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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30일 일요일

Jacob Lawrence: 미국 흑인 이주 시리즈 60장

Jacob Lawrence (제이콥 로렌스, 1917년 9월 7일 – 2000년 6월 9일). Andrew Wyeth (1917-2009) 와 같은 해에 태어나 동시대를 살다간 흑인 미술가이다. 앤드루 와이어드와 제이콥 로렌스는 출생 환경이 판이하게 다르면서도 어느 부분 닮은 꼴도 있다. 일단 같은 해에 태어났고, 둘 다 정규 학교 교육에서 벗어나서 미술에만 집중하는 시절을 보냈다. 앤드루 와이어드는 학교에 출석하는 대신에 이미 이름 난 화가였던 아버지의 슬하에서 일찌감치 그림 그리는 일을 시작했고, 제이콥 로렌스는 이혼한 홀어머니와 열세살에 뉴욕의 빈민가에 흘러 들어 할렘의 미술 공예 교실에 입학시킨다. 앤드루 와이드가 전문가인 아버지와 그 제자들 틈에 끼어 회화 기법을 익힐 때, 제이콥 로렌스는 엄마가 짜고 있던 카펫에 새겨진 무늬들을 그대로 크레용으로 그리면서 시간을 보낸다. 앤드루 와이어드가 풍요로운 어린 시절을 보내고, 사실주의적 기법의 자신의 그림 세계를 구축해 가는 동안 16세에 고등학교를 중퇴한 제이콥 로렌스는 세탁소, 인쇄소 등을 전전하며 일을 하고, Charles Alston 이 가르치는 Harlem Art Workshop 에서 수업을 듣는다. 그는 재능을 인정 받아 American Artists School 에 장학생으로 입학한다. 

 

앤드루 와이어드는 1949년 Christina’s World (크리스티나의 세상)이라는 작품을 뉴욕 현대미술관 (Museum of Modern Art)에 넘긴 후 대중들의 사랑을 받게 되는데, 로렌스는 1941년 그가 60장의 연작을 선보인 ‘흑인 이주 연작 (Migration Series)’으로 스물 네 살의 젊은 나이에 화단의 주목을 받게 된다. 앤드루 와이드보다 열악한 환경에서 시작한 미술공부였지만, 세상에 그 이름을 알린 것은 앤드루 와이드보다 한참 전이다. 그의 연작 12x18인치 사이즈의 판 60장에는 1917년부터 미국 남부지역의 흑인들이 미 북부 쪽으로 이동하는 광경과, 이들이 이주하여 어떤 일을 겪으며 정착해 나갔는가가 에피소드 별로 그려져 있다. 로렌스는 직접 그림 설명도 썼다. 그는 이 연작을 1940년에서 1941년까지 2년간 그렸다고 한다. 이 연작 시리즈는 소개 되자 마자 각계에서 놀라운 시선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1941년에 Fortune 지에서 이 작품들을 특집으로 소개 했다고도 한다. 그리고 마침내 맨하튼의 Downtown Gallery 에서 단독 전시회를 열게 되는데, 역사적으로 뉴욕에서 열린 흑인 화가 개인전은 이것이 최초였다고 한다.

 

이 시리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를 소장하려는 수집가들의 열기도 뜨거웠는데, 워싱턴의 Phillips Collection 과 뉴욕의 현대 미술관 (Museum of Modern Art) 양측에서 줄다리기를 하다가 결국 절반씩 나눠 갖는 쪽으로 결론을 맺었다.  필립스 콜렉션이 1번부터 시작하는 홀수 번호 그림을 갖고, 현대미술관이 짝수 그림을 소장하게 되었다.

 

 

Norman Rockwell 관련 페이지에서 1960년대의 미국 흑인 인권 운동 관련 그림을 소개한 바 있는데, 그보다 40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 1차 대전 직후부터 2차 대전 직전까지 미국 남부의 흑인들 중 많은 수가 일자리를 찾아 북부로 흘러 들어오게 된다. 60장의 연작 속에는 남부 농장의 목화밭도 그려지고, 린치로 살해당하는 흑인들도 그려진다. 북부에 올라와 자리 잡고 살만해지자 흑인들 주거지역을 습격하거나 폭파, 방화의 폭행이 자행되기도 하고, 여전히 흑백분리 차별을 받기도 하며, 심지어 같은 흑인이면서 이미 북부에 자리잡아 살고 있던 흑인 기득권층에게 소외 당하는 일도 벌어진다.

 

 

이런 흑인 수난의 역사야 다 알려진 것이니까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고 생각을 해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 연작의 제작, 발표 시기를 보면 제이콥 로렌스가 얼마나 시대를 앞서간 사람이었는지 가늠하게 된다. 흑인 인권 운동가 마르틴

루터 킹이 I Have a Dream 을 외치며 인권운동의 날개를 펼친 것이 1963년 이었다. 1960년대에는 버스 보이콧, 식당에서의 보이콧 등 다양한 흑인 인권 운동이 각지에서 활발하게 일어났다.  하지만 제이콥 로렌스는 그로부터 20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 흑인들의 수난사를 60장의 그림에 담아 낸 것이다. 일찍이 어느 누가 특정 역사를 이런 연작으로 담아 내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던가?  여기에서 그의 시대를 앞서가는 천재성을 찾아 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제이콥 로렌스는 1941년 함께 작업하던 미술가와 결혼하여 2000년 사망할 때 까지 해로했다. 1970년에 시애틀에 위치한 워싱턴 대학의 교수로 부임한 그는 시애틀에 정착하여 살았다.

 

2008년에 워싱턴의 필립스 콜렉션에서 뉴욕 현대미술관이 소장하는 짝수 그림까지 모두 가져와서 전체 60장을 전시한적이 있다. 그 당시에 나도 가서 그림 구경을 하고 지나쳤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내게 이 대단한 연작에 대한 문제 의식이 없었고, 단순히 흑인 그림인가보다 하고 지나치고 말았었다. 요즘 미국 미술에 대하여 생각을 하거나 자료를 찾아 보는 일이 많아지면서 제이콥 로렌스의 연작의 중대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며칠 전 필립스 콜렉션이 소장하는 홀수 번호로만 이루어진 작품 전시를 보러 갔다. 2층 구석 쪽의 방 두 개의 벽면에 30장의 그림이 번호 순서대로 전시 되어 있었다.

 

 

* 그림 크기는 가로그림이나 세로그림이나 모두 일정하다. 12x18 인치의 판 60장이 사용되었다.

 

 

 

(1)번 그림:

 

 

(3)번

 

 

(15)번

 

   "There were lynchings "  "린치도 당했습니다."

 

                                     (사진) 1925년 미국 흑인이 나무에 목이 매달린 장면.

