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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7일 목요일

The Eight / Ashcan School (8): Ernest Lawson 의 풍경화

 

Boat House, Winter, Harlem River (보트하우스, 겨울, 할렘 강) c. 1916

Oil on Canvas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미국 사실주의 미술가들 The Eight 의 멤버였던 Ernest Lawson (1873-1939)는 캐나다 노바 스코시아 (Nova Scotia) 태생으로 미국에 이민한 화가 입니다. 뉴욕 Art Student League 에서 수학했는데, 그때 미국 인상주의 화가였던 Twatchman 과 교류하면서 그의 영향을 입었다고 합니다. (Twatchman은, 저도 좋아하는 작가이므로 개별 소개페이지를 장차 만들 생각인데  http://americanart.textcube.com/243  이 페이지에서 그의 설경을 소개한 바 있지요.)

 

제가 갖고 있는 그의 그림 사진은 코코란에서 찍은 이 것이 유일한데, 아마도 제가 그의 그림에 별 매력을 못 느껴서,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들을 그냥 스치고 지나갔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음에 미술관에 가면 그의 그림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러니까, 이렇습니다. 저는 서양사람이 그린 '순수 풍경화'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그림에 '사람'이 들어가있을때  그때 들여다보는 편입니다.  아무 사람도 없이 그냥 풍경화가 제 눈길을 끌기는 어렵습니다.  사람 하나 안보이는데 제가 들여다보면서 '이거 참 좋다'라고 종알거린다면, 그 풍경화는...정말...대단한 작품일걸요...풍경화 안쳐다보고 지나가는 사람의 발길을 잡아끌 정도이니까요.  저의 취향이 그러하다는 것이지요.  미술관에 가서 유럽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모아놓은 전시장에 가면 Alfred Sisley 라는 화가의 아름다운 풍경화가 반드시 몇점 걸려있습니다. 들여다보면 아슴푸레하고 잔잔하고 좋아요. 시슬리의 풍경화를 보고 있으면 '그리움' 이라는 어휘가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막연히 뭔가 그리워져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러나 아름다운 어떤 풍경이 떠올라요.  그렇게 시슬리의 그림들은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저는 늘 그의 그림들을 보면서 '아름다워...뭔가 그리워...' 하고 지나칠뿐, 시슬리에 대하여 따로 각별한 애정을 느끼진 못했지요.  그의 풍경화에 사람이 안보이고, 그러면 나는 아무런 '이야기'도 구체적으로 떠올릴수가 없으니까요.  예, 아마도 비슷한 이유로 저는 어니스트 로슨의 풍경화가 내 앞을 지나갈때 그냥 '통과'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제가 그림에서 원하는 것은 아마도 '이야기' 혹은 '드라마' 인것 같습니다.

 

예, 어니스트 로슨의 자료를 찾아 보면 그가 유럽 인상주의, 미국의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고, 특히 시슬리의 작품들과 많이 비교가 됩니다. 붓터치나 분위기가 비슷해요.  로슨은 그가 The Eight 의 멤버였다는 것 외에 그다지 특기할 사항이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드라마를 좋아하는 제 기호에 부합하는 화가가 아니라서 그럴지도 모르지요.

 

위의 할렘강변 풍경에서 할렘강은 뉴욕 맨해턴 북부의 할렘지대, 그곳을 흐르는 강입니다. The Eight 가 도시의 풍경, 특히 뉴욕 맨해턴의 풍경을 즐겨 그렸다는 것을 상기해보면, 이 그림의 소재와 The Eight 의 조류가 어떻게 연관되는지 짐작할수 있습니다. 멀리 맨해턴의 고층 건물들이 보이지요.

 

어니스트 로슨을 마지막으로 The Eight 의 멤버들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앞으로도 관련 화가들의 그림을 새로 발견하면 페이지 업데이트를 지속적으로 해 나갈 생각입니다.

 

2010, 1, 6, redfox.

 

 

 

 

 

2010년 1월 6일 수요일

The Eight / Ashcan School (6): George Luks

펜실베니아 출신의 The Eight 화가 George Luks (1867-1933)는 의사인 아버지와 미술가이며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의 슬하에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의 가족이 펜실베니아의 광산촌 가까이로 이사한 후에는 부모님이 가난한 광부 가족들을 돕는 일에 헌신을 하였으며 조지 럭스 역시 이런 삶의 영향을 받아 서민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청년으로 성장했습니다.

 

펜실베니아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조지 럭스는  당시의 미술 학도들과 마찬가지로 유럽으로 건너가 런던, 파리를 여행하고, 독일의 뒤셀도르프에서도 생활을 하였는데, 결국 고향인 펜실베니아로 돌아와 Philadelphia Press 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면서 역시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던 John Sloan, William Glackens, Everett Shinn 등과 교유하게 되고, 이들과 함께 Robert Henri를 만나게 되는데 결국  이 만남이  The Eight 의 모태가 됩니다.

 

 

George Luks 는 당시의 The Eight 멤버들을 위시한 사실주의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도시 대중의 삶을 그렸습니다.  William Glackens와는 스튜디오를 함께 쓰며 동고동락 했다고 하는데, 그는 술을 좋아하여 취해 쓰러져 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결국 그 '술'이 화근이 되어 그를 죽음에 몰아넣게 되는데요. 66세이던 조지 럭스는 술집에서 누군가와 시비가 붙어 주먹다짐 끝에 사망했다고 윌리암 글랙슨스의 아들이 회고록에서 밝힙니다. (공식적으로는 새벽에 그림 그리러 나가다가 문앞에서 쓰러져 사망했다고 발표가 되었지만, 사실은  모르는 취객한테 맞아서 사망을 했다는 것이지요.)  술 좋아하는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 그는 인정이 많았고 기꺼이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으며 빈민가의 사람들과 뒤섞이는 것을 편안해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들을 찾아보면 광부, 걸인등 가난하거나 소외된 대중들에 대한 묘사가 많습니다.

 

 

 

이 그림은 1915년 당시 뉴욕 맨하탄 북부의 풍경입니다. 판잣집같이 자그마한 집들이 옹기종이 모여있는 것이 보입니다.

Upper Manhanttan (맨하탄 북부)  1915

Oil on Canvas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The Polka Dot Dress (물방울무늬 드레스) 1927

Oil on Canvas  94.0 x 147.4 cm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루스 센터 (Luce Foundation Center)에서 촬영

 

 

이 물방울무늬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그림은  루스센터에 다닥다닥 붙어있던 그림들 중에서 제가 발견한 것인데요. 꽃 모자를 쓰고, 흰바탕의 파랑 물방울 무늬의 드레스를 입은 이 여인이 중산층 신분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투박한 구두, 장갑, 멋대가리 없는 핸드백,  짙은 입술 연지, 그녀가 앉아있는 딱딱한 나무의자등을 종합해서 보면 이 여성이 서민, 일 다니는 가난한 여성으로 보입니다.  (이런 설명을 하자니, 영화 '양들의 침묵'에서 식인 살인마가 여 수사관을 쓱 일별하고, 그녀가 온갖 싸구려 옷과 구두 향수로 치장했다는 것을 분석해내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우리가 꼭 관상쟁이가 아니더라도, 세상을 살다 보면 어떤 감식안이 생기지요... )

 

그런데 저 여성의 표정이 참 복잡하고도 심오합니다.  싸구려 옷과 장신구로 치장한 여자가 앉아있는 의자도 푹신한 안락의자가 아닌 딱딱한 나무의자이거니와, 여자가 앉은 자세는 왜 저렇게 엉거주춤한겁니까? 눈치를 보며 엉덩이만 걸친 꼴이라 다리 모양도 세련되게 포개진 것이 아니라 역시 엉거주춤 합니다.  그리고 시선은 살짝 내리 깔았는데요,  그런데 저 표정이 참 애매합니다. 어쩌면 꿈을 꾸는것도 같고, 생각에 잠긴 것도 같은데,  참 보잘것없고 볼품없이 대충 엉거주춤 앉아있는 이 여자의 표정에는 만만치 않은 기운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나, 니네들이 보기에 별볼일 없는 인생일지도 모르지만, 나에겐 아직 꿈이 있고, 그리고 그 꿈을 이룰 젊음과 기운이 있다구....뭐 이런 표정 같기도 합니다.  살짝 시선을 내리 깔고 앉아있는 저 표정만큼은 '여왕'을 압도할만한 기운이 흐르고 있습니다.

 

 

 

 

 

Woman with Macaws (앵무새와 여인) 1907

Oil on Canvas

2009년 10월 31일 디트로이트 아트 인스티튜트 미술관에서 촬영

 

 

앵무새를 길들이는 여인의 표정이 명랑해보입니다.  앵무새의 붉은 새조가 화면 여기저기에 투영되면서, 한겨울에 보기에 따뜻한 그림이군요.  위의 물방울무늬 드레스의 여자의 표정이나, 이 앵무새 여자의 표정이 태평하고 강인해보입니다.  아마도 조지 럭스의 표정이 이와 비슷했을것 같습니다.  술과 친구를 좋아하고, 길거리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선량하게 관찰하는 화가의 표정.

 

조지 럭스의 그림을 더 발견하면 업데이트 하기로 하겠습니다.

 

2010년 1월 6일 redfox.

 

The Eight / Ashcan School (5): Everett Shinn

 

The White Ballet (흰 발레) 1904

Oil on Canvas

Everett Shinn (1876-1953)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미국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들 (The Eight 혹은 Ashcan School)중 한 사람인 Everett Shinn (이브릿 신: 1876-1953) 의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제가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 갈때마다 지나치면서 눈길을 제대로 줘 본 적이 없습니다. 처음에 얼핏 보니까 '드가' 그림 같더라구요.  '드가 그림인가?' 생각하고 가서 들여다보면 엉뚱한 이름이 걸려 있는 겁니다.  그러면 '드가 흉내낸 그림이군...' 이러고 그냥 지나치고 마는거죠.  뭐 발레 그림을 드가만 그렸을까마는, 저의 짧은 지식으로는 발레 그림은 죄다 프랑스의 화가 드가 (Degas) 작품 같은거죠.  발레를 다른 사람이 그리면 드가를 모방한것 같다는 소리나 듣는거죠.  이래서, 뭔가 먼저 잡아서 시작한 사람이 이기는겁니다. 헤헤. (그런것 같죠?)  뭔가 소재를 선택해서 집중적으로 한가지를 파들어가면, 그것이 곧 자기 자신이 되는거죠.  우리가 드가와 발레를 떼어놀수 없게 되는거죠.

 

아무튼 이 그림은 드가의 그림이 아니고 Everett Shinn 의 그림입니다.

 

만약에 제가 '미국미술을 공부하겠다'고 작정하고 차근차근 미국의 화가들을 찾아보는  취미생활을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이 그림은 영원히 저의 무시를 당하고 지나갔을겁니다. (가짜 드가그림이라는 딱지를 안고).

