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스미소니안 박물관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스미소니안 박물관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09년 9월 23일 수요일

[PSAP5] The Farmer's Kitchen 농부의 부엌 (1934)

The Farmer's Kitchen 농부의 부엌

ca. 1934 Ivan Albright  이반 올브라이트

Born: North Harvey, Illinois 1897 Died: Woodstock, Vermont 1983

oil on canvas 36 x 30 1/8 in. (91.5 x 76.5 cm.)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Transfer from the U.S. Department of Labor 1964.1.74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1st Floor, West Wing

 

 

이반 올브라이트는 일관되게 이런 '분위기'의 그림을 고수한 화가이다. 특히 현재 시카코 아트 인스티튜트 미술관에 있는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이 유명한데 그의 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매우 개성있고 기묘하다.  우리가 어릴때, 문방구에서 값싼 돋보기를 하나 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돋보기를 처음 만난 우리들은 그것을 아무데나 다 갖다 대 본다. 가장 만만한 것이 우리의 손이다. 돋보기를 들고 우리 손을 들여다보면 피부의 '때'도 아주 커다랗게 확대되어 보이고, 피부의 구릉이나 그 사이의 솜털도 상세히 드러나는데,  들여다보면 신기한 맛은 있지만, 썩 기분이 유쾌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돋보기나 현미경을 가지고 우리 피부를 들여다 볼때 우리 눈에 띄는 것은 너무나 생경해서 차라리 피하고 싶은 그런 광경들이다.  아직까지 그런 경험이 없으신가?  지금이라도 아무거나 돋보기를 잡아가지고 손톱끝이나 손가락 피부를 들여다보시라. 지문 결마다 박힌 때라던가, 손톱사이의 때, 혹은 아주 작은 상채기들이 어떻게 고랑을 이루는지 한편 흥미로우면서도 곧 기분이 역해질지도 모른다. 그것이 내가 사랑해 마지 않는 내 연인의 손일지도 모르고... 사랑해 마지 않는 내 연인의 손.

 

이반 올브라이트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런 화풍을 개발해내고 일관되게 유지했는지 그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한다. 나중에 관심이 동하면 도서관에서 그와 관련된 책을 대출해다가 읽어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가 어떠하였건, 관객으로서, 혹은 그림을 읽어나가는 독자로서 이 그림은 내게도 충분히 '재미있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일단, 특이한 묘사가 눈에 띄고, 그리고 얼핏보면 흉측하고 역겹다는 느낌이 강하지만,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면, 어쩐지 이 인물에 감정이입이 되고 만다.  그리고 '인생 다 그렇지'하며 수긍하게 되고 만다.  무슨 말씀인가하면, 우리가 돋보기를 가지고 손톱사이의 때를 들여다볼때 바로 그 느낌, 인생이 뭐 숭고하지도 않고, 통속적이지만, 뭐 설령 이렇게  돌이킬수 없이 늙어가고 시들어가고 망가져가고 고립되어 간다해도,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이 망가진 삶을 붙들고 꾸역꾸역 견뎌나가고 있다는 것이지.  이 주인공만 이런 상황에 던져진 것도 아니고,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가령 나를 버리고 간 내 님도 그렇고, 모두 마찬가지로 이렇게 사그러져 갈 거라는 엄연한 '사실' 앞에서 나는 한편 안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좋아, 좋아, 모두가 이렇게되고 마는거야.  모두가 이렇게 고립된채로 하루하루 연명하는거야. 모두가 그런거야. 좋다구.  나만 당하는게 아니라 모두가 이꼴이 되는거라구.  그러면서, 안도하게 되는 것이다.

 

상세히 들여다보자, 현미경으로 손톱의 때를 관찰하듯 그림에 돋보기를 갖다 대 보자

 

 

우선, 농가 아낙의 얼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유산처럼 물려받은 얼굴이다. 깊게 흐르는 주림들, 쪼글쪼글한 입가와 눈가.  아, 피하고 싶겠지만, 이것이 세월이, 삶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선물.

 

 

 

그가 입은 앵두무늬 회색 드레스와, 꽃무의 앞치마 섶으로 드리워지는 가슴부분의 늘어짐.  우리는 이 여신의 유방이 힘없이 늘어졌을것이며, 유방 아래 뱃살도 주름지고 늘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옷의 흐름으로 그 주름을 아주 자연스럽게, 사실적으로, 너무나 생생하게, 그러나 은유적으로  잡아 놓았다.

