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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28일 목요일

헨리 데이비즈 소로우: 세개의 의자

나의 블로그 이웃 친구 느림보님의 글에 Henry David Thoreau 가 월든 호반에 지은 오두막과 세개의 의자 얘기가 나온다.  마침, 내가 2009년에 여행하다 들른 적이 있어, 사진을 뒤져봤다.

 

 

http://slowland.textcube.com/195

이 글에 따르면, 소로우가 세개의 의자를 만든 이유

1. 하나는 '고독'을 위하여

2. 하나는 '친구'를 위하여

3. 마지막 하나는 '사교'를 위하여

라고 한다.

 

다음은 그 고독과, 친구와, 사교를 위해 만든 세개의 의자들, 그리고 월든 호수 사진들이다.

 

 

미 동부 뉴잉글랜드 지방, 매사추세츠주의 콩코드 (Concord) 시에 있는 월든 호수. 그 호숫가에 소로우가 손수 지었다는 오두막 (현재 월든 호반에 있는 이 오두막은 설계대로 똑같이 지어낸 모형이다. 원래의 오두막은 사라지고 없다). 월든 호수 입구에 소로우의 동상과 오두막이 세워져있다.

 

 

 

 

오두막 뒤로 장작을 쌓아두는 창고가 보인다.

 

 

 

오두막은 조금 큼직한 방 하나 크기이다. 입구에 들어가면 오른쪽에 작은 일인용 침대가 보이고, 정면에 벽난로가 있다. 벽난로 옆에 감자, 양파 그런 식료품과 냄비등이 있다. 간단한 요리를 해 먹을수 있겠다.  입구에서 왼편으로 안쪽에 의자 하나, 가운데 작은 책상 한개, 그리고 의자가 두개 더 있다.  실내에 의자 세개가 있다.  입구 양쪽 옆 벽으로는 창문이 나 있다.  한사람이 소박하게 살아가기에 적합한 공간이다.

 

 

 

 

월든 호숫가를 따라 산책을 하다보면,  소로우의 오두막이 원래 서있던 터로 향하는 안내판들을 발견할수 있다. 그 안내판을 따라서 숲길을 걷다보면 돌무덤이 나오고 집터 표시가 나온다. 발굴 당시의 기록 사진이 들어있는 안내판도 보인다.

 

 

 

그 오두막터에 들어가 서서 내려다보면 이런 숲과, 숲사이로 찰랑거리는 호수, 그리고 푸른 하늘이 보인다.

 

 

이렇게 단아하고 정다운 월든 호수를 그는 가슴에 안고 살았을 것이다.

 

 

 

 

 

 

이 컵은, 그곳에서 사온 것인데, 늘 '커피'를 담고 있다. 커피 폰드.  노트북 내장 카메라로 찍으니까 거울 이미지가 나오는구나. 글자가 모두 반대방향.   

 

2010년 1월 RedFox

2010년 1월 3일 일요일

Thomas Cole: Hudson River School 토마스 콜과 허드슨강 미술가들

19세기 미국미술: 토마스 콜 과 허드슨강 미술가들

 

http://americanart.textcube.com/263  이전 페이지에서 토마스 콜의 '인생' 시리즈를 살펴 봤습니다.

 

 

19세기 미국 미술가인 Thomas Cole (1801-1848. 토마스 콜)은 미국의 풍경화가로 널리 알려져있으며, 그의 이름 옆에 반드시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허드슨강 미술가들 (Hudson River School)이라는 것입니다.  본래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1918년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합니다. 오하이오에 정착했던 그는 후에 펜실베니아 미술 학교를 거쳐서 1825년에는 뉴욕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당시에 미국의 지식인들이나 꿈을 가진 화가들이 거쳤던 노선이기도 하지요. 펜실베니아를 거쳐 뉴욕으로 가는 노선.

