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31일 월요일

중서부의 아침

 

 

 

이곳은 동부시간대보다 한시간 늦다. (중부시간대).  아침 여섯시 (동부는 일곱시)에 창밖으로 보이던 햇님.

 

미국의 중서부의 역사적인  대도시로는 일리노이의 시카고, 미주리의 세인트 루이스등이 있다.  중서부지역은 '지역주의 화가들' 페이지에서 본 것처럼, 특히 Grant Wood 의 그림들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한없이 이어지는 평원'이다. 

 

아침 창밖에 떠오르는 해를 보고, 산책을 나갔다 왔는데,  끝없이 막막하게 이어진 평원 앞에서 잠시 '망연자실'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로 가도 '변함없을것 같아 보이는' 평평하고 넓은 평원. 그리고 소실점으로 사라지는 길.  나는 미국의 중부에 와 있는거구나...

 

오늘은 총장님도 만나뵈어야 할 것이고, 그동안 서로 연락하면서 '이미 친해진,' 그러나 한번도 본적이 없었던 교수들도 만나야 하고, 프로그램 회의도 있고, '인사'를 해야할 일이 많을것 같아서 옷을 좀 얌전하게 입었다.  수업을 오전 오후 세시간씩 여섯시간을 진행하고, 그리고 인사를 다녀야 하므로 그러다보면 하루가 다 갈것이다. (과일을 안사와서, 괴롭다. 알콜 중독자가 알콜기운 없어지면 괴롭듯,  야채과일로 살다가 과일을 하루 못먹으니까, 괴롭다.  냉수만 줄창 마셔대고 있긴 한데, 저녁에 학교차 끌고 나가서 과일을 잔뜩 사다가 냉장고에 쟁여 놓고 살아야해. 포도, 사과, 자두, 오이, 토마토, 뭐든 그냥 씻어서 바로 먹을수 있는것으로 잔뜩.) 과일을 잔뜩 사다놔야 일주일을 편안히 살수 있을것이다. 

 

평원지대에서 맞이하는 아침이 마음에 들었다.

 

 

*아침에 들판에서 더 많은 들꽃을 따왔다.  '초원의집'의 로라 잉걸스가 된 기분.  :)

 

 

 

 

2010년 5월 30일 일요일

들꽃

 

 

학생들이 저녁 식사를 차려놓고 불러줘서, 모처럼 저녁 식사를 아주 즐겁게 했다.  (내가 선생이 되어서 좋은 점은 바로 이것! 이라는 생각이 들정도로...누가 차려 주는 밥을 먹는 일은 참 달갑고 좋다. -.-)  하지만, 공평해야 하니까, 한끼 정도는 내가 학생들보다 먼저 준비를 할 생각이다.   저녁을 잘 먹었는데, 학장님이 근처에 아이스크림 가게가 지역 명물인 곳이 있다고 해서, 가서 디저트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배부르다).

 

돌아오는 길에 알팔파 꽃이 무성하길래 한웅큼 꺾어 왔다. (어차피 내일이면 잔디깎는 기계가 무참히 베어낼 것이라...)

 

이제 샤워를 하고나서...수업 준비를 착실하게 해가지고...내일 하루를 잘 보내야 한다.  (틈틈이 서울에 가서 진행할 프로그램 준비도 해야 한다. 보름후에는 서울에 간다.)

 

 

 

 

 

 

 

 

왕눈이의 행방불명

5월 28일에는 한국으로 보내지는 짐을 챙기기 위해서 운송업체 직원들이 우리집에 와서 짐을 챙겼다.  문을 열고 작업하는 도중에 왕눈이가 없어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왕눈이는 문만 열리면 달려 나가서 이웃의 조지아댁으로 뛰어 가므로, 안보이면 그 댁으로 가보면 되는것인데,  문제는 왕눈이가 조지아댁에 없었다는 것이다...

 

 

왕눈이와 평소에 동네 산책을 나가는 코스가 있는데, 그 곳을 모두 뒤지고, 동네를 다시 뒤져도 왕눈이가 보이지 않았다.  짐 싸러 온 사람들도 모두 자리를 뜨고, 왕눈이가 없어진지 세시간쯤 되는데 왕눈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평소에도 열린 문틈으로 몰래 나가면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금세 돌아오곤 했는데, 세시간씩 행방불명이 된 적이 없었다.)

 

 

기실 나는 요즘 이사를 하면서 왕눈이가 성가시다는 생각을 했었다. 일단 돌려받지도 못하는 '개 보증금'을  아파트 계약할때 수백달러를 낸것도 억울했고, 한달에 50달러씩 개 때문에 아파트 렌트비를 더 내는 것도 돈이 아까웠고, '아 누가 달라고 하면 주고 싶구나' 이런 생각이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내일 이사 나가려고 오늘 이삿짐 일부를 내보니는데 개가 없어지다니... 개가 제발로 나가준건가? ... 왕눈이를 찾아서 동네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왕눈이가 우리곁을 떠날때가 되어서 스스로 나간것인가,

이제 다시는 왕눈이를 못보는건가. 

왕눈이는 지금 어디 개장에 갖혀 있는건가?

아침에 왕눈이를 쓰다듬어준 것이 마지막이었나?

왜 암말도 안하고 나가버린건가.

왜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암말도 없이 사라져버리는가?

왜 모든 사랑하는 것들은 종적을 감춰버리는 것으로 끝장을 내는가?

...

 

뭐 온갖 '삶'의 비애에 대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이엇다.

 

그날은 남편도 근무를 안하고 이삿짐 챙기는 것을 돌보고 있었도, 큰 아이도 집에서 집안일을 거들고 있었는데,  모두들 왕눈이를 찾아 헤메다가 '얼빠진' 얼굴로 돌아왔다.  어-디-에-도 왕눈이가 없는것이다.

 

나는 그냥 기운이 빠져서 일하다 말고 침대에 죽은듯이 쓰러져 있고

남편은 기운을 차리겠다며 부엌에서 점심밥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통신장비 반납할것을 가지고 집을 나섰다. (오늘 반납하기로 약속했으니까).

남편이 '점심 먹고 나가라'고 부엌에서 외쳤을때

나는 울화를 터뜨리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왕눈이가 집을 나갔는데 밥이 넘어가???"

나는 울면서 집을 나섰다. 그냥 한심해서. 눈앞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한 개 한마리가 없어진게 한심해서.

 

한시간쯤 후에 집에 와보니, 큰 아이도 아픈 사람처럼 침대에 누워있고

남편이 집안에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사라진걸까? 왜 모두 사라지는가?

불안증이 생겨서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딨어?"

