심히는 못할것 같아요. 일은 하겠지만, 대충 할것 같아요...

나: 그러냐?  글쎄...

 

 

나는 아들에게 내 경험을 들려줬다.  나는 대학생때 영자신문사 기자를 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일을 꽤 열심히 했다. 영문으로 기사쓰는 나 자신이 근사해보였으니까.  그런데 편집장이 될 생각은 없었다. (난 원래 책임지는 일을 회피한다). 그래서 동기생들사이에서 편집장을 뽑을 시간이 왔을때 후배들을 독려하여 내 친구에게 몰표를 줬다.  내 친구가 리더십이 있고, 편집장을 하고 싶어했고, 그러므로 당연히 그가 편집장을 하는 것이 맞는 것이지.  그래서 내 친구가 내 동기중에서 편집장을 했다. 난 내가 담당한 분야만 열심히 즐기고 있었다. 편집장 일에 관심이 없었다.  내가 편집장을 했던 내 동기보다 열등했던것도 아니고, 심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서 편집장이 되었는가?  우리 동기들이 일을 마치고 모두 퇴진을 하는 시간이 왔을때, 주간교수님이 "야, 너 남아서 일년 더 하고 나가라.  네가 편집장 해라" 이러고 나한테 편집장을 하라고 '명령'을 하셨다.  (그때는 교수님 말씀이 하늘이라서 사절이고 거절이고 그런것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편집장질을 일년을 하고 학교를 졸업했다.  그것이 내가 편집장질을 하게 된 이력이었다. 물론 내 책임을 나는 성실하게 완수했다. 그때 주간교수가 내게 일을 맡긴 이유는, 격월간으로 발행하던 신문을 월간으로 발행부수를 늘리면서, 일거리가 늘어나니까  고참 학생기자 하나를 잡아 놓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후에 나는 월간지를 월간 '잡지'로 바꾸는 일에 투입되기도 했었다.  그래서 내 이력에 학교 방송, 학교 신문, 학교 잡지등이 덧붙게 되었다.  그 이력으로 나는 잡지사에서 일을 한적도 있고, 잡지사 칼럼을 쓰면서 용돈벌이를 한 적도 있다.

 

 

내가 이것저것 거쳐보니, 내 친구가 편집장을 하던 시절에, 나는 내가 내 친구보다 못났다는 생각을 해본적도 없었고,  내가 편집장을 하던 시절 편집장으로서의 책임 혹은 이따금 누리는 작은 명예의 맛도 봤다. 그런데, 편집장의 이력도, 편집장이 아닌 이력도 내게는 귀한 경험이었다. 동기생이 여럿 있을때 그중에서 편집장은 한명이 뽑히는 것인데, 그러면 나머지 동기생들은 모두 '바보' '머저리'라서 안뽑힌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그런 느낌이 든다면 순간적일것이다. 남들의 시선이 신경쓰이는가?  "넌 왜 신문사에서 편집장도 못해보고 졸업을 하는가?"하고 엄마 아빠가 비아냥거릴것이 두려운가?  나는 내 아들이 신문사 편집장에 선출되지 않아도 스트레스 안받는다.  뽑히면 하는거고 안뽑혀도, 일을 즐기는데는 문제가 없다.  일이 좋아서 하는것이지 편집장이 좋아서 하는 짓거리인가?

 

잘해도 못해도, 내 자식은 내 자식이고, 어딜 갖다 놔도 자랑스러운 나의 곰딴지가 아닌가? 착하고 건강한 나의 곰딴지인데 걱정할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래서 내가 전략을 말해줬다:

 1. 일단 편집장을 선출하는 투표권을 갖고 있다는 네 선배들에게 네 의사를 정확히 알려라.  반드시 편집장이 되고 싶다는 의사 표시를 하고, 비전을 제시해라.  (멀거니 앉아서 - 나를 알아주겠지 하고 기다리지는 말라.)

 2. 결과가 나오면 결과를 깨끗하게 받아들여라. 선출되면 희망이 이루어졌으니 기쁜 일이고,  혹시 다른 친구가 선출되더라도 그 것 때문에 스스로 실망하지는 말라.  그래도 너는 자랑스러운 학생기자인거다.

