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 7일 월요일

The Phillips Collection 워싱턴 디씨, 필립스 콜렉션

The Phillips Collection 필립스 콜렉션

 

며칠 전에 워싱턴을 방문한 친구에게 어디를 가 보고 싶은가?’ 물었더니 필립스 콜렉션이라고 대답한다. 워싱턴 디씨에는 국립 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Art)도 있고 스미소니안 국립 미국 미술관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도 있고 허시혼 미술관등 국립미술관들이 수두룩 한데 이 친구는 그 큰 미술관들을 젖히고 필립스 콜렉션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 필립스 콜렉션이 아마도 암암리에 미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모양이라고 짐작하게 되었다. 그래서 내 친구에게 일단 국립 미술관 급의 큼지막한 것들을 보고, 그냥 양념 삼아서, 혹시 구경하다 시간 여유가 되면 필립스 콜렉션에 가보라고 조언 해 주었다. 큼지막한 미술관에 가면 세계적인 명작들이 뜨르르 하게 걸려있어 온 종일 봐도 다 못 볼 지경인데, 개인 소장품을 전시한 필립스 콜렉션에서 귀한 시간을 보내 버리면 어렵게 온 길이 좀 아깝지 않겠는가?

 

 

 

 

필립스 콜렉션은, 워싱턴 디씨에 위치한 개인 소장품 미술관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러니까 국립 미술관 급에 비하면 아주 작은 미술관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필립스 콜렉션의 규모 자체가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은 아니다.

 

 

 

필립스 콜렉션은 미국의 은행, 철강, 유리 산업의 재벌로 알려진 Phillips 집안이 일군 것이다.  Duncan Clinch Phillips (1838 – 1917)씨가 사망했을 때, 그의 아들인 Duncan Phillips (1886–1966)씨가 어머니와 함께 필립스 기념 갤러리 (The Phillips Memorial Gallery)를 열었고, 1921Marjorie Acker 와 결혼한 그는 아내 마 조리와 함께 활발하게 당대의 유럽, 미국의 미술품들을 수집한다. 화가였던 마조리의 작품은 지금도 필립스 콜렉션에 가면 볼 수 있다.

 

 

 

 

 

필립스 콜렉션이 있는 곳은 듀폰 서클 (Dupont Circle) 근방인데, 듀폰 서클을 중심으로 매사추세츠 애비뉴 (Massachusettes Ave.)가 이어져있고, 그 매사추세츠 애비뉴의 양쪽에 각국의 대사관들이 줄지어 서 있어서, 이곳을 대사관거리 (Embassy Row)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 대사관, 한국 영사관, 한국 홍보관 역시 필립스 콜렉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 해 있다. 매사추세츠 애비뉴를 걷다 보면 길가에 간디의 동상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그 곁에 붉은 벽의 필립스 콜렉션이 서 있다.

 

 

필립스 콜렉션은 방대한 유럽, 미국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하다는 화가들의 작품이 최소한 한두 점씩은 모두 걸려있다. 가령 피카소, 마티스, 반 고흐, 르누아르, 세잔, 보나르, 뷔야르, 잭슨 폴락, 엘 그레코, 조지아 오키프…… 일일이 열거하는 것 보다 홈페이지를 소개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http://www.phillipscollection.org/   Jacob Lawrence 의 작품들이 걸려 있는 곳도 이곳이다. http://americanart.textcube.com/32

 

 

 

 

