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 28일 월요일

남자가 거세되면 세상에 평화가 올까?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발견한 두점의 그림이 웃기고, 유쾌하고, 흥미롭기도 했다.  한편은 한마디로 'XX를 잘라버리자'는 메시지가 화면게 가득하고, 또 한편에는 아예 남자가 씨가 말랐다. 여인천하를 그렸다.  두 작품은 같은 층 같은 공간에, 그러나 살짝 비껴간 곳에 전시되고 있었다.  흥미롭게 '구경'을 하긴 했는데, 나로서는 XX를 잘라버린 세상, 혹은 여인천하에서 산다는 것은 영 재미없는 일 일 것이다.  조화롭게 사는것이 좋겠지.  내가 상상해봤는데, 내가 여인천하에서 살아야 한다면, 난 차라리 죽을래. 지겨워서. (하하하.)

 

 

(1)  Paul McCarthy 의 Penis Hat (2001)

 

남성성기와 코를 폭력의 도구인 대포에 비유하여 잔뜩 '낙서'를 해 놓았다. 대략, 남성성과 폭력을 연결시키려는 의도 같다.  일단 주인공도 해적이고, 해적이 쓰고 있는 모자도 남성성기 모양이고.  화면가득 그려져있는 남성성기 그림은 변두리 공중 '변소'에 가면 많이 보이는 스타일이다.  Cut off Penis, Cut Penis (잘라버려)라는 원색적인 문구가 원색적 그림과 아주 잘 어울린다. 

 

이 작품 앞에는 사람들이 늘 일정수 이상이 모여있다. 대개는 '유쾌하다'는 표정으로 슬금슬금 웃고 지나간다. 뭐 말하자면, 대개들 감히 교양인으로서 이런 낙서조차 해볼 엄두도 못내고 살아왔을 터인데, 세계미술의 심장부라고 미국이 주장하는 맨하탄 중심의 현대미술관에서 이런 '원색적' 낙서를 보게 될 줄이야.  확 깨면서, 내심 즐거워지는 것이다. (물론 우리 엄니가 보시면, 아이구 망측스러워라. 저것은 그림도 아니다 - 라고 평가하실 가능성이 크지만...)

 

 

(사진 클릭하시면 그림이 '커'집니다. :-)  )

 

 

 

 

 

 

 

(2) Nicole Eisenman 의 Rading Brook Farm (2004)

 

어느 농장의 풍경인데, 사람 숫자를 일일이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혹시 심심할때  몇명이 나왔나 세어봐도 좋을것이다) 죄다 '여성동무'들 인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중에는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도 있다.  남자는 씨가 마른것 같은데 애는 어디서 만들어왔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동네 여성동지들은 모든 일을 스스로 알아서 하면서 즐겁고 건강하게 사는 것 처럼 보인다.  얼핏 평화로운 낙원처럼 보이는데 -  나는 이동네에서 살 생각은 없다. 나 여자 중학교, 여자 고등학교, 여자대학교, 장장 십년을 여자학교에서 '썩었는데'  그래서 여자들만의 세상따위 지긋지긋하다.  하하하. 난 여자들만의 세상이 싫어요 (이승복 어린이의 -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의 그 간절하고 애절하고 비장한 음성으로 나도 외치고 싶다.)

 

이 그림의 작가는 여성일 것이고, 여성들이 상징하는 '평화,' '보살핌' 뭐 이런 것을 화면 가득 담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화면의 노리끼리한 배경만큼이나 나른하고 졸립고 지루한 분위기를 '내게' 선사한다.  내게 이런 풍경은 그야말로 '지옥'과 다를것이 없다. 하하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나는 여자들만의 세상이 싫어요~ (이 연사! 강력히! 강력히! 촉구하는 바이옵나이다!  -- 반공 어린이 웅변조로~  )

 

 

 

 

 * 단, 비인간적인 성범죄자들, 특히 자기 딸이나 의붓딸이나, 기타 힘없는 가족,  길가는 어린 아이들 상대로 - 도무지 영문도 모르는채 당하는, 자기보호도 불가능한 사람을 상대로 X대가리를 함부로 놀리는 반사회적 동물들은 위의 그림에 나오는대로 그냥 잘라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르는것 이외에 대안이 없다. 대안이. 한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하고 싶으면 우선 이런 범죄피해자부터 보호를 해줘야 하는거다.  이런 범죄 피해자들이 보호도 못받고, 성범죄자들이 인권보호를 받는 나라는 아무리 잘살아도 선진국대열에는 들수가 없는거다.  김구선생이 가꾸고 싶었던 아름다운 나라는 이런 나라가 아니었던거다.

