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 1일 수요일

할아버지의 달걀 피라미드

나는 어쩐 일인지, 우리 아버지에 대한 기억보다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훨씬 생생한 편이다.

아버지는 무조건 '권력자'였고 나의 단점을 가지고 나를 궁지로 모는 '무서운' 존재였다.

할아버지는, 괴상하고 퉁명스러우며 비사교적인 사람이었지만, 내게는 무조건 사랑을 주는 사람이었다.

 

우리 할아버지가 옛날에, 일제 식민지 시절에 '만주'지방에서 가솔을 거느리고 살던 시절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 당시 공장 건축 관련 일을 하신 듯 하다.

아무튼 매일 일정하게 출퇴근을 하는 직종이었을것이다.

 

할아버지는 매일 새벽이면 인근의 산으로 달려가서, 냉수마찰을 하고 운동을 하고 돌아오는 일상을 이어갔다.  내가 기억하는 한, 우리 할아버지는 평생 매일 아침에 산에 뛰어 오르셨으므로, 내가 태어나기 한참 전에도, 우리 아버지가 태어나기 전에도 아마 그러셨으리라 추측한다.  아침마다 산에 뛰어오른 사나이. 그 분이 내 할아버지이다.  (아 그러니까, 그런 할아버지의 후손인 내가, 매일 거르지 않고 겨우 3마일정도 아침 산책을 다닌대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아흔 몇살인가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그런 생활을 유지하셨다.  (내가 플로리다에서 공부 할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나는 장례에도 가보지 못했다. 그때는 무척 서운했지만, 지금은 별로 개의치 않는다. 내 핏속에 할아버지가 살아 흐르는데,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만주에서 살고 있을때, 어느날 이웃 아주머니가 새댁이던 우리 할머니에게 마실을 왔다.

 

       이웃: 아이구 글쎄, 저 산위에 나물캐러 갔는데, 나무 밑에 계란이 소복히 쌓여서 산을 이루고 있지뭐야. 그래서 가봤더니, 다 먹고 난 빈 껍데기더라구. 누가 계란 껍질을 그런데다 쌓아 놨을까?

 

우리 할머니는 혼자서 픽 웃고 말았다.  아침마다 산에 올라가는 할아버지의 '소행'이 분명했다.  할머니는 새벽마다 운동 나가는 할아버지에게 날계란을 하나씩 드렸다. (당시에 날계란은 보약이나 마찬가지였다.) 할아버지는 그 날계란을 깨지지 않게 손에 쥐고 산에 오른후에, 산 꼭대기에서 맨손체조하기 전에 그것을 따서 먹은 모양이었다. (날계란 먹는 방법: 젓가락이나 가느다란 나뭇가지로 계란 위아래를 톡톡 두드려 구멍을 낸다. 한쪽 구멍으로 계란이 흘러나오면 그것을 빨아 먹는다. 나는 그렇게 못 먹는데, 집안 남자들이 날계란 먹는 것을 자주 보았다.) 

 

우리 할아버지는, 매일 새벽 한개씩, 날계란 껍데기로 산을 쌓은 사람이다.

 

할아버지가 매일 하는 운동만큼 빼놓지 않고 꾸준히 저지른 소행이 '음주'이다. (깔깔).

나는 술을 어떻게 배웠냐하면, 밥상머리에서 할아버지 약주 딸아 드리면서 배웠다.

할아버지에게 네명의 손주 (우리 아버지의 자식들)이 있었는데,

밥상머리에서 우리들의 기쁨이 뭔가하면

할아버지께 약주를 딸아드리는 '기회'를 얻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경쟁적으로 술병을 차지하여 할아버지의 술잔을 채웠다.

돌이켜보니 할아버지는 참 행복하셨을것 같다.

밥상머리에서 코흘리개 손주녀석들이 조롱조롱 쪼그려 앉아

할아버지한테 술 딸아 드리겠다고 서로 경쟁질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이쁠것인가.

 

내가 볼때, 할아버지는 평균 하루에 소주 한병 이상의 술을 끈질기고 줄기차게 드셨다.

셈을 해보자. 아침에 몇잔, 점심때 몇잔, 저녁에 몇잔 (주로 밥상에서)

그 외에도 들에서 일하다 말고 새참에도 몇잔

기분이 좋아서 몇잔

옆집에서 부침개를 가져왔다고 안주삼아 몇잔.

소주 한병을 훨씬 상회하는 양을 매일 드셨을것이다.

 

우리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음주를 탓하지 않으셨다.

시시철철이 온갖 과일에 소주를 부어 과일주 항아리 항아리 만드셨다

겨울에는 누룩을 사다가 전통 약주술도 직접 담그셨다.

우리들은 과일주에 담겨있던, 술에 쩔은 과일찌꺼기, 술찌게미 이런것을 '간식'으로 먹고 컸다. 하하.