필립스 콜렉션의 특기 할 만한 것은 개인 소장품으로 이루어진 미술관이라는 것인데 미술관 역시 필립스 일가가 살던 집을 개조하거나 증축, 확장한 것이다. 그래서 전시공간에 일반 주택의 거실같이 편안한 소파가 놓여있거나 혹은 이들이 살던 당시에 설치 되었을 벽난로가 그대로 보존 되어 있기도 하다. 대중에게 공개되는 갤러리나 역사적 주택에 가보면 대개 집기들을 전시해놓고, “만지지 마시오,” 라는 표시를 붙이거나, 전시된 소파에 앉지 말라는 표시를 해 놓는데 이 곳 필립스 콜렉션에서는 전시장의 고풍스런 소파에 편히 앉아 쉬라고 표시를 해 놓는다.  우리는 잠시, 미국의 어느 재벌 집에 초대 받은 사람처럼 고풍스런 소파에 앉아 미술품을 보면서 쉴 수도 있는 것이니, 이런 점이 정답고 친절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필립스 콜렉션은 칸칸이 방으로 이루어진 다수의 전시장을 갖고 있는데, 그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로스코(Rothko) Room 이라는 곳이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필립스 콜렉션의 인상을 말할 때, 그 로스코의 방이 인상적이었다는 얘기를 한다. 로스코는 2차 대전 때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미술가인데, 그의 작품의 특징은 문짝이나 문짝보다 더 큰 캔버스를 몇 가지 색으로 추상적으로 처리를 하는 것이다. 필립스 일가가 로스코의 작품을 사들여 방 하나에 전시해 놓았을 때, 로스코가 이를 흥미 있게 보았다고 한다. 뉴욕에서 활동하던 로스코가 워싱턴을 방문하여 직접 이 방을 구경 한 후에 방 가운데에 작은 의자를 하나 놓아두면 좋겠다고 제안하여 그의 제안대로 전시장 가운데에 나무 벤치가 하나 놓였다.  조명이 낮아 고요한 느낌을 주는, 사방에 로스코의 대작이 걸려있는 이 방의 가운데 벤치에 앉아 어느 한쪽 벽을 바라보고 있으면 기분이 차분해지고 편안해 진다.  사람들은 취향에 따라서 각기 다른 면을 바라 볼 텐데, 나는 그 네 장의 그림 중에서 짙은 녹색 주조의 작품 (위 사진에서 오른편의 작품)을 볼 때 가장 마음이 고요해진다. 이곳은 어찌 보면, 신전, 성스러운 장소, 명상실 같이 여겨지기도 한다.

 

 

필립스 콜렉션에서는 정기적으로 지역 청소년들을 위한 프로젝트도 진행한다. 워싱턴 인근 빈민가 학교의 어린이들을 초대하여 미술 작업을 하도록 한다거나 혹은 지역 학교와 연대하여 학생들의 공동 작업을 이끌기도 한다. 가끔 필립스 콜렉션에 들를 때, 나는 이곳, 청소년을 위한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전시장을 찾아본다. 그곳에서 어린이들의 시각으로 보이는 세상, 어린이들의 희망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필립스 콜렉션은 연중, 상설 전시와 특별 전시가 진행되는데, 상설전시장은 평일에 무료로 개방된다. 주말 (토요일, 일요일)에는 입장료를 내고 입장한다. 평일에 상설전시장과 특별전시장을 함께 둘러보려면 입장료를 내야 하지만, 상설전시관만 볼 계획이라면 입장료 없이 그냥 들어가면 된다. 나는 필립스 콜렉션에 종종 들르는 편이므로 따로 입장표 안 사고 상설전시장을 둘러 볼 때도 있다. 한구석에 기념품 샵이 있어서 기념품이나 미술 관련 책을 구경할 수도 있고, 카페에서 음료나 간단한 음식을 사 먹으며 쉴 수도 있다.

 

필립스 콜렉션은 방대한 소장품의 양에 비해서 전시 공간이 협소한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매주마다 벽의 전시물이 바뀌기도 한다. 상설 전시관의 전시물들이 갈 때마다 위치를 조금씩 바꾸거나 혹은 새로운 작품들이 나와 있거나 하는 것이다.  이런 변화를 발견하는 것도 이곳을 찾는 기쁨중의 한가지라고 할 만하다.

 

 

아, 위의 작품은 상설 전시관에 걸린 호레이스 피핀 (Horace Pippin)의 작품이다. 언젠가 미국 미술가 피핀에 관한 글을 쓸때, 이 그림과 화가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할 생각이다.

