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1일 목요일

Andrew Wyeth: 미술가 집안 삼대(三代) 이야기

아버지 NC 와이어드

 

 

한국인들에게 크리스티나의 세상이라는 제목의 그림으로 알려진 미국의 사실주의계열 현대화가 앤드루 와이어드는 펜실베니아의 채즈포드 (Chadds Ford)라는 농촌 마을에서 23녀중의 막내로 태어났다. 앤드루의 아버지는 미국에서 이름난 화가였다. 본명은 Newell Convers Wyeth.  그는 짧게 NC Wyeth (October 22, 1882 – October 19, 1945)로 알려져 있다. 독일과 스위스 계 후예의 이민자의 아들로 미국에서 자라난 그는 일찌감치 미국 화단에서 이야기책의 삽화가로 자리를 잡았다. 매사추세츠주의 케임브리지 (하버드 대학이 있는 도시)에서 그 고장 처녀와 결혼한 그는 가족을 이끌고 펜실베니아의 농촌마을 채즈포드 (Chadds Ford)에 집과 스튜디오를 짓고 정착하게 되는데 그 집에서 막내아들 앤드루 와이어드 (July 12, 1917 – January 16, 2009)는 태어난다.

 

다섯 아이들의 아버지로서, 그리고 수백 권의 책의 삽화를 그린 미술가로서 그는 대체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삽화가로서 확고한 자리를 잡았고, 자녀들에 대한 가장으로서의 그의 사랑은 헌신적이었다고 할 만하다. 아내는 이 확고한 가장에게 순종적이었고, 자녀들은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듯 재능 있는 청년들로 자라났다. 그의 세 딸들은 미술이나 음악분야에서 전문가 급으로 성장했고, 그의 장남은 듀폰사의 엔지니어로 취업했는데, 오늘날 우리들이 사 마시는 플라스틱 음료수병을 처음 고안해낸 사람이 나다니엘 와이어드(Nathaniel Wyeth) 바로 듀폰사에 취업한 장남이라고 한다.

 

아버지 NC 와이어드가 얼마나 성공적인 삽화가로 자리를 잡았는가 하면 1920, 그의 나이 38세 당시에 그의 채즈포드 집에는 요리사, 가정부, 집사 등이 상주했으며, 세탁물은 외부 세탁소로 모두 보내버렸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집을 찾던 손님 중에는 위대한 개츠비 (The Great Gatsby)’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미국 소설가 스코트 피츠제랄드도 있었다. NC 와이어드는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써로우 (Henry David Thoreau), 초절주의 미국철학자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등과도 교유가 있었으며 이들의 글을 열심히 읽어댔다고 한다.

 

아버지 NC는 삽화가로서 부와 명예를 얻고 가족들에게 풍요로운 삶을 제공할 수 있었으나, 개인적으로는 우울감에 시달린 것으로 보인다.  이는 Norman Rockwell 이나 그 밖의, ‘삽화가로서 이름을 날린 화가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일수 있는데, ‘삽화 (illustration)’가 순수 미술활동에서 한 발짝 벗어난 것이라는 생각에 기인한 것이다. 삽화작업이 순수미술인가 아닌가 하는 논의를 내가 따로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나 윈슬로 호머(Winslow Homer), 롸크웰 켄트(Rockwell Kent) 등 미국 미술사를 장식하는 빛나는 화가들의 이력 중에 삽화가로서의 이력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들은 대개 호구지책으로 어쩔 수 없이 삽화작업을 했으며, 이 작업에 염증을 내고 벗어나고 싶어했었다.  이는 마치 순수 문학을 하고 싶어하는 작가 지망생이 혹은 무명 작가가 호구지책으로 잡지사에서 편집 일을 하는 것과 비슷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지 NC는 삽화가로서의 성취감과 순수예술가가 되지 못했다는 우울감 사이에서 혼란스런 말년을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다섯 자녀에게 자상하기 그지없는 아버지였으며,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직접 자녀들의 미술 지도를 하기도 했으며, 그리고 튼튼한 성채와 같은 황제이기도 했다. 화를 낼 때 그는 호랑이처럼 무서웠으며, 육 척도 넘는 덩치와 힘의 소유자였던 그는 누군가가 맘에 안 드는 행동을 할 경우 그를 번쩍 집어 던질 정도로 사납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1945, 채즈포드에서 손자와 함께 자동차로 기찻길을 건너다가 달려오는 기차를 피하지 못해서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고 하는데, 바로 근처에서 이 광경을 봐야 했던 마을사람은 그의 마지막 순간을 기억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세 살짜리 손자아이에게 저 들판을 봐라. 너는 다시는 저런 광경을 보지 못 할 거야  아버지 NC는 그 날, 메인주에 가 있던 막내아들 Andrew 부부가 돌아올 것에 대비하여,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녀석을 데리고, 막내아들 부부가 살던 신혼 집을 청소해주러 가던 중이었다고 한다.