"왕눈이 찾으러 나왔지..."

"어딘데?"

"기다려봐, 여기가 어디냐하면..."

전화를 툭 끊은 남편이 1분쯤 후에 내게 전화를 걸었다.

 

"왕눈이 찾았어!"

 

 

남편은 내가 울면서 나간후에 왕눈이를 찾으러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일주일전에 왕눈이가 갔었던 동네 동물병원에 가봤다고 한다. 혹시 동물병원에 가면 잃어버린 개들이 어디로 보내지는지 알수 있을것 같아서.  그래서 왕눈이가 다니는 동물병원에 가서 "세시간전에 라사 압사 흰 개 한마리를 잃어버렸는데...어디가서 찾으면..." 하고 우물거리고 말을 꺼내니, 접수대의 직원이 "세시간전에 라사 압사 개 한마리를 누가 데리고 왔는데..." 하면서 개장에서 왕눈이를 데리고 나오더란다.

 

누군가 길에 돌아다니는 왕눈이를 데려다가 '잃어버린개'라고 동물병원에 맡기고 갔다는 것이다.  마침 그 병원이 왕눈이가 다니는 병원이었다. 그래서 병원에 왕눈이 관련 기록도 있고,  '아빠'를 보자마자 미친듯이 반기는 개가 모든것을 증명하므로 별다른 확인 절차 없이 왕눈이를 받아 올수 있었다고 한다.

 

왕눈이가 생환할때

우리들은 모두 마당에 나가서 왕눈이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앉아있었다.

평소에는 왕눈이가 귀가하는 가족들을 '열광적'으로 반기는 세리모니를 해주었지만

이번만은 온가족이 마당가에서서 환영식을 해주는 것으로 왕눈이를 반겼다.

 

우리들은 모두 왕눈이가 세시간동안 사라졌던 그 시간동안 우리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그 말도 못하고, 늙은 개가 이제 어디론가에 가서, 어쩐지 죽음을 당할거라고 상상하니 살맛이 나지 않았노라고 모두들 얼빠진 표정으로 술회했다. 

 

심지어는 동네에서 개를 끌고 한가롭게 산책하는 사람들이 한없이 부럽게 느껴졌으며

나의 경우에는 어떤 '분노'같은것도 희미하게나마 경험을 했었다.

어떤거냐하면

내가 왕눈이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을때, 조지아댁의 두마리 털복숭이 개가 산책을 나왔는데

내가 '왕눈이를 잃어버렸다'고 하니까 조지아댁이 '오늘 우리집에 안왔는데....내가 보면 알려줄게...'하고 아주 태평하게 말했었다. 나는 개 잃어버린것이 너무나 서러웠다. 그리고 두마리 개를 끌고 가는 조지아댁이 너무너무 부러웠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 '엽기 블랙 코메디'를 쓰고 있었다.  왕눈이를 영원히 잃어버리면, 가만 안있겠어... 온동네 개들을 모두...잡아다 가둬버리겠어....  이유없는 복수심.... (물론 이런 생각은 왕눈이를 찾은 후에,  우리가 느꼈던 슬픔을 회상하며 깔깔대며 만들어낸 복수혈전 같은 것이다.)

 

물론 내가 왕눈이를 영영 잃어버렸다고 해도, 동네 개들에게 보복을 할 리는 없다. 하지만 상상은 가능하다. 사랑하는 개를 잃어버린 어떤 '정신이상한 여자'가  그 보복으로 매일 한마리씩 개를 잡아다 처치해버리고, 매일 매일 동네 개 한마리가 실종되는데, 사람들은 영문을 모르고...으스스...  사람들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슬픔이나 분노는 그대로 적개심으로 이어지면서 싸이코패스 짓을 저지르게 할지도 모른다...

 

아무튼, 왕눈이를 다시 찾았다. 그래서 왕눈이를 찾아온 '왕눈아빠'는 온가족의 영웅이 되었다.  우리는 왕눈이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자각하게 되었다. 왕눈이가 없는 세상은 상상할수 없을정도로 어둡고, 슬프고, 기운빠지는 세상이 될 것이다. 왕눈이는 우리의 가족이었던 것이다.

 

 

 

 

 

 

 

 

숙소

 

어제 (5월 29일.토) 무사히 이사를 했다.  왕눈이가 약간 불안 증세를 보인다. 곧 새 집에 적응 할 것이다.  어젯밤에는 K씨댁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정쯤에야 집에 돌아왔다.  출장 보따리를 대충 꾸리고, 오늘 새벽에는 비행장으로 향했다.

 

이삿짐을 다 풀지도 못하고 엉망인 집을 나서는 마음이 편치가 못했다. 나 없는 사이에 가족들이 그 짐을 다 정리해야 하니 힘들겠다.

 

날씨가 맑아 비행이 순조로왔고, 하늘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니 기분이 탁 트이고 좋았다. (나만 호사를 누리고 있다.)

 

2인용 숙소를 일주일간 나 혼자 사용하게 된다. 역시 나만 호사를 누리고 있는것 같아 황송하다.  이제부터 특강 준비를 해야 한다. (대충 짜오긴 했는데, 이사하느라고 제대로 짠것 같지도 않고.)  2층 숙소에서 내다보이는 나즈막한 건물들이 정겹다.  나로서는 바쁘면서도 '휴식'같은 시간이 될것도 같다.  잠을 못자서 졸립기는 한데, 준비 할 것들이 있다. 열심히.  (있다가 해가 지면 산책을 나가봐야겠다. 들판이 아름다워보였다.)

 

 

 

 

 

 

 

 

 

 

2010년 5월 27일 목요일

출장

일주일간 출장을 가야 한다.  본교에 가서 써머 워크숍을 진행해야 한다.  (나는 이런식의 출장이나 워크숍이 난생 처음이라서 조금 어리둥절하다.)  일단 교육용 자료를 준비한 것이 가방을 차지할 것이고, 일주일간 갈아입을 옷이나, 뭐 소지품들을 챙겨야 할텐데, 뭘 어떻게 챙겨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냥 어리둥절하다.  토요일에 이사하고 일요일 새벽에 출장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다. (골이 아프다.)

 

노트북을 갖고 갈 생각을 하니, 내게 넷북이나 아이패드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만다.  아이패드를 매장에 가서 갖고 놀아봤는데, 예상보다 훨씬 쓸모가 있어보였다.  노트북도 가져가야하고, 내 DSLR도 챙겨야 하고, 교육용 자료와 책들, 옷가지. 가방을 어떻게 꾸려야 할지. (특강비 받으면 일단 아이패드부터 질러버릴까, 이런 즐거운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공부

오늘 봄학기 사회언어학 수업 종강을 했다.  이것으로 봄학기는 일단락 되었다. (기말 프로젝트를 세밀히 평가하고 피드백을 주는 '나의 숙제'가 남아있긴 하지만.)

