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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 3일 수요일

Social Realism (4) : Jacob Lawrence

 

미국의 Social Realism 화가를 이야기 하면서 Jacob Lawrence (http://americanart.textcube.com/search/?search=Jacob+Lawrence) 를 빼놓고 지나갈수는 없지요.  전에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정리하고 지나간적이 있지만, Social Realism 얘기를 하자니 역시 그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John Brown Series (1941)

 

http://americanart.textcube.com/176  하퍼스 페리 (Harpers Ferry)는  백인으로서 흑인 노예 해방을 위해 무력 봉기를 했던 존 브라운 (John Brown 1800-1859))이 정부군과 대치하다 잡힌 격전지이기도 하고,  이후의 남북 전쟁에서도 격전지였습니다.  포토맥강과 셰난도어 강이 이곳에서 만나면서 교통의 중심지였기 때문이지요. http://americanart.textcube.com/176  이 페이지에 하퍼스 페리를 방문했던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요, 남북전쟁 (Civil War)의 도화선이 될만한 여러가지 정황중에 한가지가 존 브라운 시건이었습니다.  백인이면서 신앙심이 강했던 존 브라운은, 사업에 여러번 실패하면서 우울증을 겪기도 하는데, 그러다가 기독교 신앙심을 바탕으로 흑인 노예 해방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는, 좀 과격했다고 보이는데요,  미국의 고등학교 미국사 과정에서도 존 브라운에 대한 언급을 하는데,  그를 노예 해방의 선구적 영웅으로 스케치하기 보다는 '기인'으로 평가를 하는 편입니다.  정부군과 대치를 했기 때문인지, 정말 기인이었기 때문인지는 알길이 없는데요.

 

존 브라운의 정체성이 어떠하건 흑인들이나 흑인 인권 운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로서는 그가 흑인 노예 해방에 혁혁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할 만 하지요. (월든, 시민불복종의 저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역시 존 브라운 편에  섰던 지식인이었습니다.)   흑인 미술가 제이콥 로렌스 (1917-2000)에게도 존 브라운은 영웅이었을겁니다.  제이콥 로렌스는 그의 남부 흑인 이민사 (http://americanart.textcube.com/79 ) 시리즈 60편 작업을 하는 것과 병행하여 1941년에 존 브라운의 일대기를 22장의 구아슈화로 담아냅니다. (http://americanart.textcube.com/84 구아슈화에 대한 설명은 링크된 페이지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역시 남부 흑인 이민사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이 스물두장의 그림에도 차례대로 그가 직접 적은 그림 설명 글이 적혀 있습니다. 구아슈화는 그 속성상 장기 보관이 힘든데, 그림 상태가 악화되자 제이콥 로렌스는 이를 판화로 다시 제작해 냅니다. 그래서 그 판화 제작 작업이 1974-1977 년 사이에 진행되었습니다.  아래의 몇장의 판화 작품은 그렇게 탄생된 것인데요, 제가  2009년 10월 31일에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본 것 들 입니다.

 

2009년 10월 31일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촬영

 

 

 

John Brown remained a full winter in Canada, drilling Negroes for his coming raid on Harpers Ferry, 1974-77, Screenprint

존 브라운은 겨울 내내 캐나다에 머무르며 하퍼스 페리 습격을 위하여 흑인들을 훈련시켰다.

 

2009년 10월 31일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촬영

 

 

 

 

 

 

 

 

In spite of a price on his head, John Brown in 1859, liberated 12 Negroes from Missiouri plantations, 1974-77, Screenprint

존 브라운의 목에 현상금이 달려 있었지만,

그는 1859년에 미조리주의 농장에 있던 열두명의 흑인들을 해방시켰다.

 

 

 

 

 

 

 

 

July 3, 1859, John Brown stocked an old barn with guns and ammunitions. 

He was ready to strike his first blow at slavery.

1974-77 Screenprint

 

1859년 7월 3일, 존 브라운은 어느 창고를 총과 탄약으로 가득 채웠다.

그는 이제 노예제도에 대하여 첫 일격을 가할 만만의 준비를 갖췄다.

 

위의 작품과 관련,  하퍼스 페리에서 바로 그 총과 탄약을 가득 채웠던 창고를 본 일이 있어서 사진을 찾아봤습니다. 사진 오른쪽에 서 있는 것이 존 브라운 기념탑이고요, 사진 왼편 구석, 언덕아래에 서 있는 작은 벽돌 건물, 그곳이 위의 그림에 나오는 무기창고로 쓰인 건물입니다. (당시의 건물은 아니고 당시의 설계대로 다시 지은 것이지요.)

 

 

 

2009년 11월 15일 하퍼스 페리에서 촬영

 

 

 

 

제가 대충 그려본 미국 사실주의 화단에서 Social Realism 화가로 Jacob Lawrence 를 포함시킨 이유를 제글의 독자들은 이해하실수 있을 것입니다.  제이콥 로렌스의 '존 브라운 연작 시리즈 22편'이나 혹은 '남부 흑인 이주사 60편'에서 무엇을 발견 할수 있나요? 한번 생각나는대로 열거해 볼까요?

 1. 사회의 기저를 이루는 민초들의 삶의 모습을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관찰하거나 사색했습니다.

 2. 민초들의 삶의 풍경을 화폭에 옮겼습니다.

 3. 노예 해방이나 약자 해방의 주제를 담았습니다.

 4. 사회 정의에 대한 주제가 너무나 분명히 드러나지요.

 5. 메시지나 이슈가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대략 이러하지요?  이러한 성향들을 미국의 Social Realism 의 면면으로 이해하면 될듯 합니다. 미국의 Social Realist 라고 해도 화가마다 개성이 다르므로 그림에서 전하는 메시지나 분위기는 제각각일수 있으므로 위에 열거된 것이 '바로 미국의 사회주의 사실주의이다'라고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고요, 이러한 성격들이 Social Realism 의 무수한 단면들에 포함이 된다는 것이지요.

 

참고로, Horace Pippin 역시 흑인 노예해방 전쟁을 하다가 생포되어 재판을 받고 사형당한 존 브라운에 대한 작품을 여러편 그린바 있습니다. 존 브라운의 일대기 혹은 그가 사형장으로 향하던 장면은 꽤나 드라마틱했으므로 여러 화가들이 걸작들을 남겼습니다.  (존 브라운 관련 그림들이나 작품들은, 별도의 페이지를 만드는 것이 나을것 같아서 다음으로 미루겠습니다.)

 

 

 

 

 

 

 

 

Chess Players (1954)

 

 

Chess Players  (체스 두는 사람들) 1954

Tempera on Masonite

2010년 1월 23일 볼티모어 미술관에서 촬영

 

 

 

이 작품을 발견했을때,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Horace Pippin (1888-1946)( http://americanart.textcube.com/314) 의 Domino Players 라는 작품이었습니다. 제이콥 로렌스 (1917-2000)는 호레이스 피핀과는 20년쯤 나이 차이가 나지만, 이들은 둘 다 흑인이었고, 이들이 미국 화단에 등장한 것은 거의 비슷한 시기였습니다.  피핀은 정규 교육도 못받고 혼자 취미로 그림을 그리면서 나이를 먹었던 사람이고, 로렌스는 가난했지만 정규 미술 교육을 받았고, 일찌감치 미술계의 총아로 떠올랐지요. 피핀과 로렌스가 직접 교류를 한 적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훗날 제이콥 로렌스가 '나 역시 피핀의 영향을 받았다'는 언급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서로 직접 만나거나 교감을 나눈적은 없다해도, 비슷한시기에 화단에 이름이 알려진 흑인 화가들이므로 그 자체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제가 어디 큰 국제 행사에 갔을때, 그 행사장에서 나와 비슷한 한국인 학자를 보게되면 설령 서로 말 한마디 안나눈다해도 관심을 갖고 보게 되거든요.)

 

로렌스의 체스 두는 사람들 그림을 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자동적으로 피핀의 도미노 게임하는 사람들 그림을 떠올린 것은, 어쩌면 '이들이 모두 흑인이다'라는 것에 촛점을 맞춘 나 자신이 사물을 그런 식으로 분류를 했기 때문일수도 있습니다. 왜 꼭 흑인들이라는 이유로 관계를 형성시키는거냐구?  (누가 이렇게 물으면 할 말 없어지는거죠....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연결을 지어버리므로.)

 

그런데요, 아무튼, 로렌스가 이 피핀의 작품을 알았건 몰랐건, 로렌스가 피핀한테 관심이 있었건 없었건, 제 눈에 이 두작품은 화풍의 현격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는것 처럼 보인다는 것이지요. 체스그린 속의 알록달록한 과일같은것, 그것이 도미노 그림속에 무엇과 연결되나요?  (한번 찾아 보세요).  심심할때 그림 이리저리 보면 - 없는 이야기까지 지어내게 된다니까요... ㅎㅎㅎ.

 

 

 

Domino Player (도미노 게임하는 사람들) 1943

Oil on Composition Board

2009년 9월 워싱턴 필립스 콜렉션에서 촬영

 

 

 

 

 

 

도서관 (1960)

 

 

 

 

Library (도서관) 1960

Tempera on Fiberboard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국립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이 도서관 그림. 정말, 딱, 도서관 풍경이죠?  제가 이 그림을 어디서 본 것 같아요.  기억해낼수 없지만,  어릴때 초등학교나 중학교 혹은 고등학교 미술 교과서 어디선가에서 이 그림을 한번 본것 같아요.  (혹시 다른 비슷한 그림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저로서는 이 그림을 '미술교과서'에서 봤다는 기분이 자꾸만 드는겁니다.  따뜻하고, 그리고 행복한 풍경입니다.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수십년간 어린이들에게 그림 안내를 해 온 Judith 라는 도슨트 할머니가 있는데 그 할머니의 설명으로는 흑인 어린이들이 이 그림을 보고 참 좋아한대요.  아, 그 쥬디스 할머니는 제이콥 로렌스와 그 부인을 (부인도 화가였죠)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해 본 적도 있다고 자랑을 하시더라구요.  제이콥 로렌스라는 사람이 신사이고 부드럽고 참 좋았대요.

 

 

 

제가 미국의 Social Realism  화가로 벤 샨 (Ben Shahn)을 소개하는 페이지 (http://americanart.textcube.com/300)에서 제일 먼저 소개한 그림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시나요? 

 

Book Shop: Hebrew Books, Holy Day Books (책방) 1953

Tempera on Panel

2009년 10월 31일 디트로이트 미술관 (Ditroit Institute of Art Museum)에서 촬영

 

바로 이 작품이었지요. 책방에서 애를 안고 나오는 유태인 여인. 벤샨 자신이 유태인이었고 유태인 이민자로서 빈민의 세월을 거쳤고요,  제이콥 로렌스 역시 흑인, 싱글 맘의 아이, 도시 극빈층의 아이로 성장을 했는데요. 벤 샨이나 제이콥 로렌스를 별처럼 당당하게 빛나게 해 준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이들은 가난한 가운데서도 '공부'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가난한 사람이 그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서 가장 효과적인 무기가 뭘까요?  공부하는거죠. 책을 읽고, 글을 읽고, 사리 분별을 할 줄 알고, 사회가 나에게 부당하게 대할때 이에 항거할줄 알아야 하는거죠.  문맹에서 벗어나서 글을 읽을수 있을때, 이런 일들이 좀더 쉬워지지요 (물론 글 많이 읽는다고 모두 행동력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옛날에 가진자들이 못가진자를 압제하는 수단으로 '그들에게 글을 가르치지 말라'고 했었쟎아요.  미국 백인들은 흑인 노예들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았으며, 마음 착한, 선량한 백인이 흑인노예에게 글을 가르치면 그 백인조차 탄압 대상이 되었습니다. 지식이 무기죠... 지식이 무기죠... 한국인들은 그걸 너무나 잘 알기에, 오늘날과 같은 무서운 대학입시 경쟁이 일어나는건데, 그 과열된 경쟁 체제 속에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처지가 매우 딱하고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러나 아무튼 우리는 교육의 수레바퀴를 굴려 나가야 하는거죠. 결국 교육이 무기이니까... (그 교육을 어떻게 이상적으로 잘 굴러가게 할것인가를 우리는 고민해야 하겠지만, 교육에 대한 열의는 참...대단하다고 할 수 있지요.  우리는 교육이 얼마나 무서운 힘을 가진 것인지 너무나 잘 아는 사람들이라는거죠).

