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14일 토요일

[Film] The Pirate Radio 그리고 '라디오 스타'

http://www.imdb.com/title/tt1131729/

 

 

The Pirate Radio (= The Boat that Rocked) 해적 라디오.

 

영화관에서 프리뷰로 몇차례 보면서, 이 영화가 개봉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기대했던, 기대에 부응하는, 유쾌한 영화였다.  영국영화가 갖는 영국식의 썰렁한 유머도 유쾌했고, 전편에 흐르는 흘러간 롹도 좋았고.  만족스럽다. 영화를 보면서, 어릴때 라디오 주위에 모여서 하루 일과를 마감하던 장면도 떠올렸고, 많은 이야기들이 한꺼번에 스쳐지나갔다.

 

동일한 장르의 영화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영국의 The Pirate Radio (해적 라디오)와, 몇해전에 한국의 영화팬들사이에 사랑을 받았던 '라디오 스타'는 여러면에서 닮은 꼴이다.

 

 1. 주류 사회의 바깥, 변두리에서 (바다, 강원도 산골 구석) 라디오 방송이 울려퍼진다.

 2. 라디오 음악 프로이다

 3. 방송을 진행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주요 모티브가 된다.

 4. 별로 힘 없는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5. 주류 사회 (힘가진 자들)의 어두운 힘에 노출되어 위기를 겪는다.

 6. 그러나 라디오 방송은 사람들의 사랑속에 '영원'하다.

 

 

 

 

 

 

라디오 스타

 

한국에서 '라디오 스타'가 개봉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때, 나는 한참 '악몽'에 시달리며 대학원 공부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종합시험을 무사히 마치고 3년만에 한국 집에 가던 해, 여름에 이 영화를 비디오로 보았었다. 역시 상상했던 대로 아름다운 영화였다.  그리고 2008년 여름에는 안성기씨가 워싱턴의  스미소니안 아시안 미술관에 왔다. 이곳에서 '라디오 스타'를 상영해주었다.  우리들은 '안성기'씨와 함께 이 영화를 보고, 그리고 그 배우와 토론도 하고...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마감할지 고민하다가 안성기씨가  우산을 받쳐주는 연기를 해봤는데 그것이 좋아서 채택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듣고.  안성기씨는 내가 상상했던 것 보다 더 단정했고, 내가 상상했던 것 보다, 더 소박하고 따뜻해 보였다.

 

 

나는 해적 라디오 영화를 보면서, 왜 하필 '안성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 나는 그 날의 안성기 오빠를 잊을수가... (하하.).  사람들에게는 각자 자신의 '스타'가 있고, 그리고 우리는 이따금 그 '스타'에 열광한다. 하늘의 별을 이유없이 바라보듯. 열광에는 '이유'가 없다.  그 이유없는 열광의 폭을 확장시킨 음악 장르, 그것이 롹이나 팝일 것이다.

 

 

라디오 세대

 

 

우리들은 어떤 경로로 인생 '최초'의 팝이나 롹을 알게 된 것일까?  나는 내가 '유치원'에서 배워야 할 것 들을 대개 시골집 마당에서 배웠듯, 인생 최초의 많은 것들을 나보다 열살쯤 나이가 많은 고모들에게서 전수 받았다. 글씨를 읽고 쓰는것도,  막대기로 마당에 앉아 사람이나 집을 그리는 것도 고모들에게서 배웠다.  팝송을 듣는것도 고모들에게서 배웠다.

 

옛날 우리 시골집은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도록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새마을 운동 사업으로 전국 방방곡곡이 근대화가 된 후에도 '경기도 용인'의 우리 마을에는 전기 들어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는데, 이곳이 서울에서 멀지도 않으면서 이렇게 방치된 이유는 근처에 군부대가 있어서 그렇다는 말도 있고...아니면 특별한 이유없이 그저 잊혀진 곳이었을지도 모른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시골마을에는 저녁이, 밤이 일찍 찾아 들었다. 겨울에는 저녁 여섯시만 되어도 사방이 깜깜했고,  일찌감치 저녁밥을 먹고나서 모두들 뜨거운 물을 떠다가 세수를 하고 방 걸레질을 치고 안방에 모이면, 라디오를 듣는 것 외에는 딱히 할 만한 일이 없었다.  서울의 밝은 전깃불 아래서 살다가 시골의 남포등불 아래에 있게되면, 정말로 '이렇게 어두운데서 책 읽으면 눈 버리겠다'는 근심이 들어서 저녁에는 그 좋아하는 책도 읽지 않았다.  우리들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지시에 따라 아랫목부터 차례차례 이부자리를 깔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손주들에게 아랫목 자리를 주고 당신들은 웃목에서 주무셨다)  그리고 이불속에 들어가서 '연속극'에 귀를 기울였다.  연속극이 끝나면 잠이 들었다.

