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선생이 삼형제의 맏인데, 삼형제의 애정이 돈독하다. P선생은 잠시 나와 떨어져 지내는 동안 동생들과 어울리며 시름을 달랠 것이다.
시동생 가족들과 어울려 고기에 술에, 회포를 풀면서 객적은 소리도 하고, 옛이야기도 하고 그랬다.
화제는 '과거'로 돌아가, 옛날에 '형수'가 얼마나 고약을 떨었는지 '회고담'으로 무르익어 갔다. 난, 살갑고 상냥한 사람이 아니다. 엄마같이 포근하고 상냥하고 다정한 '형수'를 기대했던 두 시동생들에게 나란 존재는 '재앙'과도 같았을거다. 난 사무적이고, 차갑고, 원칙만을 내세우는 고약스런 여자였다. 그들에게는 강아지를 품어주는 어미개와 같은 형수가 필요했는데 (왜냐하면 일찌감치 엄마를 잃었으므로), 그 형수는 그런 역할을 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던 거다.
한마디로 "까칠했다"고 그들은 나를 정의했다.
옛이야기가 끝나갈즈음, 나보다 두살이나 더 먹은 시동생이 내게 말했다:
"형수, 집안을 일으키느라고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그의 말 한마디로, 나는 그동안에 내 가슴속에 쌓여있던 시집에 대한 응어리들을 모두 풀어버리기로 했다. 이 한마디면 족하다.
내 삶이 무의미하지 않았다.
과오 많은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어느 한부분, 어딘가에 기여한 부분이 있으므로, 덕분에 내 삶의 일부분 의미롭게 빛날것이다.
남편은 일찌감치 어머니를 잃었다. 막내는 겨우 열살이었다. 아버지는...돈을 벌지 않았다...누군가는 생계를 이어야만 했다. 이집, 저집, 일가붙이들이 이럭저럭 도와주거나 보태주기도 했을것이다. 남편과 큰 시동생은 학비와 생계비를 벌어가며 공부를 해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친척들의 도움을 음으로 양으로 받았을것이다.
남편이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가서 첫 월급을 타던날, 그날에서야 그집 식구들은 '밥걱정'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순수한 의미에서의 '밥걱정'에서 해방.
내가 남편과 결혼했을때, 시집은 '이상스러워' 보였다. 어쩐 일인지, 친척들이 모두 '채권자'들처럼 행동하는것처럼 보였다. 모두들 인정으로 어려운 친척을 도와줬을것인데, 이제 먹고 살만하니 그 신세를 갚기를 바라는 것 처럼 보였다. 시아버지 역시 내게 친척들의 은공을 잊지 말것을 역설했다. (내가 빚졌나?) 시아버지는 그의 큰며느리가 '종년'처럼 시댁 어른들한테 헌신할것을 기대했다.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시아버지가 무능해서 남 신세졌으면 그건 그 대에서 끝낼 문제라고 나는 판단했다. 문서로 작성된 빚이 있으면 갚아줄것이로되, 인정상 이리저리 신세진것에 대해서 내가 뭘 어쩐다는 말인가?
그래서, 학비에 쓰느라 '현금' 빌린것을 갚아주었고, 인정상 신세진것은 인정으로 이리저리 갚았다. 우리는 여기저기 남의 경조사에 나가는 돈이 많았다. 그것은 그럭저럭 참을만 햇는데, 친척들이 내게 무례한것은 참기 힘들었다. 남의 삶에 무례하게 간섭하는 것은 용납하기가 어려웠다. 시댁 어른들은 "내가 내 조카를 어떻게 키웠는데, 조카 며느리가 들어와서 되지 못하게 무례하다"는 식이었다. 모두가 내 시어머니 노릇을 하러 들었다. 더 이상스러운 것은, 이 집안에 바람막이가 없어보였다. 삼형제가 바람막이 없이 서있는 촛불같아보였다.
그래서 나는 '나쁜년'이 되기로 했다.
나는 원칙을 정해놓고, 내가 돈을 줄곳은 주고, 아니다 싶으면 딱 잘랐다.
내 원칙은 뭐냐하면, 누구든지 은혜는 은혜로 갚되, 내 삶을 간섭하러 들거나, 내 앞에서 내 가족을 무시하는 언사를 하거나, 건방을 떨면 가만 놔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삼형제는 잘 커 주었다. 지금 그 삼형제는 번듯번듯하게 커 주었다.
그리고 이제 이 삼형제 앞에서 무례한 행동을 할 경우 '국물'도 없다는 것을 일가붙이들이 대충 파악하게 되었을 것이다.
처음에, 시동생들은 내가 시댁 일가붙이들에 대하여 분노하거나 쌀쌀맞게 구는 행동을 '무례'로 파악했을 것이다. 지금은 그 내 행동을 서슬퍼런 자존심정도로 해석을 하고 있는듯 하다. 나를 지탱하는 힘은, 자존감일 것이다. 굶어 뒈져도 남앞에 머리를 숙이지 않겠다는 자존감이 나를 무너지지 않게 만들어왔을 것이다. 물론 나도 비굴해야 할 때 비굴하고, 거름속을 지나야 할때 거름속을 지나고 살았다. 나는 가난이나, 고난, 그런것이 두렵지는 않다. 부자 앞에서도 기죽을 일이 없고, 고관대작 앞에서도 기죽을 일이 없다. 내가 내 능력으로 하루 세끼 벌어먹고 살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서 비굴하게 살 이유도 없어보인다. 그런 이유로, 역시 다른 사람도 똑같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서로 존중하고, 서로 간섭하지 않고, 도울수 있으면 돕고, 도움이 필요하면 도움을 받고 그렇게 살면 되는 일이다. 실낱같은 몇푼의 도움을 줘놓고 생색을 내러 들어서도 안되고, 그걸로 속박을 당해서도 안된다. 이 세상에 널려있는 재물은 본래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니다. 어차피 빌려 쓰다 가는건데, 운좋아서 조금 더 갖고, 부자라고 해서, 남을 우습게 봐서도 안되고, 조금 적게 가졌다고 한탄하거나 기가 죽을 필요도 없다. 서로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
내가 있어서, 나라는 존재로 해서, 어느 집안의 삼형제들이 더 잘 클수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어느정도 가치있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러면 나는 내 삶에 가치를 부여한 그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잘 살아줘서 고마운것이다. (우리 가족 누구라도 건드리면 국물도 없으....라고 말할수 있는 깡패같은 형수도 나름 귀여운거다.)
나보다 두살 많은 내 시동생이 내게 던진 한마디.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받은 상중에서 가장 멋진 '훈장'일 것이다.
고맙다.
* 한국땅에서 어떤 한 집안을 번성하게 해 놓았으니, 이제 '미국땅에서 일가를 일으켜 보면 어떨까' 혹시 그것이 내가 타고난 운명은 아닐까, 요런 상상도 해 본다. 내 앞날이 어떻게 펼쳐질지는 나도 알 수가 없다. 하느님만이 아실 일이다. 인생은 살아 볼 만 하다... 내일 죽어도, 사실, 여한이 없다. 여태까지의 삶이 이미 어마어마한 축복임을 내가 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