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가 원래 체격이 나 만큼 했는데, 나이가 드시니까 키가 작아지셨다.
사람들은 내가 엄마의 판박이라고 한다. 똑같이 생겼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우리 엄마가 30년전 모습이고, 우리 엄마는 나의 30년 후 모습이다.
엄마는 서른 넘어서 나를 낳으셨으니까.
(그런데 내가 *주관적*으로 생각하기에 내가 우리 엄마보다 더 이쁘다. -.-)


엄마가 원래 체격이 나 만큼 했는데, 나이가 드시니까 키가 작아지셨다.
사람들은 내가 엄마의 판박이라고 한다. 똑같이 생겼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우리 엄마가 30년전 모습이고, 우리 엄마는 나의 30년 후 모습이다.
엄마는 서른 넘어서 나를 낳으셨으니까.
(그런데 내가 *주관적*으로 생각하기에 내가 우리 엄마보다 더 이쁘다. -.-)
나무한테 찡그린 얼굴로 인사하지 마세요
나무한테 화낸 목소리로 말을 걸지 마세요
나무는 꾸중들을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답니다.
나무는 화낼만한 일을 조금도 하지 않았답니다.
나무네 가족의 가훈은 '정직과 실천'입니다.
그리고 '기다림'이기도 합니다.
봄이 되면 어김없이 싹을 내밀고 꽃을 피우고 또 열매 맺어 가을을 맞고
겨울이면 옷을 벗어버린채 서서 봄을 기다릴 따름이지요
나무의 집은 하늘이고 땅이에요
그건 나무의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때부터의 기인 역사이지요
그 무엇도 욕심껏 가지는 일이 없고 모아두는 일도 없답니다
있는 것만큼 고마워하고 받은 만큼 덜어낼 줄도 안답니다.
나무한테 속상한 얼굴을 보여주지 마세요
나무한테 어두운 목소리로 투정하지 마세요
그건 나무한테 하는 예의가 아니랍니다.
**
나의 K 선배가 자신이 읽고 있던 시화집을 쓱 내밀어 '갖고 가라'고 주었다. 그 시집에서 가장 내 맘에 드는 시.
밤에 집에 돌아와 안방에 큰대자로 누워 엄마에게 소리내어 읽어 드리니 "그 책은 여기 놓고 가거라" 하신다. 내 그럴줄 알았다. 내가 이 시집을 소리내어 읽어드리면 엄마가 "그책은 여기 놓고 가거라" 하실줄 알았다. 그래서 밤 늦도록 나는 안방에 큰대자로 누워서 엄마가 좋아하실만한 시들을 소리내어 읽어드렸다.
아무래도 나의 K선배가 내게 선물한 이 책을 나는 엄마에게 선물하고 떠나게 될 것같다. 서점에 들르면 한권 더 살수도 있고, 그것도 귀챦으면 그만 둘 수도 있고... 나는 뭘 사거나 새로 장만하는 일들이 점점 무겁게 느껴진다. 나는 안방에 큰대자로 누워 엄마를 위해 시들을 낭독했던 그 기억만 가져가도 될것도 같다.
나의 K선배가 나를 좋아하는 이유는 내가 '마음이 가난한 자'이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마음이 가난한 자'를 칭했을때 그것이 어떤 사람이었을지 알수 없는데
나는 마음이 욕심으로 가득찬 사람임을 내가 알기에, 한숨이 나왔다.
나무를 위한 예의. 이 시는 곱게 적어서 벽에 붙여놓고, 어울리는 그림도 그려보고 싶은, 아름답고 힘있는 글이다. 무릇 나무 뿐이겠는가. 모든 생명가진것, 생명가지지 않은 것. 하늘아래 삼라만상 어느것 하나에도 찡그려서는 안될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웃어야 한다. 그러면 나무가 기뻐할 것이고, 그 나무를 지으신 하느님이 기뻐할 것이다.

우리 오빠는 세계 굴지의 기업의 임원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오빠는 정말 월급을 많이 받는가보다. (부럽다). 오빠가 서울의 어떤 산동네로 이사를 갔다고 한번 놀러 오라고 해서 길을 물어 물어 가 보았다. 이 동네는 차 없이는 찾아가기 힘들어 보였다. 사실은 집근처까지 간 후에 거기서 오빠의 차를 타고 올라갔다. 오빠의 차는 내가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 차인데, 덕분에 비싼차도 한번 타 보았다.