 

당시 뉴욕주의 허드슨 밸리 (Hudson Valley)라는 지역이 빼어난 자연경관으로 이름이 있었고 그래서 토마스 콜을 위시한 '미술학도'들이 이곳에서 풍경화를 그리거나 익혔습니다.  미국 건국 초기의 미술이라야 '초상화' 아니면 '풍경화'였다고 할만하지요.  후에 그는 이탈리아에 가서 풍경화를 그리기도 했는데, 허드슨 밸리의 Catskill 에서 결혼하여 죽을때까지 그곳에서 작업을 합니다.  그리고 토마스 콜을 위시하여 허드슨강 기슭에서 풍경화 작업을 하거나, 토마스 콜의 영향을 받은 일군의 미국 풍경화가들을 일컬어 허드슨강 미술가들 (Hudson River School)이라 칭하게 됩니다.

 

허드슨강 미술가들은, 대개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미국의 풍경들을 그렸고 (말하자면 진경산수라고 할만하죠),  때로는 이상화된 풍경들도 그렸습니다. 이 허드슨 미술가들에 의해 '거대한 미국의 풍경'들이 유럽사회에 알려지게 되기도 했고요.

 

허드슨강 미술가들중에 널리 알려진, 제가 장차 페이지를 열어 소개를 하고자 하는 화가들은

 1. Albert Bierstadt (알버트 비어슈타트) : http://americanart.textcube.com/361

 2. Frederic Edwin Church (프레데릭 에드윈 처치) http://americanart.textcube.com/363

 3. Thomas Moran (토마스 모란) http://americanart.textcube.com/364

등인데요.

 

이 주요 화가들의 그림을 감상하면서 장차 허드슨강 미술가들 특징을 좀더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토마스 콜의 풍경화, 그 속에 담긴 우화들

 

 

토마스 콜은 풍경화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풍경화속에 성서적 우화들을 담기를 즐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 작품의 제목은 The Subsiding of the Waters of the Deluge 인데요.  '노아의 홍수 뒤에 차분해진 물결'로 해석이 됩니다.  Deluge 는 홍수, 범람을 의미하는 어휘인데, 성서에서 the Deluge 라고 하면 노아의 홍수를 가리킵니다.  "After me, the deluge!"  나 이후에 홍수가 오건 말건 상관없다는 뜻이지요. 나 살아생전에만 무사하면 된다 이거죠. 좀 무책임한 발상이죠. (내가 알게 뭐람).

 

그림의 제목만 보면 토마스 콜은 성서에 담긴 노아의 홍수, 그 이후의 평화를 그린것으로 풀이됩니다만, 또다른 해석도 가능해집니다. 미술관의 그림 안내지에 담긴 내용을 옮기자면, 토마스 콜은 이 그림을 통해 신생국가 미국을 찬양했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이민자였던 토마스 콜 자신의 삶의 관점을 보여준것은 아니었을까요?)

 

노아의 홍수가 뜻하는 것은 묵은것의 청산, 죄악과 오류의 청산. 그리고 새로운 시작이지요. 신생국 아메리카가 유럽의 영향권에서 독립을 하는것 역시 새로운 시작일수 있고, 유럽에서 이민 온 토마스 콜에게도 미국에서의 삶은 새로운 시작일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 깊고 어두운 동굴을 통과하여 저 멀리 노오랗게 햇살이 비치는 평화의 바다로, 신세계로 나아간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제가 사진 사이즈를 줄여놔서 잘 안보이시겠지만, (사진 두번 클릭하시면 커집니다), 사진 하단의 중앙의 바위 옆에 보시면 희끄무레한 조그만 것이 보이실겁니다. 해골바가지 입니다.  해골바가지.  이 해골바가지는 왜 그려넣은 것일까요?

