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5일 목요일

단풍잎을 보면

창밖에 노랗게 빨갛게 물든 가을 잎들.  뒷마당에 쌓여있는 낙엽들을 보면, 해마다 한번쯤은 꼭 회상을 하고 지나치게 되는 어린 시절의 기억 한가지.

 

시골에서 맘대로 살다가 학교에 다니기 위해서 서울 집에 올라와보니 단칸방에 나까지 포함하여 여섯식구가 오글거리고 사는데, 그 오글거림에 숨이 막힐 지경인데, 유일한 위안은 내가 할아버지 할머니의 슬하에서 벗어나 내 엄마 아빠의 슬하로 진입했다는 사실. 그리고, 참 이쁜 내동생을 매일 볼 수 있다는 사실. 그정도.  내 유일한 동생은 사내아이였는데, 인물이 여자인 나보다도 희고 예뻤는데다가, 집안의 막내라서 온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가운데, 나는 샘을 낼 줄도 모르고 그 내 이쁜 동생에 침을 흘리는 처지였다. 하도 이뻐서. 그 이쁜 내동생을 매일 보는 기쁨이라. (놈이 대학생이 될 즈음부터, 놈이 하도 키가 크고 체격이 좋으니까, 여자중에서 큰 키인 나를 무색하게 만들고, 그냥 오빠 노릇을 하러 들었는데다가 집안 친척 어른들도 그만 착각을 하고 놈이 내 오빠인양 대하곤 했다. 가령 집안 잔치때 오랫만에 만난 아제가, 아무개야 네 작은 오빠 어딨냐 할때 그 작은오빠 녀석이 내 동생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하여 숨막히는 가난과, 동생을 매일 보는 기쁨과, 이럭저럭 서울살이의 장점과 단점을 골고루 반죽하면 그럭저럭 살만한 시절일수도 있었을것이다. 그러니까 죽지않고 살았던 것이겠지.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한참 어렸고, 그래서 내 1학년 시절은 고달펐고, 2학년 시절도 역시 세상 말귀를 알아듣기 힘들어 고달펐다. 2학년때였다고 기억한다. 1학년때는 글을 읽고 쓸줄만 알고 셈은 잘하고, 그림그리기도 곧잘 하지만, 나머지는 전혀 알아듣지도 못하는 얼간이처럼 보냈는데, 2학년때는 일이 좀더 복잡해졌다.  선생님의 요구사항이 복잡해졌고, 나는 그저 글을 읽고 쓰고 산수 셈을 잘하고 그 외에는 도통 말을 못알아듣는 학습 지진아였다. 난 학교에 가는것도 재미가 없었다.  2학년때부터는 월말고사나 기말고사도 보고 학기말에 수우미양가가 들어가는 성적통지표와 함께 성적 우수자에게 우등상장을 나눠주던 시절이었는데, 선생님은 기가막혔을 것이다.  선생님의 말귀를 못알아듣고 딴짓만 하는 학습 지진아가 시험은 곧잘보고, 성적표는 대개 수로 채워서 우등상장도 냉큼냉큼 받아가면서도 여전히 나는 지진아처럼 굴었으니까. 아니 나는 말귀 전혀 못알아듣는 지진아였다.

 

그 지진아의 세월을 사는 나는 얼마나 답답하고 막막했을것인가. 도무지 돌아봐도 말이 통하는 사람이 없고, 숨이 막히는 지경인데.  게다가 우리집이 가난하여 미술도구도 변변한것이 없고, 뭔가 준비물을 챙기는 일도 쉽지 않았었다.  나는 늘 구석으로 숨거나 뭐 그래야 했다. 준비물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으니까.  (그러니까 행동도 불안정하고, 그러니까 선생님의 시선에서 자꾸 도망치게되고, 그러니까 더욱더 말귀를 알아듣기 힘들어지고, 이래저래 신세가 딱할수밖에...)

 

 

2학년 이맘때, 이렇게 깊은 가을이었다.  선생님이 나뭇잎 공작을 할거라고 내일은 나뭇잎을 모아가지고 오라고 숙제를 내 주셨다.  미술책에 알록달록한 나뭇잎을 이리저리 붙여서 작업하는 것이 나와 있었다. 그것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과제가 매우 막막했다. 나뭇잎을 어디서 구할지 알수가 없었던 것이다.  너 정말 지진아구나 나뭇잎이 어디에 있는줄도 모르니?  하고 묻고 싶어지실 것이다. 믿겨지지 않겠지만, 그 당시 나는 서울의 어느 변두리 빈민가의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미아 삼거리에서 가장 가까운, 바로 미아삼거리에 있었던 '숭인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 학교 마당에 있던 몇그루의 나무는 향나무라는 따끔거리는 가시의 상록수였고, 학교 한구석에 수양버드나무가 딱 한그루 있었는데, 그 깊은 가을에 그 나무에는 잎사귀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었다.  일단, 학교의 어디에서도 나뭇잎을 구할수가 없었다.  나는 내 짝꿍에게 물었다. "야, 내가 살던 시골집에서는 나뭇잎을 긁어다 불을 때고 살았어. 어디에나 나뭇잎은 넘쳐났어. 그런데 여기서는 한개도 찾아볼수가 없어. 어디가야 나뭇잎을 구하니?"  내 친구는 자기네집이 저 언덕위에 있는데 거기 혹시 나무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며 손가락으로 저 먼데를 가리켰다. 내 친구가 가리킨 곳은 돌산 아래 빽빽하게 세워진 집들, 산동네였다.  나는 내 친구와 함께 한길을 건너 여태 한번도 가본적도 없는 낯선 산동네 골목길을 올라가서 그 돌산 꼭대기까지 갔다.  하지만 돌산 꼭대기까지 가도 활엽수가 한그루도 없었다. 오로지 바위가 있고, 그리고 쓰레기와 마른 풀잎이 바람속에 엎드려 있을 뿐이었다.

 

나는 우리집을 떠올려 보았다. 우리가 세들어살고 있는 집의 손바닥만한 앞마당에도 나무한그루 없긴 마찬가지였다. 우리동네 다른집도 마찬가지였다. 나무가 심어져있는 집이 없었다.

 

내 친구는 나를 학교앞 한길까지 바래다주며 한숨을 지었다. 그 아이와 나에게는 내일 미술시간에 써야할 나뭇잎이 없었던 것이다.  나뭇잎을 구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걸까? 나는 춥고 막막했고, 학교에 가기가 싫었다. 내가 살던 서울 변두리 미아리의 빈민가는 그 당시 '사막'이었다.  나는 사막에서 나뭇잎을 찾고 있는 딱한, 변두리 말귀 못알아듣는 지진아였다.

 

그 지잔아가 조금 클 무렵,  저녁마다 언니와 라디오 방송을 듣는 재미를 맛볼무렵에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노래를 들으며 나는 '이노래는 내 노래인것 같아' 하고 생각하곤 했었다.  산울림의 "나의 마음은 황무지, 차가운 바람이 불고, 풀한포기 나지 않는 외로운 황무지였어요!"  풀한포기 발견하기 힘들었던 사막의 삶은 내게 무척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나는 미술시간에 사용할 나뭇잎 한장도 구하기 힘들었던 어떤 사막에서 몇년간 성장한 기억이 있다.  그래서 가을에 이리저리 물들어 돌아다니는 흔해빠진 낙엽들을 볼때마다 꼭 한번씩은 그때의 일화를 떠올린다. 아마 내년에도, 그 이듬해에도, 내가 죽는 날까지, 해마다 낙엽이 눈에 띌때 한번쯤 나는 그때의 사막의 기억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