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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7일 수요일

제비꽃

앤드루 와이어드를 대충 마무리 지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진 파일들을 정리하다 보니 내가 아직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크리스티나 올슨을 그린 ‘크리스티나의 세상’ 그림에 대한 이야기로 앤드루 와이어드의 페이지를 처음 열었을 때부터 내 머릿속에는 ‘제비꽃’이 떠올랐던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나의 ‘제비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지.

 

지난 9월에 뉴욕 현대미술관에 갔을 때, 벤 샨의 그림 옆에 나란히, 당당하게 걸려있던 ‘크리스티나의 세상’ 그림을 다시 카메라에 잡았다.

 

(사진 클릭하면 커집니다.)

 

 

이것은 앤드루 와이어드를 세상에 널리 알라게 된 1949년 작품이다. 와이어드에게 크리스티아 올슨이라는 사람과 그의 집을 소개한 이는 나중에 결혼하게 되는 베씨 (Betsy)였다. 크리스티나는 소아마비로 인해서 다리의 힘을 잃어갔지만, 오빠와 함께 사는 집안 일을 돌보는데 게으르지 않았다. 그는 불구의 다리를 이끌고 온 집안을 윤택하게 가꾸며 살았다. 크리스티나는 남이 도와주는 것도 원하지 않았고, 휠체어에 의지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사진의 크기를 줄이기 전에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게 되었는데, 크리스티나의 드러난 오른팔이 중간의 관절이 튀어나와 보일 정도로 앙상하고, 거뭇하고 푸르스름한 멍 자국도 보인다. 두 다리를 쓸 수 없는 상황에서 팔로 몸을 이동해야 하므로 관절이나 주변의 피부에 굳은살이 생겨 단단해졌을 것이다. 그것이 멍 자국처럼 채색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손도 앙상한 팔에 비해서 큼직하고 손가락들이 굵직하게 발달해 있다. 손으로 전 우주를 지탱하고 온갖 일을 다 해야 하는 상황이 손을 기형적으로 크게 발달 시켰을지도 모른다. (사진 오른쪽 구석의 둥근 무늬는, 필터가 깨져서 반사된 것이다.)

 

관객이 이 그림 속의 상황을 어떤 식으로 재구성하게 될지는 각자의 상상에 맡길 일이지만, 앤드루 와이어드 자신은 그림 속의 크리스티나가 들판에서 열매를 따는 중이었다는 설명을 한다. 내가 중학생 시절 발견한 소설책 표지의 크리스티나는 들판에 버려진 여인처럼 다가왔지만, 앤드루가 설명하는 크리스티나는 고난 속에서도 삶을 경건하게 살아가는 강한 여인 인 듯 하다.

 

 

Andrew Wyeth (artist)
American, 1917-2009
Wind from the Sea, 1947
tempera on hardboard
overall: 47 x 70 cm (18 1/2 x 27 9/16 in.) framed: 66.4 x 89.5 x 7 cm (26 1/8 x 35 1/4 x 2 3/4 in.)
Gift of Charles H. Morgan
2009.13.1

 

  

 

   이 그림은 와이어드가 크리스티나의 방 창문을 그린 그림이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 워싱턴의 국립 미술관 소장품이다. 1947년 크리스티나의 ‘창문’이 그려졌고, 그 후에 ‘크리스티나’가 그려진 모양이다.  만약에 내 곁에 함께 그림을 보는, 내가 편하게 말해도 되는 사람이 있어서, 내가 소근소근 속삭일 수 있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있잖아, 이 그림 앞에 서면, 바람이 분다. 따뜻하고 고요한 바닷바람이 산들산들 들어와서 레이스 커튼을 살짝 흔들지.  그러면 레이스에 새겨진 새가 날아오르고, 꽃잎들도 이리저리 떠돈다.  이 그림 앞에 서면 흐린 날 바다에서 불어오는 소금냄새 섞인 따뜻한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흔들고, 그리고 갈매기 울음 소리가 들려. 너도 갈매기 소리가 들리니?”  대개 혼자 그림을 보러 돌아다닐 때, 나는 혼자 누군가에게 종알거린다. 내 종알거리는 소리가 어디로 가는지 나도 모르겠다. “있잖아, 언젠가 너도 와서 봐봐.”

 

 

제비꽃

 

내게는 ‘제비꽃’으로 기억되는 한 사람이 있다.  나는 그이를 딱 한번 본 것으로 기억한다. 어쩌면 내가 성장하면서 몇 차례인가 스쳤을 것인데, 내가 원래 수줍음이 많고, 반사회적이었던 나 자신이 사람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성장한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내가 그를 보고, 그가 나에게 미소를 던졌대도 내가 기억을 못 할 가능성이 크다. 나는 그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사람들이 그이에 대하여 평한 것을 대체적으로 정리해보면, 그는 보름달처럼 인물이 환하고 고우며, 두 뺨은 복숭아처럼 발그레하고, 손재주는 얼마나 좋은지 뜨개질로 다섯이나 되는 오라비들의 겨울 스웨터를 짜 입히고, 자투리 헝겊을 모아 아름다운 조각보나 조각이불을 만들어내며, 반찬 솜씨가 어찌나 좋은지 그 모친이 부엌일을 그에게 모두 전담시켰으며, 온종일 집안일을 하면서도 싫은 내색조차 하지 않고, 언제나 물에 씻은 보름달처럼 환하게 웃는 집안의 보배인데, 딱 한가지, 열두 가지 재주와 미모를 타고난 이 사람에게 딱 한가지 모자라는 것이 있으니, 그만 날 때부터 앉은뱅이라 두 다리를 못쓴다는 것이었다. 분명 나도 어릴 때 이 댁 생일잔치에 가서 맛있는 밥도 먹은 적이 있으니 이 날 때부터 앉은뱅이인 사람을 몇 차례 스쳤으련만, 나는 아무것도 그이에 대해서 기억하는 것이 없었다.  게다가 내가 대학생이 될 때까지 ‘앉은뱅이’를 한번도 목도한 적이 없기 때문에 ‘앉은뱅이’가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소아마비나 혹은 사고로 다리를 다쳐서 목발을 짚거나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많이 보아왔지만, 앉은뱅이라니. 앉은뱅이가 무엇일까?

 

내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앉은뱅이란, 제비꽃 노래 속에만 존재했다.

 

보랏빛 고운빛 우리집 문패꽃

피고지고 또 피어 앉은뱅이 랍니다.

 

이른 봄날, 추운 봄바람을 무릅쓰고 피어나는 아주 작은 제비꽃을 사람들은 앉은뱅이꽂이라고도 불렀나 보다. 내가 자란 시골에서는 ‘제비꽃’으로 통했지만, 내 고모들이 서너 살짜리 조카 애를 데리고 앉아 무용까지 곁들여서 가르쳐준 노래 가사는 이 제비꽃이 ‘앉은뱅이 꽃’이라고 일러준다.  내가 서너 살 때 초등학교 고학년이었던 우리 고모들은, 나를 세워놓고 ‘선생님 놀이’를 한다고 여러 가지를 가르쳐줬는데, 그렇게 배운 것이 이 노래와 무용이었다. 피고지고 또 피어 앉은뱅이랍니다 라고 할 때는 두 손을 반짝반짝 하여 피고지는 것을 표현하다가 막판에는 바닥에 주저앉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어린 마음에 노래와 율동이 재미있어서 참 열심히 그것을 익혔었다.