 

잠이 들었다...하지만, 우리들은 자는척 하다가 사랑채의 '고모방'으로 슬금슬금 건너갔다. 고모는 차인태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별이 빛나는 밤에' 나 황인용 아나운서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오가며 듣고 있었고, 어린 우리들에게 차인태와 황인용중에서 누가 더 좋은지 비교를 하라는 숙제를 내기도 하였는데,  나는 앰비씨의 차인태 아나운서 쪽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었다. 왜냐하면, 서울집에서 테레비로 '장학퀴즈'를 즐겨 봤는데, 그 장학퀴즈를 진행하는 사람이 '차인태'였고, 나는 장학퀴즈의 광팬이었으므로... (하하.)

 

 

내가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송구스럽게도 나의 영어실력이 나의 사부인 우리 고모들보다 윗길이 되면서 나의 팝음악 편력은 자주독립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장학퀴즈 세대

 

 

위에 차인태씨의 '장학퀴즈' 이야기가 나오니 대학 시절 미팅 파트너가 떠오른다.  그는 K대 사학과 학생이었는데,  내가 1학년일때 그 사람이 3학년쯤 되었던가?  그 당시에는 2,3년 차이만 나도 나이 차이가 굉장하다고 느끼던 때였다. (지금은 열살 위아래는 그냥 친구 쯤으로 파악하게 된다.) 그러니까 그때 나는 그 사람을 '나이 많은' 인생의 선배쯤으로 대했던 것 같다.  그는 키가 훤칠했고,  날카로운 미남 인상이었다 (대략 사이비 장동건쯤 되려나).  대화가 잘 통했던것 같지만 나는 이 날카로운 인상의 사람과 특별한 교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이야기를 '장학퀴즈' 쪽으로 자꾸만 이끌어갔다.  나역시 우리집에 흑백테레비가 들어오던 그 시절부터 머리가 다 크도록 '장학퀴즈'를 보며 밥을 먹고, 언젠가 나도 '장학퀴즈'에 나가고 싶다는 꿈을 키우며 잠자리에 들었고, 뭐 그런 평범한 세월을 보냈으므로 장학퀴즈 관련해서는 이럭저럭 이야기가 진행될수 있었다.  그 사람은 내가 장학퀴즈 팬이었음을 파악하고 난 후에도 지속적으로 장학퀴즈 얘기를 이끌었는데, 마침내 그는 내게 '연말 장원'을 기억하는지 심문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지금도 그 문제로 괴로운 중이지만) 사람 얼굴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는 습관이 있다.  난 내가 특별히 관심있어 하는 사람 외에는 뭘 잘 기억을 못한다.  난 한마디로 '사람'한테 별 관심이 없었다. 장학퀴즈는 특히나 '문제'가 재미있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난 연말장원자가 누구인지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그는 해마다 탄생하는 연말 장원자를 기억해내라고 내게 요구하고 있었다.  장학퀴즈에서 내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차인태 아나운서인데...  차인태 빼고는 기억나는 사람이 없는데...

 

http://sports.donga.com/IMAGE/2009/04/17/5075999.1.jpg

 

 

 

 

그가 장학퀴즈 연말 장원자를 가지고 나를 심문한 이유는 곧 밝혀졌다. 내가 아무도 기억해내지 못함을 알게된 그는 탄식하듯 한숨을 내 쉬며, 딱하게 나를 쳐다보며,  내가 얼마나 문제가 많은 학생인지 지적하듯 그렇게 한심한 표정으로 일깨워 주었다, "내가 4년전에 거기서 연말 장원한 사람인데... 나 기억 안나요?"

