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소 그림
‘이발소 그림’이라는 것이 있다. 이발소 그림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 사전적 정의를 알 길은 없지만, 대개는 대충 그려진 상업화 수준의 그림을 그런 식으로 부르는 것 같다. 나는 어릴 때 보통의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그러하듯 연필로 종이게 뭔가 끄적이거나 그리기를 좋아했고, 이런 심심풀이 그림 그리기 취미는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그래서 어릴 적에 “넌 커서 뭐가 되고 싶으냐?” 하고 물으면 대충 우물거리며, “미술가” 혹은 “소설가”라고 대꾸하곤 했었다. 왜냐하면 나는 공책에 ‘이야기’를 쓰고 그리고 직접 삽화를 그리기를 좋아했으므로. 그러나, 이런 내 취미는 그냥 평범한 아이들이 함 직한 평범한 낙서 수준이었고, 나의 미술 보는 안목은 딱 내 수준 그대로였다.
나의 이런 ‘유치함’과는 달리, 내 주변에는 ‘미술’에 안목이 높은 분들도 많이 있었는데, 우리 아버지는 자신이 안목이 높다고 스스로 판단을 하셨던 것 같다. 미술 대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교수들이 아버지의 친구들이었고, 그래서 우리 집에 한국 현대미술가들의 작품들도 여럿 있고 그랬으므로, 아버지의 자부심을 이해 할 만도 하다. 아버지는 좀 시시해 보이는 그림에 대해서는 ‘이발소 그림’이라고 명쾌한 판단을 내리셨는데, 하필 나는 매우 반항적인 청소년기를 거치고 있었으므로 아버지의 그 ‘이발소 그림’이라는 어휘가 내 귀를 때릴 때마다 불끈불끈 반감이 치솟곤 했다. 그 결과, 나는 아주 맹렬한 ‘이발소 그림’의 변호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거의 모든 종류의 그림을 좋아했다. 우리 집 서가에 꽂혀있던 일본제 세계명화집들속의 대단한 화가들의 작품을 들여다보기도 좋아했지만, 심지어 싸구려 잡지의 삽화도 좋아했고, 눈에 띄는 삽화나 싸구려 그림도 닥치는 대로 좋아했다. 가끔 시장을 지나다 보면 길거리에 액자를 늘어놓고 판매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 길거리의 그림들, 천편일률적인 한국의 풍속화 혹은 정물화, 정체를 알 수 없는 풍경화들을 들여다보는 일도 내게는 아주 흥미로운 일이었다. 별로 문화 예술적인 배경지식이 없는 보통사람들의 집에 가보면, 덩그런 아파트의 거실 벽에, 분명 상업화가가 그렸을, 지금은 잊혀진 시골 풍경, 물동이 이고 가는 한복 입은 여인네, 지게지고 가는 남정네, 개울에서 빨래하는 아낙, 코스모스 뭐 이런 것들이 어우러진 풍경화가 있는데, 글쎄 그 그림을 일년 사시사철 들여다보자면 어딘가 싫증이 날 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다 손님으로 방문하여 이런 그림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기분이 좋아지고 그런다. 그리고 나의 이런 취향은 내가 꽤 유명하다는 미국의 대형 미술관들을 취미 삼아 돌아다니며 보고, 책을 들여다보며 연구를 해도, 그다지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촌스럽고, 내 안목은 여전히 천박하여, 나는 여전히 이발소 그림이 좋고, 남들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칭송을 해도 내가 아니다 싶으면 별로 관심을 표하지 않는 편이다.
이런 내 극히 촌스러운 안목에 들어온 이가 Grandma Moses 라고 일컬어지는 http://americanart.textcube.com/16 http://americanart.textcube.com/17 '모세 할머니’의 그림이었는데, 이에 필적하는 그림을 나는 어느 날 Smithsonian National American Art Museum (스미소니안 국립 미국 미술관)에서 조우하게 되었다.
