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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29일 금요일

Social Realism (3): Ben Shahn

 

배움을 찬양함

 

 

Book Shop: Hebrew Books, Holy Day Books (책방) 1953

Tempera on Panel

2009년 10월 31일 디트로이트 미술관 (Ditroit Institute of Art Museum)에서 촬영

 

 

 

 

배움을 찬양함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 "어머니"에서


 

가장 단순한 것을 배워라! 자기의
시대가 도래한 사람들에게는
결코 너무 늦은 것이란 없다!
알파벳을 배워라,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못하지만
우선 그것을 배워라! 꺼릴 것 없다!
시작해라! 당신은 모든 것을 알아야만 한다!
당신이 앞장을 서야만 한다.


 

배워라, 난민 수용소에 있는 남자여!
배워라, 감옥에 갇힌 사나이여!
배워라, 부엌에서 일하는 부인이여!
배워라, 나이 육십이 넘은 사람들이여!
학교를 찾아가라, 집없는 자여!
지식을 얻어라, 추위에 떠는 자여!
굶주린 자여, 책을 손에 들어라. 책은 하나의 무기다.
당신이 앞장을 서야만 한다.


 

묻기를 서슴지 말아라, 친구여!
아무것도 믿지 말고
스스로 조사해 보아라!
당신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은
당신이 모르는 것이다.
계산서를 확인해 보아라!
당신이 그 돈을 내야만 한다.
모든 항목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물어보아라, 그것이 어떻게 여기에 끼어들게 되었나?
당신이 앞장을 서야만 한다.
(1931作)

 

위의 그림은 1951년에 그려진 것이고, 브레히트의 글은 1931년작이지만, 어쩐지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처음 이 그림을 만났을때부터 - 저것은, 브레히트의 시와 같구나!  이런 상념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저 그림 이야기를 할때 브레히트의 시를 인용해야지,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림은, 제목을 안 읽고 그림만 볼경우 Books라는 간판 덕분에 책방 풍경임을 알수 있습니다. 그 책방 문을 열어 젖히고, 한 키가 커보이는 여인이 아이를 왼쪽 가슴에 안고, 숄을 두른채 걸어 나오고 있습니다. 어쩐지 그 여인의 손이 굉장히 커 보입니다. 특히 발에 비교해볼때, 손이 기이하게 커보이지요.  아주 커다란 손입니다. 그리고 쇼윈도우에 적힌 글귀가 아마도 히브리언어로 적힌 것이고 그것을 옮기면, 'Hebrew Books, Holy Day Books' 결국 유태인들의 히브리 경전들을 주로 취급하는 종교서적 책방인듯 합니다.  유태인들에게 그들의 '경'은 삶의 가장 기본이 되는 얼개이지요.  유태인들이 수천년간 '나라'도 없이 이리저리 떠돌면서도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인재들을 배출할수 있었던 이유는, 어딜가건 우선 '학교'부터 세우라는 탈무드의 가름침 덕분이라는 이야기를 어느 책에서 본 것 같습니다. 학교, 교육이 우선되는 종족은 살아 남지요.  한국이 일제 식민역사와 참혹한 한국전의 아픈 역사를 딛고 수위안에 드는 경제국가로 성장한 배경도, 한국의 '교육열'을 빼놓고 생각할수는 없을 것입니다. (얼마나 교육열이 높으면, 대학입시 경쟁이 그토록 치열하겠습니까... 교육이 파행으로 흐르는 면도 부정할수 없지만, 이것이, 무엇보다도 교육에 투자하는 것만이 생존의 길이라는 본능과도 같은 원칙 때문이겠지요.)

 

 

 

1951년이면, 1945년에 2차 대전이 끝났고,  2차 대전 전후로 유럽에서 나찌의 홀로코스트를 피해 뉴욕에 온 유태인 이민자들이 뉴욕에서 발을 붙이고 살기 위해 아둥바둥 할 때이겠지요.  1951년이면 한국에서는 625 전쟁이 (제가 어릴땐 '육이오'라고 불렀는데 요즘은 '한국전쟁'이란 이름을 많이 쓰는군요) 진행되고 있던 때 입니다.  한반도의 사람들이 전쟁의 고통속을 헤멜때, 뉴욕 거리의 유태인들도 척박한 남의 나라 땅에서 생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을 것입니다.

 

브레히트가 위의 글을 발표한 1931년은 미국이 경제 대공황을 겪고 있던 시기이고,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경제난이 휩쓸던 시기이기도 하지요. 1931년의 경제 공황과 1951년의 뉴욕의 유태인들이 오버랩 되는 이유는 시기가 다르지만 그 시절을 살아간 사람들의 곤궁한 삶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브레히트도, 벤 샨도 '책'의 '교육'의 '자발적인 공부'를  삶을 살아가는 어떤 해법으로 글에서, 그림에서 제안을 합니다.

 

 

 

오늘, 학교에서 어떤분의 인생상담을 잠시 하게 되었는데요.  가끔 저에게 '지금 공부해도 될런지, 어떤 판단을 하면 좋을지' 두루두루 묻고 싶어하는 분들이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다 가기도 하는데요. 그래서 그분과, 내가 남들보다 늦게 공부를 진행한 일화라던가, 앞으로의 전망이라던가 그런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묻기도 하다가 문득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제가요, 어느날 돌아보니까, 40넘게 살아오면서, 내가 무엇을 이뤘나 생각을 곰곰해보니까, 내 손에 쥔 것이라고는 알토란 같은 내 가족, 무조건 나를 지지해주는 내 가족하고...그리고...죽어서 관뚜껑 덮을때까지 나를 따라다닐 내 학위이더군요. 애인은 나를 버려도, 내 학위는 나를 버리지 않아요. 나는 재산을 잃을지라도 내 지식을 잃지는 않아요.  남들이 나를 인정해주건 말건, 장농속에서 썩히건 말건, 아무튼 내가 공부한 학위는 내가 죽을때 관뚜껑속에 나하고 같이 묻힐거라는거죠."

 

결국, 내게 남겨진 것이라고는, 내가 이 지구에 놀러왔다가, 공부한것. 그것이더라구요.  물론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서 '친구'가 남았더라, '애인'이 남았더라, '재산'이 남았더라, '한권의 시집'이 남았더라, 명품 백이 남았더라,  '판검사 자식이 남았더라'  하고 다양하게 자신의 것을 살필수가 있겠는데, 내가 내것을 주판알 튕겨서 계산해보니 남은것이 '내가 공부한것, 내가 배운것'이더란 것이지요. 지금 당장 배를 곯고, 지금 당장 직장을 잃는다해도, 내가 깡으로 버틸수있는 기반이 뭔가 생각해보면, 나는 내 지식을 무기로 다시 전쟁터로 나갈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아, 내가 받은 교육이 나의 삶의 무기라는 결론에 이른 것이지요. 물론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중요한 무기가 있을수 있지요. 나로서는 나의 지식이 내 무기이지요. 그것이 박사학위인가, 석사학위인가, 학사학위인가, 고등학교 졸업장인가, 그런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고요, 내가 지구상에서 똑똑하게, 지혜롭게 살아갈 능력을 키워주는것 그것이 교육의 힘이거든요.  내가 핍박받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핍박받는 타인을 돕기위해서라도 나는 영수증을 들여다보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잘못 씌어진 고지서를 보고 따질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브레히트의 시, 제가 종알종알 읊는것중에 또한가지가 있어요 (사실 많지요...)

 

 

임시 야간 숙소

           베르톨트 브레히트


듣건대, 뉴욕
26번가와 브로드웨이의 교차로 한 귀퉁이에
겨울철이면 저녁마다 한 남자가 서서
모여드는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행인들로부터 동냥을 받아 임시야간숙소를 마련해 준다고 한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야간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책을 읽는 친구여, 그 책을 내려 놓지 마라.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야간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1931년 作)

 

 

사실, 이 시에서 "책을 읽는 친구여, 그 책을 내려 놓지 마라"는 역설인지 아닌지 조금 헛갈리는 구석이 있습니다.  행동력을 상실한채 '글이나 읽는' 것을 비판하는 것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갈림길에서도 '책'을 읽으라는 것인지. 개인차원의 구제행위가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된다고 역설하는 싯귀는 오히려, 그럼에도 그것만이 유일한 해법임을 드러내고 마는데요.  책을 던지고 행동하라는 말씀일까요 아니면 책을 읽으라는 말씀일까요?  아무튼, 저로서는 그렇습니다. 우리가 책을 읽건, 책을 덮건, 우리 양심의 소리에 따라서 행동을 하건 행동을 유보하고 사색을 하건간에 '비판정신'은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비판'은 '무관심'보다는 나은 것이지요.  빈민구제를 몸소 실천하는 사람이나, 혹은 '그렇게 해봤자 소용없지'하고 비판하는 사람이나 이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또다른 사람들이 존재하는데요 -- 아예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지요.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지를 거부하거나...마찬가지입니다만. 코헨의 '잔인한 국가-외면하는 대중'에 그런 예가 잘 나와있지요).

 

단 한장의 그림만으로도, 우리는 벤 샨이라는 작가가, 사회의 밑바닥 빈곤층 (당시 유태인이면 사회 하층민입니다)사람의 삶의 한 장면을 통해서 뭔가 강한 메시지를 전하려 했다는 것을 짐작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미국 사실주의 화풍에서도 Social Realist (사회적 사실주의자) 화가로 분류를 하는 것이지요. 미국미술사 책들마다 Social Realism 을 보는 시각이 조금씩 다르지만, 대부분의 책에서  Ben Shahn (1898-1969) 을 이들의 Social Realist 분류표에 끼워 넣는 편입니다.

 

 

 

 

 

 

벤 샨의 두장의 그림 사이에서.

디트로이트 미술관, 2009년 10월 31일

왼편에 책방그림,오를쪽에 살짝 보이는 큼직한 액자가 클라리넷과 호른 그림.

 

 

 

 

도시 서민들의 유희 풍경

Handball (핸드볼), 1939

Gouache on paperboard

2009년 9월 뉴욕 현대미술관 (MoMA)에서 촬영

 

 

 

 

 

 

 

해방이란 무엇인가?

 

 

관련 이야기 :  http://americanart.textcube.com/85

Liberation (해방), 1945

Gouache on Board

2009년 9월 뉴욕 현대미술관 (MoMA)에서 촬영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http://americanart.textcube.com/196

Franklin Delano Roosevelt,  (30 Jan 1882 - 12 Apr 1945)

1944년 제작

Color Lithographic Poster

 

 

워싱턴 디씨, 국립 초상화 미술관 (National Portrait Gallery)은 국립 미국 미술관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과 건물을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미음자 건물의 통로를 따라 다니다 보면 초상화관과 미국미술관을 통과하게 되는 구조이지요. 이 작품은 초상화 미술관의 역대 대통령의 초상화들이 걸려있는 한켠에 있는 작품입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1945년에 사망했는데, 이 초상화 포스터 작품은 1944년 작품이군요. 

 

벤 샨은 러시아 유태인 이민자의 아들이었고,  그 자신 사회주의적인 이념을 갖고 있던 화가였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사회주의 사실주의 화가들은 죄다 러시아 출신 유태인들이다 라는 농담섞이 설도 있습니다.)  그는 경제 암흑기에  강력한 국가 주도의 경제정책을 펼치고 노동자들의 권익을 지켜준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을 1930년대 1940년대에 걸쳐서 강력한 지지를 보냈습니다.  그래서 루즈벨트 대통령 시절의 여러가지 미술 관련 사업에 참여를 하기도 했습니다.  위의 초상화 포스터속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아버지와 같이 인자하고 믿음직하게 그려져 있지요.

 

 

광부의 아내

 

 

 

Wives of Miners (광부의 아내들), 1947

필라델피아 미술관 소장

(제 사진파일을 실수로 지워버려서...엉엉...언라인에서 빌려왔습니다.)

 

1947년 3월 25일 일리노이주의 남부 Centralia 의 광산에서 폭파사고로 광부 142명이 매몰되는데 그중 31명이 구조되고 111명이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한 적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당시의 참상을 그린 벤샨의 작품중에, 남겨진 가족에 촛점이 맞춰진 것입니다.  아기를 안은채 의자에 앉아있는 여인도 있고, 깍지낀 손으로 우두커니 서있는 여인도 그려져 있습니다. 문밖의 하얀 마당에는 검은 옷의 사나이 두명이 보입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의 머리위에, 선반같은 것이 있고, 선반에 대충 걸린 옷가지는, 어쩌면 매몰된 광부가 남기고 간 유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꾹다문 입, 강하게 깍지낀 두손.  그것이 이들이 가진 '전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청각예술의 시각화

 

Composition for Clarinets and Tin Horn, 1951

Tempera on Panel

2009년 10월 31일 디트로이트 미술관 (Ditroit Institute of Art Museum)에서 촬영

 

 

벤샨의 그림중에는 악기, 음악을 소재로 한 것들이 종종 눈에 띄는데요, 그는 시각예술 작품속에 청각예술적 요소들, 소재들을 도입시키고 싶었던걸까?  이런 상상을 혼자 해 본적이 있습니다.  이런 악기 그림을 보면,  우리 상상속에 어떤 음악이 흐르지요.  우리의 상상력의 영역까지 그가 닿고 싶었던 것일까요?

