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30일 수요일

기별

지난주에 건강검진 한 사항중에서 두가지에 대해서 정밀 검사를 해보자는 연락이 왔다.

위와 유방.

어떤 특이/비정상 증후가 보이면 정밀검사를 하는 것이므로, 검사 해보면 별것 아니라는 진단이 나올것이라고 예측하긴 하지만,  아무튼 다시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연락을 받으니 기분이 저조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오늘 치과 치료를 모두 완료하는 날이라서, 기분이 홀가분해지려는 찰나에 이런 기별이 오다니...

 

그래서, 만약에, 만의 하나라도, 내 신체에 어떤 질환의 징조가 있어서, 내가 치료를 받아야 한다거나, 그래서 미국으로 돌아가는 일정에 차질이 생긴다거나, 혹은 내 삶의 계획들에 장애가 발생한다면 어떻게 할것인가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 치과 의자에 누워서 곰곰 생각을 해 보았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백화점에 들러서, 엄마가 입을 만한 옷을 찾아 보았는데, 마땅히 무엇을 사야 할지 알수가 없어서 구경만 하고 돌아왔다.  지금 엄마를 모시고 나가서 사 드릴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내일 위 검사를 받으려면 오늘 저녁도 굶어야 하는데, 이생각 저생각하니 어차피 입맛도 없다.  엄마 옷이나 사드리러 나가면 좋을것이다.

 

 

엄마는 내가 내일 정밀검사 받으러 병원에 간다고 하면 낭패스런 표정이 되고 말 것이다.  아침 일찍 누굴 만나러 나간다고 뻥을 치는 수밖에 없다. (맥빠진다.)

 

 

*Floss 에 대한 정보*

 

Floss (이 청소용 실)에 두종류가 있다.

1) 길다란 실모양

2) 작은 새총모양의 플라스틱 홀더에 실이 매어있는것.

 

P선생은 (1)번을 사용하고, 나는 (2)번을 사용한다.  그런데 오늘 치과치료 졸업을 하면서, 치과에서 기념으로 Oral B 치실을 하나 주길래 어떤 치실이 더 유용한가 물었다.  두가지 다 사용하면 좋긴 한데, 치과에서는 실모양의 치실이 더 좋다고 설명을 해 주었다.

 

치실중에서 어떤 제품이 가장 좋은가 물으니, 그냥 '오랄 비' 쓰면 된다고...

 

 

2010년 6월 29일 화요일

두명의 미남과 청계천변 산책

 

 

P선생은 얼굴이 작다. 포토제닉이다.  이런 사람은 공공의 웬수다.  모두 그의 곁에서는 '얼큰'이가 되고 만다. 그래서 그와 사진을 찍을때는 약간 뒤로 가서 찍는다. (-.-)

 

 

 

 

김연승군은 '얼큰이'이다. 이 친구는 우리들의 '착한 친구'이다.  이 친구와 사진을 찍을때는 마음 편하게 나란히 서서 찍어도 무리가 없다.  이 훈남 청년에게 아직 애인이 없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 할 만하다.

 

 

 

P선생이 최신형 삼성 안드로이드 폰을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장만하였는데,  내가 요런저런 기능을 점검하여 '사용방법'을 알려주는 중이다.  (나도 미국가면 스마트폰을 하나 장만하고 싶어진다...) 이 사진들은 그의 스마트폰으로 찍은 것들이다.

 

 

 

파주, 프로방스 소풍

 

 

 

 

 

엄마가 원래 체격이 나 만큼 했는데, 나이가 드시니까 키가 작아지셨다.

사람들은 내가 엄마의 판박이라고 한다. 똑같이 생겼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우리 엄마가 30년전 모습이고, 우리 엄마는 나의 30년 후 모습이다.

엄마는 서른 넘어서 나를 낳으셨으니까.

(그런데 내가 *주관적*으로 생각하기에 내가 우리 엄마보다 더 이쁘다. -.-)

 

 

 

 

 

 

 

2010년 6월 28일 월요일

나무를 위한 예의, 나 희덕

 

 

 

나무한테 찡그린 얼굴로 인사하지 마세요

나무한테 화낸 목소리로 말을 걸지 마세요

나무는 꾸중들을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답니다.

나무는 화낼만한 일을 조금도 하지 않았답니다.

 

나무네 가족의 가훈은 '정직과 실천'입니다.

그리고 '기다림'이기도 합니다.

봄이 되면 어김없이 싹을 내밀고 꽃을 피우고 또 열매 맺어 가을을 맞고

겨울이면 옷을 벗어버린채 서서 봄을 기다릴 따름이지요

 

나무의 집은 하늘이고 땅이에요

그건 나무의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때부터의 기인 역사이지요

그 무엇도 욕심껏 가지는 일이 없고 모아두는 일도 없답니다

있는 것만큼 고마워하고 받은 만큼 덜어낼 줄도 안답니다.

 

나무한테 속상한 얼굴을 보여주지 마세요

나무한테 어두운 목소리로 투정하지 마세요

그건 나무한테 하는 예의가 아니랍니다.

 

  **

 

나의 K 선배가 자신이 읽고 있던 시화집을 쓱 내밀어 '갖고 가라'고 주었다.  그 시집에서 가장 내 맘에 드는 시.

 

밤에 집에 돌아와 안방에 큰대자로 누워 엄마에게 소리내어 읽어 드리니 "그 책은 여기 놓고 가거라" 하신다. 내 그럴줄 알았다. 내가 이 시집을 소리내어 읽어드리면 엄마가 "그책은 여기 놓고 가거라" 하실줄 알았다.  그래서 밤 늦도록 나는 안방에 큰대자로 누워서 엄마가 좋아하실만한 시들을 소리내어 읽어드렸다.

 

아무래도 나의 K선배가 내게 선물한 이 책을 나는 엄마에게 선물하고 떠나게 될 것같다.  서점에 들르면 한권 더 살수도 있고, 그것도 귀챦으면 그만 둘 수도 있고... 나는 뭘 사거나 새로 장만하는 일들이 점점 무겁게 느껴진다.  나는 안방에 큰대자로 누워 엄마를 위해 시들을 낭독했던 그 기억만 가져가도 될것도 같다.

 

 

나의 K선배가 나를 좋아하는 이유는 내가 '마음이 가난한 자'이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마음이 가난한 자'를 칭했을때 그것이 어떤 사람이었을지 알수 없는데

나는 마음이 욕심으로 가득찬 사람임을 내가 알기에, 한숨이 나왔다.

 

 

나무를 위한 예의. 이 시는 곱게 적어서 벽에 붙여놓고, 어울리는 그림도 그려보고 싶은, 아름답고 힘있는 글이다. 무릇 나무 뿐이겠는가. 모든 생명가진것, 생명가지지 않은 것. 하늘아래 삼라만상 어느것 하나에도 찡그려서는 안될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웃어야 한다.  그러면 나무가 기뻐할 것이고, 그 나무를 지으신 하느님이 기뻐할 것이다.

 

 

2010년 6월 26일 토요일

오빠네 집

 

 

 

 

우리 오빠는 세계 굴지의 기업의 임원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오빠는 정말 월급을 많이 받는가보다. (부럽다).  오빠가 서울의 어떤 산동네로 이사를 갔다고 한번 놀러 오라고 해서 길을 물어 물어 가 보았다.  이 동네는 차 없이는 찾아가기 힘들어 보였다.  사실은  집근처까지 간 후에 거기서 오빠의 차를 타고 올라갔다.  오빠의 차는 내가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 차인데, 덕분에 비싼차도 한번 타 보았다.

 

오빠네 강아지 또또는 크기가 내 주먹보다 조금 큰 정도의 아주 작은 개다. 요놈이 갑자기 손님들이 쳐들어 오니까 긴장을 했는지 내 손을 앞니로 꼭 물고는 - 미안해서 쩔쩔맨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다가와서 품에 안겼다.

 

이 동네는 한마디로 '산동네'인데 가난한 사람들이 안보이고 부자들만 보이는 동네인듯 하다.  내가 살다 살다 가끔 부잣집을 가본 적도 있고, 평창동에 축구장만한 정원을 가진 집에도 놀러가 본 적도 있는데,  우리 가족중에 이렇게 으리으리한 집에서 사는 사람은 처음 본 터라 무척 신기하였다.  오빠는 좋겠다. 부자라서. 하하.  내동생의 딸은 큰고모를 많이 닮았다고 해서, 우리 언니인 큰 고모가 특히 그 녀석을 이뻐한다. 우리 언니가 입고 있는 셔츠는 무슨 일본사람 이름을 가진 디자이너의 비싼 옷이라고 하는데 내가 얼마 주고 샀냐고 물으니까 말을 안해준다.   되게 비싼 옷인가보다.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동그라미가 한개 혹은 두개 더 붙어있는 옷인가보다. 나는 뭐든 '이거 얼만데?'하고 물어보는 '천박한' 습관을 갖고 있다. 하하하.  오빠집 테라스에서 우리 언니와 내 조카 (내 동생네 막내 딸.)

