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앤드루 와이드 (1917-2009)가 Christina’s World (크리스티나의 세상), 아니 정확하게는 ‘제니의 슬픔’이라는 소설책의 표지그림으로 다가온 것은 극히 개인사적인 것이고, 이 화가가 일약 화제가 된 것은 아마도 그의 헬가 (Helga) 그림 때문이었을 것이다. 앤드루 와이드는 1986년 그의 지인 Leonard E.B.Andrews 에게 그가 15년간 그려 모아온 ‘헬가’라는 여인의 그림을 보여주는데, 액자까지 만들어진 완성작, 습작, 밑그림, 스케치 등을 모두 합하면 240여 점의 작품이 된다. 앤드루스씨의 회고를 읽어보면 그가 펜실베니아의 화가의 스튜디오에 초대받아 약 두 시간 동안 그림들을 둘러보고 나서 “이것은 국보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앤드루스씨는 이 모든 작품들을 한꺼번에 사들인다. 왜냐하면, 앤드루 와이드가 헬가 관련 그림들을 따로 따로 팔려나가는 것 보다는 한꺼번에 모여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역시 앤드루스씨도 이에 동의한다.
헬가 그림 작업은 1971년, 당시 32세였던 이웃집 여인 헬가를 앤드루 와이드 (당시 55세)를 발견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일설에는 헬가가 앤드루 와이드의 지인의 친구라고도 소개가 되는가 하면, 앤드루 와이드에 대해 악평을 하는 비평가들은 헬가가 앤드루 와이드의 처제네 집에서 일하는 가정부였다고도 전한다. 어찌되었건, Helga Testorf (헬가 테스토프)라는 이 여인은 당시 프러시아 출신의 이민자로, 앤드루 와이드의 스튜디오가 있던 펜실베니아 농촌의 어느 농가에서 살아가며 남의 집 일을 돕기도 하던 평범한 삽십대 여인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누구네 집에서 어떤 계기로 조우했건, 장년으로 접어드는 화가의 눈에 헬가는 ‘놀라움’처럼 다가왔던 것 같다. 와이드는 ‘헬가를 만난 것은 놀라운 행운’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평범한 이웃집 여인, 이민자 아낙네 헬가는 그렇게 난생 처음으로 모델 일을 시작하고, 그녀의 모델 생활은 15년간 이어진다. 내가 생각해보니 15년 사이에 32세의 여인은 47세의 중년으로 서서히 변화해 갔을 것이고, 55세의 장년 화가는 70세의 노화가가 되어 갔을 것이다. 헬가 그림 속의 여인은 주로 금발의 긴 머리칼을 가랑머리로 땋고 있고, 얼굴에 화장기가 없는 채로 수수하고 힘찬 동구권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206, Tempera, 18 1/8 x 26 7/8 inches 1980
(1980년이면 헬가가 41세때 그려진 것인데...)
헬가의 그림 시리즈 중에서 세인들의 눈길을 끌고 화제가 됐던 작품들은 아무래도, 그이의 누드 들일 것이다. 헬가 시리즈가 공개 되었을 때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이유는, 화가 앤드루 와이드가 헬가를 모델로 15년간이나 그림을 그리는 동안, 그의 매니저 역할을 하던 충실한 조력자, 그의 부인(Betsy, 베씨)조차 이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헬가 시리즈는 워싱턴에 있는 미국의 국립 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Art)에서 단독 전시가 되고 이어서 각 지방에서 앞다투어 전시회를 열게 되는데, 어느 기자가 부인 베씨에게 ‘헬가 그림들에서 발견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짓궂게 날렸던 모양이다. 그때 부인은 새촘하게 한마디하고 돌아섰다고 전해진다, “Love.” 부인의 한마디 ‘Love’는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보통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어느 노화가와 모델의 15년간의 비밀스런 사랑과 예술 작업’ 그리고 이를 시인할 수 밖에 없는 아내 베씨의 참담함 혹은 배신감, 혹은… 뭐 대충 이런 그림이 나오지 않는가? 사람들은 스캔들을 좋아한다. 그것이 어떤 식이건 우리들은 (당신과 나를 포함한 우리들은) 스캔들에 목말라 있다. 결국, 평범한 시골 아낙, 이민자 아낙은 노화가의 스튜디오에서 출발하여 ‘타임지 (Time)’의 표지를 장식하는 ‘세계적인 인물’이 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는데, 화제의 헬가 시리즈를 1986년 8월 18일 타임 지에서 특집으로 실은 것이다.

