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루 와이어드를 대충 마무리 지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진 파일들을 정리하다 보니 내가 아직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크리스티나 올슨을 그린 ‘크리스티나의 세상’ 그림에 대한 이야기로 앤드루 와이어드의 페이지를 처음 열었을 때부터 내 머릿속에는 ‘제비꽃’이 떠올랐던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나의 ‘제비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지.
지난 9월에 뉴욕 현대미술관에 갔을 때, 벤 샨의 그림 옆에 나란히, 당당하게 걸려있던 ‘크리스티나의 세상’ 그림을 다시 카메라에 잡았다.

이것은 앤드루 와이어드를 세상에 널리 알라게 된 1949년 작품이다. 와이어드에게 크리스티아 올슨이라는 사람과 그의 집을 소개한 이는 나중에 결혼하게 되는 베씨 (Betsy)였다. 크리스티나는 소아마비로 인해서 다리의 힘을 잃어갔지만, 오빠와 함께 사는 집안 일을 돌보는데 게으르지 않았다. 그는 불구의 다리를 이끌고 온 집안을 윤택하게 가꾸며 살았다. 크리스티나는 남이 도와주는 것도 원하지 않았고, 휠체어에 의지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사진의 크기를 줄이기 전에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게 되었는데, 크리스티나의 드러난 오른팔이 중간의 관절이 튀어나와 보일 정도로 앙상하고, 거뭇하고 푸르스름한 멍 자국도 보인다. 두 다리를 쓸 수 없는 상황에서 팔로 몸을 이동해야 하므로 관절이나 주변의 피부에 굳은살이 생겨 단단해졌을 것이다. 그것이 멍 자국처럼 채색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손도 앙상한 팔에 비해서 큼직하고 손가락들이 굵직하게 발달해 있다. 손으로 전 우주를 지탱하고 온갖 일을 다 해야 하는 상황이 손을 기형적으로 크게 발달 시켰을지도 모른다. (사진 오른쪽 구석의 둥근 무늬는, 필터가 깨져서 반사된 것이다.)
관객이 이 그림 속의 상황을 어떤 식으로 재구성하게 될지는 각자의 상상에 맡길 일이지만, 앤드루 와이어드 자신은 그림 속의 크리스티나가 들판에서 열매를 따는 중이었다는 설명을 한다. 내가 중학생 시절 발견한 소설책 표지의 크리스티나는 들판에 버려진 여인처럼 다가왔지만, 앤드루가 설명하는 크리스티나는 고난 속에서도 삶을 경건하게 살아가는 강한 여인 인 듯 하다.

Andrew Wyeth (artist)
American, 1917-2009
Wind from the Sea, 1947
tempera on hardboard
overall: 47 x 70 cm (18 1/2 x 27 9/16 in.) framed: 66.4 x 89.5 x 7 cm (26 1/8 x 35 1/4 x 2 3/4 in.)
Gift of Charles H. Morgan
2009.13.1
이 그림은 와이어드가 크리스티나의 방 창문을 그린 그림이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 워싱턴의 국립 미술관 소장품이다. 1947년 크리스티나의 ‘창문’이 그려졌고, 그 후에 ‘크리스티나’가 그려진 모양이다. 만약에 내 곁에 함께 그림을 보는, 내가 편하게 말해도 되는 사람이 있어서, 내가 소근소근 속삭일 수 있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있잖아, 이 그림 앞에 서면, 바람이 분다. 따뜻하고 고요한 바닷바람이 산들산들 들어와서 레이스 커튼을 살짝 흔들지. 그러면 레이스에 새겨진 새가 날아오르고, 꽃잎들도 이리저리 떠돈다. 이 그림 앞에 서면 흐린 날 바다에서 불어오는 소금냄새 섞인 따뜻한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흔들고, 그리고 갈매기 울음 소리가 들려. 너도 갈매기 소리가 들리니?” 대개 혼자 그림을 보러 돌아다닐 때, 나는 혼자 누군가에게 종알거린다. 내 종알거리는 소리가 어디로 가는지 나도 모르겠다. “있잖아, 언젠가 너도 와서 봐봐.”
