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에, 어느 기업인의 강연 내용에 대한 신문 기사를 긁어다 놓은 것이 있다.
어떤 분이, '서양 여자들은 한국 여자보다 열배나 더 부지런히 산다'는 식으로 애매한 비교를 하신 듯 하다.
뭐...그것이 학교 교실도 아니고 특정 집단의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네 끼리 자화자찬 하는 자리에서 나눌만한 소리가 나온 것 같고, 이런 일에 일일이 논리와 비논리를 구분지어 따따부따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하필 그것이 어떤 이름 난 여성의 입에서 나왔고
하필 나도 그 '한국 여자'라서 모종의 '피해의식'이 발동해서
나혼자 처박혀 있는 이 세상의 구석에서 혼자 쭝얼거려본다.
나는 40대 한국 여성이다.
나는 스스로를 많이 가진 사람. 부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중산층이라고 믿고 있다
가진 동산과 부동산 이라고는 두 부부가 노력하여 장만한 경기도 변두리에 아파트 한채
그리고 약간의 저축.
그것 뿐이다.
그외에 뭘 가졌을까 생각해보니
신체 건강한 두 아들 (큰놈은 내년 1월에 군대 들어간다), 그리고, 남들보다 긴 가방끈. 직장, 원대한 꿈. 그리고...행운.
나는 40대 한국산 여성이다.
나는 미국에서 10년 가까이 살면서 대학원에서 미국출신 뿐 아니라, 세계 여러나라 출신의 인재들과 협력하고 겨루면서 공부를 했고, 공부를 마쳤고, 그리고 아무튼 미국땅에서 합법적으로 직장을 얻어 합법적으로 먹고 사는 소 시민이다. (그러면, 나 서양여자들만큼은 해 낸것이겠지...) 내가 '재벌'의 딸이 아니니, 돈 펑펑 써가면서 유유자적 공부한 것도 아니고, 가난뱅이 유학생들이 하는 만큼의 고생도 했고, 내 삶이 주변의 미국인들보다 고생스러웠으되 나는 내가 가난하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내가 고생을 한다는 생각도 안했다. 저 좋아하는 고생이니까.
다시 말한다. 나는 40대 한국 여성이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없이 멋대로 입에서 뱉어내는 '만만한 아줌마' 집단의 한명이다.)
그런데, 나는
나의 삶을 '극소수'만이 누릴수 있는 엄청난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나는 나와 비슷한 환경의 내 또래 40대 여성들중에 (혹은 30대, 혹은 20대 여성들 역시) 얼마나 이같은 '행운'을 누릴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내가 둘러보면, 부자이건 빈곤층이건, 한국의 여성들이 어떤 면에서 '딱하다.' 내가 둘러보면, 누구하나 다리 뻗고 편히 자는 사람이 없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전업주부인 내 언니나 올케
혹은 멀쩡히 유능한 사회의 일꾼으로 직장을 다니다가 자녀 양육을 위해서 전업주부의 길을 택한 내 친구들을 보면
이 재능있고 머리좋은 인재들이, 가정에서 해 내는 일도 무시할수 없을 만큼 버겁고, 그리고 한도 끝도 없다.
이들은 단순히
'집에서 노는 사람'
'팔자가 좋아서, 남편 잘 만나서 집에서 놀면서 돈이나 쓰는 여자'
'낮에 식당에 가서 노는 사람'
들로 비쳐질지 모르겠으나, 그 삶을 미세하게 들여다보면, 이들이 참 힘들어보인다.
경쟁이 치열한 한국 사회에서 생존해 내기 위해서 받는 스트레스는, '어마어마'하다...
서양 여자들이 이만큼의 스트레스를 견뎌 낼수나 있을까? -- 나는 가끔 이런 의문을 품는다.
그 기업인은, 서양여자들이 한국 여자들보다 열배나 열심히 산다는 식으로 단순무식하게 발언 하셨는데
내가 서양여자들 속에서 이들과 겨루면서 생존하고 있으니 나도 그 여자들만큼은 해 내는 것일테고
(혹은 다른 서양여자들이 해내지 못한 것을 해 냈으니 그들보다 몇배 더 열심히 사는 것일지도 모르는데)
그런 내가 돌아보기에,
나는 내가 전업주부인 우리 언니보다 더 열심히 살아내는 것 같지가 않다...
나보다 한국의 중산층 전업주부인 우리 언니가 더 치열하게, 부지런하게 살아내고 있는것처럼 보인다.
우리 언니, 가끔 골프도 치고, 강남의 한적한 식당에서 점심도 먹는 수준의 삶을 살고 있다.
나 미국에서 골프 안 치고, 한적한 식당 못간다.
나 직장다니고 애들 키우면서 산다.
우리 언니 전업주부다.
그런데 내 눈에 전업주부인 우리 언니가 게으르다거나 한가로워 보이지 않는다.
내가 가끔 한국에 가서 보면, 한가한 주부 별로 없다. 일없이 노는것 같이 보여도, 어딘가 각박하고 쫒기는 삶을 위태위태하게 견디는 것 처럼 보인다.
한국 여성들 서양여자들보다 게으른가?
참으로 단순무식한 어떤 비교에 대해서
어떤 사람이 단순무식하게 자신의 잣대로 떠들어댔으니
나 역시 똑같은 단순무식 논리로, 내 잣대로 떠들어보자.
한국 여성들 서양여자들만큼의 '삶의 질'을 향유하는가?
생활은 근사해보이는데, 알맹이가 곯아터지고 있는 것 같다.
내 눈에는 이들이 고통받는것이 보인다.