 

그래서, 내 머릿속에 ‘앉은뱅이’란 보라색 제비꽃이다. 그래서 내가 다 자라도록 사람들이 ‘앉은뱅이’ 얘기를 하면 나는 그 사람이 제비꽃에 둘러싸여 앉아있는 풍경을 떠올리곤 했다.

 

그런데 내가 대학생이 된 후에 어느 가을날, 시골집에 가니 생전 처음 보는 여인이 마당 멍석에 앉아 콩을 까고 있다가 다가서는 나를 발견하고는 달처럼 환하게 웃는 것이 아닌가, 이 처음 보는 여인이 내 집 마당을 제 집 마당처럼 차지하고 앉아 내 이름까지 부르면서 알은체를 한다, “네가 온다더니 정말 오는구나. 너 정말 이제 어른이 다 되었네! 너 밥 먹었니? 배고프지?”  이 낯선 사람은 자기가 마치 평생 나를 알아온 것 같은 태도로 내 집 마당에서 나를 맞이했다. 나는 이세상에서 이렇게 얼굴이 환하고, 얼굴이 복숭아같이 발그레한 여인을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고 검은 눈망울하며 환하게 웃는 그 붉은 입술이라니! 

 

나는 여전히 전혀 사교성 없는 표정으로 어정쩡하게 내 집 대문을 향해 걸어가고 마는데, 그이가 “너 배고프지!” 하면서 밥을 차려주겠다는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나’ 부지런히 역시 대문으로 향했는데, 그제서야 나는 내가 평생 그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앉은뱅이’를 눈앞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이 달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바로 그 ‘앉은뱅이’였다. 그이는 두 팔을 다리처럼 세우고 그림자처럼 가느다란 하체를 바닥에 질질 끌면서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느릿느릿 바깥마당을 가로질러, 대문간을 지나 부엌으로 갔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 풍경을 바라보는 수 밖에.

 

그렇게 나는 나의 ‘제비꽃’을 만났다.  가을 걷이가 분주하게 되자 농사를 짓던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이 부족했고, 그래서 먼 일가붙이인 ‘제비꽃’이 일손을 거들 겸 우리 집에 와 있었던 모양이었다. ‘제비꽃’ 저녁상을 다 차릴 즈음에 할아버지 할머니도 하루 일을 마치고 늬엿늬엿 넘어가는 해님과 함께 집안으로 소를 끌고 오셨고, 그렇게 우리들은 별 말도 없이 ‘제비꽃’이 차려주는 밥을 달게 먹었다. 제비꽃이 차린 밥상에서는 향기로운 ‘달’ 냄새가 났다.

 

그 해 가을에 나는 한 일주일쯤 시골집에 머물렀고, 그 ‘제비꽃’과 한 방에서 자고 일어났다. ‘제비꽃’은 우리 고모들과 비슷한 또래로, 먼 친척 아줌마 뻘이었다. 그 때 서른이 넘은 나이였고, 내 고모들은 이미 아이 엄마들이 되어 있었지만, 제비꽃은 전설처럼 환하고 예쁜 처녀였고, 나이를 분간하기 힘든 신비한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조금씩 조금씩 제비꽃과 말을 섞어갔지만 그렇다고 이야기를 많이 나눈 것도 아니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일을 거들러 시골에 내려간 것이었으므로 주로 가을걷이를 도우러 밭으로 나가 살았고, ‘제비꽃’은 집안일을 챙기느라 집과 마당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제비꽃은 내가 서울 집으로 향하던 그날, 마당 가에 앉아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었다. 참 희고 환한 얼굴, 까만 머리, 그리고 뺨이 발그레한 아가씨.

 

 

그것이 제비꽃과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몇 해 후에 나의 제비꽃이 집안에서 혼자 농약을 먹고 명을 끊었다는 소식을 인편에 들었다. 그의 마지막을 보러 간 고모들이 전했다, “죽어서 드러누워 있는데 어쩌면 인물이 그렇게 곱던지. 얼굴이 달덩이처럼 환하고, 살아있을 때처럼 뺨도 붉그레 하고 곱더라. 참 착한 아이였는데……생전 찡그린 얼굴을 못 봤는데……죽어서도 참 곱더라……”

 

나는 그 사람을 ‘제비꽃’이라고 부른다. 내게는 먼 일가붙이 친척이고, 우리 고모들 또래의 ‘아줌마’뻘이지만, 그이는 하도 달처럼 곱고 아름다워서 다른 이름은 그이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내게 영원한 ‘제비꽃’이다.  나는 이세상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을 또다시 본 적이 없다. 들판에 앉아있는 크리스티나의 뒷모습을 볼 때, 사람들은 어떤 상상을 할까? 나는 크리스티나가 문득 고개를 돌려 관객을 쳐다볼 때, 어떤 얼굴이 나를 보게 될지 알 수 있다.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면, 거기 나의 ‘제비꽃’이 웃고 있을 것이다.  농약 먹고 죽을 때 얼마나 속이 아팠을까……하지만, 사는 것이 농약보다 더 아파서 죽었을 터이지. 나의 제비꽃. 피고지고 또 피어 앉은뱅이가 되었지만, 해마다 봄눈을 뚫고 피어나는 꽃.

 

 

 

 

2009년 10월 1일 목요일

원무 (圓舞): Andrew Wyeth & Ben Shahn

 

 

펜실베니아 채즈포드에 가면 아버지 NC Wyeth 가 가족을 위해 사들인 집과 스튜디오가 있다. 이곳에서 앤드루 와이어드가 태어나고 성장하였다. 앤드루 와이어드가 종종 놀러 가서 그림을 그리던 크뤼너 농장이 있다. 이곳에서 그의 유명한 헬가 시리즈의 그림들이 많이 그려졌다고 한다. 일반에 공개가 되지는 않았지만, 멀지 않은 강가에 앤드루 와이어드의 집과 스튜디오도 있다. 그리고 와이어드 3대의 예술을 기념하는 기념비와 같은 미술관이 있다.  내가 2009년 9월에 방문한 곳이 바로 그 브랜디와인 리버 미술관 (Brandywine River Museum)이다. 이 브랜디와인 리버 미술관의 앤드루 와이어드 갤러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중심 벽에서 우리를 맞아주는 그림이 그의 1989년작 눈 쌓인 언덕 (Snow Hill)이라는 대형 작품이다.

