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5일 월요일

초록모자의 소녀 Sara in a Green Bonnet (1901) Cassatt

오늘, 할 일이 많아서 미술책 보면서 노닥거리기 힘들것 같고 (바로 그런 핑계로) 좋아하는 그림 한장 들여다보며 잠시 '노닥거려' 본다

 

http://americanart.textcube.com/97 코코란 갤러리 소개 페이지에서 잠시 언급했던 Mary Cassatt 의 또다른 작품. Sara in a Green Bonnet (초록 보넷을 쓴 사라). 1901년 작품으로 추정된다. 메리 카삿은 펜실베니아 태생의 미국인 여성화가인데, 유럽에서 활동하다가 유럽에서 생을 마쳤다. 유럽으로 건너간 미국여성들중에서 가장 성공한 화가 일 것이다.

 

렌윅 갤러리 (http://americanart.textcube.com/96)  2층 홀에서 발견한 그림. 저렇게 높이 걸려 있으니까, 사진이 기울어져 보일수 밖에. 들여다보면 따뜻한 기분이 드는 그림.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소녀이지만. 세상의 모든 소녀들이 이렇게 포근한 시절을 거쳐 성장을 할 수 있기를.  

 

 

 

모두 즐거운 한 주 맞이하시길. (나도). 나에게도 기쁜일이 일어나기를. 모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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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수업 준비 하면서 Neurolinguistic Programming (NLP) 관련 자료를 다시 훑었는데, 책 보다 말고 내 얼굴이 나 혼자서 화끈거렸지... 지난주에 사실은 대학원생들한테 '대충 하려면 집어 치워라. 그따위 식으로 해 봤자 어디가서 취직이나 제대로 하겠나' 하고 아주 퉁명스럽게 몇마디 '집어 던졌고,'  ESL학생들한테는 지각, 결석 멋대로 하려면 학교 때려쳐라. 다른 학교로 옮기던지하고 으르렁대주고.  내가 왜 그렇게 으르렁댄거지 근데?  작년엔 안 그랬쟎아...  NLP 읽다보니까, 그것이, 학생들 문제가 아니고 '나의 문제'로 인식이 되면서, 가슴이 쓰려서 진도가 안나가주더라...

 

내가 아픈거지. 내가 기계고장을 일으켜서 요즘 정상이 아닌것이지, 학생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나. 학생들은 그래도 나를 믿고, 나를 의지해서 내 앞에 앉아있는데, 내가 망가진 기계를 끌고 나와 뻘짓을 하는 것이지. 내가 나를 고쳐야지.  내가 나를 고쳐야지. 내가 나를 고쳐야지.  계속 이러다가는 세상에 나 혼자 고립될지도 모르지.  (그런데, 내가 나 고치기가 제일 어려운 문제더라.)

 

NLP.  내가 나를 향한 언어부터 다듬어보도록 하자.  정확하게. 선명하게, 그리고, 웃자. 행복한 상상을 하면서, 웃자.  그림속의 소녀처럼 고요하게. 그림속의 소녀처럼 고요하게.

 

 

2009년 10월 4일 일요일

Corcoran Gallery of Art 워싱턴 코코란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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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사진은 2008년 5월에 찍었던 것이다. 현재 (2009년 10월)는 빌딩 외관 수리중이므로 철재 골조가 외관을 싸고 있어서 아름다운 건물의 자태를 보기가 힘들다.

 

 

코코란 미술관 공식 홈페이지: http://www.corcoran.org/index.asp

 

워싱턴 디씨, 백악관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이웃에 미국 적십자 건물과, 헌법홀 (Constitution Hall)도 서 있다.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일주일에 닷새동안 개관한다. (월/화요일은 쉰다.)

입장료: 성인 10달러, 학생 8달러.

개관시간은 수, 금, 토, 일 (오전 10시 - 오후 5시)  목요일 (오전 10시 - 오후 9시)

2009년 10월 현재, 건물 지붕및 외관을 수리하고 있으므로 미술관 전관을 개방하지 못하고, 일부 닫힌 구역도 있다.  그러므로 코코란이 자랑하는 콜렉션을 맘껏 보기는 힘들다.

 

http://freefeel.org/wiki/CorcoranGalleryOfArt : 2008년 5월, 코코란이 수리를 시작하기 전에 관람하고 적었던 리뷰.

 

 

 

스미소니안 렌윅 갤러리 (http://americanart.textcube.com/96)에 소개한 바와 같이, 코코란 미술관 (Corcoran Gallery of Art)는 본래 현재의 렌윅 갤러리 건물에서 1874년  처음으로 문을 열었다. 이것이 워싱턴 최초의 미술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소장품이 늘어나면서 현재 렌윅 갤러리로 사용되는 본래의 코코란 갤러리에 수용하기가 힘들었고,  그리하여 인근에 프랑스식 네오 르네상스풍의 미술관 전용 빌딩을 짓고 소장품들을 모두 이동시키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찾는 코코란 미술관의 탄생이다. 렌윅 갤러리는 건물 디자인을 한 렌윅씨의 이름을 기념했고, 현재의 코코란 미술관은 설립자인 Corcoran씨의 이름을 기념하는 것이다.  이 두 건물 입구의 머리 장식을 보면 모두 DEDICATED TO ART (예술에 바침)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방문하시면 찾아 보시길)

 

렌윅 갤러리 소개 페이지에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이곳은 백악관에 인접한 미술관으로 유럽의 명품들, 유럽 대가들의 작품들도 소장하고 있지만, 대개 미국미술 작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고, 건물 디자인도 아름다워서 역대 미국 대통령 부인들이 귀빈들을 접대할때 이곳을 안내하기도 한다고 전해진다.

 

건물 전체적인 내부 구조, 특히 입구에 들어섰을때 눈앞에 나타나는 넓직한 중앙 계단과 그 중앙계단을 중심에 두고 양옆으로 전시장이 배치된 풍경은 렌윅 갤러리의 구조와 흡사하다.  이 곳 역시 1층홀, 2층홀에 전시장들이 서 있고,  전시장에서 연결된 건물의 일부는 코코란 미술학교 공간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 건물은 코코란 미술관과 코코란 미술학교 두가지를 모두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가끔 이곳에서 코코란 미술학교 학생들의 졸업전시회가 열리는 것을 볼 수도 있는데, 역시 젊은 학생들다운 독창적이고 발랄한 전시물들을 보게 된다.

 

1층에는 중앙에 매표소,  오른쪽에 기념품 샵, 중앙 홀의 왼편에 카페테리아가 있다. 그리고 주변으로 갤러리들이 있다. 겉보기보다 내부 공간이 넓고 알차다.  중앙계단을 따라 2층홀로 올라가면 역시 넓직한 홀이 나타나고 홀 주위로 갤러리들이 있다. 국립미술관 규모로 크지는 않지만, 작다고도 할 수 없는 알찬 미술관이라고 할만하다. (2009년 10월 현재에는 지붕수리 공사중이라 미술관의 일부 공간이 폐쇄되어 있어 소장품들을 제대로 다 볼수는 없다. 그러나 이곳은 언제 들러도 아름다운 곳이긴 하다.)