 

 

 

 

 

 

 

미국미술사: 시대별 주제 정리

그동안 틈틈이 미국사와 미국미술의 발전사를 살폈는데, 이제 어떤 전체적인 '지도'가 필요한 시기인 듯 하다.  중구난방으로 기분 내키는대로 쓰고 있긴 하지만, 이제 골격은 잡아놓고 부분부분 그려나가는 식으로 정리를 하는것이 좋을 것이다. 이 문제로 고민을 좀 하고 있었는데, 뉴왁 미술관 미국미술 관련 페이지에서 대략의 뼈대를 잡을수 있었다.

 

뉴왁 미술관에 아직 가보지 못했지만, 이 미술관은 분명히 시대적으로 어떤 개성을 정해놓고 전시품들을 진열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국립미술관도, 스미소니안 미국미술 박물관도 시대적인 개념을 정하여 소장품들을 전시하긴 했는데, 뉴왁이 이를 분명히 밝혀서 '안내'를 잘 하고 있다.  내가 읽고 있는 미국미술 안내서들이 다양한 시도를 하긴 했는데 막상 차례를 살펴봐도 그렇고 '장황하다'는 인상을 주면서도 확실한 '지도'를 그려내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미술의 흐름이란것이 자대고 줄긋듯 명확히 떨어져주는 개념이 아니라서 그럴 것이다.  그런데, 이러다보니 내 머릿속에도 장황한 개념만 열거될 뿐, 시대별로 똑 떨어지게 정리가 안된다.

 

아래의 연표를 바탕으로, 이를 응용하며 커다란 전지에 시대별 지도를 그려놓고, 해당 시기에 나를 '매혹'하는 작가들을 포스트잇으로 붙여나가는 식으로, 나만의 미국미술사를 완성시키면 좋을 듯 하다. (누군지 정리 한번 잘 해 놓았다.)  왜 미술전문가들은 이런 시도를 안하거나 못하는걸까? 너무 아는게 많아서?  그런데 아는게 많아도 주워담지 못하면 그게 또 마냥 허무한거라... 왜 방대한 지식을 담은 책들이 이런 간단한 표 하나를 제시하지도 못하는가?  나는, 일단 누군가가 잘 정리해 놓은 표에 입각해서, 내식으로 응용하여 새로운 틀을 만들어가지고, 그 틀안에 작가와 작품을 집어 넣는 식으로 모자이크 하여 미국미술사를 완성시키겠다.

 

 

http://www.newarkmuseum.org/PicturingAmerica.html

1730 to 1900

The American Colonies, 1730 -1776
The Young Republic, 1790 -1860
Romantic Portraits for Eastern Cities, 1790-1860
Country Portraits, 1790 -1860
The Rise of Landscape Painting, 1825-1880
The Civil War and Its Aftermath, 1860-1900
The Lure of Europe, 1850-1900
The Gilded Age, 1875-1900


1900 to Present

Into the Modern Era, 1900-40
Far From the Modern World, 1900-25
A Modern Art For a Modern World, 1910-30
Faith, Fear and Failure in The Machine Age, 1920-40
In the Wake of the War, 1945-65
Surrealism and Abstract Expressionism, 1930-65
Challenging Conformity, 1955-65
Art Since 1965

 

이 표를 바탕으로 내 표를 만들어내면 된다.  이제 정리가 되었으니까, 두서없는 분류 시스템도 개편을 하고. 정진.

 

 

2009년 9월 27일 일요일

Ben Shahn, Liberation (1945) 벤 샨의 '해방'

(그림 클릭하면 커집니다)

 

이 작품은, 미국의 사회적 사실주의 화가 (Social Realist) 로 알려진 벤 샨 (Ben Shahn)의 '해방 (Liberation)' 이라는 구아시 화 이다.  뉴욕 맨하탄의 '현대 미술과 (Museum of Modern Art)' 소장품으로 마침 운좋게 관람이 가능했다.  미술관에 제공한, 작품 옆의 작은 '이름표'에 나온 정보에 의하면, 이 '해방'이라는 작품은 1945년에 그려진 것이다. 그러면, 이 작품을 읽는/보는 우리는 1945년이라는 해와, '해방'이라는 제목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 보게 된다.  1945년은 어떤 해인가?  한국인들에게는 그야말로 '광복의 해'가 된다. 1945년이 단지 한국인들에게만 광복의 해는 아니었다. 2차 대전이 1945년에 끝났을때, 지구상의 여기저기에서 식민지로 신음하던 약소국가들이 '조선'처럼 광복을 맞이하기도 했고, 그리고 전쟁이 끝났다는 상황 자체가 전쟁의 공포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기도 한다.  세계는 '전쟁과 죽음의 공포'로부터 일단 해방을 맞이 한 것이다.