 

 

워싱턴이 자랑하는 개인 미술관으로 필립스 콜렉션에 쌍벽을 이루는 것이 코코란 미술관 (Corcoran Gallery of Art)이다. 다음에 코코란 미술관을 소개 하겠다.

Joshua Johnson: 대갈장군 아이들

 

Joshua Johnson (artist)
American, born c. 1763, active 1796 - 1824
The Westwood Children, c. 1807
oil on canvas
overall: 104.5 x 117 cm (41 1/8 x 46 1/16 in.)
Gift of Edgar William and Bernice Chrysler Garbisch
1959.11.1

http://www.nga.gov/fcgi-bin/tinfo_f?object=45955

 

 

 

대갈장군 아이들: Joshua Johnson (c. 1763-1832)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그림을 보았는데요, 이상하게 아이들 머리가 커요. 왜 그런가요?” 워싱턴 디씨를 방문하여 국립 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Art)의 미국 미술을 둘러본 친구가 물었다. “누구의 그림인가요?” 내가 물으니 Joshua Johnson 이라고 가르쳐준다.

 

Joshua Johnsonhttp://en.wikipedia.org/wiki/Joshua_Johnson 미국 흑인 중 최초로 그림을 그려서밥벌이를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조슈아의 아버지는 백인이었고, 어머니는 다른 사람의 노예였다. 따라서 조슈아는 노예로 태어났다. 후에 조슈아의 아버지가 조슈아를 사들인 후 노예로부터 해방시켜주었다. 독학으로 그림을 그린 조슈아는 메릴랜드주의 볼티모어 지방에 살고 있던 부자들이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을 하면 이를 그려주었다. 조슈아는 만 20세가 될 때까지 노예로 살았고, 전문적인 그림 공부를 할 기회도 없었다. 그래서 Joshua Johnson 에게는 풍속화가 (folk artist)라는 이름표가 붙는다. 

 

그가 그린 초상화의 주인공들은 역사적으로 대단히 유명한 사람들도 아니고, 그저 1800년대 초반에 볼티모어에서 밥술이나 뜨던 사람들 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새삼스럽게 초상화나 가족화의 주인공들이 누구인지는 큰 관심거리가 못 된다.  그의 독특한 화풍이 오히려 눈에 띄는데, 내 친구의 질문처럼 왜 아이들의 머리가 기이하게 큰가?” “왜 아이들 얼굴이 어른 얼굴하고 비슷한가?” 이런 호기심을 불러 일으킬 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조슈아 존슨이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받지 못하여, 그냥 자기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수준에 머물렀고,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린 아이의 얼굴을 어떻게 그리면 어린아이처럼 보일지 잘 몰랐을 수도 있다.  대충 우리의 눈 짐작으로 아이들은 몸집을 보면 머리와 몸통의 비례가 어른과는 차이가 있다. 어른에 비해서 어린이는 머리통이 몸집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큰 편이다.  그러므로 보이는 대로 머리는 크게 몸집은 작게 그린 것이다.  그러면 얼굴은 왜 천사 같은 동안 (童顔)’이 아니고 겉늙은 어른 같은 표정인가? 조슈아 존슨은 어린이의 얼굴의 특징을 제대로 묘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어른의 얼굴을 아이의 얼굴에 대입 시켰다.

 

