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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 23일 수요일

[PSAP5] The Farmer's Kitchen 농부의 부엌 (1934)

The Farmer's Kitchen 농부의 부엌

ca. 1934 Ivan Albright  이반 올브라이트

Born: North Harvey, Illinois 1897 Died: Woodstock, Vermont 1983

oil on canvas 36 x 30 1/8 in. (91.5 x 76.5 cm.)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Transfer from the U.S. Department of Labor 1964.1.74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1st Floor, West Wing

 

 

이반 올브라이트는 일관되게 이런 '분위기'의 그림을 고수한 화가이다. 특히 현재 시카코 아트 인스티튜트 미술관에 있는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이 유명한데 그의 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매우 개성있고 기묘하다.  우리가 어릴때, 문방구에서 값싼 돋보기를 하나 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돋보기를 처음 만난 우리들은 그것을 아무데나 다 갖다 대 본다. 가장 만만한 것이 우리의 손이다. 돋보기를 들고 우리 손을 들여다보면 피부의 '때'도 아주 커다랗게 확대되어 보이고, 피부의 구릉이나 그 사이의 솜털도 상세히 드러나는데,  들여다보면 신기한 맛은 있지만, 썩 기분이 유쾌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돋보기나 현미경을 가지고 우리 피부를 들여다 볼때 우리 눈에 띄는 것은 너무나 생경해서 차라리 피하고 싶은 그런 광경들이다.  아직까지 그런 경험이 없으신가?  지금이라도 아무거나 돋보기를 잡아가지고 손톱끝이나 손가락 피부를 들여다보시라. 지문 결마다 박힌 때라던가, 손톱사이의 때, 혹은 아주 작은 상채기들이 어떻게 고랑을 이루는지 한편 흥미로우면서도 곧 기분이 역해질지도 모른다. 그것이 내가 사랑해 마지 않는 내 연인의 손일지도 모르고... 사랑해 마지 않는 내 연인의 손.

 

이반 올브라이트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런 화풍을 개발해내고 일관되게 유지했는지 그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한다. 나중에 관심이 동하면 도서관에서 그와 관련된 책을 대출해다가 읽어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가 어떠하였건, 관객으로서, 혹은 그림을 읽어나가는 독자로서 이 그림은 내게도 충분히 '재미있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일단, 특이한 묘사가 눈에 띄고, 그리고 얼핏보면 흉측하고 역겹다는 느낌이 강하지만,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면, 어쩐지 이 인물에 감정이입이 되고 만다.  그리고 '인생 다 그렇지'하며 수긍하게 되고 만다.  무슨 말씀인가하면, 우리가 돋보기를 가지고 손톱사이의 때를 들여다볼때 바로 그 느낌, 인생이 뭐 숭고하지도 않고, 통속적이지만, 뭐 설령 이렇게  돌이킬수 없이 늙어가고 시들어가고 망가져가고 고립되어 간다해도,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이 망가진 삶을 붙들고 꾸역꾸역 견뎌나가고 있다는 것이지.  이 주인공만 이런 상황에 던져진 것도 아니고,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가령 나를 버리고 간 내 님도 그렇고, 모두 마찬가지로 이렇게 사그러져 갈 거라는 엄연한 '사실' 앞에서 나는 한편 안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좋아, 좋아, 모두가 이렇게되고 마는거야.  모두가 이렇게 고립된채로 하루하루 연명하는거야. 모두가 그런거야. 좋다구.  나만 당하는게 아니라 모두가 이꼴이 되는거라구.  그러면서, 안도하게 되는 것이다.

 

상세히 들여다보자, 현미경으로 손톱의 때를 관찰하듯 그림에 돋보기를 갖다 대 보자

 

 

우선, 농가 아낙의 얼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유산처럼 물려받은 얼굴이다. 깊게 흐르는 주림들, 쪼글쪼글한 입가와 눈가.  아, 피하고 싶겠지만, 이것이 세월이, 삶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선물.

 

 

 

그가 입은 앵두무늬 회색 드레스와, 꽃무의 앞치마 섶으로 드리워지는 가슴부분의 늘어짐.  우리는 이 여신의 유방이 힘없이 늘어졌을것이며, 유방 아래 뱃살도 주름지고 늘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옷의 흐름으로 그 주름을 아주 자연스럽게, 사실적으로, 너무나 생생하게, 그러나 은유적으로  잡아 놓았다.

 

 

 

 

 

 

 

 

우리가 주의깊게 들여다 보지 않는다면, 화면 구석에 고양이 한마리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지도 못하고 지나갈지도 모른다.  그렇다 방구석에는 줄무늬 고양이도 한마리 앉아있다. 고양이는 주인을 쳐다보는 것도 아니고 졸고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딘지 모를 곳에 시선을 보내고 있다. 고양이의 눈동공이 1자 인것으로 보아 실내는 밝은 상태인듯 하다. 실내가 어둡다면 고양이의 동공이 열려 었을 것이다.  고양이가 거기 있기는 하나, 그 고양이와 아낙과는 별 상관이 없어보인다. 그럼에도 고양이는 거기 있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고양이가 그 구석에 있고, 이 둘 사이에 아무런 유기적 관계도 보이지 않지만, 한편 여기에 고양이가 없다면 섭섭할 것 같기도 하다.   아낙은 고립되어 보이나 혼자가 아니다. 누군가와 함께 있다.  그런데 이들은 서로 아무 상관없이 자신의 일에 열중해 있다. 그래서 이 둘은 서로 고립되어 있음이 두드러지기도 한다.

 

 

 

 

 

 

 

 

 

나의 눈길을 가장 오래 붙잡아 두는 것은 아낙의 저 주름지고 퉁퉁 부은 손가락이다. 내 눈에 아낙의 손가락이 부어있다. 손가락 관절염을 앓고 있는걸까? 이 사람은 주름지고 아픈 손에 손칼을 하나 들고 지금 마악 야채를 한웅큼 다듬으려고 하고 있다.  그릇속에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보아 아낙은 지금 막 작업을 시작하려는 찰나 같기도 하다.