 

 

 

 

Everett Shinn (1876-1953) 은 The Eight 화가들중 가장 나이가 어렸다고 하지요. 그리고 뭐 젊은나이에 잦은 이혼으로 '유명'해진 면도 있는것 같습니다. 프랑스를 여행하며 당시 유럽의 인상파 화가들의 영향을 받은 측면도 있고요.  제 안목으로는 '드가'의 소재를 빌려온 것으로 보입니다.  신문 잡지의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을 한 경력도 있습니다. (당시의 사실주의 화가들 대부분이 신문 잡지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생계를 해결하였으므로 짐작 할 만한 일입니다.)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2층 복도 전시장에 걸린 그림을 순서대로 보면

1. 왼쪽벽 - Henri,  맞은편 (오른쪽벽) - Everett Shinn

2. 왼쪽벽 - Rockwell Kent,  맞은편 (오른쪽) - Glackens

3. 왼쪽벽 - George Luks ....

 

이런 순서로 걸려 있는데요.  이곳에 The Eight 을 위시한 당시의 사실주의 화가들 작품이 차례대로 전시되었다고 할만하지요.   미술관에 전시물을 설치할때, 전시 기획자는 나름대로 어떤 '논리'를 가지고 그림을 설치했을것으로 보이는데요, 이렇게 모아놓은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Everett Shinn 의 작품을 제가 자주 보지 못해서 그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정리하려고 합니다.  Everett Shinn 에 대하여 기억할 만한 사항은

 1. The Eight 의 최연소 멤버였다는 점

 2. 따라서 다른 The Eight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뉴욕, 도시의 대중의 삶, 역동적인 장면을 잡아내어 그렸다는 것

 3. 유럽 인상파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이정도가 될것 같습니다.

 

다음에 그의 다른 작품을 '사냥'하면 페이지를 업데이트 하기로 하겠습니다.

 

2010년 1월 6일 RedFox

 

 

 

Backstage Scean (무대 뒤) 1900

Watercolor and Charcoal on Paper mounted on the Board (종이위에 수채와 목탄화)

2010년 1월 9일 델라웨어 미술관에서 촬영

 

 

1900년 작품이니까 Everett Shinn (1876-1953)이 스물네살 청년시절에 그린 그림입니다.  위에 소개한  발레 그림은 1904년 작품이고요.  두 작품 모두 그가 20대때 그린 것이군요.  두가지 작품의 공통점은,  모두 '극장' 풍경이라는 것이지요.  이를 통해서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이브릿 신이 무대예술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극장 인테리어 작업도 했고,  나중에는 영화 감독도 했다고 합니다. 극장예술을 비롯, 예술의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던 화가였군요.

 

2010년 1월 18일 업데이트

 

2009년 12월 31일 목요일

Regionalism (7) John Steuart Curry

자화상 (1928)

목탄, 콘테, 연필, 종이

49.1 x 64.3 cm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2009년 12월 29일 촬영

 

 

 

미국 1930년대 지역주의 (Regionalism)의 대표적인 세명의 화가중의 하나인 존 스튜어트 커리 (John Steuart Curry 1897-1946)는 미 중서부 캔자스 주의 부유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그의 부모님들이 대학교육을 마치고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왔을 정도였으니까, 고학력의 부유한 집안이었음을 짐작해 볼수 있겠습니다. 그는 어릴때부터 부모님의 지원을 받으며 미술 개인 교습을 받을수 있었고, 시카고 미술학교를 거쳐서, 펜실베니아의 제네바 컬리지에서도 미술 공부를 했습니다. 한때 그는 Boy's Life 를 위시한 잡지의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미국 미술사를 들여다보면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한 화가들이 참 많아요. 사실주의 화가들은 대개 일러스트레이션을 생업의 수단으로 거쳐갔을 것으로 짐작 됩니다.)

 

당시의 화가 지망생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1926년에 파리로 건너가 일년간 유럽의 미술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는 특히 꾸르베와 도미에, 티티안과 루벤스 화풍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루벤스의 경우, 어릴때 그의 집에 루벤스의 그림 복제품이 장식되어 있어 그것을 보고 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뉴욕과 커넥티컷에서 작품 활동을 하게 되는데, 1932년에는 아내 클라라가 사망합니다.  그 자신 역시 위스컨신 주립대에서 미술 교수로 재직하던 중 48세인 1946년에 심장마비로 요절을 하게 되는데요, 일찌기 부인을 잃고, 요절을 한 화가라서 그런지  그의 작품을 소장하는 미술관들이 많지 않군요. (웹에서 그의 작품들을 검색해보면 '아 참 좋다!'라고 감탄할 만한 그림들이 많이 눈에 띄는데, 제가 가능하면 제 눈으로 본 작품만을 이야기하기로 정했기 때문에,...아쉽지만...음...)

 

그의 작품을 살펴보면, 미드웨스트의 농촌과 풍습, 그리고 가축들이 소재가 되었거나, 사회성 강한 주제, 반전 의식도 발견 됩니다. 중부에서 벌어진 흑인 학대나 린치에 대한 고발성 강한 작품들도 있고, 당시 중서부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를 했는데,  그래서, 오히려 그의 고향 캔자스나 다른 중서부 지방 사람들은 존 커리를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가 그린 중서부의 삶의 모습이 어쩐지 자신들을 우스개로 만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지요. 가령, 캔자스에서 흑인 린치하는 것을 그려내면, 뉴욕의 관객들은 그 작품을 보면서 감탄을 하겠지만, 캔자스 사람들은 '우리들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타지 사람들에게 보여준다'고 괘씸하게 생각을 하겠지요.  그래서 존 커리는 최후까지도 고향 사람들의 비난을 감수하며 살아가야 했다고 합니다. (그는 고향 캔자스가 아닌 위스콘신주에서 사망했어요.)

 

아이아스의 이중성

 

 

 

Ajax (1936-37) 아이아스

Oil on Canvas

122.5 x 92 cm

 

Ajax 라는 이 그림은 일견 평화로운 초원의 황소 한마리 그림처럼 보입니다. 저는 이 그림을 자주 지나치곤 했지만, 이 평화로운 그림이 왜 여기 걸려있는지, 왜 이 그림이 박물관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알수가 없었습니다. 제게는 그냥 너무나 평화로워서 개성없고 지루한 그림처럼 보였으니까요.  그래서 늘 '무심코' 지나치다가 하필 이 그림의 작가가 John Stuart Curry 라서 (마침 그의 작품세계를 공부하던 중이라서) 관심을 갖고 들여다 보게 되었지요.  (모르면 봐도 모릅니다. 관심이 생겨서 들여다보면 뭔가 보이기 시작하는거죠).

 

그런데 그림 옆에 붙어있는 작품 설명을 보니, 이 그림은 너무나 평화로워서 지루한 그런 상황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 그림이 특별한 이유는 그림에 달린 '제목'과  그림이 탄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 때문입니다.

 

제목 Ajaz (아이아스)는 그리스 신화의 인물입니다. 트로이와 전쟁을 벌이던 그리스 장군중에 아이아스라는 장수가 있었는데, 그리스의 명장 아킬레스가 사망하자 그의 유품을 사이에 두고 오딧세우스와 아이아스 사이에 갈등이 생깁니다. 결국 아킬레스의 유품은 오딧세우스에게 넘어가고, 아이아스는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미쳐버려서 들판의 양떼를 오딧세우스와 그 부하들이라고 생각하고 몰살을 시켜버립니다.  그리고는 정신이 돌아온후 너무나도 부끄러워서 자살을 하고 말지요. 

 

그러면 '아이아스' 이야기와 이 한가로운 초원의 황소 한마리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요? 이 소가 아이아스란 말인가요?  그래서 뭐?  궁금증이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그런데요, 미술관 복도에 있는 이 그림 바로 옆에 아래의 그림이 나란히 걸려있습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 Dust Bowl (흙먼지 폭풍)입니다. 1930년대  미국은 '대공황'이라는 경제적인 난국을 겪고 있었는데, 미국의 중부에서는 엎친데 겹친 격으로 평원지대를 뒤엎는 흙먼지 바람과 한파가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날이 건조해지니 흙먼지가 폭풍처럼 평원을 뒤덮고, 날은 더욱 가물어지고. 푸르던 평야가 하루 아침에 흙먼지로 뒤덮이며 사막화 현상이 일어나기도 하고. 1930년대에 이런 현상이 여러차례 중서부를 강타하고 지나갔다고 합니다.

 

 

Dust Bowl 1933

Oil on Canvas

Alexandere Hogue

 

 

바로 이렇게 피폐해진 중서부 평야지대의 삶의 모습을 이 한장의 그림이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이래저래 경제도 안좋고, 흙먼지 바람으로 농작물은 말라죽고, 죽어라죽어라 하는거죠. 미국인들에게 1930년대는 도시나 농촌이나 참혹했던것 같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 저위의 '아이아스' 그림의 의미를 이해할수 있게 됩니다. 아이아스는 (1936-7)년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중서부 평원지대가 '사막'처럼 변화하는 것을 지켜본 화가는 신화속의 미친영웅 '아이아스'를 떠올렸나봅니다. 아이아스는 영웅이기도 했고, 미쳐 날뛰며 자기편 영웅들을 죽이려다가 가축들을 몰살시킨 인물입니다.  화가에게 미드웨스트의 평원은 평화롭고 순한 한마리 황소처럼 사람들에게 곡물과 풍요를 선사하기도 하지만, 그 소가 미쳐날뛰면 주위 모든이들을 해치게 됩니다. 흙먼지로 뒤덮여 사막처럼 변해버린 평원은 미쳐 날뛰는 아이아스의 모습이기도 하지요.

 

그러면 아이아스가 미쳐날뛰지 않게 사전에 달랠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요? 작가는 아이아스의 비유를 들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여기서 저는 또다른 질문을 해보고 싶습니다. 똑같은 그림이 1930년대가 아닌 2000년대에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우리는...저 순한 소를 화나게 하면 안되지요. 소가 평화롭게 살수 있도록 하는것이 우리 자신을 돕는 길일 것입니다. 이것은 제 생각이고요, 각자 자신의 해답을 찾기를 기대해봅니다.

 

 

그런데 토마스 하트 벤튼의 페이지에서 (http://americanart.textcube.com/252/trackback/ ) 아킬로스와 헤라클레스의 신화를 바탕으로 한 벤튼의 벽화를 소개한 바 있지요.  중부에 30년대에 강타한 흙먼지와 한발 사태를 보면 미조리강의 개발의 역사적 의미를 짐작할수 있게 됩니다. 반복적인 흙먼지와 가뭄으로 황폐해져가는 평원을 살리기 위한 방법이었던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보면 1937년에 그려진 커리의 Ajax에 등장했던 소가, 십년후 벤튼의 그림에서 '강의신'으로 새롭게 그려진것 같기도 하지요?  :)  음, 이 그림들이 이렇게도 연결이 되는군요... 

 

 

 

 

존 브라운은 광인인가 의인인가?

 

 

아래 그림은 원화가 아니고요, 제가 하퍼스 페리에 갔을때 존 브라운 기념관 입구에 설치된 실제 벽화 크기의 카피본을 사진 촬영한 것입니다. 제목은 The Tragic Prelude (비극적 서곡).  이 그림의 원본은 캔자스 Statehouse의 벽화라고 합니다. 벽화와 똑같은 크기의 카피본이 존 브라운 기념관에 설치되어 있고요.