 

그런데, 어느해부턴가,

우리 시골집 뒷마당에 초록색 소줏병이 쌓이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지극정성으로 할아버지의 술을 제공하다가, 어느날 문득,

"이노무 소줏병 지긋지긋하기도 하여라. 도대체 나 죽을때까지 몇병이나 비워댈지 내가 헤아려보겠노라!"

이렇게 작심을 하고는 소줏병들을 처분하지 않고 비워지는 족족 뒷마당 장독대 옆 공터에 쌓아놓기 시작한 것이라.

 

할머니가 돌아가시기까지 소줏병이 쌓여갔는데,

그 결과 우리 시골집 뒷마당에는 '초록색 피라미드'가 생겨나서

동네의 명물이 되었으며

이집트에서 외교사절이 왔을때, 대통령 부인께서 친히 우리집 뒷마당까지 손님들을 이끌고 와서

한국에도 피라미드가 있다는 것을 친히 설명하곤 하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가산을 정리할 무렵, 시골집도 건설업자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되었는데

(수지지구에 효자 초등학교가 있는데, 거기가 우리집에서 내려다보이던 우리집 큰 밭이었다...)

그때, 그 기념비적 초록색 피라미드가 해체되고 말았다.

그후로 이집트에서 외교사절이 와도 우리의 대통령께서는 딱히 보여줄 것이 없어서 한숨을 지으셨다고 '전설따라 삼천리'에서 전한다.

 

 

 

 

 

댓글 7개:

  1. "지금은 별로 개의치 않는다. 내 핏속에 할아버지가 살아 흐르는데,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큰 깨닳음을 얻으셨습니다.[요즈음은 50에도 지천명을 하는이가 드물던데.. 40대에 지천명을 하셨습니다.]

    ***

    소주병피라미드, 계란피라미드 ... 재미있는 참으로 재미있는 이야기였습니다.

    할아버님 할머님을 님에게서 보니 이것이 바로 님의 피속에 살아계시는 할머님 할아버님이 아니겠습니까>



    ******

    고향이 용인인 듯합니다. 수지, 효자, 지명이 낯이 익어서...



    기념비적 초록색 피라미드의 해체를 슬퍼하며....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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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이 사람, 아직도 허풍치는 데는 일가견이 있군. 이집트 대통령 부인 얘기에 잠시나마 깜빡 넘어갔네.



    찌게미 -> 지게미



    딸아드리다 -> 따라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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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미소영 - 2010/09/02 03:33
    예. 지난 여름에 한국 갔을때, 동생이 차로 데려다줘서 고향에 가 봤는데, 지금은 혼자서 찾아가기도 힘들 정도로 변했습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이, 우리집 밭 자리가 '초등학교'로 변해서, 그 초등학교를 찾아가면 더듬더듬 옛 흔적을 떠올릴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 학교이름이 '효자초등'인 것은, 우리 집 건너편에 '효자비 각'이 서 있었기 때문 일 것입니다. 집안에 큰 효자가 나서 나랏님이 비와 함께 그 비를 보호할 '각'까지 하사하셨거든요. 그 전에는 '정문'도 있었는데, 정문은 없어지고, 그대신 정문 앞에 있던 집을 우리들이 '정문집'이라고 불렀지요.



    이웃마을에는 오래된 서원도 있어서 그곳을 '서원말'이라고 불렀는데, 서원이 아직 남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고모들이 다니던 수지초등학교고 여전하고

    아버지가 청년시절 재직하시던 문정중학교도 여전하고

    학교들은 여전한데

    산천이 모두 파헤쳐져서 옛자취를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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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King - 2010/09/02 07:55
    허풍이 아니고, '해학'이라 하오~



    난 심각하게 인상쓰고 읽어야하는 글은 쓰고 싶지 않아.

    나로서도 재미가 없으니까.

    웃자고 쓴 걸 가지고 너무 심각하게 생각지 마셔~ :-)

    한번 웃고 지나가면 그뿐.



    (맞충법은 나 대신 좀 고쳐주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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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저희 친정아버님쪽 선산이 수지에 있답니다.

    가보지 못하고 그냥 미국으로 온 게 어떤 땐 마음에 덜컥 걸렸는데

    할아버지 피가 내 속에 흐르고 있다 생각하니

    죄송스럼이 덜해지네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신문에 쓰시는 글도 잘 읽고 있습니다.

    해서 오늘도 영자 신문에서 기사 하나 읽었습니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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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이미순 - 2010/09/03 11:49
    아, 그러면 결혼전 본적지가 용인이시겠군요

    용인 수지 바닥이 그리 크지 않아요.

    옛날에는 그 바닥에서는 이름만 대도 아무개집 몇째 인지 그냥 족보가 줄줄 나올 정도였습니다.



    어디 이씨 이신가요?

    그 쪽에는 전주이씨하고 성주이씨들의 집성촌이 모여있었거든요.



    :) 새삼,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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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이미순 - 2010/09/03 11:49
    ㅎㅎ..내가 아는 미순씨인듯합니다.. 칼럼 쓰시는 거 시작하셨나봐요.. 신문찾아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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