 

아들, 앤드루 와이어드

 

삽화가 NC의 막내아들 앤드루는 우리나라에서 삼일 운동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17년에 펜실베니아의 평화로운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헌신적인 부모와 다정한 형제들 속에서 동화같이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아버지 NC는 가을철 할로윈데이 (Halloween)에 자녀들이 동화 속 주인공으로 변장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겨울 크리스마스가 되면 직접 산타 할아버지로 변장을 하고 나타나 자녀들에게 꿈과 마술과 환상의 세계를 심어주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꼬마 앤디는 귀염둥이 요정처럼 자유롭게, 발랄하게 성장했을 것이다. 막내아들의 신체적으로 연약하다는 것을 파악한 아버지 NC는 그를 공립학교에 보내는 대신에 집에서 가정교사로부터 수업을 받게 했고, 그 나머지 시간에 앤드루는 혼자 마을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앤드루가 15세가 되었을 때, 그는 정식으로 아버지 NC의 스튜디오에서 미술 수업을 시작한다. 그렇다고 아버지 NC가 그에게 미술의 기술을 전수한 것 같지는 않고, 기본적인 뎃생법, 빛과 사물과의 관계를 자상하게 안내해 준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의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하는 동안 그의 삽화 습작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팔려나가기도 한다. 앤드루가 17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의 스튜디오에서 벗어난 그는 모 회사로부터 책의 삽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게 된다. 삽화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그에게도 찾아 온 것이다. 이 때, 아버지가 앤드루를 설득한다, “앤디야 내가 너를 돌봐줄 테니 그냥 그림만 그려라.”  앤디가 20세가 되어 당시 17세였던 처녀 베씨 (Betsy)를 만나 청혼을 했을 때에도 아버지 NC는 극구 결혼에 반대의사를 표했는데, 막내 아들이 가족을 부양하느라 예술가의 길을 못 가게 될까 봐 근심하였다는 것이다.

 

아버지 NC는 당시 미국사회에 풍미하던, 잭슨 폴락이나 로스코, 윌리엄 드 쿠닝등이 선보이던 추상 표현주의 (Abstract Expressionism)의 물결을 지켜보면서 사실주의적 화법으로서는 성공하기 힘들다고 예측했고, 그래서 아들이 이 새로운 물결을 수용해주길 바랬다.  하지만 앤드루는 윈슬로 호머나 뒤러와 같은 사실주의 화법의 작가들에 매료되어 있었고, 시대에 뒤떨어져 보이는 템페라화에 집중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화풍이 마음에 안 들었을지도 모르고, 아들의 앞날이 근심스러웠을 것이다.  한편 앤드루는 아버지의 시선이 부담스러웠고, 아버지가 인정해주지 않는 그의 미술세계에 대하여 불안감과 분노심과 같은 복합적인 정서를 키웠을 것이다. 이런 것을 우리는 애증의 관계라고 간단하게 표현하기도 할 것이다.

 

1945년 아버지 NC가 펜실베이나 자택 앞 기찻길에서 사고로 사망했을 때, 앤드루의 상심은 컸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신화 속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그러하듯, 혹은 대부분의 아버지와 이들의 관계가 그러하듯, 아버지를 잃고 나서야 아들은 진정한 성인으로 탈바꿈을 하게 된다. 지켜보던 시선혹은 숨은 감독관으로 존재하던 아버지로부터 벗어났을 때, 앤드루는 아버지의 상실이 가져온 생의 비극성과 성찰을 자유롭게그의 화폭에 옮길 수 있었다. 그는 사랑하는, 그러나 한편 부담스럽고 무서운 아버지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고, 그 자유 속에서 아버지를 재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뉴욕화단이 추상표현주의로 들끓고 있을 때, 앤드루는 그가 즐겨 산책하는 마을의 이웃사람들, 그 이웃사람들의 낡은 침실, 낡은 부엌, 그들의 풍경을 관찰하며 살았고, 그들의 친구가 되었고, 그리고 그들을 그렸다. 앤드루의 화집에는 그가 친구로 교류했던 독일계 이민자 가족, 혹은 오두막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흑인가족들이 많이 눈에 띈다. 어찌 보면 그와 동시대를 살던 화가들이 한편에서는 추상표현주의라는 미술 놀음에 열중하고 있고, 한편에서는 사회적 사실주의를 기치로 사회현상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을 때, 이들과 동떨어져서, 역시 동떨어진 채 살아가는 그의 이웃 사람들을 들여다보는 일에 열중해 있었던 것도 같다. 그는 세상 돌아가는 것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어떤 대상, 혹은 풍경에만 몰입하여 이를 그림에 담아내는 일에만 몰두한 것 같은데, 그의 극히 개인주의적인 이런 그림세계를 그의 화집들을 펼쳐놓고 휘리릭 넘기다 보면 재미있는 현상이 발견된다.