 

그림을 살펴보자. 전쟁의 폐허를 여실히 드러내는 폭격당한 건물이 있고, 그리고 광장에 '뺑뺑이' 기둥이 하나 서있다. 그 뺑뺑이에 아이들 셋이 매달려 있다. 아이들이 뺑뺑이를 타고 있는 배경은 황량하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가 쌓여있고, 바람이 쌩쌩 불고 있는 듯한 붓의 터치가 느껴진다. 아이들은 창백해 보인다. 명랑하게 웃고 있는 표정도 아니다.

 

이 그림은 우울한가?

절망적인가?

희망적인가?

어떠한가?

 

작가가 어떤 의도로 그림을 그렸건, 해석은 보는 사람의 자유이다.  우리도 작가의 의도로부터 '해방'될 권리는 있으니까.

 

요즘도 뺑뺑이가 있을까?  내가 어릴때, 당시에는 동네에 놀이터라는 것이 아예 없었다. 그네나 미끄럼과 같은 '놀이시설'은 오직 학교 운동장에나 가야 구경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지금은 아파트마다, 골목마다 놀이터 시설이 설치되어 있지만, 내가 어릴때는 시골에서는 아무데서나 놀면 되었고, 도시에서는 골목에서 놀았다. 학교에 가면 알량하게 서 있는 미끄럼, 그네에는 늘 아이들이 매달려 있어서 그네를 한번 타보기도 쉽지 않았다. 때로, 그네는 수리를 구실로 그냥 묶어 놓기도 했었다. 그리고 뺑뺑이가 있었다.  기둥에 최고리 줄이 몇가닥 매달려 있고, 그 쇠고리 줄을 잡고서 한 방향으로 내쳐 달리다가 발을 공중에 띄우면 원심력에 의해서 몸이 바깥으로, 허공으로 쌩 떳다. 그 상태에서 우리는 하늘을 날았다.  아! 신나는 뺑뺑이였다!  지금도 학교 운동장에 그 뺑뺑이가 있을까?

 

화집에서 이 그림을 처음 발견 했을때, 나는 '뺑뺑이'를 떠올리며 웃고 있었다.  우리들은 전국민이 모두 가난했고, 그래서 가난이 낯설지  않았다. 나는 무수한 가난뱅이 아이들중의 하나였을 뿐.  우리들은 가난한 놀이 시설에도 기죽지 않았다. 우리는 뺑뺑이를 타면서 하늘을 나는 듯한 기쁨을 맛봤다. 

 

그림속의 아이들이 절망적인가?

우울한가?

 

아, 나는 이 풍경이 전혀 낯설지 않다. 그리고 이런 풍경에서 나는 불행하지 않았다. 내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는 대개 우등생 표시가 붙었지만, 건강상황에는 항상 '영양실조, 빈혈' 이라는 표시가 따라다녔고, '영양실조로 보이니 건강을 신경써주십사' 하는 선생님의 친절한 통신문이 덧붙기도 했었다.  나는 영양실조로 얼굴이 누렇게 뜨고, 아파보이는 빈민가의 아이였으나, 나는 무럭무럭 자랐고, 새나라의 아이답게 꿈을 꾸며 살지 않았던가?

 

나는 이 그림을 보면 행복하다. 폐허가 된, 다 쓰러져가는 건물에 보이는 알록달록한 무늬는, 아마도 드러나는 벽지이리라. 각기 다른 벽지를 붙이고, 각기 다른 꿈을 갖고 살던 사람들이 이곳을 지키다 사라졌고,  그러나 다시 이곳에서 살아가기 위해 나타날 것이다.  알록달록한 벽은, 어찌보면, 내가 처음 본 서울의 골목골목의 풍경 같기도 하다. 볕이 놓은 날이면, 무허가 골목의 담벼락이나 빨래줄에 내 걸리던 알록달록한 나이롱 이불들.  그 나이롱 이불들은 햇살 아래서 뽀송뽀송 말라갔고, 그날밤 그 집 식구들은 신선한 햇살 냄새가 나는 나이롱 이불을 깔고 덮고 잠이 들었을 것이다.