 

 

1층 미국미술 전시장.  계단 몇개씩 올라가며 층층이 액자모양으로 전시실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현재는 근대 미국미술실, 그 다음에는 The Eight (8인회)라는 사회적 사실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모아 놓은 전시실,  그리고 가장 안쪽, 세번째 방에는 미국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이 걸려있었다.  중앙에 서있는 남자가 가리고 있는 것이 메리 커셋 (Mary Cassatt)의 대형 자화상.  그리고 그 너머로 자주색 커튼이 드리워진 홀이 살짝 보이는데, 프랑스 귀족의 홀, 내부 실내장치를 모두 옮겨다가 만든 방이다. (옛날에 우리나라에서도 좋은 집은 허물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건물 자재를 뜯어다가 옮겨서 새로 지었다고 하는데, 미국의 거부들이 귀족취미로 프랑스 귀족의 방을 그대로 뜯어다가 뉴욕이나 워싱턴의 저택 일부를 장식했다고 한다.)  오늘 나의 수확은, 화집에서나 볼 수 있었던,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비롯한 근대 대표적인 화가들의 작품을 한눈에 살피고, 특히 '팔인회' 멤버들의 작품들을 방 하나에서 모두 살펴볼수 있었다는 것. :-]

 

이 전시장의 작품들은 때가되면 교체되고 다른 소장품들이 걸리게 되므로 늘 항상 거기 있는것은 아니다. (그러니 가끔 가서 살펴봐줘야 ~ ) 갈때마다 새로운 작품들을 볼 수 있다는 기쁨도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 늘 거기 있을거라는 기대를 해서도 안된다. 전에는 이 전시실에서 로댕의 작품을 보았었다.

 

 

(사진들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크고 선명한 사진을 원하시면 클릭하세요)

 

 

메리 커셋의 그림. (메리 커셋 역시 미국의 100대 미술가중의 한명으로 언젠가 그녀의 페이지가 씌어질 것이다.  사실 워싱턴을 드나들며 내가 모은 자료중에 메리 커셋 관련 자료가 가장 많다. 뉴욕이나 시카고까지 가서도 메리 커셋의 작품은 꼭 찾아 봤으니까.  처음에는 무작정 그이의 그림이 좋았었고, 그 후에는 좀 시들해졌고, 요즘은 새로운 각도에서 살피고 있다. 역시나, 사랑스런 화가라고 할 만하다.)

 

 

 

 

 

미국의 광대한 풍경을 담은 전시실.  사진에서 왼쪽 작품이 Frederick Church (프레데릭 처치)의 나이아가라,  난로 오른쪽이 Bierstadt (비어슈타트) 의 들소 그림.  코코란 미술학교 졸업생으로부터 이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들은 적이 있는데, 여기 이 벤치가 단순하게 다리쉼을 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나이아가라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이 벤치에 앉아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벤치에 앉아서 나이아가라 그림을 볼때, 마치 내방 창문 밖으로 나이아가라를 보는 느낌이 들 것이라고.

 

프레데릭 처치와 비어슈타트 (비어스타드)는 초대형 미국의 풍경 그림을 그려서 유럽 화단에 소개한 화가들인데, 아직 사진이 보편화되지 않은 시절에 신생국가 미국의 거대한 풍경화가 유럽사람들을 압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니까, 이런 배경지식을 갖고 그림들을 보면 '대단한것이었군'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사실 이러한 배경지식 없이 내 눈에 처음 들어온 이런 대형 풍경화들은 별로 매력이 없었다.  나는 전자사진과 영상시대를 살고 있으니까. 당시에 굉장했다니까 굉장했나보다 하는 정도.  왜 처치나 비어슈타트의 작품들이 의미가 있는지는, 장차 이들을 소개하는 페이지에서 좀더 상세히 이야기를 해 보겠다.  (<--- 너는 왜 허구헌날 나중에 이야기 하겠다고 말을 얼버무리는 것이냐...)

 

 

 

 

그리고 이곳이, 프랑스 귀족의 집 내부를 뜯어다 붙였다는 홀.  얼핏 이곳의 첫 인상은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의 '거울의 홀'을 지나칠때와 흡사 했다. 흰 바탕의 벽에 아름다운 꽃무늬 장식. 금박의 장식들, 그리고 대형 창문과 거울의 벽.  마침 토요일이라서 갤러리 측에서 관객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으로 작은 음악회를 열었다.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주자들이 모여서 슈베르트와 모짜르트의 실내악들을 한시간동안 연주해 주었다. 화려한 '베르사이유' 궁전의 어떤 홀 같은 곳에 앉아서 모짜르트의 음악들을 '생'으로 듣자하니,  "야,귀족놀음도 재미있었겠다. 돈 있으면 재미있는 일들도 많이 일어 날 수 있겠다" 요런 생각도 사사삭 들고~  

 

 

 

 

프랑스식 방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전시장

 

 

그방에 (위 사진에서 왼편에) 놓여있던 시계. 아직도 정확하게 작동하고 있다. 오후 두시 십분전.

 

 

 

 

이탈리아 작가의 Veiled Nun (베일속의 수녀). 대리석을 조각하여 베일을 뒤집어 쓴 여인의 얼굴을 형상화 한 것인데, 돌을 가지고 베일과 베일속에 비치는 얼굴을 만들어낸 것이 아무리 들여다봐도 신기하단 말이지...

 

 

 

중앙 계단을 올라가 2층 홀에서 내려다 본 1층 중앙홀. 카페테리아.

 

 

중앙계단을 장식하는 대리석 상. 날개 달린 남자가 여자를 안고 있는데 꽤 매력적이다. (작가 신상 생략)

 

 

 

위의 날개달린 남자 아랫쪽으로 보이는 중앙계단.  1층 매표소, 그리고 계단을 더 내려가면 보이는 미술관 출입문. (저 문으로 들어오고 저 문으로 나간다)

 

 

 

미술관 건물을 지키는 두마리 사자중에서 왼쪽 사자 (철골로 감싸 놓은 건물 외관이 보인다)

 

 

오른쪽 사자 (아이 귀여워)

 

 

입구 안내판

 

 

입구에서 왼편으로 돌아보면, 사진 중앙에 보이는 역시 보수공사중인 건물이 백악관에서 사용하는 행정 건물, 그리고 멀리 붉은 벽돌 건물이 보이고 그 앞쪽에 작은 붉은벽돌 건물이 보이는데, 그것이 렌윅 갤러리 (http://americanart.textcube.com/96 ) . 중앙에 보이는 회색 건물 뒷편에 백악관 본관 및 정원이 있다).

 

 

 

 

 

백악관을 끼고, 렌윅 (코코란 미술관의 전신)과 현재의 코코란이 인접해 있으므로 이 두곳은 백악관 안주인들이 지척에 두고 드나들수 있는 보석과도 같은 곳이다.  외관 공사가 언제쯤 완결될지 모르겠다. (미국 사람들은 공사 시작하면 2-3년은 기본인것 같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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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만났다.  어쩐 일인지, 이 그림은 호퍼의 '도시' 풍경보다 '환'하고 덜 쓸쓸해보인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았는데, 어쩌면 호퍼는 '물'을 그릴때 '행복'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음, 호퍼는 하도 '거인'이라 내가 매일 그의 책을 들여다보면서도 작정하고 쓰기가 망설여진다. 하지만, 이 거인을 넘어서지 못하면 아무것도 못 할지도 모른다. 어차피 하도 유명한 사람이니 오히려 내가 본 작품들만 내가 아는 선에서 정리하고 지나가는 것이 정직한 방법인지도 모른다.  '호퍼'를 다 쓰기전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겠다. 일단 호퍼를 넘어서자...

 

 

 

redfox

2009년 10월 3일 토요일

Smithsonian Renwick Gallery : 스미소니안 렌윅 미술관

(사진 클릭하면 커집니다)

 

Smithsonian Renwick Gallery 공식 홈페이지: http://americanart.si.edu/renwick/

 

 

지도에서 왼쪽 윗편 구석쪽에 렌윅 갤러리가 보인다.

