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31일 토요일

[산책] 2010년 7월 31일 (토) Lake Burke 2010

아침에 지팔이가 메릴랜드로 캠프를 가는데, 모임 장소까지 바래다주고

거기서 멀지 않은 Lake Burke 로 산책을 다녀왔다. (http://www.fairfaxcounty.gov/parks/burkelake/)

7월의 마지막 날, 토요일.

토요일 아침이라서 그런지 주차장에 차들이 그득했다.

낚시 하는 사람들도 많이 보이고.

후텁지근한 날씨라서 기운이 빠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왕눈이와 쉬지 않고 걸었다.

호수 한바퀴 도는 트레일은 공식적으로 4.5 마일 거리.

 

 

 

호수 물에 비친 하늘, 구름

 

 

 

내 산책의 동반자 왕눈 할아범.

늙은 개 이지만, 불평 않고 헉헉거리면서 나와 동행한다.

참 착한 개 이다.

아침 나절에 다녀오더니 지쳤는지 내방 화장실, 서늘한 타일 바닥에 배깔고 종일 잔다.

 

 

 

호숫가, 나무가 울창해서 오마일 가까이 걷는 내내, 햇볕에 노출될 일이 별로 없다.

호수가 가까이, 멀리 다가왔다 멀어졌다...물은 고요하고 물속에 물고기들이 한가롭다.

 

 

 

 

호숫가에서 물 속을 들여다보는 일이 참 좋다.

물고기들이 보이는데

고요하고, 나른하게 이리저리 헤엄쳐 지나간다.

부드러운 물 표면을 봐도, 좋고.

 

참, 세상은 이렇게도 고요하고 아름답다.

감사한 일이다.

 

 

한국 여성들이 정말 그렇게 게으른가?

아래에, 어느 기업인의 강연 내용에 대한 신문 기사를 긁어다 놓은 것이 있다.

어떤 분이, '서양 여자들은 한국 여자보다 열배나 더 부지런히 산다'는 식으로 애매한 비교를 하신 듯 하다.

뭐...그것이 학교 교실도 아니고 특정 집단의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네 끼리 자화자찬 하는 자리에서 나눌만한 소리가 나온 것 같고, 이런 일에 일일이 논리와 비논리를 구분지어 따따부따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하필 그것이 어떤 이름 난 여성의 입에서 나왔고

하필 나도 그 '한국 여자'라서 모종의 '피해의식'이 발동해서

나혼자 처박혀 있는 이 세상의 구석에서 혼자 쭝얼거려본다.

 

나는 40대 한국 여성이다.

나는 스스로를 많이 가진 사람. 부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중산층이라고 믿고 있다

가진 동산과 부동산 이라고는 두 부부가 노력하여 장만한 경기도 변두리에 아파트 한채

그리고 약간의 저축.

그것 뿐이다.

그외에 뭘 가졌을까 생각해보니

신체 건강한 두 아들 (큰놈은 내년 1월에 군대 들어간다), 그리고, 남들보다 긴 가방끈. 직장, 원대한 꿈. 그리고...행운.

 

나는 40대 한국산 여성이다.

나는 미국에서 10년 가까이 살면서 대학원에서 미국출신 뿐 아니라, 세계 여러나라 출신의 인재들과 협력하고 겨루면서 공부를 했고, 공부를 마쳤고, 그리고 아무튼 미국땅에서 합법적으로 직장을 얻어 합법적으로 먹고 사는 소 시민이다.  (그러면, 나 서양여자들만큼은 해 낸것이겠지...) 내가 '재벌'의 딸이 아니니, 돈 펑펑 써가면서 유유자적 공부한 것도 아니고, 가난뱅이 유학생들이 하는 만큼의 고생도 했고, 내 삶이 주변의 미국인들보다 고생스러웠으되 나는 내가 가난하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내가 고생을 한다는 생각도 안했다.  저 좋아하는 고생이니까. 

 

다시 말한다. 나는 40대 한국 여성이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없이 멋대로 입에서 뱉어내는 '만만한 아줌마' 집단의 한명이다.)

 

그런데, 나는

나의 삶을 '극소수'만이 누릴수 있는 엄청난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나는 나와 비슷한 환경의 내 또래 40대 여성들중에 (혹은 30대, 혹은 20대 여성들 역시) 얼마나 이같은 '행운'을 누릴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내가 둘러보면, 부자이건 빈곤층이건, 한국의 여성들이 어떤 면에서 '딱하다.'  내가 둘러보면, 누구하나 다리 뻗고 편히 자는 사람이 없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전업주부인 내 언니나 올케

혹은 멀쩡히 유능한 사회의 일꾼으로 직장을 다니다가 자녀 양육을 위해서 전업주부의 길을 택한 내 친구들을 보면

이 재능있고 머리좋은 인재들이, 가정에서 해 내는 일도 무시할수 없을 만큼 버겁고, 그리고 한도 끝도 없다.

이들은 단순히

'집에서 노는 사람'

'팔자가 좋아서, 남편 잘 만나서 집에서 놀면서 돈이나 쓰는 여자'

'낮에 식당에 가서 노는 사람'

들로 비쳐질지 모르겠으나, 그 삶을 미세하게 들여다보면, 이들이 참 힘들어보인다.

경쟁이 치열한 한국 사회에서 생존해 내기 위해서 받는 스트레스는, '어마어마'하다...

서양 여자들이 이만큼의 스트레스를 견뎌 낼수나 있을까? -- 나는 가끔 이런 의문을 품는다.

 

그 기업인은, 서양여자들이 한국 여자들보다 열배나 열심히 산다는 식으로 단순무식하게 발언 하셨는데

내가 서양여자들 속에서 이들과 겨루면서 생존하고 있으니 나도 그 여자들만큼은 해 내는 것일테고

(혹은 다른 서양여자들이 해내지 못한 것을 해 냈으니 그들보다 몇배 더 열심히 사는 것일지도 모르는데)

그런 내가 돌아보기에,

나는 내가 전업주부인 우리 언니보다 더 열심히 살아내는 것 같지가 않다...

나보다 한국의 중산층 전업주부인 우리 언니가 더 치열하게, 부지런하게 살아내고 있는것처럼 보인다.

우리 언니, 가끔 골프도 치고, 강남의 한적한 식당에서 점심도 먹는 수준의 삶을 살고 있다.

나 미국에서 골프 안 치고, 한적한 식당 못간다.

나 직장다니고 애들 키우면서 산다.

우리 언니 전업주부다.

그런데 내 눈에 전업주부인 우리 언니가 게으르다거나 한가로워 보이지 않는다.

내가 가끔 한국에 가서 보면, 한가한 주부 별로 없다. 일없이 노는것 같이 보여도, 어딘가 각박하고 쫒기는 삶을 위태위태하게 견디는 것 처럼 보인다.

 

한국 여성들 서양여자들보다 게으른가?

참으로 단순무식한 어떤 비교에 대해서

어떤 사람이 단순무식하게 자신의 잣대로 떠들어댔으니

나 역시 똑같은 단순무식 논리로, 내 잣대로 떠들어보자.

한국 여성들 서양여자들만큼의 '삶의 질'을 향유하는가?

생활은 근사해보이는데, 알맹이가 곯아터지고 있는 것 같다.

내 눈에는 이들이 고통받는것이 보인다.

이들이 정서적으로, 심리적으로 받는 고통은 어쩔건대?

그건 개인의 문제라고 무시할건가?

서양여자들, 이만큼의 스트레스라면 감당 못할거다.

한국여자니까 그래도 아뭇소리 않고 부지런히 견디고 사는 것이지.

