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7일 수요일

창밖에 봄

 

눈이 내리면 폭설

비가 내리면 폭우

꽃이 피면 온세상이 꽃밭.

 

이곳, 날씨가, 지난 일년간 그러하였다.

비가 무섭게 내렸고

눈이 한없이 쌓이더니

그 겨울이 지나자 갑자기 온세상에 팝콘 터지듯 꽃이 만발했다.

(어리둥절할 정도로 삽시간에 온세상에 꽃.)

 

설레임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침.

 

내가 사시사철 내다보는, 연구실 창문 밖. 풍경.

봄은 또 오고, 꽃은 피고 또 지고 피고

아름다워서 너무나 슬픈 기억들~ 

...봄날은 가네 무심히도 꽃잎은 지네 바람에. (노래나...)

 

 

 

 

2010년 4월 6일 화요일

안녕~

ESL 클래스의 미국인 강사 '토드'가 수업 마치고 나가면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내게,

방긋 웃으며

"안녕~"

이런다.

 

나이는 이십대 후반쯤 되는 청년인데, 나보고 "안녕~"

 

그래서 내가 픽 웃고 말았다.  왜 웃냐고 묻길래 설명을 해줬다.

"너 나한테 bye bye 개념으로 안녕! 이라고 말한거지?"

"응"

"그런데 그 한국어 작별 인사 '안녕'은 애들 사이에서, 혹은 어른이 나이어린 사람한테 가볍게 날릴수는 있어도 너하고 나사이에 '안녕'하고 날리기에는 부적절한거다. 너하고 나하고는 격의없는 친구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고 애인도 아니고..."

"그러면 내가 뭐라고 해야 하는데?"

"너는 지금 일 마치고 나가는 길이고, 나는 아직 학교에 있으니까, 너는 가고 나는 남아있는거쟎아. 이 경우에 너는 -- 안녕히 계세요 라고 말하는거다.  영어로는 헤어질때 good bye 한가지면 되지만, 한국어에서는 가는 사람과 남아있는 사람의 표현이 다르다. 떠나는 사람은 '안녕히 계세요' 하는거고 남아있는 사람은 '안녕히 가세요' 하는거다."

 

토드는 '안녕'이라는 말을 자신의 절친한 한국인 친구에게서 배웠는데, '안녕'이라는 말의 이런 구체적인 맥락에 대한 설명을 들어본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 한국인 친구는 자신이 '안녕'이라고 말할때 '안녕'이라고 말하면서 킥킥 웃기만 했다고.  아주 오랫동안 아무도 이런 맥락을 설명해 주지 않았다고. (내가 언어 선생 아니냐..토드야...)

 

그래서 토드 녀석과 문을 가운데 놓고 들락거리며

안녕히 계세요

안녕히 가세요

연습을 반복했다.

 

이번엔 내가 떠나는거야, 넌 나한테 뭐라고 그러지?

"안녕히 가세요"

그렇지. 이번엔, 나는 남고 네가 떠나는거야. 넌 나한테 뭐라고 그러지?

"안녕히 계세요."

그렇지.

 

토드가 마지막으로 문을 밀어젖히며 말했다,

"안녕히 계세요."

그래서 내가 빙긋 웃고, 혀짧은 소리로 말해줬다,
"안뇽~"

 

 

 

 

학교 셔츠 맞춤

 

학교 셔츠를 맞췄는데, 오늘 도착했다고 조교가 갖다 줬다.  신청을 했던 학생들도 받아서 입고.

 

내 학교는 워싱턴 지역에 개교한지 2년도 안되는  분교이다. 본교는 다른 주에 있다. 나는 학위 받고 백수질 6개월만에 이 신생 분교의 신생 프로그램을 탄생시키는 일을 맡게 되었다. 이번 봄학기를 마치면 프로그램 탄생 2년이 되는 셈이다. 2년사이에 석사 한명이 배출되어 나갔고, 그리고 이제 대학원생들이 지역 학회에 슬슬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번 주말에 웨스트버지니아에서 열리는 컨벤션에서 일곱명의 내 제자들이 다른 이들과 동등하게 연구 발표를 진행한다. 대학원에 다니는 학생들, 혹은 현직 교사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발표이다.  그래서, 학교가  내 프로그램의 약진 덕분에, 분위기가 고무된 편이다. 신생프로그램이건 뭐건 학생은 공부로 승부 보는것이니까.