 

 

존 브라운은 미국 남북전쟁 이전에 노예해방을 부르짖으며 정부군과 전쟁을 벌였던 사나이 입니다. 백인 입니다. 그는 종교적 신념에 불타서 흑인 노예를 강력히 비판하면서 무장봉기를 일으켰던 것인데요, 결국 하퍼스 페리에서 붙잡혀 사형에 처해지고 맙니다. 당시의 지식인들, 가령 콩코드 출신의 Emerson 이나 Thoreau 와 같은 초절주의 철학자들은 존 브라운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기도 했는데요, 미국 역사에서 그에대한 평가는 '광인'과 '의인'사이에서 갈팡질팡 합니다.  그가 목숨을 걸고 노예해방을 위해 노력한 것은 가상하나, 그 방법이 적법하지 않았으므로 마냥 영웅으로 치켜주기가 위험한 것이지요.  이건 뭐 무장봉기, 폭동과도 같았으므로 이를 '영웅시'할 경우 국가의 법체계가 위협을 받게 되겠지요.  존 브라운에 대해서 제가 상세히 공부하지 않았으므로 더이상 논할경우 제가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커지므로 존 브라운 개인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접겠습니다.

 

존 브라운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어떠하건, 존 스튜어트 커리에게 존 브라운은 영웅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손에 성경을, 한손에 장총을 들고 서서 호령하는 존 브라운의 모습은 마치 제가 어릴때 본 영화 '십계'속의 '모세' 할아버지를 연상케 합니다. :)  존 브라운이 혁명적으로 노예해방을 진두지휘하며 돌아다닌 구역이 캔자스, 미소리, 버지니아주였던 고로 캔자스주에서 그를 기념하는 벽화 작업을 했던 모양입니다.

 

 

 

The Tragic Prelude (1938-1940)

Kansas Statehouse 벽화

실제 벽화는 아니고, 웨스트 버지니아주의 하퍼스 페리에 있는 존 브라운 기념관 벽에 있던 복제 사진을 촬영 (2009년 11월 15일)

참고: http://americanart.textcube.com/176

 

 

 

 

 

 

 

 

반전인가 전쟁 옹호인가?

 

 

 

Our Good Earth (1942) 우리들의 위대한 대지

Water Color on Illustration Board

27.9 x 34 cm

2009년 12월 29일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2차 대전 당시 '전쟁기금 모금'을 위한 홍보용 그림을 주문 받았을때 우리들의 커리가 그린 전쟁 홍보를 위한 그림이었다고 합니다. 한 농부가 밀밭 가운데에 우뚝 서있고, 한손에는 밀대를 한웅큼 쥐고 있고, 그의 곁에 소녀와 소년이 있습니다. 그의 왼손이 소년의 오른손을 꼭 쥐고 있군요.  농사를 짓는 일도 전쟁을 돕는데 아주 중요하다는 메시지라고 하는데요.  제가 스미소니안에서 발견한 이 작은 그림은 "Our Good Earth - Keep it Ours (우리들의 위대한 대지 - 우리의 땅을 지키자!)" 이런 선전문구를 새긴 포스터의 밑그림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이 그림이 전쟁 지지를 위한 그림이었는지,  우리가 정말 해야 할 것은 전쟁이 아니라 '농사짓는일'이라는 메시지인지 헛갈리는 구석도 있습니다. 왜 제가 헛갈려하는가하면 여러 화집에서 발견한 또다른 그림 때문인데요.

 

Parade to War (1938)

 

미술사책을 들여다보면 존 스튜어트 커리와 관련된 장에서 주로 소개 되는 작품이 이 그림 입니다. 출전 행진 (Parade to War). 저는 실재 그림을 본 바 없고, 화집에서 본 것이 전부인데요. 전쟁터로 나가기 위한 군사들의 행진 장면입니다. 구경하는 아이들은 신이나서 달음질치는데, 흰 테이프들의휘날리는 가운데 줄을 서서 행진하는 군인들은 모두 유령같아 보입니다. 해골들이 옷을 입고 행진하는것처럼 보입니다.  그림 왼편의 어느 여인이 기도하듯 입을 가린채 걸어가는데, 마치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절망하는 어머니 같습니다.  이 그림은 유령의 도시 풍경 같기도 합니다. 1938년에 그려진 그림이라는데, 이 당시에 한국에서도 식민지땅의 조선인들이 조선의 청년들과 장년 남성들이 학도병으로, 징용으로 이렇게 끌려가 죽음을 맞이 했을 것입니다.  조선에서는 여성들도 정신대로 끌려갔지요.

 

이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반전' 그림입니다. 1938년에 이런 반전 메시지가 분명한 그림을 그린 존 커리가, 1942년에 전쟁 홍보용 그림을 위탁 받았을때, 그려 낸 그림이 '우리들의 위대한 대지' 그림입니다. 존 커리가 정말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 전쟁 홍보였을까요?  ... 

 

 

이상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존 스튜어트 커리는

1. 미드웨스트 농촌 농민, 서민의 풍경을 그렸으며

2. 역사적 사실을 주제로 한 그림들을 그렸고

3. 공공벽화작업도 활발히 하였으며

4. 신화와 역사의 만남을 시도했고

5. 일러스트레이션, 벽화, 일반 회화등 다양한 장르의 활동을 했음을 짐작할만하며

6. 반전  사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존 스튜어트 커리, 이 화가는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매력적인 작품들을 많이 갖고 있는데요, 제가 직접 눈으로 본 작품이 많지 않아 대략 이쯤서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이상으로 미국의 지역주의 3대 화가로 알려진 Grant Wood, Thomas Hart Benton 그리고 John Steuart Curry 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다음엔 어디로 가나...과거로 갈까요 아니면 미래로 갈까요... 랄랄~

 

 

 

2009년 12월 31일 redfox.

 

 

 

 

Regionalism (5) : Thomas Hart Benton, 불굴의 신화가 꿈틀대는 나라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 박물관 2층 전시실. Thomas Hart Benton (1889-1971)의 벽화가 걸려 있는 곳입니다 (오른쪽 벽).  2009년의 마지막 날, 그리고 2010년을 시작하는 이 시간을 헤라클레스와 아킬로스의 신화 이야기를 하면서 보내도 좋을 것 같아서 선정해 봤습니다.  길이가 7미터 가까이 되고 그림의 높이는 대략 160 센티 (여성들 보통 키 정도 되겠군요) 되는 그림입니다.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밝고, 건강하고 힘찬 벽화인데요.

 

이 그림의 제목은 '헤라클레스'와 '애킬로스'입니다. 캔자스 시티의 한 백화점을 장식한 벽화였다고 합니다.

 

 

 

Archelous and Hercules  (1947)

671x159.6 cm (길이 6.7 미터x 높이 1.6 미터)

Tempera and Oil on Canvas mounted on Plywood.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그림의 중심이 되는 것은 커다란 황소의 뿔을 쥐려고 대적하는 사나이. 황소는 정확히 적을 노려보고 있는데 사나이는 등을 보이고 있어 표정을 알 수 없으나, 그의 팔과 등의 근육이 이 남자의 표정을 읽게 해 줍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클레스는 천하 장사로 알려져 있지요. 아킬로스는 '강'의 신이라고 합니다.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면 강의신 아에킬로스가 헤라클레스와 싸우던 장면을 이야기 해 주는데요, 헤라클레스와 씨름하다가 뱀으로 변하기도 하고, 황소로 변하기도 했는데 도무지 헤라클레스를 이기지 못했다고 술회 합니다. 헤라클레스가 '강의 신'과 대적하여 이겼다는 신화는 '자연'과 인간이 대적하여 인간이 자연을 '극복'한다는 해석이 가능하게 해주지요 (참고로 헤라클레스는 제우스신과 인간 사이에 태어난 영웅입니다.)

 

신화에서는 헤라클레스가 황소로 변한 강의 신 아킬로스의 한쪽 뿔을 뽑아서 상대를 제압했다고 합니다. 그 뿔은 서양 문화에서 '풍요'의 상징이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속담이 있지만, 쇠뿔 자체는 큰 상징적 의미가 없지요. 그리스 신화에서 소로 둔갑한 강의 신의 뿔을 뽑아냈다는 말은 강이 제공해주는 풍요를 얻어 냈다는 상징을 갖게 됩니다.)

 

   *  참고로, 영문 표현중에 Take the bull by the horns 가 있지요. 쇠 뿔을  단단히 잡아라. 소와 씨름하려면 소와 정면으로 서서 소의 두 뿔을 단단히 잡아야 하죠. 결국 정면승부를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서양에서도 '소'가 그리스 신화때부터 존재하던 짐승이었으므로 소와 관련된 우화나 속담이 많군요. (영어선생 제버릇 개 못줍니다. 꼭 티를 내죠 ^^)

 

그렇다면 이 그림에서 강의신 아킬로스는 황소이고, 이 황소와 대적하는 사람들 (여러사람이 그 황소를 잡기 위해 그림속에 등장하지요)이 헤라클레스가 되겠는데요, 벤튼은 이 그림으로 무엇을 전하려고 했던 것일까요?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 미조리주에서 공공건설의 일환으로 미주리강 개발 사업이 진행된 적이 있습니다. 평원지대에 가뭄이 들어 흙먼지가 날리면 농작물들이 말라죽고 땅이 불모지가 되는가하면 반대로 홍수의 피해를 겪기도 하는데요. 그래서 군부대가 동원되어 댐도 만들고 수로도 만들고 둑도 쌓는 등의 강 개발이 사회주의사상을 가졌었고, 공공미술 벽화작업이 활발했던 벤튼에게 영감을 주었던것 같습니다.  신화속에서처럼 인간이 강을  길들여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희망했겠지요. 

 

 

 

 

 

저 옆에 여성 두명과 소년 하나가 앉아있거나 서 있는 흰 구조물이 보이시지요?  뿔이죠. 쇠뿔.  그 쇠뿔에서 과일과 곡식이 흘러 넘치고 있지요. 강을 잘 운영할때 인간에게 가져다 주는 풍요이지요.  그러고보면 여성이 들고 있는 빨간마후라도 뿔 모양이고요, 소년이 들고 있는 나발도 뿔 모양입니다.  (또 여기서 상상력을 발휘해보니, 여성신체의 여성기관중에 '나팔관'이라는 기관도 있지요. 그 나팔관도 뿔 모양이지요...여성의 돌출된 두개의 유방도 두개의 돌출된 뿔처럼 보입니다. 이쯤되면 세상 만물이 뿔처럼 보인다는 환상에 사로잡히게 되지요...하하하....)

 

 

 

 

 

소와 씨름하는 사나이들이 있는가하면,  한쪽에서는 수확을 하는 농민, 멀리 농장에서 '영농기계화'의 상징같은 농기계도 보입니다. 강을 잘 다스렸을때 우리에게 다가올 풍요를 이런 식으로 다양하게 그려냈습니다. 그러고보면, 사나이가 황소와 씨름하는 것을 중심으로, 그림의 왼편은 '황소와의 씨름'에, 그림의 오른편은 '다가올 풍요'가 그려진 것 같습니다.

