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 3일 금요일

부모님 은혜

요즘, 불쑥 불쑥 그리워져서,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얘기를 조금 끄적거렸는데,

해마다 9월이 오면, 그렇게 된다.

아버지가 여름과 가을 사이에 돌아가셨다.

양력으로 이맘때쯤

음력으로 추석 일주일 전쯤.

 

할머니도 이맘때 돌아가셨다.

제사가 아버지보다 일주일 빠르다. (다음주이다.)

 

그래서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그립고 쓸쓸해진다.

 

 

얼마전에 '말실수'를 해서 곤경에 처해졌던 K 모 의원.

그분이 근래에 출당조치 당하고, 여러가지로 괴로운 처지인듯 하다.

나는 그분의 일에 대해서는 큰 관심은 없고,

단 한가지, 그 분의 일이 연일 인터넷 매체에 불거져 나올때,

그의 블로그까지 샅샅이 열람당하고 네티즌들의 비난의 대상이 될때

어느 구석에 실린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어린때부터 수재였던 그가 그야말로 고학 하다시피 공부를 마치고

사법고시까지 통과하고, 연수원 성적도 매우 좋았는데

판검사 임관이 될 수 없는 사정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뭔고하니, 그분이 부친께서 좋지 않은 일로 범법자가 되어 교도소를 들락거렸으며

그가 연수원을 졸업할 무렵에도 교도소에 수감중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법관에 임용이 되지 못했다던가..

 

그 토막 기사를 보니, 그 사람이 의원으로서 저지른 잘못이나 실수, 과오, 이런것을 감안하고서라도

그의 개인사에 대해서 슬픔 같은것을 느꼈다.

 

그때, 나는 내가 얼마나 운좋은 사람인지 다시 깨달았다.

우리 부모님은 유신시대의 경제개발기를 거친,

대개 고만고만한, 자수성가형 평범한 분들이다.

나는 초등학교에 다닐때, 남들이 다 사먹는 길거리 떡볶이도 사먹을줄 몰았다.

돈도 없었고, 그런것을 내가 사먹을 처지가 아니라는 생각도 했고,

원래 뭘 사먹으면 안된다고 생각도 했고.

그렇다고 밥을 굶은것도 아니고

그냥 남들만큼 가난했고, 남들만큼 먹고 살았다.

나라가 성장하는 만큼, 우리집 살림도 폈고, 그래도 우리집은 항상 긴축재정이었다.

아버지 월급으로 네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대학교육까지 시키기 위해서는 항상 긴축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유복하지도 궁핍하지도 않은 아주아주 평범 그 자체인 성장기를 거쳤고

우리 부모님에 대한 내 인상도 그러한 것이었다. 그냥 평범한 부모님.

 

그런데, 돌아보니, 내 부모님이 평범한 분들이지만, 이 세상에 평범하기가 쉬운게 아니더라.

나는 부모님이 부끄러웠던적이 없었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 집안의 자랑이었고, 집안의 기둥이었다.

일가친척들 사이에서도 모두들 우리 집이 번성한다고 부러워했다.

할머니에게 외아들은 천하에 남부러울것이 없이 훌륭한 아들이었다.

우리들은 가난하지만 자존심을 지키며 지냈다.

나는 남들 앞에서 기죽을 것이 없었다. 남부끄러울것이 없었으니까.

 

내가 사회에 나가서 뭔가 하고자 할때

우리 부모의 사회적 위상이나 이력이 나를 방해한 적이 있는가?

아니다. 우리 부모님이 나의 후광이 되어줄 지언정 방해가 된 적이 없었다.

내가 결혼할때 우리집안의 내력이나 부모님이 장애가 된 적이 있는가?

아니...생각컨대, 우리나라 어느 명문 집안, 어느 재벌집안과 비교해도 나는 꿇릴것이 없었다.

내 집안이 명문이건 아니건 돈이 많건 적건간에 나는 꿇릴것이 없었다.

(혹시라도 내가 일류대학을 안나왔다고 상대 집안이나 상대가 얕잡아볼지도 모르겠으나, 그건 그쪽의 실수인 것이지 나와는 무관한 일이었을것이다.)

 

아무튼 나는 부모님이나 집안 문제때문에 어디 가서 기 못펴고, 장애를 겪고 그럴 소지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축복인지, 나는 여태 모르고 살았다. 40년이 넘게 그걸 몰랐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념이나 사상문제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사상범, 정치범들도 많이 계시고

이런분들은 정치사의 변화에 따라서 명예롭게 사회에 복귀하기도 하고 그랬다.

부모님이 사상범이나 정치범이라고 한다면, 혹시 여러가지로 문제를 겪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나의 자존심이나 존재감에 흠집이 생기는 일은 적을 것이다.

어쩌면 내면적으로 자부심을 키울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파렴치범이라던가, 이런경우에는 ...명예회복이 쉽지 않다.

그러니, 그런 상황속의 자녀들은 생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고난을 겪게 된다.

떳떳치 못한 부모의 자식이라는 그 자괴감을...누가 위로할수 있을까...

 

이런 저런것을 돌아보건대,

나는 기가막히게 운이 좋은 사람들중의 하나라는 것이고,

그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행운아들은, 자신의 행운을 남들과 나눌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그들이 누리는 행운에 대한 예의 일 것이다.

 

나이 먹으니 부모님 감사한줄을 조금씩 깨닫게 되다.

 

 

댓글 2개:

  1. 전 내내 원망이 좀 많았는데 이젠 돌아가시고 나니 원망도 방향이 없이 사라지고, 저나 우리 애들한테 걸림돌 되는 엄마 되지 말아야지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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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사과씨 - 2010/09/04 06:42
    아이고, 저 부모 원망 많이 하면서 살았습니다.

    저야말로 불만투성이 angry little girl 의 화신.

    그렇게 부글부글 불만인채로 살다가

    그 불만이 해소되고, 내가 모든 상황을 긍정하게 된 것이

    제가 플로리다에서 공부 시작하면서.

    그때부터, 인생에 진심으로 감사하게 되었고

    주변을 원망하기보다는 감사하게 되었지요.



    그러니까, 저는 공부를 지속하지 못한 것에 대한

    개인적인 '한'이 따라다니다가 공부를 재개하면서

    그 한이 풀린 케이스로 보입니다.

    내 실력대로 내 능력껏 찾아간 길이니까.

    남편이 착실히 한 2년 학비를 대줬고

    틈틈이 엄마와 오빠와 언니도 학비를 보탰고

    남편이 아니었으면, 공부 다 못마친 한을 품고

    지옥에라도 갔을겁니다. 남편이 한을 풀어준 은인이지요.



    그 후로는 아무도 원망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지금 제가 누리는 모든 것이

    부모님 덕분, 남편 덕분, 주위 사람들 덕분. 하느님 덕분. 그렇습니다. 저 처럼 개인적인 '한'을 살아서 풀고 떠나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제가 운이 억수 좋은거죠. 공부가 그렇게 한이 된줄은 저도 잘 몰랐던 것이지요. 한이 되는게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풀어야...그래야 할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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