                                           http://en.wikipedia.org/wiki/Lynching

 

 

사실 필립스 콜렉션에서 30장의 작품 사진을 다 찍어왔는데, 그 밑의 캡션 (제이콥 로렌스가 직접 썼다는 그림 설명 문구를 사진에 담아오지 않았다. 그림과 함께 캡션도 아주 중요한데...도서관에가서 관련 자료를 찾던가 아니면 다시 필립스 콜렉션에 가서 캡션까지 사진찍어 와서 삼십장의 그림과 그 캡션을 모두 소개하고 싶다.

 

http://americanart.textcube.com/32   워싱턴 필립스 콜렉션 소장 홀수 30편

http://americanart.textcube.com/79  뉴욕 현대미술관 소장품까지 포함한 총 60편 차례대로 정리.

 

 

 

2009년 8월 20일 목요일

Norman Rockwell 4: 노만 로크웰과 나

 

 

 

 

노만이 내게 다가오다

 

내가 어떤 경로로 Norman Rockwell 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인지는 나도 기억할수 없다. 어느날 책방에서 우연히 그의 그림책을 발견했고, 관심이 생겨서 들여다보다가 차츰차츰 알게 되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Norman Rockwell의 작품을 미국의 주요 미술관에서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꼭꼭 챙겨서 신경써서 찾아보면 큼직한 미술관에 한 두 점 있을수 있지만, 그나마도 전시되어 있지 않고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는 경우도 있어서, 미술관 도록에 있다고 해도 실제로 가서 만날수 있을지는 장담할수 없다. 혹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그의 작품을 만날수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그의 작품이 흔치 않은 것은, 딱하게도 그가 미술평단에서 그다지 인정을 받지 못했고, 대접도 받지 못한 결과, 콜렉터들, 호사가들, 갤러리에서 그림을 구매하는 사람들의 손을 덜 탔기 때문일수도 있다.  어느 시절, 도서관에서 미술가들의 일대기와 작품을 소개하는 교육용 비디오들을 산더미처럼 빌려다 놓고 들여다보던 때가 있었는데, 내가 무차별적으로 빌려왔던 비디오중에 노만 로크웰을 소개하는 자료도 있었다. 잘 만들어진 자료였다. 그가 마을의 소녀를 모델로 세워놓고 그림을 그리는 현장이 기록 되기도 했고, 그 소녀가 이제는 할머니가 되어 소녀적의 그 아름다운 미소를 여전히 간직한채 노만 로크웰을 소개하는 장면도 있었다. 노만 로크웰의 그림속에 평범한 소년, 소녀, 마을 사람들이 살아 있었듯, 마을 사람들의 기억속에 노만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그에 대하여 회상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꿈을 꾸듯 행복해보였다.

 

그에 대하여 웹에서 자료를 검색해보니 그의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그의 이름을 딴 뮤지엄 (Norman Rockwell Museum)이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의 매사추세츠주에 있다고 했다. 매사추세츠는 내가 살고 있는 버지니아에서는 멀고 먼 땅이었다. 나는 집 가까이의 워싱턴 디씨, 볼티모어, 필라델피아, 뉴욕 맨하탄의 미술관들을 둘러볼때마다 혹시나 그의 그림을 구경할수 있을지 기웃거려야 했다. 그의 그림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설령 발견한다 해도, 내가 ‘걸작’이라고 생각하던 그림들은 볼수 없었다.

 

콩코드에서 그를 발견하다

 

여름 휴가 기간 동안에 나는 무작정 매사추세츠주의 콩코드 지방으로 여행을 떠났다. 나의 학부 전공은 영어영문학이었는데, 나는 그당시에 미국 문학에 재미를 붙이고 있었고, 콩코드는 초기 미국 문학이나 사상계에서는 심장과도 같은 곳이었다. 비록 학위는 문학이 아닌 교육쪽으로 가고 말았지만, 내 심장의 일부는 여전히 문학을 향해 뛰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대학시절 막연히 동경하던 그 콩코드에 가 보고 싶었다. 그곳에는 ‘작은아씨들’을 작가인 Louisa May Alcott 의 집이 아직도 서있고, Emerson, Thoreau, Hawthorne 등 굵직한 미국 사상, 문학가들의 집이며 무덤들이 있었다. ‘월든’ 호수도 있다고 하지 않는가. 게다가 검색을 해보니 Norman Rockwell Museum도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작은 아씨들’의 세팅이 되었던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내 어린시절에 상상하던 그 집에 내가 들어서고 있음을 실감했다. ‘조’가 사과를 씹으며 책을 읽고, 글을 쓰던 다락방까지 모두 둘러보며 내 가슴은 뛰었다.  그런데 그 집의 기념품가게에서 나는 Norman Rockwell 의 그림을 발견하게 되었다. ‘조’를 그린 그림이라는데, 작가가 Norman이었다. 상세히 읽어보니 Norman Rockwell 이 한때 Louisa May Alcott 의 일대기를 삽화로 그렸다는 것이다.

 

 

 

 

 

Norman Rockwell Museum

 

 

콩코드 여행을 마치고 마침내 Norman Rockwell Museum 에 가던 날 비가 쏟아졌다. 나는 잘 꾸며진 뮤지엄의 정원을 소풍 할 틈도 없이 비를 피해 전시관 안으로 뛰어 들어가야만 했다. 전시관 내부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작품 사진을 찍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서 나는 더욱 신경써서 세심하게 작품들을 들여다봤다. 한 바퀴, 두 바퀴, 보고, 또 보고. 내가 웹에서만 찾아 구경하던 그림들이 전시관 벽에 큼직큼직하게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아 잡지의 표지 그림이 많다고 해서 아주 작은 그림들이 걸려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의 대작들이 걸려 있었다.  Norman Rockwell 은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크기에 신경을 쓰지 않고 그림을 그려서, 아주 큰 것도 있고, 잡지 표지 만 한 작은 그림도 있었다고 하는데, 잡지표지 그림을 그릴 때 그가 지킨 원칙은, 액자에 끼워서 차에 실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까지만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림을 필라델피아 (Philadelphia) 의 Saturday Evening Post 사로 운송을 해야 하므로 운송에 부담이 되는 크기는 곤란했던 것이다.

 

노만 로크웰 박물관 건물에서 언덕 너머로 빨간 칠을 한 목조 건물이 보인다. 그곳은 노만 로크웰이 말년에 Stockbridge 에서 머무는 동안 사용했던 작업실. 원래는 시내에 있었던 것인데 박물관을 지으면서 그의 작업실 건물을 이곳으로 옮겨다 놓았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이따금 옛집을 그대로 트럭에 실어서 옮기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집을 통째로 들어 올리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보지 못했던 광경이다.)