 

 

지금 나는 많이 약아져있다.  지금의 나라면 누군가가 '내가 장원한 사람인데...'하고 탄식하면, 여우같이 머리를 싹 굴린후에 방긋 웃으며, "아, 아, 아, 기억난다! 그때 그 제물포고등학교, 인천 제물포 고등학교 그 오빠 아닌가요?" 뭐 요러면서 상대방을 기쁘게 해줬겠지만, 나는 그당시 매너고 에티켓이고 배려고 그런 세련된 어휘와는 상관없이 살던 무지렁이 였다.  나는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정직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저는 차인태만 기억나요."

 

 

그 미팅한 날, 우리는 버스 정거장에서 각자 찢어졌다.  (나는 애프터 신청도 못받아보고 뻥 차인 것이지. 갈갈갈 )  그는 '장학퀴즈의 연말 장원자'를 몰라보는 나를 괘씸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 미팅 자리에 나왔던 남학생들이 장학퀴즈 출연자들의 서클 회원들이었다고 한다.

 

 

차인태씨는, 내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 딱 한번 문틈으로 본적이 있다. 나는 학교 신문사 기자였고, 우리 신문사 옆에는 대학 방송국이 있었다.  방송국에서는 여름방학이면 국내 방송인들을 초빙하여 특강을 들었다.  차인태씨가 우리학교 방송국에 특강을 하러 왔다.  지금의 나라면, "그 특강 나도 좀 낑겨 듣자" 이러고 역시 내 친구들인 방송국 친구들 틈에 끼어서 들었겠지만, 그때 나는 소심하고 낯을 무척 가리는 어딘가 모자라는 학생이었다. 나는 그냥 문틈으로 차인태씨를 들여다 보았는데, 테레비에서 보이는 것보다 훨씬 훤칠하게 잘 생긴, 정말 훤하게 잘생긴, 그리고 말씨도 고운 신사였다.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

 

 

내가 중학교에 입학한 후에, 서울집에서 언니와 함께 방을 사용했는데, 우리들에게는 작은 라디오가 하나 있었다.  안방, 오빠방에 라디오가 벌써 있었고, 아마도 언니나 내가 중학교에 들어간 기념으로 아버지가 우리들에게도 라디오를 하나 사주셨을 것이다.  나도 또래 친구들처럼, 내 고모들처럼, 차인태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 씨그널 뮤직에 가슴 설레이며 이따금 서울 특별시 중구 정동...으로 나가는 주소로 엽서를 보내기도 했다.  종로 5가에는 동아방송이 있었던가?  중학교때 음악 프로에 엽서 보낸것이 뽑혀서 종로 5가의 어느 방송국 사무실로 선물 받으러 갔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때는 라디오 청소년 프로에 콩트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지어 보내가지고 여러가지 선물들을 받으러 가곤 했었다.  그런데 방송국에 가면, 어린 마음에 그 라디오 진행자가 나에게 선물을 줄 것이라는 상상을 하곤 했지만, 번번이 '작가' 혹은 '그냥 직원'이 내 학생증을 확인하고, 장부를 검토한 후에 서랍에서 뭔가 내다주는 식이라서 실망을 하곤 했다.  하지만, 뭐, 내가 이런저런 잡문을 써가지고 방송국에서 선물을 받거나 혹은 우체국 소액환을 받아 챙기는 것을 보고 우리집에서는 '저 뚱딴지가 글재주는 있나보다. 대 문호가 나오려나보다' 이러고 경이로운 눈빛으로 쳐다보곤 했을 것이다. (사실은 아무도 내가 나가서 무슨 짓을 하는지 관심도 없었다. 그저 내가 받은 선물만을 탐했을뿐.)

