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 4일 토요일

그리워서, 꽃물

 

 

 

며칠전, 저녁에 가만히 앉아있는데 코피가 쏟아진 적이 있다.

그냥 뭔가 흘러나와서 콧물인줄 알고 쓱 문질렀는데, 코피가 손에 그렁하게 묻어났다.

그리고나서도 그 선연한 붉은 빛이 조금 더 흐르다 저절로 멈췄다.

나는 코피가 평생에 다섯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안 나는 사람이라

그 코피를 신기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당장 그 다음날, 퇴근길에 찬홍이하고 '외갓집'이라는 '무제한 돌판구이 고기' 집에 가서 차돌백이만 몇판을 구워먹었다. 기운이 없다 싶을땐, 스테이크를 썰어주시던가, 불갈비를 때리던가.  뭐 그러는 식이다.

지금은 어지럽지도 않고, 좋다.

 

그런데 그 외갓집이라는 고깃집 마당에 철늦은 봉숭아가 몇그루 있길래, 내가 잎사귀며 꽃잎을 좀 따왔다.  며칠 냉장고에 넣어서 시들게 내버려두다가, 어젯밤에 (백반이 없어서) 소금을 넣고 봉숭아를 칼 끝으로 쿵쿵 짓 찧었다. 그리고 열손가락에 봉숭아를 칭칭 묶고 잤다.  내 평생에 열손가락에 봉숭아 들이기는 처음이다.

 

아침 기온이 쌀쌀하다.

옛날에 이맘때 시골집에 가면 봉숭아 분꽃 이런 여름 꽃들이 기운을 잃고 높아져가는 하늘 아래서 쓸쓸하게 서있었는데...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 할머니가 보고싶다. 아버지가 보고싶다. 그래서 열손가락에 할아버지의 봉숭아 꽃물을 들이고 앉아있다. 손에 아직도 봉숭아 꽃 냄새가 남아있다. 이 꽃물이 다 지워지기 전에 첫눈이 올것이라고 상상해본다.

 

 

2010년 9월 3일 금요일

부모님 은혜

요즘, 불쑥 불쑥 그리워져서,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얘기를 조금 끄적거렸는데,

해마다 9월이 오면, 그렇게 된다.

아버지가 여름과 가을 사이에 돌아가셨다.

양력으로 이맘때쯤

음력으로 추석 일주일 전쯤.

 

할머니도 이맘때 돌아가셨다.

제사가 아버지보다 일주일 빠르다. (다음주이다.)

 

그래서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그립고 쓸쓸해진다.

 

 

얼마전에 '말실수'를 해서 곤경에 처해졌던 K 모 의원.

그분이 근래에 출당조치 당하고, 여러가지로 괴로운 처지인듯 하다.

나는 그분의 일에 대해서는 큰 관심은 없고,

단 한가지, 그 분의 일이 연일 인터넷 매체에 불거져 나올때,

그의 블로그까지 샅샅이 열람당하고 네티즌들의 비난의 대상이 될때

어느 구석에 실린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어린때부터 수재였던 그가 그야말로 고학 하다시피 공부를 마치고

사법고시까지 통과하고, 연수원 성적도 매우 좋았는데

판검사 임관이 될 수 없는 사정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뭔고하니, 그분이 부친께서 좋지 않은 일로 범법자가 되어 교도소를 들락거렸으며

그가 연수원을 졸업할 무렵에도 교도소에 수감중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법관에 임용이 되지 못했다던가..

 

그 토막 기사를 보니, 그 사람이 의원으로서 저지른 잘못이나 실수, 과오, 이런것을 감안하고서라도

그의 개인사에 대해서 슬픔 같은것을 느꼈다.

 

그때, 나는 내가 얼마나 운좋은 사람인지 다시 깨달았다.

우리 부모님은 유신시대의 경제개발기를 거친,

대개 고만고만한, 자수성가형 평범한 분들이다.

나는 초등학교에 다닐때, 남들이 다 사먹는 길거리 떡볶이도 사먹을줄 몰았다.

돈도 없었고, 그런것을 내가 사먹을 처지가 아니라는 생각도 했고,

원래 뭘 사먹으면 안된다고 생각도 했고.

그렇다고 밥을 굶은것도 아니고

그냥 남들만큼 가난했고, 남들만큼 먹고 살았다.

나라가 성장하는 만큼, 우리집 살림도 폈고, 그래도 우리집은 항상 긴축재정이었다.