어떤 기자는 이 ‘헬가 소동’이 ‘사기 (hoax)’였다고 평하기도 한다. 헬가 그림은 앤드루 와이드가 앤드루스씨에게 공개하기 전에도 일부 몇 작품이 이전에 다른 전시회에 드문드문 소개가 된 적이 있었다고도 하고, ‘사랑’ 타령은 이들이 날조해 낸 이야기인데, 언론사에서 ‘낚싯밥’을 물고 헬가 시리즈를 널리 홍보한 덕분에 헬가 그림을 한꺼번에 사들인 앤드루쓰씨가 돈방석에 올라 앉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찌 되었거나, 미국을 한 바퀴 돌면서 선풍적 사랑을 한 몸에 받은 헬가 시리즈는 얼마 후 일본인 콜렉터에게 한꺼번에 팔려나갔다고 하는데, 앤드루쓰씨는 이로 인해 또다시 돈벼락을 맞았다는 후문이다. 헬가 시리즈는 현재 일본인이 소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9, Drybrush, 19 5/8 x 25 3/8 inches 1979
헬가의 그림들을 한 권의 화집으로 묶어 놓은 것이 있어서 한참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는데, 일견 그림들을 넘겨보면 우선 ‘아 참 눈부시게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계속 들여다보면, 따뜻하다는 생각도 들고,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행복해진다. 물론 그 사이사이에 여러 가지 느낌이 드는데, 우선 헬가가 모델로서건 혹은 숨은 연인으로서건 앤드루 와이드의 사랑을 듬뿍 받은 것이 보이므로, 그것이 부럽기도 하고, 누가 나를 이렇게 아름답게 봐줄까? 그런 쓸쓸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름다움은 기본적으로는 보는 사람(beholder)의 몫이 아닌가? (Beauty is in the eye of the beholder.) 늙어가는 길목의 화가 와이드는 헬가에게서 궁극의 아름다움을 발견 했을 텐데, 사실 그 궁극의 아름다움이란 헬가에게만 속한 것은 아닐 것이다. 헬가도, 나도, 이웃집 여인도 갖고 있는 아름다움, 그것을 화가는 헬가의 자태에서 찾아 읽고 그리고 그림으로 옮겼을 것이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쓸쓸하면서도 행복한 그림 읽기가 되는 것이다. 이 시리즈 속에서 헬가는 길을 걷거나, 서있거나, 앉아있기도 하지만, 혹은 헬가의 딸이 잠시 모델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헬가는 누워있다. 누워서 자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이 환상처럼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는 그림이 있는가 하면, 자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 햇살이 가득한 그림도 있다. 헬가가 눈을 감고 자는 듯한 스케치가 여기저기 많이 등장한다. 잠이든 헬가는 행복해 보인다.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따뜻한 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누워있는 헬가는 얼핏 십대 소녀 같기도 하고, 이십 대 처녀 같기도 하고, 혹은 나이를 알 수 없는 어떤 여자로 보이기도 한다. 헬가 속에 그녀의 소녀시절과, 처녀 시절과, 중년이 모두 들어있다. 그리고 모두 아름답다. 바로 이 점이 우리의 가슴을 저리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중년의 여인을 묘사하면서, 그녀의 눈가의 주름까지도 선명하게 묘사하면서 와이드는 중년의 여성이 갖고 있는 신비한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았다. 여기쯤서 나는 조금 안타까워진다. 앤드루 와이드는 이 시리즈를 1985년에 끝장을 낼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계속 그렸어야만 했다는 생각을 해본다. 헬가가 할머니가 되었을 때, 그는 어떤 헬가를 그렸을까? 그것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헬가 시리즈는, 미국에서나, 혹은 한국에서나 ‘화가가 15년간 감추고 그린 그림’의 주인공이라는 면에서 크게 부각되고 알려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앤드루 와이드의 그림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그의 화집들을 쌓아놓고 들여다보면, 이 헬가 스캔들은 어떤 면에서 ‘스캔들’이나 ‘드라마’를 원래 좋아하는 우리들을 위해 마련한 간식 같은 것으로 보인다. 