 

제이콥 로렌스의 도서관 그림 속에는,  흑인들도 좀더 '공부'하고 문맹을 벗어나고 지식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있다고 저는 생각하는 편입니다.  제이콥 로렌스의 '도서관' 그림을 본 흑인 어린이들은 기분이 좋아져서, 유명한 흑인 미술가가 그린 그림을 보고 기분이 좋아져서, 도서관으로 향하게 될 지도 모르지요.

 

대충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미국의 Social Realism 이란 무엇인지, 어떤 그림들이 있는지, 어떤 화가들이 있는지 대략 가닥이 잡히는것 같습니다.  다음 페이지에서 Social Realism 에 대한 간단한 정리를 하기로 하고, 제이콥 로렌스 이야기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2010년 2월 3일 RedFox.

 

 

 

 

 

2010년 1월 29일 금요일

Social Realism (3): Ben Shahn

 

배움을 찬양함

 

 

Book Shop: Hebrew Books, Holy Day Books (책방) 1953

Tempera on Panel

2009년 10월 31일 디트로이트 미술관 (Ditroit Institute of Art Museum)에서 촬영

 

 

 

 

배움을 찬양함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 "어머니"에서


 

가장 단순한 것을 배워라! 자기의
시대가 도래한 사람들에게는
결코 너무 늦은 것이란 없다!
알파벳을 배워라,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못하지만
우선 그것을 배워라! 꺼릴 것 없다!
시작해라! 당신은 모든 것을 알아야만 한다!
당신이 앞장을 서야만 한다.


 

배워라, 난민 수용소에 있는 남자여!
배워라, 감옥에 갇힌 사나이여!
배워라, 부엌에서 일하는 부인이여!
배워라, 나이 육십이 넘은 사람들이여!
학교를 찾아가라, 집없는 자여!
지식을 얻어라, 추위에 떠는 자여!
굶주린 자여, 책을 손에 들어라. 책은 하나의 무기다.
당신이 앞장을 서야만 한다.


 

묻기를 서슴지 말아라, 친구여!
아무것도 믿지 말고
스스로 조사해 보아라!
당신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은
당신이 모르는 것이다.
계산서를 확인해 보아라!
당신이 그 돈을 내야만 한다.
모든 항목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물어보아라, 그것이 어떻게 여기에 끼어들게 되었나?
당신이 앞장을 서야만 한다.
(1931作)

 

위의 그림은 1951년에 그려진 것이고, 브레히트의 글은 1931년작이지만, 어쩐지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처음 이 그림을 만났을때부터 - 저것은, 브레히트의 시와 같구나!  이런 상념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저 그림 이야기를 할때 브레히트의 시를 인용해야지,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림은, 제목을 안 읽고 그림만 볼경우 Books라는 간판 덕분에 책방 풍경임을 알수 있습니다. 그 책방 문을 열어 젖히고, 한 키가 커보이는 여인이 아이를 왼쪽 가슴에 안고, 숄을 두른채 걸어 나오고 있습니다. 어쩐지 그 여인의 손이 굉장히 커 보입니다. 특히 발에 비교해볼때, 손이 기이하게 커보이지요.  아주 커다란 손입니다. 그리고 쇼윈도우에 적힌 글귀가 아마도 히브리언어로 적힌 것이고 그것을 옮기면, 'Hebrew Books, Holy Day Books' 결국 유태인들의 히브리 경전들을 주로 취급하는 종교서적 책방인듯 합니다.  유태인들에게 그들의 '경'은 삶의 가장 기본이 되는 얼개이지요.  유태인들이 수천년간 '나라'도 없이 이리저리 떠돌면서도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인재들을 배출할수 있었던 이유는, 어딜가건 우선 '학교'부터 세우라는 탈무드의 가름침 덕분이라는 이야기를 어느 책에서 본 것 같습니다. 학교, 교육이 우선되는 종족은 살아 남지요.  한국이 일제 식민역사와 참혹한 한국전의 아픈 역사를 딛고 수위안에 드는 경제국가로 성장한 배경도, 한국의 '교육열'을 빼놓고 생각할수는 없을 것입니다. (얼마나 교육열이 높으면, 대학입시 경쟁이 그토록 치열하겠습니까... 교육이 파행으로 흐르는 면도 부정할수 없지만, 이것이, 무엇보다도 교육에 투자하는 것만이 생존의 길이라는 본능과도 같은 원칙 때문이겠지요.)

 

 

 

1951년이면, 1945년에 2차 대전이 끝났고,  2차 대전 전후로 유럽에서 나찌의 홀로코스트를 피해 뉴욕에 온 유태인 이민자들이 뉴욕에서 발을 붙이고 살기 위해 아둥바둥 할 때이겠지요.  1951년이면 한국에서는 625 전쟁이 (제가 어릴땐 '육이오'라고 불렀는데 요즘은 '한국전쟁'이란 이름을 많이 쓰는군요) 진행되고 있던 때 입니다.  한반도의 사람들이 전쟁의 고통속을 헤멜때, 뉴욕 거리의 유태인들도 척박한 남의 나라 땅에서 생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을 것입니다.

 

브레히트가 위의 글을 발표한 1931년은 미국이 경제 대공황을 겪고 있던 시기이고,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경제난이 휩쓸던 시기이기도 하지요. 1931년의 경제 공황과 1951년의 뉴욕의 유태인들이 오버랩 되는 이유는 시기가 다르지만 그 시절을 살아간 사람들의 곤궁한 삶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브레히트도, 벤 샨도 '책'의 '교육'의 '자발적인 공부'를  삶을 살아가는 어떤 해법으로 글에서, 그림에서 제안을 합니다.

 

 

 

오늘, 학교에서 어떤분의 인생상담을 잠시 하게 되었는데요.  가끔 저에게 '지금 공부해도 될런지, 어떤 판단을 하면 좋을지' 두루두루 묻고 싶어하는 분들이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다 가기도 하는데요. 그래서 그분과, 내가 남들보다 늦게 공부를 진행한 일화라던가, 앞으로의 전망이라던가 그런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묻기도 하다가 문득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제가요, 어느날 돌아보니까, 40넘게 살아오면서, 내가 무엇을 이뤘나 생각을 곰곰해보니까, 내 손에 쥔 것이라고는 알토란 같은 내 가족, 무조건 나를 지지해주는 내 가족하고...그리고...죽어서 관뚜껑 덮을때까지 나를 따라다닐 내 학위이더군요. 애인은 나를 버려도, 내 학위는 나를 버리지 않아요. 나는 재산을 잃을지라도 내 지식을 잃지는 않아요.  남들이 나를 인정해주건 말건, 장농속에서 썩히건 말건, 아무튼 내가 공부한 학위는 내가 죽을때 관뚜껑속에 나하고 같이 묻힐거라는거죠."

 

결국, 내게 남겨진 것이라고는, 내가 이 지구에 놀러왔다가, 공부한것. 그것이더라구요.  물론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서 '친구'가 남았더라, '애인'이 남았더라, '재산'이 남았더라, '한권의 시집'이 남았더라, 명품 백이 남았더라,  '판검사 자식이 남았더라'  하고 다양하게 자신의 것을 살필수가 있겠는데, 내가 내것을 주판알 튕겨서 계산해보니 남은것이 '내가 공부한것, 내가 배운것'이더란 것이지요. 지금 당장 배를 곯고, 지금 당장 직장을 잃는다해도, 내가 깡으로 버틸수있는 기반이 뭔가 생각해보면, 나는 내 지식을 무기로 다시 전쟁터로 나갈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아, 내가 받은 교육이 나의 삶의 무기라는 결론에 이른 것이지요. 물론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중요한 무기가 있을수 있지요. 나로서는 나의 지식이 내 무기이지요. 그것이 박사학위인가, 석사학위인가, 학사학위인가, 고등학교 졸업장인가, 그런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고요, 내가 지구상에서 똑똑하게, 지혜롭게 살아갈 능력을 키워주는것 그것이 교육의 힘이거든요.  내가 핍박받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핍박받는 타인을 돕기위해서라도 나는 영수증을 들여다보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잘못 씌어진 고지서를 보고 따질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브레히트의 시, 제가 종알종알 읊는것중에 또한가지가 있어요 (사실 많지요...)

 

 

임시 야간 숙소

           베르톨트 브레히트


듣건대, 뉴욕
26번가와 브로드웨이의 교차로 한 귀퉁이에
겨울철이면 저녁마다 한 남자가 서서
모여드는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행인들로부터 동냥을 받아 임시야간숙소를 마련해 준다고 한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야간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책을 읽는 친구여, 그 책을 내려 놓지 마라.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야간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1931년 作)

 

 

사실, 이 시에서 "책을 읽는 친구여, 그 책을 내려 놓지 마라"는 역설인지 아닌지 조금 헛갈리는 구석이 있습니다.  행동력을 상실한채 '글이나 읽는' 것을 비판하는 것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갈림길에서도 '책'을 읽으라는 것인지. 개인차원의 구제행위가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된다고 역설하는 싯귀는 오히려, 그럼에도 그것만이 유일한 해법임을 드러내고 마는데요.  책을 던지고 행동하라는 말씀일까요 아니면 책을 읽으라는 말씀일까요?  아무튼, 저로서는 그렇습니다. 우리가 책을 읽건, 책을 덮건, 우리 양심의 소리에 따라서 행동을 하건 행동을 유보하고 사색을 하건간에 '비판정신'은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비판'은 '무관심'보다는 나은 것이지요.  빈민구제를 몸소 실천하는 사람이나, 혹은 '그렇게 해봤자 소용없지'하고 비판하는 사람이나 이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또다른 사람들이 존재하는데요 -- 아예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지요.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지를 거부하거나...마찬가지입니다만. 코헨의 '잔인한 국가-외면하는 대중'에 그런 예가 잘 나와있지요).

 

단 한장의 그림만으로도, 우리는 벤 샨이라는 작가가, 사회의 밑바닥 빈곤층 (당시 유태인이면 사회 하층민입니다)사람의 삶의 한 장면을 통해서 뭔가 강한 메시지를 전하려 했다는 것을 짐작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미국 사실주의 화풍에서도 Social Realist (사회적 사실주의자) 화가로 분류를 하는 것이지요. 미국미술사 책들마다 Social Realism 을 보는 시각이 조금씩 다르지만, 대부분의 책에서  Ben Shahn (1898-1969) 을 이들의 Social Realist 분류표에 끼워 넣는 편입니다.