 

이 그림은 나를 행복하게 한다. 

 

 

 

 

 

 

 

 

 

가난은 우리를 파괴하지 못했다. 전쟁도 인간을 파괴하지는 못한다. 폭력은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수는 있으나 인간을 파괴하지는 못한다.

 

redfox.

 

 

Gouache Painting, 구아슈 화

 

Art Dictionary 분류는, 미술책이나 작품을 보다가 낯 선 미술 기법이나 용어가 나올때 자료를 찾아보고 정리해놓는 메모장이다.

 

 

 

Gouache (구아슈) 라는 미술 기법이 있다.  웹에 있는 각종 자료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불투명 수채화의 종류]
① 템페라 화 : 유화가 발명되기 이전에 많이 쓰인 화법으로 안료에 달걀노른자를 섞어서 그린 그림이다.
② 구아슈 화 : 안료에 물을 타서 아라비아고무를 풀어 그린 그림이다.
③ 프레스코 화 : 벽화를 그릴 때 새로 석회를 바르고 채 마르기 전에 수성 안료, 즉 수채 물감으로 그리는 그림이다. 서양의 중세 미술에서 많이 볼 수 있다.
④ 아크릴 화 : 수채 물감과 유채 물감의 두 가지 특성을 함께 지니고 있으며, 수채화처럼 물을 사용하여 그린다. 이것은 합성수지를 사용하여 만든 새로운 재료로, 마르는 시간이 빠르고 접착성이 강하여 종이, 천, 나무판 등에 사용할 수 있다. 마른 후의 질감은 유화와 같은 효과가 있다.

 

http://homework.kids.daum.net/contents/contents_ency_view.php?contentsNo=2070801m2932953&catCodeId=11529  <-- 이곳에서 자료 카피하여 옴.

 

 

Gouache 구아슈 화는 간단히 말하자면 '불투명 수채화'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데, 투명 수채화와 다른 점은, 일단 불투명하고, 안료의 농도가 투명수채화에 비해서 진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회화 기법을 즐겨 쓴 사람들중에서 유명한 사람들로

 

  • Albrecht Dürer 1471-1528  뒤러
  • Peter Paul Rubens 1577-1640  루벤스
  • Sir Anthony Van Dyck 1599-1641  반 다이크
  • Edgar Degas 1834-1917  드가
  • Egon Schiele 1890-1918  에공 쉴레
  • http://www.learn-gouache-painting.com/Gouache_History.html

     

    등이 열거 되고 있다. 내가 이 구아슈 기법에 궁금증이 생긴 이유는,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발견한 Ben Shahn 의 Liberation (1945) 작품에 구아슈 기법이라고 씌어 있었기 때문이다.  위의 그림 설명은 벤 샨 페이지에서 진행하겠다. (참 아름다운 그림이라서, 이것 찾아내고 뛸 듯이 기뻤었다).

     

     

     

     

     

    MoMa Highlights: 현대미술관 소장, 대표적인 350점 소개

    Moma Highlights

     

     

    뉴욕 현대미술관 방문기념으로 약 20달러 주고 산 핸드북. 책 내용은 좋다. 문제는 '아마존'검색해보니까 15달러면 되는건데 (물론 배송료 5달러 포함하면 마찬가지가 되지만, 25달러 이상 구매시 무료 배달해주니까, 여러권 묶어서 살때 사면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데...)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 현장에서 사면 조금 비싸도, 그래도 현장에서 사는 '손맛'이란것이 있어서, 몇달러 더 주고 그냥 사게된다. 견물생심이라서. 하하. 

     

     

    뉴욕 현대 미술관 Museum of Modern Art (MoMA) 소풍

    미술관 소개 페이지를 만들려다가, 그것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오늘은 그냥 스케치만.

     

     

     

     

    뉴욕가기

     

    버지니아 우리집 근처 알링턴에 Vamoose 라는 버스회사 정거장이 있는데 이곳에서 뉴욕 맨해턴 중심의 펜스테이션까지 직행하는 버스가 선다. 지난해에는 편도 20달러, 왕복 40달러였는데, 올해는 편도 30달러, 왕복 60 달러로 인상되었다.  온가족 네다섯명이 뉴욕 소풍을 간다면 승용차로 가도 무관하겠으나, 한두사람이 뉴욕에 갈때는 승용차로 가나 직행버스로 가나 차비가 차이가 안난다.