 

내 작은 또하나의 계획은, 이번에 발표한 학생들중에 몇놈을 가을의 국제학회에도 세우겠다는 것이다.  학교가 작아서 연구 환경이 썩 좋지 않고, 그렇다해도, 그래도 환경 탓만을 할수는 없고. 아무튼 공부만큼은 큰 학교 학생들 못지않게 해내야 하는 것이지. 내 학생들은 내 예상이나 기대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듯하다.

 

그래서 이번 주말에 학회에 발표를 하러 가는 학생 외에도, 컨퍼런스가 뭔지 구경삼아 가는 학생들도 있고, 내 프로그램에서 많은 대학원생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컨벤션에 가기로 했다. ... 그래서 나는 조교를 붙잡고 '셔츠 만들자 셔츠 만들어서 입자'고 노래를 불렀다.  일이 많은 조교가 군소리 않고 이리저리 연락을 하더니 단체셔츠를 맞추기로 하고 내게 디자인을 물었다.  대충 '뻔한' 디자인을 정하고, 가격도 정하고, 신청을 받고 해서 셔츠 한상자가 마침내 도착했다.

 

연회색 바탕의 면셔츠에 네이비색 (군청색)으로 학교 이름을 왼편 가슴에 새기고, 뒷판에는 크게 새기고.

 

아직 이름도 미미한 작은 학교이지만,

내 프로그램에서 배출되는 학생만큼은 어딜 가나 당당하게 서게 하고 싶다.

자신이 공부한 학교에 애정과 자부심을 가지고, 어딜 가나 당당할수 있게.

 

학생들이 학교에 자부심을 갖게 하기 위해서는,

가르치는 선생도 학교를 사랑해줘야 한다.

 

전에 내가 대학 다니던 시절 (나는 한국에서 칭하는 일류대를 나온 사람이 아니다) - 일류대 출신의 교수들중에 대놓고 수업시간에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을 '무시'하는 경우가 왕왕있었다.  말하자면,"내가 X대에 다닐땐 교수가 수업중에 이런 설명 할 필요도 없었다. 니네들은 도대체 문법부터 가르쳐야 하는거냐?" 뭐 이런 말을 대수롭지 않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지나치곤 했다.  그러면 나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그렇게 잘났으면 X대 가서 교수하지 왜 여기와서 잔치니? 너 X대 교수 못되어서 여기 온거쟎아. 나도 X대 교수 수업좀 받아보고 싶어... 너 말고..."

 

그때 내가 뼈저리게 겪었기때문에...

설령 지금 내가 소속한 학교가 학계에서 미미한 약체라고 해도, 나는 수업중에 내가 졸업한 학교의 수업 수준과 내가 일하는 학교의 수업수준을 대놓고 비교하는 식으로 죽을 쑤지는 않는다.  단, 학생들에게 가끔 말해준다. "나는 내가 배운것만큼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당신들중의 몇명은 지금 당장 유명대 대학원 수업에 가도 문제 없이 잘 해낼 수준이다...  몇사람은 ...  좀더 노력해야 한다. 실력 없으면 학위도 소용이 없다..."

 

셔츠가 값도 별로 안비싼데, 입어보니 모양이 단정하고 좋다.  학생들도 만족해하고.

뒤늦게 그것좀 사고싶다는 다른 프로그램 소속 학생들도 있고.

 

이 셔츠는 프로그램 시작한 이래로 최초의 단체 셔츠다.

우리는 이 셔츠를 입고 '떼거지'로 인근주 학회에 나타날것이다.   :)  (그들이 몰려온다~)

 

나는 학생들에게 자부심을 선사해주고 싶다.

(사실 나의 꿈은, 미국에서도 명문으로 알려진 번듯한 대학의 교수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꿈과는 별도로, 나는 내가 소속한 학교를 일류로 만들겠다는 꿈도 갖고 있다.  내가 소속한 곳을 번듯하게 키우는것도 사는 보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소속한 이학교를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껴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스스로 빛나줘야 한다. 나의 학생들이 작은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들이 몰려올것이다.)