 

 

 

 

 

 

벤 샨의 두장의 그림 사이에서.

디트로이트 미술관, 2009년 10월 31일

왼편에 책방그림,오를쪽에 살짝 보이는 큼직한 액자가 클라리넷과 호른 그림.

 

 

 

 

도시 서민들의 유희 풍경

Handball (핸드볼), 1939

Gouache on paperboard

2009년 9월 뉴욕 현대미술관 (MoMA)에서 촬영

 

 

 

 

 

 

 

해방이란 무엇인가?

 

 

관련 이야기 :  http://americanart.textcube.com/85

Liberation (해방), 1945

Gouache on Board

2009년 9월 뉴욕 현대미술관 (MoMA)에서 촬영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http://americanart.textcube.com/196

Franklin Delano Roosevelt,  (30 Jan 1882 - 12 Apr 1945)

1944년 제작

Color Lithographic Poster

 

 

워싱턴 디씨, 국립 초상화 미술관 (National Portrait Gallery)은 국립 미국 미술관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과 건물을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미음자 건물의 통로를 따라 다니다 보면 초상화관과 미국미술관을 통과하게 되는 구조이지요. 이 작품은 초상화 미술관의 역대 대통령의 초상화들이 걸려있는 한켠에 있는 작품입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1945년에 사망했는데, 이 초상화 포스터 작품은 1944년 작품이군요. 

 

벤 샨은 러시아 유태인 이민자의 아들이었고,  그 자신 사회주의적인 이념을 갖고 있던 화가였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사회주의 사실주의 화가들은 죄다 러시아 출신 유태인들이다 라는 농담섞이 설도 있습니다.)  그는 경제 암흑기에  강력한 국가 주도의 경제정책을 펼치고 노동자들의 권익을 지켜준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을 1930년대 1940년대에 걸쳐서 강력한 지지를 보냈습니다.  그래서 루즈벨트 대통령 시절의 여러가지 미술 관련 사업에 참여를 하기도 했습니다.  위의 초상화 포스터속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아버지와 같이 인자하고 믿음직하게 그려져 있지요.

 

 

광부의 아내

 

 

 

Wives of Miners (광부의 아내들), 1947

필라델피아 미술관 소장

(제 사진파일을 실수로 지워버려서...엉엉...언라인에서 빌려왔습니다.)

 

1947년 3월 25일 일리노이주의 남부 Centralia 의 광산에서 폭파사고로 광부 142명이 매몰되는데 그중 31명이 구조되고 111명이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한 적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당시의 참상을 그린 벤샨의 작품중에, 남겨진 가족에 촛점이 맞춰진 것입니다.  아기를 안은채 의자에 앉아있는 여인도 있고, 깍지낀 손으로 우두커니 서있는 여인도 그려져 있습니다. 문밖의 하얀 마당에는 검은 옷의 사나이 두명이 보입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의 머리위에, 선반같은 것이 있고, 선반에 대충 걸린 옷가지는, 어쩌면 매몰된 광부가 남기고 간 유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꾹다문 입, 강하게 깍지낀 두손.  그것이 이들이 가진 '전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청각예술의 시각화

 

Composition for Clarinets and Tin Horn, 1951

Tempera on Panel

2009년 10월 31일 디트로이트 미술관 (Ditroit Institute of Art Museum)에서 촬영

 

 

벤샨의 그림중에는 악기, 음악을 소재로 한 것들이 종종 눈에 띄는데요, 그는 시각예술 작품속에 청각예술적 요소들, 소재들을 도입시키고 싶었던걸까?  이런 상상을 혼자 해 본적이 있습니다.  이런 악기 그림을 보면,  우리 상상속에 어떤 음악이 흐르지요.  우리의 상상력의 영역까지 그가 닿고 싶었던 것일까요?

 

그런에 이 그림속에 두주먹을 얼굴에 기댄 이 사람 -- 얼굴이 그려져 있지 않지만, 우리는 얼굴을 상상할수 있지요. 그것도 어쩐지 주먹의 표정으로 - 그가 고뇌에 찬 표정일것이라는 상상을 하게 됩니다.  재미있지요?  우리는 얼굴이 보이지도 않는 사람의 움추린 어깨, 꽉 쥔 주먹, 이런것들을 통해서 이 그림속의 사람이 머리를 쥐어짜듯 인상을 쓰고 앉아있는 것을 상상하게 됩니다.  참 신기하죠?

 

주먹쥔 손을 통해, 그려지지도 않은 사람의 얼굴 표정을 상상하는가하면

그려진 악기를 통해서 그 악기 소리를 상상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그림을 보는 인간의 상상력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상상력의 주인은 관객이고

벤 샨은, 벤 샨의 '회화 (시각적 예술 장치)'가 그것을 유도해내는거죠.

 

 

 

 

 

사람들

Six (여섯), 1952

Tempera on Linen stretched over Plywood

2010년 1월 23일 볼티모어 미술관에서 촬영

 

 

저는 이 6인 (여섯) 그림의 배경이 궁금 합니다. 여기 함께 앉아 있는 여섯명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을것입니다.  당시의 어떤 사회적 사건의 주인공들일지도 모르고요.  사연이 궁금해서 자료를 찾아봤는데, 마땅히 이 그림을 설명해줄만한 자료를 찾지 못했습니다.  차후에 자료가 발견되면 이야기를 덧붙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이 사람들의 주먹, 손을 유심히 보는 것만으로 지나치도록 하겠습니다.

 

 

 

 

인생의 삼단계: 늑대 --> 사자 --> 개

 

 

After Titian (티티안 따라하기) 1959

Tempera on Fiberboard

136 x 77.3 cm

2009년 12월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티티안 (Titian, c.1485-1576)은 베네치아의 르네상스기의 화가입니다. 미국 사실주의 화가들 중 티티안의 영향을 받은 이가 다수입니다.  그러면 티티안이 무슨 그림을 그렸길래 티티안을 따라 그려본 것일까요?

 

http://en.wikipedia.org/wiki/Allegory_of_Prudence

 

그림을 위에 링크된 위키피디아 페이지에서 빌려왔습니다. 위키피디아의 설명에 따르면, 티티안은 '사려 (prudence)'의 우화를 위의 그림으로 표현해 냈습니다.  세 사람의 얼굴과 세가지 동물의 얼굴이 나오는데요, 오른편에서부터 보면, 유년기에는 늑대, 장년기는 사자, 노년기는 개에 비유 되었습니다.

 

티티안의 세가지 얼굴에서 노인의 얼굴이 티티안이고 가운데는 아들, 오른쪽은 사촌이라고 합니다.  벤 샨의 그림은 61세가 된 벤 샨, 노년의 벤 샨은 이를 드러낸채 웃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벤샨은 아직 이가 나지도 않은것처럼 보입니다.  티티안의 그림에서는 오른쪽, 유년기의 늑대의 이빨이 보이는데, 벤 샨의 유년기의 늑대는 이빨이 없습니다. (그래서 혹시 이쪽이 노년기인가 고민을 좀 했는데, 머리카락을 보고서야 유년기 노년기를 확실히 구분할수 있었지요).  티티안의 그림에서는 왼편, 노년기에 이빨 빠진 개가 그려져 있는데, 벤 샨의 노년기는 이를 드러낸채 웃고 있는 개가 그려져 있습니다.

 

61세의 벤 샨에게 노년은 이빨빠진 힘없는 시기가 아니었을겁니다.  세상을 살아본 노년을 맞이하는 화가가 돌아보기에 그의 어린 시절은 이빨이 나지도 않는 어린 늑대 혹은 어린 강아지의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송곳니조차 드러낼 필요도 없던 순수의 시대.  성년이 되어 세상과 겨뤄보고 파도를 겪은 그는 노년을 맞이하면서 삶에 대한 여유와 느긋함과, 미소지을수 있는 정신적 풍요를 찾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티티안에게 노년이 이빨빠진 늙은 개의 양순함이었다면,

벤 샨에게 노년은 권력을 가져본 자의 한가로움, 느긋함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티티안과 벤 샨 그림에서 가장 현격한 차이가 나는 곳은 어디일까요?  저는 벤 샨 그림의 '손'에서 그 차이를 찾고 싶습니다. 벤 샨의 그림에는 깍지 낀 큼직한 손이 그려져 있지요?

 

 

 

 

 

손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

 

 

위에 제가 미술관에서 사진찍어온 작품들중에서

 1. 배움을 찬양함

 2. 루즈벨트 대통령 초상화 포스터

 3. 광부의 아내들

 4. 클라리넷과 틴 혼의 구성

 5. 여섯

 6. 티티안 따라하기

 

 

작품들의 공통점으로 들 수 있을것을 저는 '커다란 손'에서 찾습니다.  제가 구경한 벤 샨의 그림들에서는 기이하게 '손'이 과장되게 그려져 있어요. 특히 루즈벨트 대통령 초상화에는 '대중'을 상징하는 '손들'이 그려져 있지요.  이 그림의 손들은 리베라의 디트로이트 미술관 벽화 (http://americanart.textcube.com/150 ) 를 연상시킵니다.

 

 

http://fs.textcube.com/blog/1/13644/attach/XLqmAQGN5t.jpg

 

제가 썼던 페이지에서 사진을 끌어다 놨는데요.  디트로이트 미술관의 벽화에서 제게 인상깊었던 것이 저 거대한 손들이었습니다. 주먹을 쥐었거나, 뭔가 쥐고 있거나 혹은 펼친, 다양한 사람의 손들.  리베라는 남쪽, 북쪽 벽화의 중앙 상단을 거대한 손들로 장식했습니다.

 

사실 이 작품을 마친 이후에 리베라가 뉴욕의 록펠러 센터의 벽화 작업을 하러가는데, 그때 벤 샨이 록펠러 센터 벽화 작업에 합류를 하여 리베라의 작업을 돕게 됩니다. 벤 샨 역시 나중에는 독자적으로 여러가지 벽화 작업을 이끌기도 했고요.  그러한 대형 벽화 작업에 리베라의 영향이 있었지요.  글쎄요, 벤샨의 '커다란 손'들이 반드시 리베라 그림의 영향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벤 샨이 그려낸 '손'들의 의미는 리베라의 의도와 흡사한듯 해 보입니다.  리베라의 벽화에서 '손'은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의 상징이었다고 할수 있거든요. 

 

손 - 도구

손 - 노동

손 - 창조

손 - 책을 들고

손 - 아기를 안고

손 - 고뇌하고

손 - 기도하고

 

사실 우리들은, 저같은 보통사람은 '얼굴'에 신경을 쓰고, 얼굴에 화장을 하고, 얼굴을 좀더 아름답게 가꾸고 싶어하고, 얼굴로 어떤 좋은 인상을 주려고 하지만, 의외로 우리의 '손'이 우리의 얼굴보다 더 많은 표정을 갖고 있을지도 몰라요.  벤 샨의 그림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특히 깍지 낀 손들을 잘 보셔요.

 

광부의 아내가 깍지낀 손은

(1) 어쩔지 몰라 고민하는것 같기도 하고요

(2) 기도하는 것 같기도 해요

(3) 마음을 단단히 잡기 위한 제스처로 보이기도 하고요

 

여섯사람의 깍지 낀 손들은 어떤 판결 앞에서 마음을 추스리기 위한 제스쳐로 보입니다. 인생의 삼단계를 그린 '티티안 따라하기' 그림의 깍지 낀 손은 '신중함'을 상징하는 장치 같아요. 