 

 

렌윅 갤러리는 Smirthsonian American Art Museum 스미소니안 국립 미국미술관에 속하지만 따로 떨어져있는 갤러리이다.  국립 미국미술관은 차이나타운에 인접한 갤러리 플래이스 지역에 있고, 렌윅 갤러리는 백악관 정문 앞에 있다. 이곳은 특히나 '미국 공예품' 전문 전시장으로 알려져 있다.  전시장은 1층 2층, 두개층인데, 1층에서는 특별기획 전시가 연중무휴로 이루어지고 있고, 2층에서는 미국미술관이 소장하는 소장품 중심의 상설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  2층의 대형 중앙홀에서는 미국미술관이 자랑하는 회화 작품이 전시되는 편이다.  상설 전시장의 전시품들은 일년에 몇차례씩 조금씩 바뀌기 때문에 가끔 가보면 새로운 전시작품들과 만나게 된다.

 

오늘날의 렌윅 갤러리는 1972년 1월에 공개되어 현재에 이른 것이지만, 역사적으로 이곳은 코코란 (Corcoran)이 '워싱턴 디씨'에 최초로 열은 미술관으로 기록된다. 윌리엄 윌슨 코코란 (William Wilson Corcoran)은 1858년, 스미소니안 캐슬 (현재의 스미소니안 인포메이션 센터)을 설계한 건축가 렌윅 (Renwick)에게 미술관을 설계해 줄 것을 부탁했고, 1859년과 1861년 사이에 코코란 미술관(Corcoran Museum of Art)이라는 이름으로 건축이 된다. 그런데 마침 남북전쟁 (1861-1865)이 일어나면서 이곳은 전쟁 참모본부 건물로 이용되게 된다.  코코란은 1969년에야 건물을 돌려받고, 1874년에야 본래 목적인 미술관을 열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코코란의 수집품이 너무나 방대하여 이 건물이 비좁다고 여긴 그는, 인근에 새로운 스타일의 미술관을 짓고 1897년에 오늘날의 코코란 미술관 (Corcoran Museum of Art)로 소장품들을 모두 이동시킨다.  텅비어버린 본래의 미술관 건물은 그후 정부 건물로 사용되다가 1962년 케네디 대통령이, 이 건물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살리자는 제안을 하고, 1965년 스미소니안 재단의 리플리 (Ripley) 원장이 당신의 린든 존슨 대통령에게 이 건물을 스미소니안 미국 미술관에서 접수하여 미국 미술품과 공예품을 소장할수 있도록 주선한다.  그 결과 1972년부터 건물 설계자 Renwick의 이름을 붙인 Renwick Gallery 로 우리 앞에 선을 보이게 된 것이다.

 

스미소니안 박물관들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곳은 국적 불문하고 무료 입장이다. 백악관 정문앞에 위치하고 있고, 인근에 (바로 두 블럭 건너에) 코코란 미술관이 있기 때문에, 백악관에 국빈급 손님들이 방문할 경우 대통령 부인은 귀빈 부인들을 렌윅과 코코란으로 안내하여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곳은 내셔널 몰에서 약간 안쪽으로 들어가는 곳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수학여행'코스로 워싱턴 디씨 내셔널 몰 일대의 '스미소니안 박물관'을 찾는 관광객들의 시선에서 약간 비껴나 있어서 언제 가도 한가한 편이다. 물론 국립미술관이나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의 규모에 비하면 아주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한가롭게 나들이를 하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다.

 

 

입구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렇게 2층 홀로 올라가는 중앙 계단이 보인다.  입구 오른편에는 안내 데스크가 있고,  1층 전시실 입구가 양쪽에 있는데, 1층은 늘 특별 기획전시가 열리는 곳이고, 사진 촬영이 금지 되어 있기 때문에 1층 사진은 생략하게 된다. 이 중앙계단을 올라가거나 내려갈때, 그야말로 레드 카펫(Red Carpet)을 밟게 되는데,  기분이 제법 근사해진다. 뭐 나같은 소시민도 무료로 드나들며 고급스런 카펫을 밟아볼 수 있으니. 잠시나마  이런것을 누려보는 것도 나쁜일은 아닐것이다.

(사진 클릭하면 커집니다)

 

 

마침 2층 중앙홀에서 미국 근대미술품 전시를 하고 있었다. (흐뭇). 왼쪽 구석의 그랜드 피아노와 비교하면 중앙의 둥근 소파의 크기나, 벽에 걸린 미술품들의 규모도 어림짐작이 가능해진다.

 

 

이 커다란 홀의 주인이 된 듯한 기분으로 증명사진.

 

 

 

미국미술사를 정리하면서 언젠가 정리하게될 여성화가, 그녀의 자화상 앞에서.  (퀴즈 이 여성화가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렌윅 미술관의 '상징'처럼 소개되는 '유령시계 (Ghost Clock).' 이 작품을 왜 '유령시계'라고 부르는 것일까? (퀴즈 2: 이 작품의 특이점을 찾아보세요).

 

 

렌윅 미술관이 자랑하는 또하나의 대표선수: Game Fish

 

 

 

2층 중앙계단 주변 홀의 풍경.  바로 발아래에 1층으로 내려가는 중앙계단이 있다.

 

 

 

미굴관 입구를 나서서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맞은편으로 보이는 백악관 정문과 울타리.

 

 

 

 

 

음...1층에 기념품샵이 있는데, 이곳이 '공예품' 전문 미술관이니까, 특히나 공예 기념품이 개성있는 것들이 있었다.  브로치중에서 오른쪽에 있는 것, 달을 보는 고양이. 그것 '참 예쁘다!' 하고 들여다봤는데 가격을 보니까 백달러 ($100). 음, 역시, 난 눈이 높군. 맘에 들면 일단 100달러는 기본으로 넘어 주시는군. 흐헤헤. 내 맘에 드는 것이 비쌀땐, 그냥 '난 눈이 높군'하고 스스로 칭찬해주면서 패쓰.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을 나 스스로 발견했는데, 이런 기념품샵에서 뭔가 사고 싶은 것이 있을때, 가격이 비쌀때, 그걸 사진을 찍으면, 내것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 카메라에 담았으니깐.  그래서 대개 '책'종류를 제외하고 기념품을 사는 일이 별로 없다. 특히나 요즘은, 뭐랄까 인생무상을 느끼면서, 살면 살수록, 뭘 사서 쌓아놓는 일이 무겁게 느껴지고, 그냥 이렇게 사진으로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자족하게 되는데... 이것도 건강한 패턴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욕망할줄 알고, 헛된것을 탐할줄도 알고 그런것이 삶이지. 난 어딘가가 고장이 난거야.  기계고장인거야. 기계고장. 난 너무 큰것을 탐했기 때문에 벌을 받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  지상에서 불가능한 너무 큰것을 욕심냈던 것이겠지.

 

 

 

 

 

추석날, 백악관 앞 풍경

오늘은 추석, 그리고 한국의 개천절. 미국에서는 평범한 시월의 토요일.  아침에 부지런히 추석 차례를 지내고, 음복을 한후 집안을 치우고, 워싱턴 디씨 시내에 나갔다. 코코란 미술관 http://americanart.textcube.com/97 과 렌윅 미술관(http://americanart.textcube.com/96)을 둘러보고 (미술관들 페이지는 별도 페이지에서) 그리고 백악관 정문앞을 산책하다가 귀가. 코코란 미술관과 렌윅 미술관 사이에 백악관이 있다.  그래서 대개 코코란에 가면 렌윅거쳐서 백악관 앞에서 어정거리다가 돌아오게 되는데, 오늘도 역시 그러했다.