오빠네 강아지 또또는 크기가 내 주먹보다 조금 큰 정도의 아주 작은 개다. 요놈이 갑자기 손님들이 쳐들어 오니까 긴장을 했는지 내 손을 앞니로 꼭 물고는 - 미안해서 쩔쩔맨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다가와서 품에 안겼다.
이 동네는 한마디로 '산동네'인데 가난한 사람들이 안보이고 부자들만 보이는 동네인듯 하다. 내가 살다 살다 가끔 부잣집을 가본 적도 있고, 평창동에 축구장만한 정원을 가진 집에도 놀러가 본 적도 있는데, 우리 가족중에 이렇게 으리으리한 집에서 사는 사람은 처음 본 터라 무척 신기하였다. 오빠는 좋겠다. 부자라서. 하하. 내동생의 딸은 큰고모를 많이 닮았다고 해서, 우리 언니인 큰 고모가 특히 그 녀석을 이뻐한다. 우리 언니가 입고 있는 셔츠는 무슨 일본사람 이름을 가진 디자이너의 비싼 옷이라고 하는데 내가 얼마 주고 샀냐고 물으니까 말을 안해준다. 되게 비싼 옷인가보다.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동그라미가 한개 혹은 두개 더 붙어있는 옷인가보다. 나는 뭐든 '이거 얼만데?'하고 물어보는 '천박한' 습관을 갖고 있다. 하하하. 오빠집 테라스에서 우리 언니와 내 조카 (내 동생네 막내 딸.)
그런데 돈을 얼마나 벌어야 이런 동네 정원딸린 개인주택을 소유할 수가 있는걸까? (갸우뚱.)

이 사진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내 작품이다.
이 산동네의 집은 사차원의 놀이터 같은 구조이다. 테라스에서 옥상으로 연결되는 사다리가 있는데 조카녀석 하나는 다람쥐처럼 이미 올라갔고, 여자 조카아이가 올라가고 싶어서 기웃거리고 있다. 창문 안의 거실에서는 엄마와 올케 언니가 있고, 그리고 사진을 찍고 있는 나와 P선생과 우리 언니가 거실 창문에 어른거리고 있다.

우리 올케 언니는 엄마의 옷을 사러 갔다가 생각 난 김에 언니와 나와 작은 올케의 옷도 선물로 사왔다며 모두 입어볼것을 요구 했다. 그래서 모두들 올케 언니가 사온 드레스들을 떨쳐 입고 사진들을 찍었다. 사실 우리 언니가 입고 있는 오렌지색 드레스는 내가 골라서 입었다가, 우리 언니한테 넘긴 것이다. (내가 저 드레스 입고 앉아있을 일이 없을것 같아서...) 나는 우리 언니한테 머리를 길러서 양갈래로 땋으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초원의 집 - 로라 잉걸스 패션이 될 것이다.
우리들은 이 옷을 입고
* 메이 플라워 타고 미국에 도착한 초기 정착민들 같다
* 펜실베니아 아미시 마을 여자들 같다
* 오지에 숨어 사는 어떤 종파 여자들 같다
* 초원의 집 여자들 같다
뭐 이런 수다를 왁자지껄 떠들면서 웃어댔는데
우리 엄마는 우리들이 떠드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는채로, 자식들이 깔깔대는 것이 좋아서 깔깔대셨다.
원래, 우리 엄마와 형제들이 모두 모이면,
오빠는 점잖게, 말없이 그냥 빙글거리며 앉아있고
언니 역시 얌전하게 엄마 모시고 앉아있고
내 동생 녀석도 언제부터인가 지가 내 오빠인양 거드름을 피우고 점쟎게 앉아있기 때문에
결국, 내가 내 거친 입담으로 흥행사가 되어주는 편이다.
그래서 내가 육두문자와 이죽거림과 어리버리한 사람 놀리기로 난처한 질문 던져가며 '광대질'을 시작하면
온 식구가 이리저리 굴러가며 배를 잡고 웃게 된다.