 

앤드루 와이어드 자신도 고백한바 있거니와, 그는 세상을 잘 모른다고 했다. 오로지 그가 아는 것, 그리고 그가 그림을 그린 대상은 펜실베니아 그의 집 주변, 그가 여름에 가서 지내던 메인 주의 집 주변, 그리고 이웃 사람들로 한정되어 있다. 그는 시사문제에 눈길을 돌린 적도 없고, 그의 화풍에서 벗어난 적도 없다. 그는 고집스럽게 극 사실적 세필로 그 주변의 풍경을 그려나갔다. 그런데 그의 그림의 주인공들은, 대개 소외계층의 대중들이다. 힘겹게 살아가는 독일 이민자 농부, 농부의 아낙, 한쪽 팔을 잃은 흑인 친구, 그가 자주 드나들던 이웃 흑인 가족들, 그가 15년간 은밀히 그려낸 헬가 역시 독일계 이민자의 아낙으로 남의 집 일을 해주던 여인이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친숙한 크리스티나 올슨, ‘크리스티아의 세상의 주인공 역시 그렇게 잊혀진 대중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목청 높여 소외계층의 사회적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 할 줄은 몰랐지만, 평범하게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삶의 숭고함을 전달하는 데는 성공했다.

 

바로 이런 점을 보면 예술의 힘이 무엇인가 어렴풋하게나마 실마리를 잡아 가게 된다. 산이 있을 때, 그 산의 정상까지 올라가는 길은 무수하다. 그 길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고, 외 따른 길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연결된 길을 따라 이리저리 노선을 바꾸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오로지 한 길로만 행군하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중턱에서 그만 내려오기도 한다.  아무튼 산에는 정상이 있고, 사람들은 각기 다른 길을 통해 그 정상에 오르게 된다.

 

하나의 예술 작품이, 혹은 어떤 화가의 작품이 관객의 공감을 얻게 될 때, 혹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게 될 때 그 감동이나 공감의 요소는 무엇일까? 그 그림이 추상화이건, 구상화이건, 사회성 높은 그림이건 혹은 선전물 (프로파겐다)이건간에 그것이 우리를 감동시키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이 있다.  나는 그 요소가 대상에 대한 열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화풍이 어떠하건, 작품에서 열정이 느껴질 때, 나는 감동하게 되는 것 같다. 대상의 본질을 깊이, 깊이 들여다보고 사색한 흔적이 보일 때, 그런 작품 앞에서 나는 감동하게 된다. 그것이 표현주의이건, 선전물 프로파갠다이건, 사실주의적이건 뭐건간에.  (내게 이런 시각이 있기 때문에 내가 소위 팝 아트라고 일컬어지는 일련의 작품들에 대해서 냉정하거나 무관심한 태도를 견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이런 시각은 팝 아트에 대해서 좀더 진지하게 공부한 후에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알면 사랑하게 되니까.)  앤드루 와이어드의 풍경 속에는, 그의 인물화 속에는 그가 친숙하게 잘 알고 있는 사람, 대상에 대한 깊은 성찰이 들어있다.  풍경 속의 사과나무 한 그루를 그릴 때조차 그는 사과를 일일이 세어보고 그렸을 정도로 대상에 대한 관찰이 확고 했었다. 그의, 대상에 대한 진지함은 인류애와도 닿아있었다.  그는 친한 이웃 흑인이 죽었을 때, 장례비가 없어서 쩔쩔맬 때 기꺼이 장례비를 제공하기도 했고, 부성애가 강했던 아버지가 싫어하는 줄 알면서도 이웃 흑인친구들과 어울려 시간을 보냈다. 한 개인으로서 그는 세상과 무관하게 살았던 것처럼, 역시나 인종문제나 사회적 차별의 문제와도 무관하게 사람들과 어울렸던 것이다.