제비꽃
내게는 ‘제비꽃’으로 기억되는 한 사람이 있다. 나는 그이를 딱 한번 본 것으로 기억한다. 어쩌면 내가 성장하면서 몇 차례인가 스쳤을 것인데, 내가 원래 수줍음이 많고, 반사회적이었던 나 자신이 사람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성장한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내가 그를 보고, 그가 나에게 미소를 던졌대도 내가 기억을 못 할 가능성이 크다. 나는 그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사람들이 그이에 대하여 평한 것을 대체적으로 정리해보면, 그는 보름달처럼 인물이 환하고 고우며, 두 뺨은 복숭아처럼 발그레하고, 손재주는 얼마나 좋은지 뜨개질로 다섯이나 되는 오라비들의 겨울 스웨터를 짜 입히고, 자투리 헝겊을 모아 아름다운 조각보나 조각이불을 만들어내며, 반찬 솜씨가 어찌나 좋은지 그 모친이 부엌일을 그에게 모두 전담시켰으며, 온종일 집안일을 하면서도 싫은 내색조차 하지 않고, 언제나 물에 씻은 보름달처럼 환하게 웃는 집안의 보배인데, 딱 한가지, 열두 가지 재주와 미모를 타고난 이 사람에게 딱 한가지 모자라는 것이 있으니, 그만 날 때부터 앉은뱅이라 두 다리를 못쓴다는 것이었다. 분명 나도 어릴 때 이 댁 생일잔치에 가서 맛있는 밥도 먹은 적이 있으니 이 날 때부터 앉은뱅이인 사람을 몇 차례 스쳤으련만, 나는 아무것도 그이에 대해서 기억하는 것이 없었다. 게다가 내가 대학생이 될 때까지 ‘앉은뱅이’를 한번도 목도한 적이 없기 때문에 ‘앉은뱅이’가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소아마비나 혹은 사고로 다리를 다쳐서 목발을 짚거나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많이 보아왔지만, 앉은뱅이라니. 앉은뱅이가 무엇일까?
내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앉은뱅이란, 제비꽃 노래 속에만 존재했다.
보랏빛 고운빛 우리집 문패꽃
피고지고 또 피어 앉은뱅이 랍니다.
이른 봄날, 추운 봄바람을 무릅쓰고 피어나는 아주 작은 제비꽃을 사람들은 앉은뱅이꽂이라고도 불렀나 보다. 내가 자란 시골에서는 ‘제비꽃’으로 통했지만, 내 고모들이 서너 살짜리 조카 애를 데리고 앉아 무용까지 곁들여서 가르쳐준 노래 가사는 이 제비꽃이 ‘앉은뱅이 꽃’이라고 일러준다. 내가 서너 살 때 초등학교 고학년이었던 우리 고모들은, 나를 세워놓고 ‘선생님 놀이’를 한다고 여러 가지를 가르쳐줬는데, 그렇게 배운 것이 이 노래와 무용이었다. 피고지고 또 피어 앉은뱅이랍니다 라고 할 때는 두 손을 반짝반짝 하여 피고지는 것을 표현하다가 막판에는 바닥에 주저앉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어린 마음에 노래와 율동이 재미있어서 참 열심히 그것을 익혔었다.
그래서, 내 머릿속에 ‘앉은뱅이’란 보라색 제비꽃이다. 그래서 내가 다 자라도록 사람들이 ‘앉은뱅이’ 얘기를 하면 나는 그 사람이 제비꽃에 둘러싸여 앉아있는 풍경을 떠올리곤 했다.
그런데 내가 대학생이 된 후에 어느 가을날, 시골집에 가니 생전 처음 보는 여인이 마당 멍석에 앉아 콩을 까고 있다가 다가서는 나를 발견하고는 달처럼 환하게 웃는 것이 아닌가, 이 처음 보는 여인이 내 집 마당을 제 집 마당처럼 차지하고 앉아 내 이름까지 부르면서 알은체를 한다, “네가 온다더니 정말 오는구나. 너 정말 이제 어른이 다 되었네! 너 밥 먹었니? 배고프지?” 이 낯선 사람은 자기가 마치 평생 나를 알아온 것 같은 태도로 내 집 마당에서 나를 맞이했다. 나는 이세상에서 이렇게 얼굴이 환하고, 얼굴이 복숭아같이 발그레한 여인을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고 검은 눈망울하며 환하게 웃는 그 붉은 입술이라니!
나는 여전히 전혀 사교성 없는 표정으로 어정쩡하게 내 집 대문을 향해 걸어가고 마는데, 그이가 “너 배고프지!” 하면서 밥을 차려주겠다는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나’ 부지런히 역시 대문으로 향했는데, 그제서야 나는 내가 평생 그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앉은뱅이’를 눈앞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이 달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바로 그 ‘앉은뱅이’였다. 그이는 두 팔을 다리처럼 세우고 그림자처럼 가느다란 하체를 바닥에 질질 끌면서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느릿느릿 바깥마당을 가로질러, 대문간을 지나 부엌으로 갔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 풍경을 바라보는 수 밖에.
