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5일 토요일

The Eight (Ashcan School) and George Bellows

New York (1911)

George Bellows

Oil on Canvas

2009년 9월 11일 워싱턴 국립미술관 (NGA)에서 촬영

 

사진은 클릭하시면 크게 확장시켜 보실수 있습니다.

 

뉴욕풍경

 

 

Goerge Bellows (1882-1925) 의  New York (1911)은 대략 100여년전의 뉴욕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자동차와 마차가 뒤섞여 있고, 고층 건물들과 그제나 이제나 여전한 인파가 보입니다.  사실 이 뉴욕의 풍경은 사진과 같은 실제 광경은 아니라고 합니다. 뉴욕의 여러 장면을 뒤섞어서 뉴욕의 분위기를 전달했다고 봐야겠지요. 얼핏 보면 타임 스퀘어 같기도 하고 얼핀 보면 펜스테이션 앞 같기도 하고, 어찌됐거나 우리가 한번쯤 가봤거나 혹은 영화나 그림을 통해서 지겹게도 많이 본 뉴욕 번화가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일백여년전의 풍경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의 복장이나 마차 장면을 제외하면 어느 화가가 며칠전에 그린 것이라고 해도 그럴싸해 보입니다.

 

조지 벨로우즈 (1882-1925)는 앞서 소개드린 The Eight (팔인회)나 Ashcan (애시캔) 그룹의 정식 회원으로 활동을 한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The Eight, Ashcan school 의 리더였던 로버트 헨라이 (Robert Henri 1865-1929)와 친분이 두터웠고, 헨라이의 미술관에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의 작품들이 팔인회, 애시캔 회원들의 화풍과 통했기 때문에 조지 벨로우즈를 '애시캔'의 일원으로 평가하는 비평가들도 있습니다.  저 역시 그의 작품들이 미국의 도시, 서민들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려냈으므로 조지 벨로우즈를 애시캔 그룹을 이야기하면서 함께 정리를 해보는 것입니다.

 

조지 벨로우즈는 오하이오(Ohio) 의 주도(행정수도)인 콜럼버스 (Columbus) 태생입니다. 이곳에 오하이오 주립대 (Ohio State University)가 있지요. 그는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주로 야구선수와 교지 삽화가, 그리고 잡지의 삽화가로 활동했습니다.  오하이오 주립대에 한번 가본적이 있지요. 제 친구들이 그곳 수학과에서 공부를 했는데, 한 친구는 공부 마치고 수학자로 살고 있고, 또 한 친구는 아직도 거기서 공부중입니다. (글 쓰다가 친구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집니다.) Robert Henri 역시 오하이오 출신인데 그는 신시내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아마도 조지 벨로우즈와 로버트 헨리가 고향이 가까웠다는 이유로 더욱 친근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지 벨로우즈는 스포츠맨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오하이오 주립대를 졸업한 후에 프로야구 선수가 될것인가 잡지 삽화가로 살것인가 고민하다가, 미술 수업을 받겠다고 작정하고 뉴욕으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 뉴욕 미술학교 선생으로 재직하는 로버트 헨라이를 만나게 되고 그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조지 벨로우즈는 특히나 그의 권투경기 장면이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 합니다.  그의 도시 풍경이나 다른 그림들도 그 나름의 힘과 역동성이 느껴지지만, 단답형 상식 퀴즈 대회에서 '권투하는 그림' 내 놓고 '이거 그린 사람?'하는 퀴즈가 나온다면 자동으로 '조지 벨로우즈!'을 외칠만 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의 그림 세계를 단순무식하게 정리해본다면 대략 세가지 정도로 분류가 됩니다:

 

 (1) 그를 대표하는, 권투선수 시리즈

 (2) 도시 주변의 풍경과 서민의 삶

 (3) 일반 서민의 초상화

 

제가 미술관들을 돌면서 '사냥'한 그의 작품 사진들을 주제별로 소개해 보겠습니다.

 

 

권투선수

 

Both Members of This Club (1909)

두 선수

Oil on canvas, 45 1/4 x 63 1/8 in. (115 x 160.5 cm)

2009년 9월 11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흰색의 하일라이트가 들어간 왼쪽 선수, 얼굴에 피가 낭자합니다.  오른쪽 선수, 치고 들어가는 대각선 구도가 역동적이지요. 반대방향의 대각석 구도의 관객 풍경이 그림의 중심을 잡아줍니다.  피가 낭자한 가운데, 아래 중앙의 관객은 입을 벌리고 웃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권투선수가 피를 흘리거나 말거나, 관객의 입장에서는 링에서 피가 튀고 살점이 튀고 누군가 되게 쓰러지고 그래야 신이 나는 법입니다.

 

웹에서 조지 벨로우스 이미지를 찾아보시면 이와 유사한 다른 권투경기 장면 그림들을 많이 발견하실수 있습니다. 그 그림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조지 벨로우즈의 권투경기 그림을 찾아 천지를 유랑하며 돌아다니고 싶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어릴때, 할아버지가 권투중계의 팬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권투중계의 일정을 일일이 표시해놓고, 그의 일기장에 적어놓고 절대 빼놓지 않고 들여다봤습니다. 아마도 돌아가실때까지 그러셨을겁니다. 단지 중계방송만 보신것이 아니고, 서울 우리집에 오시면, 어린 우리들을 이끌고 월곡천 건너, 시장통에 있는 '체육관'에 구경을 가곤 했습니다. '체육관'이 뭐하는데냐 하면 당시 무명 아마추어 선수들이, 혹은 권투선수 지망생들이 모여서 연습하는 '도장'이다 이거죠.  우리들은 거기서 밤이 이슥하도록 창문 너머로 사람들이 서로 치고받고, 혼자 줄넘기하거나 혼자 샌드백 치면서 훈련하는것을 구경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체육관에 따로 '탈의 시설'이 없었던것 같습니다. 가끔 우리는 잘생긴 '오빠'들의 (그때 나는 꼬맹이였으므로) 실한 엉덩이 구경도 할수 있었는데,  선수들이 체육관의 구석진곳에 가서 옷을 갈아입었거든요. 그 구석진 곳이 하필 우리가 염탐하던 창가였으므로 그들이 창가쪽 구석에서 후다닥 바지를 내리고 체육복으로 갈아있거나, 체육복에서 평상복으로 탈바꿈하는 광경을 볼 수 밖에 없었지요. (일부러 그런게 아니고요 -.-;; )   아니...엉덩이밖에 안 봤습니다... 헤헤헤.

