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1일 목요일

Andrew Wyeth: 미술가 집안 삼대(三代) 이야기

아버지 NC 와이어드

 

 

한국인들에게 크리스티나의 세상이라는 제목의 그림으로 알려진 미국의 사실주의계열 현대화가 앤드루 와이어드는 펜실베니아의 채즈포드 (Chadds Ford)라는 농촌 마을에서 23녀중의 막내로 태어났다. 앤드루의 아버지는 미국에서 이름난 화가였다. 본명은 Newell Convers Wyeth.  그는 짧게 NC Wyeth (October 22, 1882 – October 19, 1945)로 알려져 있다. 독일과 스위스 계 후예의 이민자의 아들로 미국에서 자라난 그는 일찌감치 미국 화단에서 이야기책의 삽화가로 자리를 잡았다. 매사추세츠주의 케임브리지 (하버드 대학이 있는 도시)에서 그 고장 처녀와 결혼한 그는 가족을 이끌고 펜실베니아의 농촌마을 채즈포드 (Chadds Ford)에 집과 스튜디오를 짓고 정착하게 되는데 그 집에서 막내아들 앤드루 와이어드 (July 12, 1917 – January 16, 2009)는 태어난다.

 

다섯 아이들의 아버지로서, 그리고 수백 권의 책의 삽화를 그린 미술가로서 그는 대체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삽화가로서 확고한 자리를 잡았고, 자녀들에 대한 가장으로서의 그의 사랑은 헌신적이었다고 할 만하다. 아내는 이 확고한 가장에게 순종적이었고, 자녀들은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듯 재능 있는 청년들로 자라났다. 그의 세 딸들은 미술이나 음악분야에서 전문가 급으로 성장했고, 그의 장남은 듀폰사의 엔지니어로 취업했는데, 오늘날 우리들이 사 마시는 플라스틱 음료수병을 처음 고안해낸 사람이 나다니엘 와이어드(Nathaniel Wyeth) 바로 듀폰사에 취업한 장남이라고 한다.

 

아버지 NC 와이어드가 얼마나 성공적인 삽화가로 자리를 잡았는가 하면 1920, 그의 나이 38세 당시에 그의 채즈포드 집에는 요리사, 가정부, 집사 등이 상주했으며, 세탁물은 외부 세탁소로 모두 보내버렸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집을 찾던 손님 중에는 위대한 개츠비 (The Great Gatsby)’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미국 소설가 스코트 피츠제랄드도 있었다. NC 와이어드는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써로우 (Henry David Thoreau), 초절주의 미국철학자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등과도 교유가 있었으며 이들의 글을 열심히 읽어댔다고 한다.

 

아버지 NC는 삽화가로서 부와 명예를 얻고 가족들에게 풍요로운 삶을 제공할 수 있었으나, 개인적으로는 우울감에 시달린 것으로 보인다.  이는 Norman Rockwell 이나 그 밖의, ‘삽화가로서 이름을 날린 화가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일수 있는데, ‘삽화 (illustration)’가 순수 미술활동에서 한 발짝 벗어난 것이라는 생각에 기인한 것이다. 삽화작업이 순수미술인가 아닌가 하는 논의를 내가 따로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나 윈슬로 호머(Winslow Homer), 롸크웰 켄트(Rockwell Kent) 등 미국 미술사를 장식하는 빛나는 화가들의 이력 중에 삽화가로서의 이력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들은 대개 호구지책으로 어쩔 수 없이 삽화작업을 했으며, 이 작업에 염증을 내고 벗어나고 싶어했었다.  이는 마치 순수 문학을 하고 싶어하는 작가 지망생이 혹은 무명 작가가 호구지책으로 잡지사에서 편집 일을 하는 것과 비슷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지 NC는 삽화가로서의 성취감과 순수예술가가 되지 못했다는 우울감 사이에서 혼란스런 말년을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다섯 자녀에게 자상하기 그지없는 아버지였으며,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직접 자녀들의 미술 지도를 하기도 했으며, 그리고 튼튼한 성채와 같은 황제이기도 했다. 화를 낼 때 그는 호랑이처럼 무서웠으며, 육 척도 넘는 덩치와 힘의 소유자였던 그는 누군가가 맘에 안 드는 행동을 할 경우 그를 번쩍 집어 던질 정도로 사납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1945, 채즈포드에서 손자와 함께 자동차로 기찻길을 건너다가 달려오는 기차를 피하지 못해서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고 하는데, 바로 근처에서 이 광경을 봐야 했던 마을사람은 그의 마지막 순간을 기억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세 살짜리 손자아이에게 저 들판을 봐라. 너는 다시는 저런 광경을 보지 못 할 거야  아버지 NC는 그 날, 메인주에 가 있던 막내아들 Andrew 부부가 돌아올 것에 대비하여,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녀석을 데리고, 막내아들 부부가 살던 신혼 집을 청소해주러 가던 중이었다고 한다.

