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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 20일 토요일

Georgia O'Keeffe Abstraction Feb6-May9,2010 필립스콜렉션

필립스 콜렉션 입구입니다.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있죠.

이 사진에 나도 있어요. ^^

2010년 2월 20일

 

 

2010년 2월 6일부터 5월 9일까지 세달간 워싱턴 디씨의 필립스 콜렉션에서 조지아 오키프의 추상미술 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그동안 미국의 대형 미술관을 돌며 오키프의 작품들을 꽤 많이 보고 지나쳤었는데요, 이번 전시회에서는 그이의 추상미술을 한눈에 휙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후원인이었다가 남편이 된,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에게 보낸 자필 편지며, 스티글리츠가 '애정'을 기울여서 찍은 오키프의 각종 사진들도 흥미를 불러일으킬만 한데요 (제가 미술전공생이 아니고 문학전공생이다보니, 작품의 예술성보다는 인물사적 에피소드에 오히려 솔깃하기도 합니다. )

 

대부분의 미술관에서 '특별 기획전'의 경우 사진 촬영을 허용하지 않지요. 그래서 전시장의 사진을 찍을수는 없었고요.  필립스가 자체소장하는 영구소장 작품들은 사진 촬영이 가능합니다. (그것들은 찍었습니다.) 오늘은 그냥 간단한 스케치만 전하고요, 조지아 오키프 관련 페이지를 따로 열었을때, 제가 '수집'한 작품 사진들을 풀어놓기로 하겠습니다.

 

 

필립스 콜렉션 영구 소장품, 뉴멕시코의 풍경화가 걸려있는것이 보이지요.

이 통로에서 (뒤로 돌아서면)  특별전시장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전시장부터는 사진을 못 찍지요.

 

 

전시장 입구에 관람객이 간단한 평을 남길수 있도록 공책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영어군요. 호호호.)

 

제가 얘기 했쟎아요.  오키프의 누드사진이 흥미로웠다고요. 저 안쪽에 보이지요...

 

 

제가...좀..이상한데서 집요해요 헤헤헤

통로 입구에서 안쪽이 보이는데요. 전시장 안에서 사진 찍는것은 금지 되어 있지만

전시장 바깥에서 뭐 사진 찍는것을 뭐라고 말할수는 없쟎아요. 

제 카메라 렌즈가 그래도 제법 쓸만한거거든요.

입구 통로에서 그냥 줌업을 해가지고 찍었죠 뭐.

왼쪽은, 오키프가 벌서듯이 팔을 올리고 있는데 겨드랑이 치모가 꽤 섹시하게 찍혔습니다.

오른쪽은 엉덩이 사진인데, 치모까지 드러나는 꽤 아름다운 사진입니다.

직접 사진을 보면 참 '예술'적으로 보입니다. 누구더라 그 '김기덕' 감독의 '섬' 마지막 장면같은.

한마디로, 오키프는 인물도 예술 인생도 예술이었다 이거죠 뭐. (부럽다  ^^).

 

 

 

 

저 리어왕같은 신사분과 저와는 아무런 관계가 아니에요~  헤헤

 

 

 

2009년 9월 7일 월요일

The Phillips Collection 워싱턴 디씨, 필립스 콜렉션

The Phillips Collection 필립스 콜렉션

 

며칠 전에 워싱턴을 방문한 친구에게 ‘어디를 가 보고 싶은가?’ 물었더니 필립스 콜렉션이라고 대답한다. 워싱턴 디씨에는 국립 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Art)도 있고 스미소니안 국립 미국 미술관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도 있고 허시혼 미술관등 ‘국립’ 미술관들이 수두룩 한데 이 친구는 그 큰 미술관들을 젖히고 ‘필립스 콜렉션’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 필립스 콜렉션이 아마도 암암리에 미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모양이라고 짐작하게 되었다. 그래서 내 친구에게 “일단 국립 미술관 급의 큼지막한 것들을 보고, 그냥 양념 삼아서, 혹시 구경하다 시간 여유가 되면 필립스 콜렉션에 가보라”고 조언 해 주었다. 큼지막한 미술관에 가면 세계적인 명작들이 뜨르르 하게 걸려있어 온 종일 봐도 다 못 볼 지경인데, 개인 소장품을 전시한 필립스 콜렉션에서 귀한 시간을 보내 버리면 어렵게 온 길이 좀 아깝지 않겠는가?