 

 

노아의 홍수 이후, 새로운 에덴을 향하여

The Subsiding of the Waters of the Deluge 1829

Oil on Canvas

2009년 12월 19일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서양 그림을 감상하실때, 서양 그림에 '해골바가지'가 자주 등장한다는 것을 감지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나라를 막론하고 유럽 화가들은 '해골'을 그려넣기를 즐겼습니다. 이를 Memento Mori (메멘토 모리: 우리가 모두 죽어야 할 생명들이라는 것을 기억함) 이라는 용어로 정리를 하기도 합니다. Memento (Remember, 기억하라), Mori (mortal,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아리따운 여인이 한손을 해골에 얹고 있는 그림은 어떤 식의 해석이 가능할까요?  인간은 유한하고, 처녀의 아름다움도 유한하다는 메시지이지요.  책상위에 모래시계와 해골이 그려져 있는 그림이 있다면,  메시지는 더욱 분명해지지요. 시간은 흘러가고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우리는 죽을거라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 그림에 담긴 해골은 어떤 상징을 담고 있을까요?  우리 모두 죽을거다?  뭐 그보다는.... 어떤 것의 종말을 상징할수도 있지요.  구시대는 끝났다. 이 해골을 넘어서서 저 평화로운 신천지로 나아간다는 뜻일수 있지요. 신세계 미국은 New Eden 새로운 에덴동산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토마스 콜에게.

 

2003년 겨울에 (아 벌써 아주 오래전의 일이구나, 어제 같은데...) 뉴올리안즈에 간적이 있습니다. 태풍 카트리나가 강타하기 전,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던 곳이었지요. 뉴올리언즈 시가지에 타로 점쟁이 할머니가 앉아있길래, 난생처음으로 길거리에서 타로점을 쳐봤습니다.  아, 제 일기에 그당시 사진이 있어서 올려봅니다. 그때 제가 고른 패중에 '해골'이 그려진 패가 있었거든요. 크리스마스 휴가로 간 여행이라 '신년운세'를 본것인데, 뭐 해골 패가 나왔던겁니다.  그런데 점쟁이 할머니가 제 패를 들여다보더니 설명을 해주더라구요. 이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죽음'은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기도 한다.  넌 새해에 큰 행운을 맞이할것인데, 그것을 얻기 위해 고통이나 노력이 필요하다. 잘 해내길 바란다. (히히, 점쟁이가 아닌 나 라도 그런 설명은 하겠다) 아 뭐 점쾌가 하도 안좋아서 나를 위로하려고 이러시나 했지요.

 

 

 

2003년 12월 뉴올리언즈의 타로 점쟁이 할머니와 나.

 

그런데, 그 이듬해에 저로서는 인생의 큰 전환점이 왔지요. 아주 힘든 시험도 쳤고, 새로운 관문으로 들어섰지요.  죽음은 곧 탄생이다. 새로운 탄생이다.  점쟁이 할머니의 아름다운 설명이 고마웠죠. 결국 인생 이리저리 해석하기 나름인데...

 

아, 예, 그래서 토마스 콜의 그림에 담긴 저 해골은, 죽음, 그러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이지요. 구시대, 구습의 죽음, 신생국가의 새로운 에덴동산을 희구하는.

 

 

 

아래의 두편의 그림들은 십자가의 순례라는 타이틀의, 기독교 우화 연작의 일부로 보입니다. 그가 1848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 작품들이 1847년 1848년에 그려진 것이고보면 이것들이 토마스 콜의 최후의 작품들이었던것 같은데요. 그 자신이 생의 마지막에 다다랗다고 느꼈던 것일까요? 

 

시작은 끝과 통하고, 끝은 새로운 시작과 닿아있고...

 

한해를 시작하는 요즈음, 묵은것들을 털어 내시고, 또 새로운 종말을 향해 여행을 떠나야할 때이지요.  올해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알수 없으나, 길을 떠나보는거죠.

 

 

 

The Pilgrim of the Cross at the End of His Journey

십자가의 순례, 그 여행의 끝 (십자가와 세상이라는 연작 시리즈를 위한 준비화)

(Study for the series; The Cross and the World) 1846-1848 Oil on Canvas

2009년 12월 19일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The Pilgrim of the Cross at the End of His Journey (about 1847)

십자가의 순례,그 여행의 끝.

Oil on Canvas

2009년 12월 19일 워싱턴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그리고 올해의 마지막날,  아름다운 한 해였노라...라고 술회 할수 있기를.