 

 

 

이 그림 속에는 노화가 앤드루가 평생 즐겨 그렸던 모델들이 총 동원되었다. 그의 아내 베씨도 보이고, 크뤼너 농장 주인인 크뤼너도 보인다. 그리고 가랑머리를 땋은 헬가도 있다. 이들은 어느 나라 민속놀이처럼 보이는 원무를 즐기고 있다. 커다란 기둥을 중심으로 색색 끈을 잡고 사람들이 둥글게 둘러서서 움직인다. 아마도 이리저리 교차하여 엮으면서 기둥에 직조를 하는 방식이 아닐까 상상해보게 된다. 눈이 쌓인 언덕이다. 눈이 쌓인 날, 세상이 무섭게 고요해진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무섭게 흰, 고요한 세상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어느 노화가가 평생 즐겨 그린 모델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이들은 둥글게 둥글게 춤을 추고 있다.  이들이 깔깔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고, 이들의 웃음소리마저 저 무섭게 고요한 흰 눈이 모두 흡수해 버릴 것도 같다. 언덕 아래로는 그가 즐겨 찾았을 농가도 보이고, 그리고 1945년 그의 아버지와 조카를 빼앗아간 기찻길도 보인다. 이 그림은 1989년에 그려졌고, 앤드루는 2009년 1월에 사망했다.  그러니까 이 그림을 그린 후에도 그는 20년을 더 살았다.  그런데, 이 그림 앞에 서면, 이 그림이 이 화가의 ‘최후의 그림’이 아닐까? 하는 신비한 기분이 든다. 어쩌면 나이 70세를 넘기면서 앤드루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보거나, 혹은 그의 건강이 악화되어 그의 마지막 그림을 그리겠다고 작정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의 평생을 회고하듯 이 작품 위에 그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담은 것이 아니었을까? 이 그림의 알록달록한 끈은,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내 눈에는 할머니의 꽃상여를 장식하던 원색의 무늬 같기도 하고, 상여를 따르는 만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노화가가 고요한 시선으로 그가 사랑하는 세상을 향해 작별 인사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그림 앞에 서면 나는 몇 번이라도, 작별인사처럼 ‘안녕…안녕…안녕…’하고 종알거리게 되는 것이다. 눈 위를 스치는 차갑고 고요한 겨울바람이 내 뺨을 스친다. 안녕, 안녕, 안녕…

 

 

 

뉴욕 맨하탄의 현대미술관 (Museum of Modern Art) 5층에 가면 에스컬레이터가 올라가는 도중 복도에 걸려있는 그림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현재 (2009년 10월) 세장의 그림이 나란히 걸려있다. 왼쪽부터 앤드루 와이어드의 '크리스티나의 세상'   벤 샨 (Ben Shahn)의  '핸드볼'  그리고 1945년작 ‘해방’ (Liberation  http://americanart.textcube.com/85  ).  앤드루 와이어드의 그림과 벤샨의 그림이 나란히 걸려 있는것이다.  '해방' 그림 속의 아이들은 폐허 속에서 둥글게 둥글게 뺑뺑이를 탄다. 아이들은 창백하고, 그림의 배경도 창백하다. 유령처럼 창백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뺑뺑이를 타는 아이들이 씩씩하고 건강하게 잘 자라줄 것이라는 희망을 읽는다. 왜냐하면 나 역시 창백한 얼굴로 뺑뺑이를 타던 아이였으므로. 나는 건강하게 잘 살고 있으므로.

 

앤드루 와이어드에 대한 글을 정리하면서, 나는 문득 내 머릿속에서 그의 ‘눈 쌓인 언덕’ 장면과 벤 샨의 ‘해방’ 이라는 그림의 장면이 서서히 포개지는 것을 느꼈다. 70을 넘기고 인생의 마지막을 예감하는 노 화가에게 죽음은 어쩌면 영원한 작별이면서 해방이 아니었을까? 벤 샨에게 폐허는 죽음이면서, 이곳에서 원무를 즐기던 아이들은 또 다른 희망이 아니었을까? 벤 샨 (Ben Shahn September 12, 1898 – March 14, 1969)은 1917년생인 앤드루 와이어드보다는 20여 년 연상인, 거의 한 세대 앞선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이다. 벤 샨이 사회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보았고, 사회현상에 대한 비판적 그림을 그리기도 했기 때문에 그를 사회적 사실주의화가 (Social Realist)로 분류하기도 한다. 벤 샨과 앤드루 와이어드가 20여 년의 차이가 있음에도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이들의 ‘사실주의적’ 화풍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순서로 보자면 역순이 되겠지만, 앤드루 와이어드 관련 페이지들을 정리하는 대로 벤 샨을 소개하고 싶다.

 

Andrew Wyeth: 미술가 집안 삼대(三代) 이야기

아버지 NC 와이어드

 

 

한국인들에게 ‘크리스티나의 세상’ 이라는 제목의 그림으로 알려진 미국의 사실주의계열 현대화가 앤드루 와이어드는 펜실베니아의 채즈포드 (Chadds Ford)라는 농촌 마을에서 2남3녀중의 막내로 태어났다. 앤드루의 아버지는 미국에서 이름난 화가였다. 본명은 Newell Convers Wyeth.  그는 짧게 NC Wyeth (October 22, 1882 – October 19, 1945)로 알려져 있다. 독일과 스위스 계 후예의 이민자의 아들로 미국에서 자라난 그는 일찌감치 미국 화단에서 이야기책의 삽화가로 자리를 잡았다. 매사추세츠주의 케임브리지 (하버드 대학이 있는 도시)에서 그 고장 처녀와 결혼한 그는 가족을 이끌고 펜실베니아의 농촌마을 채즈포드 (Chadds Ford)에 집과 스튜디오를 짓고 정착하게 되는데 그 집에서 막내아들 앤드루 와이어드 (July 12, 1917 – January 16, 2009)는 태어난다.

 

다섯 아이들의 아버지로서, 그리고 수백 권의 책의 삽화를 그린 미술가로서 그는 대체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삽화가로서 확고한 자리를 잡았고, 자녀들에 대한 ‘가장’으로서의 그의 사랑은 헌신적이었다고 할 만하다. 아내는 이 확고한 가장에게 순종적이었고, 자녀들은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듯 재능 있는 청년들로 자라났다. 그의 세 딸들은 미술이나 음악분야에서 전문가 급으로 성장했고, 그의 장남은 듀폰사의 엔지니어로 취업했는데, 오늘날 우리들이 사 마시는 플라스틱 음료수병을 처음 고안해낸 사람이 나다니엘 와이어드(Nathaniel Wyeth) 바로 듀폰사에 취업한 장남이라고 한다.

 

아버지 NC 와이어드가 얼마나 성공적인 삽화가로 자리를 잡았는가 하면 1920년, 그의 나이 38세 당시에 그의 채즈포드 집에는 요리사, 가정부, 집사 등이 상주했으며, 세탁물은 외부 세탁소로 모두 보내버렸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집을 찾던 손님 중에는 ‘위대한 개츠비 (The Great Gatsby)’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미국 소설가 스코트 피츠제랄드도 있었다. NC 와이어드는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써로우 (Henry David Thoreau), 초절주의 미국철학자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등과도 교유가 있었으며 이들의 글을 열심히 읽어댔다고 한다.