 

 

그런데 돈을 얼마나 벌어야 이런 동네 정원딸린 개인주택을 소유할 수가 있는걸까? (갸우뚱.)

 

 

 

 

 

이 사진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내 작품이다.

이 산동네의 집은 사차원의 놀이터 같은 구조이다. 테라스에서 옥상으로 연결되는 사다리가 있는데 조카녀석 하나는 다람쥐처럼 이미 올라갔고, 여자 조카아이가 올라가고 싶어서 기웃거리고 있다.  창문 안의 거실에서는 엄마와 올케 언니가 있고,  그리고 사진을 찍고 있는 나와 P선생과 우리 언니가 거실 창문에 어른거리고 있다.

 

 

 

 

 

 

우리 올케 언니는 엄마의 옷을 사러 갔다가 생각 난 김에 언니와 나와 작은 올케의 옷도 선물로 사왔다며 모두 입어볼것을 요구 했다. 그래서 모두들 올케 언니가 사온 드레스들을 떨쳐 입고 사진들을 찍었다.  사실 우리 언니가 입고 있는 오렌지색 드레스는 내가 골라서 입었다가, 우리 언니한테 넘긴 것이다. (내가 저 드레스 입고 앉아있을 일이 없을것 같아서...)  나는 우리 언니한테 머리를 길러서 양갈래로 땋으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초원의 집 - 로라 잉걸스 패션이 될 것이다. 

 

우리들은 이 옷을 입고

 * 메이 플라워 타고 미국에 도착한 초기 정착민들 같다

 * 펜실베니아 아미시 마을 여자들 같다

 * 오지에 숨어 사는 어떤 종파 여자들 같다

 * 초원의 집 여자들 같다

뭐 이런 수다를 왁자지껄 떠들면서 웃어댔는데

우리 엄마는 우리들이 떠드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는채로, 자식들이 깔깔대는 것이 좋아서 깔깔대셨다.

 

원래, 우리 엄마와 형제들이 모두 모이면,

오빠는 점잖게, 말없이 그냥 빙글거리며 앉아있고

언니 역시 얌전하게 엄마 모시고 앉아있고

내 동생 녀석도 언제부터인가 지가 내 오빠인양 거드름을 피우고 점쟎게 앉아있기 때문에

결국, 내가 내 거친 입담으로 흥행사가 되어주는 편이다.

그래서 내가 육두문자와 이죽거림과 어리버리한 사람 놀리기로 난처한 질문 던져가며 '광대질'을 시작하면

온 식구가 이리저리 굴러가며 배를 잡고 웃게 된다.

나는 우리 식구들을 잘 웃긴다.

그런데 또 한편 생각하면

우리 가족들이야말로 내 유머를 알아듣고 이해해주는 유일한 집단인것도 같다.

 

 

초원의 집, 작은 아씨들, 혹은, 빨강머리앤을 연출하고 있는 우리 엄니와 언니.

 

 

 

 

나는 가끔 내 가족에 대해서 가까운 사람에게 간단히 정리 요약해서 이야기 할때,

시댁쪽으로 가면 그중 내가 부자이고

친정쪽으로 가면 그 중 내가 가난뱅이에 속한다, 고 말한다.

 

내 형제들이 모두 나보다 풍요롭게 잘 살아주어서 나는 걱정이 없어서 좋다.

또, 시댁쪽으로는,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어 줄 수 있는 형편이라서 역시 나는 좋다.

모두들 맨주먹으로 시작해서 살아왔는데

내 형제들은 모두 나보다 부자이다.

나만 돈 모으는 재주가 없는것도 같다.

그렇지만, 나 역시 돈 모으는 재주는 없으나, 내 삶이 충분히 축복으로 가득차있다고 믿기 때문에 별 불만은 없다.

 

 

우리 형부는 일이 바빠서 오지 못했는데, (아직도 만나보지 못했다) 형부는 내심... 처제인 내가 '뚱보'가 되었기를 바라는 눈치다. 우리 언니에게 처제의 체중이 얼마쯤 되는지, 살은 쪘는지 물어봤다고 한다.  현재 우리 언니가 나보다 날씬하다. (형부는 통쾌할 것이다.).  내가 며칠 이내로 살을 좀 빼가지고 형부 앞에 나타나서 형부의 약을 올려줘야지.

 

 

 

 

 

 

 

YTN 견학

 

언라인으로 내 수업을 듣는 한국의 대학원생들중에서 세 명의 학생과 토요일에 서울에서 만났다. 모두 현직 영어선생님들인데 강원도 동해시, 충청도 천안, 그리고 서울지역에서 와서 나를 만나주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언라인으로만 수업이 진행된 터라 한국의 학생들에 대해서는 '현실감'이 없었는데 그 중의 몇분을 직접 만나니 이제서야 '내 학생'이라는 실감이 났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겹게 그러나 장하게 공부하고 있었구나.)

 

지방에서 상경하는 학생의 형편을 감안해서 서울역 근처 YTN 빌딩의 스타벅스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떡본김에 제사지낸다고... 학생들과 YTN견학을 했다.  :-)  

 

 

 

 

 

 

 

 

 

 

우리들은 YTN견학후 스타벅스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언라인 수업 관련 토론을 세시간 가까이 하다가 헤어졌다. 실력있는 영어선생님들이었다. 이런분들이 내 학생이라는 것도 참 뿌듯하고.  내가 이분들의 공부에 어떻게 보탬이 되어야 할지 고민이 되기도 한다.  (이분들을 워싱턴으로 불러다가  생생한 수업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이제 한국으로 돌아와 영어선생님들과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이분들이 학교에서는 실력 쟁쟁한 영어선생님들일텐데 '선생'인 내 앞에서는 그저 착하고 수줍은 '어린 학생'이었기 때문에 내 시선에도 강아지들처럼 이쁘고 사랑스러웠다.

 

 

 

 

 

 

 

 

 

 

 

 

 

2010년 6월 25일 금요일

훈장

P선생이 삼형제의 맏인데, 삼형제의 애정이 돈독하다.  P선생은 잠시 나와 떨어져 지내는 동안 동생들과 어울리며 시름을 달랠 것이다.

 

시동생 가족들과 어울려 고기에 술에, 회포를 풀면서 객적은 소리도 하고, 옛이야기도 하고 그랬다.

 

화제는 '과거'로 돌아가, 옛날에 '형수'가 얼마나 고약을 떨었는지 '회고담'으로 무르익어 갔다.  난, 살갑고 상냥한 사람이 아니다. 엄마같이 포근하고 상냥하고 다정한 '형수'를 기대했던 두 시동생들에게 나란 존재는 '재앙'과도 같았을거다. 난 사무적이고, 차갑고, 원칙만을 내세우는 고약스런 여자였다. 그들에게는 강아지를 품어주는 어미개와 같은 형수가 필요했는데 (왜냐하면 일찌감치 엄마를 잃었으므로), 그 형수는 그런 역할을 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던 거다.

 

한마디로 "까칠했다"고 그들은 나를 정의했다.

 

옛이야기가 끝나갈즈음, 나보다 두살이나 더 먹은 시동생이 내게 말했다:

 "형수, 집안을 일으키느라고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그의 말 한마디로, 나는 그동안에 내 가슴속에 쌓여있던 시집에 대한 응어리들을 모두 풀어버리기로 했다.  이 한마디면 족하다.

내 삶이 무의미하지 않았다.

과오 많은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어느 한부분, 어딘가에 기여한 부분이 있으므로, 덕분에 내 삶의 일부분 의미롭게 빛날것이다.

 

남편은 일찌감치 어머니를 잃었다. 막내는 겨우 열살이었다.  아버지는...돈을 벌지 않았다...누군가는 생계를 이어야만 했다.  이집, 저집, 일가붙이들이 이럭저럭 도와주거나 보태주기도 했을것이다. 남편과 큰 시동생은 학비와 생계비를 벌어가며 공부를 해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친척들의 도움을 음으로 양으로 받았을것이다.

 

남편이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가서 첫 월급을 타던날, 그날에서야 그집 식구들은 '밥걱정'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순수한 의미에서의 '밥걱정'에서 해방.

 

내가 남편과 결혼했을때, 시집은 '이상스러워' 보였다.  어쩐 일인지, 친척들이 모두 '채권자'들처럼 행동하는것처럼 보였다.  모두들 인정으로 어려운 친척을 도와줬을것인데, 이제 먹고 살만하니 그 신세를 갚기를 바라는 것 처럼 보였다.  시아버지 역시 내게 친척들의 은공을 잊지 말것을 역설했다. (내가 빚졌나?)  시아버지는 그의 큰며느리가 '종년'처럼 시댁 어른들한테 헌신할것을 기대했다.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시아버지가 무능해서 남 신세졌으면 그건 그 대에서 끝낼 문제라고 나는 판단했다.  문서로 작성된 빚이 있으면 갚아줄것이로되, 인정상 이리저리 신세진것에 대해서 내가 뭘 어쩐다는 말인가?