 

 

  ***

 

'모나리자 미소 Mona Lisa Smile (2003)' 이라는 쥴리아 로버츠 주연의 영화가 한 편 있다.

그 영화에서 '미술선생'은 총명한 여자 대학생들에게 '여성의 사회참여'를 극구 가르치고 싶어 한다.

제자들 중에서 어떤 매우 총명한 여학생이 '예일'에 진학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똑똑한 제자는 예일에 진학하는 대신에 '주부'의 길을 선택한다.

미술선생은 똑똑한 여학생이 평범한 전업주부의 길을 선택한 것에 대하여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 때 이 제자가 발끈 화를 내면서 미술 선생에게 말한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이 길은 아니다. 나는 내 의지로 훌륭한 가정을 경영하겠다고 선택한거다.

 

 

또다른 여학생이 있다.

이 여학생은 여성의 상급학교 진학이나, 사회참여를 어리석은 일이라고 보고

미술선생을 방해하고 조소를 보낸다.

하지만 결혼하고나서 여성의 현실을 경험한 그녀는 이혼하고 상급학교에 진학한다.

 

이 영화를 보면, '지도자' 혹은 '교사'의 우매한 '독선'이 보인다.

똑똑하면 모두 상급학교 진학하고, 사회 참여하고, 그래야만 승리하는 것이며

똑똑한데도 전업주부를 선택하면 '바보같은' 짓인가?

이야말로 누군가의 삶을 자신의 잣대로 재는 '독선'이다.

 

나에게는 내가 매우 아끼는 제자가 한 명 있다.

나의 첫 제자들중에 하나이고, 20대 어린 친구인데, 내가 의지할 정도로 사람이 참하고 똑똑했다.

나는 이 똑똑한 친구가 석사에서 안주하지 말고 '박사'과정에 입문하기를 내심 바랬다.

하지만 이 친구는 석사를 마치고 어느 국제학교 영어선생자리가 났다며 내 곁을 떠났다.

나는 내심 안타까웠다. 조금 더 공부하면 탑 클래스 대학원에 가서 박사가 될것같아 보였는데...

나는 내 제자에게 '이러한 길도 있다'고 정보만 주었을뿐, 그것을 강권하지는 않았다.

안타까웠지만 하는수 없었다.

사실 박사가 되는것보다, 어느 국제학교에 가서 청소년들을 잘 이끄는것이 어쩌면 이 사회에 더욱 이바지 하는 것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오직 신만이 아실 것이다...

나 역시 어리석은 독선을 범하면 안되는 것이다. 나는 내 제자의 판단을, 하는 일을 존중한다.

 

   ***

 

함부로 남의 삶의 풍경을 재단하는 것은 참 위험한 일이다.

어느 이름없는 개인이 그렇게 하는것도 위험한 일이고

이름난, 존경받는 분이 그런 짓을 하면 그 위험이 더 커진다.

한국 여자들은 동네 북이 아니다...

허구헌날 강간, 성추행 기사가 인터넷 매체를 도배하는 이 판국에

아나운서가 되기 위해서는 '다 줘야'한다는 소리가 난무하는 사회에서

학교 선생질을 하는 중에 '처녀냐 아니냐' 이따위 소리를 교장한테서 들어도 참아야 하고 (제기랄)

정치부 기자 아무나 하는것 아닌데, 그런 기자질 할때 국회의원이 젖퉁이를 만지지 못하도록 조심해야하고

(아 또 제기랄) 낮에 어쩌다 호텔 식당에서 밥 먹으면 '한심한 여자'로 낙인 찍혀야 하고

새벽부터 그 다음날 새벽까지 애들 학원 보내느라 뺑뺑이쳐야하고

아니면 애들 과외비 대기 위해서 온종일 편의점 점원도 해야하고

경기가 안좋으니 대학 나온 자식이 취직을 못해, 그 엄마가 파출부라도 뛰어야 하는데

도매끔에 '놀순이' 집단으로 몰려도, 입을 닥쳐야 하는 한국여자로 사는 일은

서양여자들보다 열배 스무배 힘든 일이다.

군대가 이보다 힘들겠는가?

군대야 2년이면 끝나지...이건 평생 끝이 안나요...

 

나 미국에서 십년 가까이 공부 하고, 직장생활 하면서 사는데

내 취미가 씨앤앤 뉴스 보는거고, 매일 아침 워싱턴 포스트 꼬박꼬박 읽는건데

세상에,

언론에서 '미국 여자들 게으르다'고 씹는 기사 한번도 본 적 없다.

사회 지도층 인사중에 이런 소리 하는 거 한번도 못 봤다.

미국 여자들은 모두 검소하고 부지런하고 모범적으로 살아서 이런 소리 안듣는건가?

 

아니지,

어딜 감히,  이따위,  소리들을, 입에 올릴수 있단 말인가?

아니 왜 존경받을 만한 분이 '막나가는' 소리를 겁도 없이 뱉어내는가?

내 참, 한국여자들이 오죽 착하면 이런 소리 듣고도, 그냥 직수굿이 견디는가...

 

 

제기랄...나는 한국 여자다.

주위의 서양 여자들보다 부지런하고  빡세게 살지만

보통 한국 여성들에 비교하면 '나무늘보'처럼 게을러보이는, 팔자좋은 한국여자다.

내가 아웃라이어(outlier)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판단을 유보하고 입을 닥친다.

 

 

 

 

 

2010년 7월 30일 금요일

여성 기업인 김 아무개씨께 부탁 드리는 말씀

오늘 한국 뉴스를 살피다 보니 한국의 어느 유명한 여성 기업인이 강연에서 한국의 소수 상류층 여성들의 생활 패턴에 대한 비판과 함께 여성 군복무 문제를 이야기 했나보다.  (아래에, 관련 기사를 옮겨다 놓았다).  사실 어떤 '말씀의 내용'은 전체적인 상황 (context) 속에서 이해 되어야 하며, 한 사람이 떠든 말 중에서 한 두 문장만 가지고 설왕설래 하는 것은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 쉽다. 그러므로 주의 해야 한다.

 

나는 내 블로그에서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한 나의 평을 안하기로 작정 하고 있지만, 이 문제는 나 역시 속해있는 '여성집단'과 관련된 일이고, 어쩐지 내가 그냥 지나치기에는 어떤 '죄악감'을 느껴서, 세상의 구석에서 상황을 내 식으로 점검하고, 내 의견을 말하고 싶어진다.

 

나는 인터넷 기사에 소개된 여성 기업인 김 아무개씨에 대해서 별로 아는 바가 없다. 웹 검색을 하면 그가 어떤 인물인지 소상한 자료가 나오겠으나, 그런 것을 찾아 볼 기력도, 열정도 없다. 그는 훌륭한 기업인 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분이 철학을 갖춘 훌륭한 기업인일것으로 짐작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가지 이분께 부탁을 드리고 싶다.

 

이분은 극히 소수의 '상류층' 부인들이나 여성들이 한가롭고 태평스러운 삶을 즐기는 풍경에 대하여 질타하셨다.  그런데, 나는 극 소수의 상류층 부잣집 사모님들이나 그 며느리, 딸들이 어떻게 호화롭게, 잘 사는지에 대해서 일말의 관심도 없다. 그들이 뭐 귀족적으로 잘 살건 말건, 방탕하건 말건 개의치 않는다. 그들은 어차피 '극 소수'인 것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극소수의 혜택받은 집단의 식구들은 한가로운 곳에서 나른하게 사는 법이다.

