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10일 토요일

[영화] 여우와 아이, The Fox and the Child

 

Winslow Homer 의 The Fox Hunt (여우사냥) 이라는 1893년 유화 작품이다.  윈슬로 호머의 그림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고,  명색이 '미국미술' 블로그를 열어놓고서 '프랑스 영화' 이야기를 하기가 난감하니까, (나는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그냥 슬그머니 미국화가의 그림을 짤방으로 올리는 식으로 이 난감함을 모면해 보려는 것이다.

 

윈슬로 호머 페이지를 열면, 이 여우사냥 그림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었다. 내가 참 좋아하는 그림이다. 윈슬로 호머의 삶과도 통하는 바가 있고.

 

DVD로 프랑스 감독이 제작한 영화를 봤다. 제목은 Le renard et l'enfant (2007). 여우와 어린아이.  영어로 소개된 영화 제목은 The Fox and the Child.  영어판은 케이트 윈슬렛 (Kate Winslet) 이 나레이션을 맡았고 내가 본 것도 영어판이다.

 

프랑스 산골에 사는 한 소녀가 숲속에서 여우를 발견한 이래로 여우에 대한 도서관 책을 읽기도 하고 여우에 대하여 이해하면서 마침내 여우와 친구가 된다는 동화같은 이야기이다. 자연 다큐멘터리 양식을 취하고 있긴 하지만 다큐멘터리로 보기는 힘들고,  사실과 허구의 중간쯤에 위치한 영화라 할 수 있다.

 

IMDB 의 관련 페이지: http://www.imdb.com/title/tt0756648/

 

 

 

내가 '여우'라는 존재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2009년 봄날 어느날, 나는 내 집 뒷마당 언덕에 여우가 나타난 것을 보았다. 내가 살고 있는 북미 지방에서는 이곳에 자생하는 여우를 Red Fox 붉은 여우라고 부른다. 북미의 붉은 여우라는 종 일 것이다.  우리집 뒷마당 언덕에는 우드척들이 사는 굴이 있었는데 그 굴을 여우가 접수하고 새끼를 네마리나 낳아 키우고 있었던 것이었다.  (혹은 새끼들을 이끌고 이사를 왔을지도 모른다).  여우를 발견한 날 부터, 나는 '여우 관찰'이 시작되었고, 여우 관련 자료들을 꽤 열심히 뒤졌다. 나는 여우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내 식대로 찾아냈고, 덕분에 여우 새끼들이 자라나는 풍경이 내 사진 앨범에 많이 남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내셔널 지오그라피'  다큐멘터리를 보는듯 했다고 내게 소식을 전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내가 너무 가까이 다가간 탓이었을까,  어느날 홀연 여우가족이 뒷마당에서 자취를 감췄다.  여우 어미는 이사를 가버린후 딱 한번, 그가 살던 뒷마당에 나타나 나를 딱 한번 쳐다봐 주었다. 그날 아침, 그 여우의 눈빛을 나는 잊을수가 없다.

 

나는 내 홈페이지에 여우 관련 기록을 남기기도 했지만, 수백장의 여우 사진들을 모두 풀어놓은 것은 아니어서, 나의 여우새끼 사진들은 그대로 내 앨범에 남아있고, 나는 이 자료를 언젠가 잘 엮어보리라는 생각만 한채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 지금도 나는 '여우' 관련 자료는 열심히 읽고, 심지어 디비디 가게에서 여우 영화가 눈에 띄었을때도 내 여우가 내곁에 와서 말을 거는듯한 느낌으로 그것을 집어들어 보게 된다. 