 

그런에 이 그림속에 두주먹을 얼굴에 기댄 이 사람 -- 얼굴이 그려져 있지 않지만, 우리는 얼굴을 상상할수 있지요. 그것도 어쩐지 주먹의 표정으로 - 그가 고뇌에 찬 표정일것이라는 상상을 하게 됩니다.  재미있지요?  우리는 얼굴이 보이지도 않는 사람의 움추린 어깨, 꽉 쥔 주먹, 이런것들을 통해서 이 그림속의 사람이 머리를 쥐어짜듯 인상을 쓰고 앉아있는 것을 상상하게 됩니다.  참 신기하죠?

 

주먹쥔 손을 통해, 그려지지도 않은 사람의 얼굴 표정을 상상하는가하면

그려진 악기를 통해서 그 악기 소리를 상상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그림을 보는 인간의 상상력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상상력의 주인은 관객이고

벤 샨은, 벤 샨의 '회화 (시각적 예술 장치)'가 그것을 유도해내는거죠.

 

 

 

 

 

사람들

Six (여섯), 1952

Tempera on Linen stretched over Plywood

2010년 1월 23일 볼티모어 미술관에서 촬영

 

 

저는 이 6인 (여섯) 그림의 배경이 궁금 합니다. 여기 함께 앉아 있는 여섯명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을것입니다.  당시의 어떤 사회적 사건의 주인공들일지도 모르고요.  사연이 궁금해서 자료를 찾아봤는데, 마땅히 이 그림을 설명해줄만한 자료를 찾지 못했습니다.  차후에 자료가 발견되면 이야기를 덧붙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이 사람들의 주먹, 손을 유심히 보는 것만으로 지나치도록 하겠습니다.

 

 

 

 

인생의 삼단계: 늑대 --> 사자 --> 개

 

 

After Titian (티티안 따라하기) 1959

Tempera on Fiberboard

136 x 77.3 cm

2009년 12월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티티안 (Titian, c.1485-1576)은 베네치아의 르네상스기의 화가입니다. 미국 사실주의 화가들 중 티티안의 영향을 받은 이가 다수입니다.  그러면 티티안이 무슨 그림을 그렸길래 티티안을 따라 그려본 것일까요?

 

http://en.wikipedia.org/wiki/Allegory_of_Prudence

 

그림을 위에 링크된 위키피디아 페이지에서 빌려왔습니다. 위키피디아의 설명에 따르면, 티티안은 '사려 (prudence)'의 우화를 위의 그림으로 표현해 냈습니다.  세 사람의 얼굴과 세가지 동물의 얼굴이 나오는데요, 오른편에서부터 보면, 유년기에는 늑대, 장년기는 사자, 노년기는 개에 비유 되었습니다.

 

티티안의 세가지 얼굴에서 노인의 얼굴이 티티안이고 가운데는 아들, 오른쪽은 사촌이라고 합니다.  벤 샨의 그림은 61세가 된 벤 샨, 노년의 벤 샨은 이를 드러낸채 웃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벤샨은 아직 이가 나지도 않은것처럼 보입니다.  티티안의 그림에서는 오른쪽, 유년기의 늑대의 이빨이 보이는데, 벤 샨의 유년기의 늑대는 이빨이 없습니다. (그래서 혹시 이쪽이 노년기인가 고민을 좀 했는데, 머리카락을 보고서야 유년기 노년기를 확실히 구분할수 있었지요).  티티안의 그림에서는 왼편, 노년기에 이빨 빠진 개가 그려져 있는데, 벤 샨의 노년기는 이를 드러낸채 웃고 있는 개가 그려져 있습니다.

 

61세의 벤 샨에게 노년은 이빨빠진 힘없는 시기가 아니었을겁니다.  세상을 살아본 노년을 맞이하는 화가가 돌아보기에 그의 어린 시절은 이빨이 나지도 않는 어린 늑대 혹은 어린 강아지의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송곳니조차 드러낼 필요도 없던 순수의 시대.  성년이 되어 세상과 겨뤄보고 파도를 겪은 그는 노년을 맞이하면서 삶에 대한 여유와 느긋함과, 미소지을수 있는 정신적 풍요를 찾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티티안에게 노년이 이빨빠진 늙은 개의 양순함이었다면,

벤 샨에게 노년은 권력을 가져본 자의 한가로움, 느긋함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티티안과 벤 샨 그림에서 가장 현격한 차이가 나는 곳은 어디일까요?  저는 벤 샨 그림의 '손'에서 그 차이를 찾고 싶습니다. 벤 샨의 그림에는 깍지 낀 큼직한 손이 그려져 있지요?

 

 

 

 

 

손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

 

 

위에 제가 미술관에서 사진찍어온 작품들중에서

 1. 배움을 찬양함

 2. 루즈벨트 대통령 초상화 포스터

 3. 광부의 아내들

 4. 클라리넷과 틴 혼의 구성

 5. 여섯

 6. 티티안 따라하기

 

 

작품들의 공통점으로 들 수 있을것을 저는 '커다란 손'에서 찾습니다.  제가 구경한 벤 샨의 그림들에서는 기이하게 '손'이 과장되게 그려져 있어요. 특히 루즈벨트 대통령 초상화에는 '대중'을 상징하는 '손들'이 그려져 있지요.  이 그림의 손들은 리베라의 디트로이트 미술관 벽화 (http://americanart.textcube.com/150 ) 를 연상시킵니다.

 

 

http://fs.textcube.com/blog/1/13644/attach/XLqmAQGN5t.jpg

 

제가 썼던 페이지에서 사진을 끌어다 놨는데요.  디트로이트 미술관의 벽화에서 제게 인상깊었던 것이 저 거대한 손들이었습니다. 주먹을 쥐었거나, 뭔가 쥐고 있거나 혹은 펼친, 다양한 사람의 손들.  리베라는 남쪽, 북쪽 벽화의 중앙 상단을 거대한 손들로 장식했습니다.

 

사실 이 작품을 마친 이후에 리베라가 뉴욕의 록펠러 센터의 벽화 작업을 하러가는데, 그때 벤 샨이 록펠러 센터 벽화 작업에 합류를 하여 리베라의 작업을 돕게 됩니다. 벤 샨 역시 나중에는 독자적으로 여러가지 벽화 작업을 이끌기도 했고요.  그러한 대형 벽화 작업에 리베라의 영향이 있었지요.  글쎄요, 벤샨의 '커다란 손'들이 반드시 리베라 그림의 영향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벤 샨이 그려낸 '손'들의 의미는 리베라의 의도와 흡사한듯 해 보입니다.  리베라의 벽화에서 '손'은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의 상징이었다고 할수 있거든요. 

 

손 - 도구

손 - 노동

손 - 창조

손 - 책을 들고

손 - 아기를 안고

손 - 고뇌하고

손 - 기도하고

 

사실 우리들은, 저같은 보통사람은 '얼굴'에 신경을 쓰고, 얼굴에 화장을 하고, 얼굴을 좀더 아름답게 가꾸고 싶어하고, 얼굴로 어떤 좋은 인상을 주려고 하지만, 의외로 우리의 '손'이 우리의 얼굴보다 더 많은 표정을 갖고 있을지도 몰라요.  벤 샨의 그림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특히 깍지 낀 손들을 잘 보셔요.

 

광부의 아내가 깍지낀 손은

(1) 어쩔지 몰라 고민하는것 같기도 하고요

(2) 기도하는 것 같기도 해요

(3) 마음을 단단히 잡기 위한 제스처로 보이기도 하고요

 

여섯사람의 깍지 낀 손들은 어떤 판결 앞에서 마음을 추스리기 위한 제스쳐로 보입니다. 인생의 삼단계를 그린 '티티안 따라하기' 그림의 깍지 낀 손은 '신중함'을 상징하는 장치 같아요. 

 

어떤가요? 손이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하지요?

 

 

 

어느 사회주의 사실주의 화가의 영광의 세월

 

Ben Shahn (1898-1969)은 1898년 러시아 유태인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1906년 온가족이 미국의 뉴욕으로 이민을 하여 정착하게 됩니다. 그는 석판화 기술을 익히기도 했고, 한때는 뉴욕대학에서 생물학 공부를 하기도 했었는데, 후에 National Academy of Design 등 미술 학교로 가서 미술 수업을 연마하게 됩니다. 유럽등지를 여행하며 당시의 미술 사조에 눈을 뜨기도 하거니와 유럽의 미술을 익히기도 했는데, 그는 유럽의 미술을 익힌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만의 세계를 개척해 나가지요.  일찌감치 좌익 사회주의 사상에 눈을 돌린 그는 사회 비판적인 작품 Sacco and Venzetti (1932) 사건을 일련의 작품에 담아냄으로써 화단의 주목을 받으며 그의 이름을 일찌감치 세상에 알리게 됩니다.  이 사건은 1920년에 있었던 일로 이탈리아 이민자 였던 두명의 사나이가 온당치 못한 판결을 받고 사형을 당한 일로, 벤 샨은 미국 기성 세대의 위선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래에 문제의 작품 이미지를 빌려다 올렸습니다. 이 작품은 벽화로도 제작되었는데요, 관속에 누워있는 두명의 사나이가 문제의 사코와 벤제티이고, 그의 주변에 서있는 세명의 사나이가 당대에 재판과정에 참여했던 지식인들이라고 합니다.  두명의 시민이 억울한 사형을 당할때, 이를 방치한 지식인들의 '표상'이지요.

 

 

 

http://www.usc.edu/schools/annenberg/asc/projects/comm544/library/images/367.jpg

The Passion of Sacco and Venzetti (사코와 벤제티의 수난), 1931-1932

Tempera

7x4 feet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소장

 

 

 

 

1932년 이 출세작을 시작으로, 벤 샨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 딜 정책을 지지하고, 리베라의 벽화 작업에 동참을 하기도 하면서 1969년 사망할때까지 영광의 한 세상을 삽니다. 다채로운 미술 활동및, 저술, 강의까지 하면서 당대의 영예를 누렸지요. 사회주의 사실주의 화가로서 미국에서 당대의 영광을 생존시 누릴수 있었다는 것이 신기한 알이지요?

 

벤 샨의 예를 봐도 그렇고, '사회주의 사실주의' 하면 대개는 '사회주의 (social)'라는 말에서 러시아식 빨갱이 사상을 연상할수도 있겠지만,  미국 화단에서 보였던 '사회주의' 사실주의 운동은 '사회 현상을 비판적으로 보는 선'에서 대개 잠잠해진 편 입니다.  그래서 순수한 의미의 '사회주의'하고는 거리가 있다고 할 수 있지요.  저는 이를 '미국식 사회주의'라고도 정리를 하곤 하는데,  프링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식의 사회주의를 말하는 것이지요.  난세에, 국가 주도의, 국민 복지를 위한, 노동자를 위한, 그런 미국식 사회주의.

 

제가 수집한 그림을 중심으로한 벤 샨의 페이지를 대충 이쯤에서 정리하겠습니다. 시라큐즈 대학에도  벽화로 존재 한다는 위 작품을 제 눈으로 보고 싶은데 아직 기회가 없었습니다.  훗날 혹시 벤 샨의 문제 작을 볼 기회가 생기면 그때 이 페이지를 업데이트 하도록 하겠습니다.

 

2010년 1월 29. RedFox

 

 

 

 

 

 

 

 

 

 

 

 

 

 

 

 

 

 

 

 

 

 

2010년 1월 28일 목요일

Horace Pippin: 아무도 모르게 홀로 성장한 천재

Horace Pippin (1888-1946) 의 작품들을 미국의 미술관에서 만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가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았고, 그리고 그가 '화가'로 알려지고, 화가로 활동한 기간이 극히 짧기 때문입니다. Horace Pippin은 '모세 할머니 (http://americanart.textcube.com/93)' 와 마찬가지로  어린시절부터 가난하여 미술 교육이나 정규 학교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성장했으며, 홀로 취미삼아 그림을 그렸고,  그러다가 어느날 뒤늦게 그의 예술성이 눈에 띄어 미국 미술사에 이름을 올리게 된 평범한 이웃같은 사람입니다.

 

 

겨울 저녁의 노래

 

피핀의 삶과 예술을 정리하기 전에, 우선 다음 세장의 그림들을 보시겠습니다. 실내 (1944), 기도하기 (1943), 도미노게임 하는 사람들 (1943).  제작 년도로 따지면 '실내'가 가장 뒤로 가야 마땅하겠지만, 저는 '실내'라는 작품을 제일 앞에 배치시켰습니다.  이 세편의 작품을 보면서 '공통점'들을 한번 찾아 볼까요?