 

이 아낙의 오른 손이 내 시선을 잡아 끄는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평생 농가의 '아낙'으로 살다 가신 내 할머니는 아주 특별한 오른손을 갖고 계셨다.  그이는 '죽으면 썩을 몸뚱아리를 아껴서 뭐 할건가'를 소신으로 평생 부지런하게 일을 하여 가족을 지킨 분이다. 그런데 우리 할머니의 오른손 손가락 두개가 아주 특별했다. 할머니의 세번째 중지와, 네번째 손가락은 손바닥쪽으로 구부러지지 않고, 그대신 오히려 윗쪽으로 뻐정거리고 서있기만 했다. 할머니가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면 세번째, 네번째 손가락은 주먹을 쥐지 못하고 그냥 위로 뻐정거리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런 증상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었고,  할머니가 삽십대 아낙이었을때 밭에서 낫을 가지고 일을 하다가 그만 낫의 날을 잘 못 잡아서 손가락 인대가 끊어졌다고 한다.  인대가 끓어졌으므로 마음대로 오무리거나 펼수가 없는채로 그냥 뻐정거리게 굳어버리고 만 것이다. 단지 낫 날에 잘 못 베어서 두개의 손가락이 간단히 불구가 되고 만것인데, 할머니는 그 손가락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면서 장수 하셨다.

 

나는 하필 이 그림에서 농가의 아낙의 손을 발견한 순간, "아 우리 할머니의 손이다" 이러고 혼자 반가워서 멍멍멍 하고 말았던 것이다.  불구가 된 손가락을 간직한채 할머니는 그 손을 늘 바지런히 움직여 밥을 까서 우리를 먹이고, 반찬을 하여 우리를 먹이고, 그 손으로 내 더러운 얼굴을 씻겨 깨끗하게 만들어주시고, 그 손으로 매섭게 나를 나무라기도 하시고, 그 손으로 식구들을 안전한 울타리에서 보호하시다가, 그 손을 곱게 펴고 수의를 입고 지상을 떠나셨다.  할머니는 죽어서야 그 뻐정거린 손가락을 곱게 펼수 있었다.

 

신비한 미소의 주인공 모나리자나 혹은 바다에서 태어난 비너스의 아름다움 만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아니다.  이 그림속의 농가의 여인은 주름투성이 얼굴로 고립된 채 앉아 전혀 관객과 소통이 안될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지만,  우리는 그의 주름에서, 그의 퉁퉁부은 손가락에서, 그의 고립감에서 위로를 발견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아름다워보이지도 않고 늙고, 추레하고, 주름투성이이고, 웃지도 않는 이 아낙이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이유는 뭘까?   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미'와 '추'의 개념에 대해서 인상쓰고 고민하기도 한다. 인상 쓸것 없다. 주름이나 늘 것이다.  그냥 때로 우리는 아름다움에서 '무심함'을 발견하기도 하고, 때로 '추함'에서 '숭고함'을 발견하기도 하는 것이니.  어떤이는 이런것을 '마술적 사실주의 magical realism'으로 설명을 하러 들기도 한다. 내게는 그냥, 그리운 할머니의 손 쯤으로 기억될 것이다.

 

 

 

 

[PSAP4] 황금은 당신이 찾는 곳에 Gold is where you find it

뉴딜 예술 운동 작품

 

 

Gold is where you find it  (1934)

황금은 당신이 찾는 곳에

Tyrone Comfort

Born: Port Huron, Michigan 1909 Died: Los Angeles, California 1939

oil on canvas 40 1/8 x 50 1/8 in. (101.9 x 127.3 cm.)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Transfer from the U.S. Department of the Interior, National Park Service 1965.18.49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1st Floor, West Wing

http://americanart.si.edu/collections/search/artwork/?id=5195

 

 

위의 이미지는 위에 링크된 스미소니안 콜렉션에서 찾아온 이미지이고 아래는 내가 캐논 카메라로 찍은 것. 색감이 많이 차이가 나는데, 내가 육안으로 본 색감은 내 카메라의 이미지와 비슷하다.  물론 위의 것은 예술작품을 사진으로 옮기는 전문가들의 작업을 거친 것이고, 아래의 내가 찍은 사진은 카메라라 기술적으로 미숙하다 할 수 있겠지만, 두가지 모두 '사진'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내가 왜 사진들의 상태에 대해서 언급하는가 하면, 우리들이 '화집'이나 '그림책'을 통해 보게 되는 그림들이 이런 각기 다른 카메라와 사진가들을 통해 전달 되는 것인데, 때로는 약간의 색감의 차이에 따라서 원화가 줄 수 있는 감동이나 힘에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는 한계를 직시하기 위해서이다. 예술의 맛을 가장 생생하게 즐기기 위해서는 직접 '그 것'을 만나 보는 일 일것이다. 그 외에는 부수적인 것들이다.

 