 

 

 

 

자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저와 함께 시선을 이동시키는 겁니다.) 여기 그려진 사과를 보십시오. 사과며 다른 과일의 형태가 어떤가요?  사과가 오목볼록거울에 비쳐진듯 꾸불구불 하지요? 구불구불~~ 처음부터 사나이들의 등근육이며 모든것이 구불텅구불텅 구불구불 휘어졌다는 느낌이 들었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심지어 사과마저 어디론가 빨려들어갈듯 휘어져 있습니다.  왜 이 그림속의 대상들은 빨려들어갈듯 휘어져 있는것처럼 보일까요?  왜 벤튼은 대상을 이런식으로 휘어지게 그렸을까요?

 

 

 

 

왜 모든것이 휘어져보이나?

 

벤튼은 살아있는 것들이 에너지가 넘쳐서 움직인다고 믿었던 걸까요? 사나이들의 등근육이나 소의 근육처럼 가시적인 '삶의 근육'뿐 아니라, '생의 에너지'가 갖는 움직임을 정체를 파악했던 것일까요?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근육'을 부여한 것일까요?  아, 마치 숨은그림 찾기 하듯, 뿔처럼 보이는 당근 무더기가 보이는군요.

 

 

 

소의 눈이 보이십니까? Bull's eye 이지요. Bull's eys 라고 하면, '과녁'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소의눈을 연상시키는 것들이  소 곁에 또 있군요. 나무 둥치의 둥근 나이테도 소의눈을 연상시키고, 남자가 벗어놓은 모자역시 뿔을 닮은 소의 눈처럼 보입니다.

 

그림 전체에 흐르는 휘어짐, 구부러짐은 삶에 흐르는 에너지의 흐름같이 보이기도 하고, 그대로 휘어저 굽이쳐 흐르는 생명의 상징인 강물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그 속에서 인간과 자연의 씨름이 있습니다.

 

지난 2009년은 제게는 죽음의 강을 건너듯 아주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기쁨도 컸고, 슬픔도 컸으며, 과장된 절망감이나 우울감사이로도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주었습니다. 다가오는 한해동안 제가 해결해야할 과제들이 줄을 서있고, 그것들을 하나 하나 해결하다보면 한 해가 또 지나갈 것 같습니다.  소와 씨름하듯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소와 씨름할 더 많은 시간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생의 에너지가 남아있는 그 날까지 씨름은 계속 될것입니다. 

 

쇠뿔을 거머쥐고 '돌아온 헤라클레스'처럼 환하게 웃는 그런 날이 올테니까요.

 

복된 2010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p.s. 헤라클레스는 소의 뿔을 하나만 뽑았습니다. 두개 다 뽑지 않았습니다. 하나는 얻고 하나는 양보하는 것이지요. 서로 화합하는 방법입니다.  불핀치의 그리스 신화에서 뿔을 뽑힌 강의신 아에킬로스는 헤라클레스를 원망하기보다는 그가 얼마나 힘센 영웅인지 이야기를 합니다.  이들은 서로 반목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참고: http://classiclit.about.com/library/bl-etexts/tbulfinch/bl-tbulfinch-age-23-achelous.htm  불핀치의 신화중 아켈로스와 헤라클레스

 

 

2009년 12월 31일 RedFox

 

 

 

 

 

 

2010년 1월 31일 스미소니안 미국 미술관에서 촬영

 

 

2009년 12월 28일 월요일

Regionalism (1) 지역주의 3총사: Wood, Benton, Curry

 

 

미국 사실주의 속의 지역주의

 

http://americanart.textcube.com/118 이전 페이지에서 미국미술사에 나타나는 '사실주의' 흐름을 제가 대충 정리한 바 있습니다. (공부를 해 가면서 내용을 조금씩 손을 보게 되는군요. 잘 못 알고 있던 것은 바로잡고... 첨가도 하고..)

 

그 표를 다시 갖다 놓고 살펴보겠습니다. 아래 표가 제가 대충 잡은 윤곽인데요. http://americanart.textcube.com/search/?search=ashcan  Ashcan 에 속했던 화가들을 소개한 적이 있쟎아요. 이분들이 미국 사실주의의 원조들이었다 할 만 합니다. 이들중에 Social Realist 로 분류가 될만한 화가도 있고, 아닌경우도 있고.  가령 Sloan 은 사회주의적 잡지 편집에도 관계했지만, 스스로는 사회주의와 거리를 두기도 했지요.  본격적인 사회 사실주의 화가로는 벤 샨 같은 작가들이 있지요. (벤샨은, 제가 꽤 흥미를 가진 화가 이기 때문에 오히려 페이지 정리하기가 어렵게 느껴집니다....)

 

이번에는 지역주의 (Regionalism) 작가군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삼총사'와 같은 작가들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1930년대에 탄생하는 '지역주의 (Regionalism)'의 주요 작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 Grant Wood (1892-1942)

 * Thomas Hart Benton (1889-1975)

 * John Steuart Curry (1897-1946)

 

그러니까...가령...아주 유치한 미술 문제를 낸다고 가정해봅니다.

 

다음 화가들중에서 미국의 지역주의 화가가 아닌 사람은?

(1) 그랜드 우드 (2) 토마스 벤튼 (3) 조지아 오키프  (4) 존 커리

 

이런 문제가 나오면 답은 (3)번을 찍으셔야 한다는 것이지요 :)

 

 

지역주의의 탄생과 허상

 

 

 

그러면, 이 regionalism 이라고 명명된 지역주의는 어떤 배경에서 탄생 한 것일까요? 미술비평책마다 대동소이하거나 백과사전식의 설명을 하고 있는데요, 대략 '교과서'처럼 알려진 것은 이런 내용입니다. 우선 지역주의가 1930년대에 탄생하는데, 대공황과 맞물려 있지요.  그래서 미국인의 애국심을 고취 시키고자 하는 미술 운동이 일어났고, 유럽 일변도의 미술판에 저항하여 소외되어 있었던 미국의 중서부 지역에서, 신토불이의 미술이 탄생한거다 이런 내용이죠.  아 저역시 최근까지 이런 식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지역주의의 탄생에 대한 또다른 설명을 접할수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그 내용을 조금 정리하겠습니다.  American Visions: The Epic History of Art in America by Robert Hughes 책 내용을 대충 요약해서 옮기겠습니다.

 

 

1933년에, 캔자스 출신으로 뉴욕에서 미술거래상으로 활동하던 Maynard Walker 라는 사람이 캔자스 시티에서 35점의 그림을 걸어놓고 "American Painting Since Whistler 휘슬러이래의 미국 회화" 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엽니다.  전시회에 참가했던 화가들 중에 Thomas Hart Benton, John Steuart Curry, Grant Wood 가 있었던 것이지요. 당시 벤턴은 뉴욕에서 활동중이었고,  우드역시 이미 American Gothic 이라는 불후의 명작(?)으로 큰 상을 거머쥔 후였고, 커리역시 '휘트니 미술관'이 이미 그의 작품을 여러점 사들인 후였습니다.  나름대로 이미 미술계에서 어느정도 알려진 인물들이었지요.  그런데 이 세사람은 피차 서로 본적도 없고,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리고 뭐 Regionalism 같은 것도 생각도 못해냈겠지요.

 

그런데 전시회를 기획했던 Walker 가 Art Digest 라는 잡지에 이 전시소식을 전하면서 "real American art...which really springs from American soil and seeks to interpret American life (진정한 미국 미술...미국의 토양에서 태어나서 미국의 삶을 해석하려고 노력하는...)" 이런 선전을 했다고 합니다.  뭐 사실 당시 비평가들이나 콜렉터들은 이 전시회에 별 관심이 없었다는데, 워커가 제작한 카타로그가 Time 지의 중서부 담당자의 눈에 띄어서, 그것이 뉴욕의 본사로 보내집니다. 뉴욕 본사를 지키고 있던 타임지의 설립자 Henry Luce 는 미술 애호가였는데 이 별것도 아닌 소식을 흥미롭게 보았습니다.  그리고는...난리가 난거죠...  이제 진정한 미국의 세기 (The American Century) 가 돌아왔다는 식으로 해석을 한거죠.

 

그리하여 1934년 12월 24일판 타임지의 커버를 벤턴의 초상화가 장식하고, 커리, 우드, 그리고 Charles Burchfield, Reginald Marsh 등의 그림이 소개가 됩니다. 흙냄새 물씬 풍기는 중서부 출신의 작가들이 불러일으킨,  진정한 미국화의 탄생! 지역주의가 이런식으로 탄생을 한거죠.

 

헌데 Robert Hughes 의 설명으로는 이런식의 미국의 Regionalism 은 사실과는 상관없는 '허구'라는 것이지요.  가령 벤튼, 커리, 우드가 지역주의 운동의 선구자로 널리 선전이 되었지만, 벤튼과 우드는 피차 서로 일면식도 없었고, 지역주의 화가로 알려진 화가들중에 정말 '중서부'에 뿌리를 내리고 활동한 화가는 그랜트 우드 뿐이라는 것이지요.  커리는 커넥티컷에서 활동했고, 벤튼의 스튜디오는 뉴욕에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이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이 '지역주의'라는 어떤 판타지가 미국의 대중들에게 비현실적인 향수와 꿈을 주었다는 것이지요. 경제 대공황으로 도시와 농촌등 전 지역이 고통을 겪고 있을때, 그랜트 우드가 보여준 풍경화는 '잃어버린 낙원'이었지요.  존 스타인벡이 분노의 포도(Grapes of Wrath)를 1939년에 발표하면서, 몰락한 미국 농민들의 참상을 여실히 서술한 바 있는데, 이에 비해서 그랜트 우드의 풍경화는 '몽환적'이기 까지 합니다.

 

후에 벤튼은 이 허구성이 강한 지역주의 운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평을 합니다. " 이미 각본은 씌어졌고, 우리를 위한 무대장치는 만들어졌다. 그랜트 우드는 전형적인 아이오와 소읍 사람이 되었고, 존 커리는 전형적인 캔자스의 농부가 되었으며, 그리고 나는 중서부 (미조리조)의 촌뜨기가 되었다. 우리는 우리 역할을 받아들였다."

 

예. 미국의 지역주의 운동이 대충 이러한 얼개로 탄생하였고, 미국미술사에서 나름 자리매김을 하고 있습니다. 지역주의 삼인방에 대한 소개는 Wood, Benton, Curry 순으로 페이지를 열어나가겠습니다.

 

2009년 12월 28일 redfox.

 

 

 

 

 

 

 

 

 

2009년 12월 5일 토요일

The Eight (Ashcan School) and George Bellows

New York (1911)

George Bellows

Oil on Canvas

2009년 9월 11일 워싱턴 국립미술관 (NGA)에서 촬영

 

사진은 클릭하시면 크게 확장시켜 보실수 있습니다.