 

 

사진 클릭하시면 큰 이미지로 감상하실수 있습니다.

 

 

Interior (실내) 1944

Oil on Canvas

2010년 1월 16일 워싱턴 국립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Saying Prayers (기도하기) 1943

2009년 9월 펜실베이나 Brandywine River Museum 에서 감상. 사진촬영 금지구역이라, 복제품 사온것을 사진 찍음

관련 페이지: http://americanart.textcube.com/46

 

 

 

Domino Player (도미노 게임하는 사람들) 1943

Oil on Composition Board

2009년 9월 워싱턴 필립스 콜렉션에서 촬영

 

 

저는 사실, 이 세편의 작품들을 각기 발견한 싯점이 동떨어져있으므로 (2009년 9월, 9월, 2010년 1월) 이것들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는 안중에도 없었는데요.  호레이스 피핀 이야기를 하려고 그동안 갖고 있던 그림 사진들을 나열하다보니 뭔가가 잡히더란 것입니다. 저는 그림 이야기를 하기 위하여 미술사책이나 각종 비평서들을 심심풀이차원에서 대충대충 보기도 하지만, 정작 제가 페이지를 열고 그림 이야기를 할때는, 그림에 집중해서, 그제서야 제가 발견하게 된 사항들을 정리하게 됩니다. (그래서 페이지 열어놓고 몇번씩 덧붙이거나 고쳐쓰거나 하는 일이 발생하지요.  그림보면서 이야기하면서 - 그야말로 현장에서 이야기를 하게 되니까요. 미리 생각한 얘기가 아니라, 지금 자판 두드리면서 생각 나는대로 쓰는거죠.)

 

위의 세장의 그림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무엇인가를 찾으셨나요?  (심심해서 시간을 어떻게 죽일지 모르는 독자라면, 한번 세장의 그림에 발견되는 요소들을 종이에 적어보세요. 그러면 시간이 금방 갈겁니다.  예...제가 이런 식으로 고통의 시간들을 보낼수 있었거든요. 이거 의외로 괜챦은 처방이지요. 헤헤.  자살하려다가, 심심해서 제 페이지 발견하시면, 자살도 포기하고 이거 하게 됩니다. 요소들이 뭐가 있다는거여 대체?  이거나 마저 하고 죽으까? 이러고... 하다보면... 고통이 썰물처럼 슬슬 잊혀질지도 모릅니다.)

 

자 이 세장의 그림에 뭐가 들어있나요.

 

 1. 네, 창문이 하나씩 있습니다. 창문의 모양도 일정하고, 창문을 가리는 커튼은 일률적으로 거무칙칙한 색입니다.

 

 2. 그 창문을 좀더 들여다볼까요? 그 창틀 자세히 보셨습니까?, 아, 창틀에 허옇게 칠해진것, 저것은 아마도 창틀에 쌓인 눈 (snow)이겠지요. 아 창밖에 눈이 쌓여있나봅니다. 겨울이군요. 음.  (아유, 똑똑해!  이런거 발견하셧으면, 스스로를 '난 천재야, 천재야!'하고 외친후 머리를 쓰다듬어주십시오.)

 

 3. 방의 가운데에는  반드시 등잔불이 있고요, 등잔불 옆에는 사발시계 (탁상시계: 우리 할머니는 이것을 꼭 사발시계라고 불렀습니다)가 있습니다. 제가 제작 년도를 무시하고 그림을  현재의 순서대로 차례차례 배치시킨 이유는, 이 시계 때문입니다.  '실내(1944)'라는 작품속의 시계는 여섯시를 가리킵니다. '실내' 작품속에는 등잔불 하나, 그리고 구석에 촛불 하나 이렇게 조명용 불이 두개나 있군요.  기도하기와 도미노 그림속의 시계는 여덟시를 가리킵니다 (물론 모두 저녁 시간대일것입니다.) 

 

 4. 방에는 화덕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 화덕은 요리및 난방의 기능까지 톡톡히 해주지요.

 

 5. 화덕 근처에 '물동이 (일명 바께쓰)'들이 반드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실내에 급수 시설이 없을경우, 어디선가에서 물을 길어다 썼겠지요. 저 물을 끓여서 차를 만들고, 설겆이도 하고, 씻기도 했을것입니다. (아, 저도 시골에서 다 저러고 살아서 잘 알지요.)

 

 6. 잘 보십시오, 벽의 어딘가는 금이 가고 깨져 있습니다. 닳고 망가져가는 일상이지요. 원래 우리가 사는 풍경이 어딘가 금가고, 삐그덕대고 닳아 없어지고, 칠이 벗겨지고 그런것 아닌가요. (알란 드 보통의 Architecture of Happiness 라는 책에서 -- 모든 건축물은 완공되는 순간부터 망가져간다는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끊임없는 유지 보수 작업이 기다리는거죠. 서서히 부식되고 침식되고 기울어가는거죠. 우리의 삶도.)  

 

 7. 깨진 의자 등받이들도 보이는군요.

 

 8. 그 밖에 실내 풍경에 보이는 자질구레한 도구들을 나열해봐도 재미있는 작업이 될것입니다. 호레이스 피핀이 즐겨그린 실내풍경속의 물품들은 무엇인지. 후라이판도 보이고, 빨래판 같은것도 보이고, 알록달록한 깔개하며... 참 다양한 일상의 물건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들여다볼수록 정겨운 장면이지요.

 

위의 '실내'와 '기도하기'를 보면, 참 재미있어요. 실내 디테일을 보면 약간 차이가 나지만, 엄마가 머리에 쓰고 있는 스카프의 무늬하며, 두 그림의 주인공들이 동일한 사람들인것처럼 보입니다.

 

오후 여섯시에, 저녁상을 물리고 엄마는 화덕 앞에 앉아 담배를 한대 피우고 있고, 학교에 다니는 사내녀석은 방 구석에 촛불을 키고 숙제를 하는것 같기도 하고요, 아직 어린 꼬마 여자아이는 인형놀이에 열중해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은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그림을 그리고 있을지도 모르고요. 호레이스 피핀 자신이지요) 창밖은 겨울인듯, 창틀에 눈이 쌓여있고요.  그래서 실내는 더욱 따스하게 느껴집니다.  각자 자신의 생각에 열중해 있는 풍경이지만, 각자 다른 방향을 보고 있는 세사람이 서로 소외되었다거나 서로를 소외시키고 있는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서로에게 의지하며 각자의 상념에 잠겨있는 것이지요.

 

 

오후 여덟시, 아이들은 잠옷으로 갈아입고, 엄마 품에 매달려 저녁 기도를 합니다. 여자아이는 엄마품에 매달려 기도하느라 애지중지하던 인형도 발뒷쪽에 떨어뜨려 놓았군요. 이들은 기도를 마친후 잠자리에 들을 것입니다.

 

오후 여덟시, 아이들이 잠자리로 물러간 후, 혹은 이웃집에서는 사람들이 모여서 도미노 게임을 합니다. 화덕 앞에 앉아 퀼트 작업을 하는 여인네도 보입니다. 전에, 겨울밤에, 우리들이 고모들과 어울려 내기 화투놀이를 할때, 우리 할머니는 호롱불 옆에 앉아 해어진 내복이나 양말을 꿰매셨지요.  바로 그런 풍경입니다. 겨울밤은 그렇게 일찍 찾아들고, 그리고 길었습니다.

 

 

 9. 아하!  (제가 일을 좀 하다가 문득 화면을 들여다봤는데요. 재미있는것을 발견했습니다.)  엄마가 머리에 뒤집어 쓴 스카프, 빨간 바탕에 점박이 무늬가 세장의 그림에 모두 등장하죠?  그러면, 이 세장에 등장하는 스카프를 머리에 뒤집어 쓴 저 사람은 동일인 인걸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오후 여섯시쯤에 화덕 앞에서 곰방대를 피우며 휴식을 취하던 엄마는, 오후 여덟시에 아이들을 품에 안고 저녁기도를 하고, 애들을 잠자리로 보낸후, 어른들과 어울려서 도미노 게임을 하는겁니다.  더불어서, 저 머리에 스카프 쓴 여성은 화덕에서 멀리 앉아있을때는 짙은 색의 두툼한 숄을 두르고 앉아있군요.  아무래도 윗풍도 있고 화덕에서 멀어지면 추우니까요...   자, 세장의 그림이 이렇게 연결되어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지지요? 

 

 10. 시간대별로 커튼의 높이가 다른것도 보입니다. 오후 여섯시의 커튼과 오후 여덟시의 커튼 높이가 달라요.  시간이 갈수록 커튼이 내려가는거죠.  호레이스 피핀이 실내 풍경을 그릴때, 그는 어쩌면 굉장히 사실에 입각해서 작업을 했던것 같습니다.  그림 그린 시기가 다른데도 일관성이 있쟎아요. 그 일관성은 ...그의 치밀함에서 오는것일걸요 아마도. 사실에 입각해서 그리는 치밀함.  놀랍죠?  와... 놀랍군요...

 

 

Interior (실내 풍경) 세밀하게 들여다보기

 

제가 재미난거 보여드릴까요?

 

우선 이 그림이 걸린 위치의 '의미심장'함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이 그림은 국립 미술관의 동관 (East Bldg) - 현대 미술관에 걸려있습니다.  그리고 지하층의 중심부에 있는 이 그림의 주위에는 마티스, 와홀, 잭슨 폴락, 뉴만, 로스코, 등등 20세기 세계 미술및 미국미술의 지배한 대가들이 총 출동해 있습니다.  그 한가운데 우리의 흑인 아저씨 호레이스 피핀, 정규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혼자서 심심풀이로 상자 뚜껑이나 생활 집기에 그림을 그려서 장식하는 것이 취미였던 한 사나이의 그림이 걸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좀 세밀한 부분을 보실까요?

이그림의  벽면을 좀 보십시오. 이 집의 벽면이 도대체 이상한겁니다.  이 그림의 중앙부분, 물동이가 있는 곳에서부터 왼편, 소년이 서있는 구석까지, 저 벽이 도대체 어떻게 된걸까요? 얼핏 보기에 물동이가 있는 곳이 모퉁이같이 생겼거든요.  그런데 모퉁이처럼 줄이 그어진 곳은 거기가 아니고 더 왼편입니다.  양동이가 있는 곳도 모퉁이이고,  줄이 그어진 곳도 또다른 모퉁이 인걸까요?

 

 

 

 

 

그래가지고, 피핀이 뭐랄까 착시 현상을 이용해 공간을 뒤틀어 놓는, 뭐 Escher 기법이라도 쓴걸까?  별 고민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시내 나간김에 국립 미술관에 또 가서 그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며 연구를 하다가,  나름 해답을 찾았지요.  바닥에다 시선을 고정시키고 보면, 모퉁이가 저쪽으로 꺾어진 것같이 보이는 회색 삼각형 모양은, 꺾어진 모퉁이 각이 아니고, 테이블에 올려진 촛불 때문에 생긴 테이블의 그림자였습니다.  테이블의 그림자가 선명하게 각을 이뤘던 것입니다.  촛불은 실내가 어두울수록 환하게 느껴지고, 그만큼 그림자도 깊지요.  그러다가 저 혼자 웃고 말았습니다,  물동이와 의자 사이의 바닥에 회색 그림자속에 '쥐구멍'이 하나 뚫려있는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피핀은 쥐구멍까지 그려넣는 관찰력과 여유와 웃음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 이번에는, 아래 부분에서 오른쪽의 노란 동그라미 부분을 들여다보세요. 벽부분에 흰 칠이 되어 있는데, 그 칠 안쪽에 뭔가 보이지요? (ㅎㅎㅎ) 커다란 죽 솥같은 것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제가 추측하기에 원래 여기다가 죽솥을 그렸다가, 나중에 그냥 벽으로, 흰칠을 해버린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죽솥은 희미하게 그냥 거기 남아있습니다. (죽솥의 유령이라고나 할까요).  왜 그런 일화들이 있쟎아요. 밀레나 고호나 이런 화가들이 가난해가지고 캔바스 살 돈이 없어서, 기존 작품에 덧칠을 하고 새 그림을 그리고, 몇번씩 그렇게 그림 연습을 했다고 하지요. 그것을 요즘 현대기술로 연구를 해보면 몇번을 덧칠하고 그렸는지 그런것까지 계산이 된다고도 하고, 그 자료를 바탕으로 밑에 깔린 그림을 대충 짐작해서 복원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들었거든요.  피핀역시 이그림을 그리다가 생각을 바꾸고 덧칠을 하거나 이미 그린 대상을 뭉개버리거나 그러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아, 부분부분으로 잘라봐도 참 아름다운 정경입니다. 색상이나 붓 터치나 서툰듯 정묘하고,  뭐랄까,  기성 화단의 영향을 받지 않고 홀로 성장한 사람의 어떤 개성과 순수함도 느껴지고요.