 

 

 

 

2010년 4월 5일 월요일

쇼핑했다

 

 

퇴근길에 몰에 들러서 J Crew 매장에 가서 셔츠 한장과 카디건을 한장 사가지고 왔다.  지난주 우리학교 Spring Break 였지만, 나는 감기를 시름시름 앓거나 뭐 그러느라고 여행도 못갔고, 집에 처박혀서 일이나 했다. (내가 좀 딱하지 않은가...)   그래서 오늘 '오랫만에' 출근해서 연구실 청소도 싹하고, 물걸레질까지 열심히 해 대고, 그리고 일찌감치 퇴근하는 길에  아들 학교에 가서 픽업하고, 그냥 딱 J Crew 매장으로 향했다.  얌전한 정장스타일의 바지 한장과 역시 얌전한 드레스셔츠를 한장 사려고 했는데, 바지가 맘에 드는것이 안보여서 포기하고, 얌전한 (늘 그저 그모양인) 면셔츠 한장. 그리고 유독 이곳에서만 할인 판매를 하는 캐시미어 카디건을 '덥석' 물어줬다. (그저께 조지타운에서 봤을때도 정가를 받았단 말이지...)

 

 

 

 

옷을 왜 샀냐하면, 이번주 말에 학생들을 인솔하여 웨스트버지니아주에서 열리는 학회 행사에 가는데, 내가 너무 후줄근해보일까봐.  명색이 지도교수인데 영 '똘마니'처럼 행색이 남루해보일까봐 약간 걱정이 되어서.  그래서 뭐 번듯하게 뭘 입을까 생각해봤는데.  나의 문제는, 내가 '정장'을 아주 못견뎌 한다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내게는 변변한 정장이 없다.  그냥 간신히 생 날라리를 면 할 정도의 복장일 뿐이다. (그런데, 사실 학회 행사에 가봐도, 유명한 학자들도 구질구질하게 입고 나타나는 것이 이곳의 문화라서... 나도 뭐 눈치볼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학생들에게 어쩐지...대강 아무렇게나 입는 모습을 대외적으로 보여주면 안될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뭐 역시나 생날라리를 간신히 면하는 수준이 되고 만다.

 

연한 푸른색 전통적인 셔츠, 저거 입고, 얌전한 감색 바지 (학회나 파니에 갈때면 늘 입는것, 그게 한 오년 넘었지 아마...) 그거 입고, 아니면 회색 스커트 (역시 늘 교복처럼 입는것인데, 아 작년 봄에 학회 발표하러 갈때 입었는데, 조교녀석이 기억할거야 아마...). 에라 몰라~ ~  난 정장을 입으면 숨이 막히는것 같아서, 못입는다. (없다.)

 

오랫만에 학교에 나가서 'Spring Break는 잘 쥐었는가' 행정조교에게 물으니 - 학생들이 일주일 내내 학교에서 진을 치고 공부를 하는통에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고 알려준다.  학생들이 시험준비와 학회 발표 준비를 하느라 고생들을 했던 모양이다.  (진짜 공부에 미친 분들이시군...하하하.) 고맙다. 공부 열심히 해 줘서...  아, 뭐라도 사먹여주고 싶다.  나의 작은 별들. 

 

아들녀석이 내 옷 고를때 코치를 해주면, 의지가 된다.  녀석에게도 얌전한 면바지 한장을 사줬더니 입이 찢어진다. 그것 입고 아르바이트 한다고 급히 뛰쳐나갔다.  돈 벌면 버는대로 봉투째 갖다 던져주고는, 바지 한장 얻어 입으면 좋아 죽는다.

 

아 나도 저 퍼런 셔츠 입은 모델처럼 살을 쭉 빼고, 옷을 저렇게 근사하게 소화를 시켜보고 싶다.

 

 

 

 

어제 산 카디건 착샷.

중간고사 시험치는 날이라서, 미리 준비한 시험지 가지고 수업에 들어갔더니,

시험공부 때문에 날새고 후줄근한 몰골의 학생들이 야유를 보냈다.