 

 

 

 

 

 

 

 

우리가 주의깊게 들여다 보지 않는다면, 화면 구석에 고양이 한마리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지도 못하고 지나갈지도 모른다.  그렇다 방구석에는 줄무늬 고양이도 한마리 앉아있다. 고양이는 주인을 쳐다보는 것도 아니고 졸고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딘지 모를 곳에 시선을 보내고 있다. 고양이의 눈동공이 1자 인것으로 보아 실내는 밝은 상태인듯 하다. 실내가 어둡다면 고양이의 동공이 열려 었을 것이다.  고양이가 거기 있기는 하나, 그 고양이와 아낙과는 별 상관이 없어보인다. 그럼에도 고양이는 거기 있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고양이가 그 구석에 있고, 이 둘 사이에 아무런 유기적 관계도 보이지 않지만, 한편 여기에 고양이가 없다면 섭섭할 것 같기도 하다.   아낙은 고립되어 보이나 혼자가 아니다. 누군가와 함께 있다.  그런데 이들은 서로 아무 상관없이 자신의 일에 열중해 있다. 그래서 이 둘은 서로 고립되어 있음이 두드러지기도 한다.

 

 

 

 

 

 

 

 

 

나의 눈길을 가장 오래 붙잡아 두는 것은 아낙의 저 주름지고 퉁퉁 부은 손가락이다. 내 눈에 아낙의 손가락이 부어있다. 손가락 관절염을 앓고 있는걸까? 이 사람은 주름지고 아픈 손에 손칼을 하나 들고 지금 마악 야채를 한웅큼 다듬으려고 하고 있다.  그릇속에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보아 아낙은 지금 막 작업을 시작하려는 찰나 같기도 하다.

 

이 아낙의 오른 손이 내 시선을 잡아 끄는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평생 농가의 '아낙'으로 살다 가신 내 할머니는 아주 특별한 오른손을 갖고 계셨다.  그이는 '죽으면 썩을 몸뚱아리를 아껴서 뭐 할건가'를 소신으로 평생 부지런하게 일을 하여 가족을 지킨 분이다. 그런데 우리 할머니의 오른손 손가락 두개가 아주 특별했다. 할머니의 세번째 중지와, 네번째 손가락은 손바닥쪽으로 구부러지지 않고, 그대신 오히려 윗쪽으로 뻐정거리고 서있기만 했다. 할머니가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면 세번째, 네번째 손가락은 주먹을 쥐지 못하고 그냥 위로 뻐정거리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런 증상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었고,  할머니가 삽십대 아낙이었을때 밭에서 낫을 가지고 일을 하다가 그만 낫의 날을 잘 못 잡아서 손가락 인대가 끊어졌다고 한다.  인대가 끓어졌으므로 마음대로 오무리거나 펼수가 없는채로 그냥 뻐정거리게 굳어버리고 만 것이다. 단지 낫 날에 잘 못 베어서 두개의 손가락이 간단히 불구가 되고 만것인데, 할머니는 그 손가락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면서 장수 하셨다.

 

나는 하필 이 그림에서 농가의 아낙의 손을 발견한 순간, "아 우리 할머니의 손이다" 이러고 혼자 반가워서 멍멍멍 하고 말았던 것이다.  불구가 된 손가락을 간직한채 할머니는 그 손을 늘 바지런히 움직여 밥을 까서 우리를 먹이고, 반찬을 하여 우리를 먹이고, 그 손으로 내 더러운 얼굴을 씻겨 깨끗하게 만들어주시고, 그 손으로 매섭게 나를 나무라기도 하시고, 그 손으로 식구들을 안전한 울타리에서 보호하시다가, 그 손을 곱게 펴고 수의를 입고 지상을 떠나셨다.  할머니는 죽어서야 그 뻐정거린 손가락을 곱게 펼수 있었다.

 

신비한 미소의 주인공 모나리자나 혹은 바다에서 태어난 비너스의 아름다움 만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아니다.  이 그림속의 농가의 여인은 주름투성이 얼굴로 고립된 채 앉아 전혀 관객과 소통이 안될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지만,  우리는 그의 주름에서, 그의 퉁퉁부은 손가락에서, 그의 고립감에서 위로를 발견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아름다워보이지도 않고 늙고, 추레하고, 주름투성이이고, 웃지도 않는 이 아낙이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이유는 뭘까?   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미'와 '추'의 개념에 대해서 인상쓰고 고민하기도 한다. 인상 쓸것 없다. 주름이나 늘 것이다.  그냥 때로 우리는 아름다움에서 '무심함'을 발견하기도 하고, 때로 '추함'에서 '숭고함'을 발견하기도 하는 것이니.  어떤이는 이런것을 '마술적 사실주의 magical realism'으로 설명을 하러 들기도 한다. 내게는 그냥, 그리운 할머니의 손 쯤으로 기억될 것이다.