 

뉴욕풍경

 

 

Goerge Bellows (1882-1925) 의  New York (1911)은 대략 100여년전의 뉴욕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자동차와 마차가 뒤섞여 있고, 고층 건물들과 그제나 이제나 여전한 인파가 보입니다.  사실 이 뉴욕의 풍경은 사진과 같은 실제 광경은 아니라고 합니다. 뉴욕의 여러 장면을 뒤섞어서 뉴욕의 분위기를 전달했다고 봐야겠지요. 얼핏 보면 타임 스퀘어 같기도 하고 얼핀 보면 펜스테이션 앞 같기도 하고, 어찌됐거나 우리가 한번쯤 가봤거나 혹은 영화나 그림을 통해서 지겹게도 많이 본 뉴욕 번화가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일백여년전의 풍경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의 복장이나 마차 장면을 제외하면 어느 화가가 며칠전에 그린 것이라고 해도 그럴싸해 보입니다.

 

조지 벨로우즈 (1882-1925)는 앞서 소개드린 The Eight (팔인회)나 Ashcan (애시캔) 그룹의 정식 회원으로 활동을 한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The Eight, Ashcan school 의 리더였던 로버트 헨라이 (Robert Henri 1865-1929)와 친분이 두터웠고, 헨라이의 미술관에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의 작품들이 팔인회, 애시캔 회원들의 화풍과 통했기 때문에 조지 벨로우즈를 '애시캔'의 일원으로 평가하는 비평가들도 있습니다.  저 역시 그의 작품들이 미국의 도시, 서민들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려냈으므로 조지 벨로우즈를 애시캔 그룹을 이야기하면서 함께 정리를 해보는 것입니다.

 

조지 벨로우즈는 오하이오(Ohio) 의 주도(행정수도)인 콜럼버스 (Columbus) 태생입니다. 이곳에 오하이오 주립대 (Ohio State University)가 있지요. 그는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주로 야구선수와 교지 삽화가, 그리고 잡지의 삽화가로 활동했습니다.  오하이오 주립대에 한번 가본적이 있지요. 제 친구들이 그곳 수학과에서 공부를 했는데, 한 친구는 공부 마치고 수학자로 살고 있고, 또 한 친구는 아직도 거기서 공부중입니다. (글 쓰다가 친구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집니다.) Robert Henri 역시 오하이오 출신인데 그는 신시내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아마도 조지 벨로우즈와 로버트 헨리가 고향이 가까웠다는 이유로 더욱 친근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지 벨로우즈는 스포츠맨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오하이오 주립대를 졸업한 후에 프로야구 선수가 될것인가 잡지 삽화가로 살것인가 고민하다가, 미술 수업을 받겠다고 작정하고 뉴욕으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 뉴욕 미술학교 선생으로 재직하는 로버트 헨라이를 만나게 되고 그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조지 벨로우즈는 특히나 그의 권투경기 장면이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 합니다.  그의 도시 풍경이나 다른 그림들도 그 나름의 힘과 역동성이 느껴지지만, 단답형 상식 퀴즈 대회에서 '권투하는 그림' 내 놓고 '이거 그린 사람?'하는 퀴즈가 나온다면 자동으로 '조지 벨로우즈!'을 외칠만 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의 그림 세계를 단순무식하게 정리해본다면 대략 세가지 정도로 분류가 됩니다:

 

 (1) 그를 대표하는, 권투선수 시리즈

 (2) 도시 주변의 풍경과 서민의 삶

 (3) 일반 서민의 초상화

 

제가 미술관들을 돌면서 '사냥'한 그의 작품 사진들을 주제별로 소개해 보겠습니다.

 

 

권투선수

 

Both Members of This Club (1909)

두 선수

Oil on canvas, 45 1/4 x 63 1/8 in. (115 x 160.5 cm)

2009년 9월 11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흰색의 하일라이트가 들어간 왼쪽 선수, 얼굴에 피가 낭자합니다.  오른쪽 선수, 치고 들어가는 대각선 구도가 역동적이지요. 반대방향의 대각석 구도의 관객 풍경이 그림의 중심을 잡아줍니다.  피가 낭자한 가운데, 아래 중앙의 관객은 입을 벌리고 웃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권투선수가 피를 흘리거나 말거나, 관객의 입장에서는 링에서 피가 튀고 살점이 튀고 누군가 되게 쓰러지고 그래야 신이 나는 법입니다.

 

웹에서 조지 벨로우스 이미지를 찾아보시면 이와 유사한 다른 권투경기 장면 그림들을 많이 발견하실수 있습니다. 그 그림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조지 벨로우즈의 권투경기 그림을 찾아 천지를 유랑하며 돌아다니고 싶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어릴때, 할아버지가 권투중계의 팬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권투중계의 일정을 일일이 표시해놓고, 그의 일기장에 적어놓고 절대 빼놓지 않고 들여다봤습니다. 아마도 돌아가실때까지 그러셨을겁니다. 단지 중계방송만 보신것이 아니고, 서울 우리집에 오시면, 어린 우리들을 이끌고 월곡천 건너, 시장통에 있는 '체육관'에 구경을 가곤 했습니다. '체육관'이 뭐하는데냐 하면 당시 무명 아마추어 선수들이, 혹은 권투선수 지망생들이 모여서 연습하는 '도장'이다 이거죠.  우리들은 거기서 밤이 이슥하도록 창문 너머로 사람들이 서로 치고받고, 혼자 줄넘기하거나 혼자 샌드백 치면서 훈련하는것을 구경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체육관에 따로 '탈의 시설'이 없었던것 같습니다. 가끔 우리는 잘생긴 '오빠'들의 (그때 나는 꼬맹이였으므로) 실한 엉덩이 구경도 할수 있었는데,  선수들이 체육관의 구석진곳에 가서 옷을 갈아입었거든요. 그 구석진 곳이 하필 우리가 염탐하던 창가였으므로 그들이 창가쪽 구석에서 후다닥 바지를 내리고 체육복으로 갈아있거나, 체육복에서 평상복으로 탈바꿈하는 광경을 볼 수 밖에 없었지요. (일부러 그런게 아니고요 -.-;; )   아니...엉덩이밖에 안 봤습니다... 헤헤헤.

 

어릴때는 할아버지가 권투중계 보시는 것이 못마땅했는데요, (왜냐하면 내가 어린이 프로를 볼 수가 없으니까) 지금도 그런 스포츠 중계에 재미를 못느끼므로 여전히 볼 일이 없는데요, 하지만 이 그림은 제 맘에 듭니다.  조지 벨로우즈가 무슨 맘으로 이런 그림을 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권투 장면을 그의 그림 소재로 잡았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신선한' 시도였고, 결국 그의 트레이드마크 (Signiture) 작품이 되고 말았지만, 그것 말고도,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인생 이렇게 치고 받고 맞다가 뻗는거지...하는 비감한 생각도 들고,  누구나 그런거지, 나만 유독 두드려 맞는것도 아니지, 이런 위안감이 든다니깐요, 글쎄.

 

 

 

2009년 12월 13일,  국립 미술관에 가서 조지 벨로우즈의 Both Members of This Club (1909)라는 작품을 다시 감상하고 있었는데요, 마침 미술관 도슨트(Docent 전문 안내원)가 사람들을 이쪽으로 안내해와서 이 그림에 대한 설명을 하더군요. 그래서 곁에서 귀동냥을 했지요. 새로 알게된 사실은,  1900년 초반 당시에는 상업적으로 복싱 경기를 하는것이 '금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공개적인 복싱매치가 아니고, 남성들의 '음성적인' 클럽에서 진행된 경기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목도 Both Members of This Club (이 클럽의 두 회원)이라는 식으로 달린 것이라고 하네요.  두 '선수'라고 하면 안되고, 그냥 클럽의 회원간의 친선경기같은.    그러면 이 클럽에서는 복싱만 했겠는가?  다소 '음성적인' 클럽이었으므로 그 안에서는 복싱 말고도 다른, 다양한, 그러나 저로서는 전혀 알수 없는, 남자들만의 '음성적'인 오락이 진행되었겠지요~

 

 

 

 

 

뉴욕 빈민가의 아이들

 

 

이 작품은 위의 권투선수 그림보다 2년 앞서서 그려진 것입니다.  뉴욕의 East River 강변에는 그 당시 가난뱅이 이민자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서울의 허술한 한강변 산동네를 연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제목이 Forty Two Kids (42명의 아이들) 인데요 제목의 'kid'가 단순한 '아이들' 이 아닙니다. 아이들이라는 영어 단어로는 Children 이 따로 있지요.  요즘 Kids라는 단어를 '아이들'이라는 의미로 흔히 사용하기는 하지만 백여년전 이 kid 라는 말은 '슬랭'으로 대개 이민자 아이들처럼 가난뱅이 아이들을 일컫는 표현이었다고 합니다. 그냥 아이들이 아니라...말하자면...'애새끼들'이라는 뉘앙스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

 

이 kids 라는 어휘를 저도 아주 조심해서 사용하는 편인데, 제가 교육을 전공했고, 학교에서 교사로도 일을했고, 그래서 대학원 수업을 들을때도, 온통 '아이들,' '학생들' 관련 이야기였지요. 그러니까 주로 사용하는 어휘가 students, children, ESL children, ESL students 뭐 이런 언저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무심코 지도교수와 논문 이야기를 하다가, "These ESL kids..." 뭐 이러고 말을 하니까 지도교수가 주의를 주었습니다. "우리는 학생을 존중해야 하는 교육자이다. students 나 children, learners 말은 우리가 사용하기에 적합하지만 kids 라는 말은 부적합해보인다."  그러니까 그 kids 라는 어휘가 아직도 품위있는  어휘로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아, kid의 원뜻은 염소새끼 입니다.)

 

자 우리들의 조지 벨로우즈 선수(?)가 그 가난뱅이 뉴욕 빈민가의 이민자의 '애새끼'들을 화폭에 담았다는 것인데요. 정말 42명인지 한번 헤아려 볼까요?

 

 

Forty Two Kids (1907)

42명의 아이들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Corcoran 미술관에서 촬영

 

 

이 작품이 1908년 어느 전시회에 소개가 되었을때 평단의 반응은 싸늘하고 조롱기가 가득했다고 합니다.  뭐 이따위 그림을 그림이라고 그렸냐 이거죠.  가난뱅이 애새끼들이 허술한 강변에서 노는 것이 무슨 그림의 소재가 되는가 씹었을겁니다.  하지만 평단의 싸늘한 반응과는 달리, 이 작품은 곧 개인 콜렉터에게 팔려나갔는데, 이것이 조지 벨로우즈가 최초로 개인 콜렉터에게 판매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워싱턴의 코코란 미술관에 있지요.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Bill Bryson 의 The Life and Times of the Thunderkid 의 일화중에서 전쟁이후 베이비붐 세대로 성장했던 작가 빌 브라이슨의 회고가 소개됩니다.  그가 과장되게 술회하기를, 전후 베이비붐 세대였던 자신들은, 어딜가나 애가 넘쳐나서,  그가 살던 아이오와 시 변두리의 강변에 가면 수천명의 아이들이 모여서 멱감기를 했다고 하는데요.  물론 조지 벨로우즈 그림속의 아이들은 1907년 8월의 아이들입니다.  베이비붐 세대보다 50년전에 '이민자 붐' 세대의 아이들이지요.