 

손자: Jamie Wyeth

 

앤드루 와이어드와 그의 아내 베씨 사이에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 니콜라스는 미술 중개인이고, 둘째 아들 Jamie 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대를 이어받아 화가로 성장했다. 온라인 자료를 찾아보면 그에 대한 소개가 나와있기도 한데, 삽화가였던 NC나 사실주의적 화풍을 고집한 앤드루에 비해서 3대 제이미의 미술 세계는 특별해 보이지는 않는다. 뭐 대대로 명장이 나올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미국이 자랑할만한 독보적인 화가 집안인 와이어드 집안의 3대가 화가라는 것은 특별한 사항이긴 하지만, 3대 제이미는 아직까지는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이룩한 독보적 세계를 이룩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물론 1946년생인 그가 앞으로 독창적인 미술을 펼쳐갈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글쎄, 선대의 그늘이 하도 커서……

 

 

Andrew Wyeth 관련 페이지들은 이곳에:

http://americanart.textcube.com/category/Andrew%20Wyeth

 

관련자료:

First Impressions: Andrew Wyeth, by Richard Meryman (1991)

Andrew Wyeth: Autobiography, Introduced by Thomas Hoving (1995)

 

앤드루 와이어드가 즐겨 사용했던 템페라화, 드라이터치 기법 페이지가 이어지겠습니다.

 

 

 

 

2009년 9월 28일 월요일

남자가 거세되면 세상에 평화가 올까?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발견한 두점의 그림이 웃기고, 유쾌하고, 흥미롭기도 했다.  한편은 한마디로 'XX를 잘라버리자'는 메시지가 화면게 가득하고, 또 한편에는 아예 남자가 씨가 말랐다. 여인천하를 그렸다.  두 작품은 같은 층 같은 공간에, 그러나 살짝 비껴간 곳에 전시되고 있었다.  흥미롭게 '구경'을 하긴 했는데, 나로서는 XX를 잘라버린 세상, 혹은 여인천하에서 산다는 것은 영 재미없는 일 일 것이다.  조화롭게 사는것이 좋겠지.  내가 상상해봤는데, 내가 여인천하에서 살아야 한다면, 난 차라리 죽을래. 지겨워서. (하하하.)

 

 

(1)  Paul McCarthy 의 Penis Hat (2001)

 

남성성기와 코를 폭력의 도구인 대포에 비유하여 잔뜩 '낙서'를 해 놓았다. 대략, 남성성과 폭력을 연결시키려는 의도 같다.  일단 주인공도 해적이고, 해적이 쓰고 있는 모자도 남성성기 모양이고.  화면가득 그려져있는 남성성기 그림은 변두리 공중 '변소'에 가면 많이 보이는 스타일이다.  Cut off Penis, Cut Penis (잘라버려)라는 원색적인 문구가 원색적 그림과 아주 잘 어울린다. 

 

이 작품 앞에는 사람들이 늘 일정수 이상이 모여있다. 대개는 '유쾌하다'는 표정으로 슬금슬금 웃고 지나간다. 뭐 말하자면, 대개들 감히 교양인으로서 이런 낙서조차 해볼 엄두도 못내고 살아왔을 터인데, 세계미술의 심장부라고 미국이 주장하는 맨하탄 중심의 현대미술관에서 이런 '원색적' 낙서를 보게 될 줄이야.  확 깨면서, 내심 즐거워지는 것이다. (물론 우리 엄니가 보시면, 아이구 망측스러워라. 저것은 그림도 아니다 - 라고 평가하실 가능성이 크지만...)

 

 

(사진 클릭하시면 그림이 '커'집니다. :-)  )

 

 

 

 

 

 

 

(2) Nicole Eisenman 의 Rading Brook Farm (2004)

 

어느 농장의 풍경인데, 사람 숫자를 일일이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혹시 심심할때  몇명이 나왔나 세어봐도 좋을것이다) 죄다 '여성동무'들 인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중에는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도 있다.  남자는 씨가 마른것 같은데 애는 어디서 만들어왔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동네 여성동지들은 모든 일을 스스로 알아서 하면서 즐겁고 건강하게 사는 것 처럼 보인다.  얼핏 평화로운 낙원처럼 보이는데 -  나는 이동네에서 살 생각은 없다. 나 여자 중학교, 여자 고등학교, 여자대학교, 장장 십년을 여자학교에서 '썩었는데'  그래서 여자들만의 세상따위 지긋지긋하다.  하하하. 난 여자들만의 세상이 싫어요 (이승복 어린이의 -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의 그 간절하고 애절하고 비장한 음성으로 나도 외치고 싶다.)