나는 우리 식구들을 잘 웃긴다.
그런데 또 한편 생각하면
우리 가족들이야말로 내 유머를 알아듣고 이해해주는 유일한 집단인것도 같다.
초원의 집, 작은 아씨들, 혹은, 빨강머리앤을 연출하고 있는 우리 엄니와 언니.

나는 가끔 내 가족에 대해서 가까운 사람에게 간단히 정리 요약해서 이야기 할때,
시댁쪽으로 가면 그중 내가 부자이고
친정쪽으로 가면 그 중 내가 가난뱅이에 속한다, 고 말한다.
내 형제들이 모두 나보다 풍요롭게 잘 살아주어서 나는 걱정이 없어서 좋다.
또, 시댁쪽으로는,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어 줄 수 있는 형편이라서 역시 나는 좋다.
모두들 맨주먹으로 시작해서 살아왔는데
내 형제들은 모두 나보다 부자이다.
나만 돈 모으는 재주가 없는것도 같다.
그렇지만, 나 역시 돈 모으는 재주는 없으나, 내 삶이 충분히 축복으로 가득차있다고 믿기 때문에 별 불만은 없다.
우리 형부는 일이 바빠서 오지 못했는데, (아직도 만나보지 못했다) 형부는 내심... 처제인 내가 '뚱보'가 되었기를 바라는 눈치다. 우리 언니에게 처제의 체중이 얼마쯤 되는지, 살은 쪘는지 물어봤다고 한다. 현재 우리 언니가 나보다 날씬하다. (형부는 통쾌할 것이다.). 내가 며칠 이내로 살을 좀 빼가지고 형부 앞에 나타나서 형부의 약을 올려줘야지.

언라인으로 내 수업을 듣는 한국의 대학원생들중에서 세 명의 학생과 토요일에 서울에서 만났다. 모두 현직 영어선생님들인데 강원도 동해시, 충청도 천안, 그리고 서울지역에서 와서 나를 만나주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언라인으로만 수업이 진행된 터라 한국의 학생들에 대해서는 '현실감'이 없었는데 그 중의 몇분을 직접 만나니 이제서야 '내 학생'이라는 실감이 났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겹게 그러나 장하게 공부하고 있었구나.)
지방에서 상경하는 학생의 형편을 감안해서 서울역 근처 YTN 빌딩의 스타벅스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떡본김에 제사지낸다고... 학생들과 YTN견학을 했다. :-)




우리들은 YTN견학후 스타벅스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언라인 수업 관련 토론을 세시간 가까이 하다가 헤어졌다. 실력있는 영어선생님들이었다. 이런분들이 내 학생이라는 것도 참 뿌듯하고. 내가 이분들의 공부에 어떻게 보탬이 되어야 할지 고민이 되기도 한다. (이분들을 워싱턴으로 불러다가 생생한 수업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이제 한국으로 돌아와 영어선생님들과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이분들이 학교에서는 실력 쟁쟁한 영어선생님들일텐데 '선생'인 내 앞에서는 그저 착하고 수줍은 '어린 학생'이었기 때문에 내 시선에도 강아지들처럼 이쁘고 사랑스러웠다.


P선생이 삼형제의 맏인데, 삼형제의 애정이 돈독하다. P선생은 잠시 나와 떨어져 지내는 동안 동생들과 어울리며 시름을 달랠 것이다.
시동생 가족들과 어울려 고기에 술에, 회포를 풀면서 객적은 소리도 하고, 옛이야기도 하고 그랬다.
화제는 '과거'로 돌아가, 옛날에 '형수'가 얼마나 고약을 떨었는지 '회고담'으로 무르익어 갔다. 난, 살갑고 상냥한 사람이 아니다. 엄마같이 포근하고 상냥하고 다정한 '형수'를 기대했던 두 시동생들에게 나란 존재는 '재앙'과도 같았을거다. 난 사무적이고, 차갑고, 원칙만을 내세우는 고약스런 여자였다. 그들에게는 강아지를 품어주는 어미개와 같은 형수가 필요했는데 (왜냐하면 일찌감치 엄마를 잃었으므로), 그 형수는 그런 역할을 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던 거다.
