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만 로크웰
Norman Rockwell (1894-1985)은 1894년 뉴욕 시에서 태어났다. 그에게는 형이 한 명 있었고 단란한 가정이었다. 어릴 때 소년 노만은 이야기의 삽화를 그리는 일에 몰두하곤 했다고 한다. 그의 외할아버지가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한적도 있으므로 그림을 그리는 그의 취향은 유전적인 요소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던 노만은 고등학교도 마치지 않고 자퇴해버린다. 그리고는 1909년, 국립 디자인 학교 (National Academy of Design)에 입학한다. 그는 오로지 그림에 열중하여 학비를 면제 받아가면서 미술 공부에만 전념 할 수 있었다.
그는 특히 ‘삽화 (illustration)’쪽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삽화를 그리는 사람들에게 꿈의 무대는 Saturday Evening Post 라는 잡지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는데 1916년, 그의 나이 22세에 그는 성공적으로 이 잡지에 입성하게 된다. 그는 1916년부터 1963년까지 47년간 332 점의 커버 그림을 게재하였다.
물론 그는 이 외에도 다른 잡지의 삽화, 표지를 그렸으며, 책의 삽화들을 그리기도 한다. 1932년 그는 한때 프랑스의 파리로 미술 공부를 하러 가지만 파리 화단은 그에게 영감을 주지 못한 듯 하다. 1935년, 36세에 Mark Twain 의 Adventures of Tom Sawyer, Adventures of Huckleberry Finn 의 삽화를 그리고, 1937년에는 우리들에게 ‘작은 아씨들 (Little Women)’로 친근한 작가 Louisa May Alcott 의 전기와 관련한 삽화들을 그리기도 한다. 1939년 버몬트 (Vermont)주의 알링턴 으로 이사한 그는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의 연설에 감명받아 네 가지 자유 (Four Freedoms) 시리즈를 그렸다. 그는 워싱턴 디씨에 가서 이를 정부 홍보 자료로 사용해달라는 제안을 했지만, 그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 당국자들은 일언지하에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정부로부터 거절당한 그의 작품들이 Saturday Evening Post 에 게재되자 이 ‘자유’ 시리즈는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고, 그제서야 정부가 이 작품들의 가치를 인정하고 정부 홍보 자료로 사용하기에 이르렀다고도 한다.
버몬트 시절, 그의 작업실은 농가 주택에 달려 있는 커다란 창고였는데, 어느 날 화재 사건이 나서 그의 작품들이며 그림 그리기에 필요한 도구들, 소품들을 모두 잃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는 비참함 속에서도 그 불 난 사건 조차도 삽화로 그려서 남길 정도의 여유와 유머도 잃지 않았다. 그는 1953년 현재 그의 미술 박물관이 있는 매사추세츠 (Massachusetts)주의 스톡브리지 (Stockbridge)로 이사하여 1985년 사망할 때까지 이곳에서 작업하며 여생을 보낸다.
만 91세를 지구상에 머물렀던 노만 로크웰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습작에 몰두해 살았다고 하고 십대에 이미 잡지의 표지를 그릴 정도의 실력을 과시했으므로 그가 미술 활동을 본격적으로 한 것만도 대략 70년 안팎이 될 것이다. 그 70년 중에서 47년간은 Saturday Evening Post 라는 잡지를 위해 지속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노만 로크웰이 처음에 Saturday Evening Post 에 그림을 팔아서 받은 금액이 75 달러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것을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2,300 달러 정도 되는 금액이라고 한다. 스물두 살 초년의 화가가 그림을 한 장 팔아 2,300 달러를 받았다니 대단한 일이 아닌가. 그림을 팔은 첫날 그는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달려가 부모님께 이 기쁜 소식을 전하고 그는 곧바로 마을의 애인에게 가서 득달같이 청혼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첫 부인과는 얼마 후 이혼하고, 두 번째 부인과 아들 셋을 낳아 살다가, 부인이 심장마비로 사망한 후, 동네의 문학 선생님과 다시 결혼하여 해로했다고 한다.
노만 로크웰이 소위 말하는 ‘삽화가’ 혹은 ‘상업 화가’로서 명성을 날리고, 풍요롭게 예술 활동을 하고 있을 때, 화단에서는 그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돈 잘 버는 ‘상업화가’일 따름이었다. 이 점은 노만 로크웰 자신도 스스로 괴로워하던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평생 일관되게 ‘사람들’을 그렸고, 그의 그림 속의 사람들은 실제로 그가 생활 속에서 만나고 경험한 인물들이었다. 그의 가족과 동네 사람들이 그의 그림의 모델이 되어 주었다. 그는 동네 아이들을 모델로 세우기 위해 동전을 많이 준비했다가 아이가 지루해서 짜증을 낼 무렵, 동전을 더 주는 식으로 그 지루함을 달래줬다고도 한다. 아이들은 동전 쌓여가는 것을 보며 모델의 지루함을 달랬을 것이다.