 

이 그림이 제게도 낯설지 않은 이유는, 비록 지구 정반대쪽 대륙에서 성장했지만, 저 역시 60년대 70년대 베이비붐 시대의 일원으로 변두리 가난뱅이 아이로 성장했다는 공통 분모 때문일것입니다.  우리 할머니나 어머니의 회고로는 '네 오라비나 네가 태어나던 시절에는 어느 집에서나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어느집 여자나 배가 불러 다녔다. 애가 참 많이도 나왔다'고 합니다. 그 많은 애들이 뭘하고 놀았을까요.  사실 도심에서 성장했지만 저는 어린시절 골목에서 뭘 하고 놀은 기억이 별로 남아있지 않고,  즐겁게 논 기억은 모두 시골집에서였습니다.  여름 한철 시골 개울가에 가면 약속도 필요없이 아이들이 있었고, 우리들은 수영복도 없이 그냥 입은 옷을 벗어던지고 물에 들어가 놀았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저는 초등학교 2학년때까지 옷을 벗고  개울에서 물놀이를 했습니다.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을 아직 몰랐다는 것이지요) 여자아이나 남자아이나 그냥 물속으로 뛰어 드는 것으로 각자 부끄러운데를 가렸다고 생각하고 그냥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는 것이지요.   초등학교 3학년부터는 빤쓰라도 입고 물장구를 쳤고, 초등학교 5학년부터는 싸구려 나이롱 수영복을 입고 노는 '문명인' 반열에 들 수 있었지요.

 

제가 가끔 이런 저의 '야만적'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면,  서울이나 대도시의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난 또래 친구들은 저를 '원시인' 쳐다보듯 바라보며 무슨 외계인이나 거짓말장이를 대하듯 휑한 표정으로 대합니다.  자기네로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풍경속에 내가 있었다 이거죠.  하하하. 사람들은 자기가 처한 환경을 '평균적' 환경으로 인지하는 경향이 있어서, 자신의 경험 영역 바깥의 일은 외계의 일처럼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나'역시 피할수 없는 한계죠. 나 역시 그런 눈으로 남을 판단할 것이므로.  조지 벨로우즈가 '애정'을 갖고 변두리 아이들이 벌거벗고 노는 풍경을 그렸을때, 어떤이들은 '이것도 그림이냐'로 반응 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럴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지구상에 전쟁이 사라지지 않는거죠...

 

 

첨언:  그런데 위의 42명의 아이들 그림이...어쩐지 Thomas Eakins The Swimming Hole(1885) 라는 그림을 연상시킵니다.  토마스 이킨스 (1844-1916)는 미국 사실주의 미술가들의 '대부'쯤되는, 후에 활동하는 사실주의 화가들 (The Eight, Ashcan)에게 가장 영향을 끼쳤던 미국화가라 할 만 합니다.  조지 벨로우즈가 선배 대가인 이킨스의 그림을 염두에 두었는지 아닌지는 알수 없으나, 참 닮았단 말이지요...  ;-)

 

 

 

 

 

변두리의 푸른아침

 

멀리로 고층 건물들이 밀집한 것으로 보아 역시 뉴욕의 강변 풍경으로 보입니다. 역시 강변 부두에 뿌연 안개가 피어오르고 누군가 불을 피웠는지 흰 연기도 솟아 오릅니다.  대략 어느 추운 겨울 아침 강변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웅크리고 있으니까요. 추우면 웅크리쟎아요. 이들의 하루는 오늘도 고단하게 흐를것입니다.  이들의 곤고한 풍경과는 달리 푸른 색조가 아름답지요? 

 

 

Blue Morning (1909)

푸른 아침

Oil on Canvas

86.3 x 111.7 cm

2009년 9월 11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다리밑 외딴 숙소

 

그림 오른쪽 구조물이나 그 위를 지나는 판으로 보아 이것은 다리(교각)의 일부 같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뉴욕시의 어느 커다란 다리 아래에 사람들이 모여있고, 그림의 중앙에 6층짜리 건물이 똠방, 대똑하게 서있습니다.  이곳이 그림의 제목이 되는 '외딴 숙소'인것 같습니다.  'tenement' 라는 어휘를 언라인으로 검색해보면 이런 의미가 소개가 됩니다. (http://www.thefreedictionary.com/tenement)

 

1. A building for human habitation, especially one that is rented to tenants.
2. A rundown, low-rental apartment building whose facilities and maintenance barely meet minimum standards.

해석: (1)  세입자 임대용의 사람이 거주하는 건물
        (2) 극히 기초적인 수준도 안되는 시설을 갖추고 있는  싸구려 아파트 빌딩

 

 

The Lone Tenement (1909)

외딴 숙소

Oil on Canvas

2009년 9월 11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그림 왼편에 사람들이 모여서 불을 쬐고 있는것 같지요?  멀리 강에 은은한 햇살이 비치는데, 다리밑의 사람들은 불가에 모여 서 있습니다. 웅덩이에 보이는 물은 살얼음이 얼었을것 같습니다.  이런 뉴욕의 풍경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활동해던 Georgia Totto O'Keeffe (November 15, 1887 – March 6, 1986) 가 그렸던 뉴욕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Georgia O'Keeffe
Cityscape with Roses
1932
oil
84 3/8 x 48 1/2 in.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Gift of the Georgia O'Keeffe Foundation

 

 

1932년이면 미국의 경제 암흑기 입니다. 그 당시 조지아 오키프가 묘사한 뉴욕은 장미빛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작가의 작업 취향이야 각자 자유이고 조지아 오키프가 매력적인 화가임에는 틀림없으나,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에 '사회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돈많은 사진가 스티글리츠의 사랑속에 경제적인 어려움도 모르고 예술에만 전념했겠지요.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만을 들여다볼때는 그의 작품에 감탄을 하다가도, 그 당시에 혹은 그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활동하던 작가들과 비교해보면, 어딘가 조지아 오키프의 미술세계가 '공허'하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사람'한테 관심이 없었던 사람 같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이러한 저의 비판적인 시각은, 사람이나 '세상'에 관심을 가진 저 자신의 취향에서 출발하는 것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냥 문득, 조지 벨로우즈의 뉴욕 풍경 그림을 보다가, 그 속의 가난뱅이 애새끼들이라던가, 빈민들의 풍경이 그려진 그림을 보다가 문득,  조지아오키프의 뉴욕 풍경이 떠오르면서...아하...이들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았던거구나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National Gallery of Art 에 조지 벨로우즈의 그림이 걸려있는 풍경입니다. 왼쪽부터 '권투선수' '푸른 아침' 그리고 '뉴욕' 그리고 '쓸쓸한 숙소'가 차례차례 보입니다.

 

 

 

초상화들

 

 

다음은 크라이슬러에서 '사냥'한 그의 '피아노 앞의 엠마' 입니다. 엠마는 그의 부인입니다. 뉴욕의 미술학교에서 만났는데 엠마는 그림을 그만두고 피아노에 전념했다고 합니다.  위의 Blue Morning 에 보였던 그 푸른 빛이 이 그림에서 좀더 뚜렷하게 표현됩니다. 아, 조지 벨로우즈는 이런 색감의 푸른빛을 좋아했구나 추측하게 됩니다.

 

 

Emma at the Piano (1914)

피아노 앞의 엠마

Oil on Canvas

94x73 (가로세로)

2009년 11월 29일 버지니아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촬영

 

 

 

조지 벨로우즈의 두 딸중 큰딸인 앤 입니다. 커튼과 허리 부분의 청색과 흰 드레스가 대조를 이루는데요. 역시 Blue Morning 이나 Emma at the Piano 에서 선보인 청색과 흰색의 대조가 이 그림에서도 나타납니다.

 

Anne in White (1920)

흰 드레스의 앤

147x108.9 cm

Oil on Canvas

2009년 11월 7일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에서 촬영

 

 

조지 벨로우즈는 엠마와 결혼한 이후로 두 딸의 아빠가 되었는데, 아내와 딸들을 지극히 사랑했던 그의 그림의 소재가 도시의 풍경에서 가정적인 것으로 변모합니다. 그래서 43년의 짧은 생에서 그의 후기에는 초상화 작품들이 그려집니다. 물론 그의 초상화 작품은 그의 아내 혹은 그가 살던 마을의 마을 사람들, 이런 보통 사람들입니다. 그는  생계를 위해서 삽화 작업도 계속했고, 시카고 미술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습니다.  그는 '맹장'이 터져서 그만 요절을 하고 맙니다.

 

 

2009년 12월 5일 redfox

 

 

그의 마지막 작품들

 

 

Ringside Seat (1924)

맨 앞줄 관람석

2009년 9월 24일 워싱턴 허시혼 미술관에서 촬영

 

 

 

The Picnic (소풍) c. 1924

Oil on Canvas

2010년 1월 23일 볼티모어 미술관 미국화 갤러리에서 촬영

 

 

조지 벨로우즈 (1882-1925)는 43세의 나이에 (우리나라식으로 따지면 44세가 되던 해에) 맹장이 터져서 요절한 화가인데요, 위의 두 작품들은 1924년, 그가 죽기 전 1년전쯤에 그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위의 경기장 장면이 좀 뿌옇지요?  제가 사진을 잘 못 찍어서 그런것이 아니라 작품 자체가 흐릿한 등불 아래의 장면을 묘사하듯 노리끼리하게 아슴프레 합니다.  제가 허시혼에 여러차례 들렀는데, 볼때마다 저 작품은 좀 어딘가 노란 안개속에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합니다.

 

아래의 '소풍'역시 그가 죽기1년전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요, 그림 분위기가 매우 독특합니다.  (그림 클릭하시면 큰 이미지로 보입니다.) 저는 이 작품을 미술관에 갈때마다 본 편인데요. 그러니까 제가 조지 벨로우즈에 대해서 알기 전에도 이 작품을 알고 있었습니다.  작가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한채로 분위기가 특이한 작품으로 기억을 한 거죠. 

 

제목이 '소풍'인데요, 전체적인 풍경이나 분위기는 암울하고, 음침하고, 곧 어디서 천둥 번개가 칠것같은 불안감을 줍니다. 갑자가 돌풍이 불것같기도 하고요. 물빛도 하늘빛도 심상치가 않아요. 구름조차도 예사롭지가 않고요.

 

가운데에는 소녀가 줄넘기를 들고 서 있고요, 그 아래에서 누군가가 마치 절벽에서 올라오는듯 손을 뻗치고 있죠. 낚싯대를 드리운 남자와, 피크닉 보자기를 펼친 여자가 왼편에 있는데, 오른편에는 한 남자가 사지를 벌리고 하늘을 향해 누워있습니다.

 

이 그림 앞에서서 이태전에 아이들과 대화를 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림이 세기말 적이야. 뭐랄까...암담해... 저 줄넘기를 들고 있는 소녀 말야, 저 줄넘기 이미지는 살바도르 달리도 그린적이 있고... 영원의 상징이라고도 해. 영원은 죽음과도 통한다는 거 알아? 죽음은 영원하쟎아.  줄넘기가 그리는 원, 그 원의 끝없는 회전, 인연의 굴레를 벗어날수 없음을 상징할수도 있고.  하필 줄넘기를 들고 언덕 가장자리에 서있는건 또 뭐니. 불안해보이쟎아.  전체적으로 참 불안해보여."