가령 어떤 작품이 있을때, 우선은 그 원작을 눈으로 보거나 경험하는 것이 가장 본질에 다가가는 길이고, 그외에 부가적으로 작품의 배경에 대한 이해, 그 작품을 더 잘 알기 위해서 관련 자료를 찾아보거나 하는일, 혹은 그 방면의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일등이 도움이 될 것이다. 나도 심심할때면 화집들을 들춰서 그림 설명을 읽는 일을 즐기는데,  똑같은 그림이라도 책마다 크기나 색감이 차이가 날 때가 많다.  화집속의 그림들은 '지도'속의 표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지도속에 깨알같이 박힌 지명들을 확인하면서 지도속으로 행군하게 되는데, 화집속의 그림은 '원화'가 아니라 지도속에 새겨진 지명같은 것이다.  평생 지도만 들여다보면서 거기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한들, 지도속의 실재를 찾아가지 않는다면 그는 지도 독자에 불과하다. 때로 우리는 현지로 저벅저벅 걸어들어가기도 하는데, 그래서 그 땅을 만져보거나 그 하늘을 직접 올려다보고 그 바람을 느끼기도 하게 되는데, 가까운 미술관을 찾아가 누군가가 그린 그림을 감상하는 일, 작품들을 들여다보는 일은 지도 너머에 실재하는 세계로 조금더 가까이 다가가는 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1909년에 태어나서 1939년에 사망한 미술가 Tyrone Comfort (타이론 컴포트)에 대한 자료는 많지 않다.  이 작품은 1934년 발표 된 것이므로 그가 25세 청년이던 시절 그린 것이다.  (나는 어떤 작품을 볼때, 이 그림은 이 사람이 몇 살 때 그린것인가, 혹은 그 당시 시대 상황이 어떠했나, 이런 요소들을 생각 해 볼때가 많다. '사람'에 대한 관심 때문에 그러할지도 모른다) 25살 청년이 그린 그림이라고 생각하고 이 그림을 들여다보면 그림 속의 주인공도 그러하고 청년의 '역동성'과 '힘'이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이 그림을 별 관심도 없이 몇차례 스쳐 지나간 적이 있다. 미국미술 박물관에 가도 눈에 띄고, 내가 갖고 있는 미국미술 관련 화집에도 이 그림은 '꼭' 등장을 했다.  그러나 한번도 '눈여겨서' 관심있게 들여다 본 적은 없다.  아마도 내가 '미국미술' 블로그를 열고 본격적으로 '미국미술사' 공부를 하면서 세세하게 들여다보는 작업을 안 했다면 나는 평생 이 그림을 스치면서도 한번도 제대로 볼 생각을 안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그림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미국 미술사 화집에도, 인터넷에도 별로 나오는 것이 없고, 스미소니안이 제공하는 자료가 가장 상세한 편이다. http://americanart.si.edu/collections/search/artwork/?id=5195  이자료를 간략히 정리해보면, 경제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달러'가 휴지조각처럼 되고, 일자리도 귀해지고, 금 값이 치솟자 1849년에 캘리포니아에 금을 캐려는 광산업자들이 몰렸던 것과 비슷하게 1930년대에 캘리포니아에 다시 광산없자들이 몰리게 된다.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영국에 산업혁명이 일어난 즈음에 다섯, 여섯살 짜리 꼬마 아이들이 광산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굴을 크게 파면 무너져내리니까 아주 좁은 굴을 파고 아주 작은 아이들을 들여보내 일을 하게 했다고 하던가? 이런 열악한 상황, 인간 소외의 현상을 배경으로 마르크스의 고민이 시작되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1930년대 캘리포니아의 금광이 그정도로 열악하지는 않았겠지만, 이 그림속에서 광부가 웃통을 벗어제낀채 쪼그려 앉아 채굴기를 붙잡고 있다.  청년이 앉아있는 배경을 살피면 청년의 머리 윗부분쪽에 이 막장의 디딤목들이 보인다. 거기까지는 사람의 손으로 굴이 무너지지 않게 안전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청년은 막장 너머 새로운 영역을 확보 하기 위해 굴을 파고 있는 중이다.  아직 안전조치가 취해지지않은 미지의 영역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런 그림에 Gold is where you find it 이라고 붙여 놓았다. 이런 제목에서 'you'는 일반적인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당신이, 그대가, 우리가 라고도 해석이 가능하며, 주어가 생략되는 일이 흔한 한국어에서는 아예 이 경우 'you'에 대한 직접 해석을 생략해도 된다.  그러니까 이 영문 제목에 가능한 한국어 번역은

 1. 황금은 당신이 찾는 그 곳에 있다

 2. 황금은 그대가 찾는 그 곳에

 3. 황금은 우리가 찾는 그 곳에 있다

 

이 제목은 어떤 속담의 댓구처럼 보인다. 영어 속담중에 Home is where the heart  is 라는 말이 있다.  한국말에 '정들면 고향'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위의 속담과 비슷한 뉘앙스로 보인다. '마음이 가는 곳이 고향이지' '마음이 가는 곳이 내 집이지' 이런 의미이다.  수구초심(首邱初心) 이라고, 여우는 죽을때 머리를 고향으로 둔다고 하는데 사람이나 짐승이나 고향, 집에 대한 애정은 본능과 같다.  그런데, 달리 생각해보면,  내 마음이 가는 그곳이 내 집이고 내 고향이란 말이다.

 

Home is where the heart is. (마음 가는 곳이 내집이지)

Gold is where you find it. (찾는 곳에 금은 있지)

 

서로 가락이 맞아 떨어지지 않는가?

 

만약에 이 그림의 제목이 '찾는 곳에 금은 있지'가 아니고 '막장' '노동' '금광' 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여전히 이그림의 효과는 동일 했을까?  나는 미술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작품'과 '작품 제목'과의 관계에 대해서 전문가적인 논의를 펼칠수는 없다. 미술 작품은 '제목'을 떠나서 순수하게 '작품' 자체로만 평가받아야 옳은 것인지, 제목까지 포함된 것에 대한 평가를 받아야 옳은것인지?  가령 미술대회를 할때, 심사의원들은 '작품'만을 평가하는지 아니면 '작품 제목'까지 보고나서 평가를 하는지?  나로서는 잘 알수 없지만, 이 작품의 제목이 '막장'이었다면 이 그림이 주는 전체적인 분위기는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작가는 Gold is where you find it 이라는 제목을 달아 줌으로써, 관객에게 어떤 희망적인 것을 읽도록 인도하고 있다.

 

웅크리고 앉아 일하는 청년의 노동 환경은 열악하다.  그런데 이 청년의 단단한 옆모습, 상체의 근육들 (요즘은 초콜렛 근육이라는 유행어가 돌고 있다. 네모난 초콜렛 한판 같이 울룩불룩한 상체근육의 별명일 것이다, 옛날에는 임금왕자라고 했고, 그후에는 빨래판 근육이라는 유행어가 있었는데, 요즘은 초콜렛이라고 한다. 재미있는 언어 변천이다.) 기기를 지탱하고 있는 그의 팔과 다리는 힘이 넘쳐 보이고, 그가 지탱하고 있는 기기는 탯줄과도 같이 케이블에 연결되어 있다.  그가 파 나가고 있는 벽면은 이 남자의 상체 근육과 비슷한 무늬를 이루고 있다.  태초의 순결하고 건강한 땅덩어리를 역시 건강한 인간이 파 들어가고 있는 형상이다.

 

그리고 제목이 Gold is where you find it 이다.

 

이 그림은 일견 열악한 노동의 현장을 그리는 것 처럼 비칠지도 모르고,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 단단하게 다져지는 노동자의 현장을 그대로 묘사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좀 들여다보고 있으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파 들어가는 이 청년의 모습이 미국 건국 초기에 '서부로 서부로' 향해 나아가던 '서부개척의 역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서부개척은 미국 지도에서 보면 동부에 정착한 유럽계 이민자들이 서부를 향해 나아간 역사인데 미국 지도상 오른편에서 왼쪽으로 들불처럼 퍼져 간 형상이라, 그림의 방향과 일치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그림은 열악한 노동환경의 '우울'이나 '사회 고발'의 성격보다는 '희망' '개척정신' '불굴의 의지'같은 메지지들이 더 힘있게 드러나는 것 같아 보인다.