 

어떤가요? 손이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하지요?

 

 

 

어느 사회주의 사실주의 화가의 영광의 세월

 

Ben Shahn (1898-1969)은 1898년 러시아 유태인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1906년 온가족이 미국의 뉴욕으로 이민을 하여 정착하게 됩니다. 그는 석판화 기술을 익히기도 했고, 한때는 뉴욕대학에서 생물학 공부를 하기도 했었는데, 후에 National Academy of Design 등 미술 학교로 가서 미술 수업을 연마하게 됩니다. 유럽등지를 여행하며 당시의 미술 사조에 눈을 뜨기도 하거니와 유럽의 미술을 익히기도 했는데, 그는 유럽의 미술을 익힌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만의 세계를 개척해 나가지요.  일찌감치 좌익 사회주의 사상에 눈을 돌린 그는 사회 비판적인 작품 Sacco and Venzetti (1932) 사건을 일련의 작품에 담아냄으로써 화단의 주목을 받으며 그의 이름을 일찌감치 세상에 알리게 됩니다.  이 사건은 1920년에 있었던 일로 이탈리아 이민자 였던 두명의 사나이가 온당치 못한 판결을 받고 사형을 당한 일로, 벤 샨은 미국 기성 세대의 위선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래에 문제의 작품 이미지를 빌려다 올렸습니다. 이 작품은 벽화로도 제작되었는데요, 관속에 누워있는 두명의 사나이가 문제의 사코와 벤제티이고, 그의 주변에 서있는 세명의 사나이가 당대에 재판과정에 참여했던 지식인들이라고 합니다.  두명의 시민이 억울한 사형을 당할때, 이를 방치한 지식인들의 '표상'이지요.

 

 

 

http://www.usc.edu/schools/annenberg/asc/projects/comm544/library/images/367.jpg

The Passion of Sacco and Venzetti (사코와 벤제티의 수난), 1931-1932

Tempera

7x4 feet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소장

 

 

 

 

1932년 이 출세작을 시작으로, 벤 샨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 딜 정책을 지지하고, 리베라의 벽화 작업에 동참을 하기도 하면서 1969년 사망할때까지 영광의 한 세상을 삽니다. 다채로운 미술 활동및, 저술, 강의까지 하면서 당대의 영예를 누렸지요. 사회주의 사실주의 화가로서 미국에서 당대의 영광을 생존시 누릴수 있었다는 것이 신기한 알이지요?

 

벤 샨의 예를 봐도 그렇고, '사회주의 사실주의' 하면 대개는 '사회주의 (social)'라는 말에서 러시아식 빨갱이 사상을 연상할수도 있겠지만,  미국 화단에서 보였던 '사회주의' 사실주의 운동은 '사회 현상을 비판적으로 보는 선'에서 대개 잠잠해진 편 입니다.  그래서 순수한 의미의 '사회주의'하고는 거리가 있다고 할 수 있지요.  저는 이를 '미국식 사회주의'라고도 정리를 하곤 하는데,  프링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식의 사회주의를 말하는 것이지요.  난세에, 국가 주도의, 국민 복지를 위한, 노동자를 위한, 그런 미국식 사회주의.

 

제가 수집한 그림을 중심으로한 벤 샨의 페이지를 대충 이쯤에서 정리하겠습니다. 시라큐즈 대학에도  벽화로 존재 한다는 위 작품을 제 눈으로 보고 싶은데 아직 기회가 없었습니다.  훗날 혹시 벤 샨의 문제 작을 볼 기회가 생기면 그때 이 페이지를 업데이트 하도록 하겠습니다.

 

2010년 1월 29. RedFox

 

 

 

 

 

 

 

 

 

 

 

 

 

 

 

 

 

 

 

 

 

 

2010년 1월 13일 수요일

Social Realism (2): Isabel Bishop, 이자벨 비숍의 신곡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출신의 Isabel Bishop (1902-1988)은 뉴욕의 Art Student League 에서 수학하면서 Kenneth Hayes Miller 의 지도를 받게 되는데, 당시 함께 미술 수업을 듣던 친구들중에 Reginal Marsh (http://americanart.textcube.com/285 ) 도 있었습니다. 뉴욕에서 미술 수업을 하면서 작업을 하던 비숍은 유럽 여행을 통하여 Peter Paul Rubens 의 바로크 미술이나 그 이전의 미켈란젤로릉 위시한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을 감상하고 그 영향을 받게 됩니다.  루벤스나 르네상스 미술에 심취해 있었다는 면에서 레지날드 마시와 서로 닮았지요. 결국 이들은 14th Street School (14번가 미술가들) 로 알려진, 뉴욕의 중부에 스튜디오를 갖고 활동하던 사실주의 화가들과 한 무리가 되어 함께 활동하게 됩니다.

 

이자벨 비숍은 뉴욕 맨해턴의 유니언 스퀘어 (Union Square) 인근의 스튜디오에서 1934년부터 1984년까지, 장장 50여년간 작업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평생 뉴욕 맨해턴, 유니언 스퀘어에서 작업을 했다고 할만하지요.

 

다음에 보이는 '유니언 스퀘어의 단체와 베르길리우스' 그림은 바로 이자벨이 평생 살게 된 그 유니언 스퀘어의 풍경입니다.  뉴욕의 도시 풍경, 도시 사람들이 오거나 가고 있는 풍경이 그러진 가운데에 르네상스기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가 르네상스기의 복장인채로 그려져 있습니다.

 

단테는 (읽었건 안 읽었건간에) 대개 사람들이 '신곡 Divine Comedy'의 저자로 기억하지요. 단테가 '시성'으로 존경했던 시인들중에 '베르길리우스 (Virgil)'가 있습니다. 신곡에서 단테가 인생의 어두운 골짜기를 헤메고 있을때,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나  지옥과 연옥을 안내하고, 마지막에 베아트리체가 나타나 천국을 안내하지요.  조용필의 노래에도 등장하고야 마는 '만인의 연인' 베아트리체는 단테가 연모하던 여인이었는데, 천국에 있다가 단테가 헤메는 것을 보고 베르길리우스에게 부탁을 합니다.  가서 좀 안내를 해달라고요. 베아트리체는 천국의 시민이라 지옥 연옥에는 갈수가 없지요.

 

 

 

Dante and Virgil in Union Square (유니언 스퀘어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1932

OIl on Canvas

Isabel Bishop (1902-1988)

2010년 1월 9일 델라웨어주, 델라웨어 미술관에서 촬영

(사진 클릭해서 크게 보세요...네?)

 

 

 

자 그리하여, 단테가 존경하던 고대시인 베르길리우스가 길 안내자가 되어 지옥 연옥을 통과하게 되는데요 (찰스 디킨슨의 - 크리스마스 캐롤에 나오는 수전노 스쿠루지 이야기도 이와 비슷한 구도가 아닌가요?)  단테와 베르길리우스가 서 있는 이곳을 우리는 '천국'으로 볼수는 없지요. (베르길리우스는 천국 시민이 아니거든요)  결국 지옥이라는 말씀이지요.

 

그러면 이것은 '뉴욕-지옥편'이 되는걸까요?  이자벨 비숍은 유니언 스퀘어 광장을 매일 지나치는 군중들을 보면서 왜 하필 '지옥'을 떠올렸던걸까요?

 

저는,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편 33장 (서문까지 합하면 34장) 을 가끔 심심할때 읽습니다. 왜 저는 지옥편을 심심풀이로 읽을까요?  지옥에 나오는 사람들의 일화가 드라마틱하고 매력적이며 때로 감미롭고 가슴 아프기 때문입니다. (이건 또 뭔 말이다냐?) 단테의 신곡에서 제가 가장 자주 들여다본 부분은 로댕의 지옥의 문에도 새겨진 금단의 사랑의 주인공들, 파올로와 프란체스카의 비극. (http://americanart.textcube.com/59) .  드라마가 있는곳, 한숨과 비애와 고통이 있는곳, 이리 저리 휴식없이 떠도는 곳, 우리의 삶의 모습이 그러하지 않은가요?  우리 삶이 단테의 '지옥'의 풍경과 가장 많이 닮았지요.  아마도 그래서 이자벨 비숍은 유니온 스퀘어의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신곡'으로 해석을 했었으리라 짐작합니다.

 

위의 가운데 서있는 두 인물 중에서 빨간 후드를 쓰고 있는 이가 단테, 그 옆에 푸른 옷을 걸치고 머리에 뭔가 쓰고 있는 이가 베르길리우스 입니다. 베르길리우스는 시성(詩聖)이므로 '월계관'을 쓰고 있습니다.

 

 

 

http://americanart.textcube.com/59

필라델피아 로댕 뮤지엄 입구의 지옥의 문

2009년 9월 촬영

 

 

 

 

 

미술관 2층 사실주의 전시실의 오른쪽 벽, 오른쪽에서 두번째 작품이 위의 작품입니다.

 

 

 

 

 

Soda Fountain (소다수 음료대) 1959, Printed 1978

Etching, state v/v

2009년 9월 19일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촬영

 

소다수 음료대 앞에 서있는 두명의 젊은 여성들입니다.  오른쪽 여성은 오른손으로 음료수 잔을 들고 막 마시려 하고 있고, 왼손에는 모자를 벗어서 팔에 끼고, 손에 가방을  들고 있습니다. 왼쪽 여성은 모자를 쓴채 오른 팔에 핸드백을 걸치고 왼손으로는 마악 음료수를 받으려는 동작이죠.  구두, 의상. 몸짓. 대략, 20대 평범한 직장 여성들처럼 보입니다. 도시 아무데서나 발견할수 있는 평범한.

 

제가 갖고 있는 이자벨 비숍의 작품 사진이 이렇게 두가지 뿐인데요. 이 두가지 작품속에 이자벨 비숍의 작품세계의 일반적인 특징이 모두 들어있습니다. 대략 살펴보면

 1. 비숍은 평생 뉴욕 중부 유니언 스퀘어 인근에서 활동하면서 주로 도시의 평범한 사람들이나 도시의 풍경을 그림에 답았습니다.

 2. 이자벨 비숍이 루벤스나 그이전의 르네상스 화가의 스타일에 감화를 입었다는 것을 위의 풍경화에서 확인 할수 있습니다.

 3. 서민들의 모습, 특히 평범한 직장 여성들의 일상을 그렸다는 것에서 이자벨 비숍이 사회의 기층민들을 눈여겨 본 사회 사실주의 화가들과 맥을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수 있습니다.

 

이자벨 비숍을 제가 새로이 발견하게 되면 작품 사진을 업데이트 하기로 하고요.  오늘은 이쯤에서 그의 페이지를 정리하고 다음 작가로 넘어가겠습니다.

 

2010년 1월 13일 redfox

 

2010년 1월 7일 목요일

Social Realism : 사회 사실주의의 범주

 

http://americanart.textcube.com/85

 

 

지금까지 미국의 사실주의 회화를 정리하면서 The Eight (Ashcan School) 과 Regionalism (지역주의 화가 3인)에 대한 정리를 간단히 했습니다.  그 사이에 몇몇 페이지에서 사회(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대한 언급을 산발적으로 하기도 했습니다.