 

아버지 NC는 삽화가로서 부와 명예를 얻고 가족들에게 풍요로운 삶을 제공할 수 있었으나, 개인적으로는 우울감에 시달린 것으로 보인다.  이는 Norman Rockwell 이나 그 밖의, ‘삽화가’로서 이름을 날린 화가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일수 있는데, ‘삽화 (illustration)’가 순수 미술활동에서 한 발짝 벗어난 것이라는 생각에 기인한 것이다. 삽화작업이 순수미술인가 아닌가 하는 논의를 내가 따로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나 윈슬로 호머(Winslow Homer), 롸크웰 켄트(Rockwell Kent) 등 미국 미술사를 장식하는 빛나는 화가들의 이력 중에 ‘삽화가’로서의 이력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들은 대개 ‘호구지책’으로 어쩔 수 없이 ‘삽화’작업을 했으며, 이 작업에 염증을 내고 벗어나고 싶어했었다.  이는 마치 순수 문학을 하고 싶어하는 작가 지망생이 혹은 무명 작가가 호구지책으로 잡지사에서 편집 일을 하는 것과 비슷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지 NC는 삽화가로서의 성취감과 순수예술가가 되지 못했다는 우울감 사이에서 혼란스런 말년을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다섯 자녀에게 자상하기 그지없는 아버지였으며,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직접 자녀들의 미술 지도를 하기도 했으며, 그리고 튼튼한 성채와 같은 황제이기도 했다. 화를 낼 때 그는 호랑이처럼 무서웠으며, 육 척도 넘는 덩치와 힘의 소유자였던 그는 누군가가 맘에 안 드는 행동을 할 경우 그를 번쩍 집어 던질 정도로 사납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1945년, 채즈포드에서 손자와 함께 자동차로 기찻길을 건너다가 달려오는 기차를 피하지 못해서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고 하는데, 바로 근처에서 이 광경을 봐야 했던 마을사람은 그의 마지막 순간을 기억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세 살짜리 손자아이에게 “저 들판을 봐라. 너는 다시는 저런 광경을 보지 못 할 거야”  아버지 NC는 그 날, 메인주에 가 있던 막내아들 Andrew 부부가 돌아올 것에 대비하여,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녀석을 데리고, 막내아들 부부가 살던 신혼 집을 청소해주러 가던 중이었다고 한다.

 

아들, 앤드루 와이어드

 

삽화가 NC의 막내아들 앤드루는 우리나라에서 삼일 운동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17년에 펜실베니아의 평화로운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헌신적인 부모와 다정한 형제들 속에서 동화같이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아버지 NC는 가을철 할로윈데이 (Halloween)에 자녀들이 동화 속 주인공으로 변장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겨울 크리스마스가 되면 직접 산타 할아버지로 변장을 하고 나타나 자녀들에게 꿈과 마술과 환상의 세계를 심어주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꼬마 앤디는 귀염둥이 요정처럼 자유롭게, 발랄하게 성장했을 것이다. 막내아들의 신체적으로 연약하다는 것을 파악한 아버지 NC는 그를 공립학교에 보내는 대신에 집에서 가정교사로부터 수업을 받게 했고, 그 나머지 시간에 앤드루는 혼자 마을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앤드루가 15세가 되었을 때, 그는 정식으로 아버지 NC의 스튜디오에서 미술 수업을 시작한다. 그렇다고 아버지 NC가 그에게 미술의 기술을 전수한 것 같지는 않고, 기본적인 뎃생법, 빛과 사물과의 관계를 자상하게 안내해 준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의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하는 동안 그의 삽화 습작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팔려나가기도 한다. 앤드루가 17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의 스튜디오에서 벗어난 그는 모 회사로부터 책의 삽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게 된다. 삽화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그에게도 찾아 온 것이다. 이 때, 아버지가 앤드루를 설득한다, “앤디야 내가 너를 돌봐줄 테니 그냥 그림만 그려라.”  앤디가 20세가 되어 당시 17세였던 처녀 베씨 (Betsy)를 만나 청혼을 했을 때에도 아버지 NC는 극구 결혼에 반대의사를 표했는데, 막내 아들이 가족을 부양하느라 예술가의 길을 못 가게 될까 봐 근심하였다는 것이다.

 

아버지 NC는 당시 미국사회에 풍미하던, 잭슨 폴락이나 로스코, 윌리엄 드 쿠닝등이 선보이던 추상 표현주의 (Abstract Expressionism)의 물결을 지켜보면서 사실주의적 화법으로서는 성공하기 힘들다고 예측했고, 그래서 아들이 이 새로운 물결을 수용해주길 바랬다.  하지만 앤드루는 윈슬로 호머나 뒤러와 같은 사실주의 화법의 작가들에 매료되어 있었고, 시대에 뒤떨어져 보이는 템페라화에 집중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화풍이 마음에 안 들었을지도 모르고, 아들의 앞날이 근심스러웠을 것이다.  한편 앤드루는 아버지의 시선이 부담스러웠고, 아버지가 인정해주지 않는 그의 미술세계에 대하여 불안감과 분노심과 같은 복합적인 정서를 키웠을 것이다. 이런 것을 우리는 ‘애증’의 관계라고 간단하게 표현하기도 할 것이다.

 

1945년 아버지 NC가 펜실베이나 자택 앞 기찻길에서 사고로 사망했을 때, 앤드루의 상심은 컸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신화 속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그러하듯, 혹은 대부분의 아버지와 이들의 관계가 그러하듯, 아버지를 잃고 나서야 아들은 진정한 ‘성인’으로 탈바꿈을 하게 된다. 늘 ‘지켜보던 시선’ 혹은 ‘숨은 감독관’으로 존재하던 아버지로부터 벗어났을 때, 앤드루는 아버지의 상실이 가져온 생의 비극성과 성찰을 ‘자유롭게’ 그의 화폭에 옮길 수 있었다. 그는 사랑하는, 그러나 한편 부담스럽고 무서운 아버지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고, 그 자유 속에서 아버지를 재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뉴욕화단이 추상표현주의로 들끓고 있을 때, 앤드루는 그가 즐겨 산책하는 마을의 이웃사람들, 그 이웃사람들의 낡은 침실, 낡은 부엌, 그들의 풍경을 관찰하며 살았고, 그들의 친구가 되었고, 그리고 그들을 그렸다. 앤드루의 화집에는 그가 친구로 교류했던 독일계 이민자 가족, 혹은 오두막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흑인가족들이 많이 눈에 띈다. 어찌 보면 그와 동시대를 살던 화가들이 한편에서는 추상표현주의라는 ‘미술 놀음’에 열중하고 있고, 한편에서는 ‘사회적 사실주의’를 기치로 사회현상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을 때, 이들과 동떨어져서, 역시 동떨어진 채 살아가는 그의 이웃 사람들을 들여다보는 일에 열중해 있었던 것도 같다. 그는 세상 돌아가는 것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어떤 대상, 혹은 풍경에만 몰입하여 이를 그림에 담아내는 일에만 몰두한 것 같은데, 그의 극히 ‘개인주의적’인 이런 그림세계를 그의 화집들을 펼쳐놓고 휘리릭 넘기다 보면 재미있는 현상이 발견된다.

 

앤드루 와이어드 자신도 고백한바 있거니와, 그는 세상을 잘 모른다고 했다. 오로지 그가 아는 것, 그리고 그가 그림을 그린 대상은 펜실베니아 그의 집 주변, 그가 여름에 가서 지내던 메인 주의 집 주변, 그리고 이웃 사람들로 한정되어 있다. 그는 시사문제에 눈길을 돌린 적도 없고, 그의 화풍에서 벗어난 적도 없다. 그는 고집스럽게 극 사실적 세필로 그 주변의 풍경을 그려나갔다. 그런데 그의 그림의 주인공들은, 대개 소외계층의 대중들이다. 힘겹게 살아가는 독일 이민자 농부, 농부의 아낙, 한쪽 팔을 잃은 흑인 친구, 그가 자주 드나들던 이웃 흑인 가족들, 그가 15년간 은밀히 그려낸 헬가 역시 독일계 이민자의 아낙으로 남의 집 일을 해주던 여인이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친숙한 크리스티나 올슨, ‘크리스티아의 세상’의 주인공 역시 그렇게 잊혀진 대중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목청 높여 소외계층의 사회적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 할 줄은 몰랐지만, 평범하게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삶의 숭고함을 전달하는 데는 성공했다.

