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Farmer's Kitchen 농부의 부엌
ca. 1934 Ivan Albright 이반 올브라이트
Born: North Harvey, Illinois 1897 Died: Woodstock, Vermont 1983
oil on canvas 36 x 30 1/8 in. (91.5 x 76.5 cm.)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Transfer from the U.S. Department of Labor 1964.1.74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1st Floor, West Wing
이반 올브라이트는 일관되게 이런 '분위기'의 그림을 고수한 화가이다. 특히 현재 시카코 아트 인스티튜트 미술관에 있는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이 유명한데 그의 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매우 개성있고 기묘하다. 우리가 어릴때, 문방구에서 값싼 돋보기를 하나 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돋보기를 처음 만난 우리들은 그것을 아무데나 다 갖다 대 본다. 가장 만만한 것이 우리의 손이다. 돋보기를 들고 우리 손을 들여다보면 피부의 '때'도 아주 커다랗게 확대되어 보이고, 피부의 구릉이나 그 사이의 솜털도 상세히 드러나는데, 들여다보면 신기한 맛은 있지만, 썩 기분이 유쾌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돋보기나 현미경을 가지고 우리 피부를 들여다 볼때 우리 눈에 띄는 것은 너무나 생경해서 차라리 피하고 싶은 그런 광경들이다. 아직까지 그런 경험이 없으신가? 지금이라도 아무거나 돋보기를 잡아가지고 손톱끝이나 손가락 피부를 들여다보시라. 지문 결마다 박힌 때라던가, 손톱사이의 때, 혹은 아주 작은 상채기들이 어떻게 고랑을 이루는지 한편 흥미로우면서도 곧 기분이 역해질지도 모른다. 그것이 내가 사랑해 마지 않는 내 연인의 손일지도 모르고... 사랑해 마지 않는 내 연인의 손.
이반 올브라이트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런 화풍을 개발해내고 일관되게 유지했는지 그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한다. 나중에 관심이 동하면 도서관에서 그와 관련된 책을 대출해다가 읽어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가 어떠하였건, 관객으로서, 혹은 그림을 읽어나가는 독자로서 이 그림은 내게도 충분히 '재미있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일단, 특이한 묘사가 눈에 띄고, 그리고 얼핏보면 흉측하고 역겹다는 느낌이 강하지만,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면, 어쩐지 이 인물에 감정이입이 되고 만다. 그리고 '인생 다 그렇지'하며 수긍하게 되고 만다. 무슨 말씀인가하면, 우리가 돋보기를 가지고 손톱사이의 때를 들여다볼때 바로 그 느낌, 인생이 뭐 숭고하지도 않고, 통속적이지만, 뭐 설령 이렇게 돌이킬수 없이 늙어가고 시들어가고 망가져가고 고립되어 간다해도,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이 망가진 삶을 붙들고 꾸역꾸역 견뎌나가고 있다는 것이지. 이 주인공만 이런 상황에 던져진 것도 아니고,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가령 나를 버리고 간 내 님도 그렇고, 모두 마찬가지로 이렇게 사그러져 갈 거라는 엄연한 '사실' 앞에서 나는 한편 안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좋아, 좋아, 모두가 이렇게되고 마는거야. 모두가 이렇게 고립된채로 하루하루 연명하는거야. 모두가 그런거야. 좋다구. 나만 당하는게 아니라 모두가 이꼴이 되는거라구. 그러면서, 안도하게 되는 것이다.
상세히 들여다보자, 현미경으로 손톱의 때를 관찰하듯 그림에 돋보기를 갖다 대 보자

우선, 농가 아낙의 얼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유산처럼 물려받은 얼굴이다. 깊게 흐르는 주림들, 쪼글쪼글한 입가와 눈가. 아, 피하고 싶겠지만, 이것이 세월이, 삶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선물.

그가 입은 앵두무늬 회색 드레스와, 꽃무의 앞치마 섶으로 드리워지는 가슴부분의 늘어짐. 우리는 이 여신의 유방이 힘없이 늘어졌을것이며, 유방 아래 뱃살도 주름지고 늘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옷의 흐름으로 그 주름을 아주 자연스럽게, 사실적으로, 너무나 생생하게, 그러나 은유적으로 잡아 놓았다.

우리가 주의깊게 들여다 보지 않는다면, 화면 구석에 고양이 한마리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지도 못하고 지나갈지도 모른다. 그렇다 방구석에는 줄무늬 고양이도 한마리 앉아있다. 고양이는 주인을 쳐다보는 것도 아니고 졸고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딘지 모를 곳에 시선을 보내고 있다. 고양이의 눈동공이 1자 인것으로 보아 실내는 밝은 상태인듯 하다. 실내가 어둡다면 고양이의 동공이 열려 었을 것이다. 고양이가 거기 있기는 하나, 그 고양이와 아낙과는 별 상관이 없어보인다. 그럼에도 고양이는 거기 있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고양이가 그 구석에 있고, 이 둘 사이에 아무런 유기적 관계도 보이지 않지만, 한편 여기에 고양이가 없다면 섭섭할 것 같기도 하다. 아낙은 고립되어 보이나 혼자가 아니다. 누군가와 함께 있다. 그런데 이들은 서로 아무 상관없이 자신의 일에 열중해 있다. 그래서 이 둘은 서로 고립되어 있음이 두드러지기도 한다.