 

그래서, 학비에 쓰느라 '현금' 빌린것을 갚아주었고, 인정상 신세진것은 인정으로 이리저리 갚았다. 우리는 여기저기 남의 경조사에 나가는 돈이 많았다. 그것은 그럭저럭 참을만 햇는데,  친척들이 내게 무례한것은 참기 힘들었다.  남의 삶에 무례하게 간섭하는 것은 용납하기가 어려웠다.  시댁 어른들은 "내가 내 조카를 어떻게 키웠는데, 조카 며느리가 들어와서 되지 못하게 무례하다"는 식이었다.  모두가 내 시어머니 노릇을 하러 들었다. 더 이상스러운 것은, 이 집안에 바람막이가 없어보였다. 삼형제가 바람막이 없이 서있는 촛불같아보였다. 

 

그래서 나는 '나쁜년'이 되기로 했다.

나는 원칙을 정해놓고, 내가 돈을 줄곳은 주고, 아니다 싶으면 딱 잘랐다.

내 원칙은 뭐냐하면, 누구든지  은혜는 은혜로 갚되, 내 삶을 간섭하러 들거나,  내 앞에서  내 가족을 무시하는 언사를 하거나, 건방을 떨면 가만 놔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삼형제는 잘 커 주었다.  지금 그 삼형제는 번듯번듯하게 커 주었다.

그리고 이제 이 삼형제 앞에서 무례한 행동을 할 경우 '국물'도 없다는 것을 일가붙이들이 대충 파악하게 되었을 것이다.

처음에, 시동생들은 내가 시댁 일가붙이들에 대하여 분노하거나 쌀쌀맞게 구는 행동을 '무례'로 파악했을 것이다. 지금은 그 내 행동을 서슬퍼런 자존심정도로 해석을 하고 있는듯 하다.  나를 지탱하는 힘은, 자존감일 것이다.  굶어 뒈져도 남앞에 머리를 숙이지 않겠다는 자존감이 나를 무너지지 않게 만들어왔을 것이다.   물론 나도 비굴해야 할 때 비굴하고, 거름속을 지나야 할때 거름속을 지나고 살았다.  나는 가난이나, 고난, 그런것이 두렵지는 않다. 부자 앞에서도 기죽을 일이 없고, 고관대작 앞에서도 기죽을 일이 없다. 내가 내 능력으로 하루 세끼 벌어먹고 살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서 비굴하게 살 이유도 없어보인다. 그런 이유로, 역시 다른 사람도 똑같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서로 존중하고, 서로 간섭하지 않고, 도울수 있으면 돕고, 도움이 필요하면 도움을 받고 그렇게 살면 되는 일이다. 실낱같은 몇푼의 도움을 줘놓고 생색을 내러 들어서도 안되고, 그걸로 속박을 당해서도 안된다. 이 세상에 널려있는 재물은 본래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니다. 어차피 빌려 쓰다 가는건데, 운좋아서 조금 더 갖고, 부자라고 해서, 남을 우습게 봐서도 안되고, 조금 적게 가졌다고 한탄하거나  기가 죽을 필요도 없다.  서로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

 

 

내가 있어서, 나라는 존재로 해서, 어느 집안의 삼형제들이 더 잘 클수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어느정도 가치있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러면 나는 내 삶에 가치를 부여한 그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잘 살아줘서 고마운것이다.  (우리 가족 누구라도 건드리면 국물도 없으....라고 말할수 있는 깡패같은 형수도 나름 귀여운거다.)

 

나보다 두살 많은 내 시동생이 내게 던진 한마디.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받은 상중에서 가장 멋진 '훈장'일 것이다.

고맙다.

 

 

*  한국땅에서 어떤 한 집안을 번성하게 해 놓았으니, 이제 '미국땅에서 일가를 일으켜 보면 어떨까' 혹시 그것이 내가 타고난 운명은 아닐까, 요런 상상도 해 본다. 내 앞날이 어떻게 펼쳐질지는 나도 알 수가 없다. 하느님만이 아실 일이다. 인생은 살아 볼 만 하다... 내일 죽어도, 사실, 여한이 없다. 여태까지의 삶이 이미 어마어마한 축복임을 내가 안다.

 

 

 

 

 

 

치과 자랑.

오늘도 치과 의자에서 두시간이 흘렀다.

아말감 뜯어낸 것 오른쪽 네개의 신경치료를 모두 마치고 금으로 채우는 작업을 했고

왼쪽 신경치료를 위해 마취, 임시 마감공사등을 했다.

(진도 팍팍 나간다.)

이제 오른쪽으로 안심하고 뭐든 씹어 먹을수 있게 되었다.

 

내가 통증을 잘 참는다는 칭찬을 여러차례 받았다.

원래 통증을 잘 참느냐고...

내가?  내가 원래 엄살쟁이였는데, 

내 신체의 일부를 누군가가 건드리는 것을 못참아 했는데

치과 치료는 힘들지 않게 잘 받아내고 있다.

오히려 나는, 치과지료 받는일이 내가 전에 겪었던것, 상상했던것보다 훨씬 수월해서

치과가 마냥 좋아지고 있는 판이다.

(내가 한국에 살고 있다면 정기적으로 치과에 다니면서 소소한것까지 모두 처치를 받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나를 치료해주는 의사나 간호사 입장에서는 내가 통증을 잘 참아내는

착한 환자로 비쳐지는 모양이다.

 

내가 나이를 먹으면서 통증을 잘 견디거나 혹은 둔감해진것일까?

이것도 나이를 먹은 사람의 힘일까? 

뭐 이런 생각을 해 봤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조금씩 조금씩 대담해지고,

아픈것을 별로 느끼지 않게 되었는데

기실은 혼자서 눈물을 쏟은 시간이 많고

지금도 혼자서 울때가 많다.

하지만, 내가 전보다 단단해진 것도 사실인것 같다.

여유...같은것이 생겼다고 할까...

지난 일년간, 나는 죽음과도 같은 우울증의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그 터널이 아직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시간을 죽지 않고 견뎌냈고,

앞으로 내가 책임져야 할 일들로 어깨가 무겁기는 하지만,

죽음의 터널을 견딘 사람의 여유 같은것이 가슴속에서 자란것도 같다.

 

치과에서

'참 잘 참는 분'이라는 칭찬을 여러차례 받아서, 나 스스로 대견했다. (나도 철 드나보다.)

 

 

 

 

2010년 6월 23일 수요일

엄마

 

 

 

엄마는 회갑을 맞이하던 16년전에,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가 수술을 받고 오랜 회복기를 거치셨다.

..

5년전에 대장암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를 극복한 엄마는

1년전에 갑상선암 수술을 받았다.

엄마가 두가지의 암 수술을 받고 극복하는 동안, 나는 엄마곁을 지킨적이 없었다.

엄마를 일으킨이들은 내 오빠, 언니, 동생 가족이었다.

 

엄마의 목에는 갑상선 암 수술을 받은 수술자국이 그려져있다.

그걸 보면 목이 멘다.

엄마는 허리가 많이 꼬부라졌고, 그리고 매일 한바퀴씩 돌았던 호수공원에도 잘 나가시지 못한다.

 

내가 연꽃 사진 찍으러 간다는 말에 '나도 호수에 가본지가 오래된다'며 따라 나서셨다.

올해에는 장미꽃축제에도 가보지 못했다고 하신다.

엄마는 호수공원 입구에서 사신다. 집나서면 바로 호수공원인데도 장미가 피고 지도록 못가보셨다고 한다.

그냥 삶이 분주해서,

늘 뭔가 할일이 생겨서.

기운이 없어서.

허리가 아파서.

.

.

나하고 왕눈이하고 호수공원 반바퀴를 도는동안 엄마의 굽은 허리가 펴지고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엄마는 산책을 했어야 했다.

 

 

 

 

 

나는 거의 하루, 하루 걸러씩 치과에 가서 한시간 혹은 두시간씩 입을 (아가리를) 벌리고 치료를 받는다.

마취주사에 취해 신경치료를 받고 얼굴이 얼얼한채로 (아무런 감각도 없는 얼굴을 꼬집어가며) 집에 돌아오기도 하고,  이러다 턱뼈가 빠지는 것은 아닐까 슬그머니 걱정이 들기도 한다.  치과 공사는 내 예상대로 '총체적' 보수공사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오래된 보철물들을 모두 뜯어내고, 새로 본을 떠서 끼운다거나, 그 사이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행된 충치 치료를 한다거나.  치과에서는 내 출국 일정에 맞춰서 서둘러서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치과 서비스 최고. 우리나라 좋은나라다.)

 

치료를 하면서 치과의사나 간호사들은 틈틈이 "힘드시죠" "아프시죠" 하고 나를 위로하는데

사실 나는 편안한 느낌이다.

어릴때 치과 치료 받을때는 꽤나 아프고 불편하고 힘들게 여겨졌는데

이제는 별 통증없이 치료를 받고 있다. 치과 기술이 정말 많이 좋아진듯하다. 편안하다.