 

쏟아지는 빗속을 달려 그 작업실에 들어가 보았다. 누구든지 입장이 가능하지만 역시 사진 촬영은 금지 되었다. 그곳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현재 그림을 그리고 활발한 작업을 하는 미술가이다. 그 작업실에서 Norman 의 물품들, 전시품들을 지키며 자신의 작업도 하고, 사람들이 구경하러 오면 안내도 해주는 것이 그의 임무인 듯 했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그 화가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는 내가 Norman Rockwell 의 미술 세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알고 있음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눈치였다. 그는 한국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듯, “일본과 한국은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일본과 한국은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가?” 이런 기초적인 것들을 물었다.  나는 간단하게만 대꾸했다. 그는 한국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고, 나의 행동거지에서 한국을 읽을 것이다. 그와의 대화는 미국 미술 분야로 넘어갔는데, 나의 미국 미술에 대한 관점이 그에게는 조금 특별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미국인이 보는 미국 미술과, 한국인이 보는 미국 미술은 뭔가 다른 양상을 띄고 있을 것이다. 그는 내게 미술을 전공했는가 물었고, 나는 그냥 평범한 구경꾼임을 시인했다. 나는 미술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물론 대학 시절에 이런저런 미술사 관련 교양과목들을 이수했고, 살아오면서 교양차원에서 그림구경을 하거나 그림책을 뒤적인 정도이므로 뭘 조리 있게 설명할 식견도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나름대로의 관점과 잣대가 있다. 그 나의 관점이 그에게는 재미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로서도 미술 전문가라는 사람이 내 얘기를 재미있게 들어주므로 기분이 좋아졌다.

 

이야기 끝에 나는 문득 Alcott 의 집에서 발견했던 Jo 그림을 떠올렸다. 그 그림을 뮤지엄 기념품 가게에서 사려고 보니 없었던 것이라 내가 낭패스러워 했던 것이다. “콩코드 기념품 가게에서 봤던 것을 정작 여기 와서 찾아보니 없어서 못 구했는데요. 이럴 줄 알았으면 거기서 샀어야 했는데요.”  내가 지나치는 말로 아쉬움을 표하자, 그 미술가가 빙긋 웃었다. “당신이 무슨 그림을 갖고 싶어하는지 알아요. 우리 박물관 자료 보관소에 그 복사본이 있을 거요. 잠깐만.” 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설명은 나중에 할 테니까, 여기 아주 특별한 손님이 한 분 와 있는데, Jo 그림, 그 사본을 하나 만들어 놓으세요.”  미술가는 내게 전시장 프론트 데스크에 가면 그 그림이 준비되어 있을 테니 기념으로 갖고 가라고 말했다. 빗줄기가 가늘어졌고, 사람들이 몇 명 들어왔고, 나는 그이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자리를 떴다. 전시장에 가니 나를 위한 그림 한 장이 봉투에 담겨서 기다리고 있었다.

 

 

Stockbridge 시내, 로크웰의 거리

 

전시장에서 자동차로 10분쯤 달리면 Stockbridge 시내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은 Rockwell 이 수년간 작업하여 그린 그림의 실제 거리이다. 비가 쏟아져서 그 마을을 마음껏 산책을 할 수는 없었지만,  한평생 성실하게 그림을 그려온 노 화가가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녔을, 부인을 잃고 슬픔에 잠겨 산책했을 그 길을 눈으로 쓸어 보는 것 만으로도 내게는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평생 한 우물만 판 사람, 일평생을 그림만 그린 사람, 남들이 인정해주건 말건 자기만의 화법으로 세상을 그린 사람, 아니 사람을 그린 사람. 그와의 만남은 어떤 식으로든 내 삶에 색깔을 입힐 것이다. 나는 그의 그림 속의 소녀들처럼 용감하게, 웃으면서 하루 하루 살아 나가고 싶다. 인생은 거칠고 힘들다. 내 삶 역시 간단하지도 않고, 쉽지도 않다. 모두 힘들게 살아간다. 그렇지만 이 삶 속에 웃음도, 기쁨도 있다. Rockwell 인들 인생의 신산함을 몰랐겠는가? 아내와 이별도 하고, 사별도 하고, 수십 년 간 그려온 그림들이 일시에 재가 되는 사태도 겪었던 그가, 인생의 쓴맛을 몰랐을까? 하지만 그의 그림 속의 소년 소녀들은 항상 웃고 있다. 헐벗고 지친 사나이의 곁에는 따뜻한 개 한 마리가 지키고 있기도 하다.  그의 그림은 나 뿐만이 아니라, 인생이 시고 쓰다는 것을 아는 보통 사람들에게 잠시 쉬고 웃을 수 있는 여유를 줄 것이다.

 

 

 

 

미술관에서 발견한 Norman Rockwell

 

Homecoming (집으로 돌아오다)

 

이 그림은 2009년 7월 스미소니언 미국 미술 박물관 (Smithsonial American Art Museum) 4층 Luce Center 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 이곳은 미술품 '보관창고' 같은 곳인데 관람객들에게도 개방 된 곳이다. 창고처럼 촘촘히, 조밀하게 작품들이 걸려 있어서 일반 관람객들은 이곳을 그냥 통과해버리고 마는데, 미술관 도록에 분명 있다고 하는데도 전시장에서 찾을수 없을때, 이런 곳에 와보면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경우도 있다.  먼 여행에서 지쳐 돌아온 남자를 개가 따뜻하게 반기고 있다.

 

 

 

1924 Norman Rockwell Born: New York, New York 1894 Died: 1978

oil on canvas 22 3/4 x 18 5/8 in. (57.8 x 47.4 cm.)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Gift of Mr. and Mrs. Bernard M. Hollander 1997.113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4th Floor, Luce Foundation Center

 

 

아래  작품은, Boston 인근의 Salem 이라는 도시. 그곳의 Peabody Essex Museum 에서 발견한 그의 그림이다. Peabody Essex Museum 은 미국 건국 초기에 활발하게 해외 무역을 했던 무역, 해운 재벌들이 일찌감치 건립한 박물관이다. 그래서인지 박물관의 건물 디자인도 배 모양이고, 전시된 그림중에 선박, 항해 관련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이곳에 전시된 Norman Rockwell 의 그림 역시 배 모형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나이를 그리고 있다.

 

 

 

 

 

2007년 7월 11일 뉴욕 맨해턴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Metropolitan Museum of Art) 에서 발견한 자그마한 크기의 작품. Four Freedoms 를 기획할 당시 로크웰은 다양한 밑그림을 시도했었다. 그의 Freedom of Speech 작품도 그래서 최종 작품이 탄생하기 전 시도했던 그림들이 남아 있는데, 이 작품은 1943년 그가 완성하고, 완성을 알리는 그의 공식 사인까지 적어 넣은 작품이다.  그러나 완성해 놓고 보니 일어서서 말하는 남자가 주변 사람들에 둘러 싸인채 그다지 눈에 띄지 않음을 깨달은 로크웰은 결국 한남자가 두드러지게 서 있는 최종 그림으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이전 페이지에 그의 Freedom of Speech 그림이 소개 된 바 있다.)  언론의 자유를 표상하는 그림인데, 서 있는 남자가 입을 다물고 있는 것도 조금 어색해 보인다. 뭔가 역설하는 듯한, 입을 열어 말을 하는 표정이 더 낫지 않았을까.