그렇게 나는 나의 ‘제비꽃’을 만났다. 가을 걷이가 분주하게 되자 농사를 짓던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이 부족했고, 그래서 먼 일가붙이인 ‘제비꽃’이 일손을 거들 겸 우리 집에 와 있었던 모양이었다. ‘제비꽃’ 저녁상을 다 차릴 즈음에 할아버지 할머니도 하루 일을 마치고 늬엿늬엿 넘어가는 해님과 함께 집안으로 소를 끌고 오셨고, 그렇게 우리들은 별 말도 없이 ‘제비꽃’이 차려주는 밥을 달게 먹었다. 제비꽃이 차린 밥상에서는 향기로운 ‘달’ 냄새가 났다.
그 해 가을에 나는 한 일주일쯤 시골집에 머물렀고, 그 ‘제비꽃’과 한 방에서 자고 일어났다. ‘제비꽃’은 우리 고모들과 비슷한 또래로, 먼 친척 아줌마 뻘이었다. 그 때 서른이 넘은 나이였고, 내 고모들은 이미 아이 엄마들이 되어 있었지만, 제비꽃은 전설처럼 환하고 예쁜 처녀였고, 나이를 분간하기 힘든 신비한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조금씩 조금씩 제비꽃과 말을 섞어갔지만 그렇다고 이야기를 많이 나눈 것도 아니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일을 거들러 시골에 내려간 것이었으므로 주로 가을걷이를 도우러 밭으로 나가 살았고, ‘제비꽃’은 집안일을 챙기느라 집과 마당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제비꽃은 내가 서울 집으로 향하던 그날, 마당 가에 앉아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었다. 참 희고 환한 얼굴, 까만 머리, 그리고 뺨이 발그레한 아가씨.
그것이 제비꽃과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몇 해 후에 나의 제비꽃이 집안에서 혼자 농약을 먹고 명을 끊었다는 소식을 인편에 들었다. 그의 마지막을 보러 간 고모들이 전했다, “죽어서 드러누워 있는데 어쩌면 인물이 그렇게 곱던지. 얼굴이 달덩이처럼 환하고, 살아있을 때처럼 뺨도 붉그레 하고 곱더라. 참 착한 아이였는데……생전 찡그린 얼굴을 못 봤는데……죽어서도 참 곱더라……”
나는 그 사람을 ‘제비꽃’이라고 부른다. 내게는 먼 일가붙이 친척이고, 우리 고모들 또래의 ‘아줌마’뻘이지만, 그이는 하도 달처럼 곱고 아름다워서 다른 이름은 그이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내게 영원한 ‘제비꽃’이다. 나는 이세상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을 또다시 본 적이 없다. 들판에 앉아있는 크리스티나의 뒷모습을 볼 때, 사람들은 어떤 상상을 할까? 나는 크리스티나가 문득 고개를 돌려 관객을 쳐다볼 때, 어떤 얼굴이 나를 보게 될지 알 수 있다.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면, 거기 나의 ‘제비꽃’이 웃고 있을 것이다. 농약 먹고 죽을 때 얼마나 속이 아팠을까……하지만, 사는 것이 농약보다 더 아파서 죽었을 터이지. 나의 제비꽃. 피고지고 또 피어 앉은뱅이가 되었지만, 해마다 봄눈을 뚫고 피어나는 꽃.
처음부터 느꼈지만,, 글을 참 잘 쓰시는 것 같아요..
답글삭제문화예술 잡지의 한 페이지를 장식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
@cANDor - 2009/10/08 22:11
답글삭제칭찬 감사합니다. 누군가 내 글을 읽고, 참 좋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단 한사람을 위해서라도 정성껏 글을 쓰고 싶어요. 블로그가 그 세상을 열은 셈이지요.
글을 다 읽고 나서 드는 애잔한 느낌에 잠깐 찌릿했습니다.
답글삭제@Ovwrd - 2009/10/09 20:20
답글삭제제가 좀 잡문쟁이 기질이 있긴 하죠.(-.-). 그게 제 한계입니다. 딱...영화 간판쟁이 스타일... 그래도, 칭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RedFox - 2009/10/10 02:42
답글삭제잡문쟁이시라뇨. 만약 Redfox님의 글이 잡문이라면 제 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