 3. 네가 어떤 결과를 갖고 집에 와도 - 너는 자랑스러운 나의 곰딴지인거다.  나는 네가 편집장이 되건 안되건간에, 너의 가능성을 높이 보고 있다.

 

녀석이 편집장에 선출된다면 좋겠다.  그러면 녀석에게 '나도 뭔가 할수 있다'는 자신감을 줄것이고, 그리고 그 학교 역사상 처음 배출되는 비원어민(비미국인) 아시아계 편집장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될것이니 좋은 일이고. 여러모로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니 녀석이 편집장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이것은 녀석의 문제를 바라보는 나의 희망사항이고, 결과가 어찌되건 녀석을 튼튼한 나무로 자라날 것이므로 내가 걱정할 일은 없다. 만사 태평인것이지. 두려울것이 없다. 하늘에 영광, 땅에 평화. 때는 꽃피는 봄.

 

 

 

 

 

2010년 3월 14일 일요일

[산책] 물구경 그리고 사슴의 숲

어제 오늘 이 도시에는 비가 줄창 내렸다. 저녁 나절에 비가 잠잠하길래, 산책을 나갔다. 체인브리지에서 키브리지까지 강변길 왕복.  (6마일쯤. 두시간)

 

 

 

포토맥 강물이 많이 불어서 강기슭이 물에 잠겼다.

 

 

 

 

 

키 브리지 교각의 수위를 보면 물이 얼마나 불었는지 알수 있다.

 

 

 

나처럼, 사람들이 물구경을 나와 서서 강물이 거칠게 흘러내려가는 것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돌아오는 길에, 내가 전에 '사슴의 숲'이라고 이름지은 그 숲에서 사슴을 '일곱마리'나 보았다. 사슴 한떼가 숲속에 한가롭게 모여 있었다.  어둑어둑한 숲속을 내 미니디카로 찍어 갖고 와 보니, 숲만 보일뿐 내 눈에 선명했던 사슴들이 사진속에 보이지 않는다. 사진속에 희끗한 것, 그것이 사슴의 꼬리 안쪽 털이다.  일곱마리가 나를 한참 보다가 후다닥 뛰어 사라졌다.  나는 사슴을 한마리 한마리 세었다.  '일곱송이 수선화' 노래와 같은 일곱마리 사슴이었다.

 

 

 

비오는날 수선화, 개나리, 야생 크로커스

 

비오는 일요일

일하는 일요일

 

종일 주섬주섬 일을 하다가 비가 그쳤나 나가보니 정원 후미진 구석에서 비를 맞은 수선화가 웃고 있다.  수선화는 나르시스가 죽어서 꽃으로 화했다고 하던가.

 

 

 

 

 

내 창앞의 개나리 나무도 물이 올랐다.

다음주면 개나리가 피겠다.

(노란 빛은 내방 등불)

 

 

 

비를 머금은채 몸을 낮춘 야생 크로커스.

 

 

 

 

 

Rockefeller Folk Art Museum : Williamsburg, Virginia

http://www.history.org/History/museums/abby_art.cfm

 

록펠러 재단에서 윌리엄스버그에 기증한 미술관 건물과, 소장품들.

 

 

 

윌리엄스버그에 위치한 록펠러 포크 아트 뮤지엄에는 이들이 수집한 미국 민화나 민속 공예 제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건물 한동의 절반은 Wallace Decorative Arts Musum, 그리고 절반은 Rockfeller Folk Art Museum 으로 사용된다.  1층의 절반에는 18세기 미국의 공립병원 시설의 흔적 일부가 전시되어 있기도 하다.

 

건물 입구에 들어서서, 지하로 내려가면 뮤지엄샵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입장표를 판매한다. 성인 10달러. 윌리엄앤메리 대학 학생은 무료. 이 입장표로 이 건물에 있는 두가지 뮤지엄을 관람할수 있고, 그리고 인근의 Bassatt Hall (록펠러 부부가 별장으로 사용했던 집)을 구경할수 있다. 입장표는 명찰처럼 만들어져 있으므로 달고 다니면 출입이 자유롭고, 하루에도 여러차례 드나들수 있다.