 

수업을 마치니 오후 세시. 피곤하고 배도 고프고, 근처에 나가서 아무거나 먹으려고 오피스를 나서는데, 강의실에서 학생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몇명이 남아서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중.

 

[소생이 늦은 점심을 먹으러 나가는 길인데, 혼자 가기 심심하오니 따라오시면 라면을 사드리리]

내가 제안하자, 대학원생 몇명이 따라 나섰다.  내 작은 차에 가득 채워가지고 근처 '라면집'에 가서 '라면'과 '김밥' 그리고 '라볶이'까지 '진수성찬'으로 차려놓고 '종강 기념' 라면회를 간단히 했다.  (여기 미국 맞어?  하하하 )  하긴 내 학생들도 이런곳을 처음 와본다며 놀라워했다. 헤헤헤.

 

라면과 김밥을 섞어놓고 '질펀'하게 먹던중 내 나이또래의 학생 한분이 매운 떡볶이에 진땀을 흘리며 말했다:

:이번 학기가 언제 끝나나 했더니 끝이 나긴 나는군요.  태어나서 이렇게 공부를 열심히 해본것이 처음 입니다.  아이고 죽는줄 알았어요.

 

그분은 평생 공부하거나, 가르치는 일에 종사해 왔던 분인데, 뒤늦게 석사 프로그램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렇게 '빡시게' 공부를 한것이 처음이라고 한다. ... 해서...  내 수업 진행 방법이 '나쁘지 않았구나' 하는 평가를 할수 있게 되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공부를 하라고 목조른적이 없다. 각자 자기 프로젝트를 선정하고 스스로 일을 진행했을 뿐이다.  스스로 잘 하고 싶어서 밤을 새웠을뿐, 내가 밤새라고 으르렁대거나 협박을 한 적도 없다.  스스로 좋아서 했을뿐.

 

이번학기에 학생들은 각자 스스로 연구과제를 정해서 작업을 해왔다.  오늘 연구 보고 세미나를 하는 것으로 종강을 한 것인데, 학생들 얼굴이 정말 딱하게도 야위어 있었다.  내가 보기에도 며칠씩 밤을 샌 몰골들이었다.  그만큼, 그들의 발표 내용도 예상을 뛰어넘는 것들이었다.  오늘 내 사회언어학 수업에서 각자 연구 발표한 학생들은, 아마도 대부분 올 가을 버지니아 지역 컨벤션에 서게 될 것이다.  그만큼 작품들이 좋았다.  그중에 한 작품은 내년 봄의 국제적인 컨벤션에 이름을 올려도 될것으로 보인다.  다들, 스스로 선택한 일에 열정과 '코피'를 자원해서 쏟았을뿐, 내가 그거 하라고 등떠민적 없다. 

 

그러고 보면 '교육'이란 앞에서 꽥꽥대고 떠드는 것이 아닐것이다.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여건과 분위기만 조성하고, 선생은 뒷전에서 바둑이나 두면 될지도 모른다...

 

 

 

2010년 5월 24일 월요일

창가의 파랑새

 

 

 

 

 

 

 

창가에 진종일 파랑새, 블루제이 (blue jay)가 와서 놀았다. 

내동 멀거니 내다 보기만 하다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카메라를 챙겨가지고 다가가 사진을 찍어보았다.

 

 

 

 

 

 

 

blue skies smiling at me, nothing but blue skies do i see

blue birds singing a song, nothing but blue birds all day long ~

 

 

 

 

 

왕눈이의 친구들

우리 왕눈이는 '라사 압사 (Lasa Apso)' 잡종일것으로 추정된다. 털복숭이 개이다.  최근에 털을 싹 밀어버려서 지금은 '치와와'같은 꼴이 되고 말았지만, 기본적으로 털복숭이 개이다.  시추하고도 사촌간인 이 종류의 개들은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잘 따른다.  그리고 내가 관찰한바로는 '털복숭이 개'들은 털복숭이 개들을 좋아한다.  왕눈이는 털이 길고 복슬거리는 개들과는 사이좋게 어울려 놀고, 털 짧은개를 보면 으르렁대고 사납게 군다.

 

옛날에 플로리다에 살때는 아파트 이웃의 포메라니안 개와 사이좋게 지냈다. 왕눈이는 문만 열렸다 하면 그집으로 달려갔다. 그 개도 문만 열렸다하면 왕눈이에게 놀러왔다.  하지만 털이 짧고 행동이 민첩한 발바리과의 윗집 개하고는 앙숙으로 지냈다. 아주 물어 죽이겠다는듯이 으르렁대곤 했다.

 

 

우리 이웃에는 비촌 프라이즈 (Bichon Fries) 종류의 개 한쌍이 산다.  그 집은 내가 플로리다에서 이사올 즈음에 조지아주에서 이사를 왔다.  그래서 둘다 서로 미국 남부에서 올라왔다는 이유만으로 마치 '형제'같이 각별한 이웃의 정을 느꼈다. 이 개는 오글오글한 털로 뒤덮여 있다. 그리고 순하고 태평하다.  이 개들은 우리 왕눈이와 몸집이 비슷한데 이렇게 오글거리는 털로 뒤덮여 있어서 몸집이 커보이는 편이다. 시각적으로만 커보일뿐 들어 안아보면 비슷하다.  (사진은 그냥 웹에서 빌려온것이다.)

 

 

 

이 개들은 우리집 건너 건너편에 사는데,  왕눈이는 심심하면 열린 문틈으로 뛰어나가 최종적으로는 이 개들이 사는 집 현관문 앞에서 어슬렁대고; 마찬가지로 이 개들 역시 집을 뛰쳐나와서 최종적으로 도착하는 곳이 우리집 현관문이다. 

 

그러니까, 개가 없어지면, 그개가 간 곳은 뻔하다.  그리 가보면 거기 있으므로...

 

오늘은 집에서 일을 하는 중인데, 책상앞 창가로 하얀 털 뭉치같은 것이 굴러다니길래 내다보니, 이 개들이었다. 요놈들이 우리집 현관문을 박박 긁었는데, 내가 일을 하느라 그걸 감지를 못했나보다. 그러자 내 창가에 와서 동동거리는 것이었다. 문 열으라고.  요놈들이 내 창문과 현관문 사이를 오가며 박박 긁거나 동동거린다.