 

2010년 1월 3일 redfox

2009년 12월 4일 금요일

The Eight (Ashcan School) :(1) Henri

 

Snow in New York  뉴욕의 눈 (雪),  1902년

Robert Henri

Oil on Canvas

2009년 9월 11일 워싱턴 국립 미술관에서 촬영

 

 

로버트 헨라이 (Robert Henri 1865-1929)는 미국 사회사실주의(Social Realism) 미술가들의 스승으로 알려진 화가 입니다.  이 사람의 가족력이 좀 흥미로운데, 본디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Cozad 였고 그래서 로버트 헨라이는 원래 Robert Henry Cozad 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웃 사람과 다투다가 총질을 하는 바람에 이웃사람게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야반도주를 하는 수 밖에요. 결국 가족들도 야반도주한 가장을 따라 도망을 가게 되었는데, 훗날 새로운 삶을 위해 성씨를 바꿔버렸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의 이름이 졸지에 로버트 헨라이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아, 그는 미국출신으로 유럽에서 주로 활동했던 화가 Mary Cassett (메리 커셋)과도 친척이라고 합니다.  메리 커셋에 대한 소개는 다음으로 미루기고 하겠습니다.

 

헨라이는 펜실베니아 미술학교에서 수학했고, 당시의 미국 젊은이들이 그러하였듯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인상파 화가들의 영향을 받기도 했습니다. 1891년 필라델피아로 다시 돌아온 헨라이는 1892년부터 미술 학교에서 미술 교육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당시 인쇄매체의 삽화가로 활동하던

 * William Glackens

 * Goerge Luks

 * Everett Shinn

 * John French Sloan

 

등과 어울리며  Ralph Waldo Emerson,  Walt Whitman, Henry David Thoreau 의 사회사상 관련 글을 읽습니다.  랄프 왈도 에머슨은 미국의 '초절주의 (Transcendentalism)'와 'Self Reliance (자기 주체)' 정신으로 널리 알려진 철학자였고, 월트 휘트만은 미국 최초의 산문시인으로 풀잎과도 같이 강인한 대중들을 노래한 시인이며,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우리에게 월든호수 (Walden) 라는 작품으로 알려진 역시 Self Reliance 정신의 신봉자였던 인물입니다.

 

이들은 이후에 활동의 본거지를 뉴욕으로 옮기게 됩니다. 헨라이는 뉴욕의 예술학교 (New York School of Art)에서 교편을 쥐게 되는데 이때 Edward Hopper, Rockwell Kent, George Bellow, Stuart Davis 등을 가르치게 되지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의 미국의 상황은, 사회적으로는 노동자들이 임금이나 작업 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동조합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1904년에는 한해 동안 전국적으로 4,000 번의 파업이 진행되었다는 집계가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노동운동은 주로 시카고, 디트로이트, 샌프란시스코, 뉴욕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미국의 고등학생등의 필독서중에 Upton Sinclair (업튼 싱클레어)의 The Jungle (정글, 1906)이라는 소설이 있는데,  고기 가공장에서 일하는 이민자 가족의 비극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이민자들은 Self Reliance (자기 주체) 정신으로 열심히 살아가려고 애쓰지만, 이들이 처한 노동 환경은 호락호락 하지가 않습니다. 약육강식의 정글이라는 얘기지요.  미국의 Self Reliance 라는 정신적 미덕도 통하지 않는 현상을 싱클레어는 고발하고 있는데요, 이와 같은 소설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져나오고, 노동운동도 활발하게 진행되는 중심에 당시의 미술가들도 서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당시 미술가들은 사실적인 사회, 사람들의 풍경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런 흐름의 선두에 서 있던 집단이 헨라이를 위시한 애쉬캔 (Ashcan) 그룹이고, 이들이 후에 The Eight (8인회)로 거듭나게 되지요. 헨라이는 그의 친구들이나 제자들에게  주변의 사람과 삶의 풍경을 그리되, 이를 상대가 알아채지도 못할 정도로 잽싸게 그리라는 조언을 했다고 합니다.