 

 

 

 

2009년 9월 20일 일요일

스미소니안 국립 미국미술박물관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공식 홈페이지: http://americanart.si.edu/

내가 작성한 또다른 안내 페이지: http://freefeel.org/wiki/VisitTheSmithsonian

 

 

                                               위의 지도에서 중앙의 맨 윗쪽에 있는 박물관

 

 

워싱턴 디씨에 있는 '스미소니안' 계열 국립박물관들 중의 한가지로 (1) 미국미술 박물관 (2) 국립 초상화 갤러리가 함께 있다. (이곳에 가면 두가지 박물관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이곳 외에도 스미소니안 계열 미술 박물관에 가면 '미국 미술' 작품들을 볼 수 있으므로 '미국미술' 관련 블로그를 업데이트하는 동안 나는 꽤 자주 내셔널 몰 지역의 미술관들을 산책하게 될 것이다. 물론 스미소니안 계열 박물관 뿐 아니라, 이미 소개가 된 필립스 콜렉션이나 코코란 미술관, 국회 도서관, 기타 건물들에 미국 주요미술품들이 전시가 되고 있으므로 볼거리는 풍부하다 할 수 있겠다.

 

 

이 많은 미술관들중에서 '미국미술'과 관련된 '왕중왕'은 아무래도 국립미국미술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을것이다.  이곳에 가면 미국 건국초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시기별로 주요 미술품들이 골고루 소개가 되고 있다.  초상화 갤러리에는 미국의 역대 대통령의 초상화실이 있고, 관련 멀티미디어 자료도 볼 수 있다. 미술 박물관 쪽에서는 상설전시, 특별전시, 특강등을 통해 대중들이 예술을 가까이서 즐길수 있도록 돕고 있다. 현재 워싱턴지역의 스미소니안 계열 국립 박물관은 모두 '무료입장'이다. 버지니아에 있는 항공우주 박물관의 경우 '주차비'를 따로 받지만 그곳 역시 입장료는 무료이다.

 

스미소니안 계열 국립박물관이 전관 무료개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나름대로 세가지를 추측하게 되는데  (1) 그 첫번째는 미국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행정수도의 국립박물관을 무료 개방함으로써, 미국이 문화국가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려는 것이 아닌가? (2) Smithson 이라는 영국의 재벌이 사심없이 한번도 가보지도 않은 나라, 신생국 미국에 그의 유산을 쾌척하여 그 기금을 씨앗으로 세워진 박물관들이므로 '스미손'씨의 조건없는 '기여'의 정신에 부응하여 역시 돈 없는 '걸인'이라도 자유롭게 드나들도록 문을 열어 놓은 것이 아닌가?  (3)  미국의 수도, 그 중앙 국립광장이라 할수 있는 National Mall 에 일년 내내 미국 전역에서 학생들은 수학여행을, 자녀를 거느린 미국인들은 자녀들의 역사교육을 위하여,  미국의 수도를 보기 위하여, 외국인들 역시 미국의 수도를 보기 위하여 방문하게 되는데, 미국인들에게는 '수도에 가면 국립 박물관이 모두 무료다, 우리 미국인들은 이렇게 근사한 나라의 국민이다. 우리는 대접받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줄 수 있고, 외국인 방문자들에게는 '미국은 역시 근사한 나라야'하는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는데, 이는 입장료 수익을 상회하는 큰  이익을 가져 올수도 있겠다는 것이다.  특히 수십개의 주로 이루어진 미국은 전 국민을 하나로 묶어줄만한 정신적인 '아이콘'이 필요한데, 내셔널몰이 일부 그러한 '아이콘' 역할을 하고, 무료 입장 가능한 국립 미술관들 역시 이런 분위기에 일조한다 할 수 있겠다.  이것이 워싱턴디씨를  수년간 드나들며 관찰한 나의 시각이다.

