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4일 수요일

내인생 최초의 환멸 (Disillusionment)

우리는 성장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현실을 알아가게 되지요.  라디오속에 아주 작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상상이나, 연못속에 어떤 다른 사람들의 세상이 펼쳐져있을지도 모른다는, 여러가지 상상들이 하나 하나 깨져나갑니다.  내 인생 최초의 환멸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우리는 알지 못하지요.  조금씩 조금씩 부서져 나가니까.  새가 알에서 깨어나올때 그 알껍질이 미세하게 금이 가는것처럼.

 

내가 어떻게 정치 사회적인 문제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는 나 조차도 기억하기 힘들지만, 분명 어릴때부터 신문에 보이는 '사람들'에 관심이 많았고,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할아버지, 이 세상에서 제일 힘센 사람이 누구야?" 하고 물어보면 할아버지는 "소련에 브레즈네프도 힘이 세고, 중국에 모택동도 힘이 세고,  미국 대통령도 힘이 세고, 박정희 대통령도 힘이 세고..." 이러면서 주로 신문에 나오는 인물들을 손끝으로 가리키며 중얼거리셨던 것인데.   이 세상에서 가장 힘이 셀 것만 같았던 우리 할아버지가 매일 들여다보는 신문속에 나오는, 할어버지가 인정하는 천하장사들이니 그들이 정말 힘이 센가보다 하면서, 신문을 들여다보다가... 아아, 할아버지가 힘세다고 인정하지 않았던 인물들, 김영삼이나 김대중에 대해서도 관심이 가기 시작하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나는 왜 '이세상에서 제일 힘센'사람을 궁금해 했던 것인지.  하필 그때 왜 할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힘센 사람으로 소크라테스, 예수, 석가모니 뭐 이런 성자들을 소개하는 대신에 소련의 중국의 미국의 한국의 위정자들을 언급한 것인지.  혹은 '이 세상에서 가장 힘 센 존재는 바로 너다' 이런 엉뚱한 대답을 안해주신 것인지.  궁금증은 쌓여가는데.

 

사회, 국사, 세계사등을 재미있게 공부하며 평범하게 자라나던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정치경제' 시간을 맞이하여 그동안 궁금하던 것들을 조금씩 조금씩 배워나가게 되었던 것인데, 하루하루 배우는 기쁨이 컸다고 기억합니다. 헌법의 정체라던가, 혹은 경제구조의 아주 기본 상식적인 것들을 배우면서도 내 가슴은 하늘의 무지개를 보는듯 뛰놀았던 것인데, 그것이, 고백하건대,  뭐, 하필 정치경제 선생님이 미남이라서 순전히 그의 음성에 귀먹고, 그의 아름다운 자태에 눈멀은 결과였을것입니다만.  아무튼, 나는 제법 별볼일 없는 변두리 과목에 미쳐있던 역시 변두리 청소년이었을겁니다.

 

어느날 그 아름다우신 미남 선생님 과목, 정치경제 과목 시험을 보는데, 문제는 대략 이런것이었다고 기억합니다.

 

(문제) 다음중 정당의 목적은 무엇인가?  (    )

 

1. 국가의 발전

2. 국민의 행복

3. 정당의 발전

4. 남북 통일

 

자, 여기서 정답이 무엇입니까?  저는  1번과 2번 사이에서 고민고민하다가 1번을 찍었습니다. (혹시 4번이 정답일지도 모른다는 근심을 하면서).  그런데 뚜껑 열어보니 정답은 3번이었습니다. 정당의 목적은 정당의 발전에 있다는 것입니다.  대개 1번이나 2번을 고른 우리들은 놀란 눈으로 선생님을 쳐다봤습니다.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아 그 미남선생님이 빙그레 웃을때 그 미소는 그대로 빙그레 아이스크림이었습니다)  왜 정답이 3번인지를 설명해주셨습니다. 대략, 정당은 정당의 존속을 위해 활동한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때, 정당의 목적이 정당의 발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때,  아마도 그때가, 내가 세상에 대해서 환멸을 느낀 아주 선명한 사건이었을겁니다.  고등학교 1학년때였는데요.  그때, 나는 깨달았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정글이며,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지켜주지 않으며 오직 각자 개별적인 생명들이 생존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라는 것을.  정당도, 그 어떤 사회단체도 궁극적으로는 그 자체가 목적인것이라고.   물론 그 이후에 사람은 '이기심'에서 출발하지만 그 행위 자체가 '이타적'일수 있는,  이기심과 이타심을 동시에 충족시킬수 있는 사회 활동을 할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지만, 그당시 와장창 깨어져 나가던 그 굉음을 나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어떤 현상에 대해서 실망하거나, 분노하게 될때, 어린 시절의 그 시험문제를 생각합니다. 그는 그를 위해서 존재하고, 나는 나를 위해서 존재할뿐. 그의 이기심을 내가 탓할수 없고, 나의 이기심을 당신은 탓할수 없다.  뭐 이런 아주 냉소적인 입장으로 환원하고 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냉소적인 입장에서 세상을 보면, 조금 분노가 가라앉고, 그리고 조금 더 타당한 길이 무엇일까 사색하게 됩니다.  조금더 타당한길.  너의, 그의 이기심과, 나의, 우리의 이기심을 모두 충족시킬수 있는 접점은 어디인가...  (하루 하루가 환멸인 나날이지만, 그래도 지구는 돌고 있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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