미국 건국 초기, 1700년대 후반에서 1800년대 초반에 보이는 미국인들의 초상화를 보면, 작가의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이나 Joshua Johnson과 같이 전문적인 미술 수업을 받지 않은 작가들의 초상화를 보면, 대개 사람들이 모두 닮은꼴인 것을 볼 수 있다. 일례로, 애나 어른이나 남자나 여자나 의 모양이 다들 비슷하다. 왜냐하면, 그림 그리는 사람이 그릴 줄 아는 코의 모양이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에 여자를 그릴 때나, 남자를 그릴 때나, 애나, 어른이나 그냥 그 코를 갖다 붙여주는 것이다. 아이들의 얼굴도 어른 줄여 놓은 듯겉늙은 표정이 많은데, 어른 얼굴 그리는 솜씨로 아이들 얼굴도 그려 넣었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 초기의 이런 작품들을 보노라면, “미국 미술 별 것 아니네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 나는 이런 서툰 그림들에 애정이 가는 편인데, 이 별것도 아니고 서툰 그림들은 유럽 화단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고, 이런 원시적인 화풍에서 새로운 무엇이 자라날수 있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1700년 말 혹은 1800년 초, 미국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신생국가였다. 미국의 미술도 이제 막 눈을 뜨고 그 첫걸음을 내디디고 있었던 것이다. 부유한 사람들은 문화도 역사도 척박한 이 신생의 땅에 애정을 보내기보다는 유럽을 동경하고 유럽으로 공부를 하러 떠났다. 유럽에 갈 수 없었던 사람들은 미국땅에서 독자적으로 서툰 걸음마를 계속 해 나갔다. 그리고 나는 이런 미술가들에 관심이 많다.

 

 

 Portrait of Adelia Ellender

ca. 1803-1805 Joshua Johnson oil on canvas 26 1/4 x 21 1/8 in. (66.7 x 53.7 cm.)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Gift of Mr. and Mrs. Norman Robbins 1983.95.55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3rd Floor, Luce Foundation Center

 

 

조쥬아 존슨의 그림속의 아이들이 대갈장군인 것은 그의 눈에 아이들이 그렇게 보였기 때문이다.  아이들 얼굴이 겉늙어 보이는 이유는 조슈아가 아이들 얼굴의 특징을 잘 살리지 못하고, 그냥 어른 얼굴 그리는 솜씨로 아이들 얼굴도 그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의 그림의 가치가 일천하다고는 말 할 수 없다. 민화에는 민화만의 멋과 가치가 있는 것이니까. 예를 들어서 한국의 민화에 호랑이가 많이 등장하는데 민화의 호랑이와 김홍도의 호랑이 그림을 비교하면 김홍도의 호랑이 그림이 훨씬 사실적이고 힘이 넘치지만, 김홍도와 민화의 호랑이를 동일한 선상에서, 동일한 점수표를 가지고 비교 평가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September 7, 2009

RedFox

 

 

위에 소개했던 소녀의 초상화를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 3층 루스센터에서 발견.  그림의 보관소와 같은 이곳에는 가격을 매길수도 없는 걸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분홍 드레스를 입은 소녀와 잔

 

 

 

Little Girl in Pink with Goblet (분홍 드레스를 입은 소녀와 잔) 1805

Oil on Canvas

2009년 10월 31일 디트로이트 미술관 (Detroit Institute of Art Museum) 에서 촬영

 

 

 

그외에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발견한 조슈아 존슨의  초상화 작품들

 

 

 

 

Portrait of Sea Captain John Murphy (선장 존 머피의 초상화) c. 1810

Oil on Canvas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촬영

 

 

 

 

Portrait of Mrs. Barbara Baker Murphy (Wife of Sea Captain) c. 1810

Oil on Canvas

2009년 12월 29일 스미소니안 미국미술 박물관에서 촬영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발견한 조슈아 존슨의 작품

 

 

Portrait of Edward Aisquith  (에드워드 애스퀴쓰의 초상 ) c. 1810

Oil on Canvas

2009년 9월 19일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촬영

 

Smithsonian Q and A: American Art and Artists 책에 따르면 조슈아 존슨의 작품중 현재 남겨진 것은 19점이라고 한다.  열아홉점 남아있는 것중에 내가 본 것들이 조슈아 존슨 페이지들에 담긴 것들이다.

 

2010년 1월 3일 내용 보충. redfox

 

http://americanart.textcube.com/195  : 페이지 연결.

 

 

Art Factory, Alexandria Harbor, Virginia

Old Alexandria 라고도 알려져있는 포토맥 강변의 도시는 미국 건국의 역사적 유적지이지만,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고풍스런 거리와 상점들, 하버의 유람선과 선착장 앞에 세워진 Art Factory 때문 일 것이다.  Art Factory 는 지역 예술가들의 스튜디오 건물이다. 지역의 예술가들이 아파트같이 칸칸이 작업실을 열어놓고 직접 작품을 제작, 전시, 판매까지 하는데, 이곳을 기웃거리면서 화가들이 작업하는 것을 구경하거나 전시된 작품을 보는 일이 재미있다.