 

 

내가 이 포크아트 뮤지엄을 찾은 이유는, Edward Hicks (http://americanart.textcube.com/184 ) 의 걸작들이 이 뮤지엄에 여러가지 소장되어 있는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순전히 에드워드 힉스의 그림들을 '사냥'하기 위해서 벼르고 있었던 곳인데, 가보니 에드워드 힉스 외에도, 미국의 민화 전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줄 작품들이 쌓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 미국 민화를 공부 하려면 이곳부터 들러야 하는거구나...  (내가 예상치 못했던 세상이 펼쳐져 있었음을 인정한다.)

 

록펠러 부부가 살았던 Bassett Hall 에도 민화들이 빼곡이 걸려 있었고, 이 뮤지엄에도 수백점의 민화가 걸려 있었는데,  나는 이 '서툰' 장난같은 민화를 수집했던 사람의 마음을 아직 잘 모르겠다. 그냥 돈이 많으니까 투자 차원에서 보이는대로 긁어모는걸까?  그게 아니고 민화에 특별히 관심이 있었다면, 왜, 무엇이 그렇게 매력적이었을까?  그리고, 정작 나는 왜 민화에 끌리는걸까? 뭐 이런 고민같지 않은 고민도 생겼다.

 

 

민화 박물관에서 찍은 사진들을 그냥 두서 없이 올려본다. (에드워드 힉스나, 다른 주요 작품은 별도의 페이지에 정리하겠다.)

 

 

 

포크 아트 전시장 입구.  이 홀에 들어가면 왼편에 록펠러 주니어의 부인의 초상화도 걸려있다. 후덕한 인상의 귀부인이다. 노년에는 뜨개질을 하여 군 위문품으로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바로, 이 작품을 사냥하러 갔던 것인데, 이 외에도 아름다운 작품들을 많이 볼수 있었다. 에드워드 힉스의 평화의 왕국.

 

 

 

그냥 보고 있기만 하여도 행복해지는 그림.

 

식민지시절의 어느 저택(!)의 내부를 뜯어다 복원한 실내. 나무 벽에 변화도 그려넣고, 위의 장식도 그냥 그림으로 그린것이다.

 

 

 

동화와 민화의 만남. 어린이를 위한 미술작업실도 한구석에 있다. 오른편 벽의 말 조각품 아래의 풍경화 역시 에드워드 힉스의 작품.

 

 

 

 

 

에드워드 힉스가 '간판'그리는 일을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도대체 어떤 간판을 그렸다는 것인지 내가 잘 이해할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당시의 '간판'들을 구경할수 있었다. 나무판에 그림으로 그린 간판들. 아하, 이런것을 그려주고 돈을 받았구나.

 

 

중앙 계단이 있는 홀.  가운데 보이는 것이 미국의 초상화가 Charles Pearle 이 그린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 (http://americanart.textcube.com/357 ) 스미소니안 초상화 박물관에 걸린 것과 동일한 초상화이다. 오른편에는 길버트 스튜어트가 그린 토마스 제퍼슨의 초상화도 걸려있다. 당시에는 '사진'을 여러장 인화하듯 동일한 초상화 작품을 수십점씩 복제하여 팔았다고 한다.

 

1층에 카페가 보인다.

 

 

 

 

 

시계와 의자 사이의 그림, 역시 에드워드 힉스의 작품이다.

 

 

Williamsburg: Farmers' Market

 

 

 

마침 제가 윌리엄스버그에 간 날이 '토요일'이라서 시가지에 장이 섰습니다.  대체로 미국의 중소도시에서는 금요일이나 토요일 오전에 잠깐 Farmers' Market (농부들의 장) 혹은 벼룩시장 이라는 이름으로 길거리 장이 섭니다.  별로 작물 수확이 없는 이른봄이라서 그런지 농작물은 보이지 않았고, 봄꽃, 화분 종류, 그리고 언제나 있는 잼, 꿀, 집에서 구운 먹을거리등이 나와서 사람들을 반겼습니다.