이들이 정서적으로, 심리적으로 받는 고통은 어쩔건대?
그건 개인의 문제라고 무시할건가?
서양여자들, 이만큼의 스트레스라면 감당 못할거다.
한국여자니까 그래도 아뭇소리 않고 부지런히 견디고 사는 것이지.
***
'모나리자 미소 Mona Lisa Smile (2003)' 이라는 쥴리아 로버츠 주연의 영화가 한 편 있다.
그 영화에서 '미술선생'은 총명한 여자 대학생들에게 '여성의 사회참여'를 극구 가르치고 싶어 한다.
제자들 중에서 어떤 매우 총명한 여학생이 '예일'에 진학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똑똑한 제자는 예일에 진학하는 대신에 '주부'의 길을 선택한다.
미술선생은 똑똑한 여학생이 평범한 전업주부의 길을 선택한 것에 대하여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 때 이 제자가 발끈 화를 내면서 미술 선생에게 말한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이 길은 아니다. 나는 내 의지로 훌륭한 가정을 경영하겠다고 선택한거다.
또다른 여학생이 있다.
이 여학생은 여성의 상급학교 진학이나, 사회참여를 어리석은 일이라고 보고
미술선생을 방해하고 조소를 보낸다.
하지만 결혼하고나서 여성의 현실을 경험한 그녀는 이혼하고 상급학교에 진학한다.
이 영화를 보면, '지도자' 혹은 '교사'의 우매한 '독선'이 보인다.
똑똑하면 모두 상급학교 진학하고, 사회 참여하고, 그래야만 승리하는 것이며
똑똑한데도 전업주부를 선택하면 '바보같은' 짓인가?
이야말로 누군가의 삶을 자신의 잣대로 재는 '독선'이다.
나에게는 내가 매우 아끼는 제자가 한 명 있다.
나의 첫 제자들중에 하나이고, 20대 어린 친구인데, 내가 의지할 정도로 사람이 참하고 똑똑했다.
나는 이 똑똑한 친구가 석사에서 안주하지 말고 '박사'과정에 입문하기를 내심 바랬다.
하지만 이 친구는 석사를 마치고 어느 국제학교 영어선생자리가 났다며 내 곁을 떠났다.
나는 내심 안타까웠다. 조금 더 공부하면 탑 클래스 대학원에 가서 박사가 될것같아 보였는데...
나는 내 제자에게 '이러한 길도 있다'고 정보만 주었을뿐, 그것을 강권하지는 않았다.
안타까웠지만 하는수 없었다.
사실 박사가 되는것보다, 어느 국제학교에 가서 청소년들을 잘 이끄는것이 어쩌면 이 사회에 더욱 이바지 하는 것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오직 신만이 아실 것이다...
나 역시 어리석은 독선을 범하면 안되는 것이다. 나는 내 제자의 판단을, 하는 일을 존중한다.
***
함부로 남의 삶의 풍경을 재단하는 것은 참 위험한 일이다.
어느 이름없는 개인이 그렇게 하는것도 위험한 일이고
이름난, 존경받는 분이 그런 짓을 하면 그 위험이 더 커진다.
한국 여자들은 동네 북이 아니다...
허구헌날 강간, 성추행 기사가 인터넷 매체를 도배하는 이 판국에
아나운서가 되기 위해서는 '다 줘야'한다는 소리가 난무하는 사회에서
학교 선생질을 하는 중에 '처녀냐 아니냐' 이따위 소리를 교장한테서 들어도 참아야 하고 (제기랄)
정치부 기자 아무나 하는것 아닌데, 그런 기자질 할때 국회의원이 젖퉁이를 만지지 못하도록 조심해야하고
(아 또 제기랄) 낮에 어쩌다 호텔 식당에서 밥 먹으면 '한심한 여자'로 낙인 찍혀야 하고
새벽부터 그 다음날 새벽까지 애들 학원 보내느라 뺑뺑이쳐야하고
아니면 애들 과외비 대기 위해서 온종일 편의점 점원도 해야하고
경기가 안좋으니 대학 나온 자식이 취직을 못해, 그 엄마가 파출부라도 뛰어야 하는데
도매끔에 '놀순이' 집단으로 몰려도, 입을 닥쳐야 하는 한국여자로 사는 일은
서양여자들보다 열배 스무배 힘든 일이다.
군대가 이보다 힘들겠는가?
군대야 2년이면 끝나지...이건 평생 끝이 안나요...
나 미국에서 십년 가까이 공부 하고, 직장생활 하면서 사는데
내 취미가 씨앤앤 뉴스 보는거고, 매일 아침 워싱턴 포스트 꼬박꼬박 읽는건데
세상에,
언론에서 '미국 여자들 게으르다'고 씹는 기사 한번도 본 적 없다.
사회 지도층 인사중에 이런 소리 하는 거 한번도 못 봤다.
미국 여자들은 모두 검소하고 부지런하고 모범적으로 살아서 이런 소리 안듣는건가?
아니지,
어딜 감히, 이따위, 소리들을, 입에 올릴수 있단 말인가?
아니 왜 존경받을 만한 분이 '막나가는' 소리를 겁도 없이 뱉어내는가?
내 참, 한국여자들이 오죽 착하면 이런 소리 듣고도, 그냥 직수굿이 견디는가...
제기랄...나는 한국 여자다.
주위의 서양 여자들보다 부지런하고 빡세게 살지만
보통 한국 여성들에 비교하면 '나무늘보'처럼 게을러보이는, 팔자좋은 한국여자다.
내가 아웃라이어(outlier)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판단을 유보하고 입을 닥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