 

나는 이 존경할만한 여성 기업인이 이런 극소수의 천국의 여성들에게서 눈을 돌려서, 그 분이 직접 고용하고 있는 직원들의 삶을 들여다 봐 주기를 부탁드리고 싶다.  상류층이 아닌 중산층 혹은 빈곤층 여성들의 삶을 좀 들여다 봐 주십사 하는 것이다. 잘 사는 사람들이야 숫자가 한정 되어 있고, 그들은 어차피 잘 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 돈 가지고 쓰고 마시고 먹는 것도 자기 자유다. 김 아무개씨 역시 잘 입고 잘 먹고 사실 것이다.  그런데, 중산층, 혹은 극빈층의 부인들, 며느리들, 딸들은 어떤가?  진정으로 여성 문제에 관심이 있다면, 이분들의 삶의 질을 개선시킬 고민을 좀 해 주십사 하는 것이다.

 

김 아무개씨가 기업가라고 하니, 그분께 여쭙고 싶다.

사내에 육아 시설은 있으신지? 

여직원들이 안심하고 육아와 일을 병행할 여건을 잘 만들어 놓으셨는지?

여직원들이 '여자라는 이유로' 어떤 박해나 불이익을 당하지 않고 행복하게 일을 하고 있는지?

여직원 뿐 아니라, 남직원들도 육아 시설의 혜택을 볼 수 있는 장치가 있는지?

 

사내에 이미 그런 복지 시설이 다 마련되어 있다면

훌륭하신 김 아무개 기업인께 간곡히 부탁 드리고 싶다.

 

소속하신 지역사회의 빈곤층, 중산층 여성들이 꿈을 펼칠수 있도록 제대로 한번 고상한 상류층 기업인의 모범을 보여주실수 없으신지?

뭐 이런거 조용히 해 내시는 것이

중뿔나게 여성 군대 복무 어쩌구 하는 것 보다 훨씬 인류사회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은 안하시는지?

기업인으로서

극소수 상류층 유한 마담들의 삶을 비판하기에 앞서서

 

한국에서 자라나는 여아들이 성범죄가 무서워서 학교에 가는것이 두렵고

대낮에 어린이들이, 여성들이 골목으로 끌려가 강간을 당하고, 살해 당할때

여고생들이 기지를 발휘하여 끌려가는 여아를 구해낼때

그때 당신은 한가로운 호텔 커피숍에서 극소수의 부잣집 여성들만을 쳐다보고 계시는가?

여자가 군대 가는가 안가는가

극소수의 여자들이 호텔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가 안보내는가가

정말로 여성 문제를 정확히 들여다보는 방법인지?

그거야 말로 말초지엽적인 문제인것은 아닌지?

 

존경하는 여성 기업인 김아무개씨께 부탁드리오니

제발

자신의 기업의 여성 직원들이 아무 걱정없이 그들의 능력과 열정과 꿈을 회사에서 펼칠수 있도록,

소속한 지역 사외의 여성들이 꿈을 향해 용감하게 나아갈수 있도록

돕는 일에

좀더

지금보다 조금 더 많이 애정을 쏟아주시길...

 

그것이 소수의 부자집 식솔들이 커피숍 대신에 고아원에 봉사가는 것보다 더 중효한 문제가 아닐런지..여쭙고 싶어진다.

 

사족: 좋다, 김씨 말대로 여성 군복무 한다고 치자. 그러면 문제의 극소수 상류층 여성들이 군대 갈것 같은가??? 가서 곯는건 어차피 아랫동네 여자들 아니겠는가? 상류층 여자들은 아랫동네 여자들이 군복무 할때, 호텔에서 나른하게 놀고 있을것 아니겠는가?  내가 군대 가기가 무서운가? 여자 군대가라면 나부터 자원해서 간다. 그런데...당신이 비판한 그 상류층 여자들은 어차피...요리 빠지고 조리 빠지고...에잇..농담하시는가 지금?

 

 

 

--Lem

 

 

 

 

[이데일리 편집부] 여성기업인 김성주 성주D&D회장이 30일 전경련 하계 제주포럼에서 한 강연내용이 네티즌 사이에 화제로 떠올랐다.

김 회장은 이 포럼에 강연자로 나와 “21세기는 여성의 시대가 아니라 여성이 일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 라며 “여성들은 남자탓, 사회탓만 하지 말고 스스로 강인해져서 경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고 말했다.

그녀는 “우리나라 상류층 딸, 며느리들이 아침부터 고급식당에 가서 노닥거리면서 어디 쇼핑할지, 어디서 놀지만 생각하는 것을 보면 가슴을 치게 된다” 며 “이런데서 자란 아이들이 무엇을 하겠느냐”고 강력히 비판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여성도 군대를 보내야 이스라엘, 스웨덴 여성들처럼 강해질 것” 이라며 “남자들만 억울하게 2~3년씩 군대에 붙들어 놓지 말고 군대제를 직업군인제로 바꿔 여성도 군대를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는 이색적인 발언을 했다.

또 그녀는 “서구 여성들은 얼마나 부지런한지 우리나라 여성보다 10배는 더 일하고 있다” 고 말하며 “대학나오고 유학까지 가서 공부한 여자가 사회탓을 하면서 집에만 있으려고 하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고 주장, 여성의 사회 참여를 적극 역설했다.

이 같은 김회장의 강연내용이 전해지자 네티즌들은 “김성주 회장 자체야 말로 `페미니즘의 좋은 예`”라며 "멋지다“ ”같은 여자지만 진짜 부러운 카리스마를 지닌 분이다“라는 동조의 반응을 보였다

특히 남성들의 반응이 이례적으로 뜨거웠다.

김선*님은 “김성주 회장을 여성부 장관으로 세우자”고 말하며 김회장의 발언에 적극 동조하는 반응을 보였다. 박대*님도 “회장님 말씀이야 말로 진정한 남녀평등이며, 진정한 여성을 위한 충언이다” 이라며 옹호했다.

이밖에 다른 남성 네티즌들도 “여성도 군대가고 강해져 평등한 사회를 이루자” “김성주 누님! 존경합니다” “개념충만한 회장님이 등장하셨다” “나도 저런 여성 만나고 싶다” 등 열렬한 반응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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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er time...

가을학기 운영 계획을 모두 수립했다.

 

우리학교 ESL 프로그램을 좀더 발전 시키기 위한 계획도 세웠고.

하여, 강사진을 새로 편성을 해야 한다.

내가 가장 신뢰하는 '그레고리 팩' 선생과 이 문제를 의논하기 위하여 전화를 했더니

글쎄...

바닷가에서 전화를 받는다.

지금 델라웨어의 어느 비치에서 파도를 즐기는 중이라고

 

전화 너머로 파도소리까지 들려준다.

 

좋겠다...

 

나도 바다에 가고 싶다.

파도 소리를 듣고 싶다.

 

대학원 프로그램은 어느정도 자리가 잡힌것 같아서

이번학기에는 내가 ESL 수업을 일부 챙길 계획이다.

지난 봄학기에 ESL수업에서 내가 빠지고 강사 분들께만 맡겼더니

분위기가 다소 느슨해졌다. (무서운 사람이 하나는 있어야...)

 

가을학기에는 대학원과 ESL 두 프로그램에서 수업을 하므로

이론과 실습, 모두가 가능할 것이다.

학자는 현장에서 멀어지면 그때부터 '딴소리'를 하는 경향이 있다.

늘 현장에서 이론을 살필 필요가 있다.

'토플준비'쪽을 맡을까 생각중이다.

 

8월에, 지홍이 기숙사로 떠나기 전에, 가을학기가 오기 전에

어디 멀리 아이들과 여행을 다녀오고 싶은데...

지난해처럼 뉴잉글랜드 쪽에 며칠 다녀올까...

 

 

우리 언니...

