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내내 눈(snow)때문에 나는 집에 갖혀 있었고, 그래서 개학전의 몇가지 미팅이 모두 취소되었다. 대학원 강의할 교수들과의 미팅도 취소되었고, ESL 프로그램 강사 미팅도 취소되었고. 이메일로만 필수적인 사항들을 논의하다가, 오늘 개강.
오늘 대학원 개강하면서 내 수업이 아침에 있었는데
동일한 시각에 ESL 프로그램도 개강. 그것도 내가 관리해야 하는 것이라서, 신임 강사에게 첫날 오리엔테이션에 필요한 사항들을 준비해주고 나는 나대로 내 수업을 진행해야 했다. 내 수업 이후에는 그레고리팩이 첫 수업하는 날이라서, 그레고리팩이 차질없이 수업할수 있게 살펴야했고, ESL 오리엔테이션이 잘 되어가는지 감독도 해야 했고. 그래서 첫날 일정이 순조롭게 마무리가 되어갈 무렵, 나는 일에 지쳐가지고 어제까지 내가 앓고 있었다는 것 까지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너무 바쁘니까 아픈것도 잊어버리더라.
큰애의 생일이 내일 모레라서, 퇴근후에 아이를 데리고 쇼핑몰에 가서 생일 선물을 미리 골라서 샀다. 얌전한 면바지 (정장 대용으로 입을만한것)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줄무늬 면 셔츠. 말끔하게 보일수 있게. 우리집 아이들은 너무 멋을 안부려서 (하긴, 우리식구중에 멋부리는 사람이 없다...) 어느때는 애들한테 잔소리를 하기도 한다, "멋도 부리고 좀 그러면서 살아라, 생날라리급은 아니어도 남보기에 준수해보일 정도로 갖춰입는게 좋다." 멋도 부릴줄 알아야 하는거지.
설날 차례를 정성껏 지냈는데, 피로해서 얹혔는지 뭐 다 토하고 울렁거려서 이틀간 두통약과 냉수만 먹고 앓다가 오늘 출근했던 것인데, 울렁증은 가라앉았다. 피곤한건 참겠는데 머리아프고 속 울렁거리면 참기가 힘들다. 아, 이틀전에는 머리가 너무 아파서 머리를 붙잡고 쩔쩔맸었다. 머리가 아프고 울렁거리고. (아마 스트레스 때문이었을거다).
최근에 어떤 문제로, 좀, 돌쇠짓을 했다. 나는 원칙대로 사는 편이고, 내 원칙에 벗어난다고 판단되는 상황에서는 그냥 차분하게 다 집어 던지는 경우도 있다. 위 아래 눈치 안보고, 내 원칙을 선언하는것으로 선을 확실히 긋는 편이다. 멜 깁슨이 감독했던 Passion of Christ 라는 영화에서 보면 예수님이 돌멩이 하나를 집어가지고 흙바닥에 금을 긋는 장면이 나온다. 금을 긋고 뭐 그 유명한 대사를 했을것이다, 너희중에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지라던가? 아무튼 금을 휙 긋는 장면이 나왔었다. 이 금을 넘을 자신이 있으면 넘어보라 이거지. 아무도 그 금을 못 넘었다. 아 그 영화 장면에 견주려는 것은 아니다 (어딜 감히...). 아무튼 나도 내 식대로 금을 그어놓고, 이 금을 넘고 싶으면 어디 넘어봐라~ 했던 것 같다. 일단 그렇게 선언을 해버리자, 상황은 굉장히 단순하게 정리가 되었다. 나는 오히려 여유로워졌다.
옛날에, 내가 아주 어릴때, 아버지가 중책을 맡고 계실때인데, 두번인가, 아버지가 사표를 쓰고 집에서 칩거하신적이 있었다. 우리는 어린 마음에 아버지가 사표를 쓰고 직장을 잃으면, 우리는 무얼 먹고 사나, 걱정이 되었고, 집안은 매우 침울하게 흘러갔는데, 추운 겨울이었는데 아버지는 출근도 안하시고 집에서 이불만 뒤집어 쓰고 며칠이고 꼼짝도 않으셨다. 그 사이에 사람들이 우리집을 드나들었다. 내가 아는 얼굴. 내가 모르는 얼굴. 그리고 마침내, 어느날 엄마가 어린 우리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매우 조심스럽게 주의를 주셨다. 말하자면, 최고 책임자가 직접 아버지를 만나러 나타났던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이런식으로 사표를 내고 칩거하여 최고책임자가 느추한 우리집에 나타난 것을 두번인가 보았다. 아버지는 평생 자신의 직장을 떠나지 않았다 :) 하하. 아버지는 장군처럼 보였다. 우리가 가난한 가운데서도 어떤 자존심을 잃지 않고 프라이드를 갖고 살 수 있었던 근거로는, 가난뱅이 가장이었을 망정 아버지가 우리에게 보여준 장군의 기개.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기운센 천하장사 무쇠로 만든 사람이었다. 겁날게 없었다. 아버지가 있는한은.