 

백악관앞은 늘 그러하듯, 일인 시위자들이 있고, 관광객들이 백악관 울타리에서 사진을 찍고, 경찰들이 한가롭게 지나가고, 태평스러웠다.  일본에서 수학여행을 온 고등학생들이 단체로 사진을 찍는 것을 보면서, 우리나라 고등학생들도 가난한 공립학교 학생들도, 모두 이런곳에 수학여행을 온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도 잠시 해보고...

 

 

백악관 정문앞과 백악관 후원쪽이 일반 관광객들을 위해 개방되는데, 이쪽은 정문 쪽 입구이다.  울타리 안쪽에 카메라 조리개를 들이밀고 사진을 찍으면 이렇게 깔끔한 풍경을 찍을수 있다.

 

 

(사진들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

 

 

 

오바마 행정부가 추진하는 '의료보험'을 지지하는 일인시위자. 

 

 

문맹퇴치도 그가 주장하는 내용이다.

 

 

 

아예 진을 치고 비가오나 눈이 오나 일년 사시사철 '반핵, 반전' 시위를 하는 이도 있다.

 

단체로 쎄그웨이 (Segway: 두바퀴 전동차) 를 타는 사람들도 지나가고... (나도 저렇게 단체로 저 앞을 지나친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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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에 세그웨이 놀이, FBI 빌딩앞.

 

 

선생님의 구령에 모두 일괄적으로 표정을 짓고 단체사진을 찍고 있는 일본의 모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

 

 

 

일본 고등학생들 보니까, 영화 '러브레터' 생각도 나고...이웃나라 학생들 이었지만, 교복입고 줄지어 다니는 모습이 한국학생들과 다를바가 없어보여 한편 반갑기도 했다. 세상에, 여학생들이 길에서 단체사진을 찍는데도 무릎을 끓는구나!  놀랍다. 이런 것은 사진 찍을때도 인식을 못하고 있다가 사진 들여다볼때야 발견이 된다.

 

 

 

 

 

2009년 10월 2일 금요일

모세 할머니의 일생과 스타탄생의 배경

 

Anna Mary Robertson, Moses 할머니의 일생

 

모세 할머니는 1860년에 태어나 1961년에 사망했다. 1세기 한 바퀴를 돌고도 일년을 더 살은 셈이다.  결혼하기 전 이름은 안나 마리 로버트슨 (Anna Mary Robertson)이었고, Moses와 결혼하였으므로 남편의 성을 따라서 Moses 할머니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안나 마리를 씨씨하는 애칭으로 불렀다. 씨씨는 미국의 뉴잉글랜드 지역, 뉴욕주의 시골마을, 평범하고 가난한 농부의 아이로 태어났다. 당시 농가의 아이들은 집안일을 거드느라 학교 교육을 받을 기회도 많지 않았다. , 가을에는 들판에 나가서 일을 거들어야 했고, 여름과 겨울에 3개월씩 학교를 다닐수 있었다.

 

어느 겨울날 아빠가 몸이 아파서 며칠간 일을 나가지 못하고 집에서 지내게 된 적이 있었다.  아빠는 심심한 나머지 집안의 빈 벽에 그림을 그렸다. 아버지는 거실벽에 페인트로 호수의 풍경화를 그려넣었는데, 온가족이 이 그림을 보고 기뻐하였다. 어린 씨씨 역시 아빠의 그림이 좋아보여서 판자에다 숲과 호수를 그려보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말한대로 이것을 ‘lamb scape’ 라고 불렀다. (영어로 풍경화는 랜스케이프, landscape 인데, 어린아이가 이 단어를 잘 모르니까 lamb scape 라고 말 한 것이다.) 식구들은 씨씨가 램스케이프라고 하는 것을 보고 깔깔 웃었다고 한다.

 

씨씨는 농가의 소녀들이 그러하듯 엄마가 단풍시럽을 만들거나, 우유로 버터를 만들 때 거들어야 했다. 씨씨는 양초를 만들고 비누를 만들기도 했다. 세탁이나 다림질, 바느질 등 집안에서 해야 할 일들을 부지런히 배웠다. 그리고 열두살이 되던 해에, 다른 농가의 소녀들처럼 씨씨도 남의집 살이를 하기 위해 떠났다. 60년대, 70년대 농가의 소녀들이 서울이나 대도시에 식모아이로 들어간것과 마찬가지 풍경이었으리라.  당시에는 이러한 풍경이 낯설지 않았으므로 씨씨역시 이런 상황을 특별히 슬퍼하지는 않았고 자신의 일을 하면서 명랑하게 성장했다.  씨씨는 일요일에 주인집 가족들과 다함께 교회당에 가는 것을 좋아했는데, 오랜만에 사람들도 만나고 친구를 사귈수도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씨씨가 두번째로 옮겨간 집에서는 씨씨가 학교에 다닐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래서 집안 일을 모두 마치고나면 학교에 갈 수 있었다. 어느날 씨씨가 그린 마을 풍경화를 본 선생님이 그 솜씨에 감탄하여 그림을 달라고 한 적도 있었다. 씨씨에게는 잊을수 없는 기쁜 순간이었다. 선생님의 자신의 그림을 칭찬해주었으므로.

 

 

 

 

이렇게 남의집살이로 일을 하던 씨씨는 1986, 17세 되던 해에 토마스 솔로몬 모세 (Thomas Solomon Moses)라는 청년을 만나게 된다. 그 역시 같은 집에서 일하던 사람이었다. 둘은 결혼하여 버지니아의 섀난도 골짜기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이들은 열명의 아이를 낳았고, 그 중에 다섯명의 아이를 골짜기에 묻어야 했다. (그림: 섀난도 골짜기 Shanandoh Vallery, 1938)

 

 

 

 

 

 

 

 

 

섀난도 골짜기의 농장에서 살던 이들은 다시 뉴욕주로 이주하게 된다. 이들은 이글 브리지 (Eagle Bridge) 근처에 농장을 장만하여 니보산 (Mr. Nebo)이라고 이름짓고 정착한다이곳에서 씨씨는 자녀들을 키우면서, 농부인 남편을 거들면서, 집안 살림을 하면서 부지런하게 살아간다. 어느해에 도배를 하다가 도배지가 다 떨어지자 씨씨는 페인트로 난로 가림판에 풍경화를 그린 적이 있었는데, 가족들이 이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그것이 그녀가 최초로 그린 커다란 그림이었다고 모세 할머니는 술회한적이 있다.

 

아이들이 모두 성장하여 집을 떠나고 난후, 1927 1, 모세 할머니가 67세 되던해에 남편 토마스가 급작스럽게 사망하게 된다. 자녀들도, 남편도 떠나고 홀로 남겨진 모세 할머니는 시름을 덜 겸, 털실로 헌 그림을 고치곤 했는데, 시력이 약해지고 류머티즘으로 바느질을 하기 어려워지자 그림붓을 들게 된다. 그렇게 십여년간 모세 할머니는 심심파적으로 싸구려 페인트와 붓을 이용하여 추억속의 풍경들을 그리게 된다. 그의 그림 속에는 링컨 대통령이 저격당하여 조기를 내 걸고 있는 마을이 들어있기도 하고, 새로운 자동차를 타고 소풍가는 가족의 풍경이 그려져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뉴잉글랜드 지방 농촌 사람들의 삶의 풍경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뉴잉글란드 지방이 북부에 위치하고 있어 겨울이 길어서인지 특히나 눈 쌓인 겨울 풍경이 많이 보인다. 흰눈, 빨간 옷을 입은 사람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조각보를 만드는 장면도 보이고, 다 함께 단풍시럽을 만드는 장면도 보인다. 이는 모세 할머니가 평생 살아오면서 직접 경험한 삶을 풍경들이었고, 그이의 추억속에 생생하게 흐르는 드라마이기도 했다. 모세 할머니의 그림의 소재는 무궁무진했다.