자기네는 시험으로 고문을 당하고 있는데, 혼자서만 봄을 만난것 같다고.

그래서, '억울하면 공부해서 교수가 되시죠'라고 말해줬다. ㅎㅎㅎ

 

세시간짜리 수업인데, 학생들은 한시간 반만에 에세이 작성들을 완료하고 어울려서 나갔다. 인근 카페에 가서 일단 이 시험을 마친것을 축하하는 분위기. 이제부터 나는 에세이 읽으면서 채점하고, 답안 전체 평가하고 분석해서, 다음 수업에서 토론할 거리를 정리해야 한다.  학생들의 답안 에세이를 읽다보면

  1.  학생들이 착각하고 있는 사항들 (공통적인, 내가 예측하지 못했던)
  2.  기발한 아이디어
  3.  공통적으로 주의해야할 에세이 작성요령

등이 수면위로 올라오게 되는데, 이런 것은 수업중에 토론을 하고 지나가야 한다.

 

열 여섯명의 대학원생들중에서 마지막까지 남아서 끙끙거리며 답안 작성을 한 두사람은, 이분야 혹은 타분야의 박사학위 소지자들. 재미있는 현상이다.  이제 나는 채점이나 차근차근...

 

 

 

 

2010년 4월 4일 일요일

부활절에 일어난 일들: 새와 노인

작년: 나무에 매달린 새 한마리

 

작년 부활절날 아침의 일을 나는 선명히 기억한다. 쌀쌀한 4월 초의 날씨였다.  쌀쌀했다. 코끝이 시릴정도의 쌩한 초봄의 날씨. 맑은 하늘. 마치 시월의 가을날씨같은 그런 쾌청한 이른 봄날.  그날 조지타운을 향해 걷고 있었는데, 포토맥강변의 나무에 '새'한마리가 거꾸로 매달려 있는것이 보였다. 이상도 하지. 허공에 새가 거꾸로 매달려 있다니.

 

다가가서 보니 투명한 낚싯줄이 높다란 나뭇가지와 새의 발을 뒤 엉키게 하여 새가 거꾸로 매달려 퍼덕이고 있었다.  내 옛일기를 찾아보면, 거꾸로 매달린 새의 사진이 남아있겠지...   낚시꾼이 아무렇게나 방치한 낚싯줄에 발이 엉켜 허공에 디룽디룽 매달린 새 한마리.  그때 나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는 베드로를 떠올리고 있었다.  화창한 4월의 아침. 부활절날이라고 하는 그 일요일 아침에 멀쩡한 새가 거꾸로 매달려 헛된 날개짓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지나치며 근심하였고, 한숨을 쉬며 쳐다보다가 속수무책으로 가버리곤 했다.  내가 태어나서 911에 전화를 건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앞으로도 911을 부를일은 없을것이다...).  "포토맥 강변에...체인 브리지와 키 브리지 사이의 강변 나무에 새 한마리가 낚싯줄에 엉켜서 매달려 있다...구해달라..."  여러차례 시도끝에 마침내 연결된 포토맥강 야생동물 보호센터 직원에게 애매한 위치를 설명하고는 그 강변에서 꽤 한참 구조대가 오기를 기다렸었다. 

 

그러나, 기다려도, 기다려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나 역시 속으로 절망하고 있었다.  '이런 새 따위 강변에 널려있는 수백마리의 동종의 새무리중의 하나에 불과한데. 이따위 새 한마리를 구조하기 위해서 뭐가 와주겠어?  소용없는 일이지...'

 

결국 나도 한참을 어정거리며 그 새만 쳐다보고 있다가 자리를 떴었다.

 

그리고, 조지타운을 한바퀴 돌고 돌아오는길,

나는 보았다.  새가 매달려 있던 나무 아래에, 그 새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투명한 낚싯줄이 아직도 나뭇가지에서 풀어지지 않은채 바람이 이리저리 날리고 있었다.  새는 어떻게 된 것일까?