 

바로 이런 점을 보면 ‘예술의 힘’이 무엇인가 어렴풋하게나마 실마리를 잡아 가게 된다. 산이 있을 때, 그 산의 정상까지 올라가는 길은 무수하다. 그 길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고, 외 따른 길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연결된 길을 따라 이리저리 노선을 바꾸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오로지 한 길로만 행군하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중턱에서 그만 내려오기도 한다.  아무튼 산에는 정상이 있고, 사람들은 각기 다른 길을 통해 그 정상에 오르게 된다.

 

하나의 예술 작품이, 혹은 어떤 화가의 작품이 관객의 공감을 얻게 될 때, 혹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게 될 때 그 ‘감동’이나 ‘공감’의 요소는 무엇일까? 그 그림이 추상화이건, 구상화이건, 사회성 높은 그림이건 혹은 선전물 (프로파겐다)이건간에 그것이 우리를 감동시키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이 있다.  나는 그 요소가 ‘대상에 대한 열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화풍이 어떠하건, 작품에서 ‘열정’이 느껴질 때, 나는 감동하게 되는 것 같다. 대상의 본질을 깊이, 깊이 들여다보고 사색한 흔적이 보일 때, 그런 작품 앞에서 나는 감동하게 된다. 그것이 표현주의이건, 선전물 프로파갠다이건, 사실주의적이건 뭐건간에.  (내게 이런 시각이 있기 때문에 내가 소위 팝 아트라고 일컬어지는 일련의 작품들에 대해서 냉정하거나 무관심한 태도를 견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이런 시각은 팝 아트에 대해서 좀더 진지하게 공부한 후에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알면 사랑하게 되니까.)  앤드루 와이어드의 풍경 속에는, 그의 인물화 속에는 그가 친숙하게 잘 알고 있는 사람, 대상에 대한 깊은 성찰이 들어있다.  풍경 속의 사과나무 한 그루를 그릴 때조차 그는 사과를 일일이 세어보고 그렸을 정도로 대상에 대한 관찰이 확고 했었다. 그의, 대상에 대한 진지함은 인류애와도 닿아있었다.  그는 친한 이웃 흑인이 죽었을 때, 장례비가 없어서 쩔쩔맬 때 기꺼이 장례비를 제공하기도 했고, 부성애가 강했던 아버지가 싫어하는 줄 알면서도 이웃 흑인친구들과 어울려 시간을 보냈다. 한 개인으로서 그는 세상과 무관하게 살았던 것처럼, 역시나 인종문제나 사회적 차별의 문제와도 무관하게 사람들과 어울렸던 것이다.

 

손자: Jamie Wyeth

 

앤드루 와이어드와 그의 아내 베씨 사이에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 니콜라스는 미술 중개인이고, 둘째 아들 Jamie 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대를 이어받아 화가로 성장했다. 온라인 자료를 찾아보면 그에 대한 소개가 나와있기도 한데, 삽화가였던 NC나 사실주의적 화풍을 고집한 앤드루에 비해서 3대 제이미의 미술 세계는 특별해 보이지는 않는다. 뭐 대대로 명장이 나올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미국이 자랑할만한 독보적인 화가 집안인 와이어드 집안의 3대가 화가라는 것은 특별한 사항이긴 하지만, 3대 제이미는 아직까지는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이룩한 독보적 세계를 이룩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물론 1946년생인 그가 앞으로 독창적인 미술을 펼쳐갈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글쎄, 선대의 그늘이 하도 커서……

 

 

Andrew Wyeth 관련 페이지들은 이곳에:

http://americanart.textcube.com/category/Andrew%20Wyeth

 

관련자료:

First Impressions: Andrew Wyeth, by Richard Meryman (1991)

Andrew Wyeth: Autobiography, Introduced by Thomas Hoving (1995)

 

앤드루 와이어드가 즐겨 사용했던 템페라화, 드라이터치 기법 페이지가 이어지겠습니다.

 

 

 

 

2009년 9월 13일 일요일

Brandywine River Museum 의 안내인: 안내인의 미덕

http://americanart.textcube.com/44  에서 이어지는 글. 3대로 이어진 와이어드 미술가 가문을 기념하는 Brandywine River Museum에서 Andrew Wyeth 의 손녀딸이 일주일에 6일간, 매일 오후 2시와 3시에 관람객들을 대상으로 '가이디드 투어 (Guided Tour)'를 실시한다. 미술관 안내를 해 주는 것이 그이의 역할이다. 이름은 빅토리아 와이어드 (Victory Wyeth).  관계를 보면, 앤드루 와이어드의 장남의 딸.  직계 손녀.  제이미 와이어드는 앤드루의 차남이다.  그러므로 빅토리아에게 제이미는 삼촌 (작은아버지), 앤드루는 할아버지, N.C.Wyeth 는 증조 할아버지인 셈이다.

 

나도 나름대로 앤드루 와이어드의 직계, 혹은 이 집안 사람들로 부터 직접 안내를 받으면 내가 책에서 발견하지 못한, 오직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전해지는 생생하고 새로운 무엇을 발견 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이 사람의 안내 시간을 기다렸다.  그런데, 안내를 기다리던 관람객이 많아서 제대로 그림 감상도 안되는 분위기였던데다, 빅토리아 와이어드의 안내 방식이 내 눈에 거슬려, 시간 낭비하지 말고 내 그림 구경이나 하자 하고 그 자리를 빠져나오고 말았다. 왜 나는 이 사람의 안내 방식이 맘에 안 들었는가? (1) 일단 하이톤으로 귀 따갑게 크게 떠느는 바람에 몇마디 안들었는데 골치가 지끈거렸다.  (2) 밝고, 명랑하고, 활달하고 다 좋은데, 그의 그런 밝고 명랑함이 미술관의 분위기하고 잘 안맞았다. 유치원생한테 떠드는 유치원 선생님 말투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한시간 가까이 이 분의 연설에 시달리는 동안, 나는 한가롭게 앤드루 와이어드 갤러리에서 충분히 여유있는 감상을 할 수 있었는데, 한편으로는 저 안내인이 앤드루 와이어드 갤러리에 오면 그때 하는 얘기나 좀 들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기대와는 달리, 그는 한시간 내내, '제이미 와이어드' 갤러리에서 나오지 않고, 그 안에서 떠들어댔다. 나는 제이미 와이어드 갤러리를 한번 휙 봤는데, 내 취향도 아니고, 내 관심거리도 아니고, 그래서 미련없이 그 자리를 뜬 터였다. 그런데 한시간 내내 거기서 떠들고 있었다니...

 

그래도 혹시 뭔가 재미있는 얘기를 했는가 궁금하여, 그자리를 꾹 참고 지켜봤던 관객에게 "그 사람이 무슨 설명 하던가?"하고 물어봤다. 그 관객 왈, "하도 자기 집안 자랑을 해서 듣기 역겨웠지만 그냥 그래도 무슨 새로운 얘기를 하나 싶어서 참고 들었는데, 귀따갑게 집안 자랑만 해서 아주 짜증이 났다. 그런데 나만 그런것 같지가 않고, 거기 모여 있넌 사람들 표정이 별로 안 좋았다.  하도 자랑이 늘어져서, 다 듣고 난 후에도 내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분이 나빴다는 것만 기억한다."