 

왕눈이도 낌새를 눈치채고 문 안쪽에서 동동거리고.

 

결국 내가 현관문을 열어서 두 놈을 잡아 들인후, 두 놈을 안아다가 이웃에 양도하는 것으로 일단락. 

 

이제 왕눈이 이사가면, 니네들 여기 와도 왕눈이 없는데... 

마지막 인사하러 왔니?

개들은 속상하겠다.  친구한테 이사간다는 말도 못하겠다.

 

 

 

이번주말에 이사한다. 

 

 

2010년 5월 23일 일요일

선생질을 제대로 하기위한 기본 수칙

선생질을 소신대로 하려면 지켜야 할 극히 기본적인 사항

 

 1. 공부를 열심히 하여 실력있는 선생이 된다

 2. 수업 준비를 충실히 하여 제공한다

 3. 학생들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는다

 

 4. 1원 한푼이라도 급여 외에 학생 개인이나 학생 집단으로부터 삿적인 돈을 받지 않는다.  (이거 받으면 인생 끝장이라고 판단하면 된다.)

 5. 학생이 아무리 달콤한 말로 선물을 가져와도 절대 받지 않는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고, 반드시 댓가를 바라게 되어 있다)

 

가수는 노래로 말하는거고

피아니스트는 피아노연주로 정체성을 완성시키는거다.

선생은 수업으로 선생의 사명을 다하고

학생은 공부로 학생의 분본을 다한다.

그 외의 것들은 지엽적인 것이다.

그 외의 것들에 현혹되면 본질에서 벗어날수 있다.

 

이러한 원칙을 정확히 지키면,

평생 선생질을 해도 큰 문제에 빠지는 일은 없을것이다.

사실 이것은,  내가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선생질을 하는 동안은 지키겠다는 다짐 같은 것이다.

 

내가 선생질하는 동안 경계해야 할 학생

 1호, 돈 봉투 가져오는 사람 혹은 다른 사람들까지 끌어들여 돈 봉투 만들어오는 사람.

 2호, 별거 아니라며 선물 갖고 내 연구실에 들어오는 사람, 이 사람 분명히 나중에 그걸 구실로 내 목을 조를 사람이다.

 3호, 식사대접 하겠다는 사람, 역시 내 목을 조를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학기초에 아예 실러버스에 명시를 해야 한다.  [내게 선물 가져 오는 사람은 '감점' 내지는 '과락'처리 해버리겠다.]

 

 

 

 

 

계몽사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 (5) 영국동화집

내 기억속의 최초의 책. (노트북 내장 카메라는 거울 이미지로 사진을 찍는다).

 

 

 

 

 

 

 

 

 

 

 

 

 

 

 

 

아빠가 만년필로, 한자로 적은  19** 성탄절 기념

 

 

차례

 

(잉글랜드 민화)

재크와 콩나무

첼리의 모험

위틴턴과 고양이

톰 티트 토트

세 가지 소원

할머니와 흰토끼

튜울립 꽃밭

고양이의 임금님

 

(스코틀랜드 민화)

어부와 인어

노로웨이의 검은 황소

시인 토머스

괴물 레드 에틴

요정의 기사

가슴 빨간 개똥지빠귀와 굴뚝새와의 결혼

 

(아일랜드 민화)

요정과 바뀐 아이

하얀 송어

영혼 상자

요정 반시

거인의 층층대

게으른 딸과 세 할머니

도둑맞은 아가씨

 

영국의 전래동화

 

 

 

2010년 5월 22일 토요일

바느질

 

 

 

바짓단을 조정하느라 바느질을 하고 앉아 있다보니, 언제나 실을 길게 길게 잡는 내 모습이 다시 보인다.

 

어릴때,  할머니 슬하에서 바느질을 배울때, 게으름뱅이인 내가 바늘귀에 실 꿰는게 귀챦아서 실을 길게 길게 잡아서 끊으면,  할머니가 게으름보 손녀딸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리셨다.

 

 "바늘귀에 실을 길게 잡으면 멀리 멀리 시집을 간다더라..."

 

나는 할머니 품에서, 엄마 품에서 멀리 멀리 떠나와

남의 나라에서 8년을 보냈다. 앞으로 얼마를 더 이역에서 헤메야 할지는 나도 알 수 없다.

할머니 말씀처럼 나는 멀리 멀리 떠나와 있다.

나는 멀리 멀리 떠나와 있다.

 

지난주에 책 분양 파티를 하던중, 아주 오래된 동화책 한권을 발견하여, 그것을 다시 내 책상위에 가져다 놓았다. (이것 만큼은, 내가, 죽을때까지, 간직하고 싶다.) 

그것은 계몽사판 소년 소녀 세계 문학전집. 

나같은 386 세대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주황색 하드커버.

그 문학전집의 5번. 

영국 동화집.

 

우리들이 성장한 후에 이 계몽사 동화집은 어린 아이가 있던 친척집으로 옮겨져 갔는데, 딱 한권 이 '영국동화집'만이 우연히 내 책상에 남겨져 있었고, 나는 영문과 학생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영국에 가보지 못했다.)

 

이 오래된 책의 표지를 열어보니 유려한 필체의, 우리 아버지의 서명이 들어있다.  어느해 '성탄절' 기념으로 이 책을 아이들을 위해서 마련한 30대 초반의 가난한 가장. 내가 아버지를 30대 초반으로 규정하는 근거는, 아버지가 남긴 '어느해'에 대한 단서 때문이다.  나는 그 해를 나의 나이와 비교해본다. 내가 네살때다.  그리고 나는 그 해 겨울을 기억한다. 그 해 겨울에, 나는 글을 읽을줄 몰랐다.  그래서 이 신기한 책을 들여다보며 '그림'을 찾아 읽었었다.  그 해 겨울에, 나는 우리 부모님 품에 있지 않았다.  고모들과 할아버지 할머니와 지내고 있었다...  아마도 겨울 방학을 맞이해 서울집에서 시골집에 내려온 오빠의 보따리에서 이 동화책 몇권이 나왔을것이다.  그래서 글을 읽을줄 모르던 네살짜리 나는 책 속의 그림들을 열심히 들여다 봤을 것이다.

 

나는 그 해 겨울의 쓸쓸한 눈 내리던 날을 기억한다.