 

 

 

Norman Rockwell 3: American, American, American

 

 

 

노만 로크웰

 

Norman Rockwell (1894-1985)은 1894년 뉴욕 시에서 태어났다. 그에게는 형이 한 명 있었고 단란한 가정이었다. 어릴 때 소년 노만은 이야기의 삽화를 그리는 일에 몰두하곤 했다고 한다. 그의 외할아버지가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한적도 있으므로 그림을 그리는 그의 취향은 유전적인 요소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던 노만은 고등학교도 마치지 않고 자퇴해버린다. 그리고는 1909년, 국립 디자인 학교 (National Academy of Design)에 입학한다. 그는 오로지 그림에 열중하여 학비를 면제 받아가면서 미술 공부에만 전념 할 수 있었다.

 

그는 특히 ‘삽화 (illustration)’쪽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삽화를 그리는 사람들에게 꿈의 무대는 Saturday Evening Post 라는 잡지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는데 1916년, 그의 나이 22세에 그는 성공적으로 이 잡지에 입성하게 된다. 그는 1916년부터 1963년까지 47년간 332 점의 커버 그림을 게재하였다.

 

물론 그는 이 외에도 다른 잡지의 삽화, 표지를 그렸으며, 책의 삽화들을 그리기도 한다. 1932년 그는 한때 프랑스의 파리로 미술 공부를 하러 가지만 파리 화단은 그에게 영감을 주지 못한 듯 하다. 1935년, 36세에 Mark Twain 의 Adventures of Tom Sawyer, Adventures of Huckleberry Finn 의 삽화를 그리고, 1937년에는 우리들에게 ‘작은 아씨들 (Little Women)’로 친근한 작가 Louisa May Alcott 의 전기와 관련한 삽화들을 그리기도 한다.  1939년 버몬트 (Vermont)주의 알링턴 으로 이사한 그는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의 연설에 감명받아 네 가지 자유 (Four Freedoms) 시리즈를 그렸다. 그는 워싱턴 디씨에 가서 이를 정부 홍보 자료로 사용해달라는 제안을 했지만, 그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 당국자들은 일언지하에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정부로부터 거절당한 그의 작품들이 Saturday Evening Post 에 게재되자 이 ‘자유’ 시리즈는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고, 그제서야 정부가 이 작품들의 가치를 인정하고 정부 홍보 자료로 사용하기에 이르렀다고도 한다.

 

버몬트 시절, 그의 작업실은 농가 주택에 달려 있는 커다란 창고였는데, 어느 날 화재 사건이 나서 그의 작품들이며 그림 그리기에 필요한 도구들, 소품들을 모두 잃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는 비참함 속에서도 그 불 난 사건 조차도 삽화로 그려서 남길 정도의 여유와 유머도 잃지 않았다. 그는 1953년 현재 그의 미술 박물관이 있는 매사추세츠 (Massachusetts)주의 스톡브리지 (Stockbridge)로 이사하여 1985년 사망할 때까지 이곳에서 작업하며 여생을 보낸다.

 

Saturday Evening Post

 

 

 

만 91세를 지구상에 머물렀던 노만 로크웰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습작에 몰두해 살았다고 하고 십대에 이미 잡지의 표지를 그릴 정도의 실력을 과시했으므로 그가 미술 활동을 본격적으로 한 것만도 대략 70년 안팎이 될 것이다. 그 70년 중에서 47년간은 Saturday Evening Post 라는 잡지를 위해 지속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노만 로크웰이 처음에 Saturday Evening Post 에 그림을 팔아서 받은 금액이 75 달러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것을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2,300 달러 정도 되는 금액이라고 한다. 스물두 살 초년의 화가가 그림을 한 장 팔아 2,300 달러를 받았다니 대단한 일이 아닌가.  그림을 팔은 첫날 그는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달려가 부모님께 이 기쁜 소식을 전하고 그는 곧바로 마을의 애인에게 가서 득달같이 청혼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첫 부인과는 얼마 후 이혼하고, 두 번째 부인과 아들 셋을 낳아 살다가, 부인이 심장마비로 사망한 후, 동네의 문학 선생님과 다시 결혼하여 해로했다고 한다.

 

그림 속으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다

 

노만 로크웰이 소위 말하는 ‘삽화가’ 혹은 ‘상업 화가’로서 명성을 날리고, 풍요롭게 예술 활동을 하고 있을 때, 화단에서는 그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돈 잘 버는 ‘상업화가’일 따름이었다. 이 점은 노만 로크웰 자신도 스스로 괴로워하던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평생 일관되게 ‘사람들’을 그렸고, 그의 그림 속의 사람들은 실제로 그가 생활 속에서 만나고 경험한 인물들이었다. 그의 가족과 동네 사람들이 그의 그림의 모델이 되어 주었다. 그는 동네 아이들을 모델로 세우기 위해 동전을 많이 준비했다가 아이가 지루해서 짜증을 낼 무렵, 동전을 더 주는 식으로 그 지루함을 달래줬다고도 한다. 아이들은 동전 쌓여가는 것을 보며 모델의 지루함을 달랬을 것이다.

 

 

노만 로크웰이 마크 트웨인의 ‘톰소여’와 ‘허클베리핀’의 삽화를 그릴 때, 그는 책을 샅샅이 읽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 이야기의 무대가 되었던 미조리주(Missouri) 의 한니발(Hannibal) 마을로 찾아 갔다. 그곳은 마크 트웨인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이었다. 막상 마을에 들어서보니 놀랍게도 이야기 속에 스케치 된 풍경들이 그대로 나타났다. 마크 트웨인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 속에 풀어 놓았던 것이다. 노만 로크웰은 아주 세밀한 곳까지 살펴보고 확인을 했다. 그리고는 마을의 농부가 입고 있던 낡아빠진 옷을 그 자리에서 돈을 주고 사 들였다. 실제로 낡아빠진 옷을 입은 사람을 생생하게 그리기 위해서는 낡아빠진 옷이 필요했으므로.