아버지 월급으로 네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대학교육까지 시키기 위해서는 항상 긴축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유복하지도 궁핍하지도 않은 아주아주 평범 그 자체인 성장기를 거쳤고

우리 부모님에 대한 내 인상도 그러한 것이었다. 그냥 평범한 부모님.

 

그런데, 돌아보니, 내 부모님이 평범한 분들이지만, 이 세상에 평범하기가 쉬운게 아니더라.

나는 부모님이 부끄러웠던적이 없었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 집안의 자랑이었고, 집안의 기둥이었다.

일가친척들 사이에서도 모두들 우리 집이 번성한다고 부러워했다.

할머니에게 외아들은 천하에 남부러울것이 없이 훌륭한 아들이었다.

우리들은 가난하지만 자존심을 지키며 지냈다.

나는 남들 앞에서 기죽을 것이 없었다. 남부끄러울것이 없었으니까.

 

내가 사회에 나가서 뭔가 하고자 할때

우리 부모의 사회적 위상이나 이력이 나를 방해한 적이 있는가?

아니다. 우리 부모님이 나의 후광이 되어줄 지언정 방해가 된 적이 없었다.

내가 결혼할때 우리집안의 내력이나 부모님이 장애가 된 적이 있는가?

아니...생각컨대, 우리나라 어느 명문 집안, 어느 재벌집안과 비교해도 나는 꿇릴것이 없었다.

내 집안이 명문이건 아니건 돈이 많건 적건간에 나는 꿇릴것이 없었다.

(혹시라도 내가 일류대학을 안나왔다고 상대 집안이나 상대가 얕잡아볼지도 모르겠으나, 그건 그쪽의 실수인 것이지 나와는 무관한 일이었을것이다.)

 

아무튼 나는 부모님이나 집안 문제때문에 어디 가서 기 못펴고, 장애를 겪고 그럴 소지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축복인지, 나는 여태 모르고 살았다. 40년이 넘게 그걸 몰랐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념이나 사상문제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사상범, 정치범들도 많이 계시고

이런분들은 정치사의 변화에 따라서 명예롭게 사회에 복귀하기도 하고 그랬다.

부모님이 사상범이나 정치범이라고 한다면, 혹시 여러가지로 문제를 겪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나의 자존심이나 존재감에 흠집이 생기는 일은 적을 것이다.

어쩌면 내면적으로 자부심을 키울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파렴치범이라던가, 이런경우에는 ...명예회복이 쉽지 않다.

그러니, 그런 상황속의 자녀들은 생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고난을 겪게 된다.

떳떳치 못한 부모의 자식이라는 그 자괴감을...누가 위로할수 있을까...

 

이런 저런것을 돌아보건대,

나는 기가막히게 운이 좋은 사람들중의 하나라는 것이고,

그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행운아들은, 자신의 행운을 남들과 나눌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그들이 누리는 행운에 대한 예의 일 것이다.

 

나이 먹으니 부모님 감사한줄을 조금씩 깨닫게 되다.

 

 

[Walking] 태풍이 온다는 흐리고 바람부는날 이른 아침

 

 

 

2010년 9월 3일 금요일 아침에 찍은 스타벅스 (위)와 조지타운 하버 (아래)

한시간 땀 흠뻑 흘리고 하버에 도착하면 목이 말라서

가방에서 물을 꺼내 먹거나, 물 잊고 그냥 나간 날에는

스타벅스에 들러서 물이나 아이스티를 사서 마십니다.

 

한참 땀 흘리고 몸이 뜨거울때

서늘한 스타벅스에 들어가서

음악 들으며 쉬면, 거기가 천국처럼 좋습니다.

밤하늘에 별이 무수하듯, 지상에도 별처럼 아름다운 장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스타벅스 광고 같군요.

하지만, 그 시간에 음료수를 마실수 있는 곳이 스타벅스 뿐이니까요...)

 

 

전에는 P선생과 여기 들러서 베이글에 치즈 발라 먹고,

커피도 마시고

신문도 읽고, 그랬었는데.

지금은 음료수 한잔 먹고 쌩하니 일어나서 서둘러 집으로 돌아옵니다.

 

 

흐리고 바람 부는날.

걷기에는 완벽한 날씨.

 

돌아오는 길에는 Farmer's Market 에 들러서 나무에서 방금 따온 사과와 복숭아도 몇알씩 사고

찬홍이가 먹을 빵도 사고 그랬습니다.