 

Alexandria Harbor: 포토맥 강변의 알렉산드리아 하버.

 

 

Art Factory 전시작품들.

 

 

 

공예가의 작업실

 

 

이웃 스튜디오에서 놀러온 친구와 이야기를 조롱조롱 나누는 화가

 

 

 

전망 좋은 방: 포토맥 강이 내다보이는 스튜디오

 

 

 

Art Factory 건물 앞에서 '물 잔' 연주를 하는 악사.  각기 다른 크기의 물잔에 물을 채우고 젖은 손으로 물잔을 만져주면 투명한 소리가 나는데 이 소리를 이용하여 연주를 한다.  집에서도 실험 해 볼수 있다.  유리잔에 물을 다양한 높낮이로 채우고 손끝을 물에 적혀서 물잔 주위를 만져주면 소리가 난다.

 

 

 

Old Alexandria King Street.

Jacob Lawrence 2: Migration Series, Phillips Collection

http://americanart.textcube.com/30  에서 계속

2009s년 9월 5일 토요일.  Phillips Collection 에 들러서 제이콥 로렌스의 '남부 흑인 이주 역사 시리즈 (Migration Series) 30장과 해당 그림 설명 (caption) 을 사진기에 담아 왔다.  홀수 작품은 Phillips Collection 에서, 짝수 작품은 Museum of Modern Art (MoMA) 에서 소장중이므로 홀수 1번에서 59번까지 작품들이다.

 

 

1. During World War I, there was a great migration north by southern African Americans.

1. 제 1차 세계 대전 기간동안, 미국 남부의 흑인들이 북부로 대이동을 했다.

 

한국판: 한국전이 끝나고 1960년대 '조국 근대화'에 발맞춰 한국의 영남, 호남, 기호 지방의 선량한 사람들이 잘 살아보기 위해 서울로 서울로 올라갑니다. 혹자는 서울로, 혹은 그냥 조금 큰 도시로 혹은 그냥 시골 말고 아무데나.

 

 

 

 

 

3. From every southern town migrants left by the hundreds to travel north.

3. 미국 남부의 방방곡곡에서 흑인들이 수백명씩 북쪽을 향해 떠나갔다.

 

지방의 산골, 농촌, 어촌에서 가난뱅이들이 혹은 먹고 살 만한 사람들이 혼자서 혹은 온가족이 서울을 향해 떠나갑니다.

 

 

 

 

5. Migrants were advanced passage on the railroads, paid for by the northern industry. Northern industry was to be paid by the migrants out of their future wages.

 

남부 출신 이주자들의 기차요금은 북부의 공단에서 지불해주었다. 물론 이렇게 나간 돈은 이주자들이 장차 받게되는 임금에서 나가는 것이었다.

 

한국: 어떤이는 가산을 팔아 정리를 했고, 어떤이는 집의 쌀독을 털어 차비를 장만했습니다.

 

 

 

 

 

7. The migrant, whose life had been rural and nurtured by the earth, was now moving to urban life dependent on industrial machinery.

시골에서 태어나 대지와 함께 성장하던 남부출신 이주자들은 이제 기계 산업 위주의 도시로 이동하는 것이다.

 

시골에서 태어나 대지와 함께 성장하던 호남출신 이주자들은 이제 도시로 도시로 이동을 하는 것입니다.

 

 

 

 

 

9. They left because the boll weevil had ravaged the cotton crop.

그들은 목화 바구미가 목화솜을 모두 망치는 바람에 떠나게 되었다.

 

이주의 이유, 한국, 혹자는 그해 농사가 흉작이라 희망을 잃기도 했고

 

 

 

11. Food had doubled in price because of the war.

전쟁 때문에 식량 값은 두배로 뛰었다.

 

한국: 식구들의 생계는 막막했습니다.

