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31일 월요일

Kara Walker: 우스꽝 스러운 흑인 잔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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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ob Lawrence (1917-2000) 페이지를 쓰고 나니, 흑인 여성 미술가 Kara Walker (1969-   )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Kara Walker를 만난 것은 워싱턴 디씨에 있는 Corcoran Gallery of Art (코코란 미술관)에서였다. 전시장 벽에 검정 실루엣으로 그려진 사람들. 흑인들 특유의 실루엣이었으므로 단박에 흑인관련 작품임을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참 독특했다. 새롭고 매력적이라고 해야 하나? 단지 검정 색 도화지를 오려 붙인듯한 전시물들. 벽 전면에 채워진 그림자들. 그 실루엣으로만 이루어진 인물들 속에는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 가령 노예 해방 이전에 남부에서 일어났을 법한, 백인 주인이 흑인 여자를 강간하는 장면이라던가, 여성이 남성의 신체를 기쁘게 해주는 장면, 입맞춤 하는 흑인의 손에 들린 예리한 칼. 이런 장면들은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여러 가지 매체를 통해서, 가량 스토우의 톰아저씨의 오두막, 혹은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 그 밖의 미국 흑인 잔혹사 관련 이야기에 소개되었던 에피소드들이 일제히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순전히 검은 도화지를 오려서 붙인 것 같은 이 실루엣 인물들이 그 흑백의 대비속에서 오히려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와 말을 붙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홀린 듯이 작품 구경을 했었다. 2008년 5월의 일이다.

 

 

 

                    워싱턴 디씨, 코코란 갤러리 2층에 전시된 카라 워커의 작품 (2008년 5월)

                               전시장을 지키던 흑인 경비원 아저씨가 찍어준 사진

 

 

 

 

사실 이보다 한달 전, 2008년 4월에 워싱턴 디씨의 스미소니안 미국 미술 박물관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and Portrait Gallery)에서 그의 특별전을 본 적이 있다. 미국의 일반적인 미술관의 경우에 상설 전시관에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사진 촬영이 가능하지만 특별전시장에서는 대체로 사진 촬영을 금지한다. (이점은 미국에서 미술관 나들이를 할 때 기억하면 좋을 것이다.) 그래서 꽤 크게 열렸던 그 당시의 카라 워커전을 나는 눈으로 보고 체험하는 것으로 만족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후로 도서관이나 책방에 가서 심심풀이로 미술책을 꺼내 볼 때면 나는 이따금 카라 워커의 책을 들여다보곤 한다.

 

카라 워커는 1969년 생이다. 이제 활발하게 작업하는 젊은 미술가라 할 만 하다.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던 카라는 13세에 조지아 주의 아틀란타로 이주하면서 흑백문제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한다. 조지아 주의 아틀란타시는 미국 남부에서 가장 큰 대도시로 알려져 있고, CNN의 본사가 아틀란타에 있어, 남부의 자존심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한다. 또한 아틀란타를 흑인 공화국, 흑인들의 수도라고도 부를 정도로 흑인 인구가 많다. 남북전쟁에서 남군이 패배하기도 했지만, 그 후로도 미국의 남부는 북부에 비해서 경제적인 열세에 있는 편이다. 캘리포니아에서 살던 소녀가 아틀란타에 왔을 때 흑과 백의 차이를 감지했음을 보건대. 1970년대 아틀란타에서는 여전히 미세하게 흑인 백인들이 서로 융화되지 못한 채 살았을 것이다. 흑인 인구가 적으면 아무하고나 어울려 살게 되지만, 흑인 인구가 일정 수 이상이 되면 이들이 모여서 사는 것이 가능해지고, 이렇게 특정 집단을 형성하게 되면 흑인들은 흑인 인구가 집중된 학교에 다니고, 흑인 문화권에서 나고, 자라고, 늙어가게 된다. 그러면서 미국의 주류사회,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배계층인 백인사회와 더욱 멀어지