 

이 그림을 보면 벨로우즈가 즐겨 그렸던 청색 색조와 흰색의 하일라이트도 여전히 보이는데요, 신비로우면서도 스산하죠?  어쩌면 이것이 그가 사랑하는 두 딸과, 아내와 가졌던 인생 최후의 소풍이었는지도 모르죠. 그는 화면 오른쪽에 자신의 주검까지 그렸던 것인지도 몰라요. 그 자신은 그걸 의식하지 못했겠죠.

 

우리는 가끔 그런 얘기 하쟎아요. 어떤 사람이 죽었을때, 그가 죽기전에 나눴던 이야기나 일화들을 떠올리면서, "죽을걸 알고 그랬나?  그런 얘기를 하더라구..." 뭐 이런 얘기 하죠.  뭐 마치 죽을 사람처럼 유언처럼 몇마디 한 것이 마지막 말이 되기도 하고요.  생명은 자신이 언제 죽을지를 안대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뿐 안다는거죠.  그래서 죽음을 예견하는 말이나 행동을 할 수도 있다고 해요 (그런 설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냥 그런 관점에서 그는 이미 그의 죽음을 예견한 그림을 남긴것이 아니었을까.... 볼티모어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다시 만났을때, 그리고 문득 그의 생몰연대와 그림의 제작 년대를 비교해보다가, 문득,  번개치듯 문득,  이런 쓸데없는 상상도 했다는 것이지요.  그런 상상을 하자, 이 그림이 품고 있던 신비로운 세기말적 느낌에 대한 해답을 얻은 기분이 드는겁니다.  그는...다가올...죽음을...그렸나봐...

 

 

2010년 1월 29일 내용 보충 RedFox

 

 

 

 

 

 

 

2009년 10월 22일 목요일

미국사실주의 화가들

 

 

 

 

 

http://americanart.textcube.com/118 미국 사실주의 계보정리 페이지에서 대략  미국 회화에서의 사실주의를  (1) '사회적 사실주의'와 (2) '지역주의적 사실주의'의 두가지 부류로 나눠서 도표를 그려본 바 있습니다.  미국 회화에서 사회적사실주의 (social realism)를 논할때, 반드시 거론되는 사람이나 단체들로는 Henri (헨라이)를 중심으로 한 "Ash Can (쓰레기통)" 화가들, "The Eight (8인회)"등이 반드시 떠오르게 되는데,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Ash Can 이나 The Eight 멤버들이 조금 차이가 있기도 하지만, 미국 사실주의 화풍을 논할때 이 두 그룹은 하나의 동일한 그룹으로 간단히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동일한 그룹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비슷한 구성원들이 비슷한 사회적 안목을 가지고 사회성 있는 작품 활동을 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Ash Can 학파와 The Eight 구성원을 중심으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화풍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겠습니다. Ashcan 혹은 Ash Can 이라고 알려진 이 미술그룹을 우리는 Ashcan School 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Robert Henri (로버트 헨라이)를 중심으로 그와 함께 그림 작업을 하거나, 혹은 그에게서 미술 수업을 들었던 사람들이 헨라이의 영향으로 '사회성'있는 그림을 그리면서 정체성을 만들어 갔기 때문입니다. Henri 의 동료나 제자중에서 애시캔 학파로 알려진 인물들로는 Henri, Glackens, Hopper, Shinn, Sloan, Luks, Bellows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당시 유럽 인상파화법의 영향을 받은 미국인상파 그림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뉴욕 뒷골목의 가난한 사람들, 소외받은 사람들의 풍경을 작품에 담아냈습니다.  (그러니까 ash can - 쓰레기통 이라는 별명이 붙게 된 것이겠지요).

 

The Eight (8인회)는 사실 딱 한번, 1908년 뉴욕의 맥베쓰 갤러리 (Macbeth Gallery)에서 여덟명이 합동 전시회를 한것에서 비롯된 명칭입니다. 이 8인회 전시회에 참여했던 작가들은

 

 1. William Glackens (1870-1938)  윌리암 글래큰스 : http://americanart.textcube.com/202

 2. Robert Henri (1865-1929) 로버트 헨라이 : http://americanart.textcube.com/197

 3. Goerge Luks (1867-1933) 조지 럭스 : http://americanart.textcube.com/278

 4. Everett Shinn (1876-1953) 이브릿 쉰 : http://americanart.textcube.com/272

 5. John French Sloan (1871-1951) 존 프렌치 슬로언 : http://americanart.textcube.com/201

 6. Arthur B. Davies (1862-1928) 아서 데이비스 http://americanart.textcube.com/279

 7. Ernest Lawson (1873-1939) 어니스트 로슨  http://americanart.textcube.com/281

 8. Maurice Prendergast (1859-1924) 모리스 프렌더개스트 : http://americanart.textcube.com/205

 

The Eight Member가 아닌 Ahscan School 멤버였던

  *. George Bellows (1882-1925) 조지 벨로우즈  http://americanart.textcube.com/198

 

이상입니다. 이들중 다수가 필라델피아 지역에서 '삽화가'로 활동한 경력이 있습니다.  특히 The Masses 라는 사회주의 사상이 강한 잡지의 편집이나 삽화에 관여한 화가들이 여럿 있습니다.  위에 올린 이미지는 John French Sloan 이 1914년 6월호 The Masses 표지화로 그린 작품입니다.  1914년 4월 20일에 미국 콜로라도주의 광산에서 광부들의 파업이 있었습니다. '자선가'로 널리 알려진 록펠러 (Rockefeller) 집안이 운영하던 광산이었습니다. 콜로라도 국방수비대가 이들을 공격하여 어린이 11명이 포함된 20여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이 잡지는 이 사건을 표지로 실은 것입니다.  표지 그림이 생경하고 과격해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현실'은 더욱 처참하고 과격했겠지요.  (미국 구경을 하고 돌아간 내 조카아이들의 상상속의 미국사 속에  이런 모습은 없을 것입니다. 록펠러는 하늘이 보낸 천사는 아니었겠지요).

 

물론 미국의 사회-사실주의 작가들이 모두 이런 그림을 그렸다고 상상하시면 안됩니다.  이 표지화 작업을 한 존 슬로언 역시 '예술지상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사회성이 담긴 그림을 그리되, 사회적인 이념이 '예술'보다 우선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니지요. 그래서 과격한 '사회주의'라는 이념으로부터는 어느정도 거리를 유지한 편입니다. 미국의 대부분의 사회-사실주의 화가들이 이런 식으로 '이데올로기'와는 일정 거리를 유지한 가운데 회화 작업에 몰두했다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들 여덟명의 미술가들중에서 슬로언에 관심이 많지만, 일단 이들의 '대장'격인 Robert Henri 부터 간단히 소개하고 그 뒤를 이을 생각입니다.  헨라이는 작품보다는 그가 이끌었던 애시캔, 8인회 때문에 미국 미술사에 자신의 이름 '석자 (?)'를 박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Henri 는 '헨라이'라고 발음합니다.  Hopper 관련 책에서 읽었는데 그가 자기의 이름을 반드시 '헨라이'로 발음해줄것을 극구 강조했다는 일화가 나옵니다. 그러니 그의 희망에 따라서 '헨라이'로 소개합니다.  (제 글의 독자들이 막 - 무척 똑똑해지고 교양이 업그레이드 되는 소리가 들립니다 헤헤헤.  미술 관련 글중에 헨라이 이름을 제대로 표기한 한글 페이지 찾아보기가 힘드실걸요. 헤헤헤)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2층, 미국 사실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걸어놓은 곳이다.

왼쪽 가까이에서부터: Henri, Kent, Luks 의 그림들이 차례대로 보이고

오른쪽 가까이에서부터: Everett Shinn, William Glackens 가 보인다

저 너머에 Benton 의 그림이 있다...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2009년 10월 1일 목요일

Andrew Wyeth: 미술가 집안 삼대(三代) 이야기

아버지 NC 와이어드

 

 

한국인들에게 크리스티나의 세상이라는 제목의 그림으로 알려진 미국의 사실주의계열 현대화가 앤드루 와이어드는 펜실베니아의 채즈포드 (Chadds Ford)라는 농촌 마을에서 23녀중의 막내로 태어났다. 앤드루의 아버지는 미국에서 이름난 화가였다. 본명은 Newell Convers Wyeth.  그는 짧게 NC Wyeth (October 22, 1882 – October 19, 1945)로 알려져 있다. 독일과 스위스 계 후예의 이민자의 아들로 미국에서 자라난 그는 일찌감치 미국 화단에서 이야기책의 삽화가로 자리를 잡았다. 매사추세츠주의 케임브리지 (하버드 대학이 있는 도시)에서 그 고장 처녀와 결혼한 그는 가족을 이끌고 펜실베니아의 농촌마을 채즈포드 (Chadds Ford)에 집과 스튜디오를 짓고 정착하게 되는데 그 집에서 막내아들 앤드루 와이어드 (July 12, 1917 – January 16, 2009)는 태어난다.

 

다섯 아이들의 아버지로서, 그리고 수백 권의 책의 삽화를 그린 미술가로서 그는 대체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삽화가로서 확고한 자리를 잡았고, 자녀들에 대한 가장으로서의 그의 사랑은 헌신적이었다고 할 만하다. 아내는 이 확고한 가장에게 순종적이었고, 자녀들은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듯 재능 있는 청년들로 자라났다. 그의 세 딸들은 미술이나 음악분야에서 전문가 급으로 성장했고, 그의 장남은 듀폰사의 엔지니어로 취업했는데, 오늘날 우리들이 사 마시는 플라스틱 음료수병을 처음 고안해낸 사람이 나다니엘 와이어드(Nathaniel Wyeth) 바로 듀폰사에 취업한 장남이라고 한다.

 

아버지 NC 와이어드가 얼마나 성공적인 삽화가로 자리를 잡았는가 하면 1920, 그의 나이 38세 당시에 그의 채즈포드 집에는 요리사, 가정부, 집사 등이 상주했으며, 세탁물은 외부 세탁소로 모두 보내버렸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집을 찾던 손님 중에는 위대한 개츠비 (The Great Gatsby)’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미국 소설가 스코트 피츠제랄드도 있었다. NC 와이어드는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써로우 (Henry David Thoreau), 초절주의 미국철학자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등과도 교유가 있었으며 이들의 글을 열심히 읽어댔다고 한다.

