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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 7일 월요일

Jacob Lawrence 2: Migration Series, Phillips Collection

http://americanart.textcube.com/30  에서 계속

2009s년 9월 5일 토요일.  Phillips Collection 에 들러서 제이콥 로렌스의 '남부 흑인 이주 역사 시리즈 (Migration Series) 30장과 해당 그림 설명 (caption) 을 사진기에 담아 왔다.  홀수 작품은 Phillips Collection 에서, 짝수 작품은 Museum of Modern Art (MoMA) 에서 소장중이므로 홀수 1번에서 59번까지 작품들이다.

 

 

1. During World War I, there was a great migration north by southern African Americans.

1. 제 1차 세계 대전 기간동안, 미국 남부의 흑인들이 북부로 대이동을 했다.

 

한국판: 한국전이 끝나고 1960년대 '조국 근대화'에 발맞춰 한국의 영남, 호남, 기호 지방의 선량한 사람들이 잘 살아보기 위해 서울로 서울로 올라갑니다. 혹자는 서울로, 혹은 그냥 조금 큰 도시로 혹은 그냥 시골 말고 아무데나.

 

 

 

 

 

3. From every southern town migrants left by the hundreds to travel north.

3. 미국 남부의 방방곡곡에서 흑인들이 수백명씩 북쪽을 향해 떠나갔다.

 

지방의 산골, 농촌, 어촌에서 가난뱅이들이 혹은 먹고 살 만한 사람들이 혼자서 혹은 온가족이 서울을 향해 떠나갑니다.

 

 

 

 

5. Migrants were advanced passage on the railroads, paid for by the northern industry. Northern industry was to be paid by the migrants out of their future wages.

 

남부 출신 이주자들의 기차요금은 북부의 공단에서 지불해주었다. 물론 이렇게 나간 돈은 이주자들이 장차 받게되는 임금에서 나가는 것이었다.

 

한국: 어떤이는 가산을 팔아 정리를 했고, 어떤이는 집의 쌀독을 털어 차비를 장만했습니다.

 

 

 

 

 

7. The migrant, whose life had been rural and nurtured by the earth, was now moving to urban life dependent on industrial machinery.

시골에서 태어나 대지와 함께 성장하던 남부출신 이주자들은 이제 기계 산업 위주의 도시로 이동하는 것이다.

 

시골에서 태어나 대지와 함께 성장하던 호남출신 이주자들은 이제 도시로 도시로 이동을 하는 것입니다.

 

 

 

 

 

9. They left because the boll weevil had ravaged the cotton crop.

그들은 목화 바구미가 목화솜을 모두 망치는 바람에 떠나게 되었다.

 

이주의 이유, 한국, 혹자는 그해 농사가 흉작이라 희망을 잃기도 했고

 

 

 

11. Food had doubled in price because of the war.

전쟁 때문에 식량 값은 두배로 뛰었다.

 

한국: 식구들의 생계는 막막했습니다.

 

 

 

13. The crops were left to dry and rot. There was no one to tend them.

농작물은 그대로 방치되어 말라 죽거나 썩어버렸다.  이제 농작물을 지켜줄 이는 아무도 없다.

 

한국: 그들이 버리고 간 논밭에서 작물들이 말라 죽어갔습니다.

 

 

 

15. There were lynching.

남부에서는 흑인에 대한 린치 (개인적인 폭력행사)가 벌어지곤 했다.

한국: 한국전의 상처는 깊어, 여전히 누군가는 '빨갱이'라며 손가락질을 당했습니다.

 

 

 

 

17. Tenant farmers received harsh treatment at the hands of planters.

남부의 소작농 흑인들은 지주로부터 온당치 못한 대우를 받았다.

한국: 남의 땅을 빌어 농사를 짓는이는 연명하기도 힘이 들었습니다.

 

 

 

 

19. There had always been discrimination.

항상 차별에 시달렸다.

한국: 다행히 한국땅에서 흑백 차별은 없었습니다.

 

 

 

 

21. Families arrived at the station very early.

이주하려는 가족들은 (차를 놓치지 않기 위하여) 아침 일찍 기차역에 도착했다.

한국: 밤봇짐을 싼 처녀아이나 총각녀석은 사람의 눈을 피해 신새벽에 기차를 탔습니다.

 

 

 

23. The migrant spread.

이주자들은 이리저리 흩어졌다.