 

아, 안 듣고 내 시간을 보내길 정말 잘 했다. (처음부터 싫더라구. 그래서 잽싸게 빠져나왔지.)

 

그래서 내가 겪어본 미술관 안내인들, Docent 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하는 사람들을 기억을 더듬어 살펴 보았다.  그리고 내가 왜 빅토리아의 몇마디만 듣고 그 자리를 도망쳤는지 알게 되었다.  내가 기억하는한, 미술관의 도슨트 (Docent)들은 안내와 관련된 소정의 교육을 받는다. 이들 중에는 미술대를 졸업한 전문 미술인들도 있어서, 지식도 대단하고, 설령 미술인이 아니더라고 충분히 자료를 연구하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관객을 이끈다.  그리고 이들은 대개 설명이 매우 절제되어 있다. 목소리도 차분하고, 작품에 대한 설명을 할 때에도 과장을 하거나 극적으로 자기 기분을 드러내지 않는다. 어찌보면 무미건조해 보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극히 절제된 설명을 통해서 우리는 작품에 각자의 주관을 가지고 접근하게 된다.

 

내가 미술관을 다니면서 만났던 안내원중에서 맘에 안 들었던 사례는, 별로 없지만,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생각된 안내인은, 지나치게 자기 개인적인 설명이 많고, 개인의 주관을 많이 이야기하고, 관객한테 자기가 뭘, 어디를, 왜 좋아하는지 자꾸만 설명하려고 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안내인에게도 주관이 있고, 개인적인 느낌이나 선호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를 너무 드러내면, 설명 듣는 관객은 미술품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안내인의 말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면, 그림 감상하러 갔다가 엉뚱하게 어떤 사람의 이야기나 듣다가 오는 꼴이 되고 만다.

 

빅토리아의 문제는 미술관에 미술품 보러 온 사람들, 작품에 대해서 전문가적인 관점에서 혹은 심도있는 안내를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기껏해야 자기네 집안 자랑을 하는 것으로 서비스를 열심히 하는 것에 있었다.  그이는 매우 열정적이었고 활발해 보였다. 그런데, 나는 그 사람의 삼촌이나 할아버지 얘기를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미술가, 미술가의 작품에 대한 전문적인 안내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Brandwine River Museum 에서는 전문 안내인을 따로 고용하는 것이 더 나을것 같다는 것이다.  조용하고 차분하게 미술에 대해서, 작품에 대해서 설명하는 안내인을 나는 원한다.

 

 

앤드루 와이어드의 고향집과 스튜디오

예술과 환상의 집

 

 

                               앤드루 와이어드가 태어나 자란 집: 집 앞 마당에서 보이는 풍경

 

 

앤드루 와이어드의 아버지 N.C.Wyeth ( http://en.wikipedia.org/wiki/N_c_wyeth ) 는 1907년 펜실베니아의 채즈포드 (Chadds Ford) 에 정착하여 살다가, 집 뒤에 스튜디오도 장만하게 되는데, 그의 다섯 명의 아이들 중 1917년에 막내 앤드루가 이 집에서 태어나게 된다. 앤드루는 몸이 약하여 초등학교에 다닌 기간이 짧다고 전해지는데, 다른 형제들이나 동네 아이들이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는 동안, 그는 그의 집 주변 마을이나 농장들을 쏘다니며 소일했다고 한다. 그는 수풀이나 나무들이 그의 ‘친구들’이었다고 술회 한 바 있다.

 

와이어드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면, 매우 가부장적이었던 N.C.Wyeth 가 다섯이나 되는 자녀들을 끔찍이 아끼고, 여름의 미국 독립 기념일, 가을의 할로윈데이, 추수감사절, 겨울의 크리스마스에 아이들에게 무궁한 기쁨과 환상을 심어주려 노력한 일화들이 많이 나온다. 미국에서는 지금도 독립기념일이 되면 여기저기서 불꽃놀이를 하는 풍습이 있는데, 소년 시절의 앤드루 와이어드는 신나는 불꽃놀이를 즐기던 꼬마였다. 할로윈데이에는 가족들이 모두 동화 속 주인공이나 마녀 복장을 하고 놀았으며,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키가 육척이 넘었던, 거구였던 아버지 N.C.Wyeth가 직접 산타클로스로 변장을 하고 지붕 위를 돌아다니다가 현관문을 열고 나타나 선물을 놓고 사라지곤 했는데, 앤드루는 산타클로스가 나타나 돌아다니는 상황이 얼마나 ‘무섭고’ ‘기쁜’일이었는지, 얼마나 오싹하게 겁나고 신나는 일이었는지를 훗날 술회 한 바 있다. 와이어드는 자녀들에게 음악, 예술의 아름다움, 자연의 아름다움, 그리고 동화 속 환상의 세계를 선물하고자 애 썼고, 그 결과 다섯 명의 자녀들은 예술가로, 발명가로 출중하게 자라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3대에 걸친 예술가 집안을 탄생 시키게 된 것이리라.

 

 

 

Brandywine River Museum 에서 언덕위로 1마일 올라가면 N.C.Wyeth House 라고 알려진 집이 나타나고, 그 집 언덕 위에 그의 스튜디오가 있다. 집이나 스튜디오 내부는 사진 촬영이 안되고, 안내인의 안내와 설명을 들으며 투어를 할 수 있다. 뮤지엄에서 셔틀버스가 운행된다.

 

북쪽으로 난 창

 

 

                                아버지 N.C.Wyeth 의 스튜디오: 유적지 표지판

 

집과 스튜디오를 안내 해 준 이는 70대의 단정한 신사였다. N.C.와이어드의 스튜디오는 단순한 개인 스튜디오라기보다는 ‘가족 스튜디오’라고 할만도 하고, 그 자체가 미술학교라고도 할 수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앤드루 와이어드 역시 15세 때부터 이 스튜디오에서 그림 연습을 했다고 하는데, 그의 일대기를 읽어보면 앤드루는 아버지에게서 미술 수업을 받았다기보다는 아버지의 ‘문하생’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며 미술 작업을 했다고도 한다. N.C.Wyeth 의 문하생 중에는 그의 딸과 결혼을 하여 사위가 된 사람도 있었다.

 

 

            스튜디오 입구 사과나무들: 밖에서 창문을 찍은 사진: 바깥의 사람이 거울처럼 비침

                    

 

흰 목재 건물의 스튜디오는 한 쪽 벽면이 유리창으로 되어 있었는데, 안내인의 설명으로는 그 큰 유리창 벽은 ‘북향’이라고 한다. 북향으로 창을 낸 이유는, 채광을 위해서 자연 광선이 필요하긴 하지만, 창을 남으로 낼 경우에 시간의 변화에 따라 광선이 변화하므로 안정적으로 그림을 그리기가 힘들고, 가장 안정적인 채광은 북향일 때 가능하다고 한다.