 

아버지 NC는 삽화가로서 부와 명예를 얻고 가족들에게 풍요로운 삶을 제공할 수 있었으나, 개인적으로는 우울감에 시달린 것으로 보인다.  이는 Norman Rockwell 이나 그 밖의, ‘삽화가로서 이름을 날린 화가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일수 있는데, ‘삽화 (illustration)’가 순수 미술활동에서 한 발짝 벗어난 것이라는 생각에 기인한 것이다. 삽화작업이 순수미술인가 아닌가 하는 논의를 내가 따로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나 윈슬로 호머(Winslow Homer), 롸크웰 켄트(Rockwell Kent) 등 미국 미술사를 장식하는 빛나는 화가들의 이력 중에 삽화가로서의 이력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들은 대개 호구지책으로 어쩔 수 없이 삽화작업을 했으며, 이 작업에 염증을 내고 벗어나고 싶어했었다.  이는 마치 순수 문학을 하고 싶어하는 작가 지망생이 혹은 무명 작가가 호구지책으로 잡지사에서 편집 일을 하는 것과 비슷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지 NC는 삽화가로서의 성취감과 순수예술가가 되지 못했다는 우울감 사이에서 혼란스런 말년을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다섯 자녀에게 자상하기 그지없는 아버지였으며,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직접 자녀들의 미술 지도를 하기도 했으며, 그리고 튼튼한 성채와 같은 황제이기도 했다. 화를 낼 때 그는 호랑이처럼 무서웠으며, 육 척도 넘는 덩치와 힘의 소유자였던 그는 누군가가 맘에 안 드는 행동을 할 경우 그를 번쩍 집어 던질 정도로 사납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1945, 채즈포드에서 손자와 함께 자동차로 기찻길을 건너다가 달려오는 기차를 피하지 못해서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고 하는데, 바로 근처에서 이 광경을 봐야 했던 마을사람은 그의 마지막 순간을 기억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세 살짜리 손자아이에게 저 들판을 봐라. 너는 다시는 저런 광경을 보지 못 할 거야  아버지 NC는 그 날, 메인주에 가 있던 막내아들 Andrew 부부가 돌아올 것에 대비하여,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녀석을 데리고, 막내아들 부부가 살던 신혼 집을 청소해주러 가던 중이었다고 한다.

 

아들, 앤드루 와이어드

 

삽화가 NC의 막내아들 앤드루는 우리나라에서 삼일 운동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17년에 펜실베니아의 평화로운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헌신적인 부모와 다정한 형제들 속에서 동화같이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아버지 NC는 가을철 할로윈데이 (Halloween)에 자녀들이 동화 속 주인공으로 변장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겨울 크리스마스가 되면 직접 산타 할아버지로 변장을 하고 나타나 자녀들에게 꿈과 마술과 환상의 세계를 심어주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꼬마 앤디는 귀염둥이 요정처럼 자유롭게, 발랄하게 성장했을 것이다. 막내아들의 신체적으로 연약하다는 것을 파악한 아버지 NC는 그를 공립학교에 보내는 대신에 집에서 가정교사로부터 수업을 받게 했고, 그 나머지 시간에 앤드루는 혼자 마을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앤드루가 15세가 되었을 때, 그는 정식으로 아버지 NC의 스튜디오에서 미술 수업을 시작한다. 그렇다고 아버지 NC가 그에게 미술의 기술을 전수한 것 같지는 않고, 기본적인 뎃생법, 빛과 사물과의 관계를 자상하게 안내해 준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의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하는 동안 그의 삽화 습작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팔려나가기도 한다. 앤드루가 17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의 스튜디오에서 벗어난 그는 모 회사로부터 책의 삽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게 된다. 삽화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그에게도 찾아 온 것이다. 이 때, 아버지가 앤드루를 설득한다, “앤디야 내가 너를 돌봐줄 테니 그냥 그림만 그려라.”  앤디가 20세가 되어 당시 17세였던 처녀 베씨 (Betsy)를 만나 청혼을 했을 때에도 아버지 NC는 극구 결혼에 반대의사를 표했는데, 막내 아들이 가족을 부양하느라 예술가의 길을 못 가게 될까 봐 근심하였다는 것이다.

 

아버지 NC는 당시 미국사회에 풍미하던, 잭슨 폴락이나 로스코, 윌리엄 드 쿠닝등이 선보이던 추상 표현주의 (Abstract Expressionism)의 물결을 지켜보면서 사실주의적 화법으로서는 성공하기 힘들다고 예측했고, 그래서 아들이 이 새로운 물결을 수용해주길 바랬다.  하지만 앤드루는 윈슬로 호머나 뒤러와 같은 사실주의 화법의 작가들에 매료되어 있었고, 시대에 뒤떨어져 보이는 템페라화에 집중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화풍이 마음에 안 들었을지도 모르고, 아들의 앞날이 근심스러웠을 것이다.  한편 앤드루는 아버지의 시선이 부담스러웠고, 아버지가 인정해주지 않는 그의 미술세계에 대하여 불안감과 분노심과 같은 복합적인 정서를 키웠을 것이다. 이런 것을 우리는 애증의 관계라고 간단하게 표현하기도 할 것이다.

 

1945년 아버지 NC가 펜실베이나 자택 앞 기찻길에서 사고로 사망했을 때, 앤드루의 상심은 컸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신화 속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그러하듯, 혹은 대부분의 아버지와 이들의 관계가 그러하듯, 아버지를 잃고 나서야 아들은 진정한 성인으로 탈바꿈을 하게 된다. 지켜보던 시선혹은 숨은 감독관으로 존재하던 아버지로부터 벗어났을 때, 앤드루는 아버지의 상실이 가져온 생의 비극성과 성찰을 자유롭게그의 화폭에 옮길 수 있었다. 그는 사랑하는, 그러나 한편 부담스럽고 무서운 아버지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고, 그 자유 속에서 아버지를 재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뉴욕화단이 추상표현주의로 들끓고 있을 때, 앤드루는 그가 즐겨 산책하는 마을의 이웃사람들, 그 이웃사람들의 낡은 침실, 낡은 부엌, 그들의 풍경을 관찰하며 살았고, 그들의 친구가 되었고, 그리고 그들을 그렸다. 앤드루의 화집에는 그가 친구로 교류했던 독일계 이민자 가족, 혹은 오두막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흑인가족들이 많이 눈에 띈다. 어찌 보면 그와 동시대를 살던 화가들이 한편에서는 추상표현주의라는 미술 놀음에 열중하고 있고, 한편에서는 사회적 사실주의를 기치로 사회현상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을 때, 이들과 동떨어져서, 역시 동떨어진 채 살아가는 그의 이웃 사람들을 들여다보는 일에 열중해 있었던 것도 같다. 그는 세상 돌아가는 것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어떤 대상, 혹은 풍경에만 몰입하여 이를 그림에 담아내는 일에만 몰두한 것 같은데, 그의 극히 개인주의적인 이런 그림세계를 그의 화집들을 펼쳐놓고 휘리릭 넘기다 보면 재미있는 현상이 발견된다.

 

앤드루 와이어드 자신도 고백한바 있거니와, 그는 세상을 잘 모른다고 했다. 오로지 그가 아는 것, 그리고 그가 그림을 그린 대상은 펜실베니아 그의 집 주변, 그가 여름에 가서 지내던 메인 주의 집 주변, 그리고 이웃 사람들로 한정되어 있다. 그는 시사문제에 눈길을 돌린 적도 없고, 그의 화풍에서 벗어난 적도 없다. 그는 고집스럽게 극 사실적 세필로 그 주변의 풍경을 그려나갔다. 그런데 그의 그림의 주인공들은, 대개 소외계층의 대중들이다. 힘겹게 살아가는 독일 이민자 농부, 농부의 아낙, 한쪽 팔을 잃은 흑인 친구, 그가 자주 드나들던 이웃 흑인 가족들, 그가 15년간 은밀히 그려낸 헬가 역시 독일계 이민자의 아낙으로 남의 집 일을 해주던 여인이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친숙한 크리스티나 올슨, ‘크리스티아의 세상의 주인공 역시 그렇게 잊혀진 대중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목청 높여 소외계층의 사회적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 할 줄은 몰랐지만, 평범하게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삶의 숭고함을 전달하는 데는 성공했다.

 

바로 이런 점을 보면 예술의 힘이 무엇인가 어렴풋하게나마 실마리를 잡아 가게 된다. 산이 있을 때, 그 산의 정상까지 올라가는 길은 무수하다. 그 길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고, 외 따른 길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연결된 길을 따라 이리저리 노선을 바꾸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오로지 한 길로만 행군하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중턱에서 그만 내려오기도 한다.  아무튼 산에는 정상이 있고, 사람들은 각기 다른 길을 통해 그 정상에 오르게 된다.

 

하나의 예술 작품이, 혹은 어떤 화가의 작품이 관객의 공감을 얻게 될 때, 혹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게 될 때 그 감동이나 공감의 요소는 무엇일까? 그 그림이 추상화이건, 구상화이건, 사회성 높은 그림이건 혹은 선전물 (프로파겐다)이건간에 그것이 우리를 감동시키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이 있다.  나는 그 요소가 대상에 대한 열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화풍이 어떠하건, 작품에서 열정이 느껴질 때, 나는 감동하게 되는 것 같다. 대상의 본질을 깊이, 깊이 들여다보고 사색한 흔적이 보일 때, 그런 작품 앞에서 나는 감동하게 된다. 그것이 표현주의이건, 선전물 프로파갠다이건, 사실주의적이건 뭐건간에.  (내게 이런 시각이 있기 때문에 내가 소위 팝 아트라고 일컬어지는 일련의 작품들에 대해서 냉정하거나 무관심한 태도를 견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이런 시각은 팝 아트에 대해서 좀더 진지하게 공부한 후에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알면 사랑하게 되니까.)  앤드루 와이어드의 풍경 속에는, 그의 인물화 속에는 그가 친숙하게 잘 알고 있는 사람, 대상에 대한 깊은 성찰이 들어있다.  풍경 속의 사과나무 한 그루를 그릴 때조차 그는 사과를 일일이 세어보고 그렸을 정도로 대상에 대한 관찰이 확고 했었다. 그의, 대상에 대한 진지함은 인류애와도 닿아있었다.  그는 친한 이웃 흑인이 죽었을 때, 장례비가 없어서 쩔쩔맬 때 기꺼이 장례비를 제공하기도 했고, 부성애가 강했던 아버지가 싫어하는 줄 알면서도 이웃 흑인친구들과 어울려 시간을 보냈다. 한 개인으로서 그는 세상과 무관하게 살았던 것처럼, 역시나 인종문제나 사회적 차별의 문제와도 무관하게 사람들과 어울렸던 것이다.

 

손자: Jamie Wyeth

 

앤드루 와이어드와 그의 아내 베씨 사이에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 니콜라스는 미술 중개인이고, 둘째 아들 Jamie 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대를 이어받아 화가로 성장했다. 온라인 자료를 찾아보면 그에 대한 소개가 나와있기도 한데, 삽화가였던 NC나 사실주의적 화풍을 고집한 앤드루에 비해서 3대 제이미의 미술 세계는 특별해 보이지는 않는다. 뭐 대대로 명장이 나올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미국이 자랑할만한 독보적인 화가 집안인 와이어드 집안의 3대가 화가라는 것은 특별한 사항이긴 하지만, 3대 제이미는 아직까지는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이룩한 독보적 세계를 이룩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물론 1946년생인 그가 앞으로 독창적인 미술을 펼쳐갈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글쎄, 선대의 그늘이 하도 커서……

 

 

Andrew Wyeth 관련 페이지들은 이곳에:

http://americanart.textcube.com/category/Andrew%20Wyeth

 

관련자료:

First Impressions: Andrew Wyeth, by Richard Meryman (1991)

Andrew Wyeth: Autobiography, Introduced by Thomas Hoving (1995)

 

앤드루 와이어드가 즐겨 사용했던 템페라화, 드라이터치 기법 페이지가 이어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