 

1938, 모세 할머니가 78세 되던 해에, 모세 할머니는 자신의 그림을 동네 상점 (Hoosick Falls drugstore)에 진열해 놓았다. 몇푼에라도 팔리면 용돈벌이를 할수 있을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오랫동안 예정되어온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마침 이 상점을 지나던 뉴욕의 미술품 수집가 루이스 칼더 (Louis Caldor)가 시골 상점에 진열된 모세 할머니의 그림들을 발견하고, 이 그림에서 어떤 가능성을 읽어낸 것이다. 그는 당장 상점에 진열된 작품들을 모두 사들여가지고 뉴욕으로 향한다. 처음에 뉴욕 화랑가의 반응은 냉담했다. 알수도 없는 무명, 노인 화가의 그림에 투자해봤자 별 볼일 없을거라는 반응이었다. 

 

그런데 뉴욕의 현대미술관에서 무명 미국화가전시회를 기획하면서 모세 할머니의 그림 세점을 전시하게 된다. 이어서 1940 (모세 할머니 81) Galerie St. Etienne 에서 모세 할머니의 개인 전시회를 개최한다. 많은 사람들이 전시회를 보러왔고, 이들은 모세 할머니의 풍경화속에 담긴 추억을 읽으며 감동했다.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 후 1961년 모세 할머니가 사망할때까지 20여년간, 1,500점이 넘는 그림을 그려내면서, 모세 할머니는 그야말로, ‘국민 할머니로 통하게 된다. 트루만, 아이젠하워, 케네디 대통령이 모세 할머니에게 해마다 신년 카드를 보냈으며, 할머니의 작품들이 크리스마스 카드나 달력으로 판매되고 혹은 벽지나 직물에 박혀 대량으로 판매되어 나간다. 그녀의 일대기가 드라마가 되어 소개되기도 하고,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로 소개가 되기도 한다. 그녀가 사망하기 전에 어느 방송사에서 인터뷰를 하여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적이 있는데, 모세 할머니가 살던 시골에서는 그 방송이 잡히지 않아 정작 모세 할머니는 자신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후에 방송 기자가 다큐멘터리 테이프를 가져다가 틀어서 보여줬다고 한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자신을 본 할머니는 무척 기뻐했다고 한다.

 

 

 

무엇이 모세 할머니의 기적을 만들어 냈는가?

 

미국 미술사가들은 모세 할머니의 그림이 갖는 예술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편이다. 모세 할머니의 그림을 예술적인 회화로서 취급하기 보다는 풍속화 (folk art, primitive art)’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오히려 모세 할머니의 풍속화들이 왜 그 시대에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는지, 그 배경을 주로 논의 하는 편이다. Framing America: A Social History of American Art 의 저자 Frances K. Pohl 이나 American Visions: The Epic History of Art in America 의 저자 Robert Hughes 는 모세 할머니가 발견 된 시점의 사회적 분위기에 주목한다.

 

모세 할머니가 뉴욕화단의 수집가에게 발견될 즈음,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미국인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공공미술정책의 영향으로,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눈을 뜨게 된다. 중서부 출신의 화가 그랜트 우드 (Grant Wood)가 한편에서 미국인의 미국적인 것을 외치며, ‘미국의 풍경의 중요성을 역설하기도 했거니와, 뉴딜정책의 공공미술프로젝트에서 요구된 것이 미국의 풍경이기도 했고, 여태까지 유럽문화에 의지하던 미국인들은 우리들만의 것에 서서히 눈을 돌리게 된다.  미국이 자랑하는 미국화가에드워드 호퍼 (Edward Hopper)가 너무나도 미국적인 풍경을 가지고 사람들 앞에 등장한 것이 1930년대이기도 하다. 일설에는 경제 대공황이었던 1930년대에 미술가들도 역시 경제적 암흑기를 거치게 되었는데, 에드워드 호퍼는 이때부터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1930년대에 서서히 우리 미국인들의 풍경에 눈을 뜨게 되는 미국의 대중들은 2차대전을 거치면서 1945년 전승국이 되어 경제적 호황을 누리게 되면서, 자신이 소속한 국가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유럽으로 눈길을 돌리던 것에서 벗어나, 우리의 것, 우리 할머니들의 것, 우리가 향유하던 것을 향하게 된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탄생한 것이 모세 할머니의 기적이었다고 할 만하다.  모세 할머니 외에도 1948년 크리스티나의 세상으로 그 존재를 드러낸 청년 앤드루 와이어드가 있었고, 그리고 일관되게 미국의 얼굴, 미국의 풍경들을 밝은 색조로 그려낸 노만 로크웰 (Norman Rockwell)도 있었다.  미술 수업을 받지도 못 한 채로 혼자 그림을 그리다가 역시 말년에 미술계에 데뷔한 호레이스 피핀 (Horace Pippin)역시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발굴해 낸 미국의 작가라고 할 만하다.

 

미술사가들은, 모세 할머니가 특히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계기를 당시 눈을 뜨게 되는 텔레비전과 대량생산문화에서 찾기도 한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하고 어린아이들이 노래를 하기도 하는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텔레비전은 대중문화 매체의 상징이고, 텔레비전에 소개되는 모세 할머니의 이야기는 그이가 그려내는 작품의 예술성을 떠나서 그대로 소박한 인간의 승리를 전하는 드라마이기도 했을 것이다. 카드회사에서 찍어내는 그이의 그림을 담은 크리스마스 카드나 달력, 직물회사에서 찍어내는 그의 그림이 박힌 벽지나 테이블보는 모세 할머니를 더욱 대중에게 다가가게 해 주었다. 그이가 그린 그림들이 예술성이 어떠한지 이미 그것은 대중이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모세 할머니는 예술성을 넘어서서, 비평가들의 회의적 시선을 넘어서서 이미 국민 할머니가 되었고, 대통령들이 앞다퉈 악수를 하고 싶어하는 미국 문화의 상징, 그리운 추억의 아이콘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제목: Christmas (1961)

                                                 Oil and Tempera

             스미소니안 미국미술 박물관, 풍속화 갤러리 2009년 9월 6일 촬영

 

모세할머니는 나이 80에 미술계에 정식 데뷔했지만 그 후로 20년이 넘도록 국민 할머니로 영예를 누리며 살아갔다. 그가 남긴 그림이 1,500점이 넘는다고 하는데, 꽤 많은 숫자임에도 불구하고, 어쩐 일인지 워싱턴의 국립 미술관이나,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에서 그이의 그림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미술관 웹사이트를 뒤져보면 소장품 명단에 몇 편이 올라있지만, 전시장에 내 걸리는 경우는 별로 없다. 내가 내 눈으로 확인한 모세 할머니의 작품은 워싱턴의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의 소장품 한 점, 그리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한 점, 이렇게 딱 두 점이었다. 스미소니안 미국미술관의 소장품은 풍속화 (folk art)’ 갤러리에 걸려있다.  필립스 콜렉션에서도 한번 스치고 지나간 것 같은데, 요즘은 전시되고 있는 작품이 없다. 