 

 

 

 

필립스 콜렉션은, 워싱턴 디씨에 위치한 ‘개인 소장품 미술관’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러니까 국립 미술관 급에 비하면 아주 작은 미술관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필립스 콜렉션의 규모 자체가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은 아니다.

 

 

 

필립스 콜렉션은 미국의 은행, 철강, 유리 산업의 재벌로 알려진 Phillips 집안이 일군 것이다.  Duncan Clinch Phillips (1838 – 1917)씨가 사망했을 때, 그의 아들인 Duncan Phillips (1886–1966)씨가 어머니와 함께 필립스 기념 갤러리 (The Phillips Memorial Gallery)를 열었고, 1921년 Marjorie Acker 와 결혼한 그는 아내 마 조리와 함께 활발하게 당대의 유럽, 미국의 미술품들을 수집한다. 화가였던 마조리의 작품은 지금도 필립스 콜렉션에 가면 볼 수 있다.

 

 

 

 

 

필립스 콜렉션이 있는 곳은 듀폰 서클 (Dupont Circle) 근방인데, 듀폰 서클을 중심으로 매사추세츠 애비뉴 (Massachusettes Ave.)가 이어져있고, 그 매사추세츠 애비뉴의 양쪽에 각국의 대사관들이 줄지어 서 있어서, 이곳을 대사관거리 (Embassy Row)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 대사관, 한국 영사관, 한국 홍보관 역시 필립스 콜렉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 해 있다. 매사추세츠 애비뉴를 걷다 보면 길가에 ‘간디’의 동상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그 곁에 붉은 벽의 필립스 콜렉션이 서 있다.

 

 

필립스 콜렉션은 방대한 유럽, 미국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하다는 화가’들의 작품이 최소한 한두 점씩은 모두 걸려있다. 가령 피카소, 마티스, 반 고흐, 르누아르, 세잔, 보나르, 뷔야르, 잭슨 폴락, 엘 그레코, 조지아 오키프…… 일일이 열거하는 것 보다 홈페이지를 소개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http://www.phillipscollection.org/   Jacob Lawrence 의 작품들이 걸려 있는 곳도 이곳이다. http://americanart.textcube.com/32

 

 

 

 

필립스 콜렉션의 특기 할 만한 것은 개인 소장품으로 이루어진 미술관이라는 것인데 미술관 역시 필립스 일가가 살던 집을 개조하거나 증축, 확장한 것이다. 그래서 전시공간에 일반 주택의 거실같이 편안한 소파가 놓여있거나 혹은 이들이 살던 당시에 설치 되었을 벽난로가 그대로 보존 되어 있기도 하다. 대중에게 공개되는 갤러리나 역사적 주택에 가보면 대개 집기들을 전시해놓고, “만지지 마시오,” 라는 표시를 붙이거나, 전시된 소파에 앉지 말라는 표시를 해 놓는데 이 곳 필립스 콜렉션에서는 전시장의 고풍스런 소파에 편히 앉아 쉬라고 표시를 해 놓는다.  우리는 잠시, 미국의 어느 재벌 집에 초대 받은 사람처럼 고풍스런 소파에 앉아 미술품을 보면서 쉴 수도 있는 것이니, 이런 점이 정답고 친절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필립스 콜렉션은 칸칸이 방으로 이루어진 다수의 전시장을 갖고 있는데, 그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로스코(Rothko) Room 이라는 곳이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필립스 콜렉션’의 인상을 말할 때, 그 로스코의 방이 인상적이었다는 얘기를 한다. 로스코는 2차 대전 때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미술가인데, 그의 작품의 특징은 문짝이나 문짝보다 더 큰 캔버스를 몇 가지 색으로 추상적으로 처리를 하는 것이다. 필립스 일가가 로스코의 작품을 사들여 방 하나에 전시해 놓았을 때, 로스코가 이를 흥미 있게 보았다고 한다. 뉴욕에서 활동하던 로스코가 워싱턴을 방문하여 직접 이 방을 구경 한 후에 ‘방 가운데에 작은 의자를 하나 놓아두면 좋겠다’고 제안하여 그의 제안대로 전시장 가운데에 나무 벤치가 하나 놓였다.  조명이 낮아 고요한 느낌을 주는, 사방에 로스코의 대작이 걸려있는 이 방의 가운데 벤치에 앉아 어느 한쪽 벽을 바라보고 있으면 기분이 차분해지고 편안해 진다.  사람들은 취향에 따라서 각기 다른 면을 바라 볼 텐데, 나는 그 네 장의 그림 중에서 짙은 녹색 주조의 작품 (위 사진에서 오른편의 작품)을 볼 때 가장 마음이 고요해진다. 이곳은 어찌 보면, 신전, 성스러운 장소, 명상실 같이 여겨지기도 한다.

