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철학자를 많이 배출한 이유는 그곳의 긴 겨울과 음산한 날씨 덕분이라는 설이 있는데, 역시나 눈쌓인 겨울은 철학책 읽기 좋은 계절인듯 하다. 주제가 철학이건 문학이건 과학이건간에 눈쌓인 창밖을 이따금 내다보며 따뜻한 이불속에 누워 책을 보는 맛이야.
나는 불교적인 집안의 영향으로, 그리고 내가 존경하던 선생님들이 수업중에 '불교적'인 이야기를 많이 들려준 이유로 불교적인 감수성에 푹 빠져서 성장했다. 물론 대학시절, 그 후로 철학개론 수업이나 비슷한 수업과 교양서를 통해 세계철학 겉핥기를 아주 안한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서양철학의 '맛'을 제대로 알게 된것은 2002년 이후의 일이 될 것이다. 2002년에 영문판으로 읽었던 소크라테스의 '변론' '향연'등이 서양철학에 대한 내 눈을 뜨게 해 주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나는 중학생때 한글판으로 읽은적이 있었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 (어차피 번역서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미국에서 이것을 영문판으로 차근 차근 읽으면서, 소크라테스의 논리 전개 방식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아하! 이것이 서양인들을 지배하는 논리 구조이구나! 깨달았었다.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진행된 미국식 수업은, 한국인으로 (불교적 정서와 사고로) 성장한 나의 시각을 어느정도 교정하고 확장시킨 시기였다고 할만하다. 처음에 나는 어리둥절했고, 후에 나는 약아져갔으며, 현재 나는 내가 온 구불구불 구부러진 길을 돌아보고 있다.
돌아보면, 치밀한 논리를 펼쳤던 소크라테스, 그리고 엄밀하게 관찰한 것을 바탕으로 추론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각이 모든 서양사람들의 사고체계를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에게는 빼도박도 못할 크리스찬 신앙적 시각이 또한 자리잡고 있으므로. 그러나 아무튼 나는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에 입각한 사고체계에 매력을 느꼈고, 그러한 시스템에 잘 적응했다. 내가 보기에 적어도 '학계'에서는 이들의 논리가 아직도 먹혀들어가고 있고, 나는 그 안에서 안도할수 있다. (예측가능한 세계, 논리가 분명한 세계).
가끔 내 학생들은 과제를 하다말고 푸념을 하기도 한다: "언어는 답이 없고, 불규칙하고 불투명하여 예측불가능하므로 공부하기가 힘들다"는 것이 그들의 하소연이다. 언어가 답이 없는 이유는 세상이 답이 없기 때문인데, 이 해답없는 세상에서 어떤 '원리'를 찾아낸 성현들이 있음을 그대들은 아는가? 나는 내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어지지만, 대개 나는 침묵한다. 공부 할 놈만 하는거다. 공부가 길이 아닌 놈은 딴길을 가면 되는거다. 해답없는 혼돈속에서 '논리'와 '원리'를 찾아내는 것이 학문하는것이다. 이것이 나의 생각이다.
우리집에 널려있는 대부분의 국/영문 철학 관계 서적들은 철학책 읽기가 '유일한 취미'인 남편의 책들인데, 그래서 해골 복잡할때 아무데나 돌아보면 꼭 뭔가가 내 머리맡에, 발치에, 밥상밑이나, 변소 뚜껑위에, 쓰레기통 옆에, 아무데나 놓여있는 편이다. 그중에 해골복잡할때는, 내가 어린시절 읽었거나, 몇차례 본적이 있는 책들중에 하나 골라서 옛친구를 만나듯 책장을 아무데나 열고 읽기 시작하다가, 재미있으면 처음부터 다시 읽고, 재미 없으면 아무데나 처박아두고 잊어버리고 만다. 철학이야기 책은 영문책이 두권이 있고 (남편과 내가 각자 갖고 있던 것은 중복되어 두권이 되고 만다), 번역판도 한권이 있는데, 오늘은 온종일 따끈한 전기담요에서 뒹굴며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이스토텔레스장을 읽었다. (어쩌면 철학읽기에도 우울증을 다스리는 치유력이 있을지도 모를일이지.)
아리스토텔레스이 이상적 인간상을 듀란트가 소개한 대목을 옮겨적어보자 (왜냐하면, 사람들이 나를 '문제아' 취급하는 경향이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상적 인간상에도 그런 '문제아'적인 특징이 많이 보이기 때문에 - 나 조금 이상하지만 아주 이상한 사람은 아닐지도 몰라, 이런 희망적인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107-108 페이지
그가 충분히 돌보는 일은 소수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쓸데없이 위험을 무릎쓰지 않는다. 그러나 큰 위기를 맞이하면 즐거이 목숨도 바친다. 어떤 경우에는 사는것이 오히려 욕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남의 봉사를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만 남들에게 봉사하려고 한다. 친절을 베푸는 것은 우월성의 증거이고 친절을 받는 것은 예속의 증거이다... 그는 공개적인 선전에 끼어들지 않는다... 그는 호오(好惡)를 분명히 하며 인간사와 사물을 경멸하므로 언행이 솔직하다. 그의 안목으로 보면 위대한 것은 하나도 없으므로 결코 열렬히 찬양하지도 않는다. 그는 벗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공손하지 않다. 공손하다는 것은 노예의 표시이다.... 그는 결코 악의를 느끼지 않으며 모욕을 받아도 언제나 잊고 흘려버린다... 그는 이야기 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자기가 칭찬을 받든 남이 비난을 받든 그와는 상관이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험담을 하지 않는다. 그의 태도는 침착하고 그의 목소리는 굵직하고 그의 말은 신중하다. 그는 오직 소수의 일에만 관심을 갖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는다. 그는 매우 중요한 일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므로 경쟁에 휩쓸리지 않는다. 근심에 싸인 자만이 날카로운 소리로 외치고 급히 걷는다... 그는 인생의 재난을 위엄과 품위를 갖고 인내하며 온갖 절술로써 한정된 병력을 지휘하는 능숙한 장군처럼 자신의 환경을 최선의 것으로 만든다. 덕이 없는자, 능력이 없는 자에게는 자기 자신이 최대의 적이어서 고독을 두려워하지만, 그에게는 자기 자신이 최선의 벗이므로 그는 칩거를 좋아한다. ('윤리학').
내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다방면'에 왕성한 호기심을 갖고 끊임없이 '관찰'하고 '사색'했기 때문이다. 라파엘로가 서양 학자들을 그려놓은 School Athens 그림에서 중앙 왼편의 플라톤은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고, 오른편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른손 바닥이 땅을 향해 있으며 왼손에는 책을 들고 있다. 나는 가끔 심심할때면 이 그림속의 소크라테스 아저씨와 디오게네스, 수학자들을 하나 하나 구별해가며 숨은그림 찾기 놀이를 하곤 하는데, 어느날부터인가 나의 관심은 대머리 소크라테스 아저씨에게서 아리스토텔레스로 옮겨져가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학문의 길에 접어 들면서 '학자'의 표상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최정점에 놓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석박사과정을 통해 익힌 학문의 방법은 궁극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시도하고 정리했던 방법들이었던 것이다.

오늘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만나서 잠시 달콤했다. 내가 현재 할 수 있는것들을 신중하게 하자. 머리를 지나치게 굴리지 말자.
2009년 1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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