 

 

 

 

 

그가 ‘작은 아씨들’의 작가인 루이자 메이 올코트의 일대기를 삽화로 그리기 위해 방문한 곳은 매사추세츠주(Massachusetts)의 콩코드(Concord) 마을이었다. 그곳에 ‘작은아씨들’의 무대이기도 하고 루이자 메이 올코트가 수십 년간 살면서 글을 썼던 집 (Orchard House)이 있었다. 노만 로크웰은 이야기 속의 조(Jo)가 글을 쓰던 다락방에 올라가 직접 현장을 스케치하고 그림을 그렸다. 그가 그린 삽화 속에는 쥐 두 마리도 앉아있는데, 실제 ‘작은 아씨들’ 이야기 속에 ‘조’가 ‘생쥐’들을 친구로 대하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혹은 노만 로크웰 자신이 그곳에서 돌아다니는 사랑스러운 생쥐를 봤을지도 모른다.

 

그가 한때 두번째 부인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을때, 그는 마을에서 '시'공부를 시작한다. 그는 Robert Frost 의 시를 읽다가 이해가 안되는 구절이 있으면 그자리에서 당장 프로스트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건 무슨 말이요?"하고 물어봤다고 한다.  그는 그림을 그릴때나 글을 읽을때나 생생하게 확인해보고 의미를 파악해보고 직접 저자의 설명을 듣거나, 직접 사람을 만나보는 식으로 접근해 갔다. 그의 그림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이유중에 한가지는 한장의 그림속에 그는 아주 세밀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채워나갔기 때문에 그것들을 뜯어보는 재미가 있는 것인데, 이런 구체적 세밀함은 그의 '구체적인 것'을 지향하는 태도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본다.

 

 

네가지 자유 

 

 

 

 

 

 

 

 

그의 ‘네 가지 자유 (Four Freedom)’ 시리즈는 꽤나 미국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작품들인데, 미국인이 아닌 한국인 입장에서 내게는 이 작품들에 크게 매력을 느끼지는 못한다. 오히려 이 작품들에서 미술비평가들이 그를 ‘통속적’이라고 낮춰 말하는 그 이유를 조금 감지하는 편이다. 노만 로크웰은 조국 미국을 사랑했고, 함께 살아가는 미국인들을 사랑했다. 그는 미국을 위해 뭔가 행동하고 싶었고, 그의 고민이 이 네 편의 작품들에 스며있다. 내가 이 작품들을 매력 없어 하는 이유는, 내가 미국인이 아니기 때문에 미국인 화가의 이런 드러나는 애국심에 동화가 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평자들은 이를 ‘선전물’ ‘프로파간다 (Propaganda)’라고도 일컫는다. 나는 그 전체주의적 프로파간다에 염증을 느끼는 편이다.

 

 

그의 ‘네 가지 자유’ 시리즈는 1941년 루즈벨트 (Franklin Delano Roosevelt) 대통령의 국정 연설문에서 언급한 언론의 자유 (Freedom of Speech), 종교, 신앙의 자유 (Freedom of Worship), 빈곤으로부터의 해방 (Freedom from Want), 공포로부터의 해방(Freedom from Fear) 이렇게 네 가지 가치를 형상화 한 것이다. 이 네 가지 가치를 형상화 함에 있어 노만 로크웰은 구체적이고도 가까운 우리 주변 인물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마을 회관에서 자유롭게 일어나 자기 생각을 역설하는 남자, 각기 다른 종교적 상징물에 의지하여 기도하는 보통 사람들, 가을철 추수 감사절 식탁에 모인 가족, 그리고 아이들이 안심하고 잠들 수 있도록 지켜보는 아버지와 어머니. 이것은 미국인 뿐만 아니라 보통사람들이 꿈꾸는 복된 삶의 풍경들일 것이다. 추수감사절 장면은 실제 노만 로크웰의 가족들의 모습이라는 설명도 있고, 마을회관에서 한 남자가 일어나서 이야기를 할 때 화면 왼쪽 구석 맨 뒤에 한쪽 눈과 귀만 보이는 사람이 노만 로크웰 자신이라고 한다.

 

울타리 밖으로 걸어 나가다

 

 

 

 

노만은 화가인가? 미술계에서는 그를 단지 ‘삽화가 (Illustrator)’라고 불렀다. 노만 자신도 자신을 ‘삽화가’라고 불렀다.  나는 그를 진정한, 미국을 상징하는, 미국을 대표하는 미술가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의 그림 속에서 나는 미국을, 미국인을, 미국의 역사를 만나기 때문이다. 그는 노만 로크웰 화풍을 한가지 이 세상에 세워놓은 화가이다. 유럽의 사조를 따르지 않아서, 혹은 난해하지 않아서, 통속적이라 그의 예술이 제대로 된 예술이 아니라고 한다면, 예술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노만 로크웰은 기존의 예술의 잣대를 뛰어넘는 곳으로 가버렸다. 노만 로크웰 때문에 사람들은 미술사를 예술사를 다시 써야 할지도 모른다.

 

 

저작권이 문제가 될 것 같아서, 책에 실린 그림들을 사진기로 대충 찍었다. 사실 그림책에 실린 그림 사진을 오려서 갖고 싶지만, 공공도서관 책을 이렇게 난도질하면 안되므로 꾹 참고 말다.

 

 

Norman Rockwell, Storyteller with a Brush

Norman Rockwell: Storyteller With A Brush 

 

  • Reading level: Ages 4-8
  • Hardcover: 64 pages
  • Publisher: Atheneum; 1st edition (January 1, 2000)
  • Language: English
  • ISBN-10: 0689820011
  • ISBN-13: 978-0689820014
  • Product Dimensions: 10.3 x 9.6 x 0.5 inc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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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관에서 대출.  아마존에서 권장하는 연령대가 4-8세이다. 어린이 수준에 맞게 쉬운 언어로 노만 로크웰의 미술 세계를 정리 해 놓았다. 짧은 시간내에 로크웰의 연보를 정리하기에는 이런 책이 오히려 아주 좋다.

     

     

    Norman Rockwell, Pictures for the American People

    Norman Rockwell: Pictures for the American People 

    http://www.amazon.com/gp/reader/0810963922/ref=sib_dp_pt#reader-link

     

  • Hardcover: 200 pages
  • Publisher: Harry N. Abrams; 1st edition (November 1, 1999)
  • Language: English
  • ISBN-10: 0810963922
  • ISBN-13: 978-0810963924
  • Product Dimensions: 11.6 x 9.6 x 0.9 inches
  •  

    도서관 대출

    My adventures as an illustrator

    Norman Rockwell 연구을 위하여 도서관에서 대출

     

    My Adventures as an Illustrator: Norman Rockwell 

     

  • Paperback: 430 pages
  • Publisher: Harry N. Abrams; Revised edition (January 1, 1995)
  • Language: English
  • ISBN-10: 0810925966
  • ISBN-13: 978-0810925960
  • Product Dimensions: 10.3 x 7.6 x 1 inches
  • Norman Rockwell 2: The Problem We All Live With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문제 The Problem We All Live With


     

     

              2009년 8월, Norman Rockwell Museum 기념품샵에서 구입한 그림 사진.