 

어릴때는 할아버지가 권투중계 보시는 것이 못마땅했는데요, (왜냐하면 내가 어린이 프로를 볼 수가 없으니까) 지금도 그런 스포츠 중계에 재미를 못느끼므로 여전히 볼 일이 없는데요, 하지만 이 그림은 제 맘에 듭니다.  조지 벨로우즈가 무슨 맘으로 이런 그림을 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권투 장면을 그의 그림 소재로 잡았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신선한' 시도였고, 결국 그의 트레이드마크 (Signiture) 작품이 되고 말았지만, 그것 말고도,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인생 이렇게 치고 받고 맞다가 뻗는거지...하는 비감한 생각도 들고,  누구나 그런거지, 나만 유독 두드려 맞는것도 아니지, 이런 위안감이 든다니깐요, 글쎄.

 

 

 

2009년 12월 13일,  국립 미술관에 가서 조지 벨로우즈의 Both Members of This Club (1909)라는 작품을 다시 감상하고 있었는데요, 마침 미술관 도슨트(Docent 전문 안내원)가 사람들을 이쪽으로 안내해와서 이 그림에 대한 설명을 하더군요. 그래서 곁에서 귀동냥을 했지요. 새로 알게된 사실은,  1900년 초반 당시에는 상업적으로 복싱 경기를 하는것이 '금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공개적인 복싱매치가 아니고, 남성들의 '음성적인' 클럽에서 진행된 경기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목도 Both Members of This Club (이 클럽의 두 회원)이라는 식으로 달린 것이라고 하네요.  두 '선수'라고 하면 안되고, 그냥 클럽의 회원간의 친선경기같은.    그러면 이 클럽에서는 복싱만 했겠는가?  다소 '음성적인' 클럽이었으므로 그 안에서는 복싱 말고도 다른, 다양한, 그러나 저로서는 전혀 알수 없는, 남자들만의 '음성적'인 오락이 진행되었겠지요~

 

 

 

 

 

뉴욕 빈민가의 아이들

 

 

이 작품은 위의 권투선수 그림보다 2년 앞서서 그려진 것입니다.  뉴욕의 East River 강변에는 그 당시 가난뱅이 이민자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서울의 허술한 한강변 산동네를 연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제목이 Forty Two Kids (42명의 아이들) 인데요 제목의 'kid'가 단순한 '아이들' 이 아닙니다. 아이들이라는 영어 단어로는 Children 이 따로 있지요.  요즘 Kids라는 단어를 '아이들'이라는 의미로 흔히 사용하기는 하지만 백여년전 이 kid 라는 말은 '슬랭'으로 대개 이민자 아이들처럼 가난뱅이 아이들을 일컫는 표현이었다고 합니다. 그냥 아이들이 아니라...말하자면...'애새끼들'이라는 뉘앙스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

 

이 kids 라는 어휘를 저도 아주 조심해서 사용하는 편인데, 제가 교육을 전공했고, 학교에서 교사로도 일을했고, 그래서 대학원 수업을 들을때도, 온통 '아이들,' '학생들' 관련 이야기였지요. 그러니까 주로 사용하는 어휘가 students, children, ESL children, ESL students 뭐 이런 언저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무심코 지도교수와 논문 이야기를 하다가, "These ESL kids..." 뭐 이러고 말을 하니까 지도교수가 주의를 주었습니다. "우리는 학생을 존중해야 하는 교육자이다. students 나 children, learners 말은 우리가 사용하기에 적합하지만 kids 라는 말은 부적합해보인다."  그러니까 그 kids 라는 어휘가 아직도 품위있는  어휘로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아, kid의 원뜻은 염소새끼 입니다.)

 

자 우리들의 조지 벨로우즈 선수(?)가 그 가난뱅이 뉴욕 빈민가의 이민자의 '애새끼'들을 화폭에 담았다는 것인데요. 정말 42명인지 한번 헤아려 볼까요?

 

 

Forty Two Kids (1907)

42명의 아이들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Corcoran 미술관에서 촬영

 

 

이 작품이 1908년 어느 전시회에 소개가 되었을때 평단의 반응은 싸늘하고 조롱기가 가득했다고 합니다.  뭐 이따위 그림을 그림이라고 그렸냐 이거죠.  가난뱅이 애새끼들이 허술한 강변에서 노는 것이 무슨 그림의 소재가 되는가 씹었을겁니다.  하지만 평단의 싸늘한 반응과는 달리, 이 작품은 곧 개인 콜렉터에게 팔려나갔는데, 이것이 조지 벨로우즈가 최초로 개인 콜렉터에게 판매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워싱턴의 코코란 미술관에 있지요.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Bill Bryson 의 The Life and Times of the Thunderkid 의 일화중에서 전쟁이후 베이비붐 세대로 성장했던 작가 빌 브라이슨의 회고가 소개됩니다.  그가 과장되게 술회하기를, 전후 베이비붐 세대였던 자신들은, 어딜가나 애가 넘쳐나서,  그가 살던 아이오와 시 변두리의 강변에 가면 수천명의 아이들이 모여서 멱감기를 했다고 하는데요.  물론 조지 벨로우즈 그림속의 아이들은 1907년 8월의 아이들입니다.  베이비붐 세대보다 50년전에 '이민자 붐' 세대의 아이들이지요.

 

이 그림이 제게도 낯설지 않은 이유는, 비록 지구 정반대쪽 대륙에서 성장했지만, 저 역시 60년대 70년대 베이비붐 시대의 일원으로 변두리 가난뱅이 아이로 성장했다는 공통 분모 때문일것입니다.  우리 할머니나 어머니의 회고로는 '네 오라비나 네가 태어나던 시절에는 어느 집에서나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어느집 여자나 배가 불러 다녔다. 애가 참 많이도 나왔다'고 합니다. 그 많은 애들이 뭘하고 놀았을까요.  사실 도심에서 성장했지만 저는 어린시절 골목에서 뭘 하고 놀은 기억이 별로 남아있지 않고,  즐겁게 논 기억은 모두 시골집에서였습니다.  여름 한철 시골 개울가에 가면 약속도 필요없이 아이들이 있었고, 우리들은 수영복도 없이 그냥 입은 옷을 벗어던지고 물에 들어가 놀았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저는 초등학교 2학년때까지 옷을 벗고  개울에서 물놀이를 했습니다.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을 아직 몰랐다는 것이지요) 여자아이나 남자아이나 그냥 물속으로 뛰어 드는 것으로 각자 부끄러운데를 가렸다고 생각하고 그냥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는 것이지요.   초등학교 3학년부터는 빤쓰라도 입고 물장구를 쳤고, 초등학교 5학년부터는 싸구려 나이롱 수영복을 입고 노는 '문명인' 반열에 들 수 있었지요.