 

나는 어른이 될 때 까지, 우리 언니를 '언니'라고 부르지 않고 자랐다.

그냥 '정미야' 혹은 '~ 야!' 이러고 맞장을 떴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내 하나뿐인 사내 동생 녀석도 나를 '~야!' 로 불렀다. 역시 이유는 알 수 없다.

우리는 '친구' 같았다. 서열 의식이  별로 없었다.

(참 서구적으로 컸나보다. 매우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한국의 중산층 농가에서 나고 자랐지만...)

 

나는 이미 어릴때부터 늘~ 내 체격이 우리 언니보다 컸다.

뭐든 다 컸다. 손도, 발도, 눈 코 입도 다 컸다. 물론 체격이나 키도.

언니가 나보다 두살이나 많지만.

그래서 내가 초등생일때부터 어른이 된 후까지 (지금도)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 둘이 있을때, 내가 언니라고 상상하는 편이다.

나는 우락부락하고, 언니는 섬세해서 그런가보다.

(지금은 키가 거의 똑같다. 하지만 언니는 전체적으로 가늘고, 나는 전체적으로 튼튼하다.)

 

언니는 이미 어릴때부터 맏 딸 노릇을 했다.

언니는 이미 초등학교 2학년때, 엄마가 어쩌다 어딘가에 가셨다가 늦게 오시면

철없는 어린 동생들 (나와 내 동생)을 돌보면서 밥을 지어 상을 차려

오빠와 아빠, 그리고 동생들을 먹이는 사람 이었다.

우리 엄마 아빠는 언니에게 한번도 무서운 표정으로 야단을 치신 적이 없다.

언니는 늘 착하고 단정하고 청소 잘하고 그리고 방글거리며 부모님 말씀을 따랐다.

 

 

나는 늘, 불만스런 표정으로 뭔가 으르렁대면서 살았다.

우리 엄마 아빠는 나 때문에 마음 고생을 많이 하셨다.

내가 집밖에서 탈선을 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고분고분 하지 않았다.

나는 성인이 될때까지 angry little girl 이었고 black sheep 이었다.

 

 

언니는 항상 개구장이이고 짖궂은 나의 장난이나 농담의 희생양이었다.

나는 늘 장난 칠 궁리를 하고 있었고, 언니는 번번이 나의 장난에 넘어갔다.

그래서 언니는 자신이 어리석다고 믿는 눈치였다.

 

 

지금도 언니는 내가 미국에서 박사공부까지 하고, 교수질을 한다는 것을 대단하게 보고

자신이 전업주부로 살아 간다는 것에 대해서 어쩐지 나에 못 미친다고 상상을 하는것도 같다.

   "난 너처럼 살라고 해도 살 자신이 없어..." 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언니가 똑똑하고 지혜롭게 자신의 가정을 철옹성처럼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어떤 면에서, 언니는 나보다 더 용감하고 지혜롭게 사는 것이다.

나는 가족을 위해서 나를 희생할 '용기'가 없다... 그만한 사랑이 없다...

나는 어떤 면에서, 언니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편이다. 나의 사랑 작음에 대하여.

 

나는 나에게 주어진 삶, 그리고 내가 노력하여 이뤄낸 삶에 대하여

감사하고 그리고 기뻐하며 산다.

그리고, 내 언니 역시 자신의 삶을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잘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오빠한테서 이메일이 왔는데, 언니의 건강 검진에서 뭔가 문제의 소지가 발견된것 같다고.

 

내가 한국에 있을때, 언니가 목덜미를 만져보며 "여기 뭔가 잡혀...이게 뭘까.." 했었다.

사람이 40을 넘기고 중년에 들어서면 몸의 어딘가에 지방질같은 혹 같은것이 생기기도 하고

그런다...  대체로 별 문제 없는 지방 덩어리일 경우 성형을 위해서 제거하거나,

그냥 내버려둬도 무방하다.

언니는 해마다 세밀한 건강검진을 받았고, 그동안 아무런 이상 증후도 발견된 적이 없으므로

그것 역시 근래에 생겨난 '아무것도 아닌' 것일거라고 우리는 둘이 종알거리며

서로 안심 시켰었다.

 

언니가 아마 그것을 정밀 진단을 받으러 갔었나보다.

아직 검사 결과가 안 나온걸까?

공연스레 걱정이 된다.

 

오빠의 메일을 받고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서, 혼자 울었다.

 

몇해전에, 엄마와 오빠의 종양 소식을 언니가 알려주었을때

나는 낙담하였으나 그자리에서 눈물을 쏟지는 않았다.

어쩐지, 모든 것이 잘 될것 같았다.

오빠와 엄마는, 강인한 사람들이다.

 

 

언니가 조금이라도 아플거라고 상상하니까

눈물이 난다.

우리 언니는 내 장난에 잘 넘어가고, 잘 속고, 어리버리하고,

그래서 내가 못 된 장난을 하면 혼자 상처받고 울고 그랬다.

그렇게 착하고 순한 언니이기 때문에

언니가 아플까봐 걱정이 된다.

언니가 아프면, 절대, 안된다.

그래서 하느님한테, 우리 언니가 아프면 절대 절대 안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려드려야 할것 같다...

 

 

 

하느님, 우리 언니를 지켜주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나를 너무너무 사랑한다는 것을 내가 잘 아는데, 내가 슬프면 하느님도 슬프실것 아닙니까? 내가 기뻐야 하느님이 기쁘실것 이지요. 그러므로 나를 슬프게 하시면 안됩니다. 따라서 우리 언니를 하느님이 잘 지켜주셔야 한다는 것이지요. 아시겠습니까..하느님.

 

제가 매일 기쁘게 웃어야 하느님도 매일 기쁘실걸요. 하느님.

 

 

 

 

 

2010년 7월 28일 수요일

루레이 동굴에서 사온 기념품: Nothing is impossible...

루레이 동굴에 갔다가, 근처 기념품 가게에서 발견하여 5달러 주고 산,

루레이 동굴과는 내용적으로 직접 관련이 있는것 같지는 않은

그러나 마음에 들어서 기념 삼아 산 것.

 

도자기로 만들어진, 벽에 거는 (손바닥만한)

 

Nothing is impossible to a willing heart.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 불가능한 것은 없다.

 

내 책상 앞에 걸어 놓고, 마음이 약해질때마다 들여다보고 각성 하려고.

 

 

나에게는 '남들이 미쳤다고 웃고 말' 그런 꿈들이 있다.

내가 그 꿈들을 얼마나 이뤄낼지는 나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매일 꿈을 꾸고, 그 꿈을 향해서 가고 있다.

절대 기가 죽어서는 안된다고, 매일 매일, 내가 나를 다독인다.

 

Nothing is impossible to a willing heart.

 

 

Luray Caverns 버지니아, 루레이 동굴

동굴속 광경들 중에서 내게 가장 매력적이었던 지점.

나는 이곳을 '거울 궁전'이라고 부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진에서 윗부분은 실제 종유석들이 매달린 것이고

사진의 아랫부분은 그것들이 고인 물에 반사된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착시 현상 때문에, 이것이 그대로 실재하는것처럼 보인다.

 

 

 

 

http://www.luraycaverns.com/

 

Luray Caverns (루레이 동굴)은 워싱턴 디씨를 방문하거나 관광하는 사람들이 워싱턴 디씨 시내 내셔널 몰 지역과 함께 많이 찾아가는 워싱턴 인근의 '동굴'이다.  한국신문에 나오는 관광회사 광고에 '내셔널 몰'과 '루레이 동굴'을 묶어서 당일 관광 상품으로 내놓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러니까, 너도 나도 찾아가는 관광명소로 알려져 있다.