 

영화속의 프랑스 여우는 나의 북미 빨간여우보다 몸집이 통통하다. 생김새는 거의 일치하지만 몸집이 통통한 것으로 보아, 내가 추측컨대 영화에 등장한 여우는 '야생여우'가 아닐것이다. 동물원에서 사육하거나 어떤식으로 인간이 길들인 '인간의 여우'를 등장시킨 듯 하다. 야생여우는 몸이 굉장히 홀쭉하며 눈빛이 예리하고 움직임이 굉장히 기민하다.  그러니까,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어떤 주제에 대해서 아주 상세히 알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게다. 나는 여우의 생태를 자세히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영화의 허구성을 잘 읽는다. 보통사람은 속여도 '잘 아는' 사람을 속이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이 영화의 그러한 허구성이 이 영화의 '미덕'을 깎아내리지는 못한다.  특히나 여우와 인간이 교류하게 될때, 여우와 인간이 친구가 될 때, 어떤 비극이 일어날수 있는지 이 영화는 정확히 잘 보여주고 있다.  인간은 이기적이고 뭐든 소유하고 싶어하고...거기서부터 우리 삶의 비극성을 피할수 없게 된다.  하지만, 이것이 단지 여우와 인간의 문제일까?  모든 '관계'가 그러한 것이 아닌가?  내가 너의 목에 올가미를 묶어 너를 내것으로 길들이려고 시도할 때부터,  그때부터 이 관계는 잘 못 되어가는 것이겠지. 

 

미국작가 나다니엘 호오손 (Nathaniel Hawthorne)은 '큰바위 얼굴' 혹은 '주홍글씨'로 한국의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져있다. 그의 동화중에 The Snowman 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눈사람 이야기.'  어린아이가 눈사람과 친구가 되었다.  눈사람과 친해지니 눈사람이 추위에 떨고 있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그래서 눈사람을 데리고 따뜻한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온다. 눈사람이 어떻게 되겠는가?  결국 비극으로 끝난다.

 

이 영화의 제목을 잘 들여다보자.  '여우와 어린아이'이다.  여우가 앞에, 어린아이가 뒤에 온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어린아이이고 그 어린아이의 관점에서 영화는 이어진다. 그러나 제목은 '여우와 어린아이'이다.  내 삶의 주인공은 나 자신인데, 내가 어떤 대상을 바라볼때, 어떤 대상에 관심이 생기거나, 애정을 느낄때, 이 원칙을 기억하면 좋을 것이다. 주인공은 나이지만, 내가 앞에 세워야 할 것은 '저것'의 주체성이다. 저 사람의 입장. 너의 입장을 나는 먼저 고려해야 한다. 그것이 나의 주체성과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여우를 사랑한다는 일은, 여우의 입장을 내 입장보다 더 고려하고 존중해줘야 한다는 뜻이다. 

 

설령, 그 우정이 혹은 관계가 끝난다해도, 내 입장보다는 그의 입장을 앞세워서 생각하고 존중하는 것이 관계의 도 일 것이다.  여우가 인간의 곁에 머물지 않는 이유는, 여우 때문이 아니라, 인간 때문이다.  소녀의 말이 옳다.  내 여우가 내게서 떠난 것은 나 때문이었을것이다. 나의 이기심 때문이었다.

 

아름다운 영화이다.

 

 

 

ageorgetownspring_036.jpg

 

내 손끝의 고기조각을 먹기 위해 조심스럽게 굴 밖으로 나오는 새끼여우. 녀석의 촉촉한 코끝은 달콤했었다.

 

 

 

 

댓글 1개:

  1. 음, 단지 여우 영화를 빌려다 본 것만으로도 나는 내 여우가 아직도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데, 몇달전 디비디 가게에서 나는 그 영화 제목을 봤었다. 그런데 대출되고 없었다. 이번에 갔을때, 역시 그 자리에 디비디가 없었다. 모두 대출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한숨을 내쉬면서 어정거리고 있었는데, 아주 엉뚱한 곳에 그 디비디가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 누군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가 막판에 맘이 바뀌어 아무데나 놓아두고 가버린 형상이었다. 그래서, 운좋게도 내가 그것을 빌려 볼 수 있었지... 여우가 살던 굴에 본래의 우드척들이 다시 와서 산다. 나는 우드척들을 내다보며 나의 여우를 생각한다. 영화속의 여우는 통통하지만, 나의 여우는 날씬하고 눈이 더 발랄했으며 하늘을 날듯 뛰어다녔었다. 지금도 그러할 것이다. 나의 여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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