 

이 그림의 작가는 여성일 것이고, 여성들이 상징하는 '평화,' '보살핌' 뭐 이런 것을 화면 가득 담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화면의 노리끼리한 배경만큼이나 나른하고 졸립고 지루한 분위기를 '내게' 선사한다.  내게 이런 풍경은 그야말로 '지옥'과 다를것이 없다. 하하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나는 여자들만의 세상이 싫어요~ (이 연사! 강력히! 강력히! 촉구하는 바이옵나이다!  -- 반공 어린이 웅변조로~  )

 

 

 

 

 * 단, 비인간적인 성범죄자들, 특히 자기 딸이나 의붓딸이나, 기타 힘없는 가족,  길가는 어린 아이들 상대로 - 도무지 영문도 모르는채 당하는, 자기보호도 불가능한 사람을 상대로 X대가리를 함부로 놀리는 반사회적 동물들은 위의 그림에 나오는대로 그냥 잘라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르는것 이외에 대안이 없다. 대안이. 한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하고 싶으면 우선 이런 범죄피해자부터 보호를 해줘야 하는거다.  이런 범죄 피해자들이 보호도 못받고, 성범죄자들이 인권보호를 받는 나라는 아무리 잘살아도 선진국대열에는 들수가 없는거다.  김구선생이 가꾸고 싶었던 아름다운 나라는 이런 나라가 아니었던거다.

 

 

 

 

 

 

 

미국미술사: 시대별 주제 정리

그동안 틈틈이 미국사와 미국미술의 발전사를 살폈는데, 이제 어떤 전체적인 '지도'가 필요한 시기인 듯 하다.  중구난방으로 기분 내키는대로 쓰고 있긴 하지만, 이제 골격은 잡아놓고 부분부분 그려나가는 식으로 정리를 하는것이 좋을 것이다. 이 문제로 고민을 좀 하고 있었는데, 뉴왁 미술관 미국미술 관련 페이지에서 대략의 뼈대를 잡을수 있었다.

 

뉴왁 미술관에 아직 가보지 못했지만, 이 미술관은 분명히 시대적으로 어떤 개성을 정해놓고 전시품들을 진열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국립미술관도, 스미소니안 미국미술 박물관도 시대적인 개념을 정하여 소장품들을 전시하긴 했는데, 뉴왁이 이를 분명히 밝혀서 '안내'를 잘 하고 있다.  내가 읽고 있는 미국미술 안내서들이 다양한 시도를 하긴 했는데 막상 차례를 살펴봐도 그렇고 '장황하다'는 인상을 주면서도 확실한 '지도'를 그려내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미술의 흐름이란것이 자대고 줄긋듯 명확히 떨어져주는 개념이 아니라서 그럴 것이다.  그런데, 이러다보니 내 머릿속에도 장황한 개념만 열거될 뿐, 시대별로 똑 떨어지게 정리가 안된다.

 

아래의 연표를 바탕으로, 이를 응용하며 커다란 전지에 시대별 지도를 그려놓고, 해당 시기에 나를 '매혹'하는 작가들을 포스트잇으로 붙여나가는 식으로, 나만의 미국미술사를 완성시키면 좋을 듯 하다. (누군지 정리 한번 잘 해 놓았다.)  왜 미술전문가들은 이런 시도를 안하거나 못하는걸까? 너무 아는게 많아서?  그런데 아는게 많아도 주워담지 못하면 그게 또 마냥 허무한거라... 왜 방대한 지식을 담은 책들이 이런 간단한 표 하나를 제시하지도 못하는가?  나는, 일단 누군가가 잘 정리해 놓은 표에 입각해서, 내식으로 응용하여 새로운 틀을 만들어가지고, 그 틀안에 작가와 작품을 집어 넣는 식으로 모자이크 하여 미국미술사를 완성시키겠다.

 

 

http://www.newarkmuseum.org/PicturingAmerica.html

1730 to 1900

The American Colonies, 1730 -1776
The Young Republic, 1790 -1860
Romantic Portraits for Eastern Cities, 1790-1860
Country Portraits, 1790 -1860
The Rise of Landscape Painting, 1825-1880
The Civil War and Its Aftermath, 1860-1900
The Lure of Europe, 1850-1900
The Gilded Age, 1875-1900


1900 to Present

Into the Modern Era, 1900-40
Far From the Modern World, 1900-25
A Modern Art For a Modern World, 1910-30
Faith, Fear and Failure in The Machine Age, 1920-40
In the Wake of the War, 1945-65
Surrealism and Abstract Expressionism, 1930-65
Challenging Conformity, 1955-65
Art Since 1965

 

이 표를 바탕으로 내 표를 만들어내면 된다.  이제 정리가 되었으니까, 두서없는 분류 시스템도 개편을 하고. 정진.