 

그 루레이 동굴은 우리 가족이 지난 삼년간 이따금 바람 쐬러 다녔던 애팔래치안 산맥의 Shenandoah Skyway Drive (셰난도 스카이웨이 도로) 인근에 있어서 도로에 서있는 표지판을 자주 보아왔건만,  P국장과 우리는 번번이 이 동굴을 '무시'하고 지나다녔다. 가족들이 모두 '동굴'에 관심이 없는듯 했다.

 

나로서는 고등학교때 '고수동굴'을 구경 한 것이 한국에서 본 유일한 굴이다. 그 때 나는 고수 동굴의 기묘한 종유석들을 보면서 많이 놀라워 했었다.

 

미국에서는 2002년 겨울, 온가족이 텍사스 여행중에 어느 동굴 구경을 한 적이 있고, 플로리다에 살 때 아이들과 가까운 동굴에 간 적이 있었다.  텍사스의 동굴은, 한겨울에 들어갔는데 땀이 날 정도로 더웠던 기억이 나고 (실제 동굴 안의 광경에 대해서는 별 기억이 없다) 플로리다에서 본 동굴은, 역시 크리스마스 때 였는데, 거기서 박쥐가 매달린 것을 봤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워싱턴 지역에서, 루레이를 지척에 두고도 우리는 번번이 이곳을 무시하고 지나치며 삼년을  살았다.

 

그런데, 어제 학교에서 학장님과 조교와 함께 회식을 하다가 그 루레이 동굴 얘기가 나왔다. 학장님과 조교가 이구동성으로 '워싱턴에서 가장 근사한 곳이 그 루레이 동굴이다'라고 게거품을 물고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닌가.  난...난 워싱턴에서 가장 근사한 곳은 '워싱턴 마뉴먼트'다. (나도 좀 한심하다 하하하)  난 멀리서도 워싱턴 마뉴먼트가 보이면 가슴이 '무지개'를 본듯 쿵 쿵 뛴다. 난 워싱턴 기념비가 좋아, 좋아, 좋아~  그런데, 아무튼, 두 남자가 '루레이'를 안가본 사람은 대화에 끼워주지도 않겠다는 식으로 나를 협박했기때문에, 나도 호기심이 발동하여

 

  "좋소, 내일 내가 학교에 나타나지 않거들랑, 루레이로 '출근'을 한걸로 아시고 출근부에 도장을 찍어주시오~"  하고 호언장담을 하기에 이르렀다.  :)  (우리학교에 출근부가 어디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 집에서 한 90마일 거리의 그, 문제의 루레이 동굴에 애들을 끌고 다녀왔다는 것이다~

 

참고로: http://www.luraycaverns.com/ 이곳이 공식 홈페이지.

어젯밤에 홈페이지 검색을 하면서 제반 상황을 살펴보다 보니, 입장료가 23 달러인데, (어린이 외에는 학생 할인도 안된다. 입장료가 장난이 아니올시다로 비싸다...)  가만 보니 몇가지 할인 방법이 있다.  Ticket Information 쪽을 살펴보니 AAA 회원에게 약간을 할인 혜택이 주어지고 Giant Card 를 가진 사람에게는 두장 사면 두번째 티켓은 반값으로 할인해준다. 그러니까 두사람 분의 티켓을 살경우 23 x 2 = 46 가격이 아니고, 23 + 11.5 = 34.5 가격이 된다.  자이안트는 버지니아 지역에 널리 퍼져있는 그로서리 스토어이고, 물론 나도 이 카드를 갖고 있다. 그래서 입장료도 할인을 받았다.

 

 * 그러니까 만약에 이곳에 혼자 간다면, 누군가 혼자 온 사람과 함께 티켓을 산 후에 이익금을 반씩 나누면 된다. 자이안트 카드가 있을경우.

 * 만약에 4인 가족이 간다면, 두사람이 짝지어서 티켓을 산 후, 나머지 두사람도 짝지어서 티켓을 사면 된다.  그러면 3인분 가격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우리는 세식구여서,  꼼수를 써서 두장만 사고, 누군가 한명을 섭외해서 역시 할인받아서 살까 하다가...귀챦아서 그냥 한꺼번에 3장 사고 말았다. (부지런하면 돈 좀 아끼는건데...)

 

그런데 내가 매표소에서 표를 사고,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어느 한국인 아주머니가 내게 '한국사람이세요?' 하면서 말을 걸었다.  조카를 데리고 왔는데 자신은 몇번 와 본적이 있어서 조카만 보라고 표를 한장만 샀다며, 그 조카를  나한테 부탁을 하려고 했다. 뭐 동굴 구경하는데, 걱정 할 것도 없어 보이는데... 그래서 무심코, 자이언트 카드가 있으면 반값에 두번째 사람은 표를 구입할수 있다고 말해줬더니, 그 아주머니께서 반값에 살수 있다면 자신도 사겠다며 역시 반값에 표를 사 가지고 왔다. 먼저 샀던 입장표와 자이언트 카드를 보여주고 '한장 더 사겠다'고 하니까 두말 않고 할인을 해준다.

 

 

 

동굴 내부는....

뭐라고 해야 하나?

루레이 동굴을 극찬하는 사람들이 막판에 약간 고개를 숙이며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씀:

   "그런데 입장료가 너무 비싸..."

 

그러니까,

1.25 마일, 대략 천천히 구경하며 한시간 내지 한시간 반 정도 어슬렁거리고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이 동굴 코스는, 들어가보면 입이 딱딱 벌어질 절경들이 즐비하다.

무심한 자연이 수만년을 시간동안 만들어 놓은 놀라운 작품들...

별 달리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런데,

막상 구경 다 하고 나오면, "그런데 입장료가 너무 비싸..." 소리가 나온다.

 

그렇다고 뭐 억울하게 비싸냐 하면 그것도 아닌데

내 생각에는 그냥 딱 오달러만 받고 입장 시켜줬으면 좋겠다.

 

아니, 그래도 내가 23 달러 내고 들어가 보고나서 '돈 아깝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돈이 아까운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뭔가 ... 그냥 오달러만 내고 들어간다면 극찬을 하게 될 것 같다...

 

아, 어쩐지 내가 허전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음...동굴은 어마어마하게 크고 통로도 넓고 안전하게 잘 만들어졌는데

'안내'나 '설명' 혹은 동굴에 대한 자료 제공이 미약했다.

귀에 꽂고 듣는 오디오 안내자료도 있었는데,

사람이 해주는 안내만큼 생생하지도 않았고

...안내나 설명 부분이 약했다.

전에 봤던 텍사스나 플로리다의 동굴은 동굴 자체는 이렇게 크지 않았어도 동굴 관련 자료가 생생하였고 사람이 직접 안내해줘서 좋았다.

 

동굴 자체는 '대단'하다.

그런데 이 좋은 구경을 P 국장만 빼고 우리끼리만 즐겨서 미안함을 느낀다. (이건 약올리는 멘트일지도 모른다. ㅎㅎㅎ)

 

 

 

아, 그리고, 한가지 더

워싱턴 지역이나 북버지니아에서 루레이로 가는 길, 그 길이 예술이다...

길가의 농장 풍경이, 그대로 달력 그림같은, 화보 같은, 그림같은~

루레이로 가는 그 길을 다시 달려보고 싶어진다.

 

 

 

 

아래, 종유석 끝에 물이 고였다가 떨어지는 광경

 

 

 

거울 궁전.

어디서부터 '물에 반사된 지점'인지 가늠이 잘 안될 정도이다.

 

 

 

 

 

 

 

 

 

 

 

 

 

 

 

 

 

 

 

 

 

 

 

 

 

2010년 7월 27일 화요일

[산책] 새벽에...