오늘은 집에서 종일 공부를 하고...

내일은 오랫만에 내셔널몰, 미술관에 가서 본격적으로 미국미술 리뷰작업을 다시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2010년 9월 2일 목요일

[song] try to remember

 

 

9월의 노래. 하지만 사철 즐겨듣는/부르는 노래.

 

 

 

 

외밭에선 신발끈을 고치지 말고...

오얏나무 아래선 갓끈을 고치지 말고

외밭에선 신발끈을 고치지 말라고 했다.

 

동방의 어느 나라에서는 모 고위관리의 자녀가 하필 그 고위관리 소속 기관에 '특채'가 되었다해서 특혜냐 아니냐 논란이 되는 모양이다. 이런 뉴스를 접하니, 내 쓰라린 옛 기억이 떠오른다. (세상에 쓰라릴 것도 많구나, 얘야!  <--- 하늘에서 예수님이 한마디 하시다)

 

아버지는 대학에 계셨다.

아버지는 내게 그 대학에 입학하라고 지도하셨다. 교직원 자녀는 학비 면제라는 합법적 특혜를 누릴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수성가한 가장에게 자녀 학비 절감은 중요한 이슈였을것이다. 그래서 나는 선택의 여지도 없이 아버지가 재직하시던 대학에 입학했다. 내게는 거기가 '나의 학교'라기보다는 '아버지의 학교'라는 의식이 강했고, 모든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어떤 강박증 까지 생겼다. '모두가 나를 보고 있으며, 내가 행동을 잘 못하면 우리 아버지가 망신을 당하고 말거라는 불안감.' 나는 아버지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서 노력했다.  늦게 배운 도박질에 날 새는줄 모른다고, 늦게 시작한 공부에 날새는줄 모르게 공부한 측면도 있고, 아버지의 위신을 지켜드려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고 해서 내 성적은 '타의 모범이 될만'했다.

 

그런데, 그래도 여전히 나는 스스로가 개운치 않았다. 성적이 좋으면, 그것이 내 실력때문인것인지, 아버지와 친구인 교수님들이 그냥 내 성적을 잘 주신것인지 애매하게 느껴졌다. 그런 상황 자체가 개운치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객관적으로 나의 실력을 증명할 만한 시험들을 치거나, 학교 바깥에서 내 실력을 가늠하는 활동들을 했다. 그래서 시험으로 통과한 것들이 몇가지가 있다. (나의 실력을 증명할 만한.)

 

학교의 원로 교수님들은 모두 아버지와 친구 관계였기때문에, 나는 원로 교수님들을 슬슬 피해다녔다. 그 대신에 최근에 신규 임용된 교수님들. 아버지를 전혀 모르고, 아버지와 나의 관계를 전해 모르는 젊은 교수님과는 비교적 친근하게 지냈다. 나는 교수님들에게 인정 받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내 후광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나를 평생 돌보시는 내 은사님은, 아버지의 존재 이전에 나의 존재를 먼저 발견하고 나를 사랑해주시던 분이다.

 

나의 이런 우울감은 극에 달해서, 학교에서 멀찌감치 아빠가 보이면, 나는 다른 길로 피해다녔다. 아버지와 학교에서 마주치기도 싫었다.  아버지를 아는 사람은 모두 피하고 싶었다 (나도 내 영역이 필요하니까 말이다.) 남들은 '젊음의 향연'이라는 대학생활이 내게는 감옥과 다를것이 없었다. (단, 감옥에서도 사람들은 나름 즐거움을 찾는다.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까.)  어느해에 내가 무슨 큰 상을 받았다. 학장님이 나를 불러서 상장과 상금을 전달해주시고, 뭐 사진도 찍고... 나는 벌쭘하니 상 받아다가 상금은 술값으로 탕진을 하고... 그런데, 그 때 아버지가 무척 서운해하셨다 -- "너 왜 상받을때 학장님한테 네 아비가 나라는것 얘기 안했어?  이 학장이 네가 내 딸인거 나중에 알고,  말 안했다고 섭섭해 하더라." (내가 내 실력으로 상 받았는데, 왜 거기서 아버지 이름을 들먹거려야 한다는 말인가? 하하하. 나도 내 영역이 필요하다구!)  아버지는 내가 학교 신문이나 학회지등에 발표한 시, 잡문, 평론 뭐 이런거 샅샅이 읽으면서 '야 여기 맞춤법 틀렸다 임마' 이렇게 지적하기를 잊지 않으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심 나를 무척 자랑스러워하고 계셨다. 아버지의 눈빛을 보면 알수 있었다.  자랑으로 가득찬 눈빛.  친구들에게 나를 자랑하고 싶어하던 눈빛.