     

    개인의 예로 들어보면, 승용차로 뉴욕에 다녀올 경우

     1. 왕복 꼬박 9-10 시간 운전을 해야 하고

     2. 개솔린 값이 못 잡아도 50달러는 들고

     3. 톨게이트 비용 왕복 50달러 정도 든다 (지난 겨울에 톨비 계산해봤다.)

     4. 맨해턴에서 어딘가에 차를 주차할 경우 주차비는 계산도 안나온다. 주차 시킬곳 찾기도 어렵고 대략 30달러 잡자

     

    이러면 차 끌고 다녀오는 실비만 130달러 잡아야 한다.

     

    버스로 다녀올 경우, 직행 버스 왕복 60달러, 시내에서 이동하는 것 써브웨이도 있지만 택시로 이동한대도 끽해야 30달러.  차비 100달러로 홀가분하게 다녀올수 있다. 단, 집에서 버스 정거장까지 가고, 집으로 오는 문제는 가족중에 누군가가 수고를 해줘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다. 이경우 그냥 택시로 이동해도 그만이다.  교통비가 비슷하게 든다고 해도, 왕복 9시간 운전을 내가 안하고 버스기사님이 해주시므로 버스에서 그냥 잠이나 자도 되므로 피로가 덜하다. 그래서 나는 뉴욕 갈때 버스 타는 쪽을 선호한다.

     

    아침에 사고:

     

    아침에 밥 좀 챙기고, 아침 여섯시 반에 예매된 버스 안놓치려고 서두르다가, 카메라 가방이 열린채 가방을 집어 들어가지고, 카메라가 쏟아져 내렸다. 결국 카메라 뚜껑속의 필터가 충격으로 깨졌다. 암담했지만, 그냥 깨진 카메라 들고 돌아다니며 사진 찍었다. 뭐 카메라는 멀쩡하길래.

     

    뉴욕 도착:

     

    아침 여섯시반에 알링턴에서 출발한 버스는 열한시 반에 맨해턴 중심 펜스테이션에 도착했다. 그냥 택시 잡아타고 현대미술관으로 갔는데 대략 7달러쯤 나오길래 10달러 주고 거스름돈 팁으로 줬다.  현대미술관 앞에 도착한후에, 미술관 앞 도시 공원에 앉아 밥을 먹었다. 일회용 도시락에 밥 담고, 치즈 두장 얹은 것. 빵사먹기 싫고, 그냥 밥이 편해서 이렇게 밥 간단히 먹고 물 마시면 속이 편하다.

     

    미술관 구경:

     

    대략 열두시부터 오후 네시까지 한가롭게 미술관을 돌았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하도 방대해서 하루종일 헐레벌떡 뛰어 돌아다녀도 목이 타지만, 현대미술관은 이보다 작으므로 조금 한가해진다. 게다가 나는 미국미술을 중점적으로 보기로 했으므로, 포인트가 분명했지. (하지만 결국 유럽미술이 발목을 끌긴 했다). 전체적으로 편안하고 한가로운 관람이었다.  기대하지도 못했던 내가 좋아하는 작품들도 만나서 횡재한 기분. 특히 Ben Shahn 의 Liberation 이라는 작품이 복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어서, 친한 친구 만난듯 반가웠었다.  곧 벤 샨 페이지 열어야지.

     

    미술관 기념품:

     

    미술관 화집 19달러짜리 한권 사고, 못생긴 괴물 인형을 하나 샀다.

     

     

    브로드웨이 토요 벼룩시장:

     

    오후 네시반에 브로드웨이의 토요 벼룩시장 열린곳에서 친구를 만났다. 시장구경은 항상 유쾌하다. 아무것도 안 샀지만.

     

    이스트 빌리지에서 저녁:

     

    뉴욕대가 있는 이스티 빌리지는 대학가 답게 식당이 많고 음식값이 비교적 저렴한 편이다. 이곳의 유명하다는 일식집에서 우동정식으로 저녁을 먹고, 근처에 터줏대감들만 알아서 찾아간다는 케이크 전문점에서 케이크와 커피를 마시며 브레히트와 사회주의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대하여. 뉴욕의 예술인들에 대하여 친구와 잠시 즐거운 대화. 아 뉴욕에서 3년만 살아보고 싶다.

     

    귀가

     

    오후 일곱시, 펜스테이션에서 직행버스를 타고 귀가. 오후 열한시 반 알링턴 도착. 집에 오니 자정.  집에 오자마자 웹 검색하여 내 카메라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정보를 찾아냈다. 필터만 새로 사서 끼우면 되는 문제인것 같았다. 불행중 다행. 확김에 80달러짜리 고급 필터 주문해 놓고, 앞으로 카메라를 조심해서 다루겠다고 반성.