 

 

지홍이가 친구들과 놀다가 새벽 두시 넘어서 귀가.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잠을 제대로 못잤고, 지홍이 귀가 후에는 그냥 뜬눈으로 날밤을 새웠다.

날이 밝기를 기다리다가, 다섯시 반쯤 창밖이 부염하게 밝길래 왕눈이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아파트 마당에서 보이는 내 방 창문.

내 방은 밑에서 올려다봐도 꼭 tree house 같다. (나무에 지은 집.)

 

 

아침 다섯시 반의 보름달.

어제 저녁달이 보름달이었다.

밤새 내 창가를 기웃거린 저 달.

 

아침 여섯시.

수로에 피어오르는 물안개.

 

 

 

 

 

언제나 가서 쉬는,

키브리지 앞 낭떠러지.

아침 일곱시의 햇살

 

 

 

 

아침 여덟시.

집에 돌아오는 길에, 어차피 지나치는, 전에 살던 집.

혹시 우편물이 온게 있나 확인하려고 들렀다.

마당에 목백일홍이 눈이 부시게 피어나고 있었다.

 

 

 

 

내가 살땐, 붉은 벽돌에 초록색 덧문이었는데

집 주인이 집을 팔기 위해 대대적인 수리를 한 모양이다.

흰 벽돌, 흰 프레임들.

앞마당에 반달모양의 드라이브웨이도 새로 만들었다. (진작에 만들었어야지....)

입구 램프에 매달아 놓은 나비 한마리와 종.

플로리다에서 살때, 선물 받았던 것인데, 그냥 놓고 왔다. 아직도 매달려 있다.

 

내가 매일 내다보던 1층방 창문.

하루종일 해가 뜨고 지고,

밤이면 달이 뜨고 지던 2층 방 창문.

 

 

집주인이 팔기 위해 내 놓아서, 현재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그래서 가끔 이렇게 들러도 되니까 좋다...

 

 

 

체사피케 베이글 가게에서 아침에 구운 신선한 베이글 1더즌을 샀다. 베이커즈 더즌은 덤까지 해서 13개. 크림치즈 두통.  아이들하고 아침 점심으로 한 이틀 먹을수 있겠다.

 

창밖에 빨간 카디널이 와서 기웃거린다....

내 방은 tree house 같아...

 

 

씻고 아침먹고 학교 가야지.

 

 

WP July 26 Freedom of photography: Police, security often clamp down despite public right

http://www.washingtonpost.com/wp-dyn/content/article/2010/07/25/AR2010072502795.html

 

워싱턴 포스트의 2010년 7월 26일자 (월) 메트로 페이지의 1면 기사는 공공장소에서 사진 찍는 어려움을 논의하고 있다.

 

신문기사를 읽어보면

디씨 시내의 공공건물

디씨 시내의 메트로 역사나 공공 교통 시설

경찰관의 차

뭐 이런것들을 사진 찍으면 문제에 빠질수도 있는 모양이다.

 

나도 8년전 디카를 처음 손에 넣은 이후부터, 어딜 가나 내 눈에 비친 세상을 카메라에 담는 습관이 들어서 크게 눈치 안보고 돌아다니면서 아무거나 막 찍어대는 편이다. 그런데 신문 기사를 보니 공공 건물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거나 공공장소에서 사진을 찍다가 '경비'나 '경찰'과 실랑이가 벌어지는 일이 많이 있는 모양이다. (그동안에 크게 제재를 받은 기억이 없던 내가 오히려 운이 좋았던 것일까?)

 

미국에서는 공공건물이나 공공장소의 사진을 찍는 일이 헌법에 보장된 자유라고 한다. 그러니까 법적으로는 공공건물을 사진찍는 것이 아무런 문제 될 것이 없고, 사진 찍을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법은 하늘에 있고 현실은 땅에 있는 것 역시 '법'인걸까?

실제로 공공건물 경비들이나 혹은 길거리 경찰관들은 길거리에서 국가기관 건물을 사진기에 담는 사람이 보일경우 제재를 가하거나 심할경우 카메라에서 사진 파일을 지워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한다고 한다. 

 

지난해에 Smithsonian Postal Museum (스미소니안 우편 박물관)에 갔을때, 그곳에서는 입구의 '검색대' 앞쪽에 '사진촬영 금지'라는 표시가 붙어 있었다.  (그러니까, 입구 사진은 찍지 말라는거다. 전시장에서의 사진 촬영은 허용되었다). 그래서 나는 '얌전하게' 입구를 통과하여 전시장 쪽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위가 시끄러워서 돌아보니 이민자 혹은 외국인 관광객들로 보이는 (인도계처럼 보였다) 열명 가까운 사람들이 (혹은 일가족이) 경비의 제재를 당하고, 뭔가 호되게 야단을 맞고, 그리고 카메라를 빼앗기는 광경이 보였다.  경비는 그들이 갖고 기념사진을 찍어대고 있던 디지털카메라를 빼앗아 해당 사진 파일들을 지운 후에 이들을 통과시켰다.  사진 촬영 금지 표시를 못봤던 모양이다...

 

지금 그 상황을 돌이켜보니, 우편 박물관은 '유니언 스테이션' 바로 지척에 있는 장소였고, 아마도 테러의 위험에 노출된 곳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렇게 엄하게 사진 단속을 한 것일까?  하지만...그날 내가 유니언 스테이션을 둘러보면서 기차역사 안팎을 모두 사진을 찍을때 아무도 단속하지도 않았었다.  그곳은 일종의 관광지처럼 보였고, 너무도 개방적이고 자유로웠다. 나는 지금도 왜 스미소니언 우편 박물관 입구에서 경비가 그렇게 삼엄하게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게 겁을 줬는지 (혹은 무례하게 굴었는지) 알수가 없다.

 

이태전에는 워싱턴을 방문한 친지에게 시내 안내를 해 주던길에 IMF (국제통화기금) 건물이 보이길래, 그분들을 그 앞에서 기념사진 촬영을 해 준적이 있는데, 역시 사진 여러장 찍고 나니까 경비가 다가오더니 '사진 금지'라고 쭝얼거린적이 있다.  그래서 알았다고 그자리를 떴었다.  그 때 난 좀 기분이 나빴었는데, "뭐야, 내가 이민자 똘마니로 보여서 만만해서 그래?  내가 외국인 같이 보여서 니네 눈에 만만해? 지금 사람 차별해? 사진 찍는게 뭐가 문제가 된다고, 엉?" 뭐 이런 기분이었다. 난 타국땅에서 살면서 내가 당하는 불친절에 대해서는 무조건 "내가 외국인이라, 내가 이민자로 보여서, 내가 아시안이라 만만해?" 이런 시각으로 멋대로 해석하고 분개하는 편인데... 이것 역시 나의 편협한 자기 중심적 해석이었을지도 모른다.  신문기사를 보니 나같은 외국인/이민자/아시안 뿐만 아니라 그냥 미국 시민도 나하고 똑같이 당하고 속상하고 뭐 그런 모양이다.

 

디씨 시내에서, 멋있어 보이는 공공건물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경비나 경찰이 와서 뭐라고 잔소리를 할 경우

대개는 '사진 찍지마~' 이런 잔소리일 것이다.

이 경우에는

(1) 우리가 사진을 찍으면 안된다는 법이 어딨어?  -- 이러고 따지던가

(2) 그냥 싱긋, 맑게 웃고 '미안해, 몰랐어' 이러고 지나치던가 -- 이경우에 사진기 빼앗아서 지우고 그러지 않는다. 그냥 사진 찍지 말라고 하고는 저리 가버린다. 나는 대개 이 노선을 취한다.