한마디로 "까칠했다"고 그들은 나를 정의했다.
옛이야기가 끝나갈즈음, 나보다 두살이나 더 먹은 시동생이 내게 말했다:
"형수, 집안을 일으키느라고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그의 말 한마디로, 나는 그동안에 내 가슴속에 쌓여있던 시집에 대한 응어리들을 모두 풀어버리기로 했다. 이 한마디면 족하다.
내 삶이 무의미하지 않았다.
과오 많은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어느 한부분, 어딘가에 기여한 부분이 있으므로, 덕분에 내 삶의 일부분 의미롭게 빛날것이다.
남편은 일찌감치 어머니를 잃었다. 막내는 겨우 열살이었다. 아버지는...돈을 벌지 않았다...누군가는 생계를 이어야만 했다. 이집, 저집, 일가붙이들이 이럭저럭 도와주거나 보태주기도 했을것이다. 남편과 큰 시동생은 학비와 생계비를 벌어가며 공부를 해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친척들의 도움을 음으로 양으로 받았을것이다.
남편이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가서 첫 월급을 타던날, 그날에서야 그집 식구들은 '밥걱정'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순수한 의미에서의 '밥걱정'에서 해방.
내가 남편과 결혼했을때, 시집은 '이상스러워' 보였다. 어쩐 일인지, 친척들이 모두 '채권자'들처럼 행동하는것처럼 보였다. 모두들 인정으로 어려운 친척을 도와줬을것인데, 이제 먹고 살만하니 그 신세를 갚기를 바라는 것 처럼 보였다. 시아버지 역시 내게 친척들의 은공을 잊지 말것을 역설했다. (내가 빚졌나?) 시아버지는 그의 큰며느리가 '종년'처럼 시댁 어른들한테 헌신할것을 기대했다.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시아버지가 무능해서 남 신세졌으면 그건 그 대에서 끝낼 문제라고 나는 판단했다. 문서로 작성된 빚이 있으면 갚아줄것이로되, 인정상 이리저리 신세진것에 대해서 내가 뭘 어쩐다는 말인가?
그래서, 학비에 쓰느라 '현금' 빌린것을 갚아주었고, 인정상 신세진것은 인정으로 이리저리 갚았다. 우리는 여기저기 남의 경조사에 나가는 돈이 많았다. 그것은 그럭저럭 참을만 햇는데, 친척들이 내게 무례한것은 참기 힘들었다. 남의 삶에 무례하게 간섭하는 것은 용납하기가 어려웠다. 시댁 어른들은 "내가 내 조카를 어떻게 키웠는데, 조카 며느리가 들어와서 되지 못하게 무례하다"는 식이었다. 모두가 내 시어머니 노릇을 하러 들었다. 더 이상스러운 것은, 이 집안에 바람막이가 없어보였다. 삼형제가 바람막이 없이 서있는 촛불같아보였다.
그래서 나는 '나쁜년'이 되기로 했다.
나는 원칙을 정해놓고, 내가 돈을 줄곳은 주고, 아니다 싶으면 딱 잘랐다.
내 원칙은 뭐냐하면, 누구든지 은혜는 은혜로 갚되, 내 삶을 간섭하러 들거나, 내 앞에서 내 가족을 무시하는 언사를 하거나, 건방을 떨면 가만 놔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삼형제는 잘 커 주었다. 지금 그 삼형제는 번듯번듯하게 커 주었다.
그리고 이제 이 삼형제 앞에서 무례한 행동을 할 경우 '국물'도 없다는 것을 일가붙이들이 대충 파악하게 되었을 것이다.