한국: 서울이나 대도시의 기차역에 도착한 사람들은 이리저리 흩어져 갔습니다. 공장으로, 식모살이하러, 숙식제공의 꿰임에 빠져 술집으로, 버스 안내양으로, 앵벌이로.

 

 

 

 

 

 

25. They left their homes. Soon some communities were left almost empty.

그들은 집을 버리고 떠났다. 어떤 마을들은 거의 텅 빈채 남겨지게 되었다.

한국: 사람들이 떠나버린 마을은 텅 빈채 남겨졌습니다.

 

 

 

27. Many men stayed behind until they could take their families north with them.

가족들과 함께 북부로 가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뒤처지기도 했다.

한국: 노인들과 아이들은 그대로 남아 서울로 간 가족들이 소식을 보내기를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29. The labor agent recruited unsuspecting laborers as strike breakers for northern industries.

노동 중개인들은 북부 노동자들이 태업을 할때, 그 빈자리를 메꾸는 일꾼으로 남부 출신 이주자들을 고용했다.

한국: 서울에는 인력이 넘쳐났습니다.

 

 

 

31. The migrants found improved housing when they arrived north.

북부에 온 이주민들은 남부에 살때보다 주거 사정이 낳아지기도 했다.

한국: 무허가 주택으로 산동네를 탄생시킨 이들은 달동네도 건설해냈습니다.

 

 

 

 

33. Letters from relative in the North told of the better life there.

북부의 친척들에게서 (남부에 남아있는 이들에게) 날아온 편지는 남부보다 좋은 북부 생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한국: 시골에 남아있던 처녀 총각들은 서울에서 돈을 엄청 벌었다는 편지를 읽으며

'나도 밤봇짐을 싸리'하고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35. They left the South in great numbers. They arrived in the North in great numbers.

어마어마한 숫자의 흑인들이 남부를 떠났다. 어마어마한 숫자의 흑인들이 북부에 도착했다.

한국: 그리하여 너도 나도 서울로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37. Many migrants found work in the steel industry.

많은 이주자들이 철강 산업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한국: 많은 사람들이 공장에서 일자리를 찾았습니다.

 

 

 

 

39. Railroad platforms were piled high with luggage.

기차역은 보따리로 넘쳐났다.

한국: 기차역은 보따리로 넘쳐났습니다.

 

 

41. The South was desperate to keep its cheap labor. Northern labor agents were jailed or forced to operate in secrecy.

남부는 값 싼 노동력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북부의 인력중개인들이 수감되거나 혹은 비밀리에 일을 해야만 했다.

한국: 농촌에서는 '잘살아보세'를 외치며 새마을 운동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43. In a few section of the South leaders of both black and white communities met to discuss ways of making the South a great place to live.

남주의 어떤 지역에서는 흑인과 백인 집단 양쪽 진영이 만나 남부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수 있는 방법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한국: 새마을운동은 새마을 지도자들을 배출 시켰고, 농촌에도 전기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45. The migrants arrived in Pittsburgh, one of the great industrial center of the North.

이주자들이 도착한 피츠버그는 북부 산업의 주요 거점 도시 중 하나였다.

한국: 인천이나 창원, 포항에 공장들이 세워졌습니다.

 

 

 

 

47. 사진상태가 흐려서 캡션 적음

 

 

 

 

 

 

49. They found discrimination in the North. It was a different kind.

이주자들은 북부에서도 차별을 겪었다. 남부와는 다른 식의 차별이었다.

한국: 서울에 갔다고 모두 서울 사람이 되는것은 아니었지요.

 

 

 

51. African Americans seeking to find better housing attempted to move into new areas. This resulted in the bombing of their new homes.

좀더 나은 환경의 주거지를 원한 흑인들은 새로운 구역으로 이사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들이 새로 이주한 집에 폭발물이 던져지기도 했다.

한국: 산동네나 달동네를 벗어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53. African Americans, long-time residents of northern cities, met the migrants with aloofness and disdain.

북부에서 오랫동안 터를 잡고 살던 북부흑인들은 남부에서 올라온 이주자들에게 무관심하거나 혹은 경멸했다.

한국: 서울에서 먼저 자리를 잡은 친척들에게 마냥 기댈수만도 없는 노릇이었지요.

 

 

55. The migrants, having moved suddenly into a crowded and unhealthy environment, soon contracted tuberculosis. The death rate rose.