 

아들, 앤드루 와이어드

 

삽화가 NC의 막내아들 앤드루는 우리나라에서 삼일 운동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17년에 펜실베니아의 평화로운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헌신적인 부모와 다정한 형제들 속에서 동화같이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아버지 NC는 가을철 할로윈데이 (Halloween)에 자녀들이 동화 속 주인공으로 변장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겨울 크리스마스가 되면 직접 산타 할아버지로 변장을 하고 나타나 자녀들에게 꿈과 마술과 환상의 세계를 심어주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꼬마 앤디는 귀염둥이 요정처럼 자유롭게, 발랄하게 성장했을 것이다. 막내아들의 신체적으로 연약하다는 것을 파악한 아버지 NC는 그를 공립학교에 보내는 대신에 집에서 가정교사로부터 수업을 받게 했고, 그 나머지 시간에 앤드루는 혼자 마을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앤드루가 15세가 되었을 때, 그는 정식으로 아버지 NC의 스튜디오에서 미술 수업을 시작한다. 그렇다고 아버지 NC가 그에게 미술의 기술을 전수한 것 같지는 않고, 기본적인 뎃생법, 빛과 사물과의 관계를 자상하게 안내해 준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의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하는 동안 그의 삽화 습작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팔려나가기도 한다. 앤드루가 17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의 스튜디오에서 벗어난 그는 모 회사로부터 책의 삽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게 된다. 삽화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그에게도 찾아 온 것이다. 이 때, 아버지가 앤드루를 설득한다, “앤디야 내가 너를 돌봐줄 테니 그냥 그림만 그려라.”  앤디가 20세가 되어 당시 17세였던 처녀 베씨 (Betsy)를 만나 청혼을 했을 때에도 아버지 NC는 극구 결혼에 반대의사를 표했는데, 막내 아들이 가족을 부양하느라 예술가의 길을 못 가게 될까 봐 근심하였다는 것이다.

 

아버지 NC는 당시 미국사회에 풍미하던, 잭슨 폴락이나 로스코, 윌리엄 드 쿠닝등이 선보이던 추상 표현주의 (Abstract Expressionism)의 물결을 지켜보면서 사실주의적 화법으로서는 성공하기 힘들다고 예측했고, 그래서 아들이 이 새로운 물결을 수용해주길 바랬다.  하지만 앤드루는 윈슬로 호머나 뒤러와 같은 사실주의 화법의 작가들에 매료되어 있었고, 시대에 뒤떨어져 보이는 템페라화에 집중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화풍이 마음에 안 들었을지도 모르고, 아들의 앞날이 근심스러웠을 것이다.  한편 앤드루는 아버지의 시선이 부담스러웠고, 아버지가 인정해주지 않는 그의 미술세계에 대하여 불안감과 분노심과 같은 복합적인 정서를 키웠을 것이다. 이런 것을 우리는 애증의 관계라고 간단하게 표현하기도 할 것이다.

 

1945년 아버지 NC가 펜실베이나 자택 앞 기찻길에서 사고로 사망했을 때, 앤드루의 상심은 컸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신화 속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그러하듯, 혹은 대부분의 아버지와 이들의 관계가 그러하듯, 아버지를 잃고 나서야 아들은 진정한 성인으로 탈바꿈을 하게 된다. 지켜보던 시선혹은 숨은 감독관으로 존재하던 아버지로부터 벗어났을 때, 앤드루는 아버지의 상실이 가져온 생의 비극성과 성찰을 자유롭게그의 화폭에 옮길 수 있었다. 그는 사랑하는, 그러나 한편 부담스럽고 무서운 아버지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고, 그 자유 속에서 아버지를 재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뉴욕화단이 추상표현주의로 들끓고 있을 때, 앤드루는 그가 즐겨 산책하는 마을의 이웃사람들, 그 이웃사람들의 낡은 침실, 낡은 부엌, 그들의 풍경을 관찰하며 살았고, 그들의 친구가 되었고, 그리고 그들을 그렸다. 앤드루의 화집에는 그가 친구로 교류했던 독일계 이민자 가족, 혹은 오두막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흑인가족들이 많이 눈에 띈다. 어찌 보면 그와 동시대를 살던 화가들이 한편에서는 추상표현주의라는 미술 놀음에 열중하고 있고, 한편에서는 사회적 사실주의를 기치로 사회현상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을 때, 이들과 동떨어져서, 역시 동떨어진 채 살아가는 그의 이웃 사람들을 들여다보는 일에 열중해 있었던 것도 같다. 그는 세상 돌아가는 것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어떤 대상, 혹은 풍경에만 몰입하여 이를 그림에 담아내는 일에만 몰두한 것 같은데, 그의 극히 개인주의적인 이런 그림세계를 그의 화집들을 펼쳐놓고 휘리릭 넘기다 보면 재미있는 현상이 발견된다.