     

     

    노란 바지 입은 사나이와 나.

     

    Jacob Lawrence: Migration Series, Museum of Modern Art

    http://americanart.textcube.com/30  에서 계속

    2009년 9월 26일 토요일. 뉴욕 현대미술관 (Museum of Modern Art = MoMA) 에 들러서 제이콥 로렌스의 '남부 흑인 이주 역사 시리즈 (Migration Series) 30장과 해당 그림 설명 (caption) 을 사진기에 담아 왔다.  홀수 작품은 Phillips Collection 에서, 짝수 작품은 Museum of Modern Art (MoMA) 에서 소장중. 1번부터 60번까지 완결.


    미술관의 유리 액자를 사진에 담은 것이라 조명이 반사되는 것을 피하기가 힘들었다.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는 그림들을 다닥다닥 붙여놔서 높은 곳의 작품은 올려다보면서 찍느라고 더욱더 일그러졌다. 원작을 똑같이 사진에 담아오는 것은 어쩐지 '훔쳐오는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는터라 조명때문에, 혹은 사진 찍는 각도때문에 약간 변형된 것이 오히려 사진 찍은 내 입장에서는 덜 미안하긴 하다. 캡션 부분도 별로도 사진을 찍은 것인데, 사진속의 문장을 읽고 외워서 타자를 치는 일은 그냥 영어 받아적기와 같은 막노동이었다. 이거, 거의 왕노가다로 만들어진 페이지이다. 하하.
     

     

     

    1. During World War I, there was a great migration north by southern African Americans.

    1. 제 1차 세계 대전 기간동안, 미국 남부의 흑인들이 북부로 대이동을 했다.

     

     

     

     

     

    2. The war had caused labor shortage in nothern industry. Citizens of foreign countries were returning to their native lands.

    2. 1차 대전이 일어나자 북부의 산업지대에서는 인력이 모자라게 되는데, 외국인 노동자들은 자기네 나라로 돌아갔다.

     

     

     

     

     

     

    3. From every southern town migrants left by the hundreds to travel north.

    3. 미국 남부의 방방곡곡에서 흑인들이 수백명씩 북쪽을 향해 떠나갔다.

     

     

     

     

     

    4. All other sources of labor having been exhausted, the migrants were the last source.

    4. (이렇게 시민들은 전쟁터로, 외국인 노동자들은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는 사태가 발생하여) 노동인력이 바닥이 나자, 남부에서 이주해오는 흑인인력이 최후로 기댈 인력이 되고 만다.

     

     

     

     

     

     

    5. Migrants were advanced passage on the railroads, paid for by the northern industry. Northern industry was to be paid by the migrants out of their future wages.

     

    5. 남부 출신 이주자들의 기차요금은 북부의 공단에서 지불해주었다. 물론 이렇게 나간 돈은 이주자들이 장차 받게되는 임금에서 나가는 것이었다.

     

     

    6. The trains were crowded with migrants.

    6. 기차는 이주민들로 가득찼다.

     

     

    7. The migrant, whose life had been rural and nurtured by the earth, was now moving to urban life dependent on industrial machinery.

    7. 시골에서 태어나 대지와 함께 성장하던 남부출신 이주자들은 이제 기계 산업 위주의 도시로 이동하는 것이다.

     

     

     

     

    8. Some left because of  promises of work in the North, others left because they farms had been devasted by floods.

    8. 어떤이들은 북부에 일자리가 있다는 이유로, 어떤이들은 그들의 농토가 수해의 재물이 되어 남부를 떠났다.

     

     

    9. They left because the boll weevil had ravaged the cotton crop.

    9. 그들은 목화 바구미가 목화솜을 모두 망치는 바람에 떠나게 되었다.

     

     

    10. They were very poor.

    10. 그들은 매우 가난했다.

     

     

    11. Food had doubled in price because of the war.

    전쟁 때문에 식량 값은 두배로 뛰었다.

     

     

    12. The railroad stations were at times so crowded with people that leaving special guards had to be called to keep order.

    12. 때로는 기차역에 떠나는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서, 특별 경비가 와서 질서를 유지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13. The crops were left to dry and rot. There was no one to tend them.

    농작물은 그대로 방치되어 말라 죽거나 썩어버렸다.  이제 농작물을 지켜줄 이는 아무도 없다.