노만 로크웰이 마크 트웨인의 ‘톰소여’와 ‘허클베리핀’의 삽화를 그릴 때, 그는 책을 샅샅이 읽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 이야기의 무대가 되었던 미조리주(Missouri) 의 한니발(Hannibal) 마을로 찾아 갔다. 그곳은 마크 트웨인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이었다. 막상 마을에 들어서보니 놀랍게도 이야기 속에 스케치 된 풍경들이 그대로 나타났다. 마크 트웨인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 속에 풀어 놓았던 것이다. 노만 로크웰은 아주 세밀한 곳까지 살펴보고 확인을 했다. 그리고는 마을의 농부가 입고 있던 낡아빠진 옷을 그 자리에서 돈을 주고 사 들였다. 실제로 낡아빠진 옷을 입은 사람을 생생하게 그리기 위해서는 낡아빠진 옷이 필요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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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작은 아씨들’의 작가인 루이자 메이 올코트의 일대기를 삽화로 그리기 위해 방문한 곳은 매사추세츠주(Massachusetts)의 콩코드(Concord) 마을이었다. 그곳에 ‘작은아씨들’의 무대이기도 하고 루이자 메이 올코트가 수십 년간 살면서 글을 썼던 집 (Orchard House)이 있었다. 노만 로크웰은 이야기 속의 조(Jo)가 글을 쓰던 다락방에 올라가 직접 현장을 스케치하고 그림을 그렸다. 그가 그린 삽화 속에는 쥐 두 마리도 앉아있는데, 실제 ‘작은 아씨들’ 이야기 속에 ‘조’가 ‘생쥐’들을 친구로 대하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혹은 노만 로크웰 자신이 그곳에서 돌아다니는 사랑스러운 생쥐를 봤을지도 모른다.
그가 한때 두번째 부인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을때, 그는 마을에서 '시'공부를 시작한다. 그는 Robert Frost 의 시를 읽다가 이해가 안되는 구절이 있으면 그자리에서 당장 프로스트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건 무슨 말이요?"하고 물어봤다고 한다. 그는 그림을 그릴때나 글을 읽을때나 생생하게 확인해보고 의미를 파악해보고 직접 저자의 설명을 듣거나, 직접 사람을 만나보는 식으로 접근해 갔다. 그의 그림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이유중에 한가지는 한장의 그림속에 그는 아주 세밀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채워나갔기 때문에 그것들을 뜯어보는 재미가 있는 것인데, 이런 구체적 세밀함은 그의 '구체적인 것'을 지향하는 태도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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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네 가지 자유 (Four Freedom)’ 시리즈는 꽤나 미국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작품들인데, 미국인이 아닌 한국인 입장에서 내게는 이 작품들에 크게 매력을 느끼지는 못한다. 오히려 이 작품들에서 미술비평가들이 그를 ‘통속적’이라고 낮춰 말하는 그 이유를 조금 감지하는 편이다. 노만 로크웰은 조국 미국을 사랑했고, 함께 살아가는 미국인들을 사랑했다. 그는 미국을 위해 뭔가 행동하고 싶었고, 그의 고민이 이 네 편의 작품들에 스며있다. 내가 이 작품들을 매력 없어 하는 이유는, 내가 미국인이 아니기 때문에 미국인 화가의 이런 드러나는 애국심에 동화가 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평자들은 이를 ‘선전물’ ‘프로파간다 (Propaganda)’라고도 일컫는다. 나는 그 전체주의적 프로파간다에 염증을 느끼는 편이다.
그의 ‘네 가지 자유’ 시리즈는 1941년 루즈벨트 (Franklin Delano Roosevelt) 대통령의 국정 연설문에서 언급한 언론의 자유 (Freedom of Speech), 종교, 신앙의 자유 (Freedom of Worship), 빈곤으로부터의 해방 (Freedom from Want), 공포로부터의 해방(Freedom from Fear) 이렇게 네 가지 가치를 형상화 한 것이다. 이 네 가지 가치를 형상화 함에 있어 노만 로크웰은 구체적이고도 가까운 우리 주변 인물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마을 회관에서 자유롭게 일어나 자기 생각을 역설하는 남자, 각기 다른 종교적 상징물에 의지하여 기도하는 보통 사람들, 가을철 추수 감사절 식탁에 모인 가족, 그리고 아이들이 안심하고 잠들 수 있도록 지켜보는 아버지와 어머니. 이것은 미국인 뿐만 아니라 보통사람들이 꿈꾸는 복된 삶의 풍경들일 것이다. 추수감사절 장면은 실제 노만 로크웰의 가족들의 모습이라는 설명도 있고, 마을회관에서 한 남자가 일어나서 이야기를 할 때 화면 왼쪽 구석 맨 뒤에 한쪽 눈과 귀만 보이는 사람이 노만 로크웰 자신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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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만은 화가인가? 미술계에서는 그를 단지 ‘삽화가 (Illustrator)’라고 불렀다. 노만 자신도 자신을 ‘삽화가’라고 불렀다. 나는 그를 진정한, 미국을 상징하는, 미국을 대표하는 미술가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의 그림 속에서 나는 미국을, 미국인을, 미국의 역사를 만나기 때문이다. 그는 노만 로크웰 화풍을 한가지 이 세상에 세워놓은 화가이다. 유럽의 사조를 따르지 않아서, 혹은 난해하지 않아서, 통속적이라 그의 예술이 제대로 된 예술이 아니라고 한다면, 예술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노만 로크웰은 기존의 예술의 잣대를 뛰어넘는 곳으로 가버렸다. 노만 로크웰 때문에 사람들은 미술사를 예술사를 다시 써야 할지도 모른다.
저작권이 문제가 될 것 같아서, 책에 실린 그림들을 사진기로 대충 찍었다. 사실 그림책에 실린 그림 사진을 오려서 갖고 싶지만, 공공도서관 책을 이렇게 난도질하면 안되므로 꾹 참고 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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