 

"Do it all in one sitting if you can," he advisded them. "In one minute if you can."  (Pohl, 2008) 

(해석: "그자리에서 한번에 그려버리게나," 헨라이는 그들에게 충고했다. "가능하다면 일분 안에." )

 

1902년 뉴욕에서 전시회를 가진 후 그는 풍경화를 접고 초상화를 주로 그리게 되었으며, 1908년에는 맥베스 갤러리에서 "The Eight (팔인회)" 전시회를 열게 됩니다. 사실 이 전시회를 열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마치 인상파 화가들이 프랑스의 살롱전에서 푸대접을 받은 후에 홧김에 인상파의 세기를 열었던 것처럼, Ashcan 화가들이 미국의 전시장에서 푸대접을 받자 미술비평가들과 정면으로 한판 단단히 붙은 후에 이 '팔인회' 전시회를 열게 된 것인데, 그 결과는 대중적으로나 비평계 모두 아주 호의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헨라이는 사실 그의 미술 작품 보다는 그가 미국 사회사실주의 화가들의 지도자 역할을 잘 해냈고, 그리고 미술 교육에서 공로가 크다는 점에서 오히려 미술사적 인정을 받는 편입니다.

 

헨라이가 후기에 초상화로 돌아서긴 했는데, 그가 초상화 작업을 통해 사회 각계 각층의 사람들을 화폭에 담아보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미술관에서 발견한 그의 초상화 작품들은 악사, 소년, 인디안 소녀,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Gypsy with a Bandurria (1906)

반두리아를 들고 있는 짚시

Oil on Canvas

2009년 12월 29일 버지니아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촬영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헨라이가 그린 작품입니다. (제가 헨라이에 큰 관심이 없다보니, 사진 상태가 성의가 없어보이지요? 예... 그래도 정성껏 찍을걸 하는 후회가 생깁니다.)  헨라이는 유럽의 '마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으로 소개가 되는데요, 이 그림 사진을 보니 '마네'의 피리부는 소년'과 비슷한 구도와 소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피리부는 소년 창작 년도를 찾아보니 1866년이군요. 다리 모양 닮았죠?  전체적인 구도도...

 

 

Manet, The Fifer (1866)

 

 

 

 

 

 

The Beach Hat (1914)

비치 모자

Oil on Canvas

2009년 10월 30일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촬영

 

 

 

 

Boy with Plaid Scarf (1916)

격자무늬 목도리를 한 소년

Oil on Canvas

2009년 10월 30일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촬영

 

 

 

 

Indian Girl in White Ceremonial Blanket (1917)

제사용 담요를 휘감고 있는 인디안 소녀

Oil on Canvas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이 작품은 헨라이가 뉴멕시코주의 산타페를 두번째 방문했을때 현지의 인디언소녀를 모델로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소녀의 이름은 Julianita 로 San Ildefonso Indian 종족이었다고 합니다.

 

사실, 아마도 제 그림 사진 파일을 뒤져보면 어딘가에 헨라이의 초상화 사진이 몇장 더 있을것 같습니다.  때로는 미술관에서 헨라이의 작품이 보일때,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나한테 매력이 없어 보였으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여기저기서 중구난방으로 봤던것들을 한페이지에 시간순서대로 정리하다보니 제가 미술관에서 보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게도 됩니다. 그냥 하나 하나 볼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 예를 들자면 헨라이의 초상화의 소재가 된 인물들이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혹은 별 관심을 끌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 인물들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면서도 모두 닮아보인다는 것 (이는 헨라이의 표현 스타일에 일관성이 있어서 그러할 것이겠지요) 뭐 이러한 것들 입니다.  짚시 악사 그림과 마네의 피리부는 소년 그림의 유사성도 미술관에서 발견한 것이 아니라,  사진을 쳐다보면서 생각한 것이고요.  그래서,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어떤 '현상'을 관찰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미술관에서 미술작품을 눈으로 감상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후의 사색이나 반추 역시 의미있는 일이라는 것.