 

앤드루 와이어드 자신도 고백한바 있거니와, 그는 세상을 잘 모른다고 했다. 오로지 그가 아는 것, 그리고 그가 그림을 그린 대상은 펜실베니아 그의 집 주변, 그가 여름에 가서 지내던 메인 주의 집 주변, 그리고 이웃 사람들로 한정되어 있다. 그는 시사문제에 눈길을 돌린 적도 없고, 그의 화풍에서 벗어난 적도 없다. 그는 고집스럽게 극 사실적 세필로 그 주변의 풍경을 그려나갔다. 그런데 그의 그림의 주인공들은, 대개 소외계층의 대중들이다. 힘겹게 살아가는 독일 이민자 농부, 농부의 아낙, 한쪽 팔을 잃은 흑인 친구, 그가 자주 드나들던 이웃 흑인 가족들, 그가 15년간 은밀히 그려낸 헬가 역시 독일계 이민자의 아낙으로 남의 집 일을 해주던 여인이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친숙한 크리스티나 올슨, ‘크리스티아의 세상의 주인공 역시 그렇게 잊혀진 대중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목청 높여 소외계층의 사회적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 할 줄은 몰랐지만, 평범하게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삶의 숭고함을 전달하는 데는 성공했다.

 

바로 이런 점을 보면 예술의 힘이 무엇인가 어렴풋하게나마 실마리를 잡아 가게 된다. 산이 있을 때, 그 산의 정상까지 올라가는 길은 무수하다. 그 길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고, 외 따른 길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연결된 길을 따라 이리저리 노선을 바꾸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오로지 한 길로만 행군하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중턱에서 그만 내려오기도 한다.  아무튼 산에는 정상이 있고, 사람들은 각기 다른 길을 통해 그 정상에 오르게 된다.

 

하나의 예술 작품이, 혹은 어떤 화가의 작품이 관객의 공감을 얻게 될 때, 혹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게 될 때 그 감동이나 공감의 요소는 무엇일까? 그 그림이 추상화이건, 구상화이건, 사회성 높은 그림이건 혹은 선전물 (프로파겐다)이건간에 그것이 우리를 감동시키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이 있다.  나는 그 요소가 대상에 대한 열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화풍이 어떠하건, 작품에서 열정이 느껴질 때, 나는 감동하게 되는 것 같다. 대상의 본질을 깊이, 깊이 들여다보고 사색한 흔적이 보일 때, 그런 작품 앞에서 나는 감동하게 된다. 그것이 표현주의이건, 선전물 프로파갠다이건, 사실주의적이건 뭐건간에.  (내게 이런 시각이 있기 때문에 내가 소위 팝 아트라고 일컬어지는 일련의 작품들에 대해서 냉정하거나 무관심한 태도를 견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이런 시각은 팝 아트에 대해서 좀더 진지하게 공부한 후에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알면 사랑하게 되니까.)  앤드루 와이어드의 풍경 속에는, 그의 인물화 속에는 그가 친숙하게 잘 알고 있는 사람, 대상에 대한 깊은 성찰이 들어있다.  풍경 속의 사과나무 한 그루를 그릴 때조차 그는 사과를 일일이 세어보고 그렸을 정도로 대상에 대한 관찰이 확고 했었다. 그의, 대상에 대한 진지함은 인류애와도 닿아있었다.  그는 친한 이웃 흑인이 죽었을 때, 장례비가 없어서 쩔쩔맬 때 기꺼이 장례비를 제공하기도 했고, 부성애가 강했던 아버지가 싫어하는 줄 알면서도 이웃 흑인친구들과 어울려 시간을 보냈다. 한 개인으로서 그는 세상과 무관하게 살았던 것처럼, 역시나 인종문제나 사회적 차별의 문제와도 무관하게 사람들과 어울렸던 것이다.

 

손자: Jamie Wyeth

 

앤드루 와이어드와 그의 아내 베씨 사이에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 니콜라스는 미술 중개인이고, 둘째 아들 Jamie 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대를 이어받아 화가로 성장했다. 온라인 자료를 찾아보면 그에 대한 소개가 나와있기도 한데, 삽화가였던 NC나 사실주의적 화풍을 고집한 앤드루에 비해서 3대 제이미의 미술 세계는 특별해 보이지는 않는다. 뭐 대대로 명장이 나올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미국이 자랑할만한 독보적인 화가 집안인 와이어드 집안의 3대가 화가라는 것은 특별한 사항이긴 하지만, 3대 제이미는 아직까지는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이룩한 독보적 세계를 이룩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물론 1946년생인 그가 앞으로 독창적인 미술을 펼쳐갈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글쎄, 선대의 그늘이 하도 커서……

 

 

Andrew Wyeth 관련 페이지들은 이곳에:

http://americanart.textcube.com/category/Andrew%20Wyeth

 

관련자료:

First Impressions: Andrew Wyeth, by Richard Meryman (1991)

Andrew Wyeth: Autobiography, Introduced by Thomas Hoving (1995)

 

앤드루 와이어드가 즐겨 사용했던 템페라화, 드라이터치 기법 페이지가 이어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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