 

                                           2009년 7월 3일 촬영

 

 

 

전시장에서 그림을 볼 수 없다 해도 실망 할 필요는 없다. 해마다 달력업자들은 모세 할머니의 그림 열두 장을 담은 달력을 찍어내고, 우리는 일년 내내 그이가 그린, 행복한 그림을 보며 지낼 수 있으니까. 모세 할머니는 그이가 기억하는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의 풍경을 그림에 담았다.  하지만 한국인인 나는 그 풍경 속에서 우리 할머니, 우리 할아버지, 우리 이웃집 어르신들, 내 친척들, 그리고 어린 시절의 나 자신을 찾아낼 수 있다. 미술 비평가들은 모세 할머니의 그림이 갖는 회화사적 작품성에 대해서 시큰둥한 반응이다.  하지만, 모세 할머니는 비평가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유롭고 명랑하게 그림들을 그려나갔고, 그의 그림들은 지금도 나에게 노래, 행복한 어린 시절의 노래를 선사한다. 이 행복한 보편성에 대해서 비평가들은 어떤 설명을 해 줄 것인가? 나는 이렇게 설명하고 싶다, 예술은 비평을 초월하는 곳에 있다고.

 

http://www.benningtonmuseum.com/index.aspx  이곳은 모세 할머니를 기념하는 미술관. 뉴잉글랜드 지역 버몬트주에 위치하고 있다. 2009년 8월에 매사추세츠를 방문하면서 이곳을 들러보려고 신경쓰고 있었지만, 시간이 촉박하여 가 볼 수 없었다. 다행히 내가 살고 있는 버지니아주에는 모세 할머니가 젊은시절 20여년간 살았다는 셰난도 골짜기의 농가집이 아직도 쓰러지지 않고 서 있다.  소풍삼아 그 언덕에라도 가게 되면 그때 관련 페이지들을 업데이트 하겠다.

 

 

 

관련 페이지들:

 

http://americanart.textcube.com/category/Grandma%20Moses

 

 http://americanart.textcube.com/182  또다른 일러스트레이터, 여성 화가 Tasha Tudor 이야기.

 

 

참고자료:

 1. Grandma Moses, written and illustrated by Alexandra Wallner

 2. American Visions: The Epic History of Art in America by Robert Hughes

 3. Framing America: A Social History of American Art (2nd Ed.) by Frances K. Pohl, Thames & Hudson

 

 

2009년 10월 1일 목요일

원무 (圓舞): Andrew Wyeth & Ben Shahn

 

 

펜실베니아 채즈포드에 가면 아버지 NC Wyeth 가 가족을 위해 사들인 집과 스튜디오가 있다. 이곳에서 앤드루 와이어드가 태어나고 성장하였다. 앤드루 와이어드가 종종 놀러 가서 그림을 그리던 크뤼너 농장이 있다. 이곳에서 그의 유명한 헬가 시리즈의 그림들이 많이 그려졌다고 한다. 일반에 공개가 되지는 않았지만, 멀지 않은 강가에 앤드루 와이어드의 집과 스튜디오도 있다. 그리고 와이어드 3대의 예술을 기념하는 기념비와 같은 미술관이 있다.  내가 2009 9월에 방문한 곳이 바로 그 브랜디와인 리버 미술관 (Brandywine River Museum)이다. 이 브랜디와인 리버 미술관의 앤드루 와이어드 갤러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중심 벽에서 우리를 맞아주는 그림이 그의 1989년작 눈 쌓인 언덕 (Snow Hill)이라는 대형 작품이다.

 

 

 

이 그림 속에는 노화가 앤드루가 평생 즐겨 그렸던 모델들이 총 동원되었다. 그의 아내 베씨도 보이고, 크뤼너 농장 주인인 크뤼너도 보인다. 그리고 가랑머리를 땋은 헬가도 있다. 이들은 어느 나라 민속놀이처럼 보이는 원무를 즐기고 있다. 커다란 기둥을 중심으로 색색 끈을 잡고 사람들이 둥글게 둘러서서 움직인다. 아마도 이리저리 교차하여 엮으면서 기둥에 직조를 하는 방식이 아닐까 상상해보게 된다. 눈이 쌓인 언덕이다. 눈이 쌓인 날, 세상이 무섭게 고요해진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무섭게 흰, 고요한 세상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어느 노화가가 평생 즐겨 그린 모델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이들은 둥글게 둥글게 춤을 추고 있다.  이들이 깔깔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고, 이들의 웃음소리마저 저 무섭게 고요한 흰 눈이 모두 흡수해 버릴 것도 같다. 언덕 아래로는 그가 즐겨 찾았을 농가도 보이고, 그리고 1945년 그의 아버지와 조카를 빼앗아간 기찻길도 보인다. 이 그림은 1989년에 그려졌고, 앤드루는 2009 1월에 사망했다.  그러니까 이 그림을 그린 후에도 그는 20년을 더 살았다.  그런데, 이 그림 앞에 서면, 이 그림이 이 화가의 최후의 그림이 아닐까? 하는 신비한 기분이 든다. 어쩌면 나이 70세를 넘기면서 앤드루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보거나, 혹은 그의 건강이 악화되어 그의 마지막 그림을 그리겠다고 작정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의 평생을 회고하듯 이 작품 위에 그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담은 것이 아니었을까? 이 그림의 알록달록한 끈은,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내 눈에는 할머니의 꽃상여를 장식하던 원색의 무늬 같기도 하고, 상여를 따르는 만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노화가가 고요한 시선으로 그가 사랑하는 세상을 향해 작별 인사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그림 앞에 서면 나는 몇 번이라도, 작별인사처럼 안녕안녕안녕…’하고 종알거리게 되는 것이다. 눈 위를 스치는 차갑고 고요한 겨울바람이 내 뺨을 스친다. 안녕, 안녕, 안녕

 

 

 

뉴욕 맨하탄의 현대미술관 (Museum of Modern Art) 5층에 가면 에스컬레이터가 올라가는 도중 복도에 걸려있는 그림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현재 (2009년 10월) 세장의 그림이 나란히 걸려있다. 왼쪽부터 앤드루 와이어드의 '크리스티나의 세상'   벤 샨 (Ben Shahn)  '핸드볼'  그리고 1945년작 해방’ (Liberation  http://americanart.textcube.com/85  ).  앤드루 와이어드의 그림과 벤샨의 그림이 나란히 걸려 있는것이다.  '해방' 그림 속의 아이들은 폐허 속에서 둥글게 둥글게 뺑뺑이를 탄다. 아이들은 창백하고, 그림의 배경도 창백하다. 유령처럼 창백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뺑뺑이를 타는 아이들이 씩씩하고 건강하게 잘 자라줄 것이라는 희망을 읽는다. 왜냐하면 나 역시 창백한 얼굴로 뺑뺑이를 타던 아이였으므로. 나는 건강하게 잘 살고 있으므로.

 

앤드루 와이어드에 대한 글을 정리하면서, 나는 문득 내 머릿속에서 그의 눈 쌓인 언덕장면과 벤 샨의 해방이라는 그림의 장면이 서서히 포개지는 것을 느꼈다. 70을 넘기고 인생의 마지막을 예감하는 노 화가에게 죽음은 어쩌면 영원한 작별이면서 해방이 아니었을까? 벤 샨에게 폐허는 죽음이면서, 이곳에서 원무를 즐기던 아이들은 또 다른 희망이 아니었을까? 벤 샨 (Ben Shahn September 12, 1898 – March 14, 1969) 1917년생인 앤드루 와이어드보다는 20여 년 연상인, 거의 한 세대 앞선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이다. 벤 샨이 사회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보았고, 사회현상에 대한 비판적 그림을 그리기도 했기 때문에 그를 사회적 사실주의화가 (Social Realist)로 분류하기도 한다. 벤 샨과 앤드루 와이어드가 20여 년의 차이가 있음에도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이들의 사실주의적화풍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순서로 보자면 역순이 되겠지만, 앤드루 와이어드 관련 페이지들을 정리하는 대로 벤 샨을 소개하고 싶다.