돌아보면, 그 때 아버지 속이 얼마나 착잡했을지, 얼마나 막막했을지... 이제 조금 짐작이 간다. 아주 약간 짐작이 갈 뿐이지만.
내가 가끔 단호한 표정을 짓고 어금니를 앙다물때, 나는 어느새 젊은날의 우리 아버지가 된다. 나는 하루 하루 단단해져 간다. 나는 인생의 전투에서 한걸음 한걸음 승리해 나간다. 나는 침착하게 잘 해나가고 있는것으로 보인다. 나는 우리아버지처럼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제 깨닫는다, 아버지가 참 외로우셨겠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우리 아버지만큼만 해 내면, 아마 패자는 되지 않을것이다. 그리고 내 꿈은, 내가 우리아버지보다 더 큰나무로 자라는것이다.
설 차 례
한국의 내 손아래 동서는 "형님이 정말로 미국에서 제사며 차례를 지내셨어요?"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지난 여름에 우리집에 와서 나 사는 것을 보면서. 내가 지내지도 않은 제사를 지냈다고 거짓말할 정도로 실없는 사람으로 보였나? 물론 거짓말을 잘 치긴 하지만, 뭐 제사가지고 거짓말 칠 정도로 그렇게 절박하지는 않았단 말이지. 차롓상이나 제삿상 차리는 것이 대수인가, 배운대로 차리면 되는 것이지.
이번에 차롓상을 차리던중 큰애가 묻는다,
"엄마 왜 우리집은 고조까지 제사를 지내나요?"
"아버지가 종손이니까."
"왜 종손이 제사를 다 지내나요?"
"대개는 그 집안의 큰 아들이 재산을 물려받거든. 그리고 제사를 지내는거지."
"아버지는 물려받은 재산이 없쟎아요."
"아버지가 물려받은 재산이 없는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큰아들이다. 아버지가 큰아들인데 부모가 가난해서 물려받을 재산이 없다는 이유로 제사를 안지내면 너무 치사하지 않니? 응? 그나저나 큰아들아. 나도 재산이 없어서 너 물려줄게 없을듯 한데, 너 나 제사 안지내줄거니? 치사하게..."
"(속을 들킨듯 미안한 표정으로) 아니, 지내드릴게요..."
차롓상을 차리면서 내가 시댁 부엌에서 작은어머니들에게서 들은 시댁의 내력을 기억해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 아이들이 묻는다: "어떻게 아버지 집안 일을 엄마가 더 많이 알아요?" 왜냐하면, 나는 기억의 저장소이고 스토리 텔러니까.
큰애가 발렌타인데이라고 나를 위해서 장미도 한묶음 사왔으므로, 그것도 차례상에 올리고

식당에서 차례를 지내므로 식당이 있는 뒷문밖에 쌓인 눈을 치우는 P국장. 조상님 오시는데 길을 열어드려야 한다고. (조상님이 날아오지 걸어오시는가? ㅎㅎㅎ)

작은애가 절하는데 엉덩이가 솟아 있어서 "야 이놈아 머슴절을 할래? 엉덩이를 종아리에 딱 붙이고 납작 엎드려라!" 호령도 하고. (우리 할머니가 엉덩이가 솟아오르면 머슴절이라고 야단을 치셨었다).

술은, 경주 법주인거다. (어릴때부터 보고 자란것이 경주 법주였다.) 일찌감치 돌아가신 시어머님을 위해서는 맥주도 한잔 올리고 (맥주를 좋아하셨다고).
향은 일심향. (나는 깡패아저씨들중에 팔에 문신으로 일심이라고 새긴 아저씨들 볼때마다 픽 웃는다. 일심. 헤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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