급작스럽게 인구가 조밀하고 불결한 환경으로 옮겨온 이주자들은 폐결핵에 걸리기도 했다.  사망률이 치솟았다.

한국: 사실 폐결핵을 앓거나 그로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57. The female workers were the last to arrive north.

여성들이 가장 늦게 북부로 옮겨왔다.

한국: 노인들은 고향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지요.

 

 

 

 

59. In the North they had the freedom to vote.

북부에서는 투표의 자유가 있었다.

서울에서는 창경원 소풍을 갈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한강다리 구경도 좋았고요.

주말의 극장구경도 즐거웠습니다.

 

 

 

 

 

 

전시장 스케치

 

유리 액자에 담긴 작품을 사진에 담다 보니 조명이 반사되기도 하고, 사진 찍는 내가 반사되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미국 남부 흑인들이 북부 상공업지대로 대거 이주한 역사를 화판에 옮긴 이 시리즈의 그림 캡션 (설명문)을 하나 하나 옮겨 적고 해석하다보니,  이 미국 흑인의 역사가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내가 나고 자라던 19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중반까지 한국에서는 박정희 정권과 때를 같이 하여 '근대화,' '시월 유신,' '새마을 운동'의 구호가 높아지면서 종래의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전환해 갔는데,  이때 지방에서 서울로 이주 하는 인구가 많았다.  내가 시골에서 자라날때, 아침에 일어나면 고모들이나 어른들이 밥상머리에서 곧잘 전하던 이야기가 '아무개가 밤새 쌀을 한말 퍼가지고 보따리 싸서 도망을 갔다'는 것이었다. 시골의 가난한 가족들은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이주를 했고,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집에서 가사, 농사를 돕던 떠꺼머리 총각, 처녀들도 도시로 도시로 떠났다.  서울에 가서 먼저 자리를 잡은 친구들이 보내온 편지에 현혹되어 무작정 상경을 했다가 술집에 팔려가는 딱한 신세가 되기도 했으며,  식모살이, 버스 안내양, 공장의 직공등으로 취직을 하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한국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산업화가 가속되던 시기의 남부 흑인들의 이주의 역사를 보면서, 문득 한국에서 비슷하게 진행되던 산업화의 역사를 떠올리고 말다.

 

RedFox September 6, 2009

2009년 8월 31일 월요일

Kara Walker: 우스꽝 스러운 흑인 잔혹사

http://americanart.textcube.com/30

Jacob Lawrence (1917-2000) 페이지를 쓰고 나니, 흑인 여성 미술가 Kara Walker (1969-   )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Kara Walker를 만난 것은 워싱턴 디씨에 있는 Corcoran Gallery of Art (코코란 미술관)에서였다. 전시장 벽에 검정 실루엣으로 그려진 사람들. 흑인들 특유의 실루엣이었으므로 단박에 흑인관련 작품임을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참 독특했다. 새롭고 매력적이라고 해야 하나? 단지 검정 색 도화지를 오려 붙인듯한 전시물들. 벽 전면에 채워진 그림자들. 그 실루엣으로만 이루어진 인물들 속에는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 가령 노예 해방 이전에 남부에서 일어났을 법한, 백인 주인이 흑인 여자를 강간하는 장면이라던가, 여성이 남성의 신체를 기쁘게 해주는 장면, 입맞춤 하는 흑인의 손에 들린 예리한 칼. 이런 장면들은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여러 가지 매체를 통해서, 가량 스토우의 톰아저씨의 오두막, 혹은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 그 밖의 미국 흑인 잔혹사 관련 이야기에 소개되었던 에피소드들이 일제히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순전히 검은 도화지를 오려서 붙인 것 같은 이 실루엣 인물들이 그 흑백의 대비속에서 오히려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와 말을 붙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홀린 듯이 작품 구경을 했었다. 2008년 5월의 일이다.

 

 

 

                    워싱턴 디씨, 코코란 갤러리 2층에 전시된 카라 워커의 작품 (2008년 5월)

                               전시장을 지키던 흑인 경비원 아저씨가 찍어준 사진

 

 

 

 

사실 이보다 한달 전, 2008년 4월에 워싱턴 디씨의 스미소니안 미국 미술 박물관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and Portrait Gallery)에서 그의 특별전을 본 적이 있다. 미국의 일반적인 미술관의 경우에 상설 전시관에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사진 촬영이 가능하지만 특별전시장에서는 대체로 사진 촬영을 금지한다. (이점은 미국에서 미술관 나들이를 할 때 기억하면 좋을 것이다.) 그래서 꽤 크게 열렸던 그 당시의 카라 워커전을 나는 눈으로 보고 체험하는 것으로 만족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후로 도서관이나 책방에 가서 심심풀이로 미술책을 꺼내 볼 때면 나는 이따금 카라 워커의 책을 들여다보곤 한다.