 

이 거리는 윌리엄스버그의 구 시가지 중심거리인데, 길 양편에 예쁜 가게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고, 바로 지척에 윌리엄 앤 메리 대학이 있습니다. 대학구역에서 이어진 곳에 식민지시대를 연상케하는 - 유럽의 골목길같은 거리 풍경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수백년된 도시의 거리, 그 거리에 잠깐 섰다 사라지는 장터를 보면, 어린시절에 읽었던 동화 '닐스의 신기한 여행'이 생각납니다. 닐스라는 사내아이가 집에서 키우는 거위들을 괴롭히는 못된 장난을 하다가 마법에 걸려서 엄지만한 작은 아이로 변해서, 거위를 타고 철새들과 함께 모험을 하는 이야기 인데요.  그 이야기 속에 천년에 한번 떠오르는 아틀란티스라는 도시가 나옵니다.  천년에 한번 반짝하고 나타나는 도시인데, 그 도시가 다시 현실로 돌아오려면 누군가에게 뭔가를 팔아야 한대요.  사람들이 단돈 한푼이라도 좋으니 돈을 내고 물건을 사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하지만 닐스에게는 돈한푼도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 도시는 다시 사라집니다.)  그 동화에서 가장 슬픈 일화입니다.  그 도시 생각을 하면, 지금도 슬픕니다.  내가 그 도시에 갖혀서 사라진것 같아서.  닐스. 나를 구해줘...

 

 

윌리엄스버그는, 그런 신기루같은 풍경이기도 합니다. 사라진 옛도시. 환상적인 곳이죠.

 

 

 

 

 

 

 

 

 

 

Bassett Hall에서 가이드로 일하시는 분

 

 

윌리엄스버그의 Bassett Hall, 록펠러 주니어의 집에 가면 별채에 안내소가 있는데, 이곳에서 소개 필름을 보고 모여있다가 '가이드'의 안내로 집 구경을 하게 된다.  위 사진에 별채에서 본채 (집)으로 향하고 있는 가이드와 관광객들이 들어있다.  사진 속에, 중앙 출입분에 붙어 서있는, 넥타이를 맨 남자가 보인다.

 

이 남자분은 시각장애인이다. 흰 지팡이를 사용하여 이동을 한다.

 

처음에 바셋홀 안내소에 들어갔을때, 나는 좀 피곤해서 그냥 쓱 둘러보고 자리를 뜰 참이었다.  그런데, 안내소에서 한 사나이가 다가오더니 뭐라뭐라 설명을 하는거였다.  내 피곤하고 무관심한 표정을 그가 읽었더라면 그는 내게 말을 걸지 않았을것이다.  그런데 그는 곧 안내가 시작될거라며 기초적인 설명을 하고는, 내게 입장 표를 샀느냐고 물었다.  내 가슴에 입장표를 달고 있었는데, 입장표를 묻다니...  그의 시선이 불안해보였고, 막연히, 이분이 사시이거나 뭐 그러신가보다고 생각했다. 내 가슴에 입장표 달린것을 못보다니.  그래서 나는 입장표를 이미 이전 박물관에서 구입했다고 설명을 해주었다. 그는 빙긋 웃었다.

 

...그래서...나는 이곳을 그냥 떠날수가 없었다.

 

나는 가끔,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맑은공기를 쐬고 싶은 순간에도 그 곳을 떠나지 못하고 한숨을 쉬면서 머무를때가 있는데 바로 이런 상황에서 그러하다. 얼핏 보기에 저 안내인이 어딘가 불편해보이고, 내가 도와줘야 할 것 같을때, 그때 나는 자리를 못뜬다. 꾸역꾸역 그시간을 버틴다. 왜냐하면, 내가 그자리를 뜨는것이 너무 매정한것 같아서.

 

그래서 시간을 기다리다가 본채로 이동할때 그 때 나는 보았다. 이분이 시각장애인용 흰 지팡이에 의지해서 길을 걷고, 우리를 안내한다는 사실을.

