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얏나무 아래선 갓끈을 고치지 말고
외밭에선 신발끈을 고치지 말라고 했다.
동방의 어느 나라에서는 모 고위관리의 자녀가 하필 그 고위관리 소속 기관에 '특채'가 되었다해서 특혜냐 아니냐 논란이 되는 모양이다. 이런 뉴스를 접하니, 내 쓰라린 옛 기억이 떠오른다. (세상에 쓰라릴 것도 많구나, 얘야! <--- 하늘에서 예수님이 한마디 하시다)
아버지는 대학에 계셨다.
아버지는 내게 그 대학에 입학하라고 지도하셨다. 교직원 자녀는 학비 면제라는 합법적 특혜를 누릴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수성가한 가장에게 자녀 학비 절감은 중요한 이슈였을것이다. 그래서 나는 선택의 여지도 없이 아버지가 재직하시던 대학에 입학했다. 내게는 거기가 '나의 학교'라기보다는 '아버지의 학교'라는 의식이 강했고, 모든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어떤 강박증 까지 생겼다. '모두가 나를 보고 있으며, 내가 행동을 잘 못하면 우리 아버지가 망신을 당하고 말거라는 불안감.' 나는 아버지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서 노력했다. 늦게 배운 도박질에 날 새는줄 모른다고, 늦게 시작한 공부에 날새는줄 모르게 공부한 측면도 있고, 아버지의 위신을 지켜드려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고 해서 내 성적은 '타의 모범이 될만'했다.
그런데, 그래도 여전히 나는 스스로가 개운치 않았다. 성적이 좋으면, 그것이 내 실력때문인것인지, 아버지와 친구인 교수님들이 그냥 내 성적을 잘 주신것인지 애매하게 느껴졌다. 그런 상황 자체가 개운치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객관적으로 나의 실력을 증명할 만한 시험들을 치거나, 학교 바깥에서 내 실력을 가늠하는 활동들을 했다. 그래서 시험으로 통과한 것들이 몇가지가 있다. (나의 실력을 증명할 만한.)
학교의 원로 교수님들은 모두 아버지와 친구 관계였기때문에, 나는 원로 교수님들을 슬슬 피해다녔다. 그 대신에 최근에 신규 임용된 교수님들. 아버지를 전혀 모르고, 아버지와 나의 관계를 전해 모르는 젊은 교수님과는 비교적 친근하게 지냈다. 나는 교수님들에게 인정 받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내 후광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나를 평생 돌보시는 내 은사님은, 아버지의 존재 이전에 나의 존재를 먼저 발견하고 나를 사랑해주시던 분이다.
나의 이런 우울감은 극에 달해서, 학교에서 멀찌감치 아빠가 보이면, 나는 다른 길로 피해다녔다. 아버지와 학교에서 마주치기도 싫었다. 아버지를 아는 사람은 모두 피하고 싶었다 (나도 내 영역이 필요하니까 말이다.) 남들은 '젊음의 향연'이라는 대학생활이 내게는 감옥과 다를것이 없었다. (단, 감옥에서도 사람들은 나름 즐거움을 찾는다.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까.) 어느해에 내가 무슨 큰 상을 받았다. 학장님이 나를 불러서 상장과 상금을 전달해주시고, 뭐 사진도 찍고... 나는 벌쭘하니 상 받아다가 상금은 술값으로 탕진을 하고... 그런데, 그 때 아버지가 무척 서운해하셨다 -- "너 왜 상받을때 학장님한테 네 아비가 나라는것 얘기 안했어? 이 학장이 네가 내 딸인거 나중에 알고, 말 안했다고 섭섭해 하더라." (내가 내 실력으로 상 받았는데, 왜 거기서 아버지 이름을 들먹거려야 한다는 말인가? 하하하. 나도 내 영역이 필요하다구!) 아버지는 내가 학교 신문이나 학회지등에 발표한 시, 잡문, 평론 뭐 이런거 샅샅이 읽으면서 '야 여기 맞춤법 틀렸다 임마' 이렇게 지적하기를 잊지 않으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심 나를 무척 자랑스러워하고 계셨다. 아버지의 눈빛을 보면 알수 있었다. 자랑으로 가득찬 눈빛. 친구들에게 나를 자랑하고 싶어하던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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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학을 마칠즈음에, 대학원이냐, 취직이냐, 유학이냐 뭐 이런, 내 또래 친구들이 모두 고민하던 것들을 나도 고민할 즈음에, 우리 아버지가 원칙을 제시하셨다.