 

원 작자가 어떤 의도로 이 그림을 그렸는지는 알 수 없다. 기억나지 않지만, 어디선가에서 읽은 자료에 의하면 작가는 '이런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제발 기억해 달라'고 했다 하는데... 이 그림에서 무엇을 읽어내는가 하는 것은 작가의 의도가 어떠하건 순전히 보는 사람 '맘대로'이다.  그것이 대중에게 공개된 '작품'의 운명이다. 그것이 그림이건 시이건, 소설이건, 타인에게 공개되는 순간 그것은 보는 사람에 의해 재해석 될 운명인 것이다.  한국인인 나는 이 작품에서 미국정신, 미국의 프론티어리즘 (Frontierism) 을 읽는다.

 

그런데, 이 그림을 이런식으로 해석 하는 사람이 나 뿐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엘리노어 루즈벨트 (Eleanor Roosevelt)가 남편이 집무실에 걸어 놓을 그림으로 뽑았다고 한다. 

 

 

september 23, 2009  your redfox.

 

 

 

사족이지만, 뉴딜 정책기의 예술기금으로 탄생한 이런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70년대의 아이'였던 내가 성장할때 우리집에 걸려 있었던 그림들이 생각난다. '70년대의 아이'는 '새마을 시대의 아이' 혹은 '유신시대'의 아이와도 상통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는데 (아예 이쪽 세대론을 하나 적어 올려야...하하..)  우리 할아버지의 모자가 갑자기 생각난다. 초록색 새마을 표시가 붙은 모자. 우리는 아침이면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만드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이런 노래소리에 발을 맞춰 학교로 향했었다.  그런 새마을 시대에, 그 경제개발 오개년 계획 시대 덕분에 가난뱅이 서생이었던 우리 아버지도 '잘살아보세' '잘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 염불의 힘으로 잘 살아보게 되었는데, 일전에도 적었지만, 우리 아버지 주위에는 '예술인'들이 많았고, 그냥 '미술학도'들의 작품도 가끔 선물을 받곤 하셨다.  그당시에 '미술학도'들의 작품으로 우리집 벽에 걸렸던 작품들이 대개 '공장풍경,' '농촌 개발 풍경' 이런 것들이었다. 나는 속으로 '왜 우리집 벽에는 저렇게 재미없는 그림들이 걸리나?' 불평을 하고 있었는데, 내눈에 영 살벌하고 재미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림에는 그저 왕자공주가 나와줘야~   (어린 마음에).

 

유신시대에 미술학도들은 산업의 현장이나 개발의 현장, 농촌이 변해가는 풍경등을 그리기도 했는데, 어쩌면 그 당시의 시대상황이 미술계에도 영향을 끼쳐서 그런 성향의 그림이 장려가 된것이 아닐까 추측을 해 보게 된다. 사회성이 있는 그림이긴 한데 어쩐지 '관제' 냄새가 나는.

 

뉴딜 정책의 미술 기금으로 제작된 그림들도, 분명 '사회성'이 보이기는 하되,어쩐지 '고발'이나 '비평'보다는 '어둡지만 희망을' 식의 '관제 희망'이 스며든 그런 작품들처럼 얼핏 보이기도 한다. '관제 희망.'  

2009년 9월 21일 월요일

[PSAP3] 이발소에서 In the Barber Shop (1934)

In the Barber Shop (1934)

Ilya Bolotowsky

Born: St. Petersburg, Russia 1907 Died: New York, New York 1981

oil on canvas 23 7/8 x 30 1/8 in. (60.6 x 76.5 cm.)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Transfer from the U.S. Department of Labor 1964.1.79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1st Floor, West Wing

(사진 클릭 두번하면 큰 화면으로 보실수 있습니다)

 

전편(http://americanart.textcube.com/67)에 이어서, 역시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진행된 미국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그려진 작품이다.  젬고은 '이발소에서.'  러시아 태생의 이민자였던 화가 일리야 볼로소스키는 뉴욕의 이발소 풍경속에, 이민자들의 나라, 이민자들이 어울려서 만들어가는 국가라는 미국의 정체성을 담고 싶었다고 한다. 작가는 실제로 자신의 주변인물들을 섭외하여 뉴욕시의 어느 이발소를 실제 배경으로 작업을 했다.  이발사는 이탈리아계 이민자, 이발사가 면도를 해주고 있는 손님은 그리스계 이민자, 그리고 오른쪽 작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 각자 각자 상념에 잠긴 두 남자는 아일랜드계 이민자들.  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 자신은 러시아계 이민자.

 

이발소는 아주 작아 보인다. 이발용 의자 두개, 기다리거나 노닥거리는 손님을 위한 작은 테이블과 의자 두개,  그리고 저쪽 구석에는 금전등록기가 보이고, 그 벽위로 보이는 것은 볼록 거울이 아닐까 추측하게 된다. 오른쪽 구석에는 옷과 모자를 걸어놓는 걸개가 보이는데 남성 웃저고리 두장이 각기 걸려있고, 역시 남성 모자 세개가 보인다. 하단 오른편에 비스듬하게 세워진 흰색 물체는 난방기가 아닐까?  그림의 왼쪽 벽면은 유리창으로 보인다. 유리창의 아랫부분은 짧은 부분 커튼이 드리워져 있는데, 이발하는 손님을 살짝 가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가운데 햇살이 밝은 곳에 화분을 놓았다.  오른편 벽면은 거울일까?  나름 생각해보았으나, 거울이라면 맞은편이 투영되어야 하는데 비쳐지는 것이 없는것으로 보아 그냥 '이발소 그림'이라 일컬어질만한 그림이 걸려 있는 것 같다.

 

우리의 시전을 서서히 잡아 끄는 것은 정면 벽.  커다란 거울이 설치된 벽면 속에 작은 거울이 비치고 그 비쳐진 거울 속으로 무수히 반복 반사되는 사물들. 그 끝점이 어디가 될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거울은 끝없이 동일한 이미지를 반사하게 될 테니까, 소실점에 이를때까지. 무한반복되며 멀어지는 거울속의 영상이 이 그림에 입체감을 더 해주면서 일종의 신비감까지 자아낸다.