 

 

 

13. The crops were left to dry and rot. There was no one to tend them.

농작물은 그대로 방치되어 말라 죽거나 썩어버렸다.  이제 농작물을 지켜줄 이는 아무도 없다.

 

한국: 그들이 버리고 간 논밭에서 작물들이 말라 죽어갔습니다.

 

 

 

15. There were lynching.

남부에서는 흑인에 대한 린치 (개인적인 폭력행사)가 벌어지곤 했다.

한국: 한국전의 상처는 깊어, 여전히 누군가는 '빨갱이'라며 손가락질을 당했습니다.

 

 

 

 

17. Tenant farmers received harsh treatment at the hands of planters.

남부의 소작농 흑인들은 지주로부터 온당치 못한 대우를 받았다.

한국: 남의 땅을 빌어 농사를 짓는이는 연명하기도 힘이 들었습니다.

 

 

 

 

19. There had always been discrimination.

항상 차별에 시달렸다.

한국: 다행히 한국땅에서 흑백 차별은 없었습니다.

 

 

 

 

21. Families arrived at the station very early.

이주하려는 가족들은 (차를 놓치지 않기 위하여) 아침 일찍 기차역에 도착했다.

한국: 밤봇짐을 싼 처녀아이나 총각녀석은 사람의 눈을 피해 신새벽에 기차를 탔습니다.

 

 

 

23. The migrant spread.

이주자들은 이리저리 흩어졌다.

한국: 서울이나 대도시의 기차역에 도착한 사람들은 이리저리 흩어져 갔습니다. 공장으로, 식모살이하러, 숙식제공의 꿰임에 빠져 술집으로, 버스 안내양으로, 앵벌이로.

 

 

 

 

 

 

25. They left their homes. Soon some communities were left almost empty.

그들은 집을 버리고 떠났다. 어떤 마을들은 거의 텅 빈채 남겨지게 되었다.

한국: 사람들이 떠나버린 마을은 텅 빈채 남겨졌습니다.

 

 

 

27. Many men stayed behind until they could take their families north with them.

가족들과 함께 북부로 가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뒤처지기도 했다.

한국: 노인들과 아이들은 그대로 남아 서울로 간 가족들이 소식을 보내기를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29. The labor agent recruited unsuspecting laborers as strike breakers for northern industries.

노동 중개인들은 북부 노동자들이 태업을 할때, 그 빈자리를 메꾸는 일꾼으로 남부 출신 이주자들을 고용했다.

한국: 서울에는 인력이 넘쳐났습니다.

 

 

 

31. The migrants found improved housing when they arrived north.

북부에 온 이주민들은 남부에 살때보다 주거 사정이 낳아지기도 했다.

한국: 무허가 주택으로 산동네를 탄생시킨 이들은 달동네도 건설해냈습니다.

 

 

 

 

33. Letters from relative in the North told of the better life there.

북부의 친척들에게서 (남부에 남아있는 이들에게) 날아온 편지는 남부보다 좋은 북부 생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한국: 시골에 남아있던 처녀 총각들은 서울에서 돈을 엄청 벌었다는 편지를 읽으며

'나도 밤봇짐을 싸리'하고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35. They left the South in great numbers. They arrived in the North in great numbers.

어마어마한 숫자의 흑인들이 남부를 떠났다. 어마어마한 숫자의 흑인들이 북부에 도착했다.

한국: 그리하여 너도 나도 서울로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37. Many migrants found work in the steel industry.

많은 이주자들이 철강 산업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한국: 많은 사람들이 공장에서 일자리를 찾았습니다.

 

 

 

 

39. Railroad platforms were piled high with luggage.

기차역은 보따리로 넘쳐났다.

한국: 기차역은 보따리로 넘쳐났습니다.

 

 

41. The South was desperate to keep its cheap labor. Northern labor agents were jailed or forced to operate in secrecy.

남부는 값 싼 노동력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북부의 인력중개인들이 수감되거나 혹은 비밀리에 일을 해야만 했다.