 

 

그러면, 피핀의 실내 풍경속의 창문들은 왜 모두들 하나같이 수직으로 길다란 직사각형 모양일까요? 제가 그 단서가 될만한 자료를 갖고 있습니다.  지난 2009년 9월에 펜실베니아 웨스트 체스터의 피핀의 집을 찾아가서 그가 살던 집을 밖에서 확인해보고, 그가 평생 지나치던 동네 골목길, 마을등을 둘러본적이 있지요. http://americanart.textcube.com/45 페이지에 그 내용이 실려있습니다.  자 이 건물의 두가구중에서 오른쪽 절반이 피핀이 결혼이후 평생 살았던 집입니다. 본래는 그의 아내의 집이었지요. 그의 아내가 아이들과 함께 살던 집인데 피핀이 그녀와 결혼하여 그 집에 함께 살게 된 것이지요.  실제로 가서보면 3층이긴 하지만, 한층 면적이 넓은것은 아닙니다. 그냥 소시민의 집이지요. 창문들이 죄다 수직으로 길쭉한 직사강형이지요?   그림속의 창문는 바둑판 모양의 창틀이 있었는데, 현재의 창은 '현대식' 통유리군요.  손좀 봤겠죠. 피핀이 살던 동네가 궁금하시면 링크 해 놓은 페이지로 이동하시면 됩니다.

 

http://americanart.textcube.com/45

 

 

올드 블랙 조 : 그리운 날 옛날은 지나가고

 

Old Black Joe (1943)

Oil on Canvas

61 x 76.1 cm

2009년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관련 페이지: http://americanart.textcube.com/40

 

이 그림에 대한 이야기는  http://americanart.textcube.com/40  에 정리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에이브라함 링컨 : 책과 촛불

 

 

에이브라함 링컨이 어떤 정치적 함의를 갖는 존재인가는 사람마다 해석이 다를수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미국의 흑인들에게 링컨은 '성자'와 같은 존재 일 것입니다. 아무래도 상징적으로 흑인 노예 해방에 기여한 사람이니까요 (상징적으로요....실제 역사를 들여다보면 링컨이 성자라서 그렇게 행동 한 것도 아니고, 흑인 노예 해방을 위해서는 무수한 정의로운 사람들의 노력과, 그리고 희생이 있었다고 봐야지요.)

 

링컨이 흑인들에게 상징적으로 위대한 인물일뿐더러,  호레이스 피핀이 살던 마을 거리를 걷다 보니 에이브라함 링컨의 전기책 (biography)이 그 마을에서 발간이 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그 출판사 건물 앞에서 사진도 찍고 그랬죠.  http://americanart.textcube.com/45   그러니 매일 이동네를 오가던 호레이스 피핀에게도 링컨은 각별한 인물이었을겁니다. 그는 여러장의 링컨 그림을 남겼는데요, 아래 그림은 제가 카네기 미술관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Abe Lincoln's First Book (에이브라함 링컨의 첫 책) 1944

Oil on Canvas

2009년 10월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에서 촬영

 

 

왜 이런 제목을 달았는지는 저도 잘 알수가 없군요.  에이브라함 링컨이 책벌레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고요, 특히 그의 생모가 사망하고 새어머니로 들어온 분이 링컨의 교육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고 하지요.  소년 링컨과 그 새어머니는 단단히 연결된 애정의 관계였다는 기록을 여기 저기서 볼 수 있습니다.  링컨은 성경책을 달달 외도록 읽고 또 읽었다고도 합니다.  옛날에, 책이 귀하던 시절, 집집마다 갖고 있었던 책이 아마도 성경책이었을걸요.  다른 책은 없어도 성경은 있었겠지요, 기독교 문화권 사회였으니까.  그러니 유일한 그 책을 읽고 또 읽고 달달 외도록 읽었을겁니다.  딱히 그 책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다른 읽을거리가 없으니까요. 

 

(저도 어릴때 이솝 이야기책을 저주하면서 읽던 생각이 납니다. 책이 보고 싶은데 읽을거리가 없으니까, 그나마 집에 한권 있는, 그 너무 짧아서 짜증나는 이솝이야기를 달달 외도록 읽는거죠. 거기 나오는 모든 짐승들을 저주하면서.  왜냐하면 모든 이야기가 반페이지짜리 짧은 얘기라서, 길고 길고 긴 얘기가 그리웠던 거죠. 끝나지 않는 긴 얘기가.  아 그러니 제 블로그 페이지가 길어도 용서하시길. 전 짧은 이솝 얘기를 저주하면서 읽고 읽었던 악몽의 기억이 있어서 아마도 그 트라우마가 아주 심할겁니다.)

 

이 그림은 호레이스 피핀 아저씨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건 꽤나 상징적입니다. 직접 두개의 투명한 자를 갖고 와서 확인해보셔도 되는데요. 이 그림에 대각선을 그리면 그림의 정중앙에 오는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링컨의 책을 집기 위해 뻗은 왼손 입니다. 링컨의 왼손이 그림의 정 중앙에 있고요, 그 손이 막 책을 집어 들었고요 그리고 그의 지척에 촛불이 켜져있어, 그 촛불의 빛때문에 링컨이 입고 있는 셔츠가 희게 빛납니다.  촛불은 링컨의 왼뺨과 왼팔을 희게 비쳐줍니다.  책(바이블)은 우리 삶의 빛이지요. 촛불 역시 우리 삶의 빛입니다. 링컨은 두가지 삶의 빛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어둠속에서 링컨이 희게 빛납니다.

 

설마 피핀이 의도했을거라고는 보지 않지만,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틴성당의 천정화, 천지창조에서  손을 뻗치는 아담과 같지 않습니까?  그냥 책을 향해 손을 뻗치는 소년의 이미지가 손을 뻗친 아담을 연상시킨다고요...

 

그런데요, 그림에는 흑색과 백색이 돋보입니다. 백색은 눈이 부실듯이 하얗게 빛나는데, 그가 발라놓는 흑색이 그 백색을 더욱 빛나게 합니다.  특히 '링컨의 첫 책' 그림은 흑과 백으로만 이루어진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만약에 화면 중앙에 촛불이 그려져 있지 않았다면 이 그림은 어땠을까요?

 

저는 이 그림을 발견했을때 그 눈부신 흑과 백의 대조와 링컨 머리위의 천장의 사선이나 목조 벽면, 그리고 바닥 마루의 선등을 보면서, 문득 프랭크 스텔라를 떠올렸습니다.  잠시 웹에서 스텔라의 작품을 빌려왔습니다. 검정 물감과 흰 물감으로만 작업한 스텔라의 매우 현대적인 이 작품과,  위의 피핀의 링컨 그림을 비교해보면, 어떤 것이 더 절실하게 다가오나요?  제가 스텔라를 좋아하고, 스텔라 그림을 보면 좋아서 입이 찢어지는 편인데요,  그런데 피핀의 링컨 그림이 스텔라의 현대성을 휙 뛰어넘는다는 느낌이 듭니다.  좀더 현대성이 느껴지고, 그리고 진정성이 느껴집니다.  (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아...뭔가 더 절실하다는거죠...아...공부해야돼...잘 설명을 못하겠어..공부 더 해야돼... 한탄 모우드) 아무튼, 예, 그렇습니다.  피핀의 링컨 그림에서 추상미술 작품을 뛰어넘는 추상성을 얼핏 느꼈다는 것이지요. 그 색감에서, 구도에서.

 

 

http://images.artnet.com/images_US/magazine/features/tuchman/tuchman7-9-6.jpg

 

저 링컨 그림을 미술관에서 발견했을때는, 어떤 '충격' 같은것을 느꼈었거든요. "아니! 어떻게! 이렇게 그리지? 어떻게?"  그리고는 입벌린채 멀거니 얼빠진 사람처럼 서있는거죠... 

 

 

 

아슴푸레한 기억들

 

 

Shell Holes and Observation Balloon, Champagne Sector (상파뉴 지역의 폭탄자국과 관측용 낙하산)  c. 1931

Oil on Muslin

2010년 1월 23일 볼티모어 미술관에서 촬영

 

 

 

 

 

피핀의 그림이 전시된 (왼쪽에서 세번째) 볼티모어 미술관 미국 미술 전시장

2010년 1월 23일 촬영

 

 

볼티모어 미술관 미국 미술실에서 피핀의 그림을 발견 했을때는, 월척을 한 기분이었습니다.  피핀의 그림을 찾아 보기가 힘들거든요.  위의 전쟁터 풍경 그림은 얼핏 보기에 흑백 그림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잔디밭에 초록색이 희미하게 칠해져 있는것을 볼수 있습니다.  무채색 그림은 아닌데,  기묘하게도 흑백 텔레비전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제가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화집을 통해서 그가 남긴 그림들을 살펴보면, 전쟁터 그림중에 이렇게 '흑백 테레비'처럼 보이는 그림들이 여러점 있습니다.  기분이 묘해지지요. 

 

그는 왜 채색화를 그리면서 흑백이 두드러지는 그림을 그렸을까?  혼자 사색을 해 봤는데,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은 - 혹시나 검정, 흰색 유화 물감이 값이 싸서 구하기가 쉬웠던 걸까?  다채로운 색깔 물감을 살 형편이 안되었던것은 아닐까?  뭐, 부유로운 인생이 아니었으니까요.

 

만약에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면, 무엇이 그를 무채색조의 기억으로 이끌었을까요.  그의 머릿속의 전쟁의 기억은 '암담'했기 때문일까요?

 

피핀의 일생

 

 

 

1918년에 1차대전에 참전한 그는 프랑스에 배치되었는데, 거기서 부상을 당해서 제대합니다. 제대 한 후에 펜실베니아의 고향으로 돌아와  이미 아이들을 거느리고 있던 중산층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그녀와 평생 해로하게 되는데요, 부인에게 집이 한채 있었기 때문에 그는 집 걱정없이 허드레 일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 집이 위에 소개한 웨스트체스터의 집입니다.

 

http://www.nga.gov/education/classroom/counting_on_art/bio_pippin.shtm

 

위사진은 제가 '국립미술관' 웹페이지에서 빌려온 것입니다. (위의 링크를 따라가시면 피핀에 대한 이야기와 작품들을 보실수 있습니다.)  위에 피핀과 그의 부인이 함께 있군요. 피핀을 들여다보시면 그가 오른 손에 붓을 쥐고 있는데 왼손으로 오른손목을 받치고 있지요.  그는 부상을 입어서 오른쪽 팔을 자유롭게 사용할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왼손이 오른손을 받쳐주어야 했습니다.  피핀이 남긴 작품들중에 대형 작품을 볼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의 팔의 제약 때문이라고 합니다.

 

피핀은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 시절에 교육을 많이 받지 않은 흑인들이 대개 그러하였듯, 잡역부로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 일생을 지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차대전에 참전 했던 것을 제외하고는 평생 그가 태어나 결혼하여 살림을 차린 고향 마을을 지켰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마땅히 그림 그릴 도구를 가져본적은 없다고 합니다.  열살이 되던 해에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미술 대회가 있었는데, 그때 그가 그린 그림이 대상을 받아서 부상으로 미술도구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것이 그가 평생에 처음 가져본 미술 도구였다고 하지요. 피핀은 14세에 뜨문뜨문 다디던 학교를 중단하고 생계의 현장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것으로 정규 교육과는 아주 멀어진 것이지요.

 

1차대전에서 부상당해 돌아와 고향 마을에서 잡역부로 일하며 살아가던 피핀은 취미삼아 혼자서 그림을 그립니다.  나무 상자위에 그림을 그려서 장식을 하기도 하고, 그것을 마을 시장에서 진열하여 팔기도 했는데, 별로 많이 팔려나가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자신이 그린 그림을 동네 이발소에서 이발료 대신으로 선물한적도 있는데,  이발소집 부인이 그 그림을 싫어했기 때문에 이발소 주인은 그걸 집에다 걸지도 못하고 이발소에 걸어놨다고 합니다 (울며 겨자먹기였던 거죠) 지금 그 작품이 얼마에 거래가 될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실 노릇이죠.