 

  ***

 

운좋게도 아주 세밀한 건강 검진을 '무료'로 받게 되었다. 원래 몇년에 한번, 내가 무료로 검진을 받을수 있는 기간인데, 마침 그때 내가 국내에 있으므로 무료라고 한다. 그래서 오늘 이른 아침에 광화문에 나가서 내 생애 최초의 건강진단을 받았다.  가령 담당 의사들이 "위 검사 받으신적 있으셔요?" 뭐 이런 질문을 할때마다, 나는 "처음입니다..." 이런 대답을 종알종알 해야 했다.  심지어는 "8년간 병원에 가본적이 없어요..." 라고 말하며 나는 킥 웃고 말았다 (원시소년 돌치~  자연의 아이 돌치~ )

 

자궁경부암 검사는 받을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생리중이라고, 생리 끝나고 일주일 후에 오란다. 그때쯤 비행기를 타고 떠나가고 있겠지~  그래서 나는 속으로 '야호!' 외치며 웃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곳이 그 무시무시한 산부인과 의자이다. (난 검사 안받을거다 야호~)

 

유방암 검사라는 것도 처음 해봤다. (뭐든 내겐 처음이니까.)  웃음이 나왔다.

 

내 시력은 좌우 1.2.

청력 정상

폐는 최상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고 검사자가 가르쳐주었다.

(음주 측정하듯 뭔가에 입을 대고 훅 불어보라고 했는데, 내가 그걸 아주 잘 한 모양이다.)

 

내 '쓸개'에는 3-4 밀리미터 정도 되는 사마귀 같은것이 있다. (하하하) "쓸개가 뭔가요?" 하고 물었더니 "담낭" 이라고 가르쳐준다. 담낭이 뭔지는 묻지 않았다.  그런데 그 사마귀 같은것은 크게 신경쓸것 없다고 의사가 가르쳐주었다.  사람들중에 그런 것을 몸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고, 제거 할 것도 없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안심했다.

 

혈압 정상

신장이나 심장도 튼튼하고, 기타 장기도 건강해보이고. 대략. Clean Bill of Health 일것이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몇가지 검사는 일주일후에나 결과가 나오므로 좋은 소식이 오기를...

 

 ***

 

치과 치료에 집중하느라, 피부과에는 갈 시간이나 여유가 없어보인다.

기미제거는, 나중에 귀국하면 하던가, 말던가...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치과치료는 '먹고 사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으므로 중요하다.

내 구강건강이 8년동안 방치된것에 대해서

나는 내 치아들에 대해서 '미안하다'는 마음마저 들었다.

이지경이 되도록 방치하고 고생시키고 있었구나...

공사비가 이백만원 가까이 나가는데, 물론 비싸긴 하지만, 미국 치과 치료비를 생각하면 비싸다는 생각도 지워지고 만다.  몇해전에 큰아이의 어금니 하나를 크라운을 씌우는데 1,500달러 가까이 들었었다. 어금니 크라운 하나 씌우는데 3개월쯤 지나갔다.  돈과 시간을 생각하면 하품이 나올지경이다.  그에 비하면 10년 가까이 방치되어 엉망이 된 내  치아건강을 모두 복구하는데 200만원이면 오히려 고마운 지경이다. 그래서 감사한 마음으로 찍소리 안하고 치료를 받으러 다니고 있다.

 

  ***

 

내일은 엄마하고 소풍을 간다.

엄마가 친구분들과 어디론가 소풍을 가시는데, 나보고도 가자고 하신다. '벤또'를 싸가지고 가자고 하신다.

그래서 저녁에 치과에 다녀오는 길에 김밥, 유부초밥 재료를 사가지고 왔다.

내일 새벽에 일어나 김밥, 유부초밥을 만들고, 과일을 예쁘게 잘라 담고, 고구마 찐 것도 담고

그렇게 소풍 도시락을 챙겨가지고 엄마를 모시고 소풍을 갈 것이다.

엄마는 고단하다고 먼저 잠이 드시고

나는 엄마가 꺼내준 찬합세트를 정리하고

찬합 케이스, 주머니를 비누로 깨끗이 빨아서 널어놓았다.

옛날에 내가 소풍갈때 우리 엄마가 김밥을 싸주셨으니

이제는 내가 우리 엄니 소풍 도시락을 챙겨드릴 차례이다.

 

엄마는 '계란'도 삶아서 싸라고 하신다. 계란도 삶을 것이다.

뭐든 엄마가 하자는대로 ...

이제는 늙은 엄마가 내 딸이 되고, 내가 엄마가 되어 엄마의 도시락을 내가 쌀 차례이다.

 

 ***

 

앞으로 보름정도 남았다.

나는 치과치료와 내가 꼭 해야 하는 사회적 의무 (수업, 특강)외에는 엄마와 시간을 보낼 생각이다. 엄마가 하자는 것 위주로.  엄마와 P선생이 좋은 파트너가 되어 지낼수 있도록.  늙으신 나의 엄마는 내가 없는 빈자리를 지키며 사위를 돌봐야 한다. 하하하.

 

 ***

 

엄마는 소풍갈때 예쁜 옷을 입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신다.

엄마는 곱고 잘생긴 딸을 앞장세워 다니며 폼을 잡고 싶은신거다.

엄마는 나를 앞장세워 다니며 자랑을 하실것이다.

나는 기꺼이 엄마의 자랑이 되어드릴것이다.

그것 외에 나는 다른 효도의 방법을 모르고, 그리고 내 천성이 게을러서 별다른 효도는 불가능해보인다.

그냥 내가 행복하게 웃는것, 그것이 엄마에게 가장 큰 효도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난 행복하게 웃을것이다.

그러면 하느님도 기뻐하실 것이다.

 

 

2010년 6월 20일 일요일

왕눈이와 나.

 

 

 

무조건 부비부비 핥아대는 왕눈이.

왕눈이는 2003년 1월에 내동생네 가족이 입양한 시추종 개이다.  왕눈이는 몇년에 한번, 어쩌다 내가 한국집에 방문할때마다 나와 함께 지낸다. 내 동생 가족이 내가 한국에 있는 동안에는 왕눈이를 내게 데려다주고 간다.  왕눈이때문에 내가 2004년에 미국집에서 개를 입양했을때 똑같이 '왕눈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것이 한국왕눈이와 미국왕눈이 이름에 얽힌 간단한 사연이다.  7년사이에 강아지이던 왕눈이는 할아범이 되었고, 나도 삽십대에서 40대로 넘어가고 말았다.

 

 

 

고모와 왕눈이와 학교 가는길

 

 

 

P선생을 버스 정류장까지 배웅을하고,

이웃에 사는 동생네 집을 습격

새벽에 잠자는 애들을 깨워서 시집살이를 시키고

다함께 학교에 가는길.

왕눈이도 함께 학교에 가는길.

'미국고모'와 함께 학교에 가는길.

 

 

 

 

 

출근길

 

 

 

2010년 6월 20일 오전 6시.

3년간의 워싱턴 근무를 마치고 서울로 출근하는 P선생.

P선생의 출근을 돕는 '안내견(?)' 한국 왕눈이.

 

 

2010년 6월 11일 금요일

new york

 

 

이사 전부터 시작해서 지난 몇주간, 쉴 틈없이 보낸것 같다. 오늘 아침까지도 '뉴욕'에 가야만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암담함을 느꼈다. (너무 피곤해서.)  커피를 진하게 먹고 앉아 일단 일에 착수를 하니, 그럭저럭 다시 기운도 생기고, 몇가지 아이디어도 나오고.

 

그래서 결국. 애초에 1박2일 다녀오려던 뉴욕행이 2박 3일로 변경되었다. (안가려고 꾀부리고 있다가, 제대로 걸렸다. 하하하.  오전 열시까지도 징징거리고 있었는데, 이런 결론에 도달할 줄이야...)

 

내 계획은 시간을 쪼개어서,

 *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 부르클린 뮤지엄

요 두곳을 이참에 해결을 하고 오겠다는 것이다.  메트로는 몇차례 가 보았지만, 미국미술 공부 시작한 후에는 가보지 못했었다. 제대로 된 카메라를 가지고 가서 '미국미술'쪽만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오겠다.  부르클린은 얼마전에 가려다가 사고가 생겨서 불발되었다. 이참에 해결하고 와야한다.

 

그리고, 여름 내내, 여름학기가 진행되는 동안

작은놈 대학 애플리케이션 작업 도와주면서

집에 처박혀서 미국미술 정리 작업에 몰두하겠다.

 

뉴욕을 '세계의 심장'이라고 불렀던가?  (물론 서구사람들 중심의 생각이겠지만)

그래서인지 뉴욕을 생각하면 약동하는 기운을 느끼게 된다.

 

 

 

2010년 6월 10일 목요일

옷 보따리 ~

지난주 일요일에 미주리주에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다음날, 여행짐을 꺼내 정리하면서 내가 저지른 실수를 깨달았다.

내가 숙소 옷장에 내 옷을 그대로 남겨두고 온 것이다! (으아악!)

 

사연인즉슨,

그 전날 나는 거의 대부분의 물건들을 실수없이 차곡차곡 챙겨두었었다.

내가 원래 준비정신이 강해서 뭐든 앞질러서 준비를 다 해놓는 편이다.

