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환상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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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와이어드의 아버지 N.C.Wyeth ( http://en.wikipedia.org/wiki/N_c_wyeth ) 는 1907년 펜실베니아의 채즈포드 (Chadds Ford) 에 정착하여 살다가, 집 뒤에 스튜디오도 장만하게 되는데, 그의 다섯 명의 아이들 중 1917년에 막내 앤드루가 이 집에서 태어나게 된다. 앤드루는 몸이 약하여 초등학교에 다닌 기간이 짧다고 전해지는데, 다른 형제들이나 동네 아이들이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는 동안, 그는 그의 집 주변 마을이나 농장들을 쏘다니며 소일했다고 한다. 그는 수풀이나 나무들이 그의 ‘친구들’이었다고 술회 한 바 있다.
와이어드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면, 매우 가부장적이었던 N.C.Wyeth 가 다섯이나 되는 자녀들을 끔찍이 아끼고, 여름의 미국 독립 기념일, 가을의 할로윈데이, 추수감사절, 겨울의 크리스마스에 아이들에게 무궁한 기쁨과 환상을 심어주려 노력한 일화들이 많이 나온다. 미국에서는 지금도 독립기념일이 되면 여기저기서 불꽃놀이를 하는 풍습이 있는데, 소년 시절의 앤드루 와이어드는 신나는 불꽃놀이를 즐기던 꼬마였다. 할로윈데이에는 가족들이 모두 동화 속 주인공이나 마녀 복장을 하고 놀았으며,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키가 육척이 넘었던, 거구였던 아버지 N.C.Wyeth가 직접 산타클로스로 변장을 하고 지붕 위를 돌아다니다가 현관문을 열고 나타나 선물을 놓고 사라지곤 했는데, 앤드루는 산타클로스가 나타나 돌아다니는 상황이 얼마나 ‘무섭고’ ‘기쁜’일이었는지, 얼마나 오싹하게 겁나고 신나는 일이었는지를 훗날 술회 한 바 있다. 와이어드는 자녀들에게 음악, 예술의 아름다움, 자연의 아름다움, 그리고 동화 속 환상의 세계를 선물하고자 애 썼고, 그 결과 다섯 명의 자녀들은 예술가로, 발명가로 출중하게 자라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3대에 걸친 예술가 집안을 탄생 시키게 된 것이리라.
Brandywine River Museum 에서 언덕위로 1마일 올라가면 N.C.Wyeth House 라고 알려진 집이 나타나고, 그 집 언덕 위에 그의 스튜디오가 있다. 집이나 스튜디오 내부는 사진 촬영이 안되고, 안내인의 안내와 설명을 들으며 투어를 할 수 있다. 뮤지엄에서 셔틀버스가 운행된다.
북쪽으로 난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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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과 스튜디오를 안내 해 준 이는 70대의 단정한 신사였다. N.C.와이어드의 스튜디오는 단순한 개인 스튜디오라기보다는 ‘가족 스튜디오’라고 할만도 하고, 그 자체가 미술학교라고도 할 수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앤드루 와이어드 역시 15세 때부터 이 스튜디오에서 그림 연습을 했다고 하는데, 그의 일대기를 읽어보면 앤드루는 아버지에게서 미술 수업을 받았다기보다는 아버지의 ‘문하생’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며 미술 작업을 했다고도 한다. N.C.Wyeth 의 문하생 중에는 그의 딸과 결혼을 하여 사위가 된 사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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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목재 건물의 스튜디오는 한 쪽 벽면이 유리창으로 되어 있었는데, 안내인의 설명으로는 그 큰 유리창 벽은 ‘북향’이라고 한다. 북향으로 창을 낸 이유는, 채광을 위해서 자연 광선이 필요하긴 하지만, 창을 남으로 낼 경우에 시간의 변화에 따라 광선이 변화하므로 안정적으로 그림을 그리기가 힘들고, 가장 안정적인 채광은 북향일 때 가능하다고 한다.