 

난 원래 게을러서 사사건건 따지고 싸우고 잘 안한다. 특히, 여기가 내 나라도 아니고, 내가 이곳 시민도 아니고, 따라지 인생이라... 문제 안 일으키고 조용히 평화적으루다가 준법정신 투철하게 살아보려 애쓴다.

 

 

 

 

2010년 7월 26일 월요일

손을 위하여

 

 

내가 생전 안하던 손빨래며,

세제 풀어놓고 욕조에서 발 빨래며

허구헌날 설겆이 (장갑은 성격상 못끼고)를 하다보니

손이 (ㅠ.ㅠ) 거칠어진다.

처음에는 손에 뭔가 막 솟더니

그 솟던 자리가 거칠고 딱딱해진다.

어쩐지 서러워진다. (-.-)

 

 

하여, 오늘은 세수하고나서

손에 바셀린을 잔뜩 바르고

요리용 비닐장갑을 끼웠다.

이거 이렇게 하고 자고 일어나면 손이 요술처럼 부드러워질까?

 

 

엄마가 이상해~~

 

어제, 일요일 아침에,

아이들은 다들 게으르게 자빠져 주무시고

나혼자 조지타운까지 걷고 왔는데

사실 이른 아침이지만 날은 푹푹 찌고, 진땀 나고, 혹자 헉헉댔었다.

그런데, 그렇게 두시간 꼬박 걷고 집에 오니 아홉시.

뭐랄라, 기운이 쏙 빠진 듯 하면서도

 

 

'고요'

를 느꼈다.

 

기운이 다 빠진 상태의 고요함. 신체의 적막함 같은것.

(아 운동, 혹은 산책의 효과가 이런 것이다. 내 영혼을 고요하게 해준다)

 

 

그래서, 아이들을 깨워서 집안 청소를 시키고

나는, 부엌 냉장고를 뒤져가지고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꺼내어

파,마늘,생강, (심지어 선물로 받은 복분자주까지~) 등 신선한 재료들로 불고기를 무쳤고

신선한 야채

현미와 보리만 넣은 밥 (요즘 백미를 거의 안먹는다.)

그리고 테이블에 장미.

 

뭐 아이들은 집안을 멀끔하게 치웠고

(지팔이가 소파 껍데기까지 말끔히 빨아서 말려다가 끼웠다.)

나는 식탁을 시원하게 차렸고

그래서 모처럼

근사한 일요일 점심상을 차렸다.

 

아이들에게는 고추장으로 양념한 제육볶음.

나는 야채가 듬뿍들어간 쇠고기 불고기 (나는 돼지고기 못먹는다)

그렇게 차려놓고 먹으면서

--찬홍이 이 고기를 이 양상추에 담아서 싸먹으면 맛있다.

-- 찬홍아, 이 양상추가 꼭 타코 같지 않니? 오목한게 쌈해먹기 좋지?

--찬홍아, 이 고기를 이 상추에 싸서 이렇게 먹으면~

--찬홍아, 고기 더 궈줄까?

--찬홍아, 이 쇠고기도 너 먹어라. 엄마는 많이 목먹겠다.

 

우리들은 모처럼 정갈하게 차려진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서

웃기는 농담도 하고

뭐, 그랬다.

 

그런데 찬홍이가 하는말

--엄마, 엄마가 좀 이상해요.

   엄마가 어디가 좀 아프신거 같애.

   엄마 어디 아프세요?

 

왜?

 

--엄마가 이상해졌어. 찬홍아 이거 먹어라 저거먹어라, 엄마가 이상해...

 

찬홍이 머릿속에는

소리 꽥꽥지르고

신경질내고

'내 라면 뺏어먹지마!'하고 막 으르렁대고

뭐 이런 '엄마'가 각인이 되어 있어가지고

나른한 표정으로

상냥하게 말하는 엄마는

어딘가 미쳤거나, 더위를 먹었거나, 아픈거다. 하하하.

 

우리집 남자들은 너무나도 '여장군'에게 길들여진것이야.

나도 외유내강 되어보려고 노력중.

노력할 것도 없이, 요즘 더위에 기운이 없어서 목소리가 상냥해졌을 뿐. ㅎㅎㅎ

 

 

 

지난주에 바빠서 학교에서 보낸 시간이 별로 없었다.

이번주부터 아침부터 저녁까지 학교에서 찬홍이 입시 준비나 시켜야지.

내 공부 하면서.

(찬홍이는 텅빈 ESL 교실에서 혼자 공부중.)

 

 

 

2010년 7월 25일 일요일

[산책] 일요일 아침, 조지타운

 

 

 

일요일 아침.

워싱턴 하버의 스타벅스까지 혼자 터벅터벅 걸어가서

베이글과 아이스티를 맛있게 먹고

돌아왔다.

 

 

요즘은 식사중에

치즈, 멸치를 반드시 챙겨먹거나

혹은 입맛 없을때는

우유에 씨리얼 말아서 많이 먹는 편이다.

왜냐하면, 골다공증 걸릴까봐, 예방 차원에서.

내가 검색해보니 칼슘을 많이 함유하는 식품으로

우유, 요거트, 치즈등 유제품이 많더라

멸치는...내가 상상했던 것 보다 칼슘 햠유럄이 많지 않았다...

그래도 멸치를 많이 먹고 있다.

그냥 마른 멸치를 고추장에 찍어 먹거나, 그냥 맨밥에 맨멸치를 먹어도 맛있더라.

 

그러니까,

뼈를 튼튼히 유지하려면

(1) 칼슘을 하루 필요량을 먹어줘야 하고 (유제품과 멸치...)

(2) 캄슘 소화 흡수와 관련있는 비타민 D를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하루 일정량 햇볕을 쬐어야 하고

(3) 유산소 운동 (걷기, 달리기, 줄넘기)등을 하여 뼈밀도를 단단히.

 

대략 이러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크림치즈를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

 

 

 

 

 

 

 

 

 

하버의 파라솔, 그 파랑색이 하도 이뻐서

 

 

 

 

 

 

 

 

 

 

 

 

 

 

 

2010년 7월 24일 토요일

Ice Rose

 

 

터키런에 다녀오는 길에

그로서리에 들러서 주말에 '일용할 양식'들을 대충 사고
(수박한통, 블루베리, 라스베리, 블랙베리, 상추, 샐러드야채, 씨리얼)

그리고

식당에 장미 한다발 (오달러) 이렇게 샀다.

 

마음이 자꾸만 땅으로 쳐지고, 기운이 없고 그럴땐

뭔가, 기분좋고 쾌활한 장치를 해야 한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인데

 

일단 유리 꽃병을 세제를 풀어서 아주 뽀득뽀득하게 투명하게 닦은 후에

장미를 꽃고

그리고 화병에 '얼음'조각들을 둥둥 띄워 놓는거다.

장미 시원하라고...

그런데 보따리와 장미를 한꺼번에 옮기다가 꽃 목이 떨어진 장미들도 있어서

그것들도 버리지 않고 작은 유리그릇에 담아주고.

얼음도 함께.

 

유리병과 유리 그릇에 차가운 물방울이 송송 맺히니까

정말 마음까지 시원해진다.

 

 

아침에는 기분이 정말 저조 했는데

터키런 산책하면서 땀을 뚝 뚝 흘리고

(걷다가 쉬느라고 가만히 바위위에 앉아있으려니까

내 목에서 땀이 포도알처럼 뚝뚝 떨어져서 바위를 적시더라...)