게 된다. 소녀 카라 워커는 이러한 문화권 속에서 자란 듯 하다. 참고로,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네스에 커다란 코리아 타운이 있고, 뉴욕 맨해턴에도 코리아 타운이 있고, 내가 현재 살고 있는 워싱턴 지역, 북 버지니아에도 애난데일 Annandale 을 중심으로 한국인 상점이 밀집되어 있는데, 우리는 때로 농담 삼아, 애난데일은 미국인가 아닌가? 이런 농담을 하기도 한다. 한국인이 애난데일 지역에서 산다면, 온종일 영어 한마디 할 것 없이 한국인 상점에서 필요한 것 사고, 한국인 미장원에 들르고, 한국 책방에 가고, 한국 교회에 가면 되고. 이런 생활에 익숙해지면, 미국에 살면서도 미국의 주류 사회에 진입하기보다는 미국의 변두리에서 애매한 한국 문화권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식으로 특정 집단이 밀집한 곳에 살면서 정서적인 안정감이나 소속감을 찾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반대로 주류에 진입하지 못한다는 우울감도 생길 수 있다. 카라 워커는 자기 자신이 흑인 여성으로서 흑인인구가 밀집한 곳에서 성장하면서 이러한 우울감을 일찌감치 맛 본 듯 하다.

 

카라 워커는 아틀란타 예술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고 로드 아일랜드에서 미술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가가 되는 정석의 교육을 받은 셈이다.

 

카라 워커가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94년 그녀가 24세 되던 해에 소호 (SoHo)에서 열린 전시회 부터였다. 카라는 검정 도화지로 실루엣을 오려서 벽에 붙이는 식의 벽화 작품들을 선보였는데 주로 남부 노예들이 백인한테 강간 당하거나, 유사 행위를 하는 장면들이 코믹하고 간결하게 그려졌다. 잔혹한 장면이면서 동시에 코믹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나는 이점이 궁금한데, 실제로 카라 워커의 대형 벽화 작품들을 직접 볼 때 그런 느낌이 들었었다. 끔찍스러우면서도, 어딘가 유머러스한. 사람들은 이 특이한 작업을 매력적으로 받아들인 듯 하다. 그 후로 카라 워커는 미국의 유수의 박물관에서 전시회를 갖게 된다. 요즘도 미국의 잘 나가는 작가이고 앞으로 그의 미술작업이 어떻게 발전할지는 미지수이다.

 

카라는 검정 도화지를 이용한 실루엣 작품 외에도, 벽화 전시회장에 프로젝터를 설치하여 관객이 전시장에 들어서서 움직일 때 그의 그림자가 벽에서 살아 움직이는 살아있는 현장 작업을 하기도 한다. 상상해보자, 내가 전시장에 들어섰을 때 내 검은 그림자가 전시장의 벽화와 만나서, 그 순간 나도 벽화 속의 주인공이 되거나 벽화의 일부가 된다. 재미있는 발상이다.

 

 

 

 

 

 

카라워커의 작품 활동의 주요 소재가 되는 것으로는

l       흑백 인종문제와 권력의 문제, 소외, 차별, 학대

l       인간의 원초적 욕망과 수치감

l       환상 속에 어우러진 역사적 사실과 허구

l       이야기

l       유머

라고 할 만하다. 이런 모티브들이 카라의 벽화에 점층적으로, 입체적으로 등장하는데, 평평한 평면 속에서 마술적인 입체감이 느껴지는 것은 그림을 바라보는 나만의 환상일지도 모른다.

 

 

 

 

 