 

제가 가끔 이런 저의 '야만적'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면,  서울이나 대도시의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난 또래 친구들은 저를 '원시인' 쳐다보듯 바라보며 무슨 외계인이나 거짓말장이를 대하듯 휑한 표정으로 대합니다.  자기네로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풍경속에 내가 있었다 이거죠.  하하하. 사람들은 자기가 처한 환경을 '평균적' 환경으로 인지하는 경향이 있어서, 자신의 경험 영역 바깥의 일은 외계의 일처럼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나'역시 피할수 없는 한계죠. 나 역시 그런 눈으로 남을 판단할 것이므로.  조지 벨로우즈가 '애정'을 갖고 변두리 아이들이 벌거벗고 노는 풍경을 그렸을때, 어떤이들은 '이것도 그림이냐'로 반응 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럴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지구상에 전쟁이 사라지지 않는거죠...

 

 

첨언:  그런데 위의 42명의 아이들 그림이...어쩐지 Thomas Eakins The Swimming Hole(1885) 라는 그림을 연상시킵니다.  토마스 이킨스 (1844-1916)는 미국 사실주의 미술가들의 '대부'쯤되는, 후에 활동하는 사실주의 화가들 (The Eight, Ashcan)에게 가장 영향을 끼쳤던 미국화가라 할 만 합니다.  조지 벨로우즈가 선배 대가인 이킨스의 그림을 염두에 두었는지 아닌지는 알수 없으나, 참 닮았단 말이지요...  ;-)

 

 

 

 

 

변두리의 푸른아침

 

멀리로 고층 건물들이 밀집한 것으로 보아 역시 뉴욕의 강변 풍경으로 보입니다. 역시 강변 부두에 뿌연 안개가 피어오르고 누군가 불을 피웠는지 흰 연기도 솟아 오릅니다.  대략 어느 추운 겨울 아침 강변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웅크리고 있으니까요. 추우면 웅크리쟎아요. 이들의 하루는 오늘도 고단하게 흐를것입니다.  이들의 곤고한 풍경과는 달리 푸른 색조가 아름답지요? 

 

 

Blue Morning (1909)

푸른 아침

Oil on Canvas

86.3 x 111.7 cm

2009년 9월 11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다리밑 외딴 숙소

 

그림 오른쪽 구조물이나 그 위를 지나는 판으로 보아 이것은 다리(교각)의 일부 같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뉴욕시의 어느 커다란 다리 아래에 사람들이 모여있고, 그림의 중앙에 6층짜리 건물이 똠방, 대똑하게 서있습니다.  이곳이 그림의 제목이 되는 '외딴 숙소'인것 같습니다.  'tenement' 라는 어휘를 언라인으로 검색해보면 이런 의미가 소개가 됩니다. (http://www.thefreedictionary.com/tenement)

 

1. A building for human habitation, especially one that is rented to tenants.
2. A rundown, low-rental apartment building whose facilities and maintenance barely meet minimum standards.

해석: (1)  세입자 임대용의 사람이 거주하는 건물
        (2) 극히 기초적인 수준도 안되는 시설을 갖추고 있는  싸구려 아파트 빌딩

 

 

The Lone Tenement (1909)

외딴 숙소

Oil on Canvas

2009년 9월 11일 National Gallery of Art 에서 촬영

 

 

그림 왼편에 사람들이 모여서 불을 쬐고 있는것 같지요?  멀리 강에 은은한 햇살이 비치는데, 다리밑의 사람들은 불가에 모여 서 있습니다. 웅덩이에 보이는 물은 살얼음이 얼었을것 같습니다.  이런 뉴욕의 풍경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활동해던 Georgia Totto O'Keeffe (November 15, 1887 – March 6, 1986) 가 그렸던 뉴욕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Georgia O'Keeffe
Cityscape with Roses
1932
oil
84 3/8 x 48 1/2 in.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Gift of the Georgia O'Keeffe Foundation

 

 

1932년이면 미국의 경제 암흑기 입니다. 그 당시 조지아 오키프가 묘사한 뉴욕은 장미빛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작가의 작업 취향이야 각자 자유이고 조지아 오키프가 매력적인 화가임에는 틀림없으나,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에 '사회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돈많은 사진가 스티글리츠의 사랑속에 경제적인 어려움도 모르고 예술에만 전념했겠지요.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만을 들여다볼때는 그의 작품에 감탄을 하다가도, 그 당시에 혹은 그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활동하던 작가들과 비교해보면, 어딘가 조지아 오키프의 미술세계가 '공허'하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사람'한테 관심이 없었던 사람 같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이러한 저의 비판적인 시각은, 사람이나 '세상'에 관심을 가진 저 자신의 취향에서 출발하는 것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냥 문득, 조지 벨로우즈의 뉴욕 풍경 그림을 보다가, 그 속의 가난뱅이 애새끼들이라던가, 빈민들의 풍경이 그려진 그림을 보다가 문득,  조지아오키프의 뉴욕 풍경이 떠오르면서...아하...이들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았던거구나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National Gallery of Art 에 조지 벨로우즈의 그림이 걸려있는 풍경입니다. 왼쪽부터 '권투선수' '푸른 아침' 그리고 '뉴욕' 그리고 '쓸쓸한 숙소'가 차례차례 보입니다.

 

 

 

초상화들

 

 

다음은 크라이슬러에서 '사냥'한 그의 '피아노 앞의 엠마' 입니다. 엠마는 그의 부인입니다. 뉴욕의 미술학교에서 만났는데 엠마는 그림을 그만두고 피아노에 전념했다고 합니다.  위의 Blue Morning 에 보였던 그 푸른 빛이 이 그림에서 좀더 뚜렷하게 표현됩니다. 아, 조지 벨로우즈는 이런 색감의 푸른빛을 좋아했구나 추측하게 됩니다.

 

 

Emma at the Piano (1914)

피아노 앞의 엠마

Oil on Canvas

94x73 (가로세로)

2009년 11월 29일 버지니아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촬영

 

 

 

조지 벨로우즈의 두 딸중 큰딸인 앤 입니다. 커튼과 허리 부분의 청색과 흰 드레스가 대조를 이루는데요. 역시 Blue Morning 이나 Emma at the Piano 에서 선보인 청색과 흰색의 대조가 이 그림에서도 나타납니다.

 

Anne in White (1920)

흰 드레스의 앤

147x108.9 cm

Oil on Canvas

2009년 11월 7일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에서 촬영

 

 

조지 벨로우즈는 엠마와 결혼한 이후로 두 딸의 아빠가 되었는데, 아내와 딸들을 지극히 사랑했던 그의 그림의 소재가 도시의 풍경에서 가정적인 것으로 변모합니다. 그래서 43년의 짧은 생에서 그의 후기에는 초상화 작품들이 그려집니다. 물론 그의 초상화 작품은 그의 아내 혹은 그가 살던 마을의 마을 사람들, 이런 보통 사람들입니다. 그는  생계를 위해서 삽화 작업도 계속했고, 시카고 미술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습니다.  그는 '맹장'이 터져서 그만 요절을 하고 맙니다.