 

 

 

 

사회 사실주의에 대해서 뜸을 들인 이유는, 저 스스로 이것의 범주를 정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사실주의에서 '사회 사실주의'는 사실 어찌보면 애매모호한 개념입니다.  크게 보자면, 사실주의에서 '사회속의 인간의 모습'을 묘사한 것을 모두 사회사실주의에 포함 시킬수도 있고요 (이렇게 되면 미국 미술사에서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활동한 사실주의 화가들의 작품이 대개 포함될수 있습니다) 혹은 극히 '협의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논할수도 있는데, 이 경우 소수의 몇명의 화가들이 대표적으로 떠오를수 있습니다.

 

 

 

 

그래서 협의와 '광의'의 사회 사실주의 사이에서 제가 '갈팡질팡'한 측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술사는 제 전공이 아니고, 보통 사람들처럼 저 혼자 이책 저책 들여다보면서 공부하면서 가닥을 잡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공부해 가는 과정이 아주 재미있어요. 제가 착각하거나 잘 못 알고 있었던 내용을 스스로 바로잡아 가기도 하는데요, 그러면서 스스로 키가 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정리 할 것인가, 고민을 하다가, 나름대로 어떤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일단은

 

제가 생각하기에, 그리고 몇가지 미술사책, 미술사 연구자들이 정리한 '협의의 사회 사실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소개하여, 미국의 20세기 초반, 중반을 흘렀던 사회사실주의 회화의 분위기와 소재, 주제등을 살펴본 후에, 이런 분위기를 전하는 다른 '광의의' 사회 사실주의 그림들에 대하여 논의해보겠습니다.

 

예컨대, 협의의 사회 사실주의는  지역주의 (Regionalism)와 정치적 노선을 달리 하는 식으로도 해석이 되는데요, 이경우 Social Realism 은 좌익, Regionalism은 우익 식으로 평가가 됩니다. 매우 협의의 개념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Regionalism 을 들여다보면 Benton이나 Curry 는 소비에트 사회주의에 심취했던 화가들이므로 이들을 우익으로 몰아붙이기엔 무리가 있거든요. 이들이 우익의 공공미술 정책을 지지하거나 정부 선전 미술 작업을 한것도 사실이긴 하지만요.  그러니까 들여다보면 양상이 간단치가 않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앞으로 '이것이 Social Realism 이다' 라고 할 만한 작품과 작가들을 좀 들여다보고요, 그후에 협의와 광의의 사회사실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것으로 '사회사실주의'를 정리해 볼 생각입니다.

 

대략 제가 갖고 있는 그림파일들을 보면

 1. http://americanart.textcube.com/285  Reginald Marsh

 2. http://americanart.textcube.com/297 Isabel Bishop

 3. http://americanart.textcube.com/300 Ben Shahn

 3. http://americanart.textcube.com/345 Jacob Lawrence

 

그리고....

 

찾아보죠...

 

2010년 1월 6일 redfox.

 

 

***

 

아아, 페이지 장식 차원에서 벤샨의 '해방' 그림을 해당 페이지에서 카피해다가 붙여 놓았는데요,  이것을 살펴보다가 한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저 그림의 액자 입니다. (그림과 액자를 잘 살펴보시지요.)  제가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자문자답)

 

이 '해방'이라는 그림의 소재, 주제는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해석이 어떠하건 공통분모가 있을것입니다.  도시 빈민 어린이. 망가진 삶에 대한 관찰인데요. 그래도 제목이 '해방'인것을 보면 그림은 미래에 대한 희망, 소망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그림의 소재가 저러한데요, 

 

그러므로, 이런 소재의 그림을 '화려한 금박 액자'로 처리했다면 어땠을까요?  그림과 액자가 따로 놀겠지요? 

 

 

저는 가끔 그런 그림들을 봅니다. 서민들의 비참한 삶을 그린 그림의 액자가, 그 삶과 어울리지 않게 화려한 액자로 치장되어 있는 것을요. 그래서 그때마다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생각을 해 보곤 하는데요. 어디서 읽었더라... 서민의 삶을 금박액자로 치장한것도 나름대로 사연이 있다고 합니다.  대개 이런식으로 풀이를 합니다.  그림의 소재가 주제가 어떠하였건,  서민들의 사연이 담긴 그림 - 그 그림을 향유하던 집단은 부유층들이었다는 것이지요. 그 부유층 사람들이 서민들의 고통을 나누기보다는 뭐 그냥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풍경'정도로 그 그림을 파악하고 그것에 금박액자의 옷을 입혀서 그들의 금빛 거실을 장식했다고 하네요.  말하자면, 어떤 가난한 하녀의 그림을 비싼 액자에 담아 화려한 거실에 걸어놓고, 역시 상류층 사람들과 그 그림을 그린 화가에 대해서, 그 그림의 값이 얼마나 비싼지 논의하고 있을때,  가난한 그집의 하녀는 그 사람들에게 요리를 해다 바치며 바삐 맴맴 돌았겠지요. 아마도.

 

 

 

벤샨의 '해방'의 액자는 그림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습니다.  '해방'에 금테두리 액자를 입힌다면, 그것은 '모욕'이 될겁니다.

 

 

 

 

2009년 12월 7일 월요일

The Eight (Ashcan School) (2) John French Sloan

소년가장 슬로언

 

John French Sloan (1871-1951)은 펜실베니아 태생의 미국 사실주의 화가로 Henri 를 중심으로 모인 Ashcan (애시캔) 그룹과 The Eight (8인회)의 멤버로 활동하였습니다.  존 슬로언은 필라델피아에서 성장하였는데 그의 고등학교 동창중에 후에 The Eight 의 멤버가 되는 William Glackens를 만나게 됩니다.

 

1888년 그가 16세 되던해에 아버지가 정신질환으로 쓰러지면서 슬로언이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소년가장이 되고 맙니다. 그는 책방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책을 읽고 화집을 들여다보며 혼자 그림을 그리던중 정식으로 야간 미술 과정에 입문하게 되고 후에는 펜실베니아 미술학교에 진학하게 됩니다. 여기서 그는 Thomas Pollock Anschutz 의 지도를 받게되며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Willaim Glackens 를 다시 만나게 되지요.

 

1892년 Robert Henri 를 만나게 되는데 이때부터 이들의 연대가 시작됩니다. 슬로언는 The Philadelphia Press 의 미술부에서 삽화가로 일을 하며 미술 작업을 계속해 나갑니다.

 

슬로언의 아내

 

슬로언은 아내와의 관계도 '소설'적인데,  그의 아내 Anna Maria 를 술집에서 만나서 사랑에 빠져 1901년에 결혼하게 됩니다.  안나 마리아는 백화점 점원으로 일했지만 매춘 경력이 있으며 음주벽이 있고, 아마도 이러한 전력을 거친 여성들이 보일법한 히스테리컬한 우울증도 보였던 것 같습니다. 슬로언의 아내에 사랑은 지극정성이었고 한 의사의 제안으로 1906년부터 1913년까지 매일 매일 자기가 얼마나 아내를 사랑하는지 일기를 쓰게 됩니다.  (이런 남자 또 한명 있죠, 삐에르 보나르... 삐에르 보나르는 수십년간 목욕탕에서만 지내는 특수한 병을 가진 여인을 돌보며 한세상을 보냈지요. 삐에르 보나르의 그림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목욕하는 여자, 삐에르의 평생의 연인.)  그의 부인은 1943년에 죽고, 슬로언은 이듬해에 새장가를 갔으며 슬로언 자신은 1951년에 운명합니다.

 

슬로언의 사회주의 운동

 

 

1912년 그는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잡지 The Masses 에 미술 편집인으로 참가하며 다른 사회주의 사상이 강한 매체인 Call, Coming Nation 지를 위해서도 삽화를 그려줍니다.  특히나 그가 그린 1914년 6월호 The Masses  표지화가 지금도 자주 인용되거나 소개되곤 하는데요. (http://americanart.textcube.com/133  페이지에 Ludlow 학살사건의 이야기가 잠깐 소개된바 있습니다.)  그가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했고 민중의 생존권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긴 했지만, 예술가로서 슬로언은 '선전 (propaganda)'의 '도구'로 미술 작업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회정의를 위해 노력하는 것에는 긍정하면서도 예술이 '극단적인 정치선전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고 할만하지요.  그러면, 우리는 '예술만을 위한 예술'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반문할수 있을텐데...제가 추측하기에, 슬로언은 아마도 그 주위의 '사회주의자'들의 어떤 행동들에 거부감을 가졌을법 합니다.  그 '어떤 사회주의자들'이 요구하는 '선전물'을 만들기 싫었겠지요.  그가 꿈꿨던 사회주의와 그가 속한 사회주의자의 무리들의 행동 양식이 일치하지 않았을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과 거리를 두고 싶었을겁니다.  

 

서민속에 서있던 남자

 

존 프렌치 슬로언의 작품세계는 크게

 

(1) 뉴욕의 풍경

(2) 대중의 삶의 풍경

(3) 잡지,책의 삽화가로서 작업한 세밀한 판화 작품들

 

으로 정리 될수 있습니다. 일단 그가 삽화가로 일했으므로 대중 생활 관련 묘사 작품들이 많은데, 이런 성향은 이미 십대에서부터 생계형 청년 가장으로 세상에 나아갔던 그의 삶의 이력을 통해서도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그가 즐겨그린 도시 주변의 사람들의 모습, 가령 도심의 창가에서 빨래를 너는 여인이나, 건물 청소를 하는 아주머니들, 술집 풍경 역시 그의 삶과 밀착된 풍경이었을 겁니다.  특히나 20세기초의 뉴욕의 전철과 천철 주변 풍경은 그의 '전매특허'와 같은 주제라 할 수 있지요. 조지 벨로우즈 페이지에서 (http://americanart.textcube.com/198)  권투선수 그림을 즐겨그린 미국 화가가 누군가? 이런 퀴즈가 나오면 자동으로 '조지 벨로우즈'를 외치면 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요. 마찬가지로, 미술관에서 '뉴욕 고가 기차' 풍경화가 멀리서 보일경우,  당신이 애인과 함께 미술관 구경중이라면 "저기 저 뉴욕 풍경속에 고가 기차 그림이 있는 저 그림 말야...저거 아마 존 슬로언이라는 화가의 그림일거야..." 하고 '아는체'를 해도 크게 실례가 안 될 것입니다.

 

 

 

뉴욕 고가 기차 (Elevated Train: EL)

 

The City from Greenwich Village (1922)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바라본 뉴욕
oil on canvas
overall: 66 x 85.7 cm (26 x 33 3/4 in.)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2009년 9월 촬영

이 그림은 비가 그친 겨울 저녁, 맨하탄 남단에서 바라본 맨하탄의 거리 풍경입니다. 고가기찻길 위로 기차가 불을 밝히고 지나가고 비에젖은 도로에 자동차의 불빛이 반사됩니다. 비가 갠것을 눈치채는 이유는 하늘이 부염하게 밝아 있다는 것이지요. 도시는 촉촉히 비에 젖어 있고 골목의 불빛은, 그것이 골목이라서 더욱 밝아 보입니다. 건물 옥상의 물탱크도 보이고, 다리미의 모서리같이 각진 고층 건물이 오른쪽에 보이는데, 건물에서는 불빛들이 새어나옵니다. 일층의 모든 창문은 손님들을 기다리는듯 환하게 불이 켜져있습니다.  옹기종기 걸어가는 행인도 몇명 보이지요. 그림의 전체적인 윤곽은 우리가 마치 몇층 건물에서 창밖을 내다보는 듯 합니다. 액자를 창틀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창밖을 지긋이 내려다보는 기분이 듭니다.