 

 

 

 

 

워싱턴 지역을 통과하는 메트로 (전철) Red Line의 Gallery Place/ China Town 메트로역에서 나오면 바로 박물관 건물이 보인다. (빨간선, 한국의 3호선이 Orange Line 인것처럼 이곳에서 색깔로 노선 구분을 한다. 한국에서 나는 3호선 Orange Line 구역에 살았었는데, 이곳에서도 역시 Orange Line 을 통해 주로 이동한다) 이곳이 갤러리 플레이스, 차이나타운 역인 이유는 이곳에 갤러리들이 있고 또한 박물관 뒷편으로 중국인들의 거리인 차이나타운이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도심이면서도 늘 한적한 느낌이 들어서 이곳을 찾을 때마다 마음이 한가로워진다.

 

 

 

 

 

 

 

 

1930년대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미술 기금이 마련되었을때, 미국 전역의 화가들이 기금의 도움으로 그림 작업을 할 수 있었는데, 당시 작품들을 재 전시 하고 있다.  오늘날 미국 뿐 아니라 한국,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우리들이 겪고 있는 경제 불황이 1930년대의 경제 암흑기를 연상시킨다.

 

 

 

기형적으로 커다란 꽃, 동물의 뼈, 단순한 선과 면의 주로 그린 조지아 오키프의 대형 그림이 보인다.

 

 

 

3층 링컨 갤러리의 중심에 설치된 백남준씨의 Electronic Super Highway 라는 작품을 볼 때마다 엉뚱하게도 내 머릿속에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애국가가 흐른다.  여기 한국산 미술가가 설치 해 놓은 미국 최고의 작품을 보라...고 마음 속으로 외치게 되는 것이다.  이곳에 숨겨진 다른 백남준씨의 작품들은 후에 별도의 페이지를 열고 정리하겠다.

 

 

 

미국미술박물관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3층 링컨 갤러리. 사진 왼편 벽, 형광불빛이 나오는 벽면에 백남준씨의 작품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에는 동시대의 조각품, 회화, 설치미술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때로 나는 이곳에 설치된 작품들에 대해서 '설명'을 못하고 입을 다물어버리는데, '말'로는 전달이 안되기 때문에, 나의 설명력에 한계를 느끼기 때문에...몸으로 체험하기 전에는 도무지 짐작이 안되는 작품들이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워싱턴 디씨를 방문하는 친구가 '어디 봐야해?'하고 물을때 나는 서슴치 않고 '미국미술 박물관'에 가보라고 권하게 되는데, 미국미술이 대단해서라기보다는, 이곳에 와서 꼭 봐야할 보물들이 있기 때문에... 가슴이 컥 막히고 눈물이 쏟아지는 '한국'이 여기 어딘가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국립 미술관의 '심장부'에는 '한국'이 들어있다.  한 예술가가 그것을 이뤘다.  그, 그것을 꼭 꼭 봐야만 한다...

 

 

초상화 갤러리의 대통령 초상화들 속에 있는 Ben Shahn ( http://en.wikipedia.org/wiki/Ben_Shahn )의 작품. 뉴딜 정책의 주인공, 미국의 대공황을 딛고 일어선 대통령, 간단하게 FDR 로 통하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초상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대통령에 4선했던 사람이다. 네번이나 당선이 되었다는 뜻이다. 세번째 임기까지 무사히 채우고 네번째 임기중 사망했다. 당시 '사회성'강한 그림을 그리던 벤 샨이 루즈벨트 대통령의 경제정책에 호감을 보이고 사회성 짙은 작품 활동으로 대통령을 도운것으로 알려져 있다.  (벤 샨 역시 내가 좋아하는 화가이므로 장차 그에 대한 페이지들이 만들어질 것이다.)

 

 

 

이 뮤지엄은 '미음자' 구조로 건물들이 이어져 있다. 그러니까 통로를 따라 이동하게 되면 동서남북 미음자로 한바퀴 돌게 된다. 그리고 그 미음자 구조의 중앙은 코트야드 (Court yard, 중앙홀)이다. 지붕을 수백장의 유리판으로 얹어서 이곳 테이블에 앉아 하늘의 구름도 보고, 저녁에는 달님 별님도 볼 수 있다.  비오는날 이곳에서 비 떨어지는 것을 보면 좋겠다는 상상을 해보는데 아직 비 쏟아지는 날 이곳에 가 본 적은 없다.