처음에, 시동생들은 내가 시댁 일가붙이들에 대하여 분노하거나 쌀쌀맞게 구는 행동을 '무례'로 파악했을 것이다. 지금은 그 내 행동을 서슬퍼런 자존심정도로 해석을 하고 있는듯 하다. 나를 지탱하는 힘은, 자존감일 것이다. 굶어 뒈져도 남앞에 머리를 숙이지 않겠다는 자존감이 나를 무너지지 않게 만들어왔을 것이다. 물론 나도 비굴해야 할 때 비굴하고, 거름속을 지나야 할때 거름속을 지나고 살았다. 나는 가난이나, 고난, 그런것이 두렵지는 않다. 부자 앞에서도 기죽을 일이 없고, 고관대작 앞에서도 기죽을 일이 없다. 내가 내 능력으로 하루 세끼 벌어먹고 살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서 비굴하게 살 이유도 없어보인다. 그런 이유로, 역시 다른 사람도 똑같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서로 존중하고, 서로 간섭하지 않고, 도울수 있으면 돕고, 도움이 필요하면 도움을 받고 그렇게 살면 되는 일이다. 실낱같은 몇푼의 도움을 줘놓고 생색을 내러 들어서도 안되고, 그걸로 속박을 당해서도 안된다. 이 세상에 널려있는 재물은 본래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니다. 어차피 빌려 쓰다 가는건데, 운좋아서 조금 더 갖고, 부자라고 해서, 남을 우습게 봐서도 안되고, 조금 적게 가졌다고 한탄하거나 기가 죽을 필요도 없다. 서로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
내가 있어서, 나라는 존재로 해서, 어느 집안의 삼형제들이 더 잘 클수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어느정도 가치있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러면 나는 내 삶에 가치를 부여한 그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잘 살아줘서 고마운것이다. (우리 가족 누구라도 건드리면 국물도 없으....라고 말할수 있는 깡패같은 형수도 나름 귀여운거다.)
나보다 두살 많은 내 시동생이 내게 던진 한마디.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받은 상중에서 가장 멋진 '훈장'일 것이다.
고맙다.
* 한국땅에서 어떤 한 집안을 번성하게 해 놓았으니, 이제 '미국땅에서 일가를 일으켜 보면 어떨까' 혹시 그것이 내가 타고난 운명은 아닐까, 요런 상상도 해 본다. 내 앞날이 어떻게 펼쳐질지는 나도 알 수가 없다. 하느님만이 아실 일이다. 인생은 살아 볼 만 하다... 내일 죽어도, 사실, 여한이 없다. 여태까지의 삶이 이미 어마어마한 축복임을 내가 안다.
오늘도 치과 의자에서 두시간이 흘렀다.
아말감 뜯어낸 것 오른쪽 네개의 신경치료를 모두 마치고 금으로 채우는 작업을 했고
왼쪽 신경치료를 위해 마취, 임시 마감공사등을 했다.
(진도 팍팍 나간다.)
이제 오른쪽으로 안심하고 뭐든 씹어 먹을수 있게 되었다.
내가 통증을 잘 참는다는 칭찬을 여러차례 받았다.
원래 통증을 잘 참느냐고...
내가? 내가 원래 엄살쟁이였는데,
내 신체의 일부를 누군가가 건드리는 것을 못참아 했는데
치과 치료는 힘들지 않게 잘 받아내고 있다.
오히려 나는, 치과지료 받는일이 내가 전에 겪었던것, 상상했던것보다 훨씬 수월해서
치과가 마냥 좋아지고 있는 판이다.
(내가 한국에 살고 있다면 정기적으로 치과에 다니면서 소소한것까지 모두 처치를 받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나를 치료해주는 의사나 간호사 입장에서는 내가 통증을 잘 참아내는
착한 환자로 비쳐지는 모양이다.
내가 나이를 먹으면서 통증을 잘 견디거나 혹은 둔감해진것일까?
이것도 나이를 먹은 사람의 힘일까?
뭐 이런 생각을 해 봤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조금씩 조금씩 대담해지고,
아픈것을 별로 느끼지 않게 되었는데
기실은 혼자서 눈물을 쏟은 시간이 많고
지금도 혼자서 울때가 많다.
하지만, 내가 전보다 단단해진 것도 사실인것 같다.
여유...같은것이 생겼다고 할까...
지난 일년간, 나는 죽음과도 같은 우울증의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그 터널이 아직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시간을 죽지 않고 견뎌냈고,
앞으로 내가 책임져야 할 일들로 어깨가 무겁기는 하지만,
죽음의 터널을 견딘 사람의 여유 같은것이 가슴속에서 자란것도 같다.