 

피핀은 극히 우연한 기회에 지방의  미술전에서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됩니다. 그의 예술성을 일찌감치 간파한 사람중에 Andrew Wyethe 의 아버지인, 삽화가 N.C.Wyethe 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지척의 마을에서 살고 있었거든요 (제가 와이어드 스튜디오에서 피핀의 집, 동네까지 자동차로 10분만에 간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버지 N.C.Wyeth 는 피핀의 작품을 보면서 - 나에게도 저렇게 색채를 입힐 재주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한탄을 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피핀은 1940년대에 우연히 그의 천재성이 발견되어 미술 평론가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그래서 잠시 미술학교에서 수업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지역의 화가가 그를 미술 과정에 초대를 해 준것인데요, 거기서 잠깐 그는 서양 여러나라의 미술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고, 인상파 화가들의 화잡도 접하게 됩니다.  그는 화가들중에서 르누아르의 색채를 가장 아름답다고 평했다 합니다. 피카소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하지요.  미술가가 그에게 미술의 '테크닉'을 가르치려고 했을때, 피핀은 이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 [미술 학교는 다닐게. 하지만 그림에 대해서는 간섭하지마. 나는 내가 그리고 싶은대로 그리겠어] 뭐 이런 입장이었다고 합니다. (제가 쌍따옴표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전에 책에서 읽었던 내용을 제 기억을 더듬어 옮긴 것이므로, 직접 인용이 불가하기 때문입니다.)

 

피핀은 1940년 이후에 미술계에 알려졌고, 그 이후 그의 활동 시기는 짧았습니다.  그는 1946년에 사망했으니까요.  뒤늦게 발견된, 어둠속에 가려진 천재였던 것이지요. 정말 혜성처럼 반짝 하고 나타났다가 사라진거죠.   하지만, 그가 남긴 그림들, 제가 워싱턴 일대에서 발견한 그의 그림들은 얼마나 영롱하게 반짝거리는지...   피핀. 피핀. 피핀. 참 예쁜 이름이죠? 

 

 

2010년 1월 28일 페이지 대략 완성 RedFox

 

 

 

 

 

2010년 1월 3일 일요일

Thomas Cole: Hudson River School 토마스 콜과 허드슨강 미술가들

19세기 미국미술: 토마스 콜 과 허드슨강 미술가들

 

http://americanart.textcube.com/263  이전 페이지에서 토마스 콜의 '인생' 시리즈를 살펴 봤습니다.

 

 

19세기 미국 미술가인 Thomas Cole (1801-1848. 토마스 콜)은 미국의 풍경화가로 널리 알려져있으며, 그의 이름 옆에 반드시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허드슨강 미술가들 (Hudson River School)이라는 것입니다.  본래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1918년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합니다. 오하이오에 정착했던 그는 후에 펜실베니아 미술 학교를 거쳐서 1825년에는 뉴욕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당시에 미국의 지식인들이나 꿈을 가진 화가들이 거쳤던 노선이기도 하지요. 펜실베니아를 거쳐 뉴욕으로 가는 노선.

 

당시 뉴욕주의 허드슨 밸리 (Hudson Valley)라는 지역이 빼어난 자연경관으로 이름이 있었고 그래서 토마스 콜을 위시한 '미술학도'들이 이곳에서 풍경화를 그리거나 익혔습니다.  미국 건국 초기의 미술이라야 '초상화' 아니면 '풍경화'였다고 할만하지요.  후에 그는 이탈리아에 가서 풍경화를 그리기도 했는데, 허드슨 밸리의 Catskill 에서 결혼하여 죽을때까지 그곳에서 작업을 합니다.  그리고 토마스 콜을 위시하여 허드슨강 기슭에서 풍경화 작업을 하거나, 토마스 콜의 영향을 받은 일군의 미국 풍경화가들을 일컬어 허드슨강 미술가들 (Hudson River School)이라 칭하게 됩니다.

 

허드슨강 미술가들은, 대개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미국의 풍경들을 그렸고 (말하자면 진경산수라고 할만하죠),  때로는 이상화된 풍경들도 그렸습니다. 이 허드슨 미술가들에 의해 '거대한 미국의 풍경'들이 유럽사회에 알려지게 되기도 했고요.

 

허드슨강 미술가들중에 널리 알려진, 제가 장차 페이지를 열어 소개를 하고자 하는 화가들은

 1. Albert Bierstadt (알버트 비어슈타트) : http://americanart.textcube.com/361

 2. Frederic Edwin Church (프레데릭 에드윈 처치) http://americanart.textcube.com/363

 3. Thomas Moran (토마스 모란) http://americanart.textcube.com/364

등인데요.

 

이 주요 화가들의 그림을 감상하면서 장차 허드슨강 미술가들 특징을 좀더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토마스 콜의 풍경화, 그 속에 담긴 우화들

 

 

토마스 콜은 풍경화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풍경화속에 성서적 우화들을 담기를 즐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 작품의 제목은 The Subsiding of the Waters of the Deluge 인데요.  '노아의 홍수 뒤에 차분해진 물결'로 해석이 됩니다.  Deluge 는 홍수, 범람을 의미하는 어휘인데, 성서에서 the Deluge 라고 하면 노아의 홍수를 가리킵니다.  "After me, the deluge!"  나 이후에 홍수가 오건 말건 상관없다는 뜻이지요. 나 살아생전에만 무사하면 된다 이거죠. 좀 무책임한 발상이죠. (내가 알게 뭐람).

 

그림의 제목만 보면 토마스 콜은 성서에 담긴 노아의 홍수, 그 이후의 평화를 그린것으로 풀이됩니다만, 또다른 해석도 가능해집니다. 미술관의 그림 안내지에 담긴 내용을 옮기자면, 토마스 콜은 이 그림을 통해 신생국가 미국을 찬양했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이민자였던 토마스 콜 자신의 삶의 관점을 보여준것은 아니었을까요?)

 

노아의 홍수가 뜻하는 것은 묵은것의 청산, 죄악과 오류의 청산. 그리고 새로운 시작이지요. 신생국 아메리카가 유럽의 영향권에서 독립을 하는것 역시 새로운 시작일수 있고, 유럽에서 이민 온 토마스 콜에게도 미국에서의 삶은 새로운 시작일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 깊고 어두운 동굴을 통과하여 저 멀리 노오랗게 햇살이 비치는 평화의 바다로, 신세계로 나아간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제가 사진 사이즈를 줄여놔서 잘 안보이시겠지만, (사진 두번 클릭하시면 커집니다), 사진 하단의 중앙의 바위 옆에 보시면 희끄무레한 조그만 것이 보이실겁니다. 해골바가지 입니다.  해골바가지.  이 해골바가지는 왜 그려넣은 것일까요?

 

 

노아의 홍수 이후, 새로운 에덴을 향하여

The Subsiding of the Waters of the Deluge 1829

Oil on Canvas

2009년 12월 19일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서양 그림을 감상하실때, 서양 그림에 '해골바가지'가 자주 등장한다는 것을 감지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나라를 막론하고 유럽 화가들은 '해골'을 그려넣기를 즐겼습니다. 이를 Memento Mori (메멘토 모리: 우리가 모두 죽어야 할 생명들이라는 것을 기억함) 이라는 용어로 정리를 하기도 합니다. Memento (Remember, 기억하라), Mori (mortal,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아리따운 여인이 한손을 해골에 얹고 있는 그림은 어떤 식의 해석이 가능할까요?  인간은 유한하고, 처녀의 아름다움도 유한하다는 메시지이지요.  책상위에 모래시계와 해골이 그려져 있는 그림이 있다면,  메시지는 더욱 분명해지지요. 시간은 흘러가고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우리는 죽을거라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 그림에 담긴 해골은 어떤 상징을 담고 있을까요?  우리 모두 죽을거다?  뭐 그보다는.... 어떤 것의 종말을 상징할수도 있지요.  구시대는 끝났다. 이 해골을 넘어서서 저 평화로운 신천지로 나아간다는 뜻일수 있지요. 신세계 미국은 New Eden 새로운 에덴동산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토마스 콜에게.

 

2003년 겨울에 (아 벌써 아주 오래전의 일이구나, 어제 같은데...) 뉴올리안즈에 간적이 있습니다. 태풍 카트리나가 강타하기 전,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던 곳이었지요. 뉴올리언즈 시가지에 타로 점쟁이 할머니가 앉아있길래, 난생처음으로 길거리에서 타로점을 쳐봤습니다.  아, 제 일기에 그당시 사진이 있어서 올려봅니다. 그때 제가 고른 패중에 '해골'이 그려진 패가 있었거든요. 크리스마스 휴가로 간 여행이라 '신년운세'를 본것인데, 뭐 해골 패가 나왔던겁니다.  그런데 점쟁이 할머니가 제 패를 들여다보더니 설명을 해주더라구요. 이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죽음'은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기도 한다.  넌 새해에 큰 행운을 맞이할것인데, 그것을 얻기 위해 고통이나 노력이 필요하다. 잘 해내길 바란다. (히히, 점쟁이가 아닌 나 라도 그런 설명은 하겠다) 아 뭐 점쾌가 하도 안좋아서 나를 위로하려고 이러시나 했지요.

 

 

 

2003년 12월 뉴올리언즈의 타로 점쟁이 할머니와 나.

 

그런데, 그 이듬해에 저로서는 인생의 큰 전환점이 왔지요. 아주 힘든 시험도 쳤고, 새로운 관문으로 들어섰지요.  죽음은 곧 탄생이다. 새로운 탄생이다.  점쟁이 할머니의 아름다운 설명이 고마웠죠. 결국 인생 이리저리 해석하기 나름인데...

 

아, 예, 그래서 토마스 콜의 그림에 담긴 저 해골은, 죽음, 그러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이지요. 구시대, 구습의 죽음, 신생국가의 새로운 에덴동산을 희구하는.

 

 

 

아래의 두편의 그림들은 십자가의 순례라는 타이틀의, 기독교 우화 연작의 일부로 보입니다. 그가 1848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 작품들이 1847년 1848년에 그려진 것이고보면 이것들이 토마스 콜의 최후의 작품들이었던것 같은데요. 그 자신이 생의 마지막에 다다랗다고 느꼈던 것일까요? 

 

시작은 끝과 통하고, 끝은 새로운 시작과 닿아있고...

 

한해를 시작하는 요즈음, 묵은것들을 털어 내시고, 또 새로운 종말을 향해 여행을 떠나야할 때이지요.  올해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알수 없으나, 길을 떠나보는거죠.

 

 

 

The Pilgrim of the Cross at the End of His Journey

십자가의 순례, 그 여행의 끝 (십자가와 세상이라는 연작 시리즈를 위한 준비화)

(Study for the series; The Cross and the World) 1846-1848 Oil on Canvas

2009년 12월 19일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The Pilgrim of the Cross at the End of His Journey (about 1847)

십자가의 순례,그 여행의 끝.

Oil on Canvas

2009년 12월 19일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그리고 올해의 마지막날,  아름다운 한 해였노라...라고 술회 할수 있기를.

 

2010년 1월 3일 redfox

2009년 12월 11일 금요일

The Eight / Ashcan School (4) Maurice Prendergast

프랜더개스트의 얼굴없는 미녀들

 

 

 

Maurice Prendergast (모리스 프렌더개스트, 1859-1924)는 캐나다에서 출생하여 미국에서 성장한 화가입니다. 사실주의 화가 그룹이었던 The Eight (팔인회)의 멤버로 함께 전시회를 가진적도 있긴 하지만,  모리스 프렌더개스트가 남긴 그림들은  '8인회'를 표상하는 '도시' '서민의 삶'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이미 독특한 자기만의 세계가 있었던 것이겠지요.

 

가족이민으로 세살때 보스톤에 온 프렌더개스트는 8학년 (중학교)을 마치고 14세의 나이에 '상회'에 취직을 하여 살아가면서 혼자서 그림을 그립니다.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라 혼자서 눈앞에 보이는 풍경들을 그리는 정도였겠지요. 20대때는 동생 Charles 와 함께 가축용 배에 몸을 싣고 유럽으로  가서 유럽 여행을 하기도 합니다.  유럽구경을 하고 돌아온 프렌더개스트는 그제서야 '미술공부'를 제대로 해보고싶다는 열정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결국 '액자' 사업을 하게 된 동생의 후원으로 나이 30에 파리에 입성하게 됩니다. (고호에게 그의 아우 테오가 있었던 프렌더개스트에게는 아우 찰스가 있었다고 할 만 하지요) 그는 파리의 미술학교에서 수학하게 되는데, 학교에서는 '석고상'이나 '대리석상'과 같은것을 그려보라는 지시를 했지만, 그는 밖으로 나가 살아움직이는 사람들을 스케치하는 일에 몰두 했다고 합니다.

 

 

제가 미술관을 돌며 수집한 그의 작품들은 모두 '유채화'인데요, 그는 초기에 수채화를 주로 그렸고, 후기에 유채화로 선회했다고 합니다.  제가 본 작품들은, 다 똑같아 보일정도로 테크닉이 유사한데,  화집이나 언라인 자료를 찾아보면 점이나 짧은 선을 이용한 화법의 작품들이 많이 보입니다. (이렇게 경쾌할수가!)

 

카네기 미술관에 걸려있는 커다란 '소풍 (Picnic)'이란 작품은 얼핏 보기에는 수채화처럼 보입니다.  저는 사실 이작품을 '수채화'로 알고 보고 지나쳤었는데,  글을 쓰기 위해 자세히 들여다보니 유채화라고 나오는군요. Oil on Unsized Canvas 라는 설명문이 있길래, 이것은 무엇인가? 자료를 찾아 봤지요. 