 

나는 여태까지 돌아다니면서 많은 '안내인' '도슨트'들을 겪었지만, 시각장애인의 안내를 받아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는 시각장애인이었지만, 정확히 시각적인 자료들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바셋홀의 벽은 록펠러 주니어의 부인이 모았다는 민화로 빼곡이 채워져있었는데, 그의 설명은 정확했고, 알맞았다. 모자람이 없었다. 충실했다.  그리고 나는 감동받았다. 시각장애인도 시각적인 자료를 시각이 건강한 사람들에게 제대로 정확히 설명하고 안내 할수 있는거로구나.

 

 

하긴, 시각은 우리 지각의 극히 일부이고, 때로 시각이 건강한 사람들도 못보고 지나치는 일들은 아주 많다.  설령 우리 두 눈이 건강하다고 하더라도 우리 눈으로 볼수 있는 세상은 한정적이다. 제한되어 있다.

 

내가 자리를 뜨지 않고 인내심을 갖고, 집의 안내를 받기를 잘했다. 집구경은 사실 내게 큰 흥미는 없었지만, 그 시각장애 안내인과 보낸 시간동안 나는 여러가지 생각을 할 수 있었고, 내게 귀한 경험이었다.

 

 

Williamsburg Bassett Hall : Rockefeller's House

 

http://www.history.org/Almanack/places/hb/hbbass.cfm

 

미국 버지니아주에 있는 도시 Williamsburg (윌리엄스버그)는 미국의 초기 정착민들이 형성했던 도시 제임스 타운과 더불어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세운 도시라고 할 만합니다. 메사추세츠 일대를 '퓨리턴'들이 장악했다면, 버지니아 제임스타운 일대 (윌리엄스버그 포함)는 영국교도(성공회교도)들이 장악했다고 저는 해석하는 편입니다.  버지니아 인근 주였던 펜실베니아주의 필라델피아를 퀘이커교도였던 윌리엄펜이 건설하여 종교적으로 포용적인 정책을 취했던 것도 상기할 만 합니다.  그래서. 어찌보면 이 윌리엄스버그는 '작은 영국'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역사 유적지에 가보면 영국기가 꽂혀있기도 하고요. 처음에 이곳에 온 사람들은 영국 사람들이었고, 자신들을 영국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미국 개국 이전에).

 

 

윌리엄스버그에는  William and Mary College 라는 유서깊은 대학도 자리잡고 있고요, 미국 식민지시절 (미국 독립 이전)의 역사적인 건물들이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식민시절의 흔적이 고스란히 유지된데는 사연이 있습니다.  20세기초반, 미국 최고의 갑부였던 (세계 최고의 갑부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록펠러 주니어 (http://en.wikipedia.org/wiki/John_D._Rockefeller,_Jr.)가 윌리엄스버그에 들렀을때, 그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미국 건국의 역사가 담긴 이곳의 건물들을 복원하면 어떨까?"  그의 속삭임에 록펠러는 Bassett Hall 을 사들여 복원하는 것으로 화답했고, 인근의 수십채의 건물들을 복원하게 됩니다.  록펠러가는 바셋 홀을 그들의 별장으로 사용했고, 인근에 복원된 식민시절의 건물들은 아직까지도 미국의 역사 교육 지역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록펠러 주니어는 스탠다드 오일을 창립한 아버지 록펠러의 상속자였고,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재산을 이런식으로 사회에 환원하는 일에 몰두 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열심히 벌어들였고, 그 아들은 그것을 '의로운 일에' 사용하느라고 바빴던 모양입니다. 소위... 그 아버지가 개같이 벌어서 그 아들이 정승같이 쓴 케이스로 보이는데, 어떤 면에서 보면 개같이 벌어서 개같이 탕진하는 것 보다는 정승같이 써주는 것도 값진 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개 어마어마한 '부'뒤에는 노동자 계급의 고통이 숨어있게 마련인데, 우리의 역사는 노동자들의 고통보다는 재벌이 얼마나 훌륭한 일을 많이 했는가를 기억하는 편입니다. 카네기의 개인사를 봐도, 노동자들을 상대로, 얼굴을 들고 다닐수도 없을정도로 부도덕한 행동을 했음에도, 그의 훗날의 자선사업만을 역사는 기록하는 편이고 대체적으로 착취의 역사는 잊혀지고, 선행의 역사만 기록이 되는데요. 이런 현상을 보면서 - 최소한 나중에라도 사회에 환원이라도 하는 것이 그나마 안하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식으로 스스로 의견조정(compromose)을 해버리게 됩니다.