 

 

  ***    ***

 

내가 대학을 마칠즈음에, 대학원이냐, 취직이냐, 유학이냐 뭐 이런, 내 또래 친구들이 모두 고민하던 것들을 나도 고민할 즈음에, 우리 아버지가 원칙을 제시하셨다.

 

 * 대학원은 네 실력껏 딴데로  알아서 가되, 학비도 알아서 해결하라. (왜냐....대학원부터는 교원자녀 학비 면제가 해당이 안되므로....)

 

 * 취직은 알아서 실력껏 하되, 대학 근처를 기웃거리지 말라. 행여 부속중고등학교 교사자리라도 탐내지 말라.  설령 네가 실력이 있어서 부속중고등학교에서 불러도 너는 거기 가면 안된다. 내가 여기 있는 이상. 사람들이 씹는다. 그따위 짓 하지 말라.

 

 * 유학은 네 실력껏 알아서 가던지 말던지. 난 돈 없으니 유학자금 못대준다. 알아서 하라.

 

   ***     ****

 

그래서 나는 대학 졸업과 함께 내 멋대로 회사들을 들락거리며 세상 공부를 하며 살았다.  대학 졸업한 후에는 모교 근처에 얼씬도 안했다. (치사해서 ^^* ...내가 여기 아니면 밥 굶을줄 아는가? 여기는 분명히 아버지의 땅이고. 나는 떠난거다.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난거다.) 

 

  ***   ***

 

아버지가 어느해 돌아가셨다.  그리고 이듬해에 나는 내 은사의 연락을 받고 아버지가 재직하시던, 그리고 내가 졸업한 대학에 일을 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내 일은 아버지하고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영자 신문을 만드는 내 고유 영역의 일이었다.  내 은사님은 그 자리를  바탕으로 나를 크게 키우고 싶어했지만, 나는 그 일도 2년만에 그만두었다. 집안 환경상 내가 도저히 일을 계속할수 없어서 부득불 그렇게 되고 말았다.

 

내 은사님은 그후에도 애면글면 나를 키우고 싶어 하셨고, 당신이 정년퇴직 할 무렵에는, 자신이 비울 그 자리를 내가 채워주기를 희망하셨다. 내가 학위를 마치고 귀국하는 대신에 워싱턴에서 자리를 잡았을때, 교수님은 내게 배신감을 느끼셨을것이다. 나로서는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나도 돌아가고 싶었으나 돌아갈수 없는 입장이었다.  나는 여기에서 이워야할 사명이 있는듯 하다. 내 뜻대로 안 될때는 '소명'을 생각한다.

 

  ***   ****

 

나는 지금 우리 아버지를 생각한다.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을때, 엄마의 장롱에서 나오던 무슨 무슨 훈장들을 나는 기억한다.

교육계에 수십년간 봉직한 분들께 나오는, 나랏님이 하사하시는 무슨 무슨 훈장.

우리 아버지는 훈장 몇개 남기고 사라져간 소시민이셨다.

그런 우리 아버지도, 자신의 직장에 딸자식이 얼씬거리는 것을 경계하셨다.

실력이 있으면 딴데가서도 빛날것이니, 딴데로 가라 이거다.

(그것보다는, 아버지 자신이 남들한테 손가락질 당하는 것이 싫으셨을것이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니까).

 

아버지의 노선이 옳았다.

실력 있으면 딴데가서도 밥 굷지 않는다.

하필 거기가 아니어도 되고

오히려 딴데 가서 더 빛날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 아버지의 자존심이 우리 가족을 안전하게 지켜낸 것일지도 모른다.

그럴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유명세 때문에, 그 자식이 기를 못펴고 지낸다거나, 혹은 자신의 진짜 실력을 객관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우울감 이런것에도 나는 공감하는 편이다. 나는 그 우울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정말로 실력을 닦아야만 했다. 그래서, 한편으로 나는 아버지의 자랑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로서도 힘든 세월이었다. 하여튼 나는 제 아버지 빽으로 취직했다는 소리는 안듣고 살았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아버지가 옳았다.  자존심을 지키며 올바르게 사는 모범을 보인것, 그것이 진정한 아버지의 '빽'이었다. 우리 아버지 빽이 제일 든든한 빽이었던 것이지.  그래서 나는 죽을때도 꽥! 대신에 '빽!'하고 죽을것이다. :)

 

 

  ***   ****

 

똑같은 규칙이 이제는 내 남편에게도 적용된다.