* 대학원은 네 실력껏 딴데로 알아서 가되, 학비도 알아서 해결하라. (왜냐....대학원부터는 교원자녀 학비 면제가 해당이 안되므로....)
* 취직은 알아서 실력껏 하되, 대학 근처를 기웃거리지 말라. 행여 부속중고등학교 교사자리라도 탐내지 말라. 설령 네가 실력이 있어서 부속중고등학교에서 불러도 너는 거기 가면 안된다. 내가 여기 있는 이상. 사람들이 씹는다. 그따위 짓 하지 말라.
* 유학은 네 실력껏 알아서 가던지 말던지. 난 돈 없으니 유학자금 못대준다. 알아서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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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대학 졸업과 함께 내 멋대로 회사들을 들락거리며 세상 공부를 하며 살았다. 대학 졸업한 후에는 모교 근처에 얼씬도 안했다. (치사해서 ^^* ...내가 여기 아니면 밥 굶을줄 아는가? 여기는 분명히 아버지의 땅이고. 나는 떠난거다.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난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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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어느해 돌아가셨다. 그리고 이듬해에 나는 내 은사의 연락을 받고 아버지가 재직하시던, 그리고 내가 졸업한 대학에 일을 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내 일은 아버지하고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영자 신문을 만드는 내 고유 영역의 일이었다. 내 은사님은 그 자리를 바탕으로 나를 크게 키우고 싶어했지만, 나는 그 일도 2년만에 그만두었다. 집안 환경상 내가 도저히 일을 계속할수 없어서 부득불 그렇게 되고 말았다.
내 은사님은 그후에도 애면글면 나를 키우고 싶어 하셨고, 당신이 정년퇴직 할 무렵에는, 자신이 비울 그 자리를 내가 채워주기를 희망하셨다. 내가 학위를 마치고 귀국하는 대신에 워싱턴에서 자리를 잡았을때, 교수님은 내게 배신감을 느끼셨을것이다. 나로서는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나도 돌아가고 싶었으나 돌아갈수 없는 입장이었다. 나는 여기에서 이워야할 사명이 있는듯 하다. 내 뜻대로 안 될때는 '소명'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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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우리 아버지를 생각한다.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을때, 엄마의 장롱에서 나오던 무슨 무슨 훈장들을 나는 기억한다.
교육계에 수십년간 봉직한 분들께 나오는, 나랏님이 하사하시는 무슨 무슨 훈장.
우리 아버지는 훈장 몇개 남기고 사라져간 소시민이셨다.
그런 우리 아버지도, 자신의 직장에 딸자식이 얼씬거리는 것을 경계하셨다.
실력이 있으면 딴데가서도 빛날것이니, 딴데로 가라 이거다.
(그것보다는, 아버지 자신이 남들한테 손가락질 당하는 것이 싫으셨을것이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니까).
아버지의 노선이 옳았다.
실력 있으면 딴데가서도 밥 굷지 않는다.
하필 거기가 아니어도 되고
오히려 딴데 가서 더 빛날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 아버지의 자존심이 우리 가족을 안전하게 지켜낸 것일지도 모른다.
그럴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유명세 때문에, 그 자식이 기를 못펴고 지낸다거나, 혹은 자신의 진짜 실력을 객관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우울감 이런것에도 나는 공감하는 편이다. 나는 그 우울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정말로 실력을 닦아야만 했다. 그래서, 한편으로 나는 아버지의 자랑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로서도 힘든 세월이었다. 하여튼 나는 제 아버지 빽으로 취직했다는 소리는 안듣고 살았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아버지가 옳았다. 자존심을 지키며 올바르게 사는 모범을 보인것, 그것이 진정한 아버지의 '빽'이었다. 우리 아버지 빽이 제일 든든한 빽이었던 것이지. 그래서 나는 죽을때도 꽥! 대신에 '빽!'하고 죽을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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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규칙이 이제는 내 남편에게도 적용된다.