평생을 삽화가 (illustrator)로 살아간, 혹은 삽화가로 알려진 N.C.Wyeth 는 ‘정물화’도 많이 그렸는데, 삽화가들에게 ‘정물화’는 스트레스 해소용 작업이었다고 한다. 소설이나 이야기의 ‘삽화’를 그리는 사람들의 고충은, 항상 어떤 이야기의 장면, 그 장면이 전체 이야기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 그림의 내용이 사실에 부합한지 여러 가지를 고려하여 장면을 선택하고, 사실과 상상력 사이에서 적합한 그림을 그려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면을 만들어 내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가 된다고 한다. 이런 ‘삽화’를 그리는 틈틈이 ‘정물화 (Still Life)’를 그리는 동안에는 어떤 ‘맥락’을 신경 쓸 것도 없이 눈앞에 설치된 정물만 들여다보고 그것만 그리면 되므로 정신적인 ‘휴식’을 취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즐기는 그림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삽화가에게는 삽화가로서의 고통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삽화가’들의 또 다른 고통은, 그것이 ‘순수예술’로서 자리를 못 잡고, 늘 ‘상업화’라는 굴레를 쓰게 되므로 예술가로서 어떤 열패감 같은 것에 시달릴 수도 있고, 생업 때문에 마지못해서 하는 경우도 있다. Norman Rockwell 역시 평생 삽화가로서 사는데 대한 고통을 겪었고, Edward Hopper 역시 생업을 위해 삽화가로서의 삶을 수십 년간 견뎌야 했었다. Sloan 도 그러하였고. (미국의 사실주의적 화가들 중에서 삽화가로 생업을 유지했던 작가들이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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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스튜디오의 벽에는 N.C.Wyeth 가 작업을 했다는 대형 벽화 작품이 있었는데, 안내인이 설명을 마치고 나서 ‘뭐 질문 없는가?’하길래, 내가 물었다, “저 대형 작품을 여기서 그린 후에 어떻게 옮기는가? 내가 아무리 살펴도 저 대형 작품이 나갈 수 있는 출입문이나 틈새가 보이지 않는데.” (나는 늘 매우 실질적인 문제에 주의를 빼앗기곤 한다. 예술가의 스튜디오에서 그의 예술혼을 찾기 보다는, 그림을 어떻게 옮기는가 하는 것이 더 걱정이 되는 것이다.) 안내인의 설명으로는, 벽화이긴 하지만 벽에 그린 것이 아니고 벽 크기의 대형 캔버스에 작업을 한 것이므로, 이런 경우에는 캔버스를 틀에서 분리하여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둘둘 말아서 옮겨다가 벽에 설치를 하고, 운송도중에 그림에 흠집이 생기면 (틀에서 분리하여 둘둘 말았으니 어딘가 상채기가 나겠지), 나중에 화가가 가서 다시 손을 본다고 한다.
스튜디오 앞 마당에서 언덕 아래로 내려다보니 바로 앞의 밤나무에서는 밤송이가 제법 탐스럽고, 스튜디오 옆에는 돌배나무에 돌배가 빼곡했으며, 사과 나무가 줄지어 서있기도 했다. 역시 아름다운 광경이었는데, 어쩐지 이런 풍경들이 – 예를 들어서 밤나무, 돌배나무, 사과나무가 있는 이런 풍경이 마치 내 고향집 마당, 내가 어릴 때 쏘다니던 내 고향의 풍경처럼 비쳐지면서, 문득, 여기가 내 고향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낯선 남의 나라, 이국인의 스튜디오 마당에 서서, 여기가 내 고향 같다는 느낌이 들다니. 아, 이제는 아파트 단지로 뒤덮여서 찾아 가봐도 찾을 수 없는 내 고향이 아니던가? 오히려 이국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나는 내 고향의 향기를 발견해 내기도 한다. 앤드루 와이어드의 풍경화, 혹은 그 풍경 속에 담긴 사람들이 ‘이국인들’이면서도 우리를 감동시키는 이유는, 그의 그림 안에 보편적인 그리움, 보편적인 정서를 담고 있음이라.
앤드루 와이어드는 이곳에서 나고 자랐고, 평생 이곳에서 작업을 했다고 할 수 있다. Maine 주에서 살면서 Christina’s World 를 그리기도 했지만, 메인주와 펜실베니아의 Chadds Ford의 집을 오가며 살았고 역시 채즈포드에서 죽었다. 앤드루 와이어드의 채즈포드 집이나 스튜디오가 어디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매우 삿적인 공간이므로 공개가 안 된 듯 하다. 그러나 그의 집이 Brnadywine River Trail 을 따라 걷다보면 보이기도 한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헬가시리즈 때문에 모델 헬가와의 관계가 스캔들처럼 되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아낼 무렵, 그가 헬가를 그리며 활동하던 이곳 채즈포드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모양이다. 그러자 인근주민들이 이를 불쾌히 여겨 앤드루 와이어드와 헬가에게 다른 곳으로 나가라는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다고 한다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확인 할 길이 없다).

안내인에게 혹시 앤드루 와이어드가 N.C.Wyeth 의 스튜디오에서 헬가를 그린적은 없는가 물으니, 그는 “여기서 두어장 그렸을지도 모른다. 헬가 그림은 이 근방 여러군데서 그려진 것이고, 크뤼너 농장에서 그렸고…” 하는 식으로 얼버무리고 말았는데, 어쩌면 안내인 역시 앤드루 와이어드와 헬가의 스캔들을 N.C.Wyeth 스튜디오와 연결시키는 것을 모욕으로 받아들이거나, 그냥 말하기 싫었을지도 모르겠다. 앤드루 와이어드는 사망하기 전 까지도 가끔 이 스튜디오에 들러 안내인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고 그는 회상했다.
이제 새삼스럽게 앤드루 와이어드의 채즈포드 집이나 그의 개인 스튜디오를 들여다 보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다. 삿적인 공간은 보호되어야 하고, 나는 그가 사랑했던 땅을 밟아보고, 강과, 수풀과, 나무들과, 나지막한 언덕들을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의 그림세계를 본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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