그날, 시골집을 지키고 있던 이는 둘째고모와 그의 애인이었다. (그 애인이 나중에 고모부가 되었다). 이들은 내게 사과 껍질을 바깥마당 두엄더미에 내다 버리고 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그래서 나는 화롯가에서 이 책속의 그림들을 구경하다 말고, 두엄더미에 사과 껍데기를 버리러 나갔다. 눈이 부슬 부슬 내렸다.  나는 사과 껍데기를 버리려다 말고, 사과 껍질을 질근 질근 씹었다. 달콤했다.  나는 바깥마당 두엄더미 근처에 쭈그리고 앉아 부슬부슬 내리는 눈 속에서 사과껍질을 질근 질근 오랫동안 씹었다.

 

그해 겨울, 나는 네살이었다.

그리고 나는 여섯살때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서울집에 올라왔다. 엄마, 아빠, 그리고 형제들이 사는 집으로.

 

그러고보면, 나는 내 성장의 2년 혹은 2년보다 더 긴 동안 내 부모 품에서 벗어나 있었던 셈이다.  여태까지 나는 내 유년의 1년간 내 부모에게서 벗어나 있었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책에 기록된 년도와 내 삶을 비교해서 생각해보니 2년 이상을 나는 내 부모나 형제로부터 벗어나 지냈던 것이다.  내 유년의 삶 6년중에서 2년 혹은 그 이상...

 

아하, 그래서, 이제서야 나의 이방인같은 행동 패턴을 내가 이해하게 된다.

 

학교에 다니기 위해 서울 집에 올라온 후에, 나는 가끔 자다가 '이상행동'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자다말고 벌떡일어나 집에 가겠다면서 옷몇가지를 안고 막무가내로 나가다가 붙들려 다시 잠이 들었다고 한다.  나는 가끔, 보자기에 옷을 싸가지고 집을 나서는 꿈을 꾸기도 했다. 반복되는 꿈.  꿈속에서도 나는 집에 간다며 보따리를 쌌다. 내 엄마 아빠와 형제들이 살고 있는 '그 집'이 분명, 내 집이었지만, 어쩐 일인지 나는 거기 소속한다는 느낌에서 벗어나 있었다.

 

 

삶에서 2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남자가 군대에 다녀 올 시간쯤이려나.  하지만 유년의 최초의 6년에서 2년은 그리 짧은 시간이 아닐것이다.  길고 지리한 기다림의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도 잘 알수가 없다.  가끔 엄마가 보고싶다며 울어댄 기억은 있지만, 뭐 할아버지 할머니 품에서 편안하게 살았던 것도 같고.  (나는 지금도 할아버지가 보고싶다... 이미 돌아가시고 없는데도, 할아버지의 체온까지 생생하게 기억한다.)

 

 

나는 바늘에 실을 꿸 때 아주 아주 길게 길게 꿴다.

 

원래 나는 태어날때부터 아주 멀리 멀리 떠나가도록 운명지어진 것일지도 모르고,  이미 유년기때 그 준비과정을 거친 것일지도 모른다. 

 

 

 

 

 

 

 

 

 

summer shopping spree

 

 

 

 

 

things that i bought recently ...to overcome depression

 

L.L.Bean wear  fits nice to me

 

 

 

 

 

 

 

 

The Territory Ahead

 

Circle Eyelet Cotton Skirt

 

 

Life sucks, but that's ok with me.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air supply - good bye

 

 

 

그날 새벽 세시부터 잠이 깨어서, 역시 그 시간에 잠이 깨면 다시 잠들기 힘들것을 알기에, 주섬주섬 일을 시작했다. 몇시간동안 언라인으로 처리할 일들을 하고, 학교에 나가서 수업 준비를 하고, 수업을 하고, 그리고 또 일을 하다가 귀가했다.  공장 생산라인 돌아가듯 쉬지 않고 일을 해댔을것이다.

 

오후 햇살속에, 바람이 상쾌했는데, 조지타운 가는 길에 내 빨간 모자를 잃어버렸다.

잃어버린줄도 모르고 있다가, 하버에 도착한후에야, 내 머리에서 모자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바람에 날아갔을것이다. 그걸 내가 바람 맞으면서 걷는 재미로, 까맣게 모르고 있었을것이다.

 

몇시간을 하버에서 보내야 했는데, 지쳤는데, 다시 모자를 찾기위해 왔던길을 되짚어 가기엔 피곤한데. 졸린데. 그 모자 싼건데. 없어져도 그만인데. 뭐 여러가지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포기'하려고 했지만, 어쩐지 사람들 발에 짓밟힐, 쓰레기가 될 그 모자의 운명이 서럽더라.

 

그래서, 왔던 길을 되짚어서 

한참을 되짚어서 가다보니

길가에 빨간 모자가 오두마니 있더라.

 

달려가 그것을 집어서 손으로 툭툭 털어서, 다시 머리위에 단단히 썼다.

찾았다.

다시는 너를 잃어버리지 않으마.

 

그날, 그 모자를 쓰고 하버에서 네시간쯤 있다가 한밤에, 자정쯤에 귀가했다.

그날, 그런 일이 있었다.

 

모든 잃어버려진 것들, 버려진 것들의 뒷모습은 슬프다.

빨간모자를 슬프게 하면 안되었던 것이지.

 

 

 

2010년 5월 9일 일요일

Pennsylvania Academy of the Fine Arts Museum

공식홈페이지: http://www.pafa.org/

필라델피아 시청 인근에 '펜실베니아 미술학교 (Pennsylvania Academy of Fine Arts)'가 있다.

 

 

아래의 사진에서 가운데 보이는 높다란 흰 건물이 필라델피아 시청.

오른편에 보이는 건물들이 펜실베니아 미술학교 미술관과 학교 건물들이다.

 

 

 

 

 

 

 

아래사진에서 오른쪽의 붉은 벽돌 건물이 미술관이다.

 

 

 

 

 

1805년에 개교하였다고 새겨져 있으니까 205년의 역사를 가진 학교이다. 200년을 넘겼다.  이 건물은 개교이래 세번째로 지어진 건물로 알려져있다. 이전 건물은 오래되어 손실되거나 화재가 났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미술관 입구에 들어서면 매표와 안내를 겸한 데스크가 있는데 이곳에서 입장표를 구입한다 (성인 10달러). 전시장에서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고, 2층 전시장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서만 사진을 찍도록 허용하고 있다.

 

 

 

 

 

 

 

아래사진, 오른쪽 구석에 보이는 작품들은 Andrew Wyethe (앤드루 와이어드)의 그림들이다.