 

돌아보면, 저는 미술관에서 작품들을 구경하면서 '쾌락'을 느끼기도 하지만, 후에 사진들을 다시 정리하거나 관련 페이지를 적으면서, 그제서야 깨닫게 되는 사실들도 많은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의 '미국 미술 이야기' 블로그 프로젝트를 기쁘게 생각합니다.  제가 깨닫게 되는 것들이 페이지가 쌓일수록 늘어가니까요.

 

 

 

 

 

관련 페이지들:

 

 

 

http://americanart.textcube.com/118

http://americanart.textcube.com/133

http://americanart.textcube.com/137

 

 

참고문헌:

 

1. Frances K. Pohl (2008), Framing America: A social history of American art (2nd ed.), Thames & Hudson; New York, NY

2. Suzanne Bailey (2001), Essential History of American Art, Parragon Publishing, Bath BA, UK

3. William G. Scheller (2008), America: A History in Art, The American journey told by painters, sculptors, photographers, and architects. Black Dog & Leventhal Publishers; New York, NY.

4. Marcha N. Hagood & Jefferson C. Harrison (2005) American Art at the Chrysler Museum: Selected paintings, sculpture, and drawings. Chrysler Museum of Art: Norfolk, VA

 

 

 

2009년 10월 7일 수요일

Mortal, but Immortal

When a little more deliberation in the choice of their pursuit, all men would perhaps become essentially students and observers, for certainly their nature and destiny are interesting to all alike.  In accumulating property for ourselves or our posterity, in founding a family or a state, or acquiring fame even,  we are mortal; but in dealing with truth we are immortal, and need fear no change nor accident.  The oldest Egyptian or Hindoo philosopher raised a corner of the veil from the statue of the divinity; and still the trembling robe remains raised, and I gaze upon as fresh a glory as he did, since it was I in him that was then so bold, and it is he in me that now reviews the vision.  No dust has settled on that robe; no time has elapsed since that divinity was revealed.  The time which we really improve, or which is improvable, is nether past, present, nor future.

 

사람이 추구하는 바를 좀더 깊이 들여다보면 발견하게 되는 현상이 뭔가하면, 모든 사람은 근본적으로 '학생' 혹은 '관찰자'가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학생이나 관찰자의 속성이나 운명은 모두에게 흥미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나 후세를 위해 재산을 모은다거나, 가정 혹은 국가를 이룬다거나,  또는 개인적 명성을 얻는것에 이르기까지, 모든것은 결국 죽고 사라질 운명이다. 하지만 진리를 대하는데 있어 우리는 영속적이며 변화나 사고를 두려워 할 필요도 없다.  고대의 이집트 혹은 인도의 철인은 신의 조형물을 덮은 베일의 끝자락 일부를 들어올린바 있으며,  아직도 그 미세하게 흔들리는 베일의 끝자락은 그대로 올려진채 있다.  나는 이 들어올려진 끝자락을 통해 고대의 철학자가 보았던 그 신선하고도 영광스런 자태를 올려다본다. 고대의 철학자 속에는 그 당시 그토록이나 용감했던 나 자신이 들어있었던 것이며, 오늘날 이를 다시 살피는 이는 내 속의 그 철학자 인 것이다.  세월은 흘러갔지만 베일자락위에 먼지 한톨도 내려 앉지 않았다.  신성이 최초로 발견된 이래로 시간은 흘러가지 않았다.  우리가 향상시켜 나가는 시간은, 혹은 우리가 진보시켜 나갈수 있는 시간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닌 것이다.

 

--Henry David Thoreau, Walden (Reading) pp.82

 

 

Edward Hopper 가 즐겨 읽은 사람들은 Ralph Waldo Emerson, Henry David Thoreau 인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삶의 태도와 이들 철학자들과 연관지어 생각해보면 Hopper 의 삶의 태도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된다.  Emerson 이나 Thoreau 에 대한 이해는 미국 문화 전반에 대한 이해로 확장 될 수도 있겠다. 이들은  미국이 의지할 수 있는 정신적인 스승이며 친구들이기도 했으므로. 이들의 Self-Reliance 정신과,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미국 근대화가들의 성향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것으로 보이는데,  내가 어느 선까지 정리를 해야 할지 난감하여 고민을 하고 있다.