성격대로 전날부터 이미 짐을 챙기고 청소상태까지 점검을 했는데

옷장속의 옷을 그대로 남겨두었었다.

왜냐하면

그 옷들은 그래도 내가 본교에서 여러 공식, 비공식 상황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각종 회의에 참석할 것을 전제로 특별히 선택한,

얌전한 옷들이었는데 - 이런 옷들은 구김도 잘 가니 조심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옷장 옷걸이에 얌전하게 걸어놓은 상태에서

마지막에 숙소를 떠나기 직전에 가방에 챙겨넣겠다고 작정을 했던 것이다.

(미리 가방에 챙겨넣으면 다 구겨지고 말테니까...)

 

그런데 출발하는날에도 몇가지 공식적인 행사가 있다고

학장님이 서두르라고 하는 바람에

"난 어제 가방 다 싸 놨다구요!" 이러고 당당하게 보따리를 끌고 나왔던 것이다

(옷장속의 내 옷들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

 

블라우스 몇장과 스커트 몇장. 그리고 정장구두 한켤레.

하하하 이것들을 미주리주 시골구석의 학교 숙소에 놓고 온 것이다.

 

부랴부랴 학장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학장님은 일주일간 본교에 더 머물면서 일을 하고

다음주에나 워싱턴으로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다.

"학장님!  제 숙소 옷장에 제 옷이 그냥 있어요! 챙겨 놨다가 오실때 갖다 주세요!"

학장님이 내 부탁을 듣고 내가 사용하던 숙소에서 옷들을 챙긴후에 전화를 하셨다.

"하이고 내가 이선생 비위맞춰주랴, 옷 챙겨주랴 바쁘다 바뻐.

이거 원 시애비가 며느리 챙겨주는 꼴이네, 하이고, 내가 이 옷보따리를 갖고 가면 집에 가서 마나님한테 맞어 죽을것인데~~~  나 맞어 죽으면 이선생은 조의금이나 많이 내셔~ "

 

학장님이 내 옷 갖다 줘야 내가 그거 입고 한국 갈 것인데~  (@_@)

 

 

 

 

2010년 6월 9일 수요일

비오는 수요일

2010년 6월 9일 흐리고 바람, 비.

 

아침에 출근하여, 텅빈 학교에서 (지난주에 종강했다) 일을 하는 중. 

내가 미주리주에 간 사이에 학생들이 제출한 기말 프로젝트들이 쌓여있어서

어제부터 그것들을 차근차근 평가하고 피드백 주는 작업을 하고 있다.

휴...이제 언라인 과목 기말 프로젝트를 다운 받아서 평가하고 피드백 주는 일이 기다리고 있다.

오늘은 기말 평가를 모두 마치려 한다.

 

금요일에는 1박 2일로 뉴욕에 가야 한다.

다음주 화요일에는 한국행 비행기를 타야 한다.

 

내가 한국에 가기 전에 처리해야 할 일과, 내게 주어진 시간을 비교해보자

  1.  기말평가 완료 (오늘 수요일)
  2. 여름학기 실러버스 완성 전송 (내일 목요일)
  3. 한국 방문용 선물 쇼핑 (언제 하지? 일요일에?)
  4. 1박2일 뉴욕방문 (금/토)
  5. 한국방문 보따리 싸기 및 각종 소소한 준비  (월요일)

따라서, 학교에는 오늘 내일 나와서 일하도록 하고

7월 7일에 돌아오면 그때 오피스에 다시 돌아올수 있을것이다. (화분들이 말라죽지 않게 하려면...화분들을 집으로 가져가야겠다. 우리 조교오빠는 화초가 말라 죽어도 그걸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로 화초에 무신경하다. 하하하. 게다가 요새 새댁이 애기를 낳는다고 병원에 들락거리느라 정신없다. 화초따위 그에게 부탁하면 안된다 하하하)

 

사실은...일 하다가 말고, 책상에 엎드려서 한시간 가까이 쿨쿨 잤다...

미주리에서도 피곤했는데, 오자마자 할일들이 쌓여있었다.

어제는 점심에 꼭 인사를 해야 하는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 점심밥을 먹어야 했고

저녁에도 역시 꼭 가야만 하는 자리에 가서 저녁밥을 먹으며 사교적이고 격식을 차린 대화에 집중해야 했다.

오늘 저녁도 내일 저녁도 밥 먹자는 제안이 쌓여있는데, 내가 기진맥진 상태다.

그러니까 일하다가 책상에 엎드려 쿨쿨 잠을 자지.

이것이 잠을 자고 일어난 - 제법 피부가 뽀얘진 얼굴이다. 하하하.

 

 

 

내 학생이 한국에 가서 내가 해야 할 일을 가르쳐주었다:

  1.  종합검진을 받는다 (사실 나는 여태 살면서 종합검진을 받은 적이 한번도 없다. 자궁암이나 유방암 검사도 받은적이 없다. 나는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계가 노후하니 의무적으로라도 종합검진이란걸 받아보려고 생각중이다.)
  2. 내 얼굴에 생긴 점이나 기미를 제거한다 (내 학생의 설명으로는 피부의 점이나 얼룩이 나중에 피부암으로 발전할지도 모르므로 보이는대로 제거해주는 것이 안전하다고 한다. 게다가 나는 수년간 썬크림도 안바르고 플로리다의 햇살아래를 멋대로 돌아다녀서 얼굴에 기미가 끼어있는 상태다. 어쩌다 몇해만에 우리 언니가 나를 보면 무척 안타까워했다.  이번에는 가서 바로...처리를...)
  3. 치과에 가서 종합적인 '공사'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몇해전에 치과의사가 내게 종합적으로 뜯어고치자는 제안을 했었는데 마냥 미루기만 해왔다. 돈 이백만원 깨질걸 아마... 오래된 금 크라운을 다 제거하고 새로 교체해줘야 한다던데...(난 금으로 씌운 이가 여러개다.)
  4. 머릿결이 엉망이다. 원래 알이 굵고 윤기흐르고 생기있는 머릿결이었는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스트레스가 쌓여서 그런지 근래 1년 사이에 머리가 푸석푸석하고 윤기가 흐르지 않는다. 뭔가 미장원에서 영양을 주거나 윤기를 강화하는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엄마를 모시고 미장원에 가서 한나절 보내면 해결 될 것이다.

 

아. 이거 다 하려면 돈 꽤나 깨지겠다... (한숨)

 

수요일이다

흐리고 비오고 바람분다.

비오는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이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나가서 라면집에 가서 점심으로 라면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근처 꽃가게에서 꽃을 한다발 살까...

 

내가 행복할때가 언제인가하면

장보러 그로서리에 갔다가, 꽃가게 기웃거리다가, (대개는 꽃사는것이 돈이 아까워서 구경만 하지만) 꽃을 한 다발 살때. 그때 행복감이 일시적으로 몰려온다.  아주 잠시, 반짝하듯 행복감을 느낀다.  특히 감사한 일은, 지금은 내가 내 앞가림을 할 만큼은 돈을 벌어서 꽃을 사고 싶을때 꽃 한다발을 살 정도의 여유는 있으니까. 그것이 감사하고 기쁘기도 하고 그렇다. 옛날에 대학원 다닐때, 돈 아껴서 짤짤매며 써야 했을때, 그때는 늘 그런 상상을 했었다. 내가 공부를 마치고 정규직장을 갖고 살게되면, 그때는 계란을 사도 '오가닉 비싼계란'을 살것이고, 매주 꽃한다발씩 사서 내 책상을 장식할거라고.

 

그런데, 사실 직장을 다녀도 비싼 유기농 계란을 사기에는 돈쓰는것이 겁이나고 (그래서 늘 싸구려 계란을 집어들고), 그리고 매주 꽃다발을 사지도 않는다. 어쩌다 사고 좋아 할 뿐이다.  오늘은 일단 나가서 라면이나 먹고, 꽃집에 들러서 기웃거리며 꽃 구경하다가...한다발 사올까 말까. 날이 흐리다. 이런 날엔 뜨거운 라면을 먹어줘야 한다.

 

 

 

 

 

그녀가 우스개만 떠드는 이유

옛날에 십년도 더 된 일이다.

 

내가 학교에서 영어를 잘 가르친다는 '소문'이 자자해지면서 (착각은 자유), 학교에서 '학생들 어머니들이 영어를 배우고 싶다고 하는데' 어머니를 위한 영어교실도 운영을 해 달라고 했다.  학생들의 '어머니'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내게는 예측하지 못했던 '도전'처럼 느껴졌다.

 

'어머니들' 혹은 '삽사십대 주부들 집단'을 상대로 수업을 진행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내게 도전으로 여겨졌던 이유는, 나 역시 그 나이또래의 '아파트 주부'중의 한 사람으로 주부들 집단의 '파괴력'을 어느정도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부집단은 어마어마한 파워의 원동력인데, 그 힘이 긍정적으로 작용할때와 부정적으로 작용할 때가 있다. 긍정적으로 작용할때 나라를 부흥시킬 원동력인가하면, 부정적으로 작용할때 아파트 주변의 가게를 무너뜨릴 괴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영어 선생인 나 한명을 씹어서 밟아버릴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는 것이다 (만약에 내가 실수하거나 인간적으로 맘에 안 들 경우.)