내가 우리 아버지의 영역과 내 영역사이에 분명히 금을 그엇듯

(먼저 금은 긋는 모범을 보인이는 물론 우리 아버지이시다),

나는 내 영역과 내 남편의 영역사이에도 금을 긋고 행동하는 편이다.

내가 대학 다니는 동안 '아무개의 여식'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일이 부담스럽고 싫었듯이,

나는 이 세상에서 '아무개의 아내'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지도 않다.

나는 그래서 나를 Mrs. P 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남편의 직무 영역과 관련된 인사들을 아무개의 아내 입장에서 만나는 일은 재미없는 일 중의 하나였다.

나는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 이전에 '나'로 존재한다. 그러고 싶다.

 

나는 이미 우리 아버지 슬하에서, '네 실력껏 알아서 생존하라'는 방침대로 자랐다.

내가 무슨 일을 이룰때, 아버지빽이 아니었듯, 남편 빽이라는 소리도 듣고 싶지 않다.

남편에게 누를 끼칠 생각도 없고, 그의 직위를 이용해 내 이익을 챙길 생각도 추호도 없다.

나는 나혼자 설때 가장 떳떳하다는 것을 우리 아버지 슬하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남편이 나와 함께 있어주는 것 그 자체가 이미 든든한 바람막이이고, 그것이 이미 빽이다.

그것으로 감지덕지이다. 그 외에는 나는 내 실력껏, 스스로 알아서 자랄것이다.

단지 내가 염려하는 것은 나의 실수나 실언이 남편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사람이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부실한 존재라서, 늘 자신을 돌아보고 경계해야 한다.

 

내 진짜 빽은 ----> 하느님이다. :)

 

Lunch

 

요즘 도시락, 대략 이러한:

  1. 저지방 요거트  대략 90 칼로리
  2. 작은 오이 한두개
  3. 꼬마당근 많이
  4. 인절미 몇개.

이거 먹으면, 배 부르다. 속도 편하고.

인절미나 쑥시루떡, 한국마켓에서 만들어서 그자리에서 잘라주는것 사다가

다시 조금씩 포장해가지고 냉동실에 넣었다가,

매일 한개씩 꺼내서 도시락 대신 먹으면 좋다.

 

* 무엇보다도, 부엌에 서서 조리 할 필요가 없는 음식이라는 것~  하하 *

 

 

2010년 9월 1일 수요일

할아버지의 달걀 피라미드

나는 어쩐 일인지, 우리 아버지에 대한 기억보다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훨씬 생생한 편이다.

아버지는 무조건 '권력자'였고 나의 단점을 가지고 나를 궁지로 모는 '무서운' 존재였다.

할아버지는, 괴상하고 퉁명스러우며 비사교적인 사람이었지만, 내게는 무조건 사랑을 주는 사람이었다.

 

우리 할아버지가 옛날에, 일제 식민지 시절에 '만주'지방에서 가솔을 거느리고 살던 시절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 당시 공장 건축 관련 일을 하신 듯 하다.

아무튼 매일 일정하게 출퇴근을 하는 직종이었을것이다.

 

할아버지는 매일 새벽이면 인근의 산으로 달려가서, 냉수마찰을 하고 운동을 하고 돌아오는 일상을 이어갔다.  내가 기억하는 한, 우리 할아버지는 평생 매일 아침에 산에 뛰어 오르셨으므로, 내가 태어나기 한참 전에도, 우리 아버지가 태어나기 전에도 아마 그러셨으리라 추측한다.  아침마다 산에 뛰어오른 사나이. 그 분이 내 할아버지이다.  (아 그러니까, 그런 할아버지의 후손인 내가, 매일 거르지 않고 겨우 3마일정도 아침 산책을 다닌대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아흔 몇살인가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그런 생활을 유지하셨다.  (내가 플로리다에서 공부 할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나는 장례에도 가보지 못했다. 그때는 무척 서운했지만, 지금은 별로 개의치 않는다. 내 핏속에 할아버지가 살아 흐르는데,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만주에서 살고 있을때, 어느날 이웃 아주머니가 새댁이던 우리 할머니에게 마실을 왔다.