 

 

2009년 9월 27일 일요일

Ben Shahn, Liberation (1945) 벤 샨의 '해방'

(그림 클릭하면 커집니다)

 

이 작품은, 미국의 사회적 사실주의 화가 (Social Realist) 로 알려진 벤 샨 (Ben Shahn)의 '해방 (Liberation)' 이라는 구아시 화 이다.  뉴욕 맨하탄의 '현대 미술과 (Museum of Modern Art)' 소장품으로 마침 운좋게 관람이 가능했다.  미술관에 제공한, 작품 옆의 작은 '이름표'에 나온 정보에 의하면, 이 '해방'이라는 작품은 1945년에 그려진 것이다. 그러면, 이 작품을 읽는/보는 우리는 1945년이라는 해와, '해방'이라는 제목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 보게 된다.  1945년은 어떤 해인가?  한국인들에게는 그야말로 '광복의 해'가 된다. 1945년이 단지 한국인들에게만 광복의 해는 아니었다. 2차 대전이 1945년에 끝났을때, 지구상의 여기저기에서 식민지로 신음하던 약소국가들이 '조선'처럼 광복을 맞이하기도 했고, 그리고 전쟁이 끝났다는 상황 자체가 전쟁의 공포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기도 한다.  세계는 '전쟁과 죽음의 공포'로부터 일단 해방을 맞이 한 것이다.

 

그림을 살펴보자. 전쟁의 폐허를 여실히 드러내는 폭격당한 건물이 있고, 그리고 광장에 '뺑뺑이' 기둥이 하나 서있다. 그 뺑뺑이에 아이들 셋이 매달려 있다. 아이들이 뺑뺑이를 타고 있는 배경은 황량하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가 쌓여있고, 바람이 쌩쌩 불고 있는 듯한 붓의 터치가 느껴진다. 아이들은 창백해 보인다. 명랑하게 웃고 있는 표정도 아니다.

 

이 그림은 우울한가?

절망적인가?

희망적인가?

어떠한가?

 

작가가 어떤 의도로 그림을 그렸건, 해석은 보는 사람의 자유이다.  우리도 작가의 의도로부터 '해방'될 권리는 있으니까.

 

요즘도 뺑뺑이가 있을까?  내가 어릴때, 당시에는 동네에 놀이터라는 것이 아예 없었다. 그네나 미끄럼과 같은 '놀이시설'은 오직 학교 운동장에나 가야 구경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지금은 아파트마다, 골목마다 놀이터 시설이 설치되어 있지만, 내가 어릴때는 시골에서는 아무데서나 놀면 되었고, 도시에서는 골목에서 놀았다. 학교에 가면 알량하게 서 있는 미끄럼, 그네에는 늘 아이들이 매달려 있어서 그네를 한번 타보기도 쉽지 않았다. 때로, 그네는 수리를 구실로 그냥 묶어 놓기도 했었다. 그리고 뺑뺑이가 있었다.  기둥에 최고리 줄이 몇가닥 매달려 있고, 그 쇠고리 줄을 잡고서 한 방향으로 내쳐 달리다가 발을 공중에 띄우면 원심력에 의해서 몸이 바깥으로, 허공으로 쌩 떳다. 그 상태에서 우리는 하늘을 날았다.  아! 신나는 뺑뺑이였다!  지금도 학교 운동장에 그 뺑뺑이가 있을까?

 

화집에서 이 그림을 처음 발견 했을때, 나는 '뺑뺑이'를 떠올리며 웃고 있었다.  우리들은 전국민이 모두 가난했고, 그래서 가난이 낯설지  않았다. 나는 무수한 가난뱅이 아이들중의 하나였을 뿐.  우리들은 가난한 놀이 시설에도 기죽지 않았다. 우리는 뺑뺑이를 타면서 하늘을 나는 듯한 기쁨을 맛봤다. 

 

그림속의 아이들이 절망적인가?

우울한가?

 

아, 나는 이 풍경이 전혀 낯설지 않다. 그리고 이런 풍경에서 나는 불행하지 않았다. 내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는 대개 우등생 표시가 붙었지만, 건강상황에는 항상 '영양실조, 빈혈' 이라는 표시가 따라다녔고, '영양실조로 보이니 건강을 신경써주십사' 하는 선생님의 친절한 통신문이 덧붙기도 했었다.  나는 영양실조로 얼굴이 누렇게 뜨고, 아파보이는 빈민가의 아이였으나, 나는 무럭무럭 자랐고, 새나라의 아이답게 꿈을 꾸며 살지 않았던가?

 

나는 이 그림을 보면 행복하다. 폐허가 된, 다 쓰러져가는 건물에 보이는 알록달록한 무늬는, 아마도 드러나는 벽지이리라. 각기 다른 벽지를 붙이고, 각기 다른 꿈을 갖고 살던 사람들이 이곳을 지키다 사라졌고,  그러나 다시 이곳에서 살아가기 위해 나타날 것이다.  알록달록한 벽은, 어찌보면, 내가 처음 본 서울의 골목골목의 풍경 같기도 하다. 볕이 놓은 날이면, 무허가 골목의 담벼락이나 빨래줄에 내 걸리던 알록달록한 나이롱 이불들.  그 나이롱 이불들은 햇살 아래서 뽀송뽀송 말라갔고, 그날밤 그 집 식구들은 신선한 햇살 냄새가 나는 나이롱 이불을 깔고 덮고 잠이 들었을 것이다.