내가 우리 아버지의 영역과 내 영역사이에 분명히 금을 그엇듯
(먼저 금은 긋는 모범을 보인이는 물론 우리 아버지이시다),
나는 내 영역과 내 남편의 영역사이에도 금을 긋고 행동하는 편이다.
내가 대학 다니는 동안 '아무개의 여식'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일이 부담스럽고 싫었듯이,
나는 이 세상에서 '아무개의 아내'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지도 않다.
나는 그래서 나를 Mrs. P 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남편의 직무 영역과 관련된 인사들을 아무개의 아내 입장에서 만나는 일은 재미없는 일 중의 하나였다.
나는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 이전에 '나'로 존재한다. 그러고 싶다.
나는 이미 우리 아버지 슬하에서, '네 실력껏 알아서 생존하라'는 방침대로 자랐다.
내가 무슨 일을 이룰때, 아버지빽이 아니었듯, 남편 빽이라는 소리도 듣고 싶지 않다.
남편에게 누를 끼칠 생각도 없고, 그의 직위를 이용해 내 이익을 챙길 생각도 추호도 없다.
나는 나혼자 설때 가장 떳떳하다는 것을 우리 아버지 슬하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남편이 나와 함께 있어주는 것 그 자체가 이미 든든한 바람막이이고, 그것이 이미 빽이다.
그것으로 감지덕지이다. 그 외에는 나는 내 실력껏, 스스로 알아서 자랄것이다.
단지 내가 염려하는 것은 나의 실수나 실언이 남편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사람이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부실한 존재라서, 늘 자신을 돌아보고 경계해야 한다.
내 진짜 빽은 ----> 하느님이다. :)
올바른 아버지에게서 올바른 딸이 나옴은 당연지사!
답글삭제쁘듯하게 읽었습니다.
명품 '빽' 하나 더 가져도 욕먹지 않을 듯하니 하나 더 장만하시길 ...
큰 것으로 ...^*^
당신 훌륭하신 것 잘 알고있어요. Dr. Lee 아니신가. 어느 분 말씀대로 bag 하나 더 사시든가.
답글삭제@King - 2010/09/03 08:42
답글삭제아니, 아니, 내가 잘 났다는 얘기가 아니고라~
이런 사태를 보니까,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훌륭한 '시민'이었는지 새삼 자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지. 비단 우리 아버지 뿐인가? 우리들은 대개 모두 '원칙'을 지키면서 살아야 한다고 배웠고, 그리고 그 원칙을 지키면서 살아가쟎아. 우리 부모님도 모범을 보이셨고, 우리들도 그렇게 살고.
대부분의 시민들이 바른생활 책에서 배운대로 정직하게 살기 때문에 사회가 발전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가끔 그 원칙을 깨는 사람들이 생기고
하필 그런 짓을 저지르는 사람이 고위 공직자일때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는 것이지.
사실 공직자로 사는 일은 참 고달프고 힘들거야
그 자녀로 태어나서 사는일도 부담도 클 것이고.
그런데, 장관의 딸 정도 되면,
'나는 이미 훌륭한 아버지 품에서 남들이 누리기 힘든 복된 삶을 살았다. 그러니 불이익이 약간 있어도 감수하겠다' 정도의 마음가짐은 갖춰야 할걸 아마.
Sandel 도 공익과, 개인 인권 사이의 적절한 조화
복을 누린 사람들의 양보심 이런것 강조한바 있지.
내가 내 힘으로 세상을 헤쳐나왔다고 말할수 있을까?
훌륭한 부모님, 좋은 환경, 타고난 건강, 타고난 인복 이런거 아니고 나 혼자서 뭘 이룰수 있었을까?
근데, 요새 노동절 할인하던데, 나 가방 하나 사되 돼? 헤헤~~~
@미소영 - 2010/09/03 07:24
답글삭제저는 과오 많은 보통 사람이구요,
돌아보면 운이 좋아서 훌륭한 할아버지 할머니 품에서
자랑스러운 부모님 슬하에서
제가 복되게 잘 컸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유명하고 대단한 사람들은 아니었대도
개인적인 신화를 일군 보통 시민들
그 시민들중에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도
계시는건데, 그 평범함이 위대하다는 것을 요즘 깨닫게 됩니다.
미소영님 덕분에 제가 '가방'한개 얻어가질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