 

우리가 남대문 미술상에 가면 다양한 사이즈의 나무틀에 짜여진 캔버스를 살수가 있고, 혹은 아예 두루마리 캔바스를 통째로 살수도 있는데요. 대부분 이렇게 판매되는 캔버스는 젯소 가공이 된 상태라고 합니다. 헝겊을 그림 그리기에 적합하게 가공을 했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Unsized Canvas 란 말하자면 이런 밑가공을 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면, 아무래도 캔바스에 표면처리가 되지 않았으므로 페인트가 스며들면서 색다른 효과가 나올수 있겠지요.  그래서 이 유화가 얼핏 보기에 '수채화'같은 느낌이 들었던것 같습니다.

 

 

 

카네기 미술관 전시실 풍경

2009년 11월 촬영

 

 

Picnic (c.1914-1915)

소풍

Oil on Unsized Canvas

가공처리 되지 않은 캔바스에 유화

196x271cm

2009년 11월 카네기 미술관에서 촬영

 

 

 

 

 

 

Women at Seashore (1915)

Oil on Panel

43x81cm

2009년 11월 카네기 미술관에서 촬영

 

 

 

 

 

 

위의 피크닉이나 Women at Seashore 모두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것인데요. 풍경이나 등장인물들의 분위기가 유사합니다. 

 

 

 

 

 

Salem Cove (1916)

Oil on Canvas

2009년 12월 13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워싱턴 디씨의 국립 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Art)에 걸려있는 프렌더개스트의 작품입니다.  한 소년이 아빠와 함께 손을 잡고 미국 사실주의 화가들의 작품 구경을 하면서 슬슬 지나가다가  이 그림 앞에 서더니 아빠에게 뭐라고 종알종알 이야기를 합니다.  어린이의 눈길을 잡아끄는 그림이었던것 같습니다.  아이들의 사랑을 받는 그림.  그래서 저도 그림 앞에서 기념사진 한장 찍어봤습니다. 저도 이런 그림 한장 갖고 싶어요.

 

 

 

 

 

Landscape with Figures (1921)

여러가지 모양이 있는 풍경

Oil on Canvas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Landscape with Figures (1918-1923)

여러가지 모양이 있는 풍경

Oil on Canvas

2009년 10월30일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촬영

 

 

제가 가지고 있는 몇장 안되는 그림들을  제작 연도 순서대로 배열을 했는데요, 시간이 갈수록 그의 붓 터치가 세밀하고 조밀해지지요?  아무래도 수채화에서 유화로 넘어가면서, 그 이후로 그의 붓 터치가 깊이를 얻어간것도 같고요.  그럼에도, 그의 그림들에 등장하는 풍경이나 사람들이 마치 '동일한 그림'의 반복처럼 느껴질 정도로 유사해 보입니다.

 

이들 그림에 나타난 몇가지 공통적인 현상을 나열해볼까요?

 1. 가장 확연히 드러나는 것으로, 인물들의 얼굴에 이목구비가 생략되었습니다.

 2. 사람이나 나무나, 풍경 전체가 율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지된 풍경이 아니라 살아숨쉬는 여인의 가슴처럼 굴곡과 움직임이 있지요

 3.  드레스를 차려입고 소풍을 즐기는 남녀들이 나옵니다. (후기에는 동물들도 포함됩니다).

 4. 보시다시피, 모두 야외의 풍경이지요.

 

프렌더개스트의 전기 자료를 찾아보면, 프랜더개스트가 이탈리아 화풍의 영향을 입었다던가,  혹은 후기 인상파  점묘파 화가 쉬러(Seurat)의 영향을 받았다던가, 혹은 세잔느에 견주어지기도 하거니와, 나비파 보나르, 뷔야르의 영향도 제기가 되기도 합니다.  어찌보면 당시의 유럽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거나 혹은 널리 알려진 화가들의 작품이, 혹은 그들과의 교류가  프렌더개스트의 예술세계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끼쳤을것은 자연스런 현상일수 있습니다.   그런데, 프랜더개스트는 단지 이쯤에서 주저않은 화가는 아닌듯 합니다.  그는 '자기 그림'을 만들어 낸 것으로 보입니다.  무슨 말씀인가하면,  누구의 어떤 화풍의 영향을 받았건 안받았건,  프랜더개스트는 이런 모든 '영향'을 초월하여 '이것은 프랜더개스트다'라고 할만한 화풍을 스스로 만들어 냈다고 하는 것이지요.

 

 

모리스 프랜더개스트는 1859년에 태어나 1924년에 사망했으므로 만 64년을 지구상에 머물렀다 할 수 있는데, 그는 평생 독신이었다고 합니다. 성격이 수줍고 조용하여 사교적이지도 않았고요. 본격적인 미술 수업을 나이 서른에 받기 시작한 이래로 죽을때까지 그림만 그렸으니 30여년간 미술가로 살다 간 셈인데, 그는 평생 '그림 생각'만 했다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액자를 만들어 파는 일을 했던 그의 동생 찰스가 평생 그의 후원자가 되어주었지요.  결혼도 안하고, 사교적이지도 않고, 그림만 즐겨 그린 이 조용한 사람은 어쩌면 평생 '관찰자'로 살아간것일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않는 그의 성격은, 늘,  사람들을 어떤 풍경속의 일부로 파악을 했을것도 같고요.  그런 그에게 사람들의 이목구비, 사람들의 표정, 그런것들은 큰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에게 '사람들'은 '풍경'으로 머물렀을겁니다.  그러니 그의 풍경화의 제목마저 Landscape with Figures (모양으로 이루어진 풍경화)라는 식으로 붙여졌겠지요.

 

미술평론가들은 이러한 그의 그림을 '사실주의'가 아닌 '추상적' 화법의 도입이라고 정리를 하기도 하는데요, 어쩌면 세잔느가 그러했듯 구체적인 관찰과 묘사, 혹은 인상(impression)을 넘어선 해체와 추상의 장으로 진입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엔 그냥 그의 삶이 그러하였던 것 같기도 하다는 것이지요. 다른 별에서 온 생명체가 멀찌감치서 풍경을 관찰하듯, 풍경속의 인물들도 풍경의 일부로 피상적으로 관찰을 했겠지요.

 

모리스 프랜더개스트는 1914년에 뉴욕으로 활동지를 정하고  The Eight 의 멤버였던 윌리엄 글랙슨즈의 윗층 (50 South Washington Square, New York)으로 이사를 합니다.  서로 이웃사촌으로 지냈다는 얘기지요. 

 

제 소견으로는 The Eight 의 멤버였던 William Glackens 는 '르누아르의 아류'에서 끝난 화가로 보이고, Maurice Prendergast는 유럽화풍도 공부했고, 유럽화풍의 영향권안에 있었지만, '프랜더개스트'만의 독특한 세계를 완성하고 떠난 화가로 보입니다.  그의 그림을 보면, 딱, 답이 나오쟎아요, 아! 프랜더개스트! 

 

 

 

2009년 12월 11일 redfox

 

 

후기: 모리스 프렌더개스트는, 사실, 저에게는 '듣보잡'과에 속하는 그림들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제가 무지한 관계로 미술관에서 그의 그림을 발견했을때, 그냥 별 감흥없이 쓱쓱 지나쳤다는 것이지요. 미술관 이곳저곳에서 그의 그림을 보면서도, 프랜더개스트를 기억하기보다는 '저 그림 어디서 봤더라? 전에도 비슷한 것을 본적이 있는데...' 이정도로 생각하고 그냥 지나치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The Eight 을 정리하느라 제가 갖고 있는 그림자료들을 정리하다보니, 어라? 이 사람  내가 제법 여기저기서 눈도장 찍은 사람이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어 그런데 그림 모아놓고 보니 매력있네!   뭔가 개성이 보이네!  이렇게 되더라구요.  그러니까,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고,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더욱 매력이 느껴지더란 것이지요.  (모르고 죽었으면 억울할뻔 했네~ )

 

누군가를 새로 알아간다는 것은 참 흥미진진한 일입니다. 그것이 꼭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해도... 아니 어쩌면 그 대상이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무엇을/누군가를 새로 알아가는 작업이 안전하고도 유쾌한 작업이 될지도 모릅니다.  산사람은, 알게되면 정들고, 혹은 싫증나고, 그러면 괴롭죠.  그냥 어떤 대상은 알면 알수록 유쾌해지지요. 싫증나면 떠나면 되고. 상처가 안남죠.   프랜더개스트도 혹시 그랬던걸까?  그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관조자, 관찰자로만 머물렀던걸까?

 

 

 

 

 

 

 

2009년 12월 7일 월요일

The Eight (Ashcan School) (2) John French Sloan

소년가장 슬로언

 

John French Sloan (1871-1951)은 펜실베니아 태생의 미국 사실주의 화가로 Henri 를 중심으로 모인 Ashcan (애시캔) 그룹과 The Eight (8인회)의 멤버로 활동하였습니다.  존 슬로언은 필라델피아에서 성장하였는데 그의 고등학교 동창중에 후에 The Eight 의 멤버가 되는 William Glackens를 만나게 됩니다.

 

1888년 그가 16세 되던해에 아버지가 정신질환으로 쓰러지면서 슬로언이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소년가장이 되고 맙니다. 그는 책방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책을 읽고 화집을 들여다보며 혼자 그림을 그리던중 정식으로 야간 미술 과정에 입문하게 되고 후에는 펜실베니아 미술학교에 진학하게 됩니다. 여기서 그는 Thomas Pollock Anschutz 의 지도를 받게되며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Willaim Glackens 를 다시 만나게 되지요.

 

1892년 Robert Henri 를 만나게 되는데 이때부터 이들의 연대가 시작됩니다. 슬로언는 The Philadelphia Press 의 미술부에서 삽화가로 일을 하며 미술 작업을 계속해 나갑니다.

 

슬로언의 아내

 

슬로언은 아내와의 관계도 '소설'적인데,  그의 아내 Anna Maria 를 술집에서 만나서 사랑에 빠져 1901년에 결혼하게 됩니다.  안나 마리아는 백화점 점원으로 일했지만 매춘 경력이 있으며 음주벽이 있고, 아마도 이러한 전력을 거친 여성들이 보일법한 히스테리컬한 우울증도 보였던 것 같습니다. 슬로언의 아내에 사랑은 지극정성이었고 한 의사의 제안으로 1906년부터 1913년까지 매일 매일 자기가 얼마나 아내를 사랑하는지 일기를 쓰게 됩니다.  (이런 남자 또 한명 있죠, 삐에르 보나르... 삐에르 보나르는 수십년간 목욕탕에서만 지내는 특수한 병을 가진 여인을 돌보며 한세상을 보냈지요. 삐에르 보나르의 그림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목욕하는 여자, 삐에르의 평생의 연인.)  그의 부인은 1943년에 죽고, 슬로언은 이듬해에 새장가를 갔으며 슬로언 자신은 1951년에 운명합니다.

 

슬로언의 사회주의 운동

 

 

1912년 그는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잡지 The Masses 에 미술 편집인으로 참가하며 다른 사회주의 사상이 강한 매체인 Call, Coming Nation 지를 위해서도 삽화를 그려줍니다.  특히나 그가 그린 1914년 6월호 The Masses  표지화가 지금도 자주 인용되거나 소개되곤 하는데요. (http://americanart.textcube.com/133  페이지에 Ludlow 학살사건의 이야기가 잠깐 소개된바 있습니다.)  그가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했고 민중의 생존권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긴 했지만, 예술가로서 슬로언은 '선전 (propaganda)'의 '도구'로 미술 작업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회정의를 위해 노력하는 것에는 긍정하면서도 예술이 '극단적인 정치선전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고 할만하지요.  그러면, 우리는 '예술만을 위한 예술'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반문할수 있을텐데...제가 추측하기에, 슬로언은 아마도 그 주위의 '사회주의자'들의 어떤 행동들에 거부감을 가졌을법 합니다.  그 '어떤 사회주의자들'이 요구하는 '선전물'을 만들기 싫었겠지요.  그가 꿈꿨던 사회주의와 그가 속한 사회주의자의 무리들의 행동 양식이 일치하지 않았을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과 거리를 두고 싶었을겁니다.  