야채 사온 것과 찬밥을 섞어서 양푼에 비빔밥을 해서 먹고

(요즘은 더워서 뜨거운 밥이 싫다. 밥도 찬밥이 좋다.)

그리고 기분좋게 쉬는중.

 

이제 기분좋게 청소기 돌리고

좀 쉬다가,

즐거운 저녁을 맞이해야지.

 

 

 

 

 

 

 

 

 

 

 

[산책] Turkey Run Park 의 '물개'

토요일 아침.

날씨가 더워서인지, 아니면 여름마다 찾아오는 무기력감 때문인지 모르지만

좀 피곤하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상태라서

어제도 종일 빈둥거리기만 하다가

아침에 일어나,  오늘도 그렇게 허망하게 하루를 보내게 되는게 아닐까 걱정이 된 나머지

곤히 자는 찬홍이를 깨워가지고

Turkey Run Park 에 갔다. 왕눈이도 데리고. (지팔이놈은 안일어나서 냅 뒀다.)

 

계곡에서, 양말 벗고, 신발 벗고, 계곡 물에 들어가서 세수도 하고 물장구도 치고 놀다가

(찬홍이는 절대 물에 안들어온다. 우리집 남자들은 모두 똑같다. 왕눈이까지 포함해서,  물가에서도 물을 그림구경하듯 하는 인종들이다.)

 

나는 잠시라도 '장난'을 치지 않으면 심심해 죽는 혈액혁을 타고 나서,

게다가 '물'가에서 놀지 못하면 우울증에 빠지는 '물고기자리'인지라

물을 만나면, 놀아야만 한다.

 

하여,

왕땡이를 번쩍 안아다가 일단 내가 안은 상태로 물에 띄워서 준비운동을 시켜준 후에

(내 품에 안겨서 열심히 자맥질을 하는 왕눈선수)

왕땡이를 물에 풀어 놔 주었다.

왕땡이는 아주아주 자연스럽게 '개 헤엄'을 쳐서 이 난관을 빠져 나가더라 하하하.

왕땡이가 헤엄치는 모습이 너무너무 미끈하고 자연스러워 보여서

또다시 물에 빠뜨리려고 했지만

녀석이 물 밖으로 나온후에 저만치 바위위에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았으므로

오늘 '물개 놀이'는 이쯤에서 마무리를 해야만 했다.

 

 

 

 

 

 

 

 

 

(아래) 미끈하게 헤엄치며 도망가는 왕땡군.

 

 

 

 

 

컴퓨터 화면 보호기, 수족관을 깔았다. 이 보호기가 인터넷에 많이 널렸길래, 다운받아서 깔았는데, 물소리도 나고, 물고기도 돌아다니고, 책상위에 수족관이 있는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2010년 7월 23일 금요일

빨래 바구니의 왕눈이

 

 

 

집안을 싹 정리하고 나니까, 빨래 바구니용 플라스틱 바구니가 여분이 생기길래,

방석을 깔고 왕눈이를 넣어보았다.

왕눈이가 그 자리가 맘에 드는지 가만 있다.

 

왕눈이는 내가 책상에 붙어 있으면

내 의자 발치에 누워있다가 가끔 내 발에 차이거나 밟히기도 하는데

이 바구니를 내 책상 앞에 놓아두면

왕눈이가 나한테 밟히는 일은 없을것이다.

 

나의 왕눈이.

오늘 내 차에 타고 버지니아텍까지 다녀왔다.  우리 왕눈이, 세상구경 잘 한다.

 

 

지팔이의 [마지막 수업]

어제는 (2010년 7월 21일, 수요일) 지팔이가 일하던  ESL센터에서 마지막 수업을 했다.

그리고, 그의 친구들과 동료들이 그를 위한 간단한 작별 파티를 열어 주었다.

지팔이는 바지와 셔츠를 정성껏 다려입고 넥타이까지 매고 나서면서

"엄마도 꼭 와서 우리 보스하고 인사도 하고, 내 친구들도 보고, 내가 수업하는 것도 보고..."

중얼중얼거리길래, "오냐 가 주마" 했더니 꽤나 좋아하는 눈치였다.

지팔이는 전부터 자기네 ESL센터에 와서 자기가 수업하는 것좀 봐 달라고 했었는데

나는 한번도 녀석이 근무하는 곳에 가 본 적이 없다.

 

(다른집은, 엄마가 자식 근무하는 곳이 어떤데인지 궁금해서 가려고 기웃거리면

자식이 못오게 말리고 그러지 않나?

그런데 우리집 애들은 뭐든 엄마한테 보여주고 싶어하고

그 어미는 만사 귀챦다는 표정으로 인상쓰고 앉아있거나 잠이나 잔다.

우리 애들은 좀, 무심한 엄마 때문에 애로가 많다...)

 

그래서, 내가, 만사 귀챦지만, 녀석이 일하던 곳에 가 봤다.

가서 녀석의 보쓰도 만나보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도 만나고, 학생들도 만나고, 다 만났다.

그곳 선생님들 중에는 이웃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분도 있는데

서로 몰라도 이미 이리저리 한사람 거치면 다 연결되는 사람들이었다.

전공이 같으니까...

아무튼 그래서 나도 낯선 곳에 가서 전혀 낯설지 않게 선생들과 어울리다가 왔다.

 

 

우리 지팔이가 인생의 아주 힘든 시기에 ESL 센터에서 일하면서

그 힘든 시간을 보람있게 잘 보내주었다.  그점을 감사히 생각한다.

가 보니 동료와 친구들과 학생들의 사랑을 흠뿍 받으면서 지낸것 같아 역시 그점도 감사히 생각한다.

 

 

지팔이의 마지막 수업은, 어느 학생을 개인지도 해주는 것이었다.

녀석이 내가 멀리서 보고 있으니까 좀 긴장된 표정이었다.

 

 

 

 

지팔이가 수업을 하는 동안 그의 동료들이 파티 테이블을 준비했다.

 

 

메시지 보드도 재미있게 꾸몄다.

 

 

 

지팔이의 영어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이 와서 축하해 주었다.

나하고 똑같은 이름을 가진 한국인 여학생도 있었다. (흰 셔츠)

 

 

지팔이 녀석은 간단한 스피치를 하는 자리에서 눈물을 짰다. (어이구야. 너 내자식 맞는거냐?)

 

 

오른쪽 금발 아가씨, 미셸도 여러차례 눈물을 훔치더라. (사람들이 정이 넘치나보다)

미셸은 지팔이를 인터뷰 하고 선생으로 뽑은 사람이었다.

지팔이를 1년반 전에 처음 만났을때를 상기하다가 눈물을 터뜨린다.

뭐...그 사이에 함께 일하면서 정이 많이 들었나보다.

 

 

지팔이와 함께 일한 동료, 친구들.

 

 

 

지팔이에게는, 사진 속의 이 사람들이 그의 '또다른 가족'이었을 것이다.  엄마나 아버지나 형제가 채워줄수 없는, 다른 영역을 채워준 사람들.  그러니, 참 고마운 분 들이다. 이 분들이 있어서 우리 지팔이가 하루 일과중 어떤 부분을 빛나는 시간으로 채울수 있었을 것이다.

 

지팔이의 이 대학에서의 일과 공부는 이제 끝났다.

지팔이는 오늘 UVA 오리엔테이션에 다녀왔다.

새로운 삶이, 새로운 사람들이 그 아이를 기다리고 있을것이다.

(지팔이가 앞으로 어디에 가서 누굴 만나건, 지팔이는 이 학교에서 배우고, 이 학교의 교수님들에게서 지도받고, 그리고 이 학교의 ESL센터에서 흡족한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너는 이 학교가 배출한 인재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은혜를 갚아야 하는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