 

 

 

 

전시장 내부

 

 

시장 내부에서 사진 촬영을 금지시키긴 했지만, 뭐,

  1. 내가 그림을 훔쳐가는것도 아니고,
  2. 다른 미술관에서는 영구소장품에 한하여 사진 촬용을 허용하는데, 꼭 막아야 하는 이유를 납득할수가 없어서,
  3. 돈 10달러 내고 들어간것이 아까워서,
  4. 내가 평생에 여기 한번 올까 말까 하는 판에 억울해서
  5. 내가 이래뵈도 '미국미술 전문가' 반열에 오르는 향토 아마추어 연구자인데
  6. 나도 건져가는게 있어야 휘발류 값이 안아깝지

등, 온갖 자기합리화를 주문처럼 외우고 외운후에, 경비하시는 신사분이 잠시 조는 틈에 딱 두장 찍었다. 현장 스케치 목적으로. 

 

내가 판단하기에, 이렇게 철저하게 사진촬영을 금지시키고 그러니까, 이곳이 대중에게 (혹은 외국인 여행자들에게) 알려져있지가 않고, 그러다보면 쇄락의 길로 들어서는게 아닐까?  인지도가 높아져야 학교의 위상도 더 높아지고 뭐 그럴거 아닌가?  나같은사람이나 찾아가지, 누가 여길 가서 기웃거리겠냐구~  내가 홍보해주는걸 고마워해야 하는거지. 헹.

 

 

 

 

 

 

 

카페테리아

 

내 뒷쪽에 앉아 계시는 분들이, 그, 힐러리 클린턴이 나왔다는 Wellesley College 동문 아주머니들이시다. 미술관 도는 동안 한그룹의 부인들을 어떤 전문 안내인이 안내하는 광경을 목도했는데, 이분들의 옷매무새나 행동거지가 좀 남달라보였다.  뭐랄까...설명하기 곤란한데, 뭐 교양있어보이고 안정되어 보이고, 범상치 않은 여성들의 모임으로 보였다.  '그 아주머니들 참 멋쟁이들이시네...' 뭐 이런 느낌.  차림이 화려했던것은 아니고, 그냥 행동거지나 자세가 안정되고 단아해보였다.  나는 그분들 쳐다보면서, '저 사람들중에 저사람, 저사람, 저사람은 내 친구하고 싶다' 뭐 이런 상상을 했었다.  그런데 나중에 카페테리아에 가보니 이들을 위한 특별 예약석이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Wellesley College Alumni 라는 표시가 보이는거다. 하하하. 저분들이 스무살때는 한가닥 하셨겠다.

 

웰슬리 컬리지는 미국에서 꽤 유명한 여자대학이다. 우리나라의 E여대가 그 영광을 누리듯, 미국에서는 웰슬리가 제법 콧대가 높다. 미국 영화배우 Julia Roberts 가 주연한 영화중에 Mona Lisa Smile 이 있다. 허구이긴 하지만, 그 영화속에서 줄리아 롸버츠가 여학교 미술선생으로 나오는데, 그 영화속의 여학교의 모델이 이 학교였을것이다.  부유층, 상류층 딸들이 다니는 작은 사립 여자학교. 그 영화속에서 미술선생이 잭슨 폴락의 작업장도 소개하고 그러는 장면이 나왔었다. 하필 이곳에서 웰슬리 출신 아주머니들을 뵈오니 그 영화 생각이 났다.

 

나는 뭐,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명문학교'에 다닌적이 없다.  한국에서도 보통 학교를 다녔고, 미국에서도 보통 대학에서 공부를 마쳤다.  나는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현재 내가 가르치는 학교는 아직 이름도 미미한 신생 학교이다. 역시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할뿐.  나로서는 명문대에 다녀보지 못한 것에 대한 콤플렉스나 아쉬움 같은 것은 별로 없다.  그러므로 명문대 출신들에 대해서 '부러움'은 느끼지만, 그 밖의 다른 느낌은 없는 편이다. '너 좋은 학교 나왔니? 좋겠구나...' 뭐 그정도이다. 지금 내가 이렇게 기고만장을 떨고 있는 판에, 내가 만약에 소위 일류대를 싹쓸고 나왔어봐...기고만장이 하늘을 찔렀을거다. 하하.  근데, 저 아주머니들 아주 우아하고 교양있어 보이셨다. 내 맘에 들었다.  조용조용히 말씀들을 하시고...

 

 

 

 

 

 

 

 

 

 

미술관 바로 옆의 현대식 건물은 학교 건물이다. 이곳 1층에 기념품샵이 있다.

 

 

 

 

 

미술관 건너편에 병원 건물이 있는데, 병원벽 치장이 인상적이었다.

 

 

 

 

 

 

2010년 5월 8일 (토) 필라델피아에 있는 '펜실베니아 미술학교 박물관'에 다녀왔다. 펜실베니아 미술학교는 미국 근대미술의 '산파'역을 한 미술학교라고 할 만한 곳이다. 근대 미국 미술사를 수놓은 쟁쟁한 미술가들이 대개 이 학교 출신이었다... 그리고, 이 학교의 미술관에 그들이 학생시절, 혹은 교수시절의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사진 찍기를 엄격히 통제한다.  아마도 그러한 이유로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을 것이다.  필라델피아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대개 필라델피아 미술관을 찾는다.  이 미술관도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슬슬 걸어갈 만한 거리에 있다.

 

그런데, 필라델피아 미술관이 종합적인, 전 세계의 미술폼들을 시대별로 정리하여 소장하고 있는 반면,  펜실베니아 미술학교 미술관은 '미국미술' 을 중점적으로 소장하고 있다.  나처럼 '미국 미술'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곳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부러 찾아 갔건만, 주옥같은 소장품들을 눈으로만 보고 사진에 담아 올수가 없어서 안타까웠다.

그렇지만, 사진 촬영이 금지된 전시회에 가면 사진 생각 안하고 감상에만 집중 할 수 있으므로 좋은 점도 있다 (그렇게 위로를 해야 속이 편하지...)

 

미술관 기념품 가게에서 소장품 수록집을 판매하는데 65달러나 하길래, 깨끗이 포기했다.

집에 돌아와 아마존에서 헌책으로 30달러에 주문을 했다.

책이 오면, 내가 오늘 봤던 작품들을 상기하며, 다시 감상할수 있으리라.

 

사진 몇장과, 상세한 스케치는 나중에...(운전을 내리 했더니 피곤해서 술이나 한잔 때리고 뻗는게 상책일듯...)

 

아아아, 오늘 '그리운' 그림들을 눈에 가득 담아왔다...