 

 

필립스 콜렉션에서는 정기적으로 지역 청소년들을 위한 프로젝트도 진행한다. 워싱턴 인근 빈민가 학교의 어린이들을 초대하여 미술 작업을 하도록 한다거나 혹은 지역 학교와 연대하여 학생들의 공동 작업을 이끌기도 한다. 가끔 필립스 콜렉션에 들를 때, 나는 이곳, 청소년을 위한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전시장을 찾아본다. 그곳에서 어린이들의 시각으로 보이는 세상, 어린이들의 희망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필립스 콜렉션은 연중, 상설 전시와 특별 전시가 진행되는데, 상설전시장은 평일에 무료로 개방된다. 주말 (토요일, 일요일)에는 입장료를 내고 입장한다. 평일에 상설전시장과 특별전시장을 함께 둘러보려면 입장료를 내야 하지만, 상설전시관만 볼 계획이라면 입장료 없이 그냥 들어가면 된다. 나는 필립스 콜렉션에 종종 들르는 편이므로 따로 입장표 안 사고 상설전시장을 둘러 볼 때도 있다. 한구석에 기념품 샵이 있어서 기념품이나 미술 관련 책을 구경할 수도 있고, 카페에서 음료나 간단한 음식을 사 먹으며 쉴 수도 있다.

 

필립스 콜렉션은 방대한 소장품의 양에 비해서 전시 공간이 협소한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매주마다 벽의 전시물이 바뀌기도 한다. 상설 전시관의 전시물들이 갈 때마다 위치를 조금씩 바꾸거나 혹은 새로운 작품들이 나와 있거나 하는 것이다.  이런 변화를 발견하는 것도 이곳을 찾는 기쁨중의 한가지라고 할 만하다.

 

 

아, 위의 작품은 상설 전시관에 걸린 호레이스 피핀 (Horace Pippin)의 작품이다. 언젠가 미국 미술가 피핀에 관한 글을 쓸때, 이 그림과 화가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할 생각이다.

 

 

워싱턴이 자랑하는 개인 미술관으로 필립스 콜렉션에 쌍벽을 이루는 것이 코코란 미술관 (Corcoran Gallery of Art)이다. 다음에 코코란 미술관을 소개 하겠다.

Jacob Lawrence 2: Migration Series, Phillips Collection

http://americanart.textcube.com/30  에서 계속

2009s년 9월 5일 토요일.  Phillips Collection 에 들러서 제이콥 로렌스의 '남부 흑인 이주 역사 시리즈 (Migration Series) 30장과 해당 그림 설명 (caption) 을 사진기에 담아 왔다.  홀수 작품은 Phillips Collection 에서, 짝수 작품은 Museum of Modern Art (MoMA) 에서 소장중이므로 홀수 1번에서 59번까지 작품들이다.

 

 

1. During World War I, there was a great migration north by southern African Americans.

1. 제 1차 세계 대전 기간동안, 미국 남부의 흑인들이 북부로 대이동을 했다.

 

한국판: 한국전이 끝나고 1960년대 '조국 근대화'에 발맞춰 한국의 영남, 호남, 기호 지방의 선량한 사람들이 잘 살아보기 위해 서울로 서울로 올라갑니다. 혹자는 서울로, 혹은 그냥 조금 큰 도시로 혹은 그냥 시골 말고 아무데나.

 

 

 

 

 

3. From every southern town migrants left by the hundreds to travel north.

3. 미국 남부의 방방곡곡에서 흑인들이 수백명씩 북쪽을 향해 떠나갔다.

 

지방의 산골, 농촌, 어촌에서 가난뱅이들이 혹은 먹고 살 만한 사람들이 혼자서 혹은 온가족이 서울을 향해 떠나갑니다.

 

 

 

 

5. Migrants were advanced passage on the railroads, paid for by the northern industry. Northern industry was to be paid by the migrants out of their future wages.

 

남부 출신 이주자들의 기차요금은 북부의 공단에서 지불해주었다. 물론 이렇게 나간 돈은 이주자들이 장차 받게되는 임금에서 나가는 것이었다.

 

한국: 어떤이는 가산을 팔아 정리를 했고, 어떤이는 집의 쌀독을 털어 차비를 장만했습니다.