나의 눈길을 가장 오래 붙잡아 두는 것은 아낙의 저 주름지고 퉁퉁 부은 손가락이다. 내 눈에 아낙의 손가락이 부어있다. 손가락 관절염을 앓고 있는걸까? 이 사람은 주름지고 아픈 손에 손칼을 하나 들고 지금 마악 야채를 한웅큼 다듬으려고 하고 있다. 그릇속에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보아 아낙은 지금 막 작업을 시작하려는 찰나 같기도 하다.
이 아낙의 오른 손이 내 시선을 잡아 끄는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평생 농가의 '아낙'으로 살다 가신 내 할머니는 아주 특별한 오른손을 갖고 계셨다. 그이는 '죽으면 썩을 몸뚱아리를 아껴서 뭐 할건가'를 소신으로 평생 부지런하게 일을 하여 가족을 지킨 분이다. 그런데 우리 할머니의 오른손 손가락 두개가 아주 특별했다. 할머니의 세번째 중지와, 네번째 손가락은 손바닥쪽으로 구부러지지 않고, 그대신 오히려 윗쪽으로 뻐정거리고 서있기만 했다. 할머니가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면 세번째, 네번째 손가락은 주먹을 쥐지 못하고 그냥 위로 뻐정거리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런 증상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었고, 할머니가 삽십대 아낙이었을때 밭에서 낫을 가지고 일을 하다가 그만 낫의 날을 잘 못 잡아서 손가락 인대가 끊어졌다고 한다. 인대가 끓어졌으므로 마음대로 오무리거나 펼수가 없는채로 그냥 뻐정거리게 굳어버리고 만 것이다. 단지 낫 날에 잘 못 베어서 두개의 손가락이 간단히 불구가 되고 만것인데, 할머니는 그 손가락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면서 장수 하셨다.
나는 하필 이 그림에서 농가의 아낙의 손을 발견한 순간, "아 우리 할머니의 손이다" 이러고 혼자 반가워서 멍멍멍 하고 말았던 것이다. 불구가 된 손가락을 간직한채 할머니는 그 손을 늘 바지런히 움직여 밥을 까서 우리를 먹이고, 반찬을 하여 우리를 먹이고, 그 손으로 내 더러운 얼굴을 씻겨 깨끗하게 만들어주시고, 그 손으로 매섭게 나를 나무라기도 하시고, 그 손으로 식구들을 안전한 울타리에서 보호하시다가, 그 손을 곱게 펴고 수의를 입고 지상을 떠나셨다. 할머니는 죽어서야 그 뻐정거린 손가락을 곱게 펼수 있었다.
신비한 미소의 주인공 모나리자나 혹은 바다에서 태어난 비너스의 아름다움 만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아니다. 이 그림속의 농가의 여인은 주름투성이 얼굴로 고립된 채 앉아 전혀 관객과 소통이 안될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지만, 우리는 그의 주름에서, 그의 퉁퉁부은 손가락에서, 그의 고립감에서 위로를 발견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아름다워보이지도 않고 늙고, 추레하고, 주름투성이이고, 웃지도 않는 이 아낙이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이유는 뭘까? 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미'와 '추'의 개념에 대해서 인상쓰고 고민하기도 한다. 인상 쓸것 없다. 주름이나 늘 것이다. 그냥 때로 우리는 아름다움에서 '무심함'을 발견하기도 하고, 때로 '추함'에서 '숭고함'을 발견하기도 하는 것이니. 어떤이는 이런것을 '마술적 사실주의 magical realism'으로 설명을 하러 들기도 한다. 내게는 그냥, 그리운 할머니의 손 쯤으로 기억될 것이다.
19세기와 20세기초를 살았던 사람들은 국적을 막론하고..짠한 기분이 들더군요.. 두번의 세계대전을 겪은 사람들.. 이 그림을 보니, 20세기초 풍요를 구가했던 미국식 자본주의(이를테면, 대량생산된 옷가지, 위 난로나 주전자, 유리병..등)의 그늘 같은 걸 본다하면..너무 헤픈가요 ㅎ
답글삭제이 그림은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에 그려진 것이므로 양차대전후 현대사회의 풍경이라고 할수는 없겠지요.(1차대전후와 2차대전후에 공통적인 면도 있겠지만 그 풍경은 차이가 난다고 보는 편입니다만...)
답글삭제그런데 나로님의 코멘트를 읽으면서 제가 그만 웃고 말았는데, 저는 주로 살아있는 인물, 고양이에 집중해서 그림을 봤는데 나로님은 생물을 감싸고 있는 '환경'을 유심히 보셨군요. 난로라던가, 집기, 대량생산된 옷감. 확실히 시각의 차이가 있지요? 이것을 남자, 여자의 시각차라고 일반화 하면 폭력적이 되어 버릴테고, 그냥 사람들은 한장의 그림을 볼때조차 각기 다른 것을 보고 다른 해석을 한다고 정리 할 수는 있을 것 같아요.
'대량생산'의 미덕은 그 '헤픔'에 있는데, 우리가 해석을 할 때 '헤프'면 안되는 이유라도 있을까요? :]
@RedFox - 2009/09/24 21:01
답글삭제ㅎㅎ 제가 쪼끔 여성적인 면모(외모는 뭐 전혀..ㅎ)가 있는 사람이긴 한데, 물론, 사람먼저 보이지요.. 특히나 노인들에겐 유난히 애정이 많이 가지요. 노인들에 관해 에피소드도 나름 많습니다. 그런 내 정서에 대해 많이 생각해봤는데, 처음엔 '죽음을 앞둔 세대'혹은, 갖은 풍상을 겪은 인생에 대한 관심 등등으로 생각했는데...심리학자들의 이론에 따르면, 어릴 적에 할머니에 대한 교감때문인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무의식이지요.
그리워할 할머니가 있다는 것도 아주 귀한 '유산'이라고 할 수있지요.추억도 살아갈 힘을 주니까.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