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리면,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라는 시도 생각나고, 대체적으로 우울하다. 우울한채로 달력에 그려진 앤디 와홀의 환상적인 실크스크린의 색감을 보면서, 그 우울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지난 금요일 오후부터 내린 눈은 토요일에도 내내 내렸고, 마침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높이 쌓인 눈을 보게 되었다. 한 70센티쯤 쌓였으려나. 나는 경기도 용인에서 출생했고, 서울에서 자랐으므로 강원도 산간지방이 아닌고로, 내가 평생에 본 눈이라야 그냥 쌓이다가 녹아버리는 그런 눈이었다. 내가 어릴때 무섭게 쌓인 눈의 기억도, 내가 되짚어 생각해보면, 몸집이 작은 내가 보기에 높아보였을. 우리집 늙은 개 왕눈이를 위해서 눈속에 길을 만들어 줬는데, 왕눈이는 제 키의 두배도 넘는 그 눈'벽' 사이의 통로를 따라 나가서 오줌도 누고 그랬다. 왕눈이에게 눈은 담벼락처럼 높이도 쌓인거였다.
눈속의 방문객
어제, 우리들은 눈이 지속적으로 내려서 눈을 치울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도로에서 우리집 현관문 앞까지 이르는 드라이브웨이도 손을 못대고 그냥 눈만 멀거니 보고 있었다. 그런데 저녁에 누군가가 초인종을 눌렀다. 우리집 입구의 눈도 치우지 못했는데, 누가 이 눈을 헤치고 다가와 문을 두드리는가?
남미계 사람들로 보이는 두어사람이 어깨에 삽을 들러맨체 무릎너머로 쌓인 눈을 징검 징검 밟고 현관문 앞까지 다가 온 것이었다.
"집앞 눈을 치워줄게"
"얼마?"
"125달러."
"미안해. 눈은 우리가 치울래."
"좀 깍아줄게. 얼마를 원해?"
"아니, 우리 식구 많아. 우리가 치울래"
그 남미 노동자는 다시 쌓인 눈을 징검징검 밟고 우리집을 떠났다. 아, 눈이 무섭게 쌓이니까, 눈 치워주는 신종 서비스를 생각해 낸 사람들도 있구나.
아침에 일어나 마당으로 나가 눈을 치웠다. 눈삽은 하나밖에 없었으므로, 나는 김치 담글때 사용하는 스텐레스 '다라이 (tray)'를 들고 나가서 눈을 퍽퍽 퍼다가 정원에 부어댔다. '스댕 다라이'로 눈 치우는 사람, 하하, 나는 코리안이다. 눈을 치우다보니 이웃, 그리스계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는 집 앞을 남미 노동자들이 모여서 치우고 있다. 네사람이 삽을 하나씩 들고 눈을 퍼댄다. 그냥 삽하나씩만 들고. 저 삽으로 몇시간을 '삽질'을 하면 드라이브웨이의 눈을 치울수 있으려나?
나는 눈을 치우는 시늉을 하다가 집으로 들어왔고, 우리집 남자들이 들락거리며 눈을 치웠다. 남자들 셋이 '온종일' 눈을 치웠다. 125달러 달랄때 백달러쯤으로 흥정하고, 그냥 서비스 받을걸 그랬나 생각도 해봤지만, 온가족이 '눈치우는 추억'을 만드는 것도 좋은일 아닐까? 결국 다 치웠으니까.
천사가 나타났다
버지니아의 어떤 아버지와 아들은 눈에 처박힌 어떤 차를 도와주기 위해 다가가다가 제설차에 치어서 그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알지도 못하는 남을 돕기 위해 다가가다가 아버지와 아들이 한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딱하지만, 이 눈속에서 남편과 아들을 한꺼번에 잃은 그 엄마의 마음은 어떨까? 아침에 그 뉴스를 들으면서 나는 우리집 남자들에게 주의를 줬었다:
"괜히 남 돕는다고 도로에서 돌아다니지 말것. 개죽음 당하기 싫으면."
참 안타까운 일이다. 남 돕다가 불의의 사고로 죽는것. 설령 천국이 그들을 기다린다해도, 남아있는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눈을 다 치운 우리집 아이들이, 저녁에 수퍼볼 결승전이 있다며 동네 식품점에 가서 과자를 사오겠다고 내 차를 끌고 나갔다. 드라이브웨이도 치웠겠다. 차가 제대로 잘 빠지는지 점검도 할겸, 큰놈이 내 차를 끌고 나간것인데, 아이들은 한참이 지난후에야 집에 돌아왔다.