 

 

 

 

 

7. The migrant, whose life had been rural and nurtured by the earth, was now moving to urban life dependent on industrial machinery.

시골에서 태어나 대지와 함께 성장하던 남부출신 이주자들은 이제 기계 산업 위주의 도시로 이동하는 것이다.

 

시골에서 태어나 대지와 함께 성장하던 호남출신 이주자들은 이제 도시로 도시로 이동을 하는 것입니다.

 

 

 

 

 

9. They left because the boll weevil had ravaged the cotton crop.

그들은 목화 바구미가 목화솜을 모두 망치는 바람에 떠나게 되었다.

 

이주의 이유, 한국, 혹자는 그해 농사가 흉작이라 희망을 잃기도 했고

 

 

 

11. Food had doubled in price because of the war.

전쟁 때문에 식량 값은 두배로 뛰었다.

 

한국: 식구들의 생계는 막막했습니다.

 

 

 

13. The crops were left to dry and rot. There was no one to tend them.

농작물은 그대로 방치되어 말라 죽거나 썩어버렸다.  이제 농작물을 지켜줄 이는 아무도 없다.

 

한국: 그들이 버리고 간 논밭에서 작물들이 말라 죽어갔습니다.

 

 

 

15. There were lynching.

남부에서는 흑인에 대한 린치 (개인적인 폭력행사)가 벌어지곤 했다.

한국: 한국전의 상처는 깊어, 여전히 누군가는 '빨갱이'라며 손가락질을 당했습니다.

 

 

 

 

17. Tenant farmers received harsh treatment at the hands of planters.

남부의 소작농 흑인들은 지주로부터 온당치 못한 대우를 받았다.

한국: 남의 땅을 빌어 농사를 짓는이는 연명하기도 힘이 들었습니다.

 

 

 

 

19. There had always been discrimination.

항상 차별에 시달렸다.

한국: 다행히 한국땅에서 흑백 차별은 없었습니다.

 

 

 

 

21. Families arrived at the station very early.

이주하려는 가족들은 (차를 놓치지 않기 위하여) 아침 일찍 기차역에 도착했다.

한국: 밤봇짐을 싼 처녀아이나 총각녀석은 사람의 눈을 피해 신새벽에 기차를 탔습니다.

 

 

 

23. The migrant spread.

이주자들은 이리저리 흩어졌다.

한국: 서울이나 대도시의 기차역에 도착한 사람들은 이리저리 흩어져 갔습니다. 공장으로, 식모살이하러, 숙식제공의 꿰임에 빠져 술집으로, 버스 안내양으로, 앵벌이로.

 

 

 

 

 

 

25. They left their homes. Soon some communities were left almost empty.

그들은 집을 버리고 떠났다. 어떤 마을들은 거의 텅 빈채 남겨지게 되었다.

한국: 사람들이 떠나버린 마을은 텅 빈채 남겨졌습니다.

 

 

 

27. Many men stayed behind until they could take their families north with them.

가족들과 함께 북부로 가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뒤처지기도 했다.

한국: 노인들과 아이들은 그대로 남아 서울로 간 가족들이 소식을 보내기를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29. The labor agent recruited unsuspecting laborers as strike breakers for northern industries.

노동 중개인들은 북부 노동자들이 태업을 할때, 그 빈자리를 메꾸는 일꾼으로 남부 출신 이주자들을 고용했다.

한국: 서울에는 인력이 넘쳐났습니다.

 

 

 

31. The migrants found improved housing when they arrived north.

북부에 온 이주민들은 남부에 살때보다 주거 사정이 낳아지기도 했다.

한국: 무허가 주택으로 산동네를 탄생시킨 이들은 달동네도 건설해냈습니다.

 

 

 

 

33. Letters from relative in the North told of the better life there.

북부의 친척들에게서 (남부에 남아있는 이들에게) 날아온 편지는 남부보다 좋은 북부 생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한국: 시골에 남아있던 처녀 총각들은 서울에서 돈을 엄청 벌었다는 편지를 읽으며

'나도 밤봇짐을 싸리'하고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35. They left the South in great numbers. They arrived in the North in great numbers.

어마어마한 숫자의 흑인들이 남부를 떠났다. 어마어마한 숫자의 흑인들이 북부에 도착했다.

한국: 그리하여 너도 나도 서울로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37. Many migrants found work in the steel industry.

많은 이주자들이 철강 산업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한국: 많은 사람들이 공장에서 일자리를 찾았습니다.