     

     

     

    14. For African Americans, there was no justice in the southern courts.

    14. 미국 남부의 법원에서 흑인들은 정의로운, 공정한 재판을 기대할수 없었다.

     

     

     

    15. There were lynching.

    남부에서는 흑인에 대한 린치 (개인적인 폭력행사)가 벌어지곤 했다.

     

     

     

    16. After a lynching the migration quickened.

    16. 린치 사건이 생긴후 이주의 속도는 더 빨라졌다.

     

     

     

     

    17. Tenant farmers received harsh treatment at the hands of planters.

    17. 남부의 소작농 흑인들은 지주로부터 온당치 못한 대우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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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The migration gained in momentum.

    18. 북으로의 이주에 불이 붙게 되었다.

     

    19. There had always been discrimination.

    19. 남부에서 이들은 항상 차별에 시달렸었다.

     

     

     

     

    20. In many of the communities, the Black press was read with great interest. It incouraged the movement.

    20. 여러지역에서, 사람들은 '흑인 신문'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읽었다. 흑인 언론은 이주를 장려하였다. (당시에 흑인들이 운영하는 지역 신문, 매체들이 있었음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흑인들에게도 자신들만의 매체가 있었고 흑인들이 문맹이 아니었고, 이들도 열심히 신문이나 각종 매체를 읽어 정보를 취했음을 역설하는 듯 하다.)

     

     

     

     

    21. Families arrived at the station very early.

    21. 이주하려는 가족들은 (차를 놓치지 않기 위하여) 아침 일찍 기차역에 도착했다.

     

     

     

    22. Migrants left. They did not feel safe. It was not wise to be found on the streets late at night.  They were arrested on the slightest provocation.

    22. 흑인들은 이주에 올랐다.  그들은 안전하지 못했다. 늦은 밤에 길거리에 있는 것은 현명치 못한 일이었다. 아주 사소한 일로도 이들은 체포되었다.

     

     

     

    23. The migrant spread.

    23. 이주자들은 이리저리 흩어졌다.

     

     

     

     

    24. Their children were forced to work in the fields. They could not go to school.

    24. 아이들은 들판에서 일을 해야만 했다. 이들은 학교에 갈 수 없었다.

     

     

     

     

     

     

     

     

     

    25. They left their homes. Soon some communities were left almost empty.

    25. 그들은 집을 버리고 떠났다. 어떤 마을들은 거의 텅 빈채 남겨지게 되었다.

     

     

     

    26. And people all over the south continued to discuss this great movement.

    26. 남부 전역의 사람들은 이 어마어마한 이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또 했다.

     

     

    27. Many men stayed behind until they could take their families north with them.

    27. 가족들과 함께 북부로 가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뒤처지기도 했다.

     

     

    28. The labor agent sent to south by northern industry was a familiar presence in the Black communities.

    28. 북부 산업지대에서 보내는 인력 고용업자들은 남부의 흑인지역에서는 이제 낯익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29. The labor agent recruited unsuspecting laborers as strike breakers for northern industries.

    29. 노동 중개인들은 북부 노동자들이 태업을 할때, 그 빈자리를 메꾸는 일꾼으로 남부 출신 이주자들을 고용했다.

     

     

     

    30. In every southern home people met to decide whether or not to go north.

    30. 남부의 흑인 가정에서는 사람들이 모여서 북으로 갈지 말지 의논을 하였다.

     

     

     

     

    31. The migrants found improved housing when they arrived north.

    31. 북부에 온 이주민들은 남부에 살때보다 주거 사정이 낳아지기도 했다.

     

     

     

    32. The railroad stations in the South were crowded with northbound travelers.

    32. 남부의 기차역들은 북으로 향하는 나드네들로 붐볐다.

     

     

     

     

    33. Letters from relative in the North told of the better life there.

    33. 북부의 친척들에게서 (남부에 남아있는 이들에게) 날아온 편지는 남부보다 좋은 북부 생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34. The Black press urged the people to leave the South.

    34. 흑인매체들은 사람들에게 남부를 떠나라고 독려했다.

     

     

    35. They left the South in great numbers. They arrived in the North in great numbers.

    35. 어마어마한 숫자의 흑인들이 남부를 떠났다. 어마어마한 숫자의 흑인들이 북부에 도착했다.

     

     

     

    36. Migrants arrived in Chicago, the gateway to the West.

    36. 이주자들은 시카고에 도착했다, 이곳은 서부로의 관문이었다.