 

그래서

 

그 당시에 나는 영어수업 준비외에 별도로 서점에서 '유머책'을 몇권 사다가 달달 외웠었다. 수업 중간에 틈틈이 그 내가 외운 유머를 써먹었다. 내 주부학생들은 오분 단위로 그 유머에 자지러졌고, 우리들은 유쾌한 수업을 진행할수 있었다. 나는 학생들의 '친구'로 거듭날수 있었다.

 

나는 내가 영어선생이 아니라 '개그맨'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진적도 가끔 있었지만

그 때문인지, 그 영어교실에는 중간 낙오자나 이탈자가 생기지 않았다.

내가 나의 생존의 방법으로 '본능적으로' 선택한 이 '유머 전법'이 잘 맞아떨어진것 같았다.

(그당시, 초기에 나는 급성 위염까지 앓았었다. 스트레스성 급발작성 위염.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라는 위기감에 의한. 하하하. 나는 살아남았다. 위염도 물러갔다. 우리들의 영어교실은 유쾌했다.)

 

수십년간 공직을 돌면서 '영의정'을 거쳐서 지금은 외교관으로 지내고 있는 모 인사의 부인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온갖  작살 유머로 사람들을 웃긴다. 그가 입을 열면 유머가 튀어나온다. 유머에서 시작해서 유머로 끝난다. 그의 유머가 어찌나 유명한지, 대통령을 노리는 정치인들이 각종 파티에 그를 초대한다고 한다. 파티의 성패를 결정짓는 요인은 - 모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웃고 즐거운 시간을 가졌는가로 결정되는것 같다. 

 

그런데, 어제는 이분이 '내가 왜 사람 모인자리에서 우스개만 떠드는지' 그 사연을 들려준다.

새파란 젊은 시절부터 공무원의 아내로 이리저리 떠돌다보니

생전 나랏님 흉을 볼수도 없고

상관에 대한 흉을 볼수도 없고

어떤 일에 대해서 함부로 의견을 드러낼 수도 없고

그래서 이리저리 조심하다보니

맘놓고 떠들수 있는 것은, 그저 남을 웃겨주는 유머인데

원래 성격이 쾌활하고 남 웃겨주는 일이 즐겁고

그러다보니 평생 공직자의 아내로 살면서 유머만 떠들어대서

덕분에

사람 모인자리에서 남 얘기 하거나 의견을 드러내는 식으로 '말실수'를 한적은 없고

"우스개만 떠들고 나면 몇시간 웃고 나도 남얘기 한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좋더라..."

 

아하, 이분역시 생존방법으로 우스개를 선택하신 것이구나...

 

 

 

이분이 남에 대한 험담을 할 때는 오직, 영의정까지 지낸 자신의 '남편'에 대해서 얘기를 할 때이다.

남편이 칠칠치 못해서 구겨진 넥타이를 맨다던가 이런 소소한 흉을 보는것이 그가 '타인'에 대해서 뭔가 비평적인 언사를 보이는 유일한 예라고 할 만하다.

누군가에 대해서 '씹고 싶다'고 생각되면

남을 씹기보다는 자기 자신이나 자기 자신과 진배없는, 내몸같은 존재에 대해서만 씹는 것이 사회생활에 유리하다. 그 외에 타인에 대한 의견을 함부로 드러내는 사람은 그만큼 자기 자신을 위험에 노출 시키는 것이리라. (나역시 허구헌날 남 흉보고 씹는것을 즐기면서 살아가지만 말이다.)

 

 

내가 수년간 나로서는 생사를 건 듯한 어려운 공부만 하느라고 내 인생이 빡빡해진 감이 없지 않다.

공부 마치고나서 맡게된 자리가 또 어려운 자리라서, 내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것도 사실이다.

이제는 다시 유머집을 들여다보고 달달 외워야 할 시기일지도 모르겠다.

(나를 위해서, 또 남을 위해서.)

 

 

 

 

 

 

 

2010년 6월 7일 월요일

(우산) Monet, Poppies, near Argenteuil (1873)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에 갔을때, 뮤지엄숍에서 내 학생 한명이 엄마한테 선물 한다며 이 우산을 고르는 것을 보았다. 사실 이것은 딱히 이 미술관이 아니더라도 웬만한 미술관에 가면 쉽게 볼수 있는 '중국산'이다.   어쩌면 한국의 우산가게에서는 이것을 오천원쯤에 판매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내 학생을 따라서 나도 이것을 하나 샀다. 우리 엄마 드리려고.

실제로 이 우산은 칠십대 중반의 우리 엄마가 들기에는 조금 무거울지도 모른다.

가쁜하기보다는 어쩐지 무게감이 느껴진다.

엄마는 이것을 우산대신 양산으로 사용하실지도 모른다. (이것이 우산인지 양산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우리 엄마한테는 이보다 더 좋은 우산이나 양산이 이미 여럿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에 있는 우리 엄마의 자식들은 엄마에게 좋은것, 귀한것만 사다가 드린다.

그러므로 이것은 어쩌면 시시한 물건이 될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래도 나는 이 우산을 샀다.

모네의 양귀비 꽃밭 그림이 좋아서.

그 속에 있는 아줌마가 우리 엄마같고,

그 속에 있는 모자쓴 아이가 나 같아서

(엄마와 내가 이렇게 고운 옷을 입고 이렇게 고운 풍경속에 서본적은 없을지라도

그래도 어쩐지 이 그림을 보면 나는 어린날의 햇살까지 생생하게 떠올리게 된다.)

 

엄마는 이것을 뭣하러 비싼돈 주고 사왔냐고 하실것이다.

하지만 한번쯤은 이것을 쓰고 노인대학에 가서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실것이다.

그것으로 족하다.

 

 

 

Oak Tree Room

메클레인의 부유층들이 산다는 주택가에서 3년간 남편덕분에 잘 지냈다. P국장이 귀임하므로 그 집에서 철수하여 2베드 아파트로 옮겼다. 이삿짐만 옮긴채 이튿날 새벽에 비행기를 타고 출장을 갔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사실 현재의 내 아파트보다 미주리주 본교의 교수용 처소가 더 탁트이고 넓직하고 좋았다. (^_^) 하하하.

 

일주일간 평원지대에서 탁 트인 평야를 내다보며 지내다가 돌아오니

동부의 울창한 수풀도 답답하게 느껴질정도인데

아파트로 들어서니 그 답답함이 더 하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이내 이 공간에 적응 할 것이다.

전에 학생때는 이보다 협소한 아파트에서 내 아이들 둘과, 조카녀석까지 거느리고 살았었다.

그때는 내가 잘 방이 없어서 일년가까이 거실 소파에서 잤었다.

지금은 큰애가 거실을 제방으로 생활하고 있지만, 8월이되면 자신의 학교로 갈 것이고...

 

남편이 내 침실에 내 책상을 놓고 정리를 해 놨다. 여기서 잘 지내라고.

오래된 아파트이긴 하지만, 아치형 창문이 맘에 든다. 구식 알루미늄 창틀을 신식 플라스틱형으로 바꾸는 리모델링 작업이 진행중이니까, 곧 이 창문도 더 예쁘게 마감될 것이다.

오후가 되면서 창문틈으로 나무 그림자가 반짝거리며 숨어들어오는 것을 보면

이 방이 약간 서향인듯 하다...

아파트를 정할때 '방향'을 따져봐야 했는데...

난 사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그다지 신경쓰는 편이 아니다.

모든 사람 사는 집은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아파트는 창문의 어디에서도 사생활이 보장되는 구조이다. 누군가 들여다볼만한 각도가 없다.

그점이 맘에 든다.

 

오크 잎사귀 그림자가 방바닥에, 내 몸에서 어른거린다. 그런것을 보는 일이 즐겁다.

창밖에서 손짓하는 나뭇잎사귀를 내다보는 일도 즐겁다.

이것이면 충분하다.

 

 

 

이 아파트에서 최소한 1년, 혹은 그보다 더 오래 살게 될 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의 일년후를 예측하기 힘들다.

여기에 있을지

한국으로 돌아갈지

아니면 미주리주의 본교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

무엇이건 내가 선택하고 판단할 문제이므로 상황에 몰려서 선택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가서 지내보니까 본교의 교수용 사택에서 지내도 재미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서부의 평원이 맘에 들었다.

 

이 방에서, 공부 많이 하고, 사색 많이 하고, 내게 주어진 삶을 반짝거리게 하고 싶다. 당분간.

모든 주어지는 것들이 고맙고 귀하고 그렇다.

기쁘다. 살아있다는 것이. 오랫만에 느끼는 기쁨이다.

 

 

 

 

Tree at my window, window tree,
My sash is lowered when night comes on;
But let there never be curtain drawn
Between you and me.
Vague dream-head lifted out of the ground,
And thing next most diffuse to cloud,
Not all your light tongues talking aloud
Could be profound.
But tree, I have seen you taken and tossed,
And if you have seen me when I slept,
You have seen me when I was taken and swept
And all but lost.
That day she put our heads together,
Fate had her imagination about her,
Your head so much concerned with outer,
Mine with inner, weather.