 

 

* 안내인(docent)이 안내 다 마친후에, "녀 미술전공했지?" 하고 묻길래, "아니...취미로 미국미술 공부중" 이라고 답했더니, 이곳에서 요즘 Docent 교육중인데 자기가 추천할테니 와서 교육받고 Docent 하라고. (하하하).  필라델피아까지 왕복 일곱시간 교육받으러 다니라고? 하하하.   음...나 혼자 독학으로 공부하고 있긴 하지만, 나도 이제 미국 미술사의 뼉다구정도는 슬슬 불 정도는 된 것으로 보인다. 하하하. 슬슬 정리할 때가 되어가고 있는듯하다.  그나마....내가 사는 보람이다. 혼자 하는 미술사 공부... (나는 우울증이 폭발할때면, 그림 공부에 매달리는 편이다. 요즘 잠잠했는데, 다시 미술책 들여다봐야 할것 같다.  어린왕자는 우울하면 황혼에 의자를 뒤로 빼면서 하루에 수십번의 황혼을 보고, 나는 미술관에 간다.  가끔은 나를 그냥 내려놓고, 그림속으로 사라지면 좋겠다는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

 

 

 

 

2010년 5월 4일 화요일

[산책] 황혼의 거위 가족

 

 

2010년 5월 4일.

 

저녁을 먹고나서 일곱시에 터키런으로 향했다.  아직 저녁 해가 남아있었고, 햇살이 강했지만, 숲속은 서늘하였다. 황혼이 아름다웠다. 선녀탕에서 세수를 하니, 마치 옛날 이땅을 고향으로 알고 살았던 인디언 여자가 된듯한 기분이 들었다.  터키런 계곡에서 세수하고 몸을 씻는 맛에 이곳에 자주 갈지도 모르겠다. 피부가 보들보들한 느낌.

 

숲에서 나왔을땐 사방이 어두운 밤이었다.

혼자 있었지만,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American Legion Bridge 아래 강기슭의 캐나다 거위가족.

"딸아들 구별말고 둘만 낳아 잘기르자"던 1970년대의 가족계획 표어가 생각난다.

새끼가 두마리뿐이다.

대개 대여섯마리씩 몰고 다니는데, 이 친구들은 가족계획 실천가들인가보다.

캐나다 거위는 반드시 부부가 함께 자식들을 지킨다.

이들의 투철한 자식보호 자세를 지켜보노라면,

부부가 합심해서 자식을 키워내는 것을 보노라면,

눈물겹기까지 하다.

내가 자식을 저 거위들 만큼이나 정성들여 돌보는가?

 

 

 

 

 

 

 

 

 

 

 

 

 

 

 

 

 

2010년 5월 3일 월요일

[산책] 자전거 모험 - 캐나다 거위 가족과 만나다

 

 

2010년 5월 3일 Great Falls 까지 자전거 왕복을 하던중 만난 캐나다 거위 (Canadian Geese)가족.  이 친구들은 내가 갈때도 만나고, 돌아 올때도 만났다.  (어떻게 동일한 가족인지 아는가하면, 사진을 들여다보니 새끼들 숫자가 똑같은거다. :-)   )

 

캐나다 거위는 부부가 함께 새끼들을 지키는데

인간이 나타나면

부모중에 한놈은 새끼들 곁을 지키고

한놈은 사람쪽을 향해서 방어자세를 취한다. 게다가 이놈은 사람에게 위협적으로 캭캭 으름짱을 놓거나 혹은 심지어 쪼으려는 듯한 제스쳐를 취하기도 한다. 절대 물러서지 않을 기세다

 

 

이때, 한놈이 새끼들을 거느리고 '물'쪽으로 이동한다.

 

 

내가 요놈들을 좀 곯여주려고, 물쪽에서 길을 막으니 새끼들이 일제히 물쪽을 포기하고 숲쪽 길가로 몰려간다.  (사진에서 오른쪽은 물이 있는 운하이고, 왼쪽은 강변 숲이다.)

 

 

(위) 물쪽으로 바삐 가려다 인간이 길을 막자

(아래) 숲쪽으로 가는 새끼들

 

 

 

 

위태로운 상황일때, (한가롭지가 않을때) 어른 거위는 목을 저렇게  움추리고 아이들을 모은다.  어미나 아비가 목을 저렇게 움추리면 아이들도 아마 바짝 긴장을 할 것이다.

 

 

 

내가 운하로 가는 길을 터줬다. (길 중간으로 비켜줬다).  거위 가족이 '이때다' 외치며 운하쪽(왼쪽)으로 바쁘게 가고 있다. 늘, 한쪽은 이끌고, 한쪽은 엄호를 한다.

 

 

 

물에 들어갔다.

이제 이들은 위험에서 벗어났다

한가롭게 물위를 헤엄쳐 인간으로부터 멀리 멀리 멀어져간다.

 

 

 

 

 

 

일곱마리 새끼들.

하지만, 저 새끼들이 떠꺼머리 총각이 될 즈음 - 6월쯤 되면, 부부가 거느리던 예닐곱의 새끼들은 서너마리가 된다.  서서히 숫자가 자연감소 되는것을 하루하루 볼 수 있다. 결국 어떤 평형 상태를 유지하게 되겠지...

 

 

 

 

 

[산책] 자전거 모험, Great Falls 까지 자전거 여행~

 

 

2010년 5월 3일 월요일.

간밤에 폭우, 아침에도 집중적인 소나기.

새벽에 일어나 책상머리에서 온라인 수업 자료를 챙겨서 보내놓고, 내가 할 일을 다 마치고.

연구실로 나가는 대신에, 비온 후의 상쾌함을 맛보기 위해서 포토맥강변에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

 

강변에 나가기 전에 왕눈이를 한번 안아주고.

 

비가 그쳤지만, 하늘이 잔뜩 찌푸려 있어서, 비가 다시 쏟아질지도 모르고,

하지만 이런 흐린 날씨가 산책하기에는 가장 알맞다.

가볍게 조지타운까지 걷다 오려고 작정하고 나간 것인데 (비 온후에 터키런 같은 숲길은 위험하다. 길이 질척거리고 그리고 바위나 나무가 미끄러워서 미끄러져 넘어지기 십상이다.)  Fletcher's Cove 앞을 지나다가 배와 자전거를 빌려주는 가게가 열려있는 것을 보았다. 

 

자전거를 타보면 어떨까?

즉흥적으로 자전거에 눈길이 꽂혀서, 그걸 타고 한바퀴 돌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안내판에 나와있다시피, 자전거는 한시간에 7달러, 하루 28달러 대여료를 받는다.  시간당으로 계산이 되다가 28달러 이상 넘어가면 하루 대여료로 내면 그만이다. (네시간을 타건 다섯시간을 타건 마찬가지라는 말씀).