 

       이웃: 아이구 글쎄, 저 산위에 나물캐러 갔는데, 나무 밑에 계란이 소복히 쌓여서 산을 이루고 있지뭐야. 그래서 가봤더니, 다 먹고 난 빈 껍데기더라구. 누가 계란 껍질을 그런데다 쌓아 놨을까?

 

우리 할머니는 혼자서 픽 웃고 말았다.  아침마다 산에 올라가는 할아버지의 '소행'이 분명했다.  할머니는 새벽마다 운동 나가는 할아버지에게 날계란을 하나씩 드렸다. (당시에 날계란은 보약이나 마찬가지였다.) 할아버지는 그 날계란을 깨지지 않게 손에 쥐고 산에 오른후에, 산 꼭대기에서 맨손체조하기 전에 그것을 따서 먹은 모양이었다. (날계란 먹는 방법: 젓가락이나 가느다란 나뭇가지로 계란 위아래를 톡톡 두드려 구멍을 낸다. 한쪽 구멍으로 계란이 흘러나오면 그것을 빨아 먹는다. 나는 그렇게 못 먹는데, 집안 남자들이 날계란 먹는 것을 자주 보았다.) 

 

우리 할아버지는, 매일 새벽 한개씩, 날계란 껍데기로 산을 쌓은 사람이다.

 

할아버지가 매일 하는 운동만큼 빼놓지 않고 꾸준히 저지른 소행이 '음주'이다. (깔깔).

나는 술을 어떻게 배웠냐하면, 밥상머리에서 할아버지 약주 딸아 드리면서 배웠다.

할아버지에게 네명의 손주 (우리 아버지의 자식들)이 있었는데,

밥상머리에서 우리들의 기쁨이 뭔가하면

할아버지께 약주를 딸아드리는 '기회'를 얻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경쟁적으로 술병을 차지하여 할아버지의 술잔을 채웠다.

돌이켜보니 할아버지는 참 행복하셨을것 같다.

밥상머리에서 코흘리개 손주녀석들이 조롱조롱 쪼그려 앉아

할아버지한테 술 딸아 드리겠다고 서로 경쟁질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이쁠것인가.

 

내가 볼때, 할아버지는 평균 하루에 소주 한병 이상의 술을 끈질기고 줄기차게 드셨다.

셈을 해보자. 아침에 몇잔, 점심때 몇잔, 저녁에 몇잔 (주로 밥상에서)

그 외에도 들에서 일하다 말고 새참에도 몇잔

기분이 좋아서 몇잔

옆집에서 부침개를 가져왔다고 안주삼아 몇잔.

소주 한병을 훨씬 상회하는 양을 매일 드셨을것이다.

 

우리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음주를 탓하지 않으셨다.

시시철철이 온갖 과일에 소주를 부어 과일주 항아리 항아리 만드셨다

겨울에는 누룩을 사다가 전통 약주술도 직접 담그셨다.

우리들은 과일주에 담겨있던, 술에 쩔은 과일찌꺼기, 술찌게미 이런것을 '간식'으로 먹고 컸다. 하하.

 

그런데, 어느해부턴가,

우리 시골집 뒷마당에 초록색 소줏병이 쌓이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지극정성으로 할아버지의 술을 제공하다가, 어느날 문득,

"이노무 소줏병 지긋지긋하기도 하여라. 도대체 나 죽을때까지 몇병이나 비워댈지 내가 헤아려보겠노라!"

이렇게 작심을 하고는 소줏병들을 처분하지 않고 비워지는 족족 뒷마당 장독대 옆 공터에 쌓아놓기 시작한 것이라.

 

할머니가 돌아가시기까지 소줏병이 쌓여갔는데,

그 결과 우리 시골집 뒷마당에는 '초록색 피라미드'가 생겨나서

동네의 명물이 되었으며

이집트에서 외교사절이 왔을때, 대통령 부인께서 친히 우리집 뒷마당까지 손님들을 이끌고 와서

한국에도 피라미드가 있다는 것을 친히 설명하곤 하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가산을 정리할 무렵, 시골집도 건설업자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되었는데

(수지지구에 효자 초등학교가 있는데, 거기가 우리집에서 내려다보이던 우리집 큰 밭이었다...)

그때, 그 기념비적 초록색 피라미드가 해체되고 말았다.

그후로 이집트에서 외교사절이 와도 우리의 대통령께서는 딱히 보여줄 것이 없어서 한숨을 지으셨다고 '전설따라 삼천리'에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