Robert Forst 의 시가 아주 잘 어울리는 창문이다. Tree at my window, window tree....  기쁘다. 내가 기뻐하니 하느님도 기뻐하실 것이다.

 

 

 

 

 

마지막 수업. 귀가

 

세인트루이스 공항 이륙후 일리노이주 상공에서 내려다본 미시시피강

(세인트루이스는 미조리주와 일리노이주 양안에 연결된 중부도시이다.)

 

 

 

 

 

토요일 오전에는 일주일간의 합숙 집중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짐을 꾸려서 세인트 루이스 공항으로 출발하기 위해 기숙사 휴게실에 모여서 나를 찾았다.  출발 준비가 다 되었음을 내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나는 학생들을 공항으로 전송 나갈 계획이었다.  유치원생들이 아니니 딱히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 역시 이튿날이면 워싱턴으로 돌아가야 할 입장이지만)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우리는 휴게실에 편안히 모여 앉아 학교 버스를 운전해줄 분이 오기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런데

 

한 학생이 뭔가 불편한 표정으로 아침에 일어나 작은 '불상사'에 대해서 지도교수인 내 앞에서 안색을 굳히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호텔같은 기숙사를 일주일간 무료로 사용한 이 학생들은 사전에 '관리인을 위한 팁'을 약간 후덕하게 남겨두라는 지시를 받았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아침에 기숙사 관리인이 '사용한 침대 시트며 타월등을 세탁해 놓고 떠나라'는 잔소리를 했던 모양이었다.

 

팁만 좀 여유있게 놓아두면 될 줄 알았던 학생들은

사용한 집기를 세탁해 놓고 떠나라는 잔소리에 기분이 불쾌해졌던 모양이다.

그리고 부랴부랴 공동으로 사용하는 세탁기와 건조기로 세탹을 하느라 갑자기 바빠졌을것이다.

불쾌할 만 하지.

약이 오른 학생들은 팁을 후덕하게 남겨두려던 것을 취소하고 말았다 한다.

(팁도 주고 빨래도 하고 그러면 억울하겠지...)

거기까지는 나도 잠잠히 듣고 있었다.

 

누군가가 이런 이야기를 볼멘 소리로 떠들어대자

다른 학생들도 불편했던 심기를 드러냈고

급기야는 이 점을 떠나기전에 반드시 학교에 지적을 하고 재발 방지의 다짐을 받겠노라는 '과격한' 언사로 이어졌다.  지도교수인 내 면전에서...

 

그래서 나는 그 학생에게 물었다:

"사전에 팁을 넉넉히 남겨두고 떠나라고 학교에서 지시를 했지?

그런데 아침에 관리인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쭝얼대며 잔소리를 했지?

그래서 지금 그 관리인이라는 사람이 쭝얼댄것에 기분이 나빠져서

학교에 대해서 불평하고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애초에 알려진 지시사항대로 이행하면 되는 것 아닐까?

당신들이 매우 특별한 귀빈들이라서 학교에서 방침을 정했는데

그 관리인이 사정을 잘 모르고 잔소리를 한 것일수도 있는데

왜 알지도 못하는 관리인의 말에 혹해서 시키는대로 해놓고 이제와서 학교를 탓하는가?"

 

요기까지는 내가 차분하게 차근, 차근 학생들에게 물은 사항이다.

 

하지만, 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당신들은 워싱턴에서 비행기타고 날아온 학생들을 융숭히 대접해주고 잘 교육시키기 위해서 학교가 얼마나 많은 것을 베풀었는지 전혀 모르는가?

당신들은 학생들이 사용할수 없는 구역을 사용하도록 허락받았고

학장님과 교직원들이 특별히 신경을 써서 이런저런 혜택을 누리게 했으며

학교 셔틀버스를 전용 자가용처럼 맘대로 사용할수 있었고

이세상 어디에 가도 받기 힘든 학생으로서의 대우를 모두 누렸다.

당신들은 이러한 것에 대하여 어느 누구에게라도 감사를 표한적이 있는가?

매일 셔틀버스를 운전해서 시내 안내를 해주던 교수에게 진정으로 감사인사를 드린적이 있는가?

어떤 박사학위자가 미쳤다고 당신들의 개인 기사노릇을 자청하는가?

그 사람에 대해서 감사하다는 마음을 느낀적이라도 있는가?

 

 

당신들이 이런 모든것을 누릴만큼 그렇게 특별히 대단히 훌륭하다고 스스로 믿는가?

당신들에게 베풀어진 아흔아홉가지의 친절함에 대해서는 고마움도 표시할줄 모르고

단 한가지 누군가가 심술궂게 행동했다고 해서

지금 떠나는 마당에 그것을 문제삼아서 지도교수인 내 앞에서

불량한 태도로 학교 탓을 하러 드는가?

당신들은 아흔아홉가지의 일에 대해서 추호라도 감사했는가?

지도교수인 내가

당신들을 존중하고 돌볼때

나로서는 당신들에 대해서 아무런 불만사항이 없었을거라고 생각하는가?

당신들이 그렇게 대단히 잘난 학생들이라고 생각하는가?

내가 일일이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고

그냥 좋은 말로 칭찬하고 격려한다고 해서, 그것을 그대로 모두 믿는가?

당신들이 완벽한 인간이고 학생이라고 그렇게 믿는가?

 

 

나는

문제는 덮고, 돌봐주고 교육하려고 애써왔다.

당신들 식으로 내가 당신들의 아흔아홉가지 덕을 모른체 하면서 한가지 실수에 대해서 문제시하고 졸업 자격을 취소해버린다면 당신들은 행복할까?  내가 그러기를 원하는가?

그렇게 해줄까?

당신들은 수준이하의 행동거지를 내 앞에서 보여왔다.

내가 끝까지 덮어주고 웃으면서 졸업시켜 내보내려고 했으나

떠나가는 당신들에게 내가 말하건대

나는 교육에 실패했다.

나는 교육자로서 실패한 인생이다.

당신들은 교사로서 자격이 없다.

당신들을 이따위로 교육한 나 자신이 심한 책임을 느낀다.

나의 교육은 실패했다.

앞으로 우리 두번 다시 선생과 학생으로 만나는 일이 없을것이고

나는 당신들을 내 학생으로 기억하지 않을것이며

당신들도 실패한 교육자인 나를 기억하지 않기를 바란다.

 

 

요기까지가 본론이었다.

 

그리고 학장님이 학교측이 제공하는 본교 방문 기념 선물 보따리를 가지고는 (하하하)  

학생들을 공항으로 전송하러 나타났을때,

나는 학장님에게 말했다

"저는 공항에 못 나갑니다."

(학장님 표정: @_@  "뭔 일이다냐 시방...띠용 띠용..~~  )

 

 

얼마후 학장님께서 '중재위원'으로 내방의 노크를 하고 학생들을 이끌고 나타나셨지만,

때는 너무 늦었다.

(잠자는 마귀할멈의 코털을 건드렸던 것이다)

내 방에 나타난 학생들에게 나는 '디저트' 수업을 날렸다.

 

 

"입에서 나오는 말을 조심하라

입에서 말이 나오려 들을때 그걸 두 손으로 꽉 막으라

그걸 못하면 당신들은 사회생활 제대로 못 할 것이다.

불평거리가 있으면 입을 막고

감사한 것에 대하여 생각하라

자신이 받는 것에 대해서, 그것을 누릴만한 자격이 있는지 아닌지 생각하라.

미안하다

나는 당신들을 꼴도 보기 싫다.

영원히 다시 만날 일이 없기를 바란다.

천하에 버르장머리 없고 은혜도 모르고 무례하게 꽥꽥대는 인간들의 선생인 나 자신이 챙피스럽고  참담하여 다시는 당신들을 보고 싶지 않다."

 

 

 

결국 학생들은 내 축복을 받지 못한채 패잔병들처럼 울면서 학교를 떠나야했다.

그들은 울었다.

우는 그들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울면 뭘해? 자각과 반성이 없이 울면 뭐하냐구. 은혜도 모르고 예수를 팔아 십자가에 매달은 중생들. 예수가 아무리 이적을 보여도 그자리에서 잊고 돌아서서 모른채한 것이 중생들이 아닌가. 이런 인간들을 교육시킨다고 세상이 달라져? 예수가 다시 돌아와도 인간의 속성은 바뀌지 않을걸... 울어라, 울어라, 그러나 당신들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 살다가 혹시 불평할 일이 있을때, 지금 여기서 마귀할멈처럼 저주를 해대던 내 얼굴을 기억하라... 이 마귀할멈같은 내 얼굴을 기억해내는자, 실수를 줄일수 있을지도 모르겠다...하지만 ...인간의 본성은 바뀌지 않는것 같다...생긴대로 살다 죽으라..."