 

어쨌거나, 부자들이 어떻게 차리고 살았나 구경하는 것이 또한 부자가 아닌 일반인들의 호기심이 아니겠습니까.  부자건 가난뱅이이건 하루 세끼먹는것은 피차 마찬가지이고.  지가 먹어봤자 얼마나 더 먹겠냐구. 이런 위안도 해가면서...

 

록펠러 주니어 부부가 봄 가을이면 와서 조용히 지내다 갔다는 집인데요, 처음에 이건물이 지어질 당시에 이 건물은 '어마어마한 규모'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식민지 초기에 집들이 아주 작고 소박했다는 것이지요).  록펠러가 이 집은 구입하여 보수하여 살 당시에 이 집은 그냥 작은 오두막 수준이었을겁니다. 마치 마리 앙토와테트가 화려한 궁궐이 너무 지루한 나머지 소박한 시골집을 지어놓고 놀이를 즐겼다고 하듯, 재벌 록펠러 부부가 소박한 시골의 집에서 소박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는 것이지요.  얼핏 둘러본 집의 규모는 지금 제가 세들어 살고 있는 이층집 보다도 작은 규모였고, 가령 록펠러의 서재였다는 방이, 제 서재보다 작아보였습니다. 헤헤. (나도 재벌인것이야~   비록 며칠후에 쫒겨나갈것이지만~  )

 

미국 재벌 록펠러 주니어 부부의 시골 별장 실내 사진을 보시겠습니다.  :)

(그런데요, 워싱턴 디씨에도 이런 재벌 집을 공개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개는 실내 사진 촬영이 금지가 되어 있거든요.  이곳은 공개되어서 고맙더라구요. 고맙죠 뭐 사진 찍게 해주니까.)

 

 

 

2층으로 이루어진 실내. 1층에는 양쪽으로 응접실, 거실 개념의 방이 있고, 덧지은 건물쪽에 커다란 식당과 부엌.

2층에 올라가면 양옆으로 침실이 각자 한개씩, 그리고 나중에 덧지은 쪽에 록펠러씨의 서재가 중앙 통로 건너편에 있습니다.

단촐하죠.

 

건물 밖에 부엌용 별채 세동 (훈제실, 바베큐실, 유제품실)이 따로 있고, 온실건물 따로 있고, 손님용 별채 건물 따로 있고, 마굿간과 차고 건물 따로 있고~~ 라라라~ (시간이 없어서 이 건물들을 직접 들여다보지는 못했습니다. 옛날에 우리나라에서도 어르신들은 부엌과 동떨어진 사랑채에서 노닐었듯, 서양에서도 부자들은 냄새나는 부엌 부대시설은 별채에 따로 마련해놓고 유유자적 할수 있었지요 랄랄라~ )

 

 

1층 거실.  록펠러 부인이 수집했다는 민화들이 빼곡이 걸려있었지만,  갑부의 거실치고는 소박한 편입니다. 소파들도 아주 작고...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협소해 보입니다.

 

 

 

우리는 거실에 소파 세트 한세트만 놓쟎아요. 그런데 서양사람들은 거실을 다양한 소파나 의자로 꽉 채우는것 같습니다.

 

 

가장 맘에 들었던 록펠러씨의 구석방. 서재.

 

 

 

 

2층 침실.

 

 

 

 

2층 침실.  이곳은 제가 Blue Room 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요소요소를 파란색으로 통일을 시켜놔서.  메리 커셋의 푸른 의자와 소녀 그림을 연상시키는 실내 분위기였습니다.

 

 

 

제가 유리창과 커텐에 대한 로망이 좀 있지요.  이렇게 창밖으로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는 곳.

 

 

부엌일을 해야하는 여성들의 관심의 대상. 부엌.  아, 나도 이렇게 잘 정돈되고 넓은 부엌이 있다면....(일주일 안에 난장판이 될것이야~ 포기해~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