 

Andrew Wyeth: 미술가 집안 삼대(三代) 이야기

아버지 NC 와이어드

 

 

한국인들에게 크리스티나의 세상이라는 제목의 그림으로 알려진 미국의 사실주의계열 현대화가 앤드루 와이어드는 펜실베니아의 채즈포드 (Chadds Ford)라는 농촌 마을에서 23녀중의 막내로 태어났다. 앤드루의 아버지는 미국에서 이름난 화가였다. 본명은 Newell Convers Wyeth.  그는 짧게 NC Wyeth (October 22, 1882 – October 19, 1945)로 알려져 있다. 독일과 스위스 계 후예의 이민자의 아들로 미국에서 자라난 그는 일찌감치 미국 화단에서 이야기책의 삽화가로 자리를 잡았다. 매사추세츠주의 케임브리지 (하버드 대학이 있는 도시)에서 그 고장 처녀와 결혼한 그는 가족을 이끌고 펜실베니아의 농촌마을 채즈포드 (Chadds Ford)에 집과 스튜디오를 짓고 정착하게 되는데 그 집에서 막내아들 앤드루 와이어드 (July 12, 1917 – January 16, 2009)는 태어난다.

 

다섯 아이들의 아버지로서, 그리고 수백 권의 책의 삽화를 그린 미술가로서 그는 대체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삽화가로서 확고한 자리를 잡았고, 자녀들에 대한 가장으로서의 그의 사랑은 헌신적이었다고 할 만하다. 아내는 이 확고한 가장에게 순종적이었고, 자녀들은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듯 재능 있는 청년들로 자라났다. 그의 세 딸들은 미술이나 음악분야에서 전문가 급으로 성장했고, 그의 장남은 듀폰사의 엔지니어로 취업했는데, 오늘날 우리들이 사 마시는 플라스틱 음료수병을 처음 고안해낸 사람이 나다니엘 와이어드(Nathaniel Wyeth) 바로 듀폰사에 취업한 장남이라고 한다.

 

아버지 NC 와이어드가 얼마나 성공적인 삽화가로 자리를 잡았는가 하면 1920, 그의 나이 38세 당시에 그의 채즈포드 집에는 요리사, 가정부, 집사 등이 상주했으며, 세탁물은 외부 세탁소로 모두 보내버렸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집을 찾던 손님 중에는 위대한 개츠비 (The Great Gatsby)’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미국 소설가 스코트 피츠제랄드도 있었다. NC 와이어드는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써로우 (Henry David Thoreau), 초절주의 미국철학자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등과도 교유가 있었으며 이들의 글을 열심히 읽어댔다고 한다.

 

아버지 NC는 삽화가로서 부와 명예를 얻고 가족들에게 풍요로운 삶을 제공할 수 있었으나, 개인적으로는 우울감에 시달린 것으로 보인다.  이는 Norman Rockwell 이나 그 밖의, ‘삽화가로서 이름을 날린 화가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일수 있는데, ‘삽화 (illustration)’가 순수 미술활동에서 한 발짝 벗어난 것이라는 생각에 기인한 것이다. 삽화작업이 순수미술인가 아닌가 하는 논의를 내가 따로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나 윈슬로 호머(Winslow Homer), 롸크웰 켄트(Rockwell Kent) 등 미국 미술사를 장식하는 빛나는 화가들의 이력 중에 삽화가로서의 이력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들은 대개 호구지책으로 어쩔 수 없이 삽화작업을 했으며, 이 작업에 염증을 내고 벗어나고 싶어했었다.  이는 마치 순수 문학을 하고 싶어하는 작가 지망생이 혹은 무명 작가가 호구지책으로 잡지사에서 편집 일을 하는 것과 비슷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지 NC는 삽화가로서의 성취감과 순수예술가가 되지 못했다는 우울감 사이에서 혼란스런 말년을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다섯 자녀에게 자상하기 그지없는 아버지였으며,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직접 자녀들의 미술 지도를 하기도 했으며, 그리고 튼튼한 성채와 같은 황제이기도 했다. 화를 낼 때 그는 호랑이처럼 무서웠으며, 육 척도 넘는 덩치와 힘의 소유자였던 그는 누군가가 맘에 안 드는 행동을 할 경우 그를 번쩍 집어 던질 정도로 사납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1945, 채즈포드에서 손자와 함께 자동차로 기찻길을 건너다가 달려오는 기차를 피하지 못해서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고 하는데, 바로 근처에서 이 광경을 봐야 했던 마을사람은 그의 마지막 순간을 기억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세 살짜리 손자아이에게 저 들판을 봐라. 너는 다시는 저런 광경을 보지 못 할 거야  아버지 NC는 그 날, 메인주에 가 있던 막내아들 Andrew 부부가 돌아올 것에 대비하여,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녀석을 데리고, 막내아들 부부가 살던 신혼 집을 청소해주러 가던 중이었다고 한다.

 

아들, 앤드루 와이어드

 

삽화가 NC의 막내아들 앤드루는 우리나라에서 삼일 운동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17년에 펜실베니아의 평화로운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헌신적인 부모와 다정한 형제들 속에서 동화같이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아버지 NC는 가을철 할로윈데이 (Halloween)에 자녀들이 동화 속 주인공으로 변장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겨울 크리스마스가 되면 직접 산타 할아버지로 변장을 하고 나타나 자녀들에게 꿈과 마술과 환상의 세계를 심어주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꼬마 앤디는 귀염둥이 요정처럼 자유롭게, 발랄하게 성장했을 것이다. 막내아들의 신체적으로 연약하다는 것을 파악한 아버지 NC는 그를 공립학교에 보내는 대신에 집에서 가정교사로부터 수업을 받게 했고, 그 나머지 시간에 앤드루는 혼자 마을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앤드루가 15세가 되었을 때, 그는 정식으로 아버지 NC의 스튜디오에서 미술 수업을 시작한다. 그렇다고 아버지 NC가 그에게 미술의 기술을 전수한 것 같지는 않고, 기본적인 뎃생법, 빛과 사물과의 관계를 자상하게 안내해 준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의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하는 동안 그의 삽화 습작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팔려나가기도 한다. 앤드루가 17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의 스튜디오에서 벗어난 그는 모 회사로부터 책의 삽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게 된다. 삽화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그에게도 찾아 온 것이다. 이 때, 아버지가 앤드루를 설득한다, “앤디야 내가 너를 돌봐줄 테니 그냥 그림만 그려라.”  앤디가 20세가 되어 당시 17세였던 처녀 베씨 (Betsy)를 만나 청혼을 했을 때에도 아버지 NC는 극구 결혼에 반대의사를 표했는데, 막내 아들이 가족을 부양하느라 예술가의 길을 못 가게 될까 봐 근심하였다는 것이다.