주로 노예해방 이전의 상황을 모티브로 작업을 하는 그의 미술에 대한 비판이나 반발의 시각도 만만치 않다. 신진 흑인 미술가들 중에는 흑인을 희화화하고, 백인들의 기호에 맞추는 듯한 카라의 작업에 대하여 공개적 비판을 하고 항의를 하거나, 그의 전시회를 보이콧하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한다. 왜 흑인 화가가 흑인들을 우스꽝스럽게 묘사를 하는가, 그것으로 백인들의 환심을 사고 출세를 하는 것이 정당한가? 이런 반발을 사는 것이다. 나로서는 아시안으로서, 내 일이 아닌 남의 일을 보는 입장에서 카라 워커의 작품들을 보고 매력적으로 생각을 하지만,  흑인 입장이 되면 이런 시각도 가능 할 것 같다. 흑인 예술가들의 이런 비판에 대하여, “What you want: negative images of white people, positive images of blacks.” (당신들이 원하는 : 백인은 무조건 나쁘고, 흑인은 무조건 좋다는 ) 이라고 반박했다. 유튜브에 소개된 카라와의 인터뷰에서 카라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욕망과, 동시에 주인공을 죽여버리고 싶다는 욕망 형상화 했다는 설명을 적이 있다. 이를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흑인들에게는 백인이 되고 싶다 숨은 욕망과 더불어, 백인이 되지 못하므로 백인을 죽이고 싶다는 다른 욕망이 있을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사망한 마이클 잭슨은 질환 이유로 여러 차례 성형수술을 감행하여 백인처럼 자신을 변모 시킨 있다. 그는 백인이 되고 싶었던 같다. 남아를 선호하는 전통 사회에서 여야 태어난 내가 남자가 되고 싶다 욕망을 간직하고 성장했듯, 동시에 남자 형제들에 대한 적개심을 키우며 살았듯, 백인이 주류인 미국 사회에서 흑인이 백인이 되고 싶다. 동시에 백인이 정말 밉다 심리는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 아닐까? 흑인으로서 흑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기 보다는 백인이 되고 싶다 욕망을 표출할 , 그것이 비난 받을 행동인가? 카라는 바로 그런 질문을 공격적을 던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너희도 백인 되고 싶쟎아. 주인공 되고 싶잖아. 나한테 신경질이야? 흑인을 우습게 보는 것은 내가 아니고 너희들이쟎아!” – 카라 워커는 이렇게 외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1941년에 흑인 청년 화가 제이콥 로렌스가 60장의 판에 20세기 미국 남부 흑인들이 북으로의 이주 역사를 그려서 미국 흑인들의 삶을 조명했다면,  2000년대의 신진 흑인 화가 카라 워커는 남북전쟁 이전의 남부 흑인들의 삶과 욕망과 잔혹사를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그리고 있다. 카라 워커는 그의 작품에서 흑인을 미화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동료 흑인 작가들의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역설적이게 그의 검정 실루엣 그림 속에서 검정색은 너무나도 선명하고 강렬하며 아름다운 색이 된다. 그의 그림에서 검정은 살아있는, 숨결이 느껴지고, 목소리가 느껴지는, 신음소리와, 노랫소리가 울려 나오는 색깔이 되고 만다. 검정색을 이토록 생동하는, 활발한, 질감과 소리까지 느껴지는 색으로 활용한 화가가 카라 워커 이전에 있었던가? 카라 워커에 이르러 검정색은 완성을 보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댓글 3개:

  1. 이곳 한국 시간은 새벽 2시29분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쓰신 글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사람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그리고 나는 어떤가에 대하여...

    미술 평론을 하시는 분인가 봐요..

    글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카라의 그림들을 볼 수 있었고, 나름대로의 여러가지 느낌을 갖게 합니다.



    즐거운 주말되십시오.. (_ _) 종종 들르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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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그별 - 2009/11/14 02:34
    한국이 새벽 2시 29분일때, 제가 살고 있는 곳은 정오를 조금 넘긴 29분입니다. 제 전공은 '영어교육'이고, 미국미술은 '조금 전문적인 취미' 차원에서 공부하는 중입니다. 블로그도 조금 깊게 공부하기 위해서 열었습니다. 원래 잡다하게 궁금한게 많은데, 이러다 잡동사니 인생이 될까봐, 분야를 정해서 들이파기로 한 것이지요.



    이곳은 거의 일주일 내내 비가 내리고 있어서 바탕화면을 '비'로 바꿔봤습니다. 비가 너무 오는 나머지...내일 가보기로 계획했던 미술관이 있는 도시가 물에 잠겨 휴관이 될것 같아, 속상해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이제 토요일 (이곳은 아직 금요일) 즐거운 주말 되시길. 저도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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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trackback from: Kara Walker: 신화와 동화의 만남
    http://americanart.textcube.com/31 페이지에서 Kara Walker 를 소개 한 바 있습니다. 마침 2009년 11월 7일에 피츠버그의 카네기 미술관 (http://americanart.textcube.com/159) 에 갔을때, 자그마한 방에 카라 워커의 작품 시리즈가 전시되고 있길래 너무 기뻐서 '동동' 뛰면서 작품 감상을 하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카라 워커는 대개 '특별전시'가 되기 때문에 작품 사진을 찍기가 쉽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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