 

 

 

내가 어릴때, 시골집에 살때, 우리 엄마의 방에는 앉은뱅이 경대가 있었는데, 가운데에 큰 거울이 있고, 양쪽 날개 부분에도 거울이 있었다. 그리고 양쪽 날개 부분에는 경첩이 달려 있어서 문을 열고 닫듯이 각도 조절이 가능했다.  심심할때 엄마 거울 앞에 앉아서 그 양쪽 날개 거울 부분을 조금씩 각도를 달리해 보면 거울속에 내가 아주 많아졌다.  그러니까, 장난감도 없고 별다른 놀거리도 없는 단조로운 나날 속에서, 들판으로 쏘다니거나 개, 닭들과 심심풀이를 하다가 외양간의 소한테 혼이 나가지고 시무룩해져서 엄마의 방으로 오면, 거기 거울속의 한 아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거울속에 마주보이는 아이와 노닥거리고 놀지만, 심심해지면 거울 날개를 움직여 내 옆모습도 보고, 옆모습 뒤에 무한반복 재생되는 나하고 똑같은 애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 무한 반복되는 나의 끝은 어디일까 아무리 아무리 들여다봐도 끝이 안나는거라.  한참동안 그 끝을 찾아 거울속을 들여다보면 때로 무서운 생각도 들었는데, 어쩐지 내가 깊은 우물속에 빠진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렇게 많은 아이들 중에서 나는 어디 있는걸까?  이런 의문도 들고 마는 것이다.

 

아마도 화가는 이발소 거울속에 무한히 반복되는 이미지들을 담아 놓은 식으로 최초로 거울과 만났던,  두장의 거울이 만드는 우물과도 같은 깊은 세계의 기억을 표현 한 것은 아닐까?  화가는 사실주의적 그림속에 사실 너머의 세계를 도입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평면속의 무한반복되는 입체의 세계.

 

위의 내가 대충 그린 거울의 삽화속의 아이는 파란 옷을 입고 있는데, 그것은 내 기억속의 내 모습이 온통 '파랑'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파랑'이었다. 그것은 우리 할머니가 내게 남동생을 보게 해 주려고 나를 사내놈처럼 의도적으로 키웠기 때문이다.  결국 할머니의 소망대로 나는 남동생을 보게 되었는데, 남동생을 본 후에도 나는 여전히 파랑이었고, 나는 늘 사내아이처럼 상고머리로 살았다.  나는 가끔 마을의 이발소에 갔었다.  "언년아, 오늘은 점심먹고나서 호수로 놀러가지 말고, 이발소 집으로 가거라. 내가 말 해 뒀으니까, 네가 가면 머리를  깎아 줄거다." 할머니가 점심참에 내게 이르시면 나는 군소리 않고, 찬물에 말은 밥과 김치를 대충 먹고 마당 지나, 이웃집 큰 나무 아래를 지나 골목을 지나 밭을 건너 그 동네에 하나 밖에 없는 이발소로 갔다.  그러면 이발소집 정씨 아저씨가 나를 번쩍 안아 이발소 의자 위에 올려 놓았는데, 내가 코딱지같이 작은 꼬마아이 이므로 (다섯살) 이발소 의자 양쪽 손잡이 위로 빨래판을 척 걸쳐놓고는 그 위에 나를 앉혔다.  그리고는 내 머리를 사내아이처럼 반듯하게 잘라 주었다. 그때 나는 온통 남자들 밖에 없는 이발소 집에 나혼자 '버려진 아이'처럼 겁에 질려 앉아있다가, 이발사가 머리를 다 자르고 내 목 언저리의 머리카락들을 탁탁 털어준후에 나를 번쩍 안아 바닥에 내려 놓으면 인사도 안하고 꽁지가 빠지게 도망을 쳐서 한달음에 집으로 뛰어오곤 했는데, 왜 내가 꽁지가 빠지게 도망질을 했는가 하면,  내가 가만히 보니까 머리 깎는 아저씨들은 면도도 하고, 면도가 끝나면 뜨거운 물로 머리도 감고 그러는데, 나는 무서운 칼로 면도 당하고, 닭잡아서 털 뽑을때 씀직한 뜨거운 물을 뒤집어 쓰고 머리를 감는 일이 너무나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거야 말로 로댕의 지옥의 문에 나오는 장면보다 더 생생하고 무시무시한 '생지옥'이었던거다.

 

물론 여섯살이 되어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하여 상경 한 후에 나의 이발소 행보도 끝장이 났다. 엄마는 딱 한번 내 사내놈같은 머리를 다듬어 준다며 이발소가 아닌 미장원에 끌고 갔었는데, 그 후로는 엄마가 직접 가위질을 하셨고, 나는 머리가 다 크도록 엄마가 멋대로 대충 잘라주는 헤어스타일을 유지하며 살아가야 할 운명이었던거다. 

 

아, 내 추억속의 정씨 아저씨네 이발소 앞 마당에서는  비가 오는날만 제외하고 언제나 수건이 마르고 있었다. 이발소용 수건은 가정용 타월보다 작고 얇다.  아마도 그래야 빨래하기 쉽고 마르기도 수월할 것이다. 정씨 아저씨네 마당에는 늘 노란 이발소 타월들이 수십장씩 바람에 산들산들 흔들리며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위의 이발소 풍경 그림에서 왼편 창가의 노란색 헝겊이 '이발소 타월'이 아닐까 하여 들여다 봤는데 아마도 저 노란 헝겊은 '커텐'인것 같아서 섭섭했다. 타월이 말라야 하는데, 타월이...

 

이발소는 '남성'들에게 어떤 장소일까?  요즘의 문제가 되는 일부 퇴폐 이발소 제외하고 순수한 본래의 이발소, 그 이발소는 남성들에게 어떤 정서를 불러 일으킬까?  이발소에 대한 정서는 연령별로 차이가 날 지도 모른다.  요즘 청소년들은 '미용실'에서 머리 손질을 하고, 많은 젊은 남성들이 '미용실'을 찾는다.  이 그림속의 이발소들이 아직도 여전히 건재 할까?  나는 남자가 아니라서 가늠이 안된다.

 

 

                                          영화 Gran Torino 의 이발소 장면

 

 

 

그런데, 2008년에 클린트 이스트우드 (Clint Eastwood)가 주연한  헐리우드 영화 Gran Torino(http://www.imdb.com/title/tt1205489/)를 보면, 보수적이고 강단이 있는 노인 (클린트 이스트우드)이 아시아계 이민자 소년과 친구가 되어 그가 일거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돕게 되는데, 그때 노인이 한 일이 소년을 마을의 이발소로 데려가서 '사나이들만의 대화법'을 익히게 하는 것이었다. 남자는 이렇게 말하는거야. 남자가 남자를 만났을땐 이런 태도로 이렇게...   노인과 이발소 주인은 '주류사회'에 진입하지 못하는 아시아계 이민자 소년에게 백인 남성 사회의 문화를 어떤 식으로든 전수 하려고 애를 쓴 것인데,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사실 마음이 짠했다. 사실 그 노인이나 이발소 주인 역시 주류사회의 구성원이 아닌, 사라져가는 세대의 마지막 흔적 같은 존재들 이었던거다.  (이 영화 안보셨으면 심심할 때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다 보셔도...)