 

 

2009년 12월 5일 redfox

 

 

그의 마지막 작품들

 

 

Ringside Seat (1924)

맨 앞줄 관람석

2009년 9월 24일 워싱턴 허시혼 미술관에서 촬영

 

 

 

The Picnic (소풍) c. 1924

Oil on Canvas

2010년 1월 23일 볼티모어 미술관 미국화 갤러리에서 촬영

 

 

조지 벨로우즈 (1882-1925)는 43세의 나이에 (우리나라식으로 따지면 44세가 되던 해에) 맹장이 터져서 요절한 화가인데요, 위의 두 작품들은 1924년, 그가 죽기 전 1년전쯤에 그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위의 경기장 장면이 좀 뿌옇지요?  제가 사진을 잘 못 찍어서 그런것이 아니라 작품 자체가 흐릿한 등불 아래의 장면을 묘사하듯 노리끼리하게 아슴프레 합니다.  제가 허시혼에 여러차례 들렀는데, 볼때마다 저 작품은 좀 어딘가 노란 안개속에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합니다.

 

아래의 '소풍'역시 그가 죽기1년전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요, 그림 분위기가 매우 독특합니다.  (그림 클릭하시면 큰 이미지로 보입니다.) 저는 이 작품을 미술관에 갈때마다 본 편인데요. 그러니까 제가 조지 벨로우즈에 대해서 알기 전에도 이 작품을 알고 있었습니다.  작가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한채로 분위기가 특이한 작품으로 기억을 한 거죠. 

 

제목이 '소풍'인데요, 전체적인 풍경이나 분위기는 암울하고, 음침하고, 곧 어디서 천둥 번개가 칠것같은 불안감을 줍니다. 갑자가 돌풍이 불것같기도 하고요. 물빛도 하늘빛도 심상치가 않아요. 구름조차도 예사롭지가 않고요.

 

가운데에는 소녀가 줄넘기를 들고 서 있고요, 그 아래에서 누군가가 마치 절벽에서 올라오는듯 손을 뻗치고 있죠. 낚싯대를 드리운 남자와, 피크닉 보자기를 펼친 여자가 왼편에 있는데, 오른편에는 한 남자가 사지를 벌리고 하늘을 향해 누워있습니다.

 

이 그림 앞에서서 이태전에 아이들과 대화를 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림이 세기말 적이야. 뭐랄까...암담해... 저 줄넘기를 들고 있는 소녀 말야, 저 줄넘기 이미지는 살바도르 달리도 그린적이 있고... 영원의 상징이라고도 해. 영원은 죽음과도 통한다는 거 알아? 죽음은 영원하쟎아.  줄넘기가 그리는 원, 그 원의 끝없는 회전, 인연의 굴레를 벗어날수 없음을 상징할수도 있고.  하필 줄넘기를 들고 언덕 가장자리에 서있는건 또 뭐니. 불안해보이쟎아.  전체적으로 참 불안해보여."

 

이 그림을 보면 벨로우즈가 즐겨 그렸던 청색 색조와 흰색의 하일라이트도 여전히 보이는데요, 신비로우면서도 스산하죠?  어쩌면 이것이 그가 사랑하는 두 딸과, 아내와 가졌던 인생 최후의 소풍이었는지도 모르죠. 그는 화면 오른쪽에 자신의 주검까지 그렸던 것인지도 몰라요. 그 자신은 그걸 의식하지 못했겠죠.

 

우리는 가끔 그런 얘기 하쟎아요. 어떤 사람이 죽었을때, 그가 죽기전에 나눴던 이야기나 일화들을 떠올리면서, "죽을걸 알고 그랬나?  그런 얘기를 하더라구..." 뭐 이런 얘기 하죠.  뭐 마치 죽을 사람처럼 유언처럼 몇마디 한 것이 마지막 말이 되기도 하고요.  생명은 자신이 언제 죽을지를 안대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뿐 안다는거죠.  그래서 죽음을 예견하는 말이나 행동을 할 수도 있다고 해요 (그런 설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냥 그런 관점에서 그는 이미 그의 죽음을 예견한 그림을 남긴것이 아니었을까.... 볼티모어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다시 만났을때, 그리고 문득 그의 생몰연대와 그림의 제작 년대를 비교해보다가, 문득,  번개치듯 문득,  이런 쓸데없는 상상도 했다는 것이지요.  그런 상상을 하자, 이 그림이 품고 있던 신비로운 세기말적 느낌에 대한 해답을 얻은 기분이 드는겁니다.  그는...다가올...죽음을...그렸나봐...

 

 

2010년 1월 29일 내용 보충 RedFox

 

 

 

 

 

 

 

생각의 지도, 인식의 다양성

 

The Geography of Thought : How Asians and Westerners Think Differently...and Why

 

 

2003년 4월의 나의 독서기록을 보면 '생각의지도'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번역 소개가 되기도 했던 The Geography of Thought 라는 책을 내가 꽤 흥미롭게 읽은 흔적이 남아있다.  이 책이 서양사람들과 아시아권 사람들의 인식의 차이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묘사했다는 혹평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차피 어떤 '이론'을 정리하다보면 다소 '단순하게' 처리되는 내용이 나오는 법이므로 이런저런 상황을 감안해서 좋은 점수를 줬던 기억이 난다. 2003년은 내가 미국에서 생활을 한지 얼마 되지 않던 시기이기도 해서, 이 책을 읽으면서 '그래, 한국과 미국이 이렇게 다르고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이렇게 다르더라'하면서 나름대로 나의 경험과 빗대어 생각을 해보기도 했었다.  아니, 여전히 나는 하루하루 살면서 그런 비교작업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좌측통행 우측통행

 

가령 자동차는 우측통행, 사람은 좌측통행이라는 식으로 교육받고 자라온 상식적인 한국인이었던 내가, 미국의 대학 복도에서 학생들이 수업을 마치고 쏟아져 내려올때, 좌측으로 얌전히 계단을 올라가는 아시아출신의 나와,  우측으로 우르르 몰려서 계단을 내려오는 미국학생들이 계단의 중앙에서 정면충돌하듯 맞닥뜨렸을때,  상식적인 코리안이었던 나는 '이 미국애들이 왜 좌측통행을 안하나? 정말 버릇없는 놈들이군!' 하면서 탄식을 했을것이고; 저쪽에서는 이 피부 노란 아시안이 왜 우측통행을 안하고 남의 길을 막고 이러는가? 하면서 투덜댔을지도 모른다.  미국에서는 자동차도 사람도 모두 우측통행 시스템이었던 것이니.