 

 

다음 그림은 워싱턴 필립스 콜렉션이 소장하는 Six O'clock, Winter (1912) 라는 또다른 고가 기차 (EL) 풍경입니다. (제가 갖고 있는 사진 파일이 상태가 안좋아서 웹에서 얻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속의 여섯시의 풍경은 오전일까요 오후 일까요? (제가 볼때는 오후 여섯이인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단서는 나중에 말씀드리기로 하고요...  )  이 작품이 1912년작이고, '그리니치 빌지지에서 바라본 뉴욕'이 1922년 작품이므로, 두 그림 사이에는 10년의 세월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두 그림을 함께 놓고 보면, 1912년 작품은 고가기차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시선이고, 1922년 작품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각도이지요.

 

 

 

 

http://www.phillipscollection.org/research/american_art/learning/sloan-learning.htm

 

 

 

무료 커피

 

The Coffee Line (1905)

무료 커피를 받기 위해 줄서있는 사람들

2009년 11월 7일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에서

 

 

 

 

뉴욕에서 무료 커피를 받기 위해 긴 행렬을 이룬 실업자들을 발견한 슬로언이 그려낸 겨울 저녁의 풍경입니다. 길에는 눈이 쌓여 있지요. 슬로언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이 어둡고 긴 행렬을 묘사 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빈곤의 문제가 그를 사회주의 사상으로, The Masses 로 이끌었을 것입니다.

 

비가 들이치는 페리선

 

Wake of the Ferry, No. 1 (1907)

페리선의 물길

2009년 10월30일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촬영

 

 

 

지금도 뉴저지에서 맨하탄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중에 배(Water Taxi)로 강을 건너는 직장인들이 있습니다. 100여년전 뉴욕과 뉴저지를 왕래하는 페리선을  그린것은 당시로서는 '엉뚱한' 시선이었을겁니다.  비가 들이키고 물결이 거칠게 일고, 전체적으로 '내가 그 페리선을 탄듯' 심란한 기분이 드는 그림입니다.  오른쪽 구석에 서있는 여인도 그래서 심상치 않아 보이는데요.

 

이 그림은 그림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 만큼이나 심상치 않은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슬로언은 1904년에 뉴욕으로 활동지를 옮겼는데, 그의 알콜중독자 부인은 이후로도 걸핏하면 필라델피아의 집으로 가버리곤 했던 모양입니다. 그의 아내가 필라델피아로 가기위해 이 페리호를 종종 이용했지요. 결국 이 그림속의 여인은 슬로언의 알콜중독자 아내의 뒷모습이었던 것인데요.  1907년에 슬로언이 그의 작업실에서 The Eight 전시회를 준비하기 위해 모임을 갖고 있었을때 부인이 들이닥쳤다고 합니다.  (남자 작업장에 여자가 허락도 안받고 나타난거죠, 아마 그렇겠죠.) 술도 몇잔 마셨겠다, 화딱지가 난 슬로언이 그 자리에서 의자를 집어던져가지고 이 그림이 상처를 입었다고 합니다. 그래가지고,  나중에 이 그림을 또다시 그리게 되는데 그 (2)번 그림은 필립스 콜렉션에 소장되어 있고, 이 (1)번 그림은 슬로언이 (2)번 그림 그린후에 손을 봐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Beal 2002).  아무래도 이런 뒷 이야기를 듣다보면, 이 페리선의 풍경이 슬로언과 그의 아내의 풍경이었다 싶기도 하지요.

 

 

 

 

 

 

이상에서 보신바와 같이 대도시의 뒷골목의 삶의 풍경, 이런 풍경은 Henri 가 주도했던 Ashcan 일당들의 주요 소재라 할 수 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시각에서 '이런 그림이 뭐가 대단한가?' 의구심이 들 수도 있을것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이 그려진 1922년 미국 화단의 상황속에서 이 그림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우리의 생각은 달라질수도 있습니다.

 

미국의 미술의 역사는 유럽에 비해서 '일천'할수밖에 없지요. 제가 에드워드 힉스나 조쥬아 존슨과 같은 초기의 '포크 아트' 작가들에 대하여 애정을 갖고 소개를 한 이유가 있는데요, 미국은 초기에 유럽 강대국들의 '식민지'였고 유럽 문화권의 식민지이기도 했습니다. 미국 자생의 문화가 없었다고 봐야지요 (아메리카 인디언 문화를 제외하면).  그래서...Henri 를 위시한 '사실주의' 화가들의 탄생 이전의 미국 회화사는 '유럽 베끼기'의 연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장차는 미국의 인상주의나 그 이전의 풍광, 초상와 위주의 미술과 미술가들을 차례로 소개하겠지만, 제가 왜 이들부터 시작을 안하고 풍속화가 잠깐 건드리다가 '사실주의'로 점프를 해버렸는가하면,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들 이전의 작가들에게서 제가 별 매력을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뭐 대략 사이비 유럽미술 냄새가 고약하게 난다는 느낌이 드니까요. 제가 감지하기에 미국의 사실주의 화파들부터, 미국의 미술은 자신의 정체성을 슬슬 세워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에서부터 미국의 풍경이, 미국의 서민이 화면의 중심에 슬슬 등장을 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슬로언의 전철 그림과 도심 그림이 매력적으로 비쳐지는 것이지요. (이것은 미국인이 아닌, 아시아 출신의 어느 외국인이 이방인의 시각으로 미국 미술을 보는 관점이긴 합니다.)

 

 

 

Yeats at Petitpas'

 

이 그림은 뉴욕 웨스트 사이드의 어느 하숙집에서 열린 파티 장면입니다.  Petitpas 는 프랑스 출신의 두 자매가 경영한 하숙집 이었습니다. 

 

이곳에 영국의 철학자이며 예술가였던 John Butler Yeats (존 버틀러 예이츠 1839-1922)가 머물렀는데, 그는 영문학도들에게 (그리고 교양 차원에서 영시를 읽은 사람들에게)  친근한 시인 William Butler Yeats(1865-1939) 의 아버지입니다.  존 버틀러 예이츠는 69세 되던 해에 뉴욕으로 이주하여 '애시캔' 화가들과 친교를 맺었고, 결국 뉴욕에서 사망하여 뉴욕에 뼈를 묻었지요. 그러고보면, 그의 아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는 '유럽'문화를 이상화 했는데, 아버지인 자신은 말년에 문화 불모지와 같은 뉴욕에 와서 세월을 보내다가 갔군요.

 

흰 턱수염의 노인이 존 버틀러 예이츠이고, 오른쪽 끝에 보이는 검은머리 남자가 존 슬로언이군요. 음식을 들고 서있는 이는 하숙집 주인이고요, 그이의 왼쪽에 모자를 쓴 여인이 슬로언의 부인이라고 합니다. 존 버틀러 예이츠가 이 하숙집에 머무는 동안 이곳은 당시 미술, 문학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즐겨 모이는 장소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Yeats at Petitpas' (1910)

Oil on Canvas

워싱턴 Corcoran 미술관에서 2009년 10월 3일 촬영

 

 

 

해부학교실

 

존 슬로언은 펜실베니아 미술학교에서 Anschutz 선생의 지도를 받았는데, 다음 작품은 해부학 강의를 하는 안슈츠 선생을 에칭 판화로 묘사한 작품으로 보입니다.

 

 

 

 

 

Anshutz on Anatomy (1912)

해부학 교실의 안슈츠 선생

Etching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2009년 9월 19일 촬영

 

 

 

 

제 사진 상태가 좋지 못해서, 웹에서 좀더 선명한 이미지를 빌려 왔습니다.  강단아래에 안슈츠 선생이 서서 강의를 하고 있고,  강단위에 인간 골격이 서있고, 그 옆에 성기만 가린 남자 누드 모델이 서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둘러 앉거나 서서 해부학 강의를 듣고 있는데요. 학생들중에 여학생도 보입니다.  아마도 여학생들이 없었다면 남자 누드 모델이 성기를 가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1900년대 초반에 미국 미술 학교에서는 남녀학생이 함께 작업하는 곳에서는 누드 모델이 성기를 드러내면 안되었다고 하지요.

 

 

슬로언에 관심이 많아 자료를 많이 보긴 했는데, 막상 제가 가진 작품 사진 파일이 미미하여 그의 미술 세계를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소개할수 없어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저는 화집이 아닌 '내 눈'으로 본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기로 작정을 했거든요.  나중에라도 슬로언 작품들이 보이면 보이는대로 잘 갈무리하여 좀더 그에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싶습니다. 화집에서 본, 제가 좋아하는 그의 작품들로는 그의 '빨래'관련 그림들인데요. 슬로언이 도심에서 빨래를 널거나, 걷거나 하는 여인들을 모티브로 그린 그림이 많이 있습니다. 참 아름답지요. 그래서 '빨래' 주제의 페이지를 하나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는데요, 이것 역시 훗날로 미루기로 하겠습니다.

 

 

 

참고문헌:

 1. http://www.nga.gov/fcgi-bin/tinfo_f?object=52079

 2. Sherry Babbit (2008). Philadelphia Museum of Art: Handbook of the Collections. Philadelphia, PA.

 3. Graham W. J. Beal (2002) American Beauty: Paintings from the Detroit Institute of Arts 1770-1920. Scala Publishers Ltd. London, UK.

 

 

 

 

2009년 12월 6일 red fox

2009년 12월 5일 토요일

The Eight (Ashcan School) and George Bellows

New York (1911)

George Bellows

Oil on Canvas

2009년 9월 11일 워싱턴 국립미술관 (NGA)에서 촬영

 

사진은 클릭하시면 크게 확장시켜 보실수 있습니다.

 

뉴욕풍경

 

 

Goerge Bellows (1882-1925) 의  New York (1911)은 대략 100여년전의 뉴욕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자동차와 마차가 뒤섞여 있고, 고층 건물들과 그제나 이제나 여전한 인파가 보입니다.  사실 이 뉴욕의 풍경은 사진과 같은 실제 광경은 아니라고 합니다. 뉴욕의 여러 장면을 뒤섞어서 뉴욕의 분위기를 전달했다고 봐야겠지요. 얼핏 보면 타임 스퀘어 같기도 하고 얼핀 보면 펜스테이션 앞 같기도 하고, 어찌됐거나 우리가 한번쯤 가봤거나 혹은 영화나 그림을 통해서 지겹게도 많이 본 뉴욕 번화가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일백여년전의 풍경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의 복장이나 마차 장면을 제외하면 어느 화가가 며칠전에 그린 것이라고 해도 그럴싸해 보입니다.

 

조지 벨로우즈 (1882-1925)는 앞서 소개드린 The Eight (팔인회)나 Ashcan (애시캔) 그룹의 정식 회원으로 활동을 한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The Eight, Ashcan school 의 리더였던 로버트 헨라이 (Robert Henri 1865-1929)와 친분이 두터웠고, 헨라이의 미술관에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의 작품들이 팔인회, 애시캔 회원들의 화풍과 통했기 때문에 조지 벨로우즈를 '애시캔'의 일원으로 평가하는 비평가들도 있습니다.  저 역시 그의 작품들이 미국의 도시, 서민들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려냈으므로 조지 벨로우즈를 애시캔 그룹을 이야기하면서 함께 정리를 해보는 것입니다.