 

 

고등학교 3학년때는, 심야에 진행되는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라는 프로를 들었다.  이종환씨는, 신화와 같은 사람이었다. 내가 어릴때 잘나가던 디제이였다고 하는데, 나는 어려서 모르지만 무슨 스캔들을 일으켜가지고 미국으로 나가서 지내다가 돌아왔다고 하던가. 그러니까 내가 그의 방송을 들을 당시는 그가  스캔들 일으키고 나갔다가 돌아온 후, 다시 국내에서 마이크를 잡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우리고모들은 그를 선명하게 기억했지만, 내게는 낯선 사람이었다)  아무튼, 당시 고3이던 우리들은 '모두' 그의 심야 프로를 틀어놓고 공부를 했을것이다.  삼년내내 전교 일등을 달리다가 서울대에 골인한 우리반 반장이나,  삼년내내 전교 꼴찌를 달리다가 서울대에 골인을 하지 못한 우리반 꼴찌나, 누구나, 누구든지간에, 아침에 우리들의 화제는 '어젯밤에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에 이문세가 나왔는데~' 이런 식이었다.   요즘 이종환씨는 주부대상 프로그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실 것이다.  (아니 벌써 은퇴하셨을지도 모른다.)

 

 

내 하이틴 시절 '밤을 잊은 그대에게'로 귀를 간지르던 황인용 아저씨는, 내가 새댁이 되었을때  주부대상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오전에 진행되던 프로였다.  이 프로에서는 청취자 사연을 읽어주는데, 일단 채택되면 선물이 많았다.  나는 순전히 그 '선물'에 욕심이 나서 이갸기를 써보내곤 했는데, 그래서 선물이나 상금을 종종 받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해에, 나는 황인용 아저씨 프로에 글을 보내서 당시 30만원짜리 남성 정장 상품권을 받았다. 그것을 남편에게 주는 대신에 내 친정 아버지께 드렸었다.  아버지는 '언년이 덕분에 양복을 얻어 입는다'고 좋아하시며 당시의 물가로는 제법 고급 양복을 한벌 맞춰 입으셨다.  아버지는 그 해에 돌아가셨다. 그후로 나는 라디오를 듣지 않게 되었다.

 

미국에서 살면서, 운전을 할때 나는 가끔 라디오를 튼다.  대개는 NPR (http://www.npr.org/)  에 맞춰져 있거나, 그것이 지루해지면 클래식 방송을 찾아 듣는다. ( http://www.weta.org/ )

 

해적 라디오라는 영국 영화를 보는 동안, 이러저러한 기억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달콤하고, 씁쓸하고, 돌이킬수 없는 시간이었다.

 

 

근데...이 영화 또 보러 가고 싶다...내 구미에 딱 맞는 영화다.

 

댓글 3개:

  1. 박통아들 박지만씨가 고딩일때 장학퀴즈에 출연하고 싶어해서 제작진 난감했다지요..게다가 박지만씨의 순수한 고딩의 열정을 몰라주고, 그쪽 사람들이 몇문제 흘려달라는 얘기까지 했다는..나중에 무산되긴했지만..(차인표씨 글에서 나온 내용이랍니다)



    방송에 관한 따뜻한 영화는 일본영화 '웰컴 투 미스터 맥도날드'.. 6년전인가... 디비디방에서 울적한 마음을 한방에 날렸던 영화였는데..지금은 내용도 잘 생각이 안나네요... ㅎㅎ 라됴방송 얘기.



    나도 라됴 방송을 제작해보긴했지만... 심야나 새벽방송, 언젠가는 다시 해보고 싶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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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나로 - 2009/11/15 10:55
    '차인태' 씨죠? (설마 차인표 씨?)



    웰컴투맥...유튜브에 있나 찾아봐야지. = )

    아, 나로님 프로듀서 시구나. 라디오 프로듀서가 재미있어 보여요. 티브이 프로듀서는 할일이 너무 잡다하게 많아서 거의 '노가다'처럼 느껴져요. (헤헤) 하하...아아. 나도 라디오프로 진행자 해보고 싶다...(얼굴이 안보일테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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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RedFox - 2009/11/15 13:31
    ㅎㅎ 차인표씨..그분은 옆에서 한두번봤는데..한마디로 "의리의 싸나이"더군요..주위 사람들도 다 좋아하고..



    라됴피디잠깐했었죠..좋은기억..

    -

    어릴때 신새벽에들었던,"새벽을달린다"라는 라됴프로.. 지금도 그때 그 여자성우의 음성이 생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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