 

카라 워커는 1969년 생이다. 이제 활발하게 작업하는 젊은 미술가라 할 만 하다.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던 카라는 13세에 조지아 주의 아틀란타로 이주하면서 흑백문제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한다. 조지아 주의 아틀란타시는 미국 남부에서 가장 큰 대도시로 알려져 있고, CNN의 본사가 아틀란타에 있어, 남부의 자존심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한다. 또한 아틀란타를 흑인 공화국, 흑인들의 수도라고도 부를 정도로 흑인 인구가 많다. 남북전쟁에서 남군이 패배하기도 했지만, 그 후로도 미국의 남부는 북부에 비해서 경제적인 열세에 있는 편이다. 캘리포니아에서 살던 소녀가 아틀란타에 왔을 때 흑과 백의 차이를 감지했음을 보건대. 1970년대 아틀란타에서는 여전히 미세하게 흑인 백인들이 서로 융화되지 못한 채 살았을 것이다. 흑인 인구가 적으면 아무하고나 어울려 살게 되지만, 흑인 인구가 일정 수 이상이 되면 이들이 모여서 사는 것이 가능해지고, 이렇게 특정 집단을 형성하게 되면 흑인들은 흑인 인구가 집중된 학교에 다니고, 흑인 문화권에서 나고, 자라고, 늙어가게 된다. 그러면서 미국의 주류사회,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배계층인 백인사회와 더욱 멀어지

게 된다. 소녀 카라 워커는 이러한 문화권 속에서 자란 듯 하다. 참고로,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네스에 커다란 코리아 타운이 있고, 뉴욕 맨해턴에도 코리아 타운이 있고, 내가 현재 살고 있는 워싱턴 지역, 북 버지니아에도 애난데일 Annandale 을 중심으로 한국인 상점이 밀집되어 있는데, 우리는 때로 농담 삼아, 애난데일은 미국인가 아닌가? 이런 농담을 하기도 한다. 한국인이 애난데일 지역에서 산다면, 온종일 영어 한마디 할 것 없이 한국인 상점에서 필요한 것 사고, 한국인 미장원에 들르고, 한국 책방에 가고, 한국 교회에 가면 되고. 이런 생활에 익숙해지면, 미국에 살면서도 미국의 주류 사회에 진입하기보다는 미국의 변두리에서 애매한 한국 문화권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식으로 특정 집단이 밀집한 곳에 살면서 정서적인 안정감이나 소속감을 찾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반대로 주류에 진입하지 못한다는 우울감도 생길 수 있다. 카라 워커는 자기 자신이 흑인 여성으로서 흑인인구가 밀집한 곳에서 성장하면서 이러한 우울감을 일찌감치 맛 본 듯 하다.

 

카라 워커는 아틀란타 예술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고 로드 아일랜드에서 미술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가가 되는 정석의 교육을 받은 셈이다.

 

카라 워커가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94년 그녀가 24세 되던 해에 소호 (SoHo)에서 열린 전시회 부터였다. 카라는 검정 도화지로 실루엣을 오려서 벽에 붙이는 식의 벽화 작품들을 선보였는데 주로 남부 노예들이 백인한테 강간 당하거나, 유사 행위를 하는 장면들이 코믹하고 간결하게 그려졌다. 잔혹한 장면이면서 동시에 코믹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나는 이점이 궁금한데, 실제로 카라 워커의 대형 벽화 작품들을 직접 볼 때 그런 느낌이 들었었다. 끔찍스러우면서도, 어딘가 유머러스한. 사람들은 이 특이한 작업을 매력적으로 받아들인 듯 하다. 그 후로 카라 워커는 미국의 유수의 박물관에서 전시회를 갖게 된다. 요즘도 미국의 잘 나가는 작가이고 앞으로 그의 미술작업이 어떻게 발전할지는 미지수이다.