한국: 농촌에서는 '잘살아보세'를 외치며 새마을 운동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43. In a few section of the South leaders of both black and white communities met to discuss ways of making the South a great place to live.

남주의 어떤 지역에서는 흑인과 백인 집단 양쪽 진영이 만나 남부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수 있는 방법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한국: 새마을운동은 새마을 지도자들을 배출 시켰고, 농촌에도 전기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45. The migrants arrived in Pittsburgh, one of the great industrial center of the North.

이주자들이 도착한 피츠버그는 북부 산업의 주요 거점 도시 중 하나였다.

한국: 인천이나 창원, 포항에 공장들이 세워졌습니다.

 

 

 

 

47. 사진상태가 흐려서 캡션 적음

 

 

 

 

 

 

49. They found discrimination in the North. It was a different kind.

이주자들은 북부에서도 차별을 겪었다. 남부와는 다른 식의 차별이었다.

한국: 서울에 갔다고 모두 서울 사람이 되는것은 아니었지요.

 

 

 

51. African Americans seeking to find better housing attempted to move into new areas. This resulted in the bombing of their new homes.

좀더 나은 환경의 주거지를 원한 흑인들은 새로운 구역으로 이사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들이 새로 이주한 집에 폭발물이 던져지기도 했다.

한국: 산동네나 달동네를 벗어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53. African Americans, long-time residents of northern cities, met the migrants with aloofness and disdain.

북부에서 오랫동안 터를 잡고 살던 북부흑인들은 남부에서 올라온 이주자들에게 무관심하거나 혹은 경멸했다.

한국: 서울에서 먼저 자리를 잡은 친척들에게 마냥 기댈수만도 없는 노릇이었지요.

 

 

55. The migrants, having moved suddenly into a crowded and unhealthy environment, soon contracted tuberculosis. The death rate rose.

급작스럽게 인구가 조밀하고 불결한 환경으로 옮겨온 이주자들은 폐결핵에 걸리기도 했다.  사망률이 치솟았다.

한국: 사실 폐결핵을 앓거나 그로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57. The female workers were the last to arrive north.

여성들이 가장 늦게 북부로 옮겨왔다.

한국: 노인들은 고향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지요.

 

 

 

 

59. In the North they had the freedom to vote.

북부에서는 투표의 자유가 있었다.

서울에서는 창경원 소풍을 갈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한강다리 구경도 좋았고요.

주말의 극장구경도 즐거웠습니다.

 

 

 

 

 

 

전시장 스케치

 

유리 액자에 담긴 작품을 사진에 담다 보니 조명이 반사되기도 하고, 사진 찍는 내가 반사되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미국 남부 흑인들이 북부 상공업지대로 대거 이주한 역사를 화판에 옮긴 이 시리즈의 그림 캡션 (설명문)을 하나 하나 옮겨 적고 해석하다보니,  이 미국 흑인의 역사가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내가 나고 자라던 19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중반까지 한국에서는 박정희 정권과 때를 같이 하여 '근대화,' '시월 유신,' '새마을 운동'의 구호가 높아지면서 종래의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전환해 갔는데,  이때 지방에서 서울로 이주 하는 인구가 많았다.  내가 시골에서 자라날때, 아침에 일어나면 고모들이나 어른들이 밥상머리에서 곧잘 전하던 이야기가 '아무개가 밤새 쌀을 한말 퍼가지고 보따리 싸서 도망을 갔다'는 것이었다. 시골의 가난한 가족들은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이주를 했고,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집에서 가사, 농사를 돕던 떠꺼머리 총각, 처녀들도 도시로 도시로 떠났다.  서울에 가서 먼저 자리를 잡은 친구들이 보내온 편지에 현혹되어 무작정 상경을 했다가 술집에 팔려가는 딱한 신세가 되기도 했으며,  식모살이, 버스 안내양, 공장의 직공등으로 취직을 하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한국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산업화가 가속되던 시기의 남부 흑인들의 이주의 역사를 보면서, 문득 한국에서 비슷하게 진행되던 산업화의 역사를 떠올리고 말다.

 

RedFox September 6,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