Old Black Joe
Horace Pippin
Old Black Joe
1943
oil
24 x 30 inch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Museum
하늘은 푸르고 구름은 목화 솜같이 희게 피어 오르고 목화 꽃은 하얗게 피었고, 노인의 수염도 목화처럼 희다. 이 그림을 보면서, 아니 이 그림을 ‘읽으면서’ 어떤 이는 흑인 노예의 지팡이 끝에 묶여 있는 백인 소녀, 이 둘의 관계가 역설적이라고 평하기도 하고, 노예 해방 이후의 새로운 관계정립이 아닌가 해석하기도 한다. 해석이야 보는 사람 각자 하는 문제이고, 이 그림을 그린 Horace Pippin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단지 그는 Old Black Joe 라는 ‘포스터 Stephen Foster, 1860 (1826-1864)’의 노래에서 이 그림의 모티브를 찾은 것으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
노래 Old Black Joe (올드 블랙 조)를 기억하시는가? 나는 지금도 내가 어릴 적 불렀던 그 노래를 흥얼거릴 수 있다
그리운 날 옛날은 지나가고 들에 놀던 친구 간 곳 없으니, 이 세상에 낙원은 어디 이뇨 블랙 조 널 부르는 소리 슬프다……
1절 Gone are the days 내 가슴이 젊고 발랄하던 시절은 가고 없어라 저 멀리 목화밭의 내 친구들도 가고 없어라 여기보다 더 좋은 세상으로 가고 말았어라 그리고 이제 나는 그들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 늙은 검둥이 조를 부르는 소리를 듣노라 후렴: 그래 나도 가네, 나도 가네 이제 나도 구부정하여 고개도 수그러지네 그들이 이 늙은 검둥이 조를 부드러운 음성으로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네 2절 Why do I weep 친구들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한숨지은들 무엇 하나 형식적으로 애도하던 것도 오래 전의 일이라네 이제 나는 이 늙은 검둥이 조를 부르는 부드러운 음성을 듣는다네 3절. 한때 그토록 행복하고 자유롭던 가슴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내 무릎 위에 안아주던 사랑스런 아이들도 벌써 내가 가고 싶어하던 피안의 기슭으로 가버렸지 나는 그들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부르는 소리를 듣네.
When my heart was young and gay.
Gone are my friends
From the cotton fields away.
Gone from this place,
To a better land I know.
I hear their gentle voices calling:
Old Black Joe
Chorus:
I'm coming, I'm coming
For my head is bending low
I hear their gentle voices calling
Old Black Joe.
When my heart should feel no pain
Why do I sigh
That my friends come not again
Grieving for forms
Now departed long ago
I hear their gentle voices calling:
Old Black Joe.
이제 가슴이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데 운들 무엇 하나
Where are the hearts
Once so happy and so free
The children so dear
That I held upon my knee
Gone to the shore
Where my soul has longed to go
I hear their gentle voices calling:
Old Black Joe.
가사를 해석하며 들여다보니, 흑인 ‘조’가 나이가 들어 먼저 떠난 친구, 아이들을 그리면서 저승에서 그들이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는 내용이다. 한편 쓸쓸하기도 하고 한편 따뜻하기도 하다. 혼자 남은 사람의 쓸쓸함과, 죽음을 관조하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노인을 상상하니 따뜻한 느낌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내가 2008년 5월 어느 날 미술관에서 처음 이 그림을 접한 후, 이곳에 갈 때마다 그림 앞에 서서 카메라를 들이대고 이리저리 찍어보려고 시도를 하거나, 혹은 그림을 들여다보며, 작가는 무슨 생각으로 이 그림을 그리고 이 제목을 달은 걸까? 궁금해 하던 그 순간, 어쩌면 내 머릿속에는 아주 오래된, 올드 블랙 조 노래의 멜로디가 흐르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면서, 그림의 제목을 읽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포스터의 그 슬프고 아름다운 멜로디를 떠올리면서 그림에 빠져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그림을 감상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국 미술에 대한 상식이나 교양, 회화에 대한 교양인적 지식, 그러한 것이 아니다. 이 그림은 그림에 대한 교양하고는 상관없이 누구나 다가가서 볼 수 있고, 그리고 얼핏 보기에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 ‘미술대학’에서 혹은 ‘미술학원’에서 그림 공부를 했을 것 같지는 않다. 어쩐지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사람의 그림 같다. 그런데, 그런 그림 한 장이 내 발길을 오래오래 묶어 놓고 있었다. 나는 혼자 종알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발소 그림 같아 보여. 그런데 참 좋아.’
당시 나는 Pippin이 누구인지 몰랐다. 막연하게나마 그림의 대체적인 색감이 어둡다는 것과 (흰 구름, 흰 목화밭이 환하게 그려져 있었지만 어딘지 색감이 어둡고 수상쩍었다), 그림의 주인공이 흑인인 것을 감안하여 대강 흑인 작가의 그림 일 것이라는 상상을 했을 뿐이었다. 그 후에 나는 필립스 콜렉션에서 또다시 매우 매력적인 그림을 만나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동일한 작가의 그림이었던 거다.
(다음에 그 그림과 Horace Pippin 을 소개하는 글을 적어 보겠다)
문제의 그 이발소 그림
trackback from: Horace Pippin: 아무도 모르게 홀로 성장한 천재
답글삭제Horace Pippin (1888-1946) 의 작품들을 미국의 미술관에서 만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가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았고, 그리고 그가 '화가'로 알려지고, 화가로 활동한 기간이 극히 짧기 때문입니다. Horace Pippin은 '모세 할머니 (http://americanart.textcube.com/93)' 와 마찬가지로 어린시절부터 가난하여 미술 교육이나 정규 학교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성장했으며, 홀로 취미삼아 그림을 그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