 

1934년, 미국의 경제 암흑기, 대공황 시절의 뉴욕의 이발소 풍경.  지금 그 낡은 이발소가 아직 남아있을지 모르지만, 거울속에 무한 반복되는 이미지들처럼 이발소는 또 다른 풍경으로 어디선가에서 새로이 생겨나고 사라지고 또 생겨나고 사라지기를 반복 할 것이다. 거울 속의 나는 내가 사라진 후에도 무한반복되는 이미지로 어딘가로  끝없이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september 21, 2009 your redfox.

 

 

p.s. 음, 오른쪽 구석의 옷걸이 위에 있는 '모자들'을 보니, 모자업자가 '외국에 갈때 궁색하면 안된다고' 돈 천만원을 주길래, 가족같은 사람이 주는 용돈으로 알고 이를 꿀꺽 먹었다고 하던 어떤 학자 생각이 나면서 갑자기 뒷골이 뻣뻣해진다.  나도 누가 잔돈푼, 소액, 돈천만원 용돈으로 안주나?  오백만원씩 두번에 걸쳐서 주면 더 좋고, 딸라로 줘도 고맙고 ... (두리번 두리번).  대한민국 어떤 사람의 죽음 이후에,  한국의 공직자 지망생들은 기억해야 할 사항이 있는데,  이제 '가족같은 친한 사람'이 주는 돈은 한푼이라도 받으면 자살바위로 직행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전범을 우리는 두 눈뜨고 보았다. 울어도 소용없고, 거기 바위가 있는것이다. 자살바위 가기 싫으면,  돈 천만원 받아 꿀꺽 하면서 '소액' '용돈'이라고 방송 카메라 앞에서 종알거리는 처지는 되지 말아야 한다는거다.  루즈벨트의 뉴딜을 백번을 다시 한다고 해도, 국립대 총장이 '모자'업자가 주는 '소액'이라는 '돈 천만원'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넣는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제대로 되는 것이 없는 것이다. 자살하시라는 말씀이 아니옵고,  우리는 그 바위에서 호랭이 한마리가 뛰어 내리는 것을 두눈 뜨고 목도했는데, 이제 역사는 준엄하게 격을 갖추게 되는 것이니, 호랭이를 생각해야 하는거다.  이제 더이상 얼렁뚱땅, 아무개가 주는 돈 쓱싹은 안된다. 그렇게는 안된다.  우리는 호랭이를 잃었고, 앞으로 호랭이의 잣대로 공직자의 위엄을 기대 할 것이다.  그 엄중함을 아시고, 그냥 논문이나 이리저리 엮으시면서, 모자업자가 주는 모자나 하나 쓰고 그냥 유람이나 허시면서 여생을 복되고 행복하게 지내시면 어떠허실지. 총리 자리가 뭐 대단한 자리라고 그 자리에 오르려고 욕을 보시는지.  모자나 쓰시고...모자업자가 주는 용돈으로 그냥 골푸나 치시고...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해가 저문후에 날개짓을 하며 날아오른다. (해 저물었어유. 늦었지만 날아 올라유.)

 

 

 

 

 

 

 

 

 

 

2009년 9월 20일 일요일

[PWAP2] 축제 Festival

1934-1934년 실시된 예술가를 위한 공공기금 정책의 후원으로 탄생한 작품. 축제 (Festival)

 

 

(사진 클릭하시면 커집니다)

 

제목 : 축제 (Festival) 1934년 제작

작가: Daniel Celentano

        Born: New York, New York 1902 Died: 1980

oil on canvas mounted on fiberboard 48 1/8 x 60 1/8 in. (122.3 x 152.8 cm.)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Transfer from the U.S. Department of Labor 1964.1.55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1st
Floor, West Wing

 

전편의 '연립주택' 그림보다 조금 더 큼직한 크기의 그림.  작가이름이 다니엘 센렌타노 인 것으로 보아, 카톨릭 종교를 가진 이탈리아계 이민자 이거나 그 후손임을 짐작하게 한다.  그림 왼편 건물의 간판 부분에 AGHETTI 라고 적힌 것으로 보아 SPAGHETTI (스파게티) 가게임을 알 수 있고,  축제행렬에서 아기를 안고 있는 성녀의 모습은 성모 마리아 처럼 보인다.  그 앞의 행인 둘이 성호를 긋고 있는 것도 보이고 이들은 교회당 앞을 통과하고 있는 중이다. 행렬뒤에 따라오는 두개의 깃발이 보이는데 하나는 미국의 성조기, 다른 하나는 이탈리아의 삼색기이다.  따라서,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아 이곳이 미국의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의 구역이고 지금은 종교적인 축제를 즐기고 있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축제일에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고단한 일상에서 잠시 틈을 내어 춤을 추고 놀기도 하고, 모처럼 길거리에서 주전부리 거리를 사 먹기도 한다. 높은 연단에서 악단이 축제 음악을 연주하고 행인들 중에 몇사람은 신나게 춤을 춘다. 골목길 구석진 곳에서는 골목 시장이 형성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장을 보기도 하는데, 그 골목 뒷쪽으로 가면 공장의 굴뚝이 보인다.

 

그림 중앙의 리어카의 행상은 이탈리아식 소세지와 치즈 덩이를 올려놓고 무게를 달아 팔고 있는 듯 하다.  자그마한 이탈리아 빵 접시를 들고 서 있는 빵가게 점원도 보인다. 역시 왼편 건물 구석쪽에 빨래가 널려 있고.

 

이 그림 앞에 섰을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영화 대부 (The Godfather)의 1편, 2편 장면들 이었다.