 

 

한국이 서구화되면서 '미국'의 문명이나 제도를 많이 가져다 썼을듯한데, 자동차가 '우측통행'을 하면서 사람은 '좌측통행'을 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잘은 알수 없지만, 내가 상식적인 차원에서 추측하건대,  현대식 자동차 문화가 적극적으로 도입된것이 해방이후이고, 그래서 '미국식' 도로 문화를 채택하게 된 반면, 복도에서의 '좌측통행'은 아마도 일본 식민지시절부터 그렇게 시행했을 것이고, 군사문화에서도 그대로 정착을 하고 있다가 그냥 우리 생활속에 뿌리를 내렸을 것이다. (이는 나의 추측일 뿐이다.)  어찌됐건 나는 왼손잡이로 태어나서 오른손잡이 문화에 적응해서 사는 사람이라서, 가끔 방향에 착오를 일으키기도 하는데, 이는 '왼손잡이'들이 피치못하게 겪어야하는 설움일수도 있지만, 오른손잡이들의 세상에서는 그들이 멋대로 정한 규율을 따라주는 수밖에.  (그래도 가끔 오바마 대통령이라던가, 우리들의 스타가 테레비에 나올때, 이들이 왼손으로 싸인을 할때, 뭐 그럴때 우리들은 불법 지하단체의 회원들인것처럼 혼자만의 미소를 날리기도 한다. 저기 우리 패거리가 있다구~ )

 

 

가로세로? 세로가로?

 

미국미술 전문(?) 블로그를 만들어놓고 이따금 내가 미술관에서 찍은 작품 사진을 정리하면서 글을 쓰다보면, 그림의 크기를 적게 될 때가 자주 있다.  나는 가능하면 그림의 상세하고도 정확한 정보를 내 블로그에 자료화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다보면 미술책을 뒤져서 크기를 확인하고 옮겨적게 되는데 이때 미술품 크기 표기법의 두가지 특징을 만나게 된다.

 

(1) 미국의 미술책에 표기되는 그림 크기는 '인치 (inch)'로 표기되는 경우가 종종있다.  사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는 센티미터에 익숙하기 때문에 인치표시는 감이 잘 안온다.

 

(2) 친절하고 사려깊은 미술책 편집자는 고맙게도 '인치'와 '센티' 두가지 표기를 해 놓는다. 이런 자료를 보면 참 고맙다. (꾸벅꾸벅. 굽신굽신.)  그런데 내가 들여다보니 이들은 평면, 네모의 크기를 표기할때 '세로 x 가로'의 양식을 따른다.  그러니까 일단 높이(세로)가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폭 (가로)가 나온다.  세로-가로로 표기를 하는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는 네모의 크기를 말할때, 가로-세로라고 저절도 말하게 된다.  한번 해보시길. 당신은 세로가로 라고 말하는가 아니면 가로세로 라고 말하는가?  한국인들은 대개 '가로세로'라고 말 할 것이고, 따라서 크기를 말할때 일단 폭부터 말하고 그다음에 높이를 말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걸 세로-가로로 표시를 할까? 아니면 가로-세로로 표시를 할까? 고민을 하다가 그냥 한국인인 내 스타일대로 '가로-세로' 표시를 한다. 미술책에 적힌 크기를 다시 내 식으로 순서 바꿔서 정리를 하는것이다.  그러면서 계속 헛갈린다, 내가 이것을 한국인인 나의 표준으로 바꿔서 고쳐 쓰는것이 타당한지 아닌지, 나도 잘 모르겠는것이다. (한국에서는 미술품 크기 표시할때 어떻게 할까?)

 

그래서 이런 세로가로냐? 가로세로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보면...이것이 어쩌면 한국인인 나와 세로가로로 살아가는 미국사람들의 사고에까지 영향을 끼치거나 혹은 우리는 그런식의 다른 인식구조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무슨 말씀인가하면,

 * 한국인인 나는 가로-->세로의 사고를 한다. 가로는 수평적 (horizontal) 상태이고, 세로는 수직적 (vertical) 상태이므로 한국인인 나는 수평적인 점에서 출발하여 수직적으로  점진 성장하는 사고를 한다. 이는 우리들의 '좌식'문화와도 연관되어 보인다.

 * 미국인인 아무개는 세로-->가로의 사고를 한다.  어떤 계층 (하이어라키 hierarchy)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는 이들은 '입식'문화와도 연관되어 보인다.

 

한국인이 수평적 사고, 미국인이 수직적 사고를 한다고? 미국인이 계층적 (hierarchical)사고를 한다고?  오히려 한국이 위계질서가 뚜렷하고 미국인이 수평적인 질서를 유지하는것 아니야? 누군가 이런 반문을 할 수 있겠다 (나 스스로 내게 이런 질문을 던져봤다)  이에 대한 내 대답은 '천만에 말씀이오~'이다.

 

한국인의 정서는 기본적으로 '불교적'인 가락이 있고, 천지 만물은 동등하다는 정서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벌레 한마리와 사람 사이에 큰 차이를 느끼지 않는 문화권이다.  만물이 동등하다는 말씀이다.  나는 그리고 그런 정서를 갖고 성장하고 자랐다. 그래서 나는 나를 수평적 정서의 인간으로 분류한다.

 

미국인의 정서는 기본적으로 '유일신' '기독교' 가락에서 출발하고, 기독교에는 '위계질서'가 분명히 존재한다. 위에 신이 있고, 그 아래 인간이 있고, 인간 아래에 천지 만물이 있다.  상하가 이렇게 뚜렷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나는 이들을 수직적 정서를 가진 사람들로 분류한다.  

 

그러므로 나는 가로세로로 사고하고, 미국인들은 세로가로로 사고한다. (단순화 시켜서 보자면 이런 측면도 있을수 있다는 것이다.)

 

 

목수의 집그림

 

신영복 선생님의 서화 에세이집 '처음처럼' 36페이지에 실린 그림

 

 

목수의 집 그림

 

노인 목수가 그리는 집 그림은 충격이었습니다.

집을 그리는 순서가 판이하였기 때문입니다.

지붕부터 그리는 우리들의 순서와는 반대였습니다.

먼저 주춧돌을 그린 다음 기둥, 도리, 들보, 서까래...

지붕을 맨 나중에 그렸습니다.

그가 집을 그리는 순서는 집을 짓는 순서였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그림이었습니다.