 

카라는 검정 도화지를 이용한 실루엣 작품 외에도, 벽화 전시회장에 프로젝터를 설치하여 관객이 전시장에 들어서서 움직일 때 그의 그림자가 벽에서 살아 움직이는 살아있는 현장 작업을 하기도 한다. 상상해보자, 내가 전시장에 들어섰을 때 내 검은 그림자가 전시장의 벽화와 만나서, 그 순간 나도 벽화 속의 주인공이 되거나 벽화의 일부가 된다. 재미있는 발상이다.

 

 

 

 

 

 

카라워커의 작품 활동의 주요 소재가 되는 것으로는

l       흑백 인종문제와 권력의 문제, 소외, 차별, 학대

l       인간의 원초적 욕망과 수치감

l       환상 속에 어우러진 역사적 사실과 허구

l       이야기

l       유머

라고 할 만하다. 이런 모티브들이 카라의 벽화에 점층적으로, 입체적으로 등장하는데, 평평한 평면 속에서 마술적인 입체감이 느껴지는 것은 그림을 바라보는 나만의 환상일지도 모른다.

 

 

 

 

 

주로 노예해방 이전의 상황을 모티브로 작업을 하는 그의 미술에 대한 비판이나 반발의 시각도 만만치 않다. 신진 흑인 미술가들 중에는 흑인을 희화화하고, 백인들의 기호에 맞추는 듯한 카라의 작업에 대하여 공개적 비판을 하고 항의를 하거나, 그의 전시회를 보이콧하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한다. 왜 흑인 화가가 흑인들을 우스꽝스럽게 묘사를 하는가, 그것으로 백인들의 환심을 사고 출세를 하는 것이 정당한가? 이런 반발을 사는 것이다. 나로서는 아시안으로서, 내 일이 아닌 남의 일을 보는 입장에서 카라 워커의 작품들을 보고 매력적으로 생각을 하지만,  흑인 입장이 되면 이런 시각도 가능 할 것 같다. 흑인 예술가들의 이런 비판에 대하여, “What you want: negative images of white people, positive images of blacks.” (당신들이 원하는 : 백인은 무조건 나쁘고, 흑인은 무조건 좋다는 ) 이라고 반박했다. 유튜브에 소개된 카라와의 인터뷰에서 카라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욕망과, 동시에 주인공을 죽여버리고 싶다는 욕망 형상화 했다는 설명을 적이 있다. 이를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흑인들에게는 백인이 되고 싶다 숨은 욕망과 더불어, 백인이 되지 못하므로 백인을 죽이고 싶다는 다른 욕망이 있을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사망한 마이클 잭슨은 질환 이유로 여러 차례 성형수술을 감행하여 백인처럼 자신을 변모 시킨 있다. 그는 백인이 되고 싶었던 같다. 남아를 선호하는 전통 사회에서 여야 태어난 내가 남자가 되고 싶다 욕망을 간직하고 성장했듯, 동시에 남자 형제들에 대한 적개심을 키우며 살았듯, 백인이 주류인 미국 사회에서 흑인이 백인이 되고 싶다. 동시에 백인이 정말 밉다 심리는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 아닐까? 흑인으로서 흑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기 보다는 백인이 되고 싶다 욕망을 표출할 , 그것이 비난 받을 행동인가? 카라는 바로 그런 질문을 공격적을 던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너희도 백인 되고 싶쟎아. 주인공 되고 싶잖아. 나한테 신경질이야? 흑인을 우습게 보는 것은 내가 아니고 너희들이쟎아!” – 카라 워커는 이렇게 외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1941년에 흑인 청년 화가 제이콥 로렌스가 60장의 판에 20세기 미국 남부 흑인들이 북으로의 이주 역사를 그려서 미국 흑인들의 삶을 조명했다면,  2000년대의 신진 흑인 화가 카라 워커는 남북전쟁 이전의 남부 흑인들의 삶과 욕망과 잔혹사를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그리고 있다. 카라 워커는 그의 작품에서 흑인을 미화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동료 흑인 작가들의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역설적이게 그의 검정 실루엣 그림 속에서 검정색은 너무나도 선명하고 강렬하며 아름다운 색이 된다. 그의 그림에서 검정은 살아있는, 숨결이 느껴지고, 목소리가 느껴지는, 신음소리와, 노랫소리가 울려 나오는 색깔이 되고 만다. 검정색을 이토록 생동하는, 활발한, 질감과 소리까지 느껴지는 색으로 활용한 화가가 카라 워커 이전에 있었던가? 카라 워커에 이르러 검정색은 완성을 보았다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