     

     

    37. Many migrants found work in the steel industry.

    37. 많은 이주자들이 철강 산업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38. They also worked on the railroads.

    38. 이들은 철도 공사장에서도 일을 했다.

     

     

    39. Railroad platforms were piled high with luggage.

    39. 기차역은 보따리로 넘쳐났다.

     

     

     

     

    40. The migrants arrived in great numbers.

    40. 어마어마한 숫자의 이주자들이 북부에 다다랗다.

     

     

     

    41. The South was desperate to keep its cheap labor. Northern labor agents were jailed or forced to operate in secrecy.

    41. 남부는 값 싼 노동력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북부의 인력중개인들이 수감되거나 혹은 비밀리에 일을 해야만 했다.

     

     

     

     

    42. To make it difficult for the migrants to leave they were arrested en masse. They often missed the trains.

    42. 이주자들이 떠나지 못하도록 이들을 한꺼번에 체포하기도 했다. 이들은 종종 기차를 놓치곤 했다.

     

     

     

    43. In a few section of the South leaders of both black and white communities met to discuss ways of making the South a great place to live.

    43. 남부의 어떤 지역에서는 흑인과 백인 집단 양쪽 진영이 만나 남부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수 있는 방법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44. But living conditions were better in the North.

    44. 하지만 북부의 삶이 낫았다.

     

     

    45. The migrants arrived in Pittsburgh, one of the great industrial center of the North.

    45. 이주자들이 도착한 피츠버그는 북부 산업의 주요 거점 도시 중 하나였다.

     

     

     

     

    46. Industries boarded their workers in unhealthy quarters. Labor camps were numerous.

    46. 산업지대에서는 비위생적인 합숙소를 노동자들에게 제공했다. 무수히 많은 노동자 합숙소가 있었다.

     

     

     

    47. 사진상태가 흐려서 캡션 놓침.

    47. 채워 넣겠...

     

     

     

    48. Housing was a serious problem.

    48. 주거는 아주 심각한 문제였다.

     

     

    49. They found discrimination in the North. It was a different kind.

    49. 이주자들은 북부에서도 차별을 겪었다. 남부와는 다른 식의 차별이었다.

     

     

    50. Race riots were numerous. White workers were hostile toward the migrants who had been hired to break strikes.

    50. 인종 폭동이 무수히 일어났다. 백인 노동자들은 파업 현장에 대신 고용된 남부 이주민들에게 적대적이었다.

     

     

     

    51. African Americans seeking to find better housing attempted to move into new areas. This resulted in the bombing of their new homes.

    51. 좀더 나은 환경의 주거지를 원한 흑인들은 새로운 구역으로 이사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들이 새로 이주한 집에 폭발물이 던져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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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 One of the most violent race riots occured in  East St. Louis.

    52. 세인트루이스의 동부에서는 사상 최악의 인종 폭동이 발생하기도 했다.

     

     

     

    53. African Americans, long-time residents of northern cities, met the migrants with aloofness and disdain.

    53. 북부에서 오랫동안 터를 잡고 살던 북부흑인들은 남부에서 올라온 이주자들에게 무관심하거나 혹은 경멸했다.

     

     

     

     

    54. For the migrants, the church was the center of life.

    54. 이주자들에게 교회는 삶의 중심이었다.

     

     

    55. The migrants, having moved suddenly into a crowded and unhealthy environment, soon contracted tuberculosis. The death rate rose.

    55. 급작스럽게 인구가 조밀하고 불결한 환경으로 옮겨온 이주자들은 폐결핵에 걸리기도 했다.  사망률이 치솟았다.

     

     

     

    56. The African American professionals were forced to follow their clinets in order to make a living.

    56. 흑인 전문직업인들이 생존을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고객을 따를수 밖에 없었다. (직장에서 비위생적인 환경으로 흑인 노동자가 사망했을 때에도 흑인 의사들은 백인 고용주들 편에 서야만 했다는 뜻으로 보인다)

     

    57. The female workers were the last to arrive north.

    57. 여성들이 가장 늦게 북부로 옮겨왔다.

     

     

     

    58. In the North the African Americans had more educational opportunities.

    58. 북부에서 흑인들은 교육의 기회를 더 많이 가질수 있었다.

     

     

    59. In the North they had the freedom to vote.

    59. 북부에서는 투표의 자유가 있었다.

     

     

    60. And the migrants kept coming.

    60. 그리고, 북으로의 이주는 계속 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