 

목수는 목수의 안목으로 그림을 그릴것이고,  서양식 건축을 공부한 사람은 그가 배운대로 그림을 그릴것이고, 집이 없는 사람은 자신이 갖고 싶은 집 그림을 그리게 될것이다. 사람이나 사회, 집단들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존재하고, 때로 그 차이는 우주의 폭처럼 크기도 하지만, 우리가 그 차이를 인지하게 될때 우주처럼 광대하던 그 차이의 간격은 '이해'로 메꿔질수도 있고 혹은 끈끈하게 화합도 가능해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 집 창가에 앉아 이방인의 시선으로 밖을 내다보며 시간을 보낸다.  우리가 어느 별에서 온 생명체라면 지구는 우리에게 낯선 땅이고 우리는 후에 우리의 별로 돌아가 '지구에 갔었는데....' 즐거웠노라고 말하게 되기를...(천상병 시인처럼)

 

 

 

 

 

 

 

 

 

2009년 12월 4일 금요일

The Eight (Ashcan School) :(1) Henri

 

Snow in New York  뉴욕의 눈 (雪),  1902년

Robert Henri

Oil on Canvas

2009년 9월 11일 워싱턴 국립 미술관에서 촬영

 

 

로버트 헨라이 (Robert Henri 1865-1929)는 미국 사회사실주의(Social Realism) 미술가들의 스승으로 알려진 화가 입니다.  이 사람의 가족력이 좀 흥미로운데, 본디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Cozad 였고 그래서 로버트 헨라이는 원래 Robert Henry Cozad 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웃 사람과 다투다가 총질을 하는 바람에 이웃사람게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야반도주를 하는 수 밖에요. 결국 가족들도 야반도주한 가장을 따라 도망을 가게 되었는데, 훗날 새로운 삶을 위해 성씨를 바꿔버렸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의 이름이 졸지에 로버트 헨라이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아, 그는 미국출신으로 유럽에서 주로 활동했던 화가 Mary Cassett (메리 커셋)과도 친척이라고 합니다.  메리 커셋에 대한 소개는 다음으로 미루기고 하겠습니다.

 

헨라이는 펜실베니아 미술학교에서 수학했고, 당시의 미국 젊은이들이 그러하였듯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인상파 화가들의 영향을 받기도 했습니다. 1891년 필라델피아로 다시 돌아온 헨라이는 1892년부터 미술 학교에서 미술 교육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당시 인쇄매체의 삽화가로 활동하던

 * William Glackens

 * Goerge Luks

 * Everett Shinn

 * John French Sloan

 

등과 어울리며  Ralph Waldo Emerson,  Walt Whitman, Henry David Thoreau 의 사회사상 관련 글을 읽습니다.  랄프 왈도 에머슨은 미국의 '초절주의 (Transcendentalism)'와 'Self Reliance (자기 주체)' 정신으로 널리 알려진 철학자였고, 월트 휘트만은 미국 최초의 산문시인으로 풀잎과도 같이 강인한 대중들을 노래한 시인이며,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우리에게 월든호수 (Walden) 라는 작품으로 알려진 역시 Self Reliance 정신의 신봉자였던 인물입니다.

 

이들은 이후에 활동의 본거지를 뉴욕으로 옮기게 됩니다. 헨라이는 뉴욕의 예술학교 (New York School of Art)에서 교편을 쥐게 되는데 이때 Edward Hopper, Rockwell Kent, George Bellow, Stuart Davis 등을 가르치게 되지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의 미국의 상황은, 사회적으로는 노동자들이 임금이나 작업 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동조합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1904년에는 한해 동안 전국적으로 4,000 번의 파업이 진행되었다는 집계가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노동운동은 주로 시카고, 디트로이트, 샌프란시스코, 뉴욕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미국의 고등학생등의 필독서중에 Upton Sinclair (업튼 싱클레어)의 The Jungle (정글, 1906)이라는 소설이 있는데,  고기 가공장에서 일하는 이민자 가족의 비극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이민자들은 Self Reliance (자기 주체) 정신으로 열심히 살아가려고 애쓰지만, 이들이 처한 노동 환경은 호락호락 하지가 않습니다. 약육강식의 정글이라는 얘기지요.  미국의 Self Reliance 라는 정신적 미덕도 통하지 않는 현상을 싱클레어는 고발하고 있는데요, 이와 같은 소설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져나오고, 노동운동도 활발하게 진행되는 중심에 당시의 미술가들도 서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당시 미술가들은 사실적인 사회, 사람들의 풍경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런 흐름의 선두에 서 있던 집단이 헨라이를 위시한 애쉬캔 (Ashcan) 그룹이고, 이들이 후에 The Eight (8인회)로 거듭나게 되지요. 헨라이는 그의 친구들이나 제자들에게  주변의 사람과 삶의 풍경을 그리되, 이를 상대가 알아채지도 못할 정도로 잽싸게 그리라는 조언을 했다고 합니다.

 

"Do it all in one sitting if you can," he advisded them. "In one minute if you can."  (Pohl, 2008) 

(해석: "그자리에서 한번에 그려버리게나," 헨라이는 그들에게 충고했다. "가능하다면 일분 안에." )

 

1902년 뉴욕에서 전시회를 가진 후 그는 풍경화를 접고 초상화를 주로 그리게 되었으며, 1908년에는 맥베스 갤러리에서 "The Eight (팔인회)" 전시회를 열게 됩니다. 사실 이 전시회를 열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마치 인상파 화가들이 프랑스의 살롱전에서 푸대접을 받은 후에 홧김에 인상파의 세기를 열었던 것처럼, Ashcan 화가들이 미국의 전시장에서 푸대접을 받자 미술비평가들과 정면으로 한판 단단히 붙은 후에 이 '팔인회' 전시회를 열게 된 것인데, 그 결과는 대중적으로나 비평계 모두 아주 호의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헨라이는 사실 그의 미술 작품 보다는 그가 미국 사회사실주의 화가들의 지도자 역할을 잘 해냈고, 그리고 미술 교육에서 공로가 크다는 점에서 오히려 미술사적 인정을 받는 편입니다.

 

헨라이가 후기에 초상화로 돌아서긴 했는데, 그가 초상화 작업을 통해 사회 각계 각층의 사람들을 화폭에 담아보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미술관에서 발견한 그의 초상화 작품들은 악사, 소년, 인디안 소녀,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Gypsy with a Bandurria (1906)

반두리아를 들고 있는 짚시

Oil on Canvas

2009년 12월 29일 버지니아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촬영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헨라이가 그린 작품입니다. (제가 헨라이에 큰 관심이 없다보니, 사진 상태가 성의가 없어보이지요? 예... 그래도 정성껏 찍을걸 하는 후회가 생깁니다.)  헨라이는 유럽의 '마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으로 소개가 되는데요, 이 그림 사진을 보니 '마네'의 피리부는 소년'과 비슷한 구도와 소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피리부는 소년 창작 년도를 찾아보니 1866년이군요. 다리 모양 닮았죠?  전체적인 구도도...