 

이 그림은 나를 행복하게 한다. 

 

 

 

 

 

 

 

 

 

가난은 우리를 파괴하지 못했다. 전쟁도 인간을 파괴하지는 못한다. 폭력은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수는 있으나 인간을 파괴하지는 못한다.

 

redfox.

 

 

Gouache Painting, 구아슈 화

 

Art Dictionary 분류는, 미술책이나 작품을 보다가 낯 선 미술 기법이나 용어가 나올때 자료를 찾아보고 정리해놓는 메모장이다.

 

 

 

Gouache (구아슈) 라는 미술 기법이 있다.  웹에 있는 각종 자료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불투명 수채화의 종류]
① 템페라 화 : 유화가 발명되기 이전에 많이 쓰인 화법으로 안료에 달걀노른자를 섞어서 그린 그림이다.
② 구아슈 화 : 안료에 물을 타서 아라비아고무를 풀어 그린 그림이다.
③ 프레스코 화 : 벽화를 그릴 때 새로 석회를 바르고 채 마르기 전에 수성 안료, 즉 수채 물감으로 그리는 그림이다. 서양의 중세 미술에서 많이 볼 수 있다.
④ 아크릴 화 : 수채 물감과 유채 물감의 두 가지 특성을 함께 지니고 있으며, 수채화처럼 물을 사용하여 그린다. 이것은 합성수지를 사용하여 만든 새로운 재료로, 마르는 시간이 빠르고 접착성이 강하여 종이, 천, 나무판 등에 사용할 수 있다. 마른 후의 질감은 유화와 같은 효과가 있다.

 

http://homework.kids.daum.net/contents/contents_ency_view.php?contentsNo=2070801m2932953&catCodeId=11529  <-- 이곳에서 자료 카피하여 옴.

 

 

Gouache 구아슈 화는 간단히 말하자면 '불투명 수채화'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데, 투명 수채화와 다른 점은, 일단 불투명하고, 안료의 농도가 투명수채화에 비해서 진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회화 기법을 즐겨 쓴 사람들중에서 유명한 사람들로

 

  • Albrecht Dürer 1471-1528  뒤러
  • Peter Paul Rubens 1577-1640  루벤스
  • Sir Anthony Van Dyck 1599-1641  반 다이크
  • Edgar Degas 1834-1917  드가
  • Egon Schiele 1890-1918  에공 쉴레
  • http://www.learn-gouache-painting.com/Gouache_History.html

     

    등이 열거 되고 있다. 내가 이 구아슈 기법에 궁금증이 생긴 이유는,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발견한 Ben Shahn 의 Liberation (1945) 작품에 구아슈 기법이라고 씌어 있었기 때문이다.  위의 그림 설명은 벤 샨 페이지에서 진행하겠다. (참 아름다운 그림이라서, 이것 찾아내고 뛸 듯이 기뻤었다).

     

     

     

     

     

    MoMa Highlights: 현대미술관 소장, 대표적인 350점 소개

    Moma Highlights

     

     

    뉴욕 현대미술관 방문기념으로 약 20달러 주고 산 핸드북. 책 내용은 좋다. 문제는 '아마존'검색해보니까 15달러면 되는건데 (물론 배송료 5달러 포함하면 마찬가지가 되지만, 25달러 이상 구매시 무료 배달해주니까, 여러권 묶어서 살때 사면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데...)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 현장에서 사면 조금 비싸도, 그래도 현장에서 사는 '손맛'이란것이 있어서, 몇달러 더 주고 그냥 사게된다. 견물생심이라서. 하하. 

     

     

    뉴욕 현대 미술관 Museum of Modern Art (MoMA) 소풍

    미술관 소개 페이지를 만들려다가, 그것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오늘은 그냥 스케치만.

     

     

     

     

    뉴욕가기

     

    버지니아 우리집 근처 알링턴에 Vamoose 라는 버스회사 정거장이 있는데 이곳에서 뉴욕 맨해턴 중심의 펜스테이션까지 직행하는 버스가 선다. 지난해에는 편도 20달러, 왕복 40달러였는데, 올해는 편도 30달러, 왕복 60 달러로 인상되었다.  온가족 네다섯명이 뉴욕 소풍을 간다면 승용차로 가도 무관하겠으나, 한두사람이 뉴욕에 갈때는 승용차로 가나 직행버스로 가나 차비가 차이가 안난다.