 

 

 

꼭 필요해서 뮤지엄샵에서 산 것들. 미국미술사 정리된 것 (할인해서 8달러에 살수 있었다. 아마도 싼맛에 좋아서 샀을 것이다. 갖고 있는 미국미술사 관련 책만 다섯권이다. 하하하.).  그리고 '미술 용어 카드.'  미술 관련 블로그를 열어 놓고 글을 쓰다보니, 내가 미술 용어중 구체적으로 정확히 내용을 알고, 다른 사람에게 쉬운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개념들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다.  나는 '내가 남에게 쉬운말로 전달할수 없다면, 나는 정확히 안다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편이다. 뭐든지 아주 쉬운 말로, 가령 공부를 많이 하지 않으신 '내 엄마'가 내 말을 알아듣고 수긍할 수 있을 정로로 내가 설명할 수 있어야 내가 정말로 아는 것이라고 믿는 편이다. 그러므로 뭐든 설명하기 위해서는 깊게, 상세히 이해해야 하고 이를 가장 쉬운 말로 간단하게 정리 할 수 있어야 한다. 

 

 

학교에서 수업할때, 학생들이 발표 자료를 준비해 가지고 와서 발표를 할 때,  가르치는 입장에서 내가 가장 '재미없어'하는 것은, 파워 포인트 자료에 잔뜩 교재 요약해 가지고 와서 그것을 '낭독하듯' 발표 하는 것이다.  나는 가끔 발표를 하는 학생들에게 아주 기초적인 개념이나 어휘를 가지고 질문을 던진다. 가령 Meta-linguistic, Meta-physical, Meta-cognitive 라는 말이 막 뒤섞여 나오는데, 그 메타가 뭐냐? 묻는다.  그러면 학생들은 우물거리다가 beyond...above ...이정도의 대답을 한다. 그러면 나는 다시 묻는다.    "Beyond..above..what? (그게 무슨 말인데?). 그러면, 이미 다른 과정에서 박사학위까지 마치고 온 학생조차 우물거리며 이렇게 말한다, "I know it, but I cannot explain it..because it's a very abstract concept (알긴 하지만 설명을 하기는 힘들다, 왜나햐면 매우 추상적인 개념이라서)."  그러면 나는 대꾸해준다, "If you are not able to explain that concept in plain language, you do not know about it. Don't tell me that you do know it... (만약에 그 개념을 평이한 언어로 설명 할 수 없다면, 당신은 그것에 대하여 안다고 할 수 없다.  안다는 말은 하지 말라.)  잘 모르는 것에 대하여 안다고 말하면 안된다. 잘 모르는 것에 대하여 그냥 베껴다가 읽으면서 자신이 그것에 대하여 알고 있다고 착각해서도 안된다.  내가 그것을 잘 이해하고 있는가, 아닌가, 직시할 필요가 있다. 모르면, 책을 뒤지고 인터넷에 널린 친절한 자료를 뒤져서라도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Meta-linguistics knowledge' 란 '언어에 대한 지식'을 가리킨다.  메타 피직스란 물리 세계에 대한 지식, 그러므로 철학을 메타 피지컬 학문이라고 하는데, 물리 세계 너머에서 물리세계에 대한 사색을 하는것, 그것이 철학의 시작인 것이다. Meta-cognitive awareness 는 앎에 대한 지식. 내가 무엇을 아는가 모르는가에 대한 자기성찰 그것을 말한다.  '나는 아는가 모르는가?' 자기 성찰은 '메타'적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어떤 말을 하고나서 문법적으로 그것이 잘 못 되었음을 파악하는 능력, 그것이 메타-언어 능력이다.   내가 평이한 말로 설명 할 수 없다면, 나는 아직도 정확하게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배움과 소통에 대한 나의 신념인데, 그 신념대로 나를 채찍질 하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  (그런데 내가 왜 내 전공도 아닌 미국미술을 가지고 씨름을 시작했단 말인가?  가끔 회의가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진도 나간다. 왜냐하면... 미국미술이 좋아서 :-]  )

 

그러니 공부를 해야...

 

(엄마가 읽고 수긍 할 수 있는 블로그... 그렇게 만들고 싶은데, 그것도 쉽지 않다.)

 

 

    전철역 입구의 각종 무료 주간 안내지 상자들. 그 알록달록한 통들이 서있는 것이 발랄해 보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다시 메트로 역

 

                                                                  워싱턴 디씨 메트로

 

                                                        

 

메트로 스테이션 역에서 Orange Line 으로 갈아타야 한다.  벽화가 보이길래 사진기에 담아 보았다.  이런 사소한 것들이 거리의 풍경을 이루는 것이고, 이런 것들이 쌓여서 문화가 되고, 미술사의 일부가 되는 것이므로.

 

2009년 9월 19일 금요일 오후 방문. redfo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