 

 

Manet, The Fifer (1866)

 

 

 

 

 

 

The Beach Hat (1914)

비치 모자

Oil on Canvas

2009년 10월 30일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촬영

 

 

 

 

Boy with Plaid Scarf (1916)

격자무늬 목도리를 한 소년

Oil on Canvas

2009년 10월 30일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촬영

 

 

 

 

Indian Girl in White Ceremonial Blanket (1917)

제사용 담요를 휘감고 있는 인디안 소녀

Oil on Canvas

2009년 10월 3일 워싱턴 코코란 미술관에서 촬영

 

 

 

이 작품은 헨라이가 뉴멕시코주의 산타페를 두번째 방문했을때 현지의 인디언소녀를 모델로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소녀의 이름은 Julianita 로 San Ildefonso Indian 종족이었다고 합니다.

 

사실, 아마도 제 그림 사진 파일을 뒤져보면 어딘가에 헨라이의 초상화 사진이 몇장 더 있을것 같습니다.  때로는 미술관에서 헨라이의 작품이 보일때,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나한테 매력이 없어 보였으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여기저기서 중구난방으로 봤던것들을 한페이지에 시간순서대로 정리하다보니 제가 미술관에서 보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게도 됩니다. 그냥 하나 하나 볼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 예를 들자면 헨라이의 초상화의 소재가 된 인물들이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혹은 별 관심을 끌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 인물들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면서도 모두 닮아보인다는 것 (이는 헨라이의 표현 스타일에 일관성이 있어서 그러할 것이겠지요) 뭐 이러한 것들 입니다.  짚시 악사 그림과 마네의 피리부는 소년 그림의 유사성도 미술관에서 발견한 것이 아니라,  사진을 쳐다보면서 생각한 것이고요.  그래서,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어떤 '현상'을 관찰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미술관에서 미술작품을 눈으로 감상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후의 사색이나 반추 역시 의미있는 일이라는 것.

 

돌아보면, 저는 미술관에서 작품들을 구경하면서 '쾌락'을 느끼기도 하지만, 후에 사진들을 다시 정리하거나 관련 페이지를 적으면서, 그제서야 깨닫게 되는 사실들도 많은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의 '미국 미술 이야기' 블로그 프로젝트를 기쁘게 생각합니다.  제가 깨닫게 되는 것들이 페이지가 쌓일수록 늘어가니까요.

 

 

 

 

 

관련 페이지들:

 

 

 

http://americanart.textcube.com/118

http://americanart.textcube.com/133

http://americanart.textcube.com/137

 

 

참고문헌:

 

1. Frances K. Pohl (2008), Framing America: A social history of American art (2nd ed.), Thames & Hudson; New York, NY

2. Suzanne Bailey (2001), Essential History of American Art, Parragon Publishing, Bath BA, UK

3. William G. Scheller (2008), America: A History in Art, The American journey told by painters, sculptors, photographers, and architects. Black Dog & Leventhal Publishers; New York, NY.

4. Marcha N. Hagood & Jefferson C. Harrison (2005) American Art at the Chrysler Museum: Selected paintings, sculpture, and drawings. Chrysler Museum of Art: Norfolk, VA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사회주의, 미국

http://www.claremontmckenna.edu/hist/jpetropoulos/arrow/holocaust/Franklin_Roosevelt.jpg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1882-1945)은 1932년에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래로, 죽을때까지 (1932-1945) 미국대통령직을 유지했다. 그는 미국에서 유일무이하게 4선 까지 이른 사람이며, 미국 대통령들중에서 3선 이상을 한 유일한 사람이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이후로 대통령을 2선까지만 가능하게 하는 법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미국이 어떤 지도자의 '독재'의 가능성에 눈을 뜨고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고안해낸 방법이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12년도 넘는 기간동안 미국을 통치하였는데, 경제 대공황때 그가 취한 경제정책 (소위 뉴 딜 정책으로 알려져 있음)이 널리 알려져 있다. 세세한 내용까지는 차치하고라도, 그가  여러가지 국책사업을 펼치가 국가가 주도하는 경제정책을 펼쳐서 경제난을 이겨내려 했다는 것은 중고등 학교 사회책이나 세계사책에도 소개되는 내용이다 (나는 중학교때 이런 내용을 배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국에서는 Social Security (사회복지) 제도가 있는데 이 사회복지법 (social security act)을 최종 승인하고 시행한 대통령이 바로 이 루즈벨트 대통령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기초생계를 보장하는 '사회복지'의 초석이 마련되었다고 한다면,  '의료복지'의 초석을 만들고자 하는 이가 현재의 '오바마' 대통령이다. (그가 미국 역사상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을 저지르려고 하는 것인지...) 

 

 

 

바로 이러한 '국책사업,' '국가 주도의 경제정책,'  사회복지 정책등을 이유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을 '사회주의자'라 평하는 이들도 있다.  미국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군에 속하는 '최장기 대통령직'을 수행한 대통령이 '사회주의자'라고?  우리는 이런 의문을 품을수도 있다.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대략 간단하게는 사회 통치 시스템의 측면에서 '민주주의'의 대척점에 '사회주의'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다수가 동등한 권리를 누리면서 동등하게 통치하는 시스템이 '민주주의'라면,  소수의 '통치집단'이 사회 운영을 관장하고 계획을 세우고 시민들에게 각자의 역할을 분담시키는것이 '사회주의'적 통치체제라 할수 있다.  경제 구조적으로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서로 상반된 방식으로 굴러가는데, 대개 민주주의적 방식과 자본주의 체제가 서로 궁합이 맞아보이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체제가 상통해보이므로 우리가 흔히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뒤섞어서 인지하기도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우는 '대통령제'를 탄생시킨 미국, 자유 경제와 자본주의의 꽃으로 알려진 미국땅에서 미국을 부흥시킨 존재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거론되고, 하필 그의 정책과 관련하여 그를 '사회주의자라 부른다니 이것은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그래서, 우리는 사회주의는 이것이고 민주주의는 저것이다 라던가, 자본주의는 이것이고 공산주의는 저것이다라는 양분법식 생각에서 한걸음 물러설 필요가 있어 보인다.  루즈벨트는 국가의 경제위기를 극복하는데 노력했고,  사회주의적 방식이라  일컬어진 뉴딜정책은 소기의 효과를 발휘했으며, 뉴딜정책의 발판 위에서 미국은 다시 '민주주의'와 '자유경제' '자본주의'의 꽃을 활짝 피울수 있었던 것이니...

 

 

 

http://americanart.textcube.com/65

스미소니안 국립 초상화 박물관에 걸린 벤샨의 루즈벨트 대통령 초상화

 

 

 

(미국미술 공부하다 잠시 생각) 2009년 12월 4일 RF

2009년 12월 3일 목요일

Joshua Johnson

 

Mrs. Abraham White, Jr. and Daughter Rose c. 1808-1809

Oil on Canvas

64.8 x 76.2 cm

2009년 11월 버지니아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촬영

 

 

 

http://americanart.textcube.com/34  페이지에서 소개해드린대로 Joshua Johnson (조슈아 존슨 1763-1824) 은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태생의 흑백 혼혈 초상화가 입니다.  일설에 따르면 조슈아 존슨은 당대의 미술가였던  Charles Wilson Peale 과 함께 미술 수업을 받았다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림속의 주인공은 이 초상화를 그린 직후에 30세의 꽃다운 나이로 요절을 했다고 합니다.  여인의 손에 들려있는 반쯤 열려있는 책, 그리고 아이의 손에 들려있는 들딸기는 조쥬아 존슨이 즐겨 그리는 스타일이었다고 합니다. 앞서의 페이지에 소개된 그림들보다 나중에 그려진 그림이라서 그런지 그림도 좀더 세련되어 보입니다.