 

 

나대신 이들을 인솔한 학장님의 전언:

 "학교를 출발하려는데 학생들이 갑자기 총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가겠다고 하더라구

그래서 바쁜데 그냥 가자했더니 꼭 총장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가겠대

그래서 총장님을 찾으니

총장님이 교직원들과 함께 학교 청소를 하고 계시는거야.

총장님이 청소하다말고 인사하러 온 학생들을 위해서

감사와 축복의 기도를 드려준거야

(하하하, 여기서부터 코메디)

그러니까 학생들이 막 눈물을 펑펑 쏟는거야...

총장님이 축복의 기도를 드려주는데

학생들이 막 통곡을 하니까

곁에 있던 교직원들이 이걸 보고 그만, 숙연해진거지

아 총장님의 기도가 무지무지한 파워가 있나보다 학생들이 갑자기 통곡을 한다 할레루야! 이런 지경이 된거야.

(하하하 갈갈갈 -- 나중에 얘기를 전하면서 갈갈대던 학장님)

 

그래가지고 갑자기 분위기가 매우 숙연해졌다니깐. 총장님도 너무너무 감격한거지, 학생들이 너무나 고마워서 운다고 생각했으니까...

 

 

이것이 그들에게 준 내 '마지막 수업'이었다.

 

 

일요일밤, 나도 일주일간의 긴 여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펼쳐두기..

2010년 6월 5일 토요일

St. Louis Art Museum

공식 홈페이지: http://www.slam.org/

 

Saint Louis Art Museum 에 '마침내! 드디어!' 다녀왔다.  여기를 전부터 꼭 와보고 싶었다. 왜냐하면, 이곳에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Bingham 의 대작들이 걸려 있기 때문에. 빙엄은 미주리주에서 활동한 미시시피 강변의 풍속화가이다.  '지역주의 화가'들에 대한 페이지들을 정리할때 미 중서부 지역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면서 정작 그 중심이라 할 미주리주를 내 발로 가보지 못한 것이 어쩐지 개운치가 않았었다.  이제 그 '부채감'을 털어낸 기분이다.

 

이번 출장의 목적인 '여름 집중 학습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거의 4일간은 학생들이나 나나 '지옥 훈련'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가르치는 나로서는 큰 부담이 없을거라고 생각했는데,  공부하는 학생들이 거의 나흘 밤낮을 새 가면서 공부를 해야 했기 때문에 지도하는 나 역시 편안히 퍼 자고 그럴수가 없었다.  밤에 질문을 갖고 오는 학생도 있었고,  심지어 와인 파티도 수업의 연장같았다.  4일째가 되는 목요일에 종합시험을 치러 교실로 들어오는 학생들은 거의 파김치가 된 꼴 이었는데, 대부분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서 밤을 꼬박 샌 형상이었다.  그렇게 나흘간의 일정을 마치고

 

금요일에는 필드트립을 나갔다.  세인트 루이스의 상징인 커다란 아치 (Gateway Arch)를 방문하여 그 아치의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미시시피 강이 가로질러 흐르는 일리노이주와 미주리주를 조망하고, 그리고 내 계획대로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에 도착했다.  필드트립이 교수의 삿적인 취향에 의해 결정된 감은 있지만, 학생들이 이 방문을 무척 좋아했다.

 

 

이제 내 학생들은 각자 자신의 방향으로 뿔뿔이 흩어질것이다.  나는 이들을 모두 한자리에서 다시 만날일이 없을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인생이 참 덧없고, 흐르는 바람같다. 나는 미국 미술을 지속적으로 들여다 볼 것이고... (미술관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거울의 계단. 끝없이 반복되는 나, 나, 나, 나...)

 

 

 

 

 

2010년 6월 4일 방문.

 

 

2010년 6월 1일 화요일

love yourself

비행기를 타면, 비행기 이륙에 즈음하여 승무원이 비상시 안전수칙에 대한 짧막한 안내를 한다.  비행기가 사고로 비상 착륙하거나 물에 떨어질때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뭐 그런 내용들이다.  그 중에는 '호흡보조기'에 대한 안내도 있다.  좌석위에 뭘 누르면 호흡보조도구가 나올것인데, 그것을 안면에 잘 부착시켜서 호흡 곤란을 방지하라는 안내이다. (승무원이 앞에서 시연을 해준다.)  그런데 그 안내 내용중에 이런 말이 나온다:

 

 "비상시에 이 호흡보조기를 부착할시에는, 옆사람을 도와주기 전에 우선 자기 자신부터 안면에 부착을 하라. 그 후에 이웃을 도우라" (대략 이런 설명이다.)

 

비상상황에서는 '나의 몸을 돌보지 않고 남부터 돕는' 행동을 하기보다는

우선

자기 자신의 안전부터 지켜놓고, 그 후에 이웃을 돌보라는 말씀이다.

 

 

어제 비폭력대화 (Nonviolent Communication) 워크숍에서도 학생이 네가지 상황을 주면서 어떤 상황이 가장 바람직한지 질문을 던졌다: 


"넌 이기적이고 너밖에 몰라" 라고 누군가가 나를 비난했다. 이때 나의 반응은?

(1) 풀이 죽어서, "그래 다 내탓이야..."

(2) 화를 버럭내며, "너야말로 이기적이야! 병신!"

(3) "네가 그렇게 말해서 나 속상해. 네가 뭣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것인지 모르겠어. 난 열심히 살고 있는데..."

(4) "네가 뭣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내가 너에게 뭔가 실수한게 있니?  내가 어떻게하면 좋을까?"

 

우리 정신건강에 가장 편안한 대응방법은 (3)번에 해당한다고 한다.  내 식으로 풀어서 설명을 하자면,

(1)번은 자기 학대에 가깝고

(2)번은 무조건적인 '회피'에 가깝고

(3)번은 그 말이 나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알리고, 자기 자신을 긍정적으로 보호하려는 태도로 보이고

(4)번은 자기희생쪽으로 흐를 경향이 있다.

 

상황이 어떠하건, 일단은 '나를 사랑하는 태도'를 견지하고, 나를 존중함으로써 상대방도 존중하는 식으로 자기 확장을 하라는 메시지일것이다.  그래야, 이 난해한 세상을 무사히 살아낼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찌보면 자기희생은 자신에 대한 '학대행위'일 가능성도 있다. 

자아 존중에 기반한 봉사와 희생은 위대하다. 그것을 이루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를 위한 첫걸음은 자기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자기를 이해하고, 보호해주고, 충분히 사랑하여주면

남을 진심으로 돌볼 기운을 얻게 될 것이다. 자기도 보호받아야 할 대상임을 잊으면 안된다.

 

 

 

자전거

간밤에, 와인 덕분에 꿈없는 잠을 푹 자고 새벽에 잠이 깼다.  어제, 교원 사택에 살고 있는 꼬마가  자전거를 빌려주기로 했으므로,  자전거를 가져다가 동네 '드라이브'를 신나게 하고 돌아왔다.  초원지대에 떠오르는 태양은 평온해보인다.  저 태양은 지구상의 만물을 골고루 만져줄것이다.  (나까지 포함하여).

 

돌아오는길에 들꽃을 한웅큼 따왔다. 

지천으로 피어나므로 내가 한웅큼 따다가 내 방을 장식한다고 해서 하느님이 노여워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이곳에는 내가 버지니아에서 보지 못했던 중서부의 새들이 보인다.

나는 그들의 이름을 알지 못하지만, 용모를 기억한다.  온몸이 모두 까맣고 부리와 목덜미 안쪽만 예쁜 주황색인 반지르르한 새가 예쁘다. 제비같은 자태의 새도 있다. 오리올도 보인다.

 

오늘은 오전에 Teaching Approaches and Methodology 를 하고

오후에는 Collective Thinking 수업을 진행한다.

 

어제 Nonviolent Communication 수업은 기대했던대로 학생들이 잘 해냈다. 수업 후에도 관련 대화가 이어지는 것을 보고, 그 수업이 내가 의도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음을 감지할수 있었다.  오늘도, 잘 되기를.

 

 

아침에 캠퍼스와 인근 지역을 자전거로 돌면서 생각했다. 2년전에 내가 이 학교와 처음 인연을 맺었을때, 나는 이곳에 이런 학교가 있었다는 '존재'자체를 몰랐었다.  2년후, 지금 나는 이 학교의 교수용 숙소에서 생활하며 캠퍼스를 내 집 정원처럼 산책하고, 이곳에서 중부의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본다.  마찬가지로 1년후 혹은 2년후의 내 모습을 나는 상상하기가 힘들다.  혹은 지상에 내가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까지도 배제할수 없다.  옛날  애인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봤다. 25년전에 내가 죽고싶게 만들었던 내 첫사랑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지금  그와 조우한다면, 나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낯설것이다. 그리고, '내가 저사람때문에 죽고 싶었단 말인가?'하면서 나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내게 아무런 감정도 남아있지 않다.  그런 점에 대하여 생각을 해 보았다.

 

내 삶은 급한 물살처럼 다이나믹하게 흘러가는 것 처럼 여겨진다.  내게 주어진 삶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주어지는 향기들에 대해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