 

서민속에 서있던 남자

 

존 프렌치 슬로언의 작품세계는 크게

 

(1) 뉴욕의 풍경

(2) 대중의 삶의 풍경

(3) 잡지,책의 삽화가로서 작업한 세밀한 판화 작품들

 

으로 정리 될수 있습니다. 일단 그가 삽화가로 일했으므로 대중 생활 관련 묘사 작품들이 많은데, 이런 성향은 이미 십대에서부터 생계형 청년 가장으로 세상에 나아갔던 그의 삶의 이력을 통해서도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그가 즐겨그린 도시 주변의 사람들의 모습, 가령 도심의 창가에서 빨래를 너는 여인이나, 건물 청소를 하는 아주머니들, 술집 풍경 역시 그의 삶과 밀착된 풍경이었을 겁니다.  특히나 20세기초의 뉴욕의 전철과 천철 주변 풍경은 그의 '전매특허'와 같은 주제라 할 수 있지요. 조지 벨로우즈 페이지에서 (http://americanart.textcube.com/198)  권투선수 그림을 즐겨그린 미국 화가가 누군가? 이런 퀴즈가 나오면 자동으로 '조지 벨로우즈'를 외치면 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요. 마찬가지로, 미술관에서 '뉴욕 고가 기차' 풍경화가 멀리서 보일경우,  당신이 애인과 함께 미술관 구경중이라면 "저기 저 뉴욕 풍경속에 고가 기차 그림이 있는 저 그림 말야...저거 아마 존 슬로언이라는 화가의 그림일거야..." 하고 '아는체'를 해도 크게 실례가 안 될 것입니다.

 

 

 

뉴욕 고가 기차 (Elevated Train: EL)

 

The City from Greenwich Village (1922)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바라본 뉴욕
oil on canvas
overall: 66 x 85.7 cm (26 x 33 3/4 in.)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2009년 9월 촬영

이 그림은 비가 그친 겨울 저녁, 맨하탄 남단에서 바라본 맨하탄의 거리 풍경입니다. 고가기찻길 위로 기차가 불을 밝히고 지나가고 비에젖은 도로에 자동차의 불빛이 반사됩니다. 비가 갠것을 눈치채는 이유는 하늘이 부염하게 밝아 있다는 것이지요. 도시는 촉촉히 비에 젖어 있고 골목의 불빛은, 그것이 골목이라서 더욱 밝아 보입니다. 건물 옥상의 물탱크도 보이고, 다리미의 모서리같이 각진 고층 건물이 오른쪽에 보이는데, 건물에서는 불빛들이 새어나옵니다. 일층의 모든 창문은 손님들을 기다리는듯 환하게 불이 켜져있습니다.  옹기종기 걸어가는 행인도 몇명 보이지요. 그림의 전체적인 윤곽은 우리가 마치 몇층 건물에서 창밖을 내다보는 듯 합니다. 액자를 창틀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창밖을 지긋이 내려다보는 기분이 듭니다.

 

 

다음 그림은 워싱턴 필립스 콜렉션이 소장하는 Six O'clock, Winter (1912) 라는 또다른 고가 기차 (EL) 풍경입니다. (제가 갖고 있는 사진 파일이 상태가 안좋아서 웹에서 얻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속의 여섯시의 풍경은 오전일까요 오후 일까요? (제가 볼때는 오후 여섯이인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단서는 나중에 말씀드리기로 하고요...  )  이 작품이 1912년작이고, '그리니치 빌지지에서 바라본 뉴욕'이 1922년 작품이므로, 두 그림 사이에는 10년의 세월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두 그림을 함께 놓고 보면, 1912년 작품은 고가기차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시선이고, 1922년 작품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각도이지요.

 

 

 

 

http://www.phillipscollection.org/research/american_art/learning/sloan-learning.htm

 

 

 

무료 커피

 

The Coffee Line (1905)

무료 커피를 받기 위해 줄서있는 사람들

2009년 11월 7일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에서

 

 

 

 

뉴욕에서 무료 커피를 받기 위해 긴 행렬을 이룬 실업자들을 발견한 슬로언이 그려낸 겨울 저녁의 풍경입니다. 길에는 눈이 쌓여 있지요. 슬로언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이 어둡고 긴 행렬을 묘사 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빈곤의 문제가 그를 사회주의 사상으로, The Masses 로 이끌었을 것입니다.

 

비가 들이치는 페리선

 

Wake of the Ferry, No. 1 (1907)

페리선의 물길

2009년 10월30일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촬영

 

 

 

지금도 뉴저지에서 맨하탄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중에 배(Water Taxi)로 강을 건너는 직장인들이 있습니다. 100여년전 뉴욕과 뉴저지를 왕래하는 페리선을  그린것은 당시로서는 '엉뚱한' 시선이었을겁니다.  비가 들이키고 물결이 거칠게 일고, 전체적으로 '내가 그 페리선을 탄듯' 심란한 기분이 드는 그림입니다.  오른쪽 구석에 서있는 여인도 그래서 심상치 않아 보이는데요.

 

이 그림은 그림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 만큼이나 심상치 않은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슬로언은 1904년에 뉴욕으로 활동지를 옮겼는데, 그의 알콜중독자 부인은 이후로도 걸핏하면 필라델피아의 집으로 가버리곤 했던 모양입니다. 그의 아내가 필라델피아로 가기위해 이 페리호를 종종 이용했지요. 결국 이 그림속의 여인은 슬로언의 알콜중독자 아내의 뒷모습이었던 것인데요.  1907년에 슬로언이 그의 작업실에서 The Eight 전시회를 준비하기 위해 모임을 갖고 있었을때 부인이 들이닥쳤다고 합니다.  (남자 작업장에 여자가 허락도 안받고 나타난거죠, 아마 그렇겠죠.) 술도 몇잔 마셨겠다, 화딱지가 난 슬로언이 그 자리에서 의자를 집어던져가지고 이 그림이 상처를 입었다고 합니다. 그래가지고,  나중에 이 그림을 또다시 그리게 되는데 그 (2)번 그림은 필립스 콜렉션에 소장되어 있고, 이 (1)번 그림은 슬로언이 (2)번 그림 그린후에 손을 봐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Beal 2002).  아무래도 이런 뒷 이야기를 듣다보면, 이 페리선의 풍경이 슬로언과 그의 아내의 풍경이었다 싶기도 하지요.

 

 

 

 

 

 

이상에서 보신바와 같이 대도시의 뒷골목의 삶의 풍경, 이런 풍경은 Henri 가 주도했던 Ashcan 일당들의 주요 소재라 할 수 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시각에서 '이런 그림이 뭐가 대단한가?' 의구심이 들 수도 있을것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이 그려진 1922년 미국 화단의 상황속에서 이 그림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우리의 생각은 달라질수도 있습니다.

 

미국의 미술의 역사는 유럽에 비해서 '일천'할수밖에 없지요. 제가 에드워드 힉스나 조쥬아 존슨과 같은 초기의 '포크 아트' 작가들에 대하여 애정을 갖고 소개를 한 이유가 있는데요, 미국은 초기에 유럽 강대국들의 '식민지'였고 유럽 문화권의 식민지이기도 했습니다. 미국 자생의 문화가 없었다고 봐야지요 (아메리카 인디언 문화를 제외하면).  그래서...Henri 를 위시한 '사실주의' 화가들의 탄생 이전의 미국 회화사는 '유럽 베끼기'의 연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장차는 미국의 인상주의나 그 이전의 풍광, 초상와 위주의 미술과 미술가들을 차례로 소개하겠지만, 제가 왜 이들부터 시작을 안하고 풍속화가 잠깐 건드리다가 '사실주의'로 점프를 해버렸는가하면,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들 이전의 작가들에게서 제가 별 매력을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뭐 대략 사이비 유럽미술 냄새가 고약하게 난다는 느낌이 드니까요. 제가 감지하기에 미국의 사실주의 화파들부터, 미국의 미술은 자신의 정체성을 슬슬 세워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에서부터 미국의 풍경이, 미국의 서민이 화면의 중심에 슬슬 등장을 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슬로언의 전철 그림과 도심 그림이 매력적으로 비쳐지는 것이지요. (이것은 미국인이 아닌, 아시아 출신의 어느 외국인이 이방인의 시각으로 미국 미술을 보는 관점이긴 합니다.)

 

 

 

Yeats at Petitpas'

 

이 그림은 뉴욕 웨스트 사이드의 어느 하숙집에서 열린 파티 장면입니다.  Petitpas 는 프랑스 출신의 두 자매가 경영한 하숙집 이었습니다. 

 

이곳에 영국의 철학자이며 예술가였던 John Butler Yeats (존 버틀러 예이츠 1839-1922)가 머물렀는데, 그는 영문학도들에게 (그리고 교양 차원에서 영시를 읽은 사람들에게)  친근한 시인 William Butler Yeats(1865-1939) 의 아버지입니다.  존 버틀러 예이츠는 69세 되던 해에 뉴욕으로 이주하여 '애시캔' 화가들과 친교를 맺었고, 결국 뉴욕에서 사망하여 뉴욕에 뼈를 묻었지요. 그러고보면, 그의 아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는 '유럽'문화를 이상화 했는데, 아버지인 자신은 말년에 문화 불모지와 같은 뉴욕에 와서 세월을 보내다가 갔군요.

 

흰 턱수염의 노인이 존 버틀러 예이츠이고, 오른쪽 끝에 보이는 검은머리 남자가 존 슬로언이군요. 음식을 들고 서있는 이는 하숙집 주인이고요, 그이의 왼쪽에 모자를 쓴 여인이 슬로언의 부인이라고 합니다. 존 버틀러 예이츠가 이 하숙집에 머무는 동안 이곳은 당시 미술, 문학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즐겨 모이는 장소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Yeats at Petitpas' (1910)

Oil on Canvas

워싱턴 Corcoran 미술관에서 2009년 10월 3일 촬영

 

 

 

해부학교실

 

존 슬로언은 펜실베니아 미술학교에서 Anschutz 선생의 지도를 받았는데, 다음 작품은 해부학 강의를 하는 안슈츠 선생을 에칭 판화로 묘사한 작품으로 보입니다.

 

 

 

 

 

Anshutz on Anatomy (1912)

해부학 교실의 안슈츠 선생

Etching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2009년 9월 19일 촬영

 

 

 

 

제 사진 상태가 좋지 못해서, 웹에서 좀더 선명한 이미지를 빌려 왔습니다.  강단아래에 안슈츠 선생이 서서 강의를 하고 있고,  강단위에 인간 골격이 서있고, 그 옆에 성기만 가린 남자 누드 모델이 서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둘러 앉거나 서서 해부학 강의를 듣고 있는데요. 학생들중에 여학생도 보입니다.  아마도 여학생들이 없었다면 남자 누드 모델이 성기를 가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1900년대 초반에 미국 미술 학교에서는 남녀학생이 함께 작업하는 곳에서는 누드 모델이 성기를 드러내면 안되었다고 하지요.

 

 

슬로언에 관심이 많아 자료를 많이 보긴 했는데, 막상 제가 가진 작품 사진 파일이 미미하여 그의 미술 세계를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소개할수 없어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저는 화집이 아닌 '내 눈'으로 본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기로 작정을 했거든요.  나중에라도 슬로언 작품들이 보이면 보이는대로 잘 갈무리하여 좀더 그에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싶습니다. 화집에서 본, 제가 좋아하는 그의 작품들로는 그의 '빨래'관련 그림들인데요. 슬로언이 도심에서 빨래를 널거나, 걷거나 하는 여인들을 모티브로 그린 그림이 많이 있습니다. 참 아름답지요. 그래서 '빨래' 주제의 페이지를 하나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는데요, 이것 역시 훗날로 미루기로 하겠습니다.

 

 

 

참고문헌:

 1. http://www.nga.gov/fcgi-bin/tinfo_f?object=52079

 2. Sherry Babbit (2008). Philadelphia Museum of Art: Handbook of the Collections. Philadelphia, PA.

 3. Graham W. J. Beal (2002) American Beauty: Paintings from the Detroit Institute of Arts 1770-1920. Scala Publishers Ltd. London, UK.

 

 

 

 

2009년 12월 6일 red fox

2009년 9월 23일 수요일

[PSAP4] 황금은 당신이 찾는 곳에 Gold is where you find it

뉴딜 예술 운동 작품

 

 

Gold is where you find it  (1934)

황금은 당신이 찾는 곳에

Tyrone Comfort

Born: Port Huron, Michigan 1909 Died: Los Angeles, California 1939

oil on canvas 40 1/8 x 50 1/8 in. (101.9 x 127.3 cm.)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Transfer from the U.S. Department of the Interior, National Park Service 1965.18.49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1st Floor, West Wing

http://americanart.si.edu/collections/search/artwork/?id=5195

 

 

위의 이미지는 위에 링크된 스미소니안 콜렉션에서 찾아온 이미지이고 아래는 내가 캐논 카메라로 찍은 것. 색감이 많이 차이가 나는데, 내가 육안으로 본 색감은 내 카메라의 이미지와 비슷하다.  물론 위의 것은 예술작품을 사진으로 옮기는 전문가들의 작업을 거친 것이고, 아래의 내가 찍은 사진은 카메라라 기술적으로 미숙하다 할 수 있겠지만, 두가지 모두 '사진'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내가 왜 사진들의 상태에 대해서 언급하는가 하면, 우리들이 '화집'이나 '그림책'을 통해 보게 되는 그림들이 이런 각기 다른 카메라와 사진가들을 통해 전달 되는 것인데, 때로는 약간의 색감의 차이에 따라서 원화가 줄 수 있는 감동이나 힘에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는 한계를 직시하기 위해서이다. 예술의 맛을 가장 생생하게 즐기기 위해서는 직접 '그 것'을 만나 보는 일 일것이다. 그 외에는 부수적인 것들이다.