사기(hoax)까지는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대서특필할 무엇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가 헬가 시리즈를 그리던 시기뿐 이 아니라 그 이전, 그 이후에도 앤드루 와이드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이웃 사람들을 모델로 그림을 그렸으며, 마을 여인들을 모델로 한 누드들도 다양하게 그렸다. 그의 1948년작 Spring Evening 에서 그는 Evelyn 이라는 이웃집 흑인 여자가 침대에 누워 자고 있는 모습을 그렸는데, 당시에 이웃집 여자 사라(Sarah)가 밖에서 외쳤다고 한다, “이블린, 앤디 선생 앞에서 딴짓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Evelyn, are you behaving yourself with Mr. Andy?” 이블린이 대꾸했다, “그렇지 않아도 내 속에서 악마가 몇 차례 일어났지만, 내가 바로 쓰러뜨렸어! The devil rose up in me a couple of times, but I slapped him right down again.” 앤드루 와이드의 전 생애와 그림을 살펴보면, 15년간 그려온 헬가가 특별한 모델이기는 했지만, 헬가만이 그의 모델을 했던 것은 아니고, 앤드루 와이드의 그림 속의 여인들은 모두 헬가처럼 소박하면서도 생명력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물론 여성뿐 아니라 그가 그린 이웃사람들, 대개 흑인들, 평범한 서민들의 모습 속에 앤드루의 애정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헬가 시리즈가 스캔들의 소재가 되었고, 바로 그 의도적인 스캔들 덕분에 헬가 원화와 판권을 소유했던 사람이 돈벼락을 맞았고, 헬가 시리즈는 지나치게 과대평가 되었다는 평도 있긴 하지만, 헬가 시리즈를 어떻게 해석할지는 전문 평단에 맡기기로 하고, 인터넷에 떠도는 신비로운 헬가의 그림 외에 습작화, 밑그림, 혹은 거친 스케치까지 포함된 전체 240여 점을 그림책을 살핀 내 입장에서 헬가 시리즈는 ‘경이’이다. 15년간 한 여자를 세밀하게, 사랑을 가지고 그려나간 화가가 새삼스럽게 보이고, 그리고 그림 속의 헬가가 아름다워서 기쁘다. 헬가의 아름다움은, 내가, 당신이, 우리가 공유하는 아름다움이기도 하므로. 보잘것없는 이민자 여자, 남의 집 일을 도와주거나 농장에서 일을 하면서 나이를 먹어간 여자 헬가는 앤드루 와이드의 그림 속에서 신화가 되었다. 그 신화 속에 당신의, 나의 초상이 스며있을지도 모른다.

Drybrush and Watercolor 23 x 28 inches (이 그림은 전체의 일부이다.) 1977
추신:
1. 1986년에 240점쯤 되는 헬가 시리즈 (완성화, 습작, 스케치 포함)를 팔아치운 화가는 그 후에도 이따금 헬가를 모델로 한 그림을 선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2. 헬가는 스캔들과 상관없이 그후에도 계속해서 앤드루 와이드 집안 사람들의 친구로 살아갔다고 한다.
3. 헬가 연작을 일본의 재벌이 사 들인고로, 미국의 미술관에서는 그 흔적을 찾기 힘들지만, 앤드루 와이드 뮤지엄에 가면 그 이전이나 이후에 와이드가 그린 헬가 그림이 있을지도 모르므로, 그것이 보이면 '사냥'을 하여 기록을 하겠다.
앤드루 와이드 참고 자료:
1. Andrew Wyeth Close Friends, Introduction by Betsy James Wyeth, Mississippi Museum of Art, Jackson, in Association with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Seattle and London (2001)
2. Andrew Wyeth, The Helga Pictures, John Wilmerding, Deputy Director, Gallery of Art, Washington, Harry N. Abrams, Inc., Publishers, New York (1987)
3. Andrew Wyeth Memory & Magic, Anne Classen Knutson, Introduced by John Wilmerding, High Museum of Art, Atlanta. Philadelphia Museum of Art, in association with Rizzoli, New York (2006)
다음회에, 기운이 난다면 펜실베니아에 있는 그의 스튜디오와 미술관을 취재해와서 적어보겠다. 그리고 그의 미술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쓰겠다. (헬가가 아직 살아있다면, 그이를 만나보고 싶기도 하다. 우리들의 헬가를)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