     

     

     

     

    The Problem We All Live With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문제

     

     

    현재 한국 사회에서 우리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각자 처한 위치나 상황에 따라서 대답은 조금씩 달라지겠지만 몇 가지 생각나는 대로 나열해 볼까요? 미국의 경제 불황과 맞물려서 한국의 경제도 어렵고, 그래서 취업 희망자가 많은 반면 안심하고 일할만한 자리가 넉넉하지 않습니다. 국토는 좁고 자원은 많지 않고 인구는 많은 나라에서는 생존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결국 학력 경쟁에 불이 붙고 오로지 일류대학에 들어가야 살아 남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 큽니다. 입시경쟁이 치열하죠. 입시문제를 아무리 머리 좋은 사람을 데려다 물어봐도 해법이 잘 안 나오는 이유가 ‘교육’이 총체적인 사회문제와 항상 맞물려 들어가서 그런 것입니다. 어떤 방법을 채택하건 ‘경쟁’ 자체를 해소할 수는 없으므로 마찬가지이죠. 김대중 선생께서 남북통일의 염원을 이뤄보려고 통치기간 동안 노력을 많이 하셨는데, 아직 남북 통일은 요원해 보입니다.  이것도 우리가 해결 해 야할 숙제 중 한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거하신 김대중 대통령은 전라도 출신이지요.  우리나라에서 전라도 사람에 대한 차별이 막심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어느 한 쪽을 차별하면 그 차별 당하는 사람들만 괴로울까요?  아닐걸요, 사회는 하나의 유기체이고 하나의 몸이나 마찬가지라서, 몸의 일부가 차별당하고 썩어갈때 다른 부위가 무사 할까요?  위암이면 위만 잘라내면 되나요? 심장이 멈추면 다른 장기가 안전할까요? 뇌가 멈춰도 다른 장기 멀쩡하면 되는건가요? 그건 아니지요. 김대중 선생은 그 '빨갱이' 혹은 '개똥쇠'라고 불리우곤 하던 호남이 배출한 걸출한 민주 인사셨는데요. 남북통일 뿐 아니라, 동서화합을 위해서도 노력하신 분이지요. 우리 역사에 그가 있어 우리는 행복했을 것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미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

     

    미국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는 무엇이 있을까요? 초기 건국에서부터 되짚어 보자면 (1) 신대륙에서 살아 남아야 한다는 절실한 문제가 있었을 것이고, 영국을 상대로 독립전생을 치러야 했습니다. (2) 본래 이곳의 토박이로 살아왔던 아메리칸 인디언들과 관계 정립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미국에서 거의 잊혀져 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3) 남북전쟁으로 흑인 노예들이 해방되긴 했으나 제도가 바뀐다고 그 사회의 문화나 정서가 일거에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흑백문제는 여전히 이들에게 해결해야 할 숙제였습니다. 2009년 1월에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취임한 오바마가 ‘희망’의 상징인 이유는, 미국 사회가 인종문제나 차별의 문제 상황을 좀더 희망적인 방향으로 개선시킬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신호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오바마의 대통령 취임은 ‘희망’이지 ‘완성’은 아닌 것입니다.

     

    미국의 흑인 문제, 혹은 흑인 차별의 역사에 대해서 흑인도 아닌 사람들이 주목하는 이유는, 이것이 단지 인종의 문제가 아니고 대결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대결의 문제란, 결국 힘의 문제인데, 힘이 있는 세력과 힘이 없는 세력이 어떻게 힘의 균형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문제 입니다. 힘이 균형을 유지할 때 그 사회는 사람이 골고루 편히 살만한 곳, 힘이 균형을 잃을 때 사람 살기 힘든 곳이 될 것입니다. 흑백의 문제는 ‘차별’의 표상입니다. 그 차별은 천 가지 얼굴을 가진 사회의 여러 측면에서 발견됩니다. 요즘 미국에서는 동성간의 결혼을 허용할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합니다. 영화 Brokeback Mountain (브록백 마운틴)에서 두 젊은이들의 애절한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원작이 된 단편소설도 읽어보았는데요, 실제로 전통적인 미국사회에서 동성애자 남자가 발견될 경우 돌로 때려 죽였다고 합니다. 오늘날 미국이나 한국에서 여성들이 법적으로 남성들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며 사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의 모든 여성들이 이만큼의 지위를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도 명예살인을 구실로 살해당하고, 노예처럼 팔려가고, 할례를 당하면서도 그것이 잔혹한 것인지도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미국의 ‘흑인 차별 문제’가 여전히 주목 받을 가치가 있는 이유는 그 드러난 문제가 다른 많은 인류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암암리에 차별을 당하거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다른 사람을 차별대우 하고 있을 수 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흑백문제는 여성문제, 동성애 문제, 빈곤의 문제, 폭력의 문제, 기아의 문제 등 그 모든 문제들과 맥을 같이 하는 ‘사람’의 문제라고 보입니다.

     

     

     

     

    흑인 소녀 루비 브리지가  학교에 입학하던 날

     