 

가령 어떤 작품이 있을때, 우선은 그 원작을 눈으로 보거나 경험하는 것이 가장 본질에 다가가는 길이고, 그외에 부가적으로 작품의 배경에 대한 이해, 그 작품을 더 잘 알기 위해서 관련 자료를 찾아보거나 하는일, 혹은 그 방면의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일등이 도움이 될 것이다. 나도 심심할때면 화집들을 들춰서 그림 설명을 읽는 일을 즐기는데,  똑같은 그림이라도 책마다 크기나 색감이 차이가 날 때가 많다.  화집속의 그림들은 '지도'속의 표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지도속에 깨알같이 박힌 지명들을 확인하면서 지도속으로 행군하게 되는데, 화집속의 그림은 '원화'가 아니라 지도속에 새겨진 지명같은 것이다.  평생 지도만 들여다보면서 거기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한들, 지도속의 실재를 찾아가지 않는다면 그는 지도 독자에 불과하다. 때로 우리는 현지로 저벅저벅 걸어들어가기도 하는데, 그래서 그 땅을 만져보거나 그 하늘을 직접 올려다보고 그 바람을 느끼기도 하게 되는데, 가까운 미술관을 찾아가 누군가가 그린 그림을 감상하는 일, 작품들을 들여다보는 일은 지도 너머에 실재하는 세계로 조금더 가까이 다가가는 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1909년에 태어나서 1939년에 사망한 미술가 Tyrone Comfort (타이론 컴포트)에 대한 자료는 많지 않다.  이 작품은 1934년 발표 된 것이므로 그가 25세 청년이던 시절 그린 것이다.  (나는 어떤 작품을 볼때, 이 그림은 이 사람이 몇 살 때 그린것인가, 혹은 그 당시 시대 상황이 어떠했나, 이런 요소들을 생각 해 볼때가 많다. '사람'에 대한 관심 때문에 그러할지도 모른다) 25살 청년이 그린 그림이라고 생각하고 이 그림을 들여다보면 그림 속의 주인공도 그러하고 청년의 '역동성'과 '힘'이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이 그림을 별 관심도 없이 몇차례 스쳐 지나간 적이 있다. 미국미술 박물관에 가도 눈에 띄고, 내가 갖고 있는 미국미술 관련 화집에도 이 그림은 '꼭' 등장을 했다.  그러나 한번도 '눈여겨서' 관심있게 들여다 본 적은 없다.  아마도 내가 '미국미술' 블로그를 열고 본격적으로 '미국미술사' 공부를 하면서 세세하게 들여다보는 작업을 안 했다면 나는 평생 이 그림을 스치면서도 한번도 제대로 볼 생각을 안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그림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미국 미술사 화집에도, 인터넷에도 별로 나오는 것이 없고, 스미소니안이 제공하는 자료가 가장 상세한 편이다. http://americanart.si.edu/collections/search/artwork/?id=5195  이자료를 간략히 정리해보면, 경제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달러'가 휴지조각처럼 되고, 일자리도 귀해지고, 금 값이 치솟자 1849년에 캘리포니아에 금을 캐려는 광산업자들이 몰렸던 것과 비슷하게 1930년대에 캘리포니아에 다시 광산없자들이 몰리게 된다.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영국에 산업혁명이 일어난 즈음에 다섯, 여섯살 짜리 꼬마 아이들이 광산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굴을 크게 파면 무너져내리니까 아주 좁은 굴을 파고 아주 작은 아이들을 들여보내 일을 하게 했다고 하던가? 이런 열악한 상황, 인간 소외의 현상을 배경으로 마르크스의 고민이 시작되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1930년대 캘리포니아의 금광이 그정도로 열악하지는 않았겠지만, 이 그림속에서 광부가 웃통을 벗어제낀채 쪼그려 앉아 채굴기를 붙잡고 있다.  청년이 앉아있는 배경을 살피면 청년의 머리 윗부분쪽에 이 막장의 디딤목들이 보인다. 거기까지는 사람의 손으로 굴이 무너지지 않게 안전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청년은 막장 너머 새로운 영역을 확보 하기 위해 굴을 파고 있는 중이다.  아직 안전조치가 취해지지않은 미지의 영역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런 그림에 Gold is where you find it 이라고 붙여 놓았다. 이런 제목에서 'you'는 일반적인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당신이, 그대가, 우리가 라고도 해석이 가능하며, 주어가 생략되는 일이 흔한 한국어에서는 아예 이 경우 'you'에 대한 직접 해석을 생략해도 된다.  그러니까 이 영문 제목에 가능한 한국어 번역은

 1. 황금은 당신이 찾는 그 곳에 있다

 2. 황금은 그대가 찾는 그 곳에

 3. 황금은 우리가 찾는 그 곳에 있다

 

이 제목은 어떤 속담의 댓구처럼 보인다. 영어 속담중에 Home is where the heart  is 라는 말이 있다.  한국말에 '정들면 고향'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위의 속담과 비슷한 뉘앙스로 보인다. '마음이 가는 곳이 고향이지' '마음이 가는 곳이 내 집이지' 이런 의미이다.  수구초심(首邱初心) 이라고, 여우는 죽을때 머리를 고향으로 둔다고 하는데 사람이나 짐승이나 고향, 집에 대한 애정은 본능과 같다.  그런데, 달리 생각해보면,  내 마음이 가는 그곳이 내 집이고 내 고향이란 말이다.

 

Home is where the heart is. (마음 가는 곳이 내집이지)

Gold is where you find it. (찾는 곳에 금은 있지)

 

서로 가락이 맞아 떨어지지 않는가?

 

만약에 이 그림의 제목이 '찾는 곳에 금은 있지'가 아니고 '막장' '노동' '금광' 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여전히 이그림의 효과는 동일 했을까?  나는 미술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작품'과 '작품 제목'과의 관계에 대해서 전문가적인 논의를 펼칠수는 없다. 미술 작품은 '제목'을 떠나서 순수하게 '작품' 자체로만 평가받아야 옳은 것인지, 제목까지 포함된 것에 대한 평가를 받아야 옳은것인지?  가령 미술대회를 할때, 심사의원들은 '작품'만을 평가하는지 아니면 '작품 제목'까지 보고나서 평가를 하는지?  나로서는 잘 알수 없지만, 이 작품의 제목이 '막장'이었다면 이 그림이 주는 전체적인 분위기는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작가는 Gold is where you find it 이라는 제목을 달아 줌으로써, 관객에게 어떤 희망적인 것을 읽도록 인도하고 있다.

 

웅크리고 앉아 일하는 청년의 노동 환경은 열악하다.  그런데 이 청년의 단단한 옆모습, 상체의 근육들 (요즘은 초콜렛 근육이라는 유행어가 돌고 있다. 네모난 초콜렛 한판 같이 울룩불룩한 상체근육의 별명일 것이다, 옛날에는 임금왕자라고 했고, 그후에는 빨래판 근육이라는 유행어가 있었는데, 요즘은 초콜렛이라고 한다. 재미있는 언어 변천이다.) 기기를 지탱하고 있는 그의 팔과 다리는 힘이 넘쳐 보이고, 그가 지탱하고 있는 기기는 탯줄과도 같이 케이블에 연결되어 있다.  그가 파 나가고 있는 벽면은 이 남자의 상체 근육과 비슷한 무늬를 이루고 있다.  태초의 순결하고 건강한 땅덩어리를 역시 건강한 인간이 파 들어가고 있는 형상이다.

 

그리고 제목이 Gold is where you find it 이다.

 

이 그림은 일견 열악한 노동의 현장을 그리는 것 처럼 비칠지도 모르고,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 단단하게 다져지는 노동자의 현장을 그대로 묘사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좀 들여다보고 있으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파 들어가는 이 청년의 모습이 미국 건국 초기에 '서부로 서부로' 향해 나아가던 '서부개척의 역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서부개척은 미국 지도에서 보면 동부에 정착한 유럽계 이민자들이 서부를 향해 나아간 역사인데 미국 지도상 오른편에서 왼쪽으로 들불처럼 퍼져 간 형상이라, 그림의 방향과 일치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그림은 열악한 노동환경의 '우울'이나 '사회 고발'의 성격보다는 '희망' '개척정신' '불굴의 의지'같은 메지지들이 더 힘있게 드러나는 것 같아 보인다.

 

원 작자가 어떤 의도로 이 그림을 그렸는지는 알 수 없다. 기억나지 않지만, 어디선가에서 읽은 자료에 의하면 작가는 '이런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제발 기억해 달라'고 했다 하는데... 이 그림에서 무엇을 읽어내는가 하는 것은 작가의 의도가 어떠하건 순전히 보는 사람 '맘대로'이다.  그것이 대중에게 공개된 '작품'의 운명이다. 그것이 그림이건 시이건, 소설이건, 타인에게 공개되는 순간 그것은 보는 사람에 의해 재해석 될 운명인 것이다.  한국인인 나는 이 작품에서 미국정신, 미국의 프론티어리즘 (Frontierism) 을 읽는다.

 

그런데, 이 그림을 이런식으로 해석 하는 사람이 나 뿐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엘리노어 루즈벨트 (Eleanor Roosevelt)가 남편이 집무실에 걸어 놓을 그림으로 뽑았다고 한다. 

 

 

september 23, 2009  your redfox.

 

 

 

사족이지만, 뉴딜 정책기의 예술기금으로 탄생한 이런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70년대의 아이'였던 내가 성장할때 우리집에 걸려 있었던 그림들이 생각난다. '70년대의 아이'는 '새마을 시대의 아이' 혹은 '유신시대'의 아이와도 상통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는데 (아예 이쪽 세대론을 하나 적어 올려야...하하..)  우리 할아버지의 모자가 갑자기 생각난다. 초록색 새마을 표시가 붙은 모자. 우리는 아침이면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만드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이런 노래소리에 발을 맞춰 학교로 향했었다.  그런 새마을 시대에, 그 경제개발 오개년 계획 시대 덕분에 가난뱅이 서생이었던 우리 아버지도 '잘살아보세' '잘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 염불의 힘으로 잘 살아보게 되었는데, 일전에도 적었지만, 우리 아버지 주위에는 '예술인'들이 많았고, 그냥 '미술학도'들의 작품도 가끔 선물을 받곤 하셨다.  그당시에 '미술학도'들의 작품으로 우리집 벽에 걸렸던 작품들이 대개 '공장풍경,' '농촌 개발 풍경' 이런 것들이었다. 나는 속으로 '왜 우리집 벽에는 저렇게 재미없는 그림들이 걸리나?' 불평을 하고 있었는데, 내눈에 영 살벌하고 재미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림에는 그저 왕자공주가 나와줘야~   (어린 마음에).

 

유신시대에 미술학도들은 산업의 현장이나 개발의 현장, 농촌이 변해가는 풍경등을 그리기도 했는데, 어쩌면 그 당시의 시대상황이 미술계에도 영향을 끼쳐서 그런 성향의 그림이 장려가 된것이 아닐까 추측을 해 보게 된다. 사회성이 있는 그림이긴 한데 어쩐지 '관제' 냄새가 나는.

 

뉴딜 정책의 미술 기금으로 제작된 그림들도, 분명 '사회성'이 보이기는 하되,어쩐지 '고발'이나 '비평'보다는 '어둡지만 희망을' 식의 '관제 희망'이 스며든 그런 작품들처럼 얼핏 보이기도 한다. '관제 희망.'  

2009년 9월 13일 일요일

Roy Lichtenstein: House 1 리히텐시타인의 '집 1'

 

 

미국 미술가들을 차례차례 정리하다보면 훗날 Roy Lichtenstein (로이 리히텐시타인)에 대한 챕터도 정리가 되겠지만, 오늘은 National Galler of Art (워싱턴 국립 미술관)의 조각공원 (Sculptor Garden)에 설치된 그의 작품 한가지를 소개한다.

 

사실, 이 작품은 워싱턴에 2년 넘게 드나들면서 자주 보던 것인데, 며칠 전에야 이 작품의 진정한 '매력'을 발견했던 것을 고백한다.

 

(사진감상)

 

 

 

'집'이라는 이 작품은 보는 각도에 따라서 그 입체감을 달리한다. 귀여운 집이다. 어떻게 보면 공중에 떠있는것 같기도 하고.  언덕위의 집을 이각도 저 각도에서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사실, 이곳은 평지이다. 평지인데 어떻게 언덕위의 집처럼 보이는가?

 

그 비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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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착시현상을 이용한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