작은 아이가 말했다:
"엄마 오늘 천사를 봤어요."
무슨 천사? 도로에 차가 다니기는 하는데 빙판길 투성이라서 내 소형차가 언덕길을 오르지를 못하고 있었단다. 바퀴는 헛돌고 차는 언덕길에서 꼼짝도 안하고, 아이들이 당황해 하자 지나가던 미국인 가족이, 아버지와 딸 둘이 차를 세우고는 나와서, 그 아버지의 구령소리에 맞춰서 일제히 차를 밀어가지고 내 차가 무사히 언덕길을 달려 올라오게 되었다고 한다. 하도 고마워서 차를 언덕 위 안전한곳에 세워놓고 인사를 하기 위해 달려가보니 그들은 벌써 사라지고 없더란다. 그래서 우리 작은 아이는 그 사람들을 '천사'라고 부른다.
애들이 아마 무척 난감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자식들까지 이끌고 나타나 우리집 아이들을 도와준 모양이다.
거기다대고 내가 한 말,
"야, 너 절대 언덕배기에서 남의 차 뒤에서 밀어주고 그러지마. 그러다가 차가 뒤로 밀리면 넌 차에 깔려 죽는거야..." (나, 선생 맞어? -.-)
아, 그 남자분은 딸들을 데리고 직접 남을 돕는 실천을 하신건데, 난 뭐냐... (난 이래서 안돼...) 아니, 아이들은 나보다 영리하다. 아이들은 서로 돕는 미덕을 이미 잘 안다. 아이들은 어려울때 도움 받은 경험을 통해서,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체험했고, 그러므로 그들도 때가 되면 역시 다가가 손을 내밀고 도움을 나눌것이다.
월요일에 하기로 했던 교무회의도 연기했고, 어쩌면 눈때문에 또 연기를 해야 할지도 모르고, 어쩌면 일주일 내내 나는 내방에 처박혀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지난해의 일기를 꺼내 보려다가 그만둔다. 과거를 돌아보는 일이 아직도 쉽지가 않다. 지난해 2월에 나는 행복했을것이다. 지금은 행복하지 않다. 시간을 견디고 있을 뿐이다. 옛날에, 옛날에, 아주 오래 전에 그 해 겨울에도 나는 이런 말을 혼자 했었다.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 하루 하루 살아간다는 말. 운명을 견디기 위해서. 그때, 그 글 덕분에 내 손에는 제법 몫돈이 쥐어졌었지. 그래서 잠시 '행복'했었다. 하하. 아이러니. 절대적인 행복이란건 어차피 불가능한거다. 잠시 행복했었다면, 그것으로도 나는 감사해야 하는거다. 잠시라도 행복했다면.
아, 눈이 쌓이면, 내가 태어나던 날에도 눈이 쌓였었다고 옛얘기를 해주시던 친척 아주머니 생각이 난다. 우리 엄마는 넷이나 되는 자식들중에 내 생일을 까먹고 지나칠수도 있었지만, 그 친척아주머니는 지나치는 말로라도 내 생일을 기억해내곤 하셨다. 그 아주머니는 항렬상 막내딸보다도 한참 어린 나에게 항상 '애기씨'라고 호칭을 했고, 이렇게 눈이 쌓인 겨울날이 되면 말씀하셨다, "그때 애기씨도 이렇게 눈이 펑펑 쌓인날 태어났지. 제사지낸 음식을 갖고 가야 하는데 눈이 허리까지 쌓여서 내가 그 눈을 헤치고 가야했지. 가봤더니만 기집애가 태어났다고 ... 아유 눈이 몹시도 내렸는데..." 그 아주머니는 이제 치매라서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신다고 한다. 왜정때 사범학교까지 나와서 '하늘같은' 선생질까지 했던 집안의 재원이었다는, 종갓집의 종부로 평생을 사시면서, 먼 일가붙이인 내 생일까지 기억해내던 총기있던 분인데, 그 분이 사람을 못알아보신다니, 그러면 내 생일은 누가 기억해줄까? 엄마도, 형제들도, 심지어 우리집 세 남자도 내 생일을 잘 모르는데...
벼락같은 행복이 찾아 올땐, 벼락같은 슬픔도 예상해두는 것이 좋을것이다. 반대로, 벼락같은 슬픔이 찾아오거든, 불꽃같은 기쁨이 올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면 될것이다. 눈이 내리고, 그 자리에 꽃은 필것이다. 사람이 죽어 썩어 문드러진 자리에도 꽃은 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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