치과에서
'참 잘 참는 분'이라는 칭찬을 여러차례 받아서, 나 스스로 대견했다. (나도 철 드나보다.)

엄마는 회갑을 맞이하던 16년전에,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가 수술을 받고 오랜 회복기를 거치셨다.
..
5년전에 대장암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를 극복한 엄마는
1년전에 갑상선암 수술을 받았다.
엄마가 두가지의 암 수술을 받고 극복하는 동안, 나는 엄마곁을 지킨적이 없었다.
엄마를 일으킨이들은 내 오빠, 언니, 동생 가족이었다.
엄마의 목에는 갑상선 암 수술을 받은 수술자국이 그려져있다.
그걸 보면 목이 멘다.
엄마는 허리가 많이 꼬부라졌고, 그리고 매일 한바퀴씩 돌았던 호수공원에도 잘 나가시지 못한다.
내가 연꽃 사진 찍으러 간다는 말에 '나도 호수에 가본지가 오래된다'며 따라 나서셨다.
올해에는 장미꽃축제에도 가보지 못했다고 하신다.
엄마는 호수공원 입구에서 사신다. 집나서면 바로 호수공원인데도 장미가 피고 지도록 못가보셨다고 한다.
그냥 삶이 분주해서,
늘 뭔가 할일이 생겨서.
기운이 없어서.
허리가 아파서.
.
.
나하고 왕눈이하고 호수공원 반바퀴를 도는동안 엄마의 굽은 허리가 펴지고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엄마는 산책을 했어야 했다.

나는 거의 하루, 하루 걸러씩 치과에 가서 한시간 혹은 두시간씩 입을 (아가리를) 벌리고 치료를 받는다.
마취주사에 취해 신경치료를 받고 얼굴이 얼얼한채로 (아무런 감각도 없는 얼굴을 꼬집어가며) 집에 돌아오기도 하고, 이러다 턱뼈가 빠지는 것은 아닐까 슬그머니 걱정이 들기도 한다. 치과 공사는 내 예상대로 '총체적' 보수공사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오래된 보철물들을 모두 뜯어내고, 새로 본을 떠서 끼운다거나, 그 사이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행된 충치 치료를 한다거나. 치과에서는 내 출국 일정에 맞춰서 서둘러서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치과 서비스 최고. 우리나라 좋은나라다.)
치료를 하면서 치과의사나 간호사들은 틈틈이 "힘드시죠" "아프시죠" 하고 나를 위로하는데
사실 나는 편안한 느낌이다.
어릴때 치과 치료 받을때는 꽤나 아프고 불편하고 힘들게 여겨졌는데
이제는 별 통증없이 치료를 받고 있다. 치과 기술이 정말 많이 좋아진듯하다. 편안하다.
***
운좋게도 아주 세밀한 건강 검진을 '무료'로 받게 되었다. 원래 몇년에 한번, 내가 무료로 검진을 받을수 있는 기간인데, 마침 그때 내가 국내에 있으므로 무료라고 한다. 그래서 오늘 이른 아침에 광화문에 나가서 내 생애 최초의 건강진단을 받았다. 가령 담당 의사들이 "위 검사 받으신적 있으셔요?" 뭐 이런 질문을 할때마다, 나는 "처음입니다..." 이런 대답을 종알종알 해야 했다. 심지어는 "8년간 병원에 가본적이 없어요..." 라고 말하며 나는 킥 웃고 말았다 (원시소년 돌치~ 자연의 아이 돌치~ )
자궁경부암 검사는 받을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생리중이라고, 생리 끝나고 일주일 후에 오란다. 그때쯤 비행기를 타고 떠나가고 있겠지~ 그래서 나는 속으로 '야호!' 외치며 웃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곳이 그 무시무시한 산부인과 의자이다. (난 검사 안받을거다 야호~)
유방암 검사라는 것도 처음 해봤다. (뭐든 내겐 처음이니까.) 웃음이 나왔다.
내 시력은 좌우 1.2.
청력 정상
폐는 최상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고 검사자가 가르쳐주었다.
(음주 측정하듯 뭔가에 입을 대고 훅 불어보라고 했는데, 내가 그걸 아주 잘 한 모양이다.)