 

크라이슬러 미술관 소장품입니다.

 

 

2009년 12월 3일 redfox.

 

 

 

 

Edward Hopper : New York Pavement 뉴욕의 보도 (1924/5)

Edward Hopper (1882-1967)

New York Pavement (1924 or 1925)

뉴욕의 보도

Oil on Canvas

75.6 x 62.9cm (가로 x 세로)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 '월척'을 낚은 기분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1924년이나 1925년 작품으로 추측되므로 그가 42세때, 아직 세상이 '대가'의 출현을 알아보지 못하던 시기의 그림이라 할 만 합니다.  '뉴욕의 보도'라는 제목처럼 뉴욕 시내의 어떤 건물 앞 풍경을  맞은편 건물 2층이나 3층 혹은 옥상에서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각도로 잡아 놓았습니다.  얼핏 수녀복을 입은듯한 여인이 유모차를  밀며 걸어가는데 이 여인의 머리 두건이 펄럭거리는 것으로 보아 바람이 휙 부는듯 합니다.  도심의 골목길 앞을 지날때 문득 불어오는 골바람일지도 모르지요.

 

여인의 나부끼는 머리두건이나 그의 방향성에서 어떤 움직임이 느껴지지만, 그외의 모든 장치들은 요지부동으로 꼼짝도 않겠다는 태도로 무겁게 버티고 있습니다. 회색돌로 이루어진 건물과 역시 같은 색조의 보도에는 어떤 틈새도 보이지 않습니다.  유모차속의 아이의 얼굴도 보이지 않습니다.  건물의 창 안쪽으로 노란 블라인드가 드리워져 있고, 가운데 창은 커튼도 열려있지만, 커튼 안은 캄캄하기만 할뿐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수녀처럼 보이는 이 사람의 검은 옷과, 유모차의 검정빛, 그리고 건물 입구나 유리창 안의 검정색은  노란 블라인드와 대조를 이루면서 더욱 어둡게 느껴집니다.

 

저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서 '엄마, 아버지, 아이들' 이런 '가족'이 어우러진 풍경을 본 적이 없고, 아이들이나 아기를 본 적도 없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이 그림이 '아기'가 등장하는 유일한 그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조차 '아기'는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가 '아기'의 존재를 추측할 뿐. 

 

우리에게 호퍼의 그림이 외롭거나, 쓸쓸하거나, 혹은 을씨년 스러워 보이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의 그림에 '미래'를 상징하는 '아이'가 없어서 그런것은 아닌지...  문득, 유모차를 끌고가는 검은 제복의 유모를 보니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어머니와 아기의 관계가 아닌 을씨년 스러운 제복을 입은 (저승사자 같아보이는) 유모의 보호를 받는 이 아기가 행복할것 같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그림이 아주 암담해보이지 않는 이유는 아기를 덮고 있는 붉은 천,  유모의 붉은 뺨, 건물 2층 부분에 보이는 붉은 벽돌 일부, 그리고 창문 블라인드의 햇빛같이 고요한 연노란색이 여기저기서 '생기'를 보내기 때문인데요, 이런 미묘한 생기 때문에 우리들은 호퍼의 쓸쓸맞아 미치겠는 그림앞에서 아쉬운듯 아쉬운듯 떠나지 못하고 맴돌게 되는 것 같습니다.

 

 

2009년 12월 3일 redfox

 

Edward Hicks: 조지 워싱턴

http://americanart.textcube.com/184  에드워드 힉스가 꿈꾼 평화의 나라 페이지에서 퀘이커 교도였던 힉스가 즐겨 그린 소재 두가지를 소개한바 있습니다. 한가지는 미국 정착사를 바탕으로 한 '평화의 왕국' 주제이고, 또 한가지는 성서를 바탕으로 한 '노아의 방주' 주제입니다.

 

http://americanart.textcube.com/190 버지니아 남부 해안도시인 Norfolk 에 위치한 크라이슬러 미술관에서는 에드워드 힉스의 또다른 역사화를 두 점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Washington at the Delaware  c. 1849

델라웨어의 워싱턴

Oil on Canvas

90.2cmx71.1cm (가로 세로)

 

 

이 그림은 훗날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조지 워싱턴이 미국 독립전쟁 당시 영국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델라웨어강을 건너는 역사적인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힉스가 독창적으로 창작했다기 보다는 현재 보스톤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Thomas Sully 의 Passage of the Delaware (1819)  525.8cm x 372.2cm 를 본떠서 그린 것입니다.

 

Thomas Sully 의 그림

 

 

남의 그림을 그대로 베껴 그린것이 뭐가 대단하다고 박물관에 모셔 놓는가?  이런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에드워드 힉스가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받은바 없고, 그자신이 순수 예술가라기보다는 마차를 장식하거나 표지판을 잘 만들어내는 '기술자'였고,  혼자서 익힌 그림 재주가 뛰어나서 다른 사람의 그림이 맘에 들때 이를 베껴그리거나 이런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선물하거나 팔면서 살았다는 측면을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를 '풍속화가'로 분류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퀘이커 교도들이 '평화주의자'들이므로 전쟁을 거부하고, 그래서 병역도 거부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열렬한 퀘이커 교도였던 에드워드 힉스가 워싱턴의 역사적인 '전쟁'을 즐겨 그렸다고 하는 것이지요.  에드워드 힉스는 워싱턴과 독립군을 '신의 대리인'으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그의 애국심이 그의 종교관에도 영향을 끼친 것인데,  '호국불교' 정신하고도 비슷하군요 =) .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1776   c.1840-1845

1776년 독립선언

Oil on Canvas

74.3cm x 65.4 cm (가로세로)

 

 

1776년 독립선언을 묘사한 이 그림의 이마에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1776 이라고 새겨진 것이 보입니다.  힉스가 '표시판' 만드는 기술자였다는 대목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에드워드 힉스를 '순수 미술'의 차원에서 보기는 힘들고, 오히려 '생활속의 장인'의 측면에서 해석할때 그의 정체성에 생생하게 다가갈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때로 저는 이렇게 서툰 환쟁이들을 좋아합니다. 우리 엄마의 그림과 많이 닮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