 

위로가 되는 것은, 며칠전에 집에 있는 알란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 책에서 그의 '호퍼'관련 챕터을 찾아 읽어보았는데,  지금 호퍼에 대한 지식으로 무장 된 상태에서 알란 드 보통의 글을 다시 살펴보니 그의 그 맛깔스럽고 매력적인던 글이 진부하고 상투적으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참 대충 쓴 글이군.  그런데 내가 잘 모르는 상태에서는 매력적으로 보였군.  이런 생각도 들고,  내가 글을 너무 심각하게 쓰면 안될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사기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내 시각으로 풀어내도 될것 같다.  (그렇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호퍼의 개성을 정리해내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겠지. 역시 알란 드 보통은 재주가 뛰어나다.)

 

 

오늘 아침 Thoreau 의 이 글이 내게 고요한 평화를 가져다 준다.  고대 이집트의 철학자속에 내가 있었단 말이지.  써로우가 하늘을 보며 감탄할때 그 속에 내가 있었단 말이지.  지금 내 속에 써로우가 있단 말이지. (재미있는 발상. 위로가 되는 발상.)

 

 

나의 관점은 이러하다:

 

Edward Hopper 는 Robert Hughes 의 설명에 의하면 Solitary Watcher (외토리 관찰자) 였다.  호퍼는 끊임없이 이리저리 떠돌면서도 평생 조그만 아파트를 자신의 거주지로 정해놓고 살 정도로 정적인 인간이기도 했다.  그가 생활이 핀 후에도 (그가 그림을 팔아 떵떵거리고 살정도로 부자가 된 후에도) 공중화장실을 써야하는 아파트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냥 눌러 산것은  그가 이런 일상적 삶의 양태에 대해서 얼마나 무관심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는 동떨어진 관찰자였고, 그렇게 동떨어진 자세를 견지하며,  사람들 곁으로 다가섰다. 사람들의 가슴속으로 서늘하게 들어섰다. 그는 말없는 관찰자였고,  오직 그림으로서 그의 세계관을 외쳐댔다. 그는 고요했지만, 그의 고요한 그림의 울림은 미국을 흔들었다.

 

헨리 데이비드 써로우 (Henry David Thoreau)는 Edward Hopper 가 즐겨 읽던 작가였다.  써로우는 평생 독신으로 지내면서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혼자 생활한다거나,  세금 내지 않겠다고 일인 시위를 벌이며 '시민 불복종'을 외치다가, 파출소 유치장 신세를 진다거나, 산속을 떠돌며 자연을 관찰하면서 외토리처럼 살았지만, 그가 남긴 글은 미국의 지식인들의 양식이 되고, 추억이 되고, 울림이 되고, 그리고 세계의 보통사람들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검소하게 살다가, 궁핍하게 죽어갔으나, 그의 책은 재벌들의 금장 저택 서재에서부터 가난뱅이 학생의 찌그러진 책상에까지 파고들어 이들의 영혼의 친구가 되었다.

 

써로우나 호퍼나 서로 외토리, 외고집, 은둔자라는 면에서 일치하고, 미국이 자랑하는 '고유의 미국인'이라는 점에서도 서로 통하며, 이들이 '미국'이라는 국경을 넘어 보통사람들 곁으로 다가간것도 닮았다.

 

이들의 삶을 관찰해보면, 외고집쟁이들의 '승리'를 읽게도 되는데,  여러가지 경영관련 처세술 책, 잘 먹고 잘살자 노래부르는, 혁신을 외치는 책들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밥을 혼자 먹지 말라' '사람들과 자꾸 어울려라' '사교 골프를 치지 왜 안치냐' 뭐 이따위 대단한 금언들이 무색해진다는 것이다. 혼자 자기 구멍만 파면서 동떨어져 살아도, 난놈은 나는거고, 남이 나를 알아달라고 외쳐대지 않아도, 난놈은 저절로 세상이 알아본다는 것이지. 세상에 아첨하며 살지 않아도, 인생은 굴러간다는 것이지. 하하 (또 이상한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