 

 

시칠시아 섬에서 나고 자란 소년 '비토 꼴리오네'는 죽고 죽이는 오랜 복수극 때문에 온 가족이 몰살을 당하고 간신히 혼자 몸으로 미국으로 건너가는 배에 몸을 싣는다.  소년 비토 꼴리오네가 내다보는 창에 자유의 여신상이 비치고 있다. 이 장면은 대부의 2편에, 아버지의 어린시절과 청년시절을 그리는 대목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현재 뉴욕 맨해튼 남쪽 (Lower Manhattan)의 리틀 이탤리 (Little Italy),  오래전부터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이 모여 살던 구역에서 청년으로 성장하여 가게 점원으로 성실하게 일하며 살게 되는데, 그 일자리마저 동네 깡패녀석의 조카에게 빼앗기고 만다. 가게 주인은 비토를 무척 아꼈지만, 동네 깡패의 요구를 들어 줄 수 밖에 없어 비토를 해고하면서도 무척 안타까워 한다. 주인이 따라 나오면서 그에게 먹을 것을 싸 주는 장면은 다시 생각해도 눈물이 나게 만든다.  비토는 졸지에 아내와 아이들을 거느린 실업자로 전락하고 마는데,  이때 우연히 '도둑 친구'를 알게 되어 그를 도와주다가 그만 결국 '대부님'의 길로 접어 들게 되는 것이다.

 

젊은날의 대부 비토 꼴리오네가 '어떻게 먹고 살것인가, 가족들을 어떻게 먹여 살릴것인가?' 골똘히 생각하며 걷던 맨해튼의 이탈리아 거리. 그리고 그가 내린 결론.

 

 

비토 꼴리오네는 이 이탈리아 거리의 축제일에, 온통 거리가 축제로 들끓고 시끌시끌 할때,  밴드가 연주하고 사람들이 몰려다니고 춤추며 시끄러운 바로 그 시간에 이 거리의 지붕을 타고 이리저리 넘나들며 이 동네 깡패조직원들을 처치해 나간다. 사람들은 축제를 즐기느라 그 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알지 못하고,  비토 꼴리오네의 계획은 완수된다.  그는 이 골목 상인들과 주민들을 괴롭히던 깡패녀석들을 처단하여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결국, 그는 그가 죽인 깡패녀석의 그 깡패질을 물려 받은 것이고,  이곳은 그의 '나와바리 (?)'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대부 2편에서 축제가 무르익을 무렵 로버트 드니로 (Robert DeNiro)가 연기한 젊은날의 비토 꼴리오네가 깡패조직원들을 하나하나 쓰러뜨릴때 이를 지켜보던 그 긴장감, 감동은 매우 특별한 경험이다.  그래서 나는 대부 1,2,3편의 디비디를 샀는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 2편, 젊은날의 아버지의 풍경이다.  말론 브란도가 압권이긴 하지만, 나는 젊은날의 대부, 로버트 드니로가 연기한 대부를 제일 좋아한다.

 

뉴욕 맨해턴에 가면 지금도 '리틀 이탤리' 그리고 이어져 있는 '차이나 타운'은 여전히 관광 명소이다.  나는 두차례 이 거리를 산책하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는데, 여전히 뉴욕에 갈때마다 리틀 이탤리 거리를 걷고 싶어진다. 지금 가봐야 늘어선 식당, 그리고 허술한 건물들 뿐이지만, 그래도 영화속을 걷는듯한 느낌이 들고, 이탈리안 액센트의 식당 종업원들이 인사를 날려줄때 기분도 유쾌해지고 그렇다.

 

다니엘 셀렌따노의 이탈리아 거리 축제의 그림은, 역시 비슷한 시기를 살았을 젊은날의 비토 꼴리오네의 장면이기도 하다. 이 그림을 보면 그래서 영화속의 축제 음악이 머릿속에 흐른다.  우리는 각자의 추억으로 그림을 혹은 대상을 만난다. 

 

september 20, 2009 your redfox.

[PWAP 1] 서민용 연립주택 Tenement Flats

1929년 미국의 주식시장의 붕괴와 그 여파로 '대공황'이 불어닥쳐 1930년대 미국 전역이 시련을 겪을때 예술가들 역시 고난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1933년 3월에 취임한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러한 경기침체를 벗어나기 위하여 뉴딜 (New Deal)정책을 펼치면서 공공사업을 확충하고 농산물 수급을 조절하는 둥 고용증대및 여러가지 경기부양책을 실시하게 되는데, 이런 공공사업의 일환으로 '예술가'들을 위한 기금을 조성하여 공공 예술 사업을 펼쳤다. 1933년 12월부터 1934년 6월 사이에 미 전역에서 3,749명의 예술가들이 15,663 편의 다양한 장르의 예술작품들을 창조해 냈다. 회화, 벽화, 조각, 인쇄, 드로잉, 공예품에 이르기까지 총망라된 작품들의 공동의 주제는 '미국의 풍경 (American Scene)'이었는데, 경제 공황시기를 살아가는 미국의 풍경이라면 어떠한 소재라도 상관 없었다.  소재에 제한을 둔 것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자연풍경, 노동의 현장, 서민들의 삶의 모습, 당시의 유흥, 오락 장면등 다양한 소재의 작품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 작품들 중에서 루즈벨트 대통령 자신이 32편을 골라 백악관에서 소장했고, 다수의 작품들이 당시의 상원, 하원 의원이나 부유한 정부 관리, 기업인들에게 팔려 나갔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집무실에 걸린 이 프로젝트의 작품은 다음회에 소개하기로 하고, 오늘은 이 '연립주택' 그림을 소개하고 싶다. 이 그림 역시 백악관으로 간 작품이다.

 

 

제목: Tenement Flats (1933-1934 제작)

 

작가: Millard Sheets

Born: Pomona, California 1907 Died: Gualala, California 1989

유화: oil on canvas 40 1/4 x 50 1/4 in. (102.1 x 127.6 cm.)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Transfer from the U.S. Department of the Interior, National Park Service 1965.18.48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현재 위치:1st Floor, West Wing

 

가로 127.5 센티, 세로 102.1 센티의 큼직한 크기의 그림 가득히 1930년 초반의 미국 캘리포니아의 어떤 서민용 연립주택의 풍경이, 사람들이 담겨있다.  앞쪽에 보이는 연두색 건물은 이층짜리 연립이고, 뒤편 윗쪽의 연립은 3층이나 4층짜리로 보인다. 언덕위에는 빅토리아 고딕 양식의 저택도 보인다.

 

이 그림의 부분 부분을 상세히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 전체그림을 한꺼번에 볼때와 달리 작은 부문들에 집중하여 볼때 이 그림이 새롭게 다가오는데 전체적으로 볼때 내가 발견하지 못했던, 장면들의 개성이나 아름다움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빈양동이를 허리에 끼고 아이의 손을 잡고 가는 여인은 옆에서 조롱조롱 떠드는 아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 같다. 중앙의 어린 소녀는 아기를 안고 어르고 있는데, 검은 고양이, 흰고양이가 각자 한가롭게 자신의 일에 몰두해 있다.  플랑멩고의 분홍을 연상시키는 계단참의 분홍색이 전체 분위기를 경쾌하게 하는데 일조한다. 여인들의 흰옷이나 고양이의 털 빛도 역시 환하게 빛난다.