     

    개인의 예로 들어보면, 승용차로 뉴욕에 다녀올 경우

     1. 왕복 꼬박 9-10 시간 운전을 해야 하고

     2. 개솔린 값이 못 잡아도 50달러는 들고

     3. 톨게이트 비용 왕복 50달러 정도 든다 (지난 겨울에 톨비 계산해봤다.)

     4. 맨해턴에서 어딘가에 차를 주차할 경우 주차비는 계산도 안나온다. 주차 시킬곳 찾기도 어렵고 대략 30달러 잡자

     

    이러면 차 끌고 다녀오는 실비만 130달러 잡아야 한다.

     

    버스로 다녀올 경우, 직행 버스 왕복 60달러, 시내에서 이동하는 것 써브웨이도 있지만 택시로 이동한대도 끽해야 30달러.  차비 100달러로 홀가분하게 다녀올수 있다. 단, 집에서 버스 정거장까지 가고, 집으로 오는 문제는 가족중에 누군가가 수고를 해줘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다. 이경우 그냥 택시로 이동해도 그만이다.  교통비가 비슷하게 든다고 해도, 왕복 9시간 운전을 내가 안하고 버스기사님이 해주시므로 버스에서 그냥 잠이나 자도 되므로 피로가 덜하다. 그래서 나는 뉴욕 갈때 버스 타는 쪽을 선호한다.

     

    아침에 사고:

     

    아침에 밥 좀 챙기고, 아침 여섯시 반에 예매된 버스 안놓치려고 서두르다가, 카메라 가방이 열린채 가방을 집어 들어가지고, 카메라가 쏟아져 내렸다. 결국 카메라 뚜껑속의 필터가 충격으로 깨졌다. 암담했지만, 그냥 깨진 카메라 들고 돌아다니며 사진 찍었다. 뭐 카메라는 멀쩡하길래.

     

    뉴욕 도착:

     

    아침 여섯시반에 알링턴에서 출발한 버스는 열한시 반에 맨해턴 중심 펜스테이션에 도착했다. 그냥 택시 잡아타고 현대미술관으로 갔는데 대략 7달러쯤 나오길래 10달러 주고 거스름돈 팁으로 줬다.  현대미술관 앞에 도착한후에, 미술관 앞 도시 공원에 앉아 밥을 먹었다. 일회용 도시락에 밥 담고, 치즈 두장 얹은 것. 빵사먹기 싫고, 그냥 밥이 편해서 이렇게 밥 간단히 먹고 물 마시면 속이 편하다.

     

    미술관 구경:

     

    대략 열두시부터 오후 네시까지 한가롭게 미술관을 돌았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하도 방대해서 하루종일 헐레벌떡 뛰어 돌아다녀도 목이 타지만, 현대미술관은 이보다 작으므로 조금 한가해진다. 게다가 나는 미국미술을 중점적으로 보기로 했으므로, 포인트가 분명했지. (하지만 결국 유럽미술이 발목을 끌긴 했다). 전체적으로 편안하고 한가로운 관람이었다.  기대하지도 못했던 내가 좋아하는 작품들도 만나서 횡재한 기분. 특히 Ben Shahn 의 Liberation 이라는 작품이 복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어서, 친한 친구 만난듯 반가웠었다.  곧 벤 샨 페이지 열어야지.

     

    미술관 기념품:

     

    미술관 화집 19달러짜리 한권 사고, 못생긴 괴물 인형을 하나 샀다.

     

     

    브로드웨이 토요 벼룩시장:

     

    오후 네시반에 브로드웨이의 토요 벼룩시장 열린곳에서 친구를 만났다. 시장구경은 항상 유쾌하다. 아무것도 안 샀지만.

     

    이스트 빌리지에서 저녁:

     

    뉴욕대가 있는 이스티 빌리지는 대학가 답게 식당이 많고 음식값이 비교적 저렴한 편이다. 이곳의 유명하다는 일식집에서 우동정식으로 저녁을 먹고, 근처에 터줏대감들만 알아서 찾아간다는 케이크 전문점에서 케이크와 커피를 마시며 브레히트와 사회주의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대하여. 뉴욕의 예술인들에 대하여 친구와 잠시 즐거운 대화. 아 뉴욕에서 3년만 살아보고 싶다.

     

    귀가

     

    오후 일곱시, 펜스테이션에서 직행버스를 타고 귀가. 오후 열한시 반 알링턴 도착. 집에 오니 자정.  집에 오자마자 웹 검색하여 내 카메라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정보를 찾아냈다. 필터만 새로 사서 끼우면 되는 문제인것 같았다. 불행중 다행. 확김에 80달러짜리 고급 필터 주문해 놓고, 앞으로 카메라를 조심해서 다루겠다고 반성.

     

     

    노란 바지 입은 사나이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