 

평생을 삽화가 (illustrator)로 살아간, 혹은 삽화가로 알려진 N.C.Wyeth 는 ‘정물화’도 많이 그렸는데, 삽화가들에게 ‘정물화’는 스트레스 해소용 작업이었다고 한다.  소설이나 이야기의 ‘삽화’를 그리는 사람들의 고충은, 항상 어떤 이야기의 장면, 그 장면이 전체 이야기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 그림의 내용이 사실에 부합한지 여러 가지를 고려하여 장면을 선택하고, 사실과 상상력 사이에서 적합한 그림을 그려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면을 만들어 내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가 된다고 한다. 이런 ‘삽화’를 그리는 틈틈이 ‘정물화 (Still Life)’를 그리는 동안에는 어떤 ‘맥락’을 신경 쓸 것도 없이 눈앞에 설치된 정물만 들여다보고 그것만 그리면 되므로 정신적인 ‘휴식’을 취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즐기는 그림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삽화가에게는 삽화가로서의 고통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삽화가’들의 또 다른 고통은, 그것이 ‘순수예술’로서 자리를 못 잡고, 늘 ‘상업화’라는 굴레를 쓰게 되므로 예술가로서 어떤 열패감 같은 것에 시달릴 수도 있고, 생업 때문에 마지못해서 하는 경우도 있다. Norman Rockwell 역시 평생 삽화가로서 사는데 대한 고통을 겪었고, Edward Hopper 역시 생업을 위해 삽화가로서의 삶을 수십 년간 견뎌야 했었다. Sloan 도 그러하였고. (미국의 사실주의적 화가들 중에서 삽화가로 생업을 유지했던 작가들이 많이 있다.)

 

 스튜디오 안쪽 대형 벽화그림과 작업용 이동식 계단: 스튜디오 전경: 스튜디오 입구쪽 홀  

 

 

마침 스튜디오의 벽에는 N.C.Wyeth 가 작업을 했다는 대형 벽화 작품이 있었는데, 안내인이 설명을 마치고 나서 ‘뭐 질문 없는가?’하길래, 내가 물었다, “저 대형 작품을 여기서 그린 후에 어떻게 옮기는가? 내가 아무리 살펴도 저 대형 작품이 나갈 수 있는 출입문이나 틈새가 보이지 않는데.” (나는 늘 매우 실질적인 문제에 주의를 빼앗기곤 한다. 예술가의 스튜디오에서 그의 예술혼을 찾기 보다는, 그림을 어떻게 옮기는가 하는 것이 더 걱정이 되는 것이다.) 안내인의 설명으로는, 벽화이긴 하지만 벽에 그린 것이 아니고 벽 크기의 대형 캔버스에 작업을 한 것이므로, 이런 경우에는 캔버스를 틀에서 분리하여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둘둘 말아서 옮겨다가 벽에 설치를 하고, 운송도중에 그림에 흠집이 생기면 (틀에서 분리하여 둘둘 말았으니 어딘가 상채기가 나겠지), 나중에 화가가 가서 다시 손을 본다고 한다.

 

스튜디오 앞 마당에서 언덕 아래로 내려다보니 바로 앞의 밤나무에서는 밤송이가 제법 탐스럽고, 스튜디오 옆에는 돌배나무에 돌배가 빼곡했으며, 사과 나무가 줄지어 서있기도 했다. 역시 아름다운 광경이었는데, 어쩐지 이런 풍경들이 – 예를 들어서 밤나무, 돌배나무, 사과나무가 있는 이런 풍경이 마치 내 고향집 마당, 내가 어릴 때 쏘다니던 내 고향의 풍경처럼 비쳐지면서, 문득, 여기가 내 고향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낯선 남의 나라, 이국인의 스튜디오 마당에 서서, 여기가 내 고향 같다는 느낌이 들다니.  아, 이제는 아파트 단지로 뒤덮여서 찾아 가봐도 찾을 수 없는 내 고향이 아니던가? 오히려 이국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나는 내 고향의 향기를 발견해 내기도 한다.  앤드루 와이어드의 풍경화, 혹은 그 풍경 속에 담긴 사람들이 ‘이국인들’이면서도 우리를 감동시키는 이유는, 그의 그림 안에 보편적인 그리움, 보편적인 정서를 담고 있음이라.

 

 앤드루 와이어드의 땅

 

앤드루 와이어드는 이곳에서 나고 자랐고, 평생 이곳에서 작업을 했다고 할 수 있다. Maine 주에서 살면서 Christina’s World 를 그리기도 했지만, 메인주와 펜실베니아의 Chadds Ford의 집을 오가며 살았고 역시 채즈포드에서 죽었다. 앤드루 와이어드의 채즈포드 집이나 스튜디오가 어디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매우 삿적인 공간이므로 공개가 안 된 듯 하다. 그러나 그의 집이 Brnadywine River Trail 을 따라 걷다보면 보이기도 한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헬가시리즈 때문에 모델 헬가와의 관계가 스캔들처럼 되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아낼 무렵, 그가 헬가를 그리며 활동하던 이곳 채즈포드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모양이다. 그러자 인근주민들이 이를 불쾌히 여겨 앤드루 와이어드와 헬가에게 다른 곳으로 나가라는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다고 한다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확인 할 길이 없다).

 

                         인터넷에서 발견한 브랜디와인 강변의 그의 집 사진:

 

                          http://www.geocities.com/brandywinetrail/sites.html

 

 

 

 

안내인에게 혹시 앤드루 와이어드가 N.C.Wyeth 의 스튜디오에서 헬가를 그린적은 없는가 물으니, 그는 “여기서 두어장 그렸을지도 모른다. 헬가 그림은 이 근방 여러군데서 그려진 것이고, 크뤼너 농장에서 그렸고…” 하는 식으로 얼버무리고 말았는데, 어쩌면 안내인 역시 앤드루 와이어드와 헬가의 스캔들을 N.C.Wyeth 스튜디오와 연결시키는 것을 모욕으로 받아들이거나, 그냥 말하기 싫었을지도 모르겠다. 앤드루 와이어드는 사망하기 전 까지도 가끔 이 스튜디오에 들러 안내인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고 그는 회상했다.

 

이제 새삼스럽게 앤드루 와이어드의 채즈포드 집이나 그의 개인 스튜디오를 들여다 보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다. 삿적인 공간은 보호되어야 하고, 나는 그가 사랑했던 땅을 밟아보고, 강과, 수풀과, 나무들과, 나지막한 언덕들을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의 그림세계를 본 것이라고 생각한다.

Brandywine River Museum 와이어드 뮤지엄

 

 

                    공식 홈 페이지: http://www.brandywinemuseum.org/

                   앤드루 와이어드 관련글: http://americanart.textcube.com/category/Andrew%20Wyeth

 

소개

 

미국의 21세기 사실주의 화풍의 대표가 할 만한 앤드루 와이어드(Andrew Wyeth) (July 12, 1917 – January 16, 2009)는 크리스티나의 세상 (Christina’s World)라는 작품으로 한국인들에게 기억 될 것이다. 메인주(Maine)의 이웃집 여인 Christina Olsen 을 그린 그림이다.  앤드루 와이어드가 미국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지 않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의 아버지 N.C.Wyeth (Newell Convers Wyeth: October 22, 1882 – October 19, 1945)는 책의 삽화가로 역시 자기 분야에서 대가로 인정 받는 사람이기도 하다. 앤드루 와이어드의 아들 제이미 와이어드 (Jamie Wyeth) 역시 화가로 성장했다. 그러므로 근현대 미국 미술사를 보면 Wyeth 집안에서, 삽화가로 살아간 N.C.Wyeth 에서 앤드루 와이어드를 거쳐 제이미 와이어드에 이르는 3대에 걸친 미술가들이 탄생한 것이다. 그 삼대에 걸친 화가집안을 기념하는 미술관이 브랜디와인 리버 미술관 (Brandywine River Museum)인데, 펜실베니아의 채즈 포드(Chadds Ford)지역에 있다.