 

조지 벨로우즈는 오하이오(Ohio) 의 주도(행정수도)인 콜럼버스 (Columbus) 태생입니다. 이곳에 오하이오 주립대 (Ohio State University)가 있지요. 그는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주로 야구선수와 교지 삽화가, 그리고 잡지의 삽화가로 활동했습니다.  오하이오 주립대에 한번 가본적이 있지요. 제 친구들이 그곳 수학과에서 공부를 했는데, 한 친구는 공부 마치고 수학자로 살고 있고, 또 한 친구는 아직도 거기서 공부중입니다. (글 쓰다가 친구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집니다.) Robert Henri 역시 오하이오 출신인데 그는 신시내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아마도 조지 벨로우즈와 로버트 헨리가 고향이 가까웠다는 이유로 더욱 친근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지 벨로우즈는 스포츠맨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오하이오 주립대를 졸업한 후에 프로야구 선수가 될것인가 잡지 삽화가로 살것인가 고민하다가, 미술 수업을 받겠다고 작정하고 뉴욕으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 뉴욕 미술학교 선생으로 재직하는 로버트 헨라이를 만나게 되고 그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조지 벨로우즈는 특히나 그의 권투경기 장면이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 합니다.  그의 도시 풍경이나 다른 그림들도 그 나름의 힘과 역동성이 느껴지지만, 단답형 상식 퀴즈 대회에서 '권투하는 그림' 내 놓고 '이거 그린 사람?'하는 퀴즈가 나온다면 자동으로 '조지 벨로우즈!'을 외칠만 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의 그림 세계를 단순무식하게 정리해본다면 대략 세가지 정도로 분류가 됩니다:

 

 (1) 그를 대표하는, 권투선수 시리즈

 (2) 도시 주변의 풍경과 서민의 삶

 (3) 일반 서민의 초상화

 

제가 미술관들을 돌면서 '사냥'한 그의 작품 사진들을 주제별로 소개해 보겠습니다.

 

 

권투선수

 

Both Members of This Club (1909)

두 선수

Oil on canvas, 45 1/4 x 63 1/8 in. (115 x 160.5 cm)

2009년 9월 11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흰색의 하일라이트가 들어간 왼쪽 선수, 얼굴에 피가 낭자합니다.  오른쪽 선수, 치고 들어가는 대각선 구도가 역동적이지요. 반대방향의 대각석 구도의 관객 풍경이 그림의 중심을 잡아줍니다.  피가 낭자한 가운데, 아래 중앙의 관객은 입을 벌리고 웃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권투선수가 피를 흘리거나 말거나, 관객의 입장에서는 링에서 피가 튀고 살점이 튀고 누군가 되게 쓰러지고 그래야 신이 나는 법입니다.

 

웹에서 조지 벨로우스 이미지를 찾아보시면 이와 유사한 다른 권투경기 장면 그림들을 많이 발견하실수 있습니다. 그 그림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조지 벨로우즈의 권투경기 그림을 찾아 천지를 유랑하며 돌아다니고 싶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어릴때, 할아버지가 권투중계의 팬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권투중계의 일정을 일일이 표시해놓고, 그의 일기장에 적어놓고 절대 빼놓지 않고 들여다봤습니다. 아마도 돌아가실때까지 그러셨을겁니다. 단지 중계방송만 보신것이 아니고, 서울 우리집에 오시면, 어린 우리들을 이끌고 월곡천 건너, 시장통에 있는 '체육관'에 구경을 가곤 했습니다. '체육관'이 뭐하는데냐 하면 당시 무명 아마추어 선수들이, 혹은 권투선수 지망생들이 모여서 연습하는 '도장'이다 이거죠.  우리들은 거기서 밤이 이슥하도록 창문 너머로 사람들이 서로 치고받고, 혼자 줄넘기하거나 혼자 샌드백 치면서 훈련하는것을 구경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체육관에 따로 '탈의 시설'이 없었던것 같습니다. 가끔 우리는 잘생긴 '오빠'들의 (그때 나는 꼬맹이였으므로) 실한 엉덩이 구경도 할수 있었는데,  선수들이 체육관의 구석진곳에 가서 옷을 갈아입었거든요. 그 구석진 곳이 하필 우리가 염탐하던 창가였으므로 그들이 창가쪽 구석에서 후다닥 바지를 내리고 체육복으로 갈아있거나, 체육복에서 평상복으로 탈바꿈하는 광경을 볼 수 밖에 없었지요. (일부러 그런게 아니고요 -.-;; )   아니...엉덩이밖에 안 봤습니다... 헤헤헤.

 

어릴때는 할아버지가 권투중계 보시는 것이 못마땅했는데요, (왜냐하면 내가 어린이 프로를 볼 수가 없으니까) 지금도 그런 스포츠 중계에 재미를 못느끼므로 여전히 볼 일이 없는데요, 하지만 이 그림은 제 맘에 듭니다.  조지 벨로우즈가 무슨 맘으로 이런 그림을 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권투 장면을 그의 그림 소재로 잡았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신선한' 시도였고, 결국 그의 트레이드마크 (Signiture) 작품이 되고 말았지만, 그것 말고도,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인생 이렇게 치고 받고 맞다가 뻗는거지...하는 비감한 생각도 들고,  누구나 그런거지, 나만 유독 두드려 맞는것도 아니지, 이런 위안감이 든다니깐요, 글쎄.

 

 

 

2009년 12월 13일,  국립 미술관에 가서 조지 벨로우즈의 Both Members of This Club (1909)라는 작품을 다시 감상하고 있었는데요, 마침 미술관 도슨트(Docent 전문 안내원)가 사람들을 이쪽으로 안내해와서 이 그림에 대한 설명을 하더군요. 그래서 곁에서 귀동냥을 했지요. 새로 알게된 사실은,  1900년 초반 당시에는 상업적으로 복싱 경기를 하는것이 '금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공개적인 복싱매치가 아니고, 남성들의 '음성적인' 클럽에서 진행된 경기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목도 Both Members of This Club (이 클럽의 두 회원)이라는 식으로 달린 것이라고 하네요.  두 '선수'라고 하면 안되고, 그냥 클럽의 회원간의 친선경기같은.    그러면 이 클럽에서는 복싱만 했겠는가?  다소 '음성적인' 클럽이었으므로 그 안에서는 복싱 말고도 다른, 다양한, 그러나 저로서는 전혀 알수 없는, 남자들만의 '음성적'인 오락이 진행되었겠지요~

 

 

 

 

 

뉴욕 빈민가의 아이들

 

 

이 작품은 위의 권투선수 그림보다 2년 앞서서 그려진 것입니다.  뉴욕의 East River 강변에는 그 당시 가난뱅이 이민자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서울의 허술한 한강변 산동네를 연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제목이 Forty Two Kids (42명의 아이들) 인데요 제목의 'kid'가 단순한 '아이들' 이 아닙니다. 아이들이라는 영어 단어로는 Children 이 따로 있지요.  요즘 Kids라는 단어를 '아이들'이라는 의미로 흔히 사용하기는 하지만 백여년전 이 kid 라는 말은 '슬랭'으로 대개 이민자 아이들처럼 가난뱅이 아이들을 일컫는 표현이었다고 합니다. 그냥 아이들이 아니라...말하자면...'애새끼들'이라는 뉘앙스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

 

이 kids 라는 어휘를 저도 아주 조심해서 사용하는 편인데, 제가 교육을 전공했고, 학교에서 교사로도 일을했고, 그래서 대학원 수업을 들을때도, 온통 '아이들,' '학생들' 관련 이야기였지요. 그러니까 주로 사용하는 어휘가 students, children, ESL children, ESL students 뭐 이런 언저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무심코 지도교수와 논문 이야기를 하다가, "These ESL kids..." 뭐 이러고 말을 하니까 지도교수가 주의를 주었습니다. "우리는 학생을 존중해야 하는 교육자이다. students 나 children, learners 말은 우리가 사용하기에 적합하지만 kids 라는 말은 부적합해보인다."  그러니까 그 kids 라는 어휘가 아직도 품위있는  어휘로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아, kid의 원뜻은 염소새끼 입니다.)

 

자 우리들의 조지 벨로우즈 선수(?)가 그 가난뱅이 뉴욕 빈민가의 이민자의 '애새끼'들을 화폭에 담았다는 것인데요. 정말 42명인지 한번 헤아려 볼까요?

 

 

Forty Two Kids (1907)

42명의 아이들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Corcoran 미술관에서 촬영

 

 

이 작품이 1908년 어느 전시회에 소개가 되었을때 평단의 반응은 싸늘하고 조롱기가 가득했다고 합니다.  뭐 이따위 그림을 그림이라고 그렸냐 이거죠.  가난뱅이 애새끼들이 허술한 강변에서 노는 것이 무슨 그림의 소재가 되는가 씹었을겁니다.  하지만 평단의 싸늘한 반응과는 달리, 이 작품은 곧 개인 콜렉터에게 팔려나갔는데, 이것이 조지 벨로우즈가 최초로 개인 콜렉터에게 판매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워싱턴의 코코란 미술관에 있지요.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Bill Bryson 의 The Life and Times of the Thunderkid 의 일화중에서 전쟁이후 베이비붐 세대로 성장했던 작가 빌 브라이슨의 회고가 소개됩니다.  그가 과장되게 술회하기를, 전후 베이비붐 세대였던 자신들은, 어딜가나 애가 넘쳐나서,  그가 살던 아이오와 시 변두리의 강변에 가면 수천명의 아이들이 모여서 멱감기를 했다고 하는데요.  물론 조지 벨로우즈 그림속의 아이들은 1907년 8월의 아이들입니다.  베이비붐 세대보다 50년전에 '이민자 붐' 세대의 아이들이지요.

 

이 그림이 제게도 낯설지 않은 이유는, 비록 지구 정반대쪽 대륙에서 성장했지만, 저 역시 60년대 70년대 베이비붐 시대의 일원으로 변두리 가난뱅이 아이로 성장했다는 공통 분모 때문일것입니다.  우리 할머니나 어머니의 회고로는 '네 오라비나 네가 태어나던 시절에는 어느 집에서나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어느집 여자나 배가 불러 다녔다. 애가 참 많이도 나왔다'고 합니다. 그 많은 애들이 뭘하고 놀았을까요.  사실 도심에서 성장했지만 저는 어린시절 골목에서 뭘 하고 놀은 기억이 별로 남아있지 않고,  즐겁게 논 기억은 모두 시골집에서였습니다.  여름 한철 시골 개울가에 가면 약속도 필요없이 아이들이 있었고, 우리들은 수영복도 없이 그냥 입은 옷을 벗어던지고 물에 들어가 놀았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저는 초등학교 2학년때까지 옷을 벗고  개울에서 물놀이를 했습니다.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을 아직 몰랐다는 것이지요) 여자아이나 남자아이나 그냥 물속으로 뛰어 드는 것으로 각자 부끄러운데를 가렸다고 생각하고 그냥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는 것이지요.   초등학교 3학년부터는 빤쓰라도 입고 물장구를 쳤고, 초등학교 5학년부터는 싸구려 나이롱 수영복을 입고 노는 '문명인' 반열에 들 수 있었지요.