 

 

 

 

39. Railroad platforms were piled high with luggage.

기차역은 보따리로 넘쳐났다.

한국: 기차역은 보따리로 넘쳐났습니다.

 

 

41. The South was desperate to keep its cheap labor. Northern labor agents were jailed or forced to operate in secrecy.

남부는 값 싼 노동력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북부의 인력중개인들이 수감되거나 혹은 비밀리에 일을 해야만 했다.

한국: 농촌에서는 '잘살아보세'를 외치며 새마을 운동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43. In a few section of the South leaders of both black and white communities met to discuss ways of making the South a great place to live.

남주의 어떤 지역에서는 흑인과 백인 집단 양쪽 진영이 만나 남부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수 있는 방법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한국: 새마을운동은 새마을 지도자들을 배출 시켰고, 농촌에도 전기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45. The migrants arrived in Pittsburgh, one of the great industrial center of the North.

이주자들이 도착한 피츠버그는 북부 산업의 주요 거점 도시 중 하나였다.

한국: 인천이나 창원, 포항에 공장들이 세워졌습니다.

 

 

 

 

47. 사진상태가 흐려서 캡션 적음

 

 

 

 

 

 

49. They found discrimination in the North. It was a different kind.

이주자들은 북부에서도 차별을 겪었다. 남부와는 다른 식의 차별이었다.

한국: 서울에 갔다고 모두 서울 사람이 되는것은 아니었지요.

 

 

 

51. African Americans seeking to find better housing attempted to move into new areas. This resulted in the bombing of their new homes.

좀더 나은 환경의 주거지를 원한 흑인들은 새로운 구역으로 이사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들이 새로 이주한 집에 폭발물이 던져지기도 했다.

한국: 산동네나 달동네를 벗어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53. African Americans, long-time residents of northern cities, met the migrants with aloofness and disdain.

북부에서 오랫동안 터를 잡고 살던 북부흑인들은 남부에서 올라온 이주자들에게 무관심하거나 혹은 경멸했다.

한국: 서울에서 먼저 자리를 잡은 친척들에게 마냥 기댈수만도 없는 노릇이었지요.

 

 

55. The migrants, having moved suddenly into a crowded and unhealthy environment, soon contracted tuberculosis. The death rate rose.

급작스럽게 인구가 조밀하고 불결한 환경으로 옮겨온 이주자들은 폐결핵에 걸리기도 했다.  사망률이 치솟았다.

한국: 사실 폐결핵을 앓거나 그로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57. The female workers were the last to arrive north.

여성들이 가장 늦게 북부로 옮겨왔다.

한국: 노인들은 고향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지요.

 

 

 

 

59. In the North they had the freedom to vote.

북부에서는 투표의 자유가 있었다.

서울에서는 창경원 소풍을 갈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한강다리 구경도 좋았고요.

주말의 극장구경도 즐거웠습니다.

 

 

 

 

 

 

전시장 스케치

 

유리 액자에 담긴 작품을 사진에 담다 보니 조명이 반사되기도 하고, 사진 찍는 내가 반사되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미국 남부 흑인들이 북부 상공업지대로 대거 이주한 역사를 화판에 옮긴 이 시리즈의 그림 캡션 (설명문)을 하나 하나 옮겨 적고 해석하다보니,  이 미국 흑인의 역사가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내가 나고 자라던 19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중반까지 한국에서는 박정희 정권과 때를 같이 하여 '근대화,' '시월 유신,' '새마을 운동'의 구호가 높아지면서 종래의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전환해 갔는데,  이때 지방에서 서울로 이주 하는 인구가 많았다.  내가 시골에서 자라날때, 아침에 일어나면 고모들이나 어른들이 밥상머리에서 곧잘 전하던 이야기가 '아무개가 밤새 쌀을 한말 퍼가지고 보따리 싸서 도망을 갔다'는 것이었다. 시골의 가난한 가족들은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이주를 했고,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집에서 가사, 농사를 돕던 떠꺼머리 총각, 처녀들도 도시로 도시로 떠났다.  서울에 가서 먼저 자리를 잡은 친구들이 보내온 편지에 현혹되어 무작정 상경을 했다가 술집에 팔려가는 딱한 신세가 되기도 했으며,  식모살이, 버스 안내양, 공장의 직공등으로 취직을 하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한국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산업화가 가속되던 시기의 남부 흑인들의 이주의 역사를 보면서, 문득 한국에서 비슷하게 진행되던 산업화의 역사를 떠올리고 말다.

 

RedFox September 6,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