 

워싱턴 디씨나 북버지니아에서 이곳까지는 대략 120마일 안팎의 거리인데, 델라웨어(Delaware)의 주도인 윌밍턴 (Wilmington)시에서도 인접해 있고, 필라델피아 (Philadelphia)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내가 이곳을 방문한 날은, 2009년 9월 12일. 날이 잔뜩 흐려서 하늘에 회색 구름이 가득하고, 간간히 비가 내리기도 하는 날이었다. 하이웨이를 달리던 도중에 실수로 국도로 접어 들게 되었는데, 마침 델라웨어의 윌밍턴의 변두리를 통과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미 이곳에서부터 브랜디와인 리버 (Brandywine River)라는 이름이 여기저기 표지판에 붙어 있었다. 이 일대를 흐르는 자그마한 강이 브랜디와인 강인듯 했다.  강이 브랜디와인처럼 흐른다니, 얼마나 향기로울지. 이곳의 아름다운 풍광을 강의 이름에서부터 느낄수 있었다.

 

하이웨이에서 빠져나와 U.S. Route 1, (미국 1번 국도)를 따라 나즈막한 평야와 숲, 그리고 마을들을 통과하다보면 나타나는 표지판. Brandywine River Museum. 이 박물관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1971년이라고 하는데, 현재 규모의 박물관이 개관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분명치 않다. 아마도 최근에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이 아닐까 상상 할 뿐이다. 이 박물관 주변에는 앤드루 와이어드가 태어나 성장하고, 미술 공부를 하던 그의 아버지의 집, 그리고 아버지의 스튜디오가 있고, 또한 앤드루 와이어드가 좋아하던 이웃 크뤼너 (Kruener) 농장도 있다. 박물관 입장료는 방문 당시 10달러, 생가와 스튜디오를 묶은 투어와 크뤼너 농장 투어가 각각 5달러씩 이었다. 일정상 나는 박물관과 생가, 스튜디오를 둘러보았는데, 나중에라도 다시 방문하여 크뤼너 농장도 살펴보고 싶다.  그런데 사실 이 주변을 살펴 보고 이웃집들, 농가주택들, 풍경들을 보는 것 만으로도 앤드루 와이어드가 사랑하던 풍경에 공감할 만 했다.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전시장

 

박물관 1층에는 기념품 매점, 카페테리아, 전시실이 있고, 2층에는 미국 미술품들을 특별 전시하는 공간이 있다. 이곳에서 ‘미국의 풍경’이라는 주제로 미국의 풍경화들이 전시 되어 있었는데, 미국미술 명문가답게 Winslow Homer를 위시한 대가들의 그림도 많이 보였다.  2층, 미국의 초상전에서도 역시 Mary Cassatt 의 인물화 습작품을 위시한 작품들을 볼 수 있었다. 호레이스 피핀 (Horace Pippin)의 작품은 ‘기도하기’ (Saying Prayers) 외에 두 점의 정물화가 있었고, 마침 삽화가이며 미술가였던 로크웰 켄트 (Rockwell Kent) 기획전도 하고 있어서, 켄트의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볼 기회를 가졌다. 3층은 와이어드 집안을 위한 공간이다.  아버지 N.C.Wyeth 갤러리에 이어, 아들 앤드루 갤러리, 그리고 가장 구석에 손자 제미이 와이어드.  물론 나의 관심은 앤드루 와이어드에 있었으므로 앤드루 갤러리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며 그의 그림들을 감상했다.  화집에서 보던 그림들이 내 앞에 펼쳐져 있을 때, 보고 싶던 그림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라니.

 

 

 

 

미술관 건물의 특징

 

브랜디와인 리버 뮤지엄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박물관 입구로 들어설 때, 한국 사람이라면, 한국의 농가주택에서 살아 본 경험이 있거나, 혹은 한옥집에서 살아 본 사람이라면, 마치 자기의 집을 혹은 할머니댁에 들어서는 듯한 기분이 들을지도 모른다. 박물관 건물의 구조가 전통적인 한옥의 건축양식을 닮았기 때문이다. 내가 살던 고향집을 예로 들어보겠다.  우리집은 경기도의 일반적인 농가 주택이었는데, 바깥에 커다란 마당이 있어서 이를 바깥 마당이라고 했고, 사랑채에 대문이 이어져 있었다. 사랑채의 대문을 거쳐서 안마당을 지나 안채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박물관도 그런 식이었다. 대문 통과하면 앞마당 있고, 그리고 미술관 본채가 있다. 이것은 전통적인 미국식 건축양식이 아니다. 나는 이 미술관의 대문을 통과하여 앞마당을 지나칠 때, 내 고향집에 들어서는 기분이 들었다.

 

 

 

 

 

인테리어 역시 일반적인 미국의 미술관이나 갤러리와 차이가 났다.  예를 들어서 필립스 콜렉션(Phillips Collection)의 경우, 미국의 부호가 사용하던 개인 주택을 갤러리로 개조했으므로 미국식 부잣집 내부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브랜디와인 리버 뮤지엄의 내부는 한옥을 연상시켰다. 투박하고 굵직한 원목 기둥이 그대로 드러나있고, 전시장 내부 바닥을 마루로 깔았으며, 매끄럽지 않은 울퉁불퉁한 흰 회벽처리를 해 놓았다. 분명 현대적으로 설계된 건물이지만 갤러리들을 돌아 다닐 때의 느낌은 내 집처럼 아늑하고 편안하다는 것이었다.

 

브랜디와인 리버 강, 혹은 집 옆을 흐르는 개울

 

 

 

뮤지엄 건물의 한쪽 벽은 유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유리벽은 잔잔히 흐르는 브랜디와인 강을 내려다보도록 설계가 되었다. 미술관에서 갤러리를 이동할 때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유리벽 바깥의 강과 강 주변 풍경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런데 브랜디와인 강은 강이라고 부르기엔 작아보이는, 개울 보다는 좀 커보이는, 딱 청계천 정도의 규모였는데, 자그마한 강 혹은 개울이 집앞에 흐르는 형상이라, 소박하고 정다워 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한강이나 포토맥강처럼 규모가 큰 강을 앞에 두고 있을때와, 헤엄쳐 건널정도의 자그마한 하천, 개울을 보고 있을때의 느낌은 다르다. 큰 강이 압도적이라면 작은 하천은 소박한 평화를 선물한다.  브랜디와인 강은 고향의 앞개울같이 정답게 흐르고 있었다.

 

 

 

앨범

 

갤러리 내부에서 사진 촬영이 금지 되어 있어서, 열망하던 작품들을 사진에 담아 올수 없어 아쉬웠다. 앤드루 와이어드 갤러리에서 Lovers 그림이 있는 갤러리 풍경을 '한 장' 찍었다. (경비의 눈을 피해서). '사냥꾼'이 사냥을 한듯, 혹은 낚시꾼이 물고기를 잡은 듯 잠시 유쾌.  헬가의 누드 Lov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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