 

 

 

 

흰 고양이가 계단 아래 '반지하층'의 무언가를 주시하고 있고, 역시 희게 빛나는 옷을 입은 두 여인이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계단 그늘에서는 걸음마쟁이를 데리고 한 여인이 앉아있다.  누나인지 엄마인지 가늠이 안간다. 네 사람들의 시선이 왼쪽으로 향하고 있을때, 왼편의 흰 고양이는 뒷쪽을, 오른편 의자에 앉아있는 여성의 시선은 오른쪽으로 시선을 보내고 있어서 전체적으로 시선의 균형감을 이루고 있다.  마치 계단이 오른쪽으로 경사지고 다시 왼쪽으로 이어지듯 시선도 한쪽으로 경사지는 듯 하지만 반대쪽으로 향하는 시선이 있어 변화와 균형감이 보인다.

 

 

 

의자에 앉아있는 여자는 혼자 있었던 것이 아니다. 작업대에서 일을 하는 딸아이를 감독하고 있거나 일을 잘 하도록 잔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잔등의 X자 표시를 보아하니 앞치마를 입고 빨래를 하고 있는 듯. 그녀의 뒤에 빨랫줄이 걸려있고 희게 빛나는 빨래가 걸려있다.  옥외용 간이 침대인 것일까?  검은 고양이가 역시 소녀를 향해 앉아있고, 문이 열려있다.

 

 

2층의 오른쪽 집엔 엉성하고 남루해 보이는 빨래가 몇장 널려있다. '가난이야 한낱 남루 (서정주)'가 아닌가? 해진 옷을 입고, 깨진 유리창을 갈아 끼우지도 못하고 사는 형편이지만, 다섯개의 꽃화분이 이 집 사람들의 낙관적 심성을 보여주는 듯 하다.

 

 

 

왼쪽 집 유리창 밖으로 한 여인이 머리를 내밀고 이웃친구 두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빨래를 난간 손잡이에 걸쳐놓기도 했다.

 

 

 

이 초록색 연립과 통로를 함께 쓰는 윗편 연립이 눈에 들어온다.  역시 그곳에서도 여인들이 빨래를 널거나 혹은 오전의 일과를 마치고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왼쪽 구석 계단 아래 뒷쪽으로 뒷모습만 보이는 두명의 행인이 걸어가고 있다. 뒷모습이지만 두 여인네가 아닐까 상상을 하게 된다.

 

 

 

이들의 머리 위로 더 높은곳에 빨랫줄이 연결되어 있고 빨래가 깃발처럼 휘날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림 속에는 단지 두채의 연립이 보이지만, 이 연립들 주변에서 비슷비슷하면서도 각기 다른 연립주택들이 오밀조밀 붙어 있는 듯 하다. 이건물에서 저건물로 빨랫줄을 연결하여 빨래를 널은 것 같다.

 

 

 

그리고 저 언덕위, 연립이 서있지 않은, 빅토리아식 고딕 주택 건물이 서있는 언덕위로 한 사람이 허리를 굽힌채 올라가고 있다.  언덕위에 고급 주택이 서 있는 것으로 보아 한때 이곳은 부유층의 저택들이 서 있던 곳이었으리라, 그러다가 서서히 서민용 연립주택지로 변화해 갔으리라 추측된다.

 

그림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니 이 그림에는 '소리없는 아우성(유치환)'과 같은, 혹은 깔깔대고 웃는 듯한 빨래가 휘날리고, 그 빨래를 해서 널었을 여인들의 웃음소리와 두런거림이 있고, 고양이의 양양 거리는 소리와, 아이 어르는 소리와, 햇살이 빨래에 부딪치는 소리가 가득하다.  가난뱅이 구역이지만, 경제공황으로 형편도 좋지 않지만, 이 풍경은 우리의 시선을 붙잡으며 '햇살도 가득하니 잠시 쉬었다 가라' '그늘에 앉아서 바람이나 좀 쐬어가라' 하고 말을 거는 듯 하다.

 

유신시대의 아이였던 나 역시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엄마 손에 이끌려 상경했을때, 우리 식구들은 단칸방에서 살고 있었다. 나까지 포함하여 여섯명이 조그만 방 한칸에서 살았다. 우리가 살던 대지 30평의 무허가 건물에는 네개의 방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중에서도 가장 구석의 작은 방에서 살았다.  안방차지를 하던 사람은 트럭운전사네 집이었는데 그 집은 식구가 일곱이었다. 안방 건너 건너방에 살던 사람들은 새댁네였는데 세식구였다. 대문간 가까이 살았던 집은 네식구였는데, 그 작은 방에서 '무허가 미장원'까지 했었다. 그런 무허가 셋방살이 집에서 나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4학년까지 살았다. 그후로 우리는 장미꽃이 피고 잔디가 깔린 새장같이 예쁜 집으로 이사를 갔다.  내가 또다시 셋방살이를 하게 된 것은 결혼과 함께였다. 위의 그림과 아주 흡사한 연립주택에서 살면서 나는 때로 행복했고, 때로 불행했다. 때로는 빨래 한장 내다 걸수 없는 비좁음에 숨이 컥컥 막히기도 했고. 어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으며 가끔 노래를 부르거나 가끔 울기도 했다.

 

이따금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 가서 이 그림앞에 설 때마다, 나는 가난하고 우울했지만, 그래도 늘 햇살이 비치던 빈민가의 내 유년시절과, 역시 숨막히고 우울했지만, 거기서 태어나고 자라나던 내 아이들 생각을 하면서 웃게 된다. 미국 사람이 그린 미국 풍경을 보면서 한국에서 나고 자란 한국인인 내가 고향에 돌아온듯 공감할수 있는것, 이것은 예술이, 예술혼이 갖고 있는 보편성에 기인한 것이리라.

 

그림을 정리하고 글을 쓰면서 약 두시간이 소모되고 말았는데, 글을 쓰는 내내 나는 웃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내가 좋아하는 그림에 대해서 상세하게, 세세하게 종알종알 이야기를 들려주는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아, 나는 아마도 그래서 미국미술 프로젝트를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에게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서...아마도 그럴것이다...)

 

september 20, 2009 your redfo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