 

제가 가끔 이런 저의 '야만적'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면,  서울이나 대도시의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난 또래 친구들은 저를 '원시인' 쳐다보듯 바라보며 무슨 외계인이나 거짓말장이를 대하듯 휑한 표정으로 대합니다.  자기네로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풍경속에 내가 있었다 이거죠.  하하하. 사람들은 자기가 처한 환경을 '평균적' 환경으로 인지하는 경향이 있어서, 자신의 경험 영역 바깥의 일은 외계의 일처럼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나'역시 피할수 없는 한계죠. 나 역시 그런 눈으로 남을 판단할 것이므로.  조지 벨로우즈가 '애정'을 갖고 변두리 아이들이 벌거벗고 노는 풍경을 그렸을때, 어떤이들은 '이것도 그림이냐'로 반응 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럴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지구상에 전쟁이 사라지지 않는거죠...

 

 

첨언:  그런데 위의 42명의 아이들 그림이...어쩐지 Thomas Eakins The Swimming Hole(1885) 라는 그림을 연상시킵니다.  토마스 이킨스 (1844-1916)는 미국 사실주의 미술가들의 '대부'쯤되는, 후에 활동하는 사실주의 화가들 (The Eight, Ashcan)에게 가장 영향을 끼쳤던 미국화가라 할 만 합니다.  조지 벨로우즈가 선배 대가인 이킨스의 그림을 염두에 두었는지 아닌지는 알수 없으나, 참 닮았단 말이지요...  ;-)

 

 

 

 

 

변두리의 푸른아침

 

멀리로 고층 건물들이 밀집한 것으로 보아 역시 뉴욕의 강변 풍경으로 보입니다. 역시 강변 부두에 뿌연 안개가 피어오르고 누군가 불을 피웠는지 흰 연기도 솟아 오릅니다.  대략 어느 추운 겨울 아침 강변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웅크리고 있으니까요. 추우면 웅크리쟎아요. 이들의 하루는 오늘도 고단하게 흐를것입니다.  이들의 곤고한 풍경과는 달리 푸른 색조가 아름답지요? 

 

 

Blue Morning (1909)

푸른 아침

Oil on Canvas

86.3 x 111.7 cm

2009년 9월 11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다리밑 외딴 숙소

 

그림 오른쪽 구조물이나 그 위를 지나는 판으로 보아 이것은 다리(교각)의 일부 같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뉴욕시의 어느 커다란 다리 아래에 사람들이 모여있고, 그림의 중앙에 6층짜리 건물이 똠방, 대똑하게 서있습니다.  이곳이 그림의 제목이 되는 '외딴 숙소'인것 같습니다.  'tenement' 라는 어휘를 언라인으로 검색해보면 이런 의미가 소개가 됩니다. (http://www.thefreedictionary.com/tenement)

 

1. A building for human habitation, especially one that is rented to tenants.
2. A rundown, low-rental apartment building whose facilities and maintenance barely meet minimum standards.

해석: (1)  세입자 임대용의 사람이 거주하는 건물
        (2) 극히 기초적인 수준도 안되는 시설을 갖추고 있는  싸구려 아파트 빌딩

 

 

The Lone Tenement (1909)

외딴 숙소

Oil on Canvas

2009년 9월 11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그림 왼편에 사람들이 모여서 불을 쬐고 있는것 같지요?  멀리 강에 은은한 햇살이 비치는데, 다리밑의 사람들은 불가에 모여 서 있습니다. 웅덩이에 보이는 물은 살얼음이 얼었을것 같습니다.  이런 뉴욕의 풍경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활동해던 Georgia Totto O'Keeffe (November 15, 1887 – March 6, 1986) 가 그렸던 뉴욕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Georgia O'Keeffe
Cityscape with Roses
1932
oil
84 3/8 x 48 1/2 in.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Gift of the Georgia O'Keeffe Foundation

 

 

1932년이면 미국의 경제 암흑기 입니다. 그 당시 조지아 오키프가 묘사한 뉴욕은 장미빛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작가의 작업 취향이야 각자 자유이고 조지아 오키프가 매력적인 화가임에는 틀림없으나,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에 '사회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돈많은 사진가 스티글리츠의 사랑속에 경제적인 어려움도 모르고 예술에만 전념했겠지요.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만을 들여다볼때는 그의 작품에 감탄을 하다가도, 그 당시에 혹은 그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활동하던 작가들과 비교해보면, 어딘가 조지아 오키프의 미술세계가 '공허'하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사람'한테 관심이 없었던 사람 같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이러한 저의 비판적인 시각은, 사람이나 '세상'에 관심을 가진 저 자신의 취향에서 출발하는 것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냥 문득, 조지 벨로우즈의 뉴욕 풍경 그림을 보다가, 그 속의 가난뱅이 애새끼들이라던가, 빈민들의 풍경이 그려진 그림을 보다가 문득,  조지아오키프의 뉴욕 풍경이 떠오르면서...아하...이들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았던거구나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National Gallery of Art 에 조지 벨로우즈의 그림이 걸려있는 풍경입니다. 왼쪽부터 '권투선수' '푸른 아침' 그리고 '뉴욕' 그리고 '쓸쓸한 숙소'가 차례차례 보입니다.

 

 

 

초상화들

 

 

다음은 크라이슬러에서 '사냥'한 그의 '피아노 앞의 엠마' 입니다. 엠마는 그의 부인입니다. 뉴욕의 미술학교에서 만났는데 엠마는 그림을 그만두고 피아노에 전념했다고 합니다.  위의 Blue Morning 에 보였던 그 푸른 빛이 이 그림에서 좀더 뚜렷하게 표현됩니다. 아, 조지 벨로우즈는 이런 색감의 푸른빛을 좋아했구나 추측하게 됩니다.

 

 

Emma at the Piano (1914)

피아노 앞의 엠마

Oil on Canvas

94x73 (가로세로)

2009년 11월 29일 버지니아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촬영

 

 

 

조지 벨로우즈의 두 딸중 큰딸인 앤 입니다. 커튼과 허리 부분의 청색과 흰 드레스가 대조를 이루는데요. 역시 Blue Morning 이나 Emma at the Piano 에서 선보인 청색과 흰색의 대조가 이 그림에서도 나타납니다.

 

Anne in White (1920)

흰 드레스의 앤

147x108.9 cm

Oil on Canvas

2009년 11월 7일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에서 촬영

 

 

조지 벨로우즈는 엠마와 결혼한 이후로 두 딸의 아빠가 되었는데, 아내와 딸들을 지극히 사랑했던 그의 그림의 소재가 도시의 풍경에서 가정적인 것으로 변모합니다. 그래서 43년의 짧은 생에서 그의 후기에는 초상화 작품들이 그려집니다. 물론 그의 초상화 작품은 그의 아내 혹은 그가 살던 마을의 마을 사람들, 이런 보통 사람들입니다. 그는  생계를 위해서 삽화 작업도 계속했고, 시카고 미술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습니다.  그는 '맹장'이 터져서 그만 요절을 하고 맙니다.

 

 

2009년 12월 5일 redfox

 

 

그의 마지막 작품들

 

 

Ringside Seat (1924)

맨 앞줄 관람석

2009년 9월 24일 워싱턴 허시혼 미술관에서 촬영

 

 

 

The Picnic (소풍) c. 1924

Oil on Canvas

2010년 1월 23일 볼티모어 미술관 미국화 갤러리에서 촬영

 

 

조지 벨로우즈 (1882-1925)는 43세의 나이에 (우리나라식으로 따지면 44세가 되던 해에) 맹장이 터져서 요절한 화가인데요, 위의 두 작품들은 1924년, 그가 죽기 전 1년전쯤에 그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위의 경기장 장면이 좀 뿌옇지요?  제가 사진을 잘 못 찍어서 그런것이 아니라 작품 자체가 흐릿한 등불 아래의 장면을 묘사하듯 노리끼리하게 아슴프레 합니다.  제가 허시혼에 여러차례 들렀는데, 볼때마다 저 작품은 좀 어딘가 노란 안개속에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합니다.

 

아래의 '소풍'역시 그가 죽기1년전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요, 그림 분위기가 매우 독특합니다.  (그림 클릭하시면 큰 이미지로 보입니다.) 저는 이 작품을 미술관에 갈때마다 본 편인데요. 그러니까 제가 조지 벨로우즈에 대해서 알기 전에도 이 작품을 알고 있었습니다.  작가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한채로 분위기가 특이한 작품으로 기억을 한 거죠. 

 

제목이 '소풍'인데요, 전체적인 풍경이나 분위기는 암울하고, 음침하고, 곧 어디서 천둥 번개가 칠것같은 불안감을 줍니다. 갑자가 돌풍이 불것같기도 하고요. 물빛도 하늘빛도 심상치가 않아요. 구름조차도 예사롭지가 않고요.

 

가운데에는 소녀가 줄넘기를 들고 서 있고요, 그 아래에서 누군가가 마치 절벽에서 올라오는듯 손을 뻗치고 있죠. 낚싯대를 드리운 남자와, 피크닉 보자기를 펼친 여자가 왼편에 있는데, 오른편에는 한 남자가 사지를 벌리고 하늘을 향해 누워있습니다.

 

이 그림 앞에서서 이태전에 아이들과 대화를 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림이 세기말 적이야. 뭐랄까...암담해... 저 줄넘기를 들고 있는 소녀 말야, 저 줄넘기 이미지는 살바도르 달리도 그린적이 있고... 영원의 상징이라고도 해. 영원은 죽음과도 통한다는 거 알아? 죽음은 영원하쟎아.  줄넘기가 그리는 원, 그 원의 끝없는 회전, 인연의 굴레를 벗어날수 없음을 상징할수도 있고.  하필 줄넘기를 들고 언덕 가장자리에 서있는건 또 뭐니. 불안해보이쟎아.  전체적으로 참 불안해보여."

 

이 그림을 보면 벨로우즈가 즐겨 그렸던 청색 색조와 흰색의 하일라이트도 여전히 보이는데요, 신비로우면서도 스산하죠?  어쩌면 이것이 그가 사랑하는 두 딸과, 아내와 가졌던 인생 최후의 소풍이었는지도 모르죠. 그는 화면 오른쪽에 자신의 주검까지 그렸던 것인지도 몰라요. 그 자신은 그걸 의식하지 못했겠죠.

 

우리는 가끔 그런 얘기 하쟎아요. 어떤 사람이 죽었을때, 그가 죽기전에 나눴던 이야기나 일화들을 떠올리면서, "죽을걸 알고 그랬나?  그런 얘기를 하더라구..." 뭐 이런 얘기 하죠.  뭐 마치 죽을 사람처럼 유언처럼 몇마디 한 것이 마지막 말이 되기도 하고요.  생명은 자신이 언제 죽을지를 안대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뿐 안다는거죠.  그래서 죽음을 예견하는 말이나 행동을 할 수도 있다고 해요 (그런 설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냥 그런 관점에서 그는 이미 그의 죽음을 예견한 그림을 남긴것이 아니었을까.... 볼티모어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다시 만났을때, 그리고 문득 그의 생몰연대와 그림의 제작 년대를 비교해보다가, 문득,  번개치듯 문득,  이런 쓸데없는 상상도 했다는 것이지요.  그런 상상을 하자, 이 그림이 품고 있던 신비로운 세기말적 느낌에 대한 해답을 얻은 기분이 드는겁니다.  그는...다가올...죽음을...그렸나봐...

 

 

2010년 1월 29일 내용 보충 RedFo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