 

내 추측으로는, 야생동물 구조대가 나타나서 허공의 낚싯줄을 끊어내어 새를 구했을 것이다. 그리고 높다란 나뭇가지 위에 남아있는 낚싯줄 나머지는 어쩌지 못하고 그냥 가버렸을것이다. 새는 구제되었을것이다.  만약에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면, 새는 아직도 허공에 거꾸로 매달려 죽어가고 있었을테니까.

 

그때, 나는 어떤 생각을 했냐면,

내가, 나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후에는,

애면글면하지 말고, 지나친 책임감이나 죄책감을 갖을것 없이

그냥 내 길을 가는것이 타당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해결할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나를 너무 괴롭히지 말것.

결국, 누군가가 와서 새를 구해주지 않았는가?

책임회피를 해서도 안되지만, 억지스럽게 책임감에 눌려 살아서도 안되는 것이지.

 

올해: 어둠속의 노인

 

올해 부활절 일요일은 5월의 날씨처럼 따뜻하고 화창하였다. '천국'처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거리에 꽃들이 피어나고, 연두빛 물감을 풀은듯 나무에 물이 오르고, 온종일 태양이 빛나고. 아주 따뜻하고 좋았다.

 

저녁을 먹고나서 해거름에 우리개 왕눈이와 남편과 함께 포토맥 강변에 나갔다.  작년과 같은 산책 코스. 돌아오는 길은, 밤이라서 어두웠다. Fletcher's Cove 주차장에 세워놓은 차로 향하는데, 어둠속에 서성이던 사나이가 남편에게 뭐라고 말을 걸었다. 그는 70대 노인이었는데,  자동차 열쇠를 차에 두고 내려서, 뭔가 연장을 가지고 자동차 문을 열어야 한다며 연장을 빌려달라는 것이다. 그에게 필요한 연장은 버터나이프같은 작은 손칼 같은것이라고 했다.  열려진 창문을 통해서 문을 열려면 꼭 손칼같은 도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 차에는 아무런 연장이 없었다. (앞으로는 나도 연장 공구함 하나 정도는 갖고 다녀야겠다.)

 

날은 어둡고, 지나치는 사람도 없고,  손칼같은 연장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특히나 어두운 밤에 ... 지나치는 사람을 보기도 힘든데...

 

결국 그에게 도움을 주는 유일한 길은,  누군가가 손칼 같은것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노인에게 제안을 했다. "여기서 우리집이 가까운데, 내가 차로 가서 필요한 연장을 갖고 오겠다. 20분 안에 도구를 갖고 오겠다. 기다릴수 있겠는가?"  노인은 두시간이라도 기다려야 할 처지라며 웃었다.  그래서 20분안에 연장을 갖다 주기로 하고 자리를 떠나면서 전화번호를 메모해 주었다.  "만약에 20분 안에 누군가가 나타나서 문제 해결을 해주면, 내게 전화를 하시길. 그러면 나도 안심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면 되니까."

 

부랴부랴 집으로 와서 도움이 될만한 연장들을 챙겨서, 약속대로 20분 안에 도착하기 위해 운전을 하던중, 강변 못미쳐서 전화를 받았다.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안 와도 된다고.   그래서, 강변에서 차를 돌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작년에도, 나는 그 새에게 별 도움이 되어주지 못 한 것 같고

올해에도, 나는 문제에 빠진 그 노인께 실질적인 도움이 되어주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 새가 고통을 겪고 있을때, 나는 한참동안 거꾸로 매달린 새 곁에서 새에게 말을 걸어주며 서 있었고

한 노인이 문제에 빠졌을때, 어둠속에서 그의 문제를 함께 고민해주고, 그리고 도움이 되기위해 서둘렀었다.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리고 역시 생각한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안에서 노력을 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기는거다.

그냥, 그렇게 살면 되는것 같아...