 

자전거 (혹은 카약이나 보트)를 빌리기 위해서는 신분증 (운전면허증)을 제시하고 카드나 현금으로 계산을 하면 된다. 신분증은 나중에 자전거나 배를 반납할때 돌려받는다. (신분증 없으면 대여할수 없다.)  사진속의 점원 아저씨가, 성품좋게 생긴 미남이고, 그리고 친절하다. 간단한 음료와 스넥도 판다.

 

 

 

 

 

 

나는 일단 한시간 대여료를 냈고, 나중에 돌려줄때 시간초과를 할경우 정산을 하기로 했다. (그쪽에서 한시간 비용만 받고 나중에 정산하겠다고 제안했다).

 

 

 

 

 

 

 

이 장면을...나는 무척 좋아한다.

길 왼편으로는 바다같이 넓고 느긋한 포토맥강이 유유하게 흐르고

길 오른편으로는 운하가 흐른다.

나는 물위에 난 길을 통과하는 것 같아.

이런 길이 Great Falls 로 향하는 11마일 내내 이어진다.

한편에 강, 또 한편에 운하.

 

 

 

 

흰 건물은 Lock House 라고 한다.  포토맥 강변의 운하 (이 운하 길이 200마일 이어진다, 워싱턴 디씨에서 시작하여 멀리 오하이오에서 끝난다. 그래서 Chesapeake Ohio Canal 이라고 부른다) 이 운하의 수문이 1-2마일마다 있는데 (물의 높낮이를 이용하여 배를 움직이게 해준다)  그 수문 관리인 가족이 살던 집을 Lock House 라고 부른다.

 

현재 이 200마일 (100 마일은 160 킬로미터) 의 운하는 운하로서의 기능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미국은 이 200 마일에 이르는 운하길을 국립 공원으로 지정하여 자연상태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사람들이 산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고다닐수 있도록 길을 유지보수하거나 나무며 자연환경을 관리를 하지만, 그 외에 인공적인 구조물은 없다. 가게도 없다. (물 사먹을 간이점도 없다.)

 

 

 

 

지금은 텅 비어있지만

언젠가는 이 집에 가족이 살았고

아이들은 부모를 도와 수문을 여닫는 일을 했을 것이다.

 

 

 

 

 

오래된 마일 스톤 (Mile Stone : 이정표 : 몇마일인지 표시하는 돌)이 보인다.

9 miles to W.C 라고 적혀있다. 

워싱턴 디씨까지 9마일 남았다는 뜻이다.

내가 강변에 가면 대개 3.5마일 지점에서 조지타운까지 가므로 왕복 6마일로 환산을 하는데

이곳은 내가 평소에 산책을 시작하는 지점에서 조지타운 반대방향으로 (상류쪽으로) 5.5 마일을 올라온 곳이다.

 

옛날에는 Washington D.C. 를 W.C 라고 표기했나보다. (혹은 D자가 마모되어 없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메릴랜드 방향의 Great Falls Park 진입로. 이쯤에서 반환

 

이곳을 지나치니, 2008년 12월이던가, 몇몇 지인들과 이곳을 산책한 일이 생각난다.

그중에는 '친구'라 부를만한 이도 있었고, 그냥 아는 분이라고 할 만한 분도 있었고.

겨울이었는데 날이 포근했다.

산책을 마치고, 일행중에 내가 '정경부인'이라고 일컬었던 '마님'이 집에서 국수나 먹고 가라고 제안을 하셨다.  그래서 산책 마치고 그댁에 들러서 멸치국물에 소면 말은것을 잘 먹었다.  그 부인이 내가 고기국물 안 먹는걸 아시고, 내게 뭘 먹일때면 신경을 많이 쓰셨다.

 

지금은 한국으로 돌아가셨는데,  이사한 후에 일부러 우리집에 '간장 한통'을 주려고 먼 걸음을 하셨다.  친정 어머니께서 손수 빚으신 아주 귀한 조선간장인데, 그걸 타향살이하면서 아끼고 아끼다가 귀국을 하시면서, 내게 주려고 일부러 빗속에 다녀가셨다.

 

그 조선간장 (우리 집안에서는 이걸 조선간장이라고 부른다.  '왜간장'에 대별되는 '자존심'있는 간장, 그것이 바로 조선간장이다) 을 나는 미역국 끓일때마다 넣어 먹었는데, 이제 잼병으로 두병이 남았다. 저거 다 먹으면 그다음에는 사먹어야 할 판인데, 조선간장은 집에서 담아야 제맛인것을 나는 안다.

 

 

 

 

 

 

Great Falls 에서 반환하여 돌아오는길.

 

 

 

 

오후 한시쯤에 Fletcher's Cove 에서 자전거를 빌려서 출발했는데, Great Falls 까지 가는 11마일 동안, 중간에 멈춰서 자연관찰도 하고, 새 관찰도 하고, 학교에서 긴급회의 한다고 전화를 해대서 전화받고, 그러느라 지체되었다.  길은, 흙길에 자갈이 깔려있어서, 아스팔트에 비해서는 길이 매끄럽지 않아 힘들었다.  자전거 반환하러 가서 시계를 보니 네시간이 지나있었다. (오후 다섯시). 아아아.

 

출발할때는 두시간이면 왕복할줄 알고, 가볍게 생각하고 물 한병 가지고 갔는데, 네시간 돌아다니며 그 물 한병을 아껴먹어야 했다.

 

오늘 내가 자전거로 왕복한 거리는

2008년 11월에 온가족이 걸어서 왕복한 적이 있다.

그날 오전 열한시쯤 출발하여 다섯시쯤에 돌아왔는데, 중간에 비도 오고 아주 물에 젖은 생쥐꼴로 걸었었다.

오늘은

그 길을 나혼자 한가롭게 자전거로 돌았다.

그 길의 부분부분을 친구나 지인과 돌기도 했었으므로 내게는 익숙한 길이었다.

그런데 자전거에 앉아서 보는 세상은 걸을때와는 또 달라서

늘 새롭고, 아름답고 그렇다.

날씨도 비 온 후라 촉촉하고, 공기에서 수박냄새가 나고, 향긋하고, 뜨겁지 않아 좋았다.

 

아마도 오늘 내가 자전거로 타고 돈 거리가, 내 생애에서 자전거로 달린 가장 긴 거리일것이다.

어릴때 자전거타고 태릉에 간다던가, 강변에 간다던가 한 적은 있었지만, 오늘같이 진빠지게 달린 적은 없었다.  어릴때도 내가 포장된 길만 달렸지, 오늘같은 자갈길은 ... 아아아... 만만하게 봤다가 고생좀 했다. 하하하. 하지만 즐거웠다.  또 가야지....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