 

아버지 NC는 당시 미국사회에 풍미하던, 잭슨 폴락이나 로스코, 윌리엄 드 쿠닝등이 선보이던 추상 표현주의 (Abstract Expressionism)의 물결을 지켜보면서 사실주의적 화법으로서는 성공하기 힘들다고 예측했고, 그래서 아들이 이 새로운 물결을 수용해주길 바랬다.  하지만 앤드루는 윈슬로 호머나 뒤러와 같은 사실주의 화법의 작가들에 매료되어 있었고, 시대에 뒤떨어져 보이는 템페라화에 집중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화풍이 마음에 안 들었을지도 모르고, 아들의 앞날이 근심스러웠을 것이다.  한편 앤드루는 아버지의 시선이 부담스러웠고, 아버지가 인정해주지 않는 그의 미술세계에 대하여 불안감과 분노심과 같은 복합적인 정서를 키웠을 것이다. 이런 것을 우리는 애증의 관계라고 간단하게 표현하기도 할 것이다.

 

1945년 아버지 NC가 펜실베이나 자택 앞 기찻길에서 사고로 사망했을 때, 앤드루의 상심은 컸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신화 속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그러하듯, 혹은 대부분의 아버지와 이들의 관계가 그러하듯, 아버지를 잃고 나서야 아들은 진정한 성인으로 탈바꿈을 하게 된다. 지켜보던 시선혹은 숨은 감독관으로 존재하던 아버지로부터 벗어났을 때, 앤드루는 아버지의 상실이 가져온 생의 비극성과 성찰을 자유롭게그의 화폭에 옮길 수 있었다. 그는 사랑하는, 그러나 한편 부담스럽고 무서운 아버지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고, 그 자유 속에서 아버지를 재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뉴욕화단이 추상표현주의로 들끓고 있을 때, 앤드루는 그가 즐겨 산책하는 마을의 이웃사람들, 그 이웃사람들의 낡은 침실, 낡은 부엌, 그들의 풍경을 관찰하며 살았고, 그들의 친구가 되었고, 그리고 그들을 그렸다. 앤드루의 화집에는 그가 친구로 교류했던 독일계 이민자 가족, 혹은 오두막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흑인가족들이 많이 눈에 띈다. 어찌 보면 그와 동시대를 살던 화가들이 한편에서는 추상표현주의라는 미술 놀음에 열중하고 있고, 한편에서는 사회적 사실주의를 기치로 사회현상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을 때, 이들과 동떨어져서, 역시 동떨어진 채 살아가는 그의 이웃 사람들을 들여다보는 일에 열중해 있었던 것도 같다. 그는 세상 돌아가는 것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어떤 대상, 혹은 풍경에만 몰입하여 이를 그림에 담아내는 일에만 몰두한 것 같은데, 그의 극히 개인주의적인 이런 그림세계를 그의 화집들을 펼쳐놓고 휘리릭 넘기다 보면 재미있는 현상이 발견된다.

 

앤드루 와이어드 자신도 고백한바 있거니와, 그는 세상을 잘 모른다고 했다. 오로지 그가 아는 것, 그리고 그가 그림을 그린 대상은 펜실베니아 그의 집 주변, 그가 여름에 가서 지내던 메인 주의 집 주변, 그리고 이웃 사람들로 한정되어 있다. 그는 시사문제에 눈길을 돌린 적도 없고, 그의 화풍에서 벗어난 적도 없다. 그는 고집스럽게 극 사실적 세필로 그 주변의 풍경을 그려나갔다. 그런데 그의 그림의 주인공들은, 대개 소외계층의 대중들이다. 힘겹게 살아가는 독일 이민자 농부, 농부의 아낙, 한쪽 팔을 잃은 흑인 친구, 그가 자주 드나들던 이웃 흑인 가족들, 그가 15년간 은밀히 그려낸 헬가 역시 독일계 이민자의 아낙으로 남의 집 일을 해주던 여인이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친숙한 크리스티나 올슨, ‘크리스티아의 세상의 주인공 역시 그렇게 잊혀진 대중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목청 높여 소외계층의 사회적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 할 줄은 몰랐지만, 평범하게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삶의 숭고함을 전달하는 데는 성공했다.

 

바로 이런 점을 보면 예술의 힘이 무엇인가 어렴풋하게나마 실마리를 잡아 가게 된다. 산이 있을 때, 그 산의 정상까지 올라가는 길은 무수하다. 그 길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고, 외 따른 길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연결된 길을 따라 이리저리 노선을 바꾸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오로지 한 길로만 행군하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중턱에서 그만 내려오기도 한다.  아무튼 산에는 정상이 있고, 사람들은 각기 다른 길을 통해 그 정상에 오르게 된다.

 

하나의 예술 작품이, 혹은 어떤 화가의 작품이 관객의 공감을 얻게 될 때, 혹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게 될 때 그 감동이나 공감의 요소는 무엇일까? 그 그림이 추상화이건, 구상화이건, 사회성 높은 그림이건 혹은 선전물 (프로파겐다)이건간에 그것이 우리를 감동시키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이 있다.  나는 그 요소가 대상에 대한 열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화풍이 어떠하건, 작품에서 열정이 느껴질 때, 나는 감동하게 되는 것 같다. 대상의 본질을 깊이, 깊이 들여다보고 사색한 흔적이 보일 때, 그런 작품 앞에서 나는 감동하게 된다. 그것이 표현주의이건, 선전물 프로파갠다이건, 사실주의적이건 뭐건간에.  (내게 이런 시각이 있기 때문에 내가 소위 팝 아트라고 일컬어지는 일련의 작품들에 대해서 냉정하거나 무관심한 태도를 견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이런 시각은 팝 아트에 대해서 좀더 진지하게 공부한 후에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알면 사랑하게 되니까.)  앤드루 와이어드의 풍경 속에는, 그의 인물화 속에는 그가 친숙하게 잘 알고 있는 사람, 대상에 대한 깊은 성찰이 들어있다.  풍경 속의 사과나무 한 그루를 그릴 때조차 그는 사과를 일일이 세어보고 그렸을 정도로 대상에 대한 관찰이 확고 했었다. 그의, 대상에 대한 진지함은 인류애와도 닿아있었다.  그는 친한 이웃 흑인이 죽었을 때, 장례비가 없어서 쩔쩔맬 때 기꺼이 장례비를 제공하기도 했고, 부성애가 강했던 아버지가 싫어하는 줄 알면서도 이웃 흑인친구들과 어울려 시간을 보냈다. 한 개인으로서 그는 세상과 무관하게 살았던 것처럼, 역시나 인종문제나 사회적 차별의 문제와도 무관하게 사람들과 어울렸던 것이다.

 

손자: Jamie Wyeth

 

앤드루 와이어드와 그의 아내 베씨 사이에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 니콜라스는 미술 중개인이고, 둘째 아들 Jamie 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대를 이어받아 화가로 성장했다. 온라인 자료를 찾아보면 그에 대한 소개가 나와있기도 한데, 삽화가였던 NC나 사실주의적 화풍을 고집한 앤드루에 비해서 3대 제이미의 미술 세계는 특별해 보이지는 않는다. 뭐 대대로 명장이 나올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미국이 자랑할만한 독보적인 화가 집안인 와이어드 집안의 3대가 화가라는 것은 특별한 사항이긴 하지만, 3대 제이미는 아직까지는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이룩한 독보적 세계를 이룩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물론 1946년생인 그가 앞으로 독창적인 미술을 펼쳐갈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글쎄, 선대의 그늘이 하도 커서……

 

 

Andrew Wyeth 관련 페이지들은 이곳에:

http://americanart.textcube.com/category/Andrew%20Wyeth

 

관련자료:

First Impressions: Andrew Wyeth, by Richard Meryman (1991)

Andrew Wyeth: Autobiography, Introduced by Thomas Hoving (1995)

 

앤드루 와이어드가 즐겨 사용했던 템페라화, 드라이터치 기법 페이지가 이어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