 

 

내년 부활절에는 또 어떤 생명이 내게 도움을 청할지

나는 또 어떤 헛짓을 하게 될지, 문득 궁금해진다.  :)

 

 

 

 

 

인구 센서스 United States Census 2010

 

노트북 내장형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면 이렇게 '거울효과'가 난다. 미국에 처음 온 것이 2002년인데, 그 동안 센서스 라는 것을 해본적이 없다. 올해 처음이다. (10년만에 한번 하는건가봐요~)

 

요즘은 어떤 종류의 '설문'이건 '무조건' 싫고 귀챦은 입장이라, 차일피일 미루다가 오늘 마침내 개봉해서 답변을 했다. 열어놓고 보니 의외로 간단하다.  대략

 

1. 네가 사는 집이 렌트냐 아니냐 뭐 이런거 기입하게 하고

2. 식구 몇명이냐?

3. 식구중에 주거부정인 사람은 있는가?

뭐 이런거 질문한 후에

현재 집에 있는 식구들에 대한 기초조사 (생년월일, 나이, 인종배경)를 한다.

 

그것이 전부였다. 질문에 마킹하면서, '이제 이것을 누군가가 통계프로그램에 입력 작업을 할 것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통계를 돌리겠지...'  머릿속에 SPSS가 쌩쌩 돌아가는거다...  그, 그, 그러니까, 내가 연구 설문 양식을 특정 집단의 사람들에게 돌릴때도, 음, 머리를 잘 써서, 입력하기 편리하게 구조를. 

 

옛날에, 어느해던가,  한국집에 살때 인구센서스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질문이 꽤 많았던것으로 어렴풋이 기억하는데...  그당시에 내 고모들이 아직 젊었을때인데, 그러니까, 40대 아주머니들이었던 내 고모들께서, 용돈벌이를 하겠다고 그 인구센서스 조사원 아르바이트를 했을거다. 센서스 설문을 난해하게 생각하고 잘 못하는 분들 (문맹 어르신들이나 신체허약등으로 이런것을 혼자 처리하지 못하시는 분들)을 가가호호 방문하여 직접 여쭤가면서 답을 작성하는 일이었을것이다.  그렇게 한건을 할때마다 얼마씩의 사례금을 받았을것이다.  셋째 넷째 고모들이 그 일 한다는 얘기를 하면서 깔깔대고 즐거워했었는데... 그 용돈벌이 하러 바삐 다니던 내 고모들은 이제 '마님'수준으로 살림이 활짝 펴 가지고, 내가 어쩌다 한국에 가면 애들 용돈주듯 십만원짜리 수표를 꺼내서 주기도 하고 그런다. 타향살이에 고생이 많겠다고. ㅎㅎㅎ. 타향살이, 남의나라 인구조사 답안 작성하면서 머릿속으로는 센서스 알바하던 40대 억척 아주머니들, 내 고모들의 젊은날을 떠올리고 마는것이다.

 

 

2010년 4월 3일 토요일

택시 기사님

천안함 구조 작업을 하시다가 사고를 당하신 한주호 준위님. 

그 따님이 모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들려줬던 이야기. 

아버지 소식을 듣고 통곡을 하면서 친구의 도움으로 함께 택시를 탔는데,

대구에서 진해까지 통곡을 하면서 가는 그 따님을 태워다준 택시기사님이

택시비를 안 받으셨다고.

그 친구가 돌아오는길 역시 택시비를 안받고 가버리셨다고.

 

 

예전에, 우리 아버지가 '가노라' 인사 한마디 없이 서둘러 우리 곁을 떠났을때

그날, 그 조그만 산골짜기의 서민 연립 아래윗집 사람들이

내 통곡소리에 놀라 뛰어 들어와 쩔쩔매며 달래주던 것이 생각이 났다.

 

그러고보면, 돌아가신 한 준위님이나

벌이도 넉넉치 않으셨을텐데 하루 일당이나 마찬가지인 택시비를 거절한 택시기사님이나

혹은 내 통곡을 보듬어 안아주고 쩔쩔매며 근심하던 그 선량한 내 이웃들이나

참, 별같이 아름다운 사람들인것도 같고

그래서 그런 사람들의 빛으로, 세상은 여전히 굴러가는것도 같고...

 

물에 잠긴 별들이 지상에 올라 오는날, 우리 함께 울고,

또 우리가 마저 가야할 길을 가야 하리라.

아름다운 택시 기사님, 그날 일당 부조하신것, 그것도 나는 기억해야지.