내 '쓸개'에는 3-4 밀리미터 정도 되는 사마귀 같은것이 있다. (하하하) "쓸개가 뭔가요?" 하고 물었더니 "담낭" 이라고 가르쳐준다. 담낭이 뭔지는 묻지 않았다. 그런데 그 사마귀 같은것은 크게 신경쓸것 없다고 의사가 가르쳐주었다. 사람들중에 그런 것을 몸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고, 제거 할 것도 없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안심했다.
혈압 정상
신장이나 심장도 튼튼하고, 기타 장기도 건강해보이고. 대략. Clean Bill of Health 일것이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몇가지 검사는 일주일후에나 결과가 나오므로 좋은 소식이 오기를...
***
치과 치료에 집중하느라, 피부과에는 갈 시간이나 여유가 없어보인다.
기미제거는, 나중에 귀국하면 하던가, 말던가...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치과치료는 '먹고 사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으므로 중요하다.
내 구강건강이 8년동안 방치된것에 대해서
나는 내 치아들에 대해서 '미안하다'는 마음마저 들었다.
이지경이 되도록 방치하고 고생시키고 있었구나...
공사비가 이백만원 가까이 나가는데, 물론 비싸긴 하지만, 미국 치과 치료비를 생각하면 비싸다는 생각도 지워지고 만다. 몇해전에 큰아이의 어금니 하나를 크라운을 씌우는데 1,500달러 가까이 들었었다. 어금니 크라운 하나 씌우는데 3개월쯤 지나갔다. 돈과 시간을 생각하면 하품이 나올지경이다. 그에 비하면 10년 가까이 방치되어 엉망이 된 내 치아건강을 모두 복구하는데 200만원이면 오히려 고마운 지경이다. 그래서 감사한 마음으로 찍소리 안하고 치료를 받으러 다니고 있다.
***
내일은 엄마하고 소풍을 간다.
엄마가 친구분들과 어디론가 소풍을 가시는데, 나보고도 가자고 하신다. '벤또'를 싸가지고 가자고 하신다.
그래서 저녁에 치과에 다녀오는 길에 김밥, 유부초밥 재료를 사가지고 왔다.
내일 새벽에 일어나 김밥, 유부초밥을 만들고, 과일을 예쁘게 잘라 담고, 고구마 찐 것도 담고
그렇게 소풍 도시락을 챙겨가지고 엄마를 모시고 소풍을 갈 것이다.
엄마는 고단하다고 먼저 잠이 드시고
나는 엄마가 꺼내준 찬합세트를 정리하고
찬합 케이스, 주머니를 비누로 깨끗이 빨아서 널어놓았다.
옛날에 내가 소풍갈때 우리 엄마가 김밥을 싸주셨으니
이제는 내가 우리 엄니 소풍 도시락을 챙겨드릴 차례이다.
엄마는 '계란'도 삶아서 싸라고 하신다. 계란도 삶을 것이다.
뭐든 엄마가 하자는대로 ...
이제는 늙은 엄마가 내 딸이 되고, 내가 엄마가 되어 엄마의 도시락을 내가 쌀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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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보름정도 남았다.
나는 치과치료와 내가 꼭 해야 하는 사회적 의무 (수업, 특강)외에는 엄마와 시간을 보낼 생각이다. 엄마가 하자는 것 위주로. 엄마와 P선생이 좋은 파트너가 되어 지낼수 있도록. 늙으신 나의 엄마는 내가 없는 빈자리를 지키며 사위를 돌봐야 한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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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소풍갈때 예쁜 옷을 입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신다.
엄마는 곱고 잘생긴 딸을 앞장세워 다니며 폼을 잡고 싶은신거다.
엄마는 나를 앞장세워 다니며 자랑을 하실것이다.
나는 기꺼이 엄마의 자랑이 되어드릴것이다.
그것 외에 나는 다른 효도의 방법을 모르고, 그리고 내 천성이 게을러서 별다른 효도는 불가능해보인다.
그냥 내가 행복하게 웃는것, 그것이 엄마에게 가장 큰 효도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난 행복하게 웃을것이다.
그러면 하느님도 기뻐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