    이 그림의 제목은 The Problem We All Live With (우리 모두가 안고 살아가는 문제). 이 그림은 Norman Rockwell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Look 이라는 잡지의 1964년 간행 표지였다고 전해집니다만, 원화는 제법 큼직합니다. 그림의 실제 크기는 잡지표지 크기가 아니고 36 x 58 인치 입니다 (미국의 인치 표시를 센티로 환산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림 속에는 네 명의 건장한 남자가 보입니다만, 이들의 머리부분은 없습니다. 흑인소녀만이 온전하게 전신이 보입니다. 소녀는 흰 드레스, 흰 양말, 흰 운동화를 착용했으며 머리의 리본도 흰 색입니다. 오로지 피부가 검은 것이 문제 같습니다. 손에는 누런 바탕의 책 한, 그리고 별이 그려진 책 (둘 중에 하나는 공책이겠지요), 노란색 자, 빨강, 파랑 연필 한 자루씩이 들려있습니다. 남자들은 가슴에 경찰관 표시를 달았고, 왼팔에 경관 완장도 찼습니다. 배경은 보도와 벽면 입니다. 벽면으로 던져진 토마토와 바닥의 토마토 파편이 총알자국처럼, 혹은 피가 튄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중앙의 윗부분에 NIGGER (깜둥이)라는 낙서가 보입니다. 그림 왼쪽 구석 쪽에 K, K, K 라고 씌어진 것도 보입니다. 머리가 보이지 않는 이 네 명의 경관들은 발까지 정확히 맞추어 걷고 있습니다. 소녀도 이 경관들과 발을 맞추고 있는 것일까요? 궁금해져서 그림을 들여다봅니다. 소녀의 오른손이 남자들처럼 앞으로 나와있는 것을 보면, 이 소녀의 왼발도 남자들과 맞춰서 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걸을 때 오른 팔이 나가면 왼발이 나간다는 것을 아시지요? 물론 발을 맞추겠다고 생각하고 긴장하면 오른팔과 오른발이 함께 나가는 일도 발생하는데, 그러면 여간 민망스럽지가 않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그림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요?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나고 미국의 흑인 노예들은 해방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노예 해방이 그들에게 ‘동등한 권리’을 부여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흑인들은 여전히 푸대접을 받으며 백인 중심의 미국 사회를 지켜나갔습니다. 이 그림은 남북전쟁이 끝난 후 대략 1세기가 지난 미국 사회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그림 속의 소녀의 이름은 Ruby Bridges (1954 - ) 입니다. 1960년 미국의 남부 (미국에서는 이곳을 남부 중에서도 아주 깊은 남부라는 의미로 Deep South 라고 부릅니다) 루이지아나 (Louisiana)의 뉴올리안즈 (New Orleans)에서 살던 이 소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이 소녀는 흑인학교에 입학하는 대신에, 여태까지 백인들만 다니던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당시 뉴올리안즈 교육국에서 실험적으로 이 소녀를 백인학교에 입학을 시켰다고 전해집니다. 물론 소녀의 부모들은 한참을 망설였다고 합니다. 내 딸이 무사히 백인 학교에 갈수 있을까?  주변의 백인들의 저항도 만만치가 않았다고 합니다. 등교 첫날, 이 소녀를 보호하기 위해서 실제로 네 명의 경관들이 소녀의 등굣길을 에워싸 보호를 했다고 합니다. 소녀가 백인 학교에 나타나자 백인들은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가 버렸고, 교사들도 흑인을 가르칠 수 없다고 교실을 나가버렸습니다. 오직 보스턴 출신의 한 선생님만이 백인 학생들이 모두 빠져나간 텅 빈 교실에 혼자 오두마니 앉아있는 소녀를 향해 수업을 진행했다고 합니다. 용기 있는 교사였지요. 그런데 그림 속의 소녀를 보십시오. 어깨를 곧게 펴고, 씩씩하게 걷고 있습니다. 당당해 보이지요? 헐렁한 양복을 입은 머리 없는 사나이들의 발걸음보다 이 소녀의 검은 두 다리가 더 씩씩해 보입니다. 눈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고, 입술은 꼭 다물고 있습니다.  소녀는 소녀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상황’속을 그러나 한걸음 헤쳐 나가고 있습니다. 그 한걸음 한걸음이 하루, 하루 쌓여 갔고, 한해 두 해 쌓여갔고, 그리고 그로부터 48년이 지난 2008년, 미국은 흑인 대통령 오바마를 탄생시키기에 이릅니다.

     

    Norman Rockwell, Pictures for the American People pp. 112-113 사진:

    실제로 그는 이 한장의 그림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여러가지 밑그림을 그려보고, 세밀한 소품들을 연구해보는 과정을 거쳤다.

     

    이웃집에 새로 이사온 친구

     

    다음의 그림은 New Kids in the Neighborhood (1967) ‘이웃집에 새로 이사온 아이들’입니다.

     

    박물관 전시실에서 위의 The Problem We All Live With 작품으로부터 정면에 걸려있는데 크기도 조금 더 큽니다. 분위기는 밝고 따스해 보입니다. 그림 설명을 보면 시카고의 어느 주거지역이 배경이라고 합니다. 이 그림 속에는 여섯 명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사를 하는 풍경입니다. 트럭에서 짐을 옮기는 남자의 옆모습이 살짝 나와있고, 길거리에 소파와 집기들이 서있습니다. 새로 이사온 듯한 흑인 소년소녀가 왼쪽에 서있고, 오른쪽에는 세 명의 소년소녀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서 있습니다. 양쪽 진영이 뭔가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 같습니다. 오른쪽 진영에는 검정 개 한 마리가 앉아있고, 왼쪽진영의 흑인 소녀는 털이 흰 고양이를 안고 있지요. 그런데 그림 속의 소년들 손에 모두 야구 글로브가 들려있습니다. 아하! 이제 이 그림 속의 아이들은 조 금후에 그림 밖으로 나와서 동네 야구장으로 놀러 갈 것 같습니다. 오른쪽 진영의 소년들은 야구를 함께 할 수 있는 새 친구가 생긴 것 같습니다. 오른쪽의 소녀는 털이 흰 고양이를 만져보려 다가갈 것 같습니다. 이 그림의 메시지도 분명해 보입니다. 우리 서로 사이 좋게 살자는 것이지요.  그러면 왜 이런 메시지의 그림을 작가는 그려야 했을까요?  역설적이게도 백인 구역에 흑인이 이사 오는 것이 그 당시 여전히 간단치가 않았으므로 이런 메시지 있는 그림이 필요했겠지요.

     

    시카고의 어느 언어학자가 실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도 명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열심히 활동하는 학자입니다. 흑인입니다. 그가 시카고의 전화번호부를 뒤져 전세 아파트를 찾아보기로 합니다. 그는 잘 교육받은 언어학자이고 흑인 액센트와 백인 액센트를 유창하게 구사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여기 저기 전화를 걸어 빈방이 있는가? 내가 세 들어 살고 싶은데 계약조건이 뭔가? 이런 아주 평범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의 실험 결과 그가 흑인 액센트를 사용하면 저쪽에서는 두말 않고 끊어버리거나 ‘미안하지만 이미 방은 나갔다’는 답을 듣습니다. 그가 백인 액센트를 사용하면 집주인의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진행됩니다. 이런 현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흑인은 안되고 백인만.

     

    이것이 미국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비슷한 현상은 한국에서도 일어납니다. 한국의 대도시 거리에서, 한국인들은 영어로 질문을 하며 다가오는 백인 관광객에게 무척 친절합니다. 한국인들은 흑인이나, 혹은 인디언이나, 그 밖의 동남아시아권 사람들에게 똑같이 친절할까요? 어느 해 교육방송에서 비슷한 실험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가 한국의 교육방송에서 그것을 봤다는 것이지요) 서울 시내에서 백인이 길을 묻자 사람들이 다가와 도와주려고 애를 씁니다.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동남아시아인의 용모를 한 사람이 길을 묻자 본체 만 체 합니다. 막판에는 이 사람이 한국말로 길을 물어도 사람들은 무시하고 지나쳐버립니다. 이것이 거울 속의 나의 모습일 것입니다. 누구를 비난 할 것도 없이, 거울 속에 보이는 나 자신부터 비난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림 속의 소년 소녀들은 지금쯤 동네 야구장에서 서로 즐겁게 소리를 지르며 야구 놀이를 하고 있겠지요. Norman Rockwell 의 그림 속 소년 소녀들은 세상이야 어떻게 흘러가건 용감하게, 진지하게, 장난스럽게, 평화롭게 세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다음 회에 Rockwell 의 ‘사람들’ 이야기를 조금 더 한 후에 그의 그림세계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그림:

    Norman Perceval Rockwell (1894-1978)

    "The Problem We All Live With",

    1963, Look, January 1964

    Story Illustration

    Oil on Canvas 36 x 58 inches

    Collection of the Norman Rockwell Museum,

    Stockbridge Massachusetts

     

    관련 자료:

     

    http://www.loc.gov/exhibits/brown/brown-aftermath.html

    August 20, 2009

    forgetmetomorrow.gmail.com

    微微

    2009년 8월 19일 수요일

    Norman Rockwell 1: Girl with Black Eye (1953)

     

    내 연구실 책상 위에 놓여있는 이 작은 액자 속의 소녀를 볼 때면 나는 기분이 좋아집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현재 제가 딱 요렇게 눈두덩이 혹은 마음 어딘가가 시퍼렇게 멍이 든 것 같은 심정이기 때문입니다. 이 액자 속의 그림의 사이즈는 A4 용지보다 약간 작은, 평범한 ‘잡지책’ 크기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이 그림은 1953년 5월 23일자 미국의 Saturday Evening Post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라는 잡지의 표지였거든요.  이 그림은 세가지 제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 Girl with Black Eye: 한쪽 눈이 멍든 소녀

     2. The Winner: 승리자

     3. The Shiner: 빛나는 승리자

     

    이미 제목에서 우리는 삶의 어떤 기미를 눈치채고 말게 되는데요, 사실 제목이 없다 하더라도, 그림 속의 정경이 이미 ‘승리’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갈래머리 소녀가 복도의 벤치에 앉아있습니다. 머리 위로 게시판이 보입니다. 학교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소녀의 오른쪽으로 열린 문이 보이는데, 그 틈으로 책상에 앉아 내다보는 남자와, 남자를 향한 채 서서 역시 뒤를 흘깃 내다보는 여자의 얼굴이 보입니다. 그 그림 속의 인물들은 미국인이고 상황이 미국의 상황인 것은 분명하나, 한국인인 우리들도 그림을 보면 대충 어떤 상상인지 상상이 갑니다.

     

    소녀를 좀더 들여다볼까요?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것 같은데 빨간 리본이 풀어져 늘어져있습니다. 머리도 전체적으로 삐죽삐죽 엉켜있습니다. 반팔소매의 한쪽은 아예 민 소매처럼 접혀 올라가 있고요, 셔츠의 한쪽이 치마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앉아있는 모양새를 보십시오. 소녀는 다리를 편안하게 벌리고 앉아있는데, 아마도 무릎까지 올라가는 양말이 흘러 내려와 있고, 그리고 오른쪽 무릎에는 반창고까지 붙이고 있습니다. 두 손은 나무벤치 끝을 꼭 쥐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소녀의 한쪽 눈이 시퍼렇게 멍이 들고 부어 올라서 감겨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두 사람에 대해서도 상상이 가능합니다.  남자는 교장선생님이나 교감선생님이듯 하고, 비스듬히 서서 내다보는 여인은 아마도 이 소녀의 담임선생님 일것입니다. 이 두 사람의 대화를 제가 상상해볼까요?

     

     여자: 교장선생님, 샐리가 또 톰을 두들겨 팼어요.  덩치 큰 톰녀석이 울면서 집으로 가버렸습니다. 저 샐리를 어쩌면 좋죠?

     남자: 글쎄요, 샐리의 부모님에게 연락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여자: 지난번에도 단단히 주의를 줬거든요.

     남자: 그것 참……

     

     

     

    샐리는 아무래도 어떤 처벌을 면치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눈이 시퍼렇게 멍이 들고 머리나 옷 꼴이 엉망인 채로 뭔가 사고를 친 이 소녀는 장차 자신에게 어떤 처벌이 내려질지 전혀 신경을 쓰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소녀는 득의 양양하게 빙그레 웃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입이 귀에 가 걸렸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샐리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 선생님한테 혼날 때 혼나더라도, 일단 톰 녀석을 해치워버려서 아주 속이 후련하다고, 헤헤헤! 

     

    이 그림은 1953년, 한국에서는 한국전쟁의 막바지 전투가 벌어지던 시절에 미국에서 그려진, 50년도 지난 그림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의 ‘감동’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저는 이 작은 액자를 매사추세츠주의 스톡브리지라는 마을의 기념품 가게에서 20달러를 주고 샀습니다. 인쇄상태나 액자상태나 고급스러울 것도 없는 그냥 싸구려 기념품입니다.  그렇지만 이 작품을 손에 넣었을 때 믿음직한 친구가 생긴 듯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왜냐하면 이 시퍼렇게 멍이든 채 씩 웃고 있는 이 소녀가 참으로 용감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 소녀와 함께라면 나도 겁날 것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지요. 내가 앞으로 나아갈 때, 나는 무수한 실수를 저지를 것이고, 사람들은 때로 나를 손가락질하며 비웃거나 비난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돌팔매질을 당할지도 모르고 발길질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나는 털고 일어나 세상을 향해 씩 웃어주고 그리고 내가 이겨내야 할 운명적 순간들을 이겨내겠다는 생각이 문득 스쳤기 때문입니다.

     

    1936년에 찰리 채플린 (Charlie Chaplin) 이 작곡한 노래 ‘스마일’이 있습니다. ‘웃어요 가슴이 아파도, 가슴이 무너져도 웃어요. 하늘에 구름이 낀다 해도 공포와 슬픔 속에서도 웃다 보면 견뎌낼 수 있을 거예요.’  이런 가사의 노래입니다.

     

     

     

    Smile

     

    http://www.youtube.com/watch?v=iu-rLA4POkI

     

    Smile though your heart is aching;

    Smile even though it's breaking.

    When there are clouds in the sky, you'll get by.

    If you smile through your fear and sorrow,

    Smile and maybe tomorrow,

    You'll see the sun come shining through for you.

     

    Light up your face with gladness,

    Hide every trace of sadness.

    Although a tear may be ever so near,

    That's the time you must keep on trying,

    Smile, what's the use of crying?

    You'll find that life is still worthwhile,

    If you just smile.

     

    That's the time you must keep on trying,

    Smile, what's the use of crying?

    You'll find that life is still worthwhile

    If you just smile.

     

     

     

    Lyrics by John Turner and Geoffrey Parsons.

    Music written by Charlie Chaplin, 1936.

     

     

    Norman Rockwell 의 아름다운 작품 몇 가지를 더 보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드리겠습니다.

     

     

     

     

     

     

     

    작품:

     

    Rockwell, Norman
    Girl with Black Eye
    1953
    The Saturday Evening Post, May 23. 1953 (cover)
    Oil on canvas
    34 x 30